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낙불사촉 (1)
리스본에 셰자데 셀림의 방문을 정중히 청하는 펠리페 2세의 서신이 닿은 이후, 포르투갈 국왕 주앙 3세의 궁정에서는 짧지만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
이대로라면 셀림과 함께 동방인들도 에스파냐로 넘어가게 될 터였다. 리스본에서 떡하니 수상한 짓을 하였다가, 예수회 신부와 콩베르수 상인들 사이에서 더욱 수상한 짓을 하고는 갑자기 조용해진 동방인들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그대로 놓아주자니, 아쉬운 것을 넘어 후환이 두려워질 판이었다.
그러나 결국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였다. 그 누가 오스만 왕자의 벗이자,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의 ‘상관’ - 여전히 많은 이들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의문을 제기하곤 했다 - 인 동 림을 붙잡을 것인가?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붙잡으려다 발생할 뒤탈은 누가 감당할 것인가?
이미 여실히 증명되었듯, 동방인 패거리가 부릴 수 있는 말썽은 수십 가지에 달했다. 그리고 앙리 2세의 불우한 운명이 보여주듯, 그 수십 가지 말썽에는 자비심이 없었으므로, 그 말썽 중 하나만 제대로 벌어져도 리스본은 멀쩡하지 못할 터였다.
결국 노쇠한 주앙 3세는 논의 와중에 두통을 호소하며 쓰러지고야 말았다.
“임 당수의 무공이 날로 심후해지는 듯합니다. 허공답보를 하시는 것이야 익히 알았지만, 이제는 능공섭물(凌空攝物)로 방구석에 누워 국왕의 머릿속을 헤집어놓기까지 하시니, 이대로라면 동쪽으로 돌아갈 때에는 호풍환우(呼風喚雨)도 하시겠습니다그려.”
“시끄럽고, 얼른 짐이나 싸시오들. 이대로라면 곧, 썩 꺼지라는 말을 갖은 문재(文才)로 가다듬어 돌려 말하는 자가 궁궐에서 나올 것이오.”
경험에서 우러나온 꺽정이 말에, 모두들 당수를 놀리면서도 순순히 따랐다.
에스파냐는 정해진 도읍이 없고, 다만 옛 카스티야의 수부(首府) 바야돌리드에 주로 국왕이 머물 뿐이라 하였다.
그리고 리스본에서 바야돌리드까지 가려면, 다시 바다로 나가는 것보다는 리스본 앞을 지나는 타구스(Tagus) 강을 따라 죽 거슬러 올라가다가 톨레도 인근에서 뭍에 내려 북상하는 쪽이 훨씬 빠르고 편할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타고 온 배는 미리 지브롤터 반대편, 발렌시아 쪽으로 보내놓고, 일행은 포르투갈 관헌들의 마지못해 하는 배웅을 받으며 타구스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카스티야 땅에 들어서자마자, 제법 마음에서 우러나온 듯한 환영을 받았다.
대저 강을 거슬러오르는 여정이란, 밤마다 닻을 내리고 강가의 마을에서 여독을 푼다는 명목으로 술판 벌이기 마련.
엘리자베스는 언니의 친정 나라에서 당연히 이런 환대를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떠벌리면서도 속으로 의심하고, 이는 이탁오도 마찬가지였다.
따지고 보면 이미 이탈리아와 잉글랜드, 그리고 프랑스에서 꺽정이 일행에게 대놓고든 돌려서든 여러 번 골탕을 먹은 에스파냐 쪽에서 그들을 환대할 이유가 전혀 없던 것이다.
톨레도 근방에서 슬슬 육로로 갈아타려던 무렵, 저 멀리 그들을 기다리는 상왕 카를로스의 깃발을 보게 되자, 그러한 의심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그런 의심을 꺽정이에게 고하니, 오히려 말하기를,
“잘 되었네. 어르신께 인사나 올릴 겸, 찾아뵙고 꿍꿍이 무엇이냐 여쭤보지 무어.”
하는 것이었다.
꺽정이 앞에서 얕은 꾀를 부리거나 어설프게 그 눈을 가리려 했다가는 좋은 꼴 못 본다는 것을, 그를 만나본 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사고뭉치에 화근덩어리라는 평판이 이런 좋은 점 있을 줄 뉘 알았으랴.
그리하여 괜한 걱정 하였음을 깨달아 머쓱해진 엘리자베스와 이탁오를 뒤에 거느린 채, 당당히 옛 황제 앞으로 꺽정이는 나아갔다.
