46. 순수한 피 (3)
포르투갈 사람들, 특히 동방무역에 지대한 관심과 이해관계 지닌 이들은, 스스로 동방의 사정에 대해 가장 밝은 자들이라 여기곤 했다.
당장 주님의 해 1556년 내내 에우로파에 이야깃거리를 뿌리고 다닌 저 동방 사절단만 하더라도 그러했다. 포르투갈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그 우두머리 동 림과 그 일파인 ‘인민당’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그들의 동향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적어도, 포르투갈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주변의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조금 더 많이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였는데, 이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본성이었다.
“우리가 곤경에 처했다? 어째서 그렇다고 보시오?”
꺽정이는 자신이 빌린 가게로 돌아오자마자, 저를 찾아온 유대 상인 다 코스타, 아니, 이삭 하비비를 앉혀두고 대뜸 물었다.
동 림이 자신을 떠보고 있다 여긴 하비비는, 곧장 자신이 아는 (또는 안다고 여기는) 바를 털어놓았다.
“저는 일찍이 베네치아와 리스본을 오가며 장사의 실무를 맡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동 림께서 지금까지 어떤 행보를 걸어오셨는지, 동방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에 대해서도 잘 들을 기회를 여럿 얻었지요.”
머나먼 바다로 나아가 이 지구를 누비게 된 기독교인들은, 수많은 이교도 군주들을 만났다.
그런 군주들 중 기독교에 호의를 표하고, 선교를 허용하거나 아예 개종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군주가 아닌 이가 그 아버지나 형제의 자리를 노리고 에우로파의 우월한 무기와 병사를 들여오고자 하는 경우, 아니면 교역의 이익을 누리며 그 발달한 기술과 부를 얻어내려 하는 경우였다.
그리고 동방 사정에 해박한 포르투갈인들에 따르면, 동 림은 왕관만 쓰지 않았을 뿐 사실상 디오시온의 군주와 다름없었다. 당장 그의 신분을 증명하는 칙서에 적혀 있었다는 휘황찬란한 칭호도 이를 증명하지 않던가.
그런 강력한 군주가 이렇게 직접 에우로파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분명 그가 교역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뜻했다.
그런 이에게 예수회는, 인도양과 태평양 두 바다를 장악한 포르투갈과의 교역에 있어 극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껏 개종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표한 적 없는 동 림이 유독 예수회에 대해 호의적인 것을 넘어 숫제 나라 하나까지 세워주는 엄청난 투자를 한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가 얼마나 교회의 권위와 신앙을 존중하는지는, 어느새 예술 작품을 의뢰한 모든 이탈리아 연맹 권력자들의 두통거리가 된 ‘자유석공단’의 설립 내력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던가.
헌데 예수회에 그러한 가치가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포르투갈이 그들의 동방선교를 지원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 림이 이 땅의 어떤 군주와 어떤 교분을 쌓고, 또 어떠한 약조를 하든, 가운데에서 포르투갈이 길을 막는다면 이루어지기 어려울 터.
그 점을 잊었는지,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 무엇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그것을 과신한 것인지, 동 림은고아에 이어 이곳 리스본에서도 경솔한 언행을 함으로써 협력은커녕 견제를 받게 되었다. 그러니 동 림이 지금 절박한 심정이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당장 어제와 오늘, 동 림과 그 일행들이 국왕과의 접견을 시도하고, 리스본 내의 고관들을 설득하려 동분서주한 것만 보아도 이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에우로파 군주들이 우리 믿음의 백성들을 끝없이 탄압하면서도 종국에는 우리 손을 빌릴 수밖에 없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지요. 지금껏 황금의 유혹을 견뎌낸 기독교 군주는 많았지만, 황금의 부재를 이겨내는 군주는 없었으니까요.”
이만하면 슬슬 미끼를 물 법도 했다. 그 족보를, 아주 훌륭하게 꾸며서 넘겨 주겠다. 시나 황제의 으뜸가는 재상은 물론이요, 숫제 황제의 후손이라고까지 적어 줄 터이니, 부디 장삿길 끊어지지 않도록 도와달라.