“어르신, 그간 강녕하셨소? 어째 그사이 신수가 훤해지셨습니다그려.”
“세상의 무게를 어깨에서 내려놓으니 이 낡은 무릎도 한결 편해지는 듯하더군. 물론 여기 타고스 박사가 소개해준 동방의 지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그사이 몇 명 늘어난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는 카를로스였다. 자신의 말과 달리, 이제는 부축을 받아도 쉽사리 걷지 못하는 고로,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는 로마 근교에서 황제의 군영에 더부살이하던 시절, 이탁오가 제갈공명의 고안이라면서 대충 먹으로 슥슥 그려서 카를로스에게 진상한 것이었는데, 그사이 솜씨 좋은 공장(工匠)을 어디서 구했는지 제법 정교하게 만들어내었다. (다만 이탁오가 그려준 것과 달리, 부채와 양산은 따로 만들지 않아서 다소 아쉬웠다.)
“뭐, 그렇게 몸이 편해지셨다니, 굳이 듣는 이 안녕 생각하여 빙빙 돌릴 것도 없겠구려. 우리네 부른 속내가 무엇이오?”
“하하! 자네는 어찌 이리도 한결같은가!”
늙은 카를로스가 저도 모르게 박장대소를 했다가, 무릎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잠시 몸서리를 쳤다.
“좋네. 그러면 들려주겠네.”
잉글랜드 왕자 찰스의 목숨을 구한 이탁오의 ‘신묘한’ 의술로 자신의 못된 손주도 고쳐달라 하는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꺽정이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조선국 사람들의 성정을 평한다면, 사족은 고상하고 양민은 순량하며 천민은 비천하다는 것이 통념이었다. 그러나 꺽정이 보기에는, 오히려 천민들이야말로 조금 거칠고 못 배우긴 했어도 착한 사람들이 많았다.
상투 틀만큼 머리 굵을 때까지 멀쩡히 살아있는 천민을 마을 안에서 만난다면, 그자는 대개 선량하고 남을 줄곧 위해주는 자로, 저의 분수를 알고 언행을 스스로 삼가는 사람일 터였다. 그러지 못한 자는 대개 도망쳐 산야 어딘가에서 떳떳지 못한 짓을 하거나, 아니면 진작에 몰매 맞고 골병 들어 죽었을 테니까.
(말보다 주먹질 먼저 배웠다는 이야기 전하는 꺽정이는 당연히 전자였다.)
그런데 공맹의 가르침이나 예수의 가르침이나, 사람의 본성은 다 같다고 하니, 아마 양반도 태어날 때부터 갸냘픈 회초리 대신 주먹과 발차기로 가르치면 다들 천민처럼 싹싹하고 남 눈치 잘 보게 될 것이다. 꺽정이 생각은 그러하였다.
“안 되네.”
카를로스가 대뜸,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한 마디 꺼내어 꺽정이 생각을 끊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어찌 아시고 안 된다고부터 하시는 것이오?”
“자네 머릿속 들여다보는 데 무슨 비범한 지성이 필요한 것은 아니잖은가.“
그런 코우지오니스의 ‘심계’에 한 번 당한 이력 있던 늙은 카를로스가, 쓴웃음과 그냥 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이 저의 주먹에 와 닿는 것을 본 꺽정이도 멋쩍음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보나마나 타고스 박사의 ‘진료’를 대신하여 카를로스 그 아이에게 훈육을 가하려는 것이겠지.”
이 시기의 훈육이란 동서 막론하고 매질이 기본이었다. 그 땅의 식생에 따라 회초리의 재질이 달라질 뿐.
“이보게, 나와 내 아들은 손주를 고치기 위해 이미 모든 수를 다 써보았다네. 심지어 바다 건너 무어인들 사이에서까지 자식 훈육의 지혜를 구하였고, 여러 나라의 왕관을 쓰고 있는 내 아들이 손수 회초리를 들기까지 했지. 허나 아이의 행실은, 매질을 거듭할수록 더욱 나빠지더군.
더구나 자네는 프랑스에서의 그, 전력이 있지 않은가.“
카를로스가 꺽정이의 아픈 구석을 은근히 꼬집었다.
북이탈리아가 자신의 손을 벗어나게 된 이상, 프랑스가 그것을 차지하는 일만은 막아야 했다. 그리하여 조용히 물러나면서 코우지오니스를 슬쩍 부추겨 그 나라에도 가서 뭔가 혼란을 일으키라 하였건만, 그만한 큰일을 벌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적어도 자신은 몸은 멀쩡히 살아서 이탈리아를 벗어났으니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어찌하면 이 사태를 이용하여 부르봉과 기즈 가문 사이를 이간질할 수 있을까 아들 펠리페와 함께 고민하던 카를로스였다.
어린 국왕 뒤에서 실권을 장악한 그 메디치 여인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두 가문 모두 에스파냐 쪽의 접촉에 꿈쩍도 하지 않아 끝내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아니, 그 일은 불운한 실수였소! 내가 아무리 임금들을 쉽게 여긴다고 하지만, 그렇게 막 마구잡이로 사람 죽이고 하진 않는단 말이오!”
제 발 저린 꺽정이가 (딴에는 진심어린) 항변을 하였다.
“그리고 이번 일에는 자네의 그 삼손과 같은 완력은 필요하지 않을 것일세. 오직 타고스 박사의 의술만 있으면 될 일이니.”
통역에만 힘쓰던 이탁오는, 갑자기 저를 향한 화살촉에 일순 놀랐다.
“병약하여 언제 숨 거둘지 모르는 어린아이를 며칠만에 소생시킨 자네의 의술이라면, 우리도 배울 바가 많을 것이라 믿네. 당장 자네의 이 신묘한 ‘중국 의자’도 내 몸과 마음에 크나큰 즐거움을 주었으니, 또 어떤 가르침을 우리에게 베풀어줄지 어찌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제야 이탁오는, 카를로스가 이 자리에 자신이 제안한 바퀴 달린 의자를 타고 나타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깨달았다.
“국왕의 주치의 산탄데르 박사는 이미 이곳에 나와 함께 머물고 있으니, 바야돌리드로 향하는 길에 함께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네. 그리고 바야돌리드에는 탁월한 솜씨를 지닌 외과의 토레스와 포르투게스 두 사람도 곁에 함께 대기하고 있으니, 자네가 어떤 시술을 행하려 하든 도움은 될지언정 걸림돌은 아니 될 것이야.”
이 자리에서 자신이 아는 것을 모조리 털어놓으라면 사흘 밤낮은 족히 떠들 수 있는 사람이 이탁오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의술은 그 안에 들지 않았다. 만약 의술에 밝았더라면, 카를로스의 통풍을 치료해줄 비방을 지니고 있다면서 진작에 재물을 더 뜯어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못 하겠다거나, 의술과는 별 연이 없다고 이실직고할 수도 없는 노릇.
더구나 지금까지 열심히 통변 노릇하고 다녔으니, 의원들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 둘러댈 수도 없었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면, 지난 로마에서의 대화 이후로 내 나름대로 고심하고 탐구한 바를 꺼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군. 하지만 어찌 기회가 없겠는가? 우선은 치료책을 마련하는 데 힘쓰게나.”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옛 황제는 빙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 웃음 이면에, 어쩌면 이번에는 정말로 기연을 얻어 손주의 병질이 고쳐질 지도 모른다는 사람다운 기대가 깃들어 있음을 보았기에, 이탁오는 끝내 카를로스를 원망할 수 없었다.
결국 카를로스와 함께 바야돌리드로 향하면서 이탁오는 계속 왕궁 주치의와 그의 조수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치료’의 조건은 이러하였다.
첫째, 왕자 돈 카를로스에게 절대 폭력을 행사하지 말 것.
(돌이켜보면, 에우로파 어디에도 왕족을 두들겨 팰 의원이 있지는 않았으므로, 이러한 조건이 ‘치료’ 앞에 굳이 붙을 필요가 있다는 것부터가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둘째, 부득이하게 통례에서 벗어난 치료나 시술을 해야 할 경우, 사전에 이를 보고하고 모든 절차를 기록에 남길 것.
셋째, 돈 카를로스가 ‘그의 자리에 맞는’ 인성을 갖추게 될 때까지 치료를 멈추지 말 것.
카를로스는 주치의 산탄데르를 통해 전하기를,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만족하지 못할 것 같다면 언제든 편하게 알려달라 하였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니, 이탁오도 결국 오기가 생기기도 하고, 또 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이런 말까지 나오는가 궁금하기도 하여, 바야돌리드에 닿아 펠리페 2세를 알현하자마자 곧장 그 아들 만나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한 각이 채 지나지 않아, 혀를 내두르며 나왔다.