그런 말이 나와야 했다.
예수회를 대신하여 동방인들이 넘어오면서 퍼뜨린 소위 ‘신앙의 자유’에 반대하는 다른 수도회가 주앙 3세의 허가를 받아 동방선교를 맡게 된다면, 그들은 분명 훨씬 적대적인 입장을 견지할 것이다.
개종하지 않은 그 어떤 동방 상인도 받지 않겠노라 선언한다면, 포르투갈에게도 물론 타격은 되겠지만 교역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틀림 없는 동 림에게는 더욱 크나큰 고통이 될 것이었다.
헌데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동 림을 바라본 이삭 하비비 눈에는, 하품으로 쩍 벌어진 동 림의 입천장만 보였다.
“아, 미안하오. 어제오늘 사이 저 궁궐 앞을 하도 오락가락하다 보니.”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마음 한편으로 느끼면서도, 하비비는 저의 고용주인 나시 가문을 대신하여 제안을 마저 꺼냈다.
“기껏 통한 교역로가 다시 막혀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저희에게 동 림의 권한으로, 몇몇 품목에 대해 교역을 독점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그 어떤 에우로파 사람들을 거치지 않고서도 에우로파에 시나의 귀중한 물건들을 팔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길까지 기껏 터 놨건만, 말라카 한 곳을 넘지 못하여 발만 동동 굴러야 하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두둑한 뇌물을 돌리면서 겉으로만 개종한 유대인 상인들이 슬쩍 나타난다면 어떻겠는가.
그런데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꾸는 영 이상했다.
“역시 그랬군.”
“예?”
“과연 훌륭한 상인의 자질이 있다 하겠소. 우리네가 인증하는 족보의 값이 헐해지다 못해, 숫제 값을 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낼 지경까지 떨어지는 것을 기다렸다니.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대가 잘못 알고 있는 점이 있다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역력히 드러나는 당황함을 가능한 한 속으로 갈무리하며 하비비가 물었다.
“예수회 종문(宗門)을 포르투갈 국왕이 어찌 다루든, 우리는 포르투갈을 장차 몰아낼 것이오. 향신료며 무엇이며, 그토록 이득 많이 남는 것을 가지고 포르투갈 하나만 재미 보는 게 어찌 온당한 일이겠소? 정 독점한다면 우리가 독점하는 게 맞지.”
“허, 허나 동방선교를 빌미로 포르투갈 정부가 동 림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을 텐데···”
“그럼 우린 더 좋소. 누가 내 발목을 잡으려 한다면, 그것을 핑계삼아 그놈 손목을 잘라내면 될 일이지. 어차피 한 대 때릴 심산이었다면, 저쪽에서 먼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더 명분이 살지 않겠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그들이 그저 동 림의 이름을 몇 년 일찍 들었다 하여, 그를 직접 겪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잘 안다고 과신하였던 것이 잘못일까.
아니면 저 프란치아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눈앞의 사람이 그저 걸어다니는 재앙의 뿌리일 뿐인 것일까.
독실한 기독교인 트리스탕 다 코스타로서 그 어떤 이단심문관 앞에 서 있을 때도 흘리지 않던 식은땀 한 방울이, 이삭 하비비의 이마에 맺혔다.
“그런데 듣고 보니, 예수회 그 종문이 아닌 게 아니라 우리네 사업에 제법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구려. 하비에르 어르신이 내게 도움 준 것이 많기도 했으니, 이렇게 된 김에 새로 그 종문에 보시해줄 뒷배를 찾아주는 것도 보은이라면 보은이겠지.”
“뒷배라 하시면···?”
“유대인들이 그리 돈이 많다고 들었소.”
불길한 예감은 꼭 들어맞았다.
“너무 억울하게 여기지만은 마시오. 만약 그대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무슨 흉노 사람이나 천주도 별종이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똑같이 그대들 벗겨먹을 궁리를 했을 테니.“
“제안은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부디 리스본에 머무시는 동안 편히 지내시기를···”
마침내 듣다 못한 하비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차.