“어떻던가요?”
언니 메리가, 카를로스 이야기만 나오면 마치 자신의 치부가 들춰진 양 황급히 화제를 돌리던 것을 기억하던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남편에 대한 사랑에 얽매여, 어지간하면 세간의 소문은 그저 음해성 짙은 것이라며 그 부족한 입담으로 둘러댈 메리가 항변조차 포기하고 아예 함구하기를 택할 정도였으니, 엘리자베스로서도 은근히 궁금하였던 것이었다.
“주왕(紂王)이 산 채로 불타 죽는 사람을 보며 즐거워했다는 것이 허무맹랑한 거짓인 줄만 알았는데 아닌 모양입디다. 오면서 산탄데르 선생에게 들었던 것이 결코 허언이 아닌 듯합니다.”
마음 같아서야 죽은 맹자 앞으로 데려가서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세상은 넓고, 개중에는 남의 집 아기가 우물가로 기어가는 것을 보면 비명 지르며 구해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아기를 발로 차 우물에 빠뜨리려 할 놈도 있다고.
그간 주치의 산탄데르와 이야기 나누면서, 지금까지 왕자가 하였던 일들과 그에게 행한 치료에 대해 들었던 이탁오였다. 왕실의 일이므로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산탄데르였으나, 카를로스의 당부가 있었기에 가감없이, 심지어 펠리페가 직접 회초리를 든 일이나, 금식을 비롯해 아들에게 직접 벌줄 것을 명한 일까지 밝혔다.
그러나 그 모든 처벌에도 어린 카를로스의 행실은 고쳐지지 않고, 오히려 패악질의 강도만 높아졌다. 그저 궁궐 무수리들 사이의 헛소문이 아니라, 내의원정(주치의)쯤 되는 사람까지 그리 말했다 하니, 그 꺽정이조차 ‘아, 그건 좀···’ 할 만하였다.
“그 정도요?”
“한 각을 참지 못하고 패악질을 합디다. 내가 왜 네놈 말을 들어야 하느냐며, 이 부질없는 모임을 당장 끝내지 않으면 오늘 밤에 숙소에 불을 지르겠다고 같잖은 겁박을 하지를 않나, 얘기하는 사람 앞에 두고 풀벌레 한 마리를 잡더니, 눈앞에서 다리를 하나씩 떼면서 재밌다고 저도보고 해보라 권하지를 않나.”
“내가 힘껏 험상궂은 표정을 지은 채 선생 옆을 지키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은데.”
꺽정이가 별 생각 없이 말했다.
“손찌검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이야, 카를로스 어르신 당부한 것이고, 그 어린놈은 모르지 않겠소?”
결국 믿을 것은 힘 뿐이라는 꺽정이 말에 일리가 있어, 이탁오도 정신 차리고 꺽정이와 함께 돈 카를로스와의 두 번째 (기)싸움에 나섰다.
그리고 결과는 완패였다.
“대체 언놈이 누설을 한 건지, 빌어먹을.”
분명 영 모자라고 그 나이 먹도록 저의 에스파냐 말만 겨우 할 뿐 라틴어조차 제대로 못 배웠다 하였건만, 제게 쓸모 있다 싶은 것은 기똥차게 알아먹고 그대로 외우고 있던 것이다.
그리하여 꺽정이가 나타나자마자, 자신의 ‘치료’에 대해 세 가지 조건이 걸려있지 않으냐며, 어디 한 번 프란치아의 엔리케(앙리)에게 한 것처럼 제게도 해 보라며 꺽정이를 놀려대었다.
아직도 카를로스 그놈이 어눌한 목소리로,
‘답답하지? 때리고 싶지? 그런데 못 때리지? 에베벱.’
하고 놀리던 것이 귓가에 선하던 꺽정이가 애먼 탁자를 뻥 걷어찼다.
“이대로라면 허송세월만 하고 건지는 것은 하나도 없게 되겠소. 뭐 뾰족한 수 없겠소?”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패라면 결국 꺽정이와 그 패거리의 완력인데, 그것을 쓰려 해도 도저히 쓸 수 없으니, 두 팔이 묶인 것과 다름없었다.