“저 문을 나가는 것은 그대 마음대로요. 남의 등 뒤에서 그자 해칠 모략 세우는 것이 내 마음대로이듯.
나는 리스본을 떠나면, 카를로스 그 노인네 만나러 옆 나라 에스파냐로 갈 게요. 그 어르신이 요새 나 때문에, 나라의 빚을 어찌 갚을까 늘그막에 그리도 고심이 많으실 텐데, 그대들 유대인들이 그리 돈이 많다니 싹 쪼개서 반은 나 가지고 반은 어르신 가지시라 하면 되겠지.
바오로 큰스님이나 쉴레이만 어르신도, 그렇게 내가 나서서 노략질할 테니 뒤 좀 봐달라 하면 기꺼이 응하실 듯하오. 그렇지 않소?”
“대체 무슨··· 아니, 그것이 어찌 일국을 다스리는 이의 말이 될 수 있습니까?”
“나는 본디 도둑놈이라오. 그리고 소위 임금이라는 것도 대개는 명분이 많을 뿐 하는 짓은 도적과 별반 다를 것 없지 않소? 그대들 유대인들이 그리 박해를 당했다면 잘 알 이야기일 텐데.”
결국 하비비는 다시 자리에 앉고야 말았다.
“너무 걱정은 마시오. 그렇게 많이 뜯어먹지는 않을 테니. 스님, 밖에 계시오?”
‘스님이 아니라 신부님이라니까요.’ 소리와 함께, 이탁오와 카네이루 신부가 들어왔다.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한 협상과 타협, 그리고 타협을 빙자한 협박 끝에, 이 땅을 다스리는 주앙 3세는 알지도 못할 엄청난 합의가 이루어졌다.
“자, 정리하겠소. 예수회의 해외선교가 졸지에 끈 떨어진 뒤웅박이 되게 생겼는데, 겉으로 내세우기로는 훌륭한 천주도 도인인 우리 유대 상인들이 대신 이를 후원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껏 그래왔듯 예수회 어르신들이 우리 당 위세 뻗친 곳 어디든 갈 수 있도록 돕는다.
여기 탁오 선생은 유대인들에게 족보를 만들어준다. 원한다면 비조(鼻祖)에 중시조(中始祖)까지 하나 만들어주고, 공적 칭송하는 시도 지어준다. 그리고 나는 유대인들이 동쪽에서 우리 당 허락만 받으면 마음껏 장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단, 뭘 독점하거나 우리 몰래 수작 부렸다가 걸리면 죽도록 얻어맞아도 할 말은 없다.
그리고 예수회에서는 저의 믿는바 제멋대로 믿을 수 있도록, 또 믿는 것 가지고 트집잡아 누굴 불태우거나 하지 못하게끔 힘을 쓴다. 불만들 있소?”
그 엄청난 합의를 꺽정이 말투로 하니, 차라리 이곳 광장 앞 가게가 아니라 뒷골목에 더 어울릴 성싶은 것이 되긴 했지만.
“후··· 없습니다.”
정체 한 번 잘못 밝혔다가 호되게 당하기는 했지만, 본디 목적, 즉 동방무역에 한 발 걸치는 데는 성공하였으므로 그나마 다행이라 할 만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나마’요, 곤경에 처한 동방인들의 약점을 이용해먹는다는 당초 목표는 완전히 물 건너간 셈이었다.
“제게는 예수회를 대표할 권한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제안을 로마에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이대로라면 받아들여지지 않을 공산이 훨씬 크기는 하겠지만요.”
“로욜라 어르신께 글 부칠 때, 하비에르 어르신께서도 이런 인화(人和) 가득한 방책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임꺽정이가 한 마디 했노라 적어주시오.“
그러잖아도 로욜라 본인을 포함하여 예수회 사람들 대부분은, 개종한 유대인에 대한 박해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심지어 그들 중 몇몇은 진심으로 개종하고 유대인 친척들과 절연한 콘베르소 출신이었다.
하지만 로욜라와 예수회 사람들 대다수는, 모든 이교도와 이단이 종국에는 보편교회의 품으로 들어오거나 돌아와야 한다는 신념을 굽힌 적 없고 앞으로도 굽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개종한 유대인에 우호적이라는 것과, 개종 여부조차 의심스러운 유대 상인들의 후원을 받는다는 것 사이에는 에딘버러와 콘스탄티노플 사이만큼의 거리가 있는 셈이었다.
그나마 유대인들에게 다행인 점이라면, 예수회야 그렇게 독실하고 완고할지 몰라도, 교황청은 그들이 그토록 경멸하고 추운 겨울날에는 종종 장작과 혼동하곤 하는 유대인들에게 제법 자비를 베푼 전력이 있었다. 주로 그 자비는 유대인들이 자비(自費)로 마련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로욜라 어르신께서 그토록 따르는 교황청에서도 말라카에서 술탄이 도호부사 노릇하는 것에 반대하진 않았잖소. 유대인들이 좋은 일에 돈 좀 보태겠다는 것을 반대하진 않을 게요.
보내는 글에 내 이름 한 줄 적는다면, 교종 큰스님께서도 내 면상 한 번 더 보느니 그냥 해달라는 대로 해 주자 하실 것이외다.
자, 더 불만들 있소?”
이번에는 정말로 침묵만 남았는데, 불만 있느냐 물은 꺽정이가 그것을 깨뜨렸다.
“다행이오. 사실 나는 불만이 있거든.”
또 왜 트집을 잡느냐 따지기에는, 하비비와 카네이루 신부 모두 지쳐 있었다. 분명 해질녘에는 하품을 하던 꺽정이만, 밤이 깊어가는 지금 아주 말똥말똥하니 눈을 부리부리 뜨고 있었지만.
“다 좋은데, 우리가 받아가는 게 좀 적은 듯하오. 족보라는 것을 무슨 부적 나부랭이로 착각하면 아니 되는데.”
정확히 따진다면, 지금 이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소위 족보의 가치는 아직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았다. 피의 순수함을 검증하는 데 있어 이 기묘한 문서가 얼마나 효험을 지닐지도 확실치 않았다. 그러니 어찌 그 값을 높게 쳐줄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은 도저히 하비비 입에서 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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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줄 수 있는 건 무엇이오?”
이럴 때는 차라리 솔직하게 두 손 두 발 다 들고, 가져갈 수 있는 만큼 가져가라 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주로 대리석과 유리 제품, 그리고 신대륙으로부터 건너오는 약초 등을 취급하는 상인입니다. 에스파냐와 이탈리아에서 들어오는 그런 물건들은 이곳 리스본을 통해 포르투갈 전역에 유통되지요.”
“잘 되었네. 곳간 비울 준비 하시오. 대리석이야 언감생심이지만, 유리랑 약초 정도는 챙겨갈 수 있지 않겠소?”
눈 뜨고 강도질을 당하고 있건만, 같은 유대인은커녕 사마리아 사람조차 지나가지 않으니 어디 붙잡고 하소연도 못할 일이었다.
결국 일행은 밤을 뚫고 그 창고로 직행하게 되었다. 얼떨결에 덤으로 붙게 된 카네이루 신부까지 동행하였다.
등불이 환하게 밝혀지고, 꺽정이와 일행들은 오밤중에 급히 불려나온 점원들과 함께 챙길 만한 물건을 찾아 창고를 뒤졌다.
타바쿠(담배)며 바타타(감자)며, 몇 년 내로 그것이 유행할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이파리와 덩이줄기뿐 아니라 씨앗까지 챙겨왔건만, 야무지게 챙겨온 만큼 야무지게 뜯기게 되었다.
어디 쓰는 풀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다 가져가보고 나서 그 값어치를 판단하겠다는 도둑놈 심보에 마침내 하비비의 분통이 (뒤늦게) 터져나왔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순수한 피를 지키고자 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언약의 땅으로 돌아갈 날이 올 때까지요. 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 증오스러운 기독교인들에 이어 이제는 동 림 그대로부터도 이러한 핍박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동 림뿐 아니라, ‘증오스러운 기독교인’인 예수회 신부 카네이루도 옆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조금 늦어 있었다.
허나 의외로 덤덤한 대꾸가 돌아왔다.
“우리 동네 속담에,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소.”
“예?”
“천주도 도인들도, 청진도 믿는 셀림 그 친구도 그대들이 천벌을 받아 쫓겨났다고 하더군. 그런데 그대가 전전긍긍하는 것을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이다.
천벌을 받아서 고향에서 쫓겨난 뒤로 계속 고생길을 걷는 게 아니라, 반대로 고향에 진작 돌아갔어야 했는데 타지만 전전하고 있으니, 고집 작작 부리라고 그렇게 하늘이 고난을 내리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소?”
우악스러운 작자 입에서 나오는 말이니 더는 아니 들으려 했건만, 뚫린 귀로 소리가 들어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곁에서 듣던 핀투 선장은, 이 이교도 도적놈 겸 그의 상관이 그래도 모든 신앙을 동등하게 대하여 골고루 신성모독을 범한다는 것을 깨닫고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런데 듣고 보니 의외로 일리가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약의 땅에 그들이 돌아갈 수 없다면, 적어도 그 코앞에서라도 기다리는 것이 예의 아닐까? 이미 밤새 시달리며 피폐해진 마음이었기에 어째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이를 박박 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조금은 덜 가는 유대인 상인 몇몇, 그리고 이 일을 어떻게 전해야 로욜라와 교황청으로부터 ‘미쳤느냐’하는 소리를 최대한 완곡하게 들을 수 있을까 고민에 빠진 예수회 신부 몇몇을 남기고 동방인들은 리스본을 떠났다.
그 무렵, 에스파냐 국왕이 거하는 바야돌리드(Valladolid) 왕궁에는 환호하는 소리와 비명이 교차하여 울리고 있었다.
“하하하! 소리가 좋다! 더 때려라! 더 때려!”
“아악! 살려주세요! 저하! 저하!”
사람이 나무나 풀을 가격하는 것은, 보통 벤다고 하지 때린다고는 칭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 ‘때리라’ 하는 말의 대상은, 살아 숨쉬는 동물일 텐데, 안타깝게도 잔인한 어린아이의 호령 사이에 들리는 비명은 사람, 그것도 어린 여종의 비명이었다.
“당장 가서 말려라.”
그것을 접견실 안에서 듣던, 아버지의 주걱턱을 빼 닮은 에스파냐의 새로운 국왕 펠리페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움켜쥐었다.
“예, 폐하. 송구하옵나이다.”
펠리페의 하나뿐인 - 아니, 이제는 둘이었다 - 아들, 돈 카를로스의 보육을 맡고 있던 불우한 신하가 저의 면목 없음을 고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어찌 그대의 잘못일까. 얼른 나가서 저 불쌍한 아이를 구해주거라.”
‘불쌍한 아이’란 여종인가, 아니면 그저 자신에게 닥치는 고통을 몇 배로 부풀려 남에게 넘겨주는 것을 즐길 뿐인 모자란 아들 돈 카를로스인가. 신하는 차마 그것을 묻지 못하고 황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저께는 부지깽이를 들고 마구간에 있던 말의 눈을 모두 찔러버리고서 이를 마구간지기에게 덮어씌우려 하기도 했다. 직접 불러 아버지이자 국왕으로서 꾸중을 하였건만, 죄송하다는 말 한 마디만 하고 물러나자마자 다시 저런 짓을 벌인 것이다.
“분명 저 아이를 직접 꾸짖은 지 삼십 분이 채 되지 않았건만 이리 되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저 아이의 생명도, 저 아이의 성품도 모두 신께서 내려주신 것이다. 치유 역시 신께서 하실 일 아니겠느냐.“
이미 손주의 성정을 어떻게든 고치고, 그 부족한 지성을 채우기 위하여 아들 펠리페와 함께 백방으로 노력한 바 있던 카를로스가 함께 한탄하였다.
승리는커녕 명예로운 패배마저도 겪지 못하였던 이탈리아 원정을 마지막으로 제위를 내려놓은 카를로스는, 아들에게 물려준 이 궁에 종종 들리곤 했다. 본디 그가 은거하기로 하였던 수도원에는, 전직 황제 대신 언제고 때가 되면 들어가 여생을 신께 바치겠노라는 황제의 공언(空言)만 머물고 있었다.
대신 카를로스는 바야돌리드와 톨레도, 살라망카 등을 돌면서, 이름난 학자들을 초빙하여 그들과 대화 나누는 것으로 새로운 일을 삼고 있었다. 상왕이 이토록 나라 안을 순행하며, 정치와 철학, 시사에 대해 저명한 학자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은 펠리페의 왕권에는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카를로스가 자신은 은퇴한 몸이라며 어딜 가든 선을 긋곤 했고, 또 이렇게 종종 궁에 머물며 아들의 조언자를 자청하기도 했으므로, 펠리페는 아버지라는 거인을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이렇게 종종 의지하곤 했다.
하지만 손주 카를로스의 병든 마음에 대해서는, 그 어떤 현명한 조언도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치유가 우리 몫이 아니라 하여, 정말로 낙담하여 방치만 할 수도 없는 일이지. 우리의 힘으로 고칠 수 없다면, 장차 나라와 우리 집안에 미칠 해는 줄이고,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미리 얻어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순식간에 카를로스는, 자신의 무력함과 가문의 불행을 한탄하는 늙은이에서 한때 대명천자보다도 더 넓은 땅을 저의 이름으로 다스렸던 황제로 돌아왔다.
“우리의 부끄러움과 아픔은 우리의 것이지만, 압스부르고의 이름과 에스파냐의 국운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허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대로라면···”
그 뒤의 말을 내놓으려다 끝내 말문이 막힌 펠리페였다.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잉글라테라(잉글랜드)의 마리아(메리)가, 사실 지난해 겨울에 펠리페의 아이를 낳았으며, 그저 너무나 병약하여 언제 신께서 거두어 가실까 두려운 마음에 부군에게도, 또 백성들에게도 이를 알리지 못했노라는 해괴한 변명을 내세우며 자신의 아들 ‘카를로스’를 내세웠던 것이다.
자신의 결함 있는 아들, (메리와는 달리) 사랑하는 전처에게서 얻은 사랑하는 아들과 이름마저 같았다. 그것이 펠리페에게는 더욱 불쾌했고, 더 큰 배신으로 느껴졌다.
주제를 모르고 저를 사랑한다 감히 말하던 마리아였지만, 일가붙이에 대한 동정으로, 또 사내로서 왕관 쓴 자의 책무로 그와 몸을 섞었다.
그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얻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고, 사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비록 법적으로 에스파냐와 누에바에스파냐 식민지는 돈 카를로스의 것이요, 저지대 역시 법을 따진다면 저 ‘찰스’보다는 그의 아들 카를로스의 것에 가까울 테지만, 아들의 병증을 잘 아는 펠리페는 안심할 수 없었다.
어찌 보면, 혼사와 혼사로 가문과 영지를 엮고, 후계자가 없어질 때마다 그 남은 땅을 상속하여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낸 합스부르크에게 어울리는 결말이라고도 할 만했다. 그렇지 않은가. 그토록 욕심 내어 온 에우로파와 결혼했는데, 이제 그 혼인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잉글라테라에 넘어갈 수도 있게 되었으니.
물론 펠리페는 아직 젊었고, 언제든 더 후사를 볼 수도 있을 터였으나, 불쾌함과 불안은 무엇을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막막하다 하여 방관하는 것이 어찌 군주의 할 일이겠느냐? 설령 아주 사소하고 하찮으며, 심지어 비루한 짓이라 하더라도 나라와 가문을 위해서라면 감수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의 지혜를 구합니다.”
“먼저 네게 양해와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무슨 이야기가 나올 것인가. 짐짓 두려워하며 펠리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본에서는 그나마 조용히 머물던 코우지오니스와 그 벗들이, 사람이 더 늘어난 채로 곧 이곳 에스파냐에 닿을 것이다. 잉글라테라의 마리아가 분명 자신의 글에서 둘러대기를, 병약하여 일 년 가까지 죽은 것과 다름없던 아이를 코우지오니스의 벗 타고스 박사가 신묘한 의술로 살려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토록 뛰어난 동방의 의술이라면, 저 아이도 고쳐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마리아의 말도 거짓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겠지.”
실로 허가를 구해야 할 만한 이야기. 모자란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집는 말이었다. 카를로스 또한 눈시울 붉히는 것을 보지 못했더라면, 펠리페는 그러한 계책을 꺼낸 아버지를 원망하게 되었을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어떻게든 잉글라테라의 ‘그것’에게 흠잡을 곳을 만들어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대로였다. 일 년 동안 빈사에 놓여 있던 아이가 살아났다는 것은 고작해야 반신반의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으나, 다른 가능성에 비하면 그나마 현실성이 있었으므로 조심스럽게 정설로 굳어져가고 있었다.
여왕에게 정부(情夫)가 따로 있어, 그 사이에서 사생아를 얻었다는 것은 더욱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템즈 강가의 진흙만큼이나 뛰어난 매력을 자랑하는 아내에게 정부가 있기도 어려웠거니와, 어떤 놈팽이가 헛된 꿈에 취해 아내의 곁을 배회하고 있었다면 런던에 있는 에스파냐 외교관과 첩자들 중 누군가는 눈치를 챘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저 늙은이의 헛소리지만, 어쩌면 정말로 저 동방의 도적떼에게는 그런 비술(秘術)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부족한 손주를 둔 조부로서의 말이었다. 헛된 기대임을 알면서도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는 신세.
허나 그리 따지면, 십 년 전만 해도 에우로파라는 곳이 있는 줄 꿈에도 몰랐을 동방인이, 느닷없이 이곳에 들이닥쳐, 도저히 단합 못할 줄 알았던 이탈리아의 북쪽 절반을 하나로 묶고, 프랑스에서는 국왕을 죽인 뒤 무사히 배웅까지 받아가며 떠나지 않았던가.
카를로스는 조심스레 희망을 품었다. 그것이 때로는 더 큰 절망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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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에 언급된 멘데스 가문은, 당대의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유대인 가문으로서, 숱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영향력을 지녔습니다. 작중 시점에서 멘데스/나시 가문을 이끌고 있는 한나 나시의 경우, 이탈리아 안코나와 페라라 등에 새로 유대인 정착지를 세우면서 교황청과 직접 교섭하기도 했고, 그것이 끝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유대인들이 재산을 간직한 채 안전히 이탈리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상당한 힘을 쓴 바 있습니다.
작중에 언급된 것처럼, 예수회는 로욜라 본인을 비롯해 개종한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 조치에 반대했습니다. 당시 강제로 개종당하였던 유대인 상당수가 실제로는 유대교 신앙을 유지하였음을 고려했을 때 일견 이는 이상주의적인 주장이었으나, 실제로 개종한 유대인 출신 신부를 배출하기도 하는 등(루이스 지 아우메이다Luis de Almeida) 강제개종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유대인들이 유럽 주류 사회에 통합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17세기에 접어들어 종교적 자유 관념이 확실하게 자리잡게 되면서, 역설적으로 각종 탄압에도 굳건히 유지되던 유대인 사회는 조금씩 이완되고, 근대에 접어들게 되면 유대인 상당수가 기독교 사회에 동화되게 됩니다.
담배와 감자 등 신대륙 작물은 16세기 말엽 유럽에 퍼지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유럽에 그 존재가 알려져 있었습니다. 보통 이러한 작물의 전파는, 저명인사들이 군주들에게 이런 작물을 헌정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는데 - 예컨대 담배의 경우, 카트린 드 메디치에게 처음 진상되었다 하여 ‘왕비의 약초’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습니다 - 이는 이미 그 이전부터 제한적으로나마 작물 재배와 연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감자 역시 16세기 말~17세기 초 식용으로 조금씩 재배되기 전에도 약재로서의 재배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