허나 문제의 세 가지 조건 모두, 병약하고 심약한 데다가 가뜩이나 약한 마음이 악하기까지 한 왕자를 두고 골머리 썩이는 펠리페가 내걸 만한, 또 내걸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었다.
그러니 화려한 왕궁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그저 복도 앞에서 꺽정이와 패거리끼리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다.
개중에는 엘리자베스도 어느새부턴가 껴 있었다. 이미 명희의 예가 있다 보니, 흑의군 중 그 누구도 여인이 사내들 가운데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오밤중에 우연히 만나게 되면 동방의 맹수 호랑이라도 만난 것처럼, 흑의군 쪽에서 화들짝 놀랄 뿐.
그런 엘리자베스도 이 한숨에 동참하고 있다가, 조건 하니 떠오르는 것이 있어 문득 입을 열었다.
“대개 규칙이라는 것이 마음 맞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면, 그 규칙을 비틀어버리면 될 일이더군요.”
아버지가 그렇게 규칙을 비튼 덕분에 이 세상 빛을 볼 수 있었던 엘리자베스였다.
“세 가지 조건 중에 그나마 우리가 파고들 만한 건 마지막 조건 아니겠어요?”
이탁오도 그 말 들으니 떠오르는 것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에서 열심히 새들을 괴롭히고 있는 돈 카를로스가 모르는 사이, 그가 알량한 두 손으로 행하는 것보다 훨씬 고약한 흉계가 어느새 꾸며지고 있었다.
“돈 카를로스의 병은 고칠 수 없습니다.”
타고스 박사가 모자란 아들을 대면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았다. 응접실의 의자에 온기가 가시기도 전 돌아와 이렇게 단언하니, 아버지와 함께 타고스를 맞이한 펠리페의 심경은 답답하기에 앞서 당황스러웠다.
“허어··· 정녕 그렇다는 말인가. 그대가 그렇게 판단한 까닭을 들을 수 있겠는가?”
“카를로스 공자의 소위 병이라는 것은, 첫째로 허리가 굽고 몸의 좌우의 크기가 서로 다른 것입니다. 허나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그러했던 것인데, 대저 기골이 비범한 것은 어리석은 범부들의 비웃음을 살지언정 결코 천하를 다스리는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요임금은 눈 안에 눈동자가 두 개였고, 제나라 안평중(安平仲)은 난쟁이였으나 각각 천하와 나라를 다스려 번성케 하였습니다.
둘째로 병증이라 하는 것은, 몸이 약하고 잔병치레가 잦은 것입니다. 이는 몸이 불편하여 어려서부터 몸을 자주 놀리지 못하고 스스로 기력을 보하지 못한 탓이니, 보약을 자주 지어 먹고 또 종종 몸을 움직여 기혈이 스스로 돌게 하면 될 일입니다.
셋째 병증은 곧 가장 중하다 여겨지는 것으로, 간악한 언행을 하고 남을 괴롭게 하는 것을 즐기는 일입니다. 허나 이것은 병증이 아닙니다. 병증이 아닌 것을 병으로 대하여, 올바른 스승을 구해야 할 것을 의원만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니 어찌 차도가 있겠습니까?”
“병증이 아니라면 무엇이라는 말인가?”
“말씀드린 것처럼, 오로지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생긴 병통입니다. 스스로 깨우쳐 배운다면 능히 봄날의 눈처럼 해소할 수 있겠지요.
제나라 환공은 관중을 등용하여 패자(覇者)가 되었으나, 관중이 죽자 간신배를 가까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그 누구도 곁을 지키지 않아 병든 채 굶어 죽었고, 구더기가 가득 슨 뒤에야 시신을 수습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됨이 비루한 자도 스스로 깨달아 인재를 가까이할 때에는 훌륭한 군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소싯적 작위를 두고 형 규(糾)와 다툴 때, 배에 화살을 맞기까지 하였던 것이 큰 배움의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이로부터, 사람이 왕재(王才)를 지니려면 우선 명재경각(命在頃刻)의 위기에 처해보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서방에도 다모클레스(Damokles)의 검에 대한 일화가 있지 않습니까? 다만 칼을 머리 위에 달아놓는 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것이지요.”
그동안, 셀림에게 청하여 입 무거운 통역관 하나- 동방인들의 대화를 듣고 해석할 수 있을 만큼 조선어를 숙달하라는 쉴레이만의 밀명을 받들었으나, 술자리에서 조선말 어렵다고 투덜대다가 발각되고야 말았다- 를 대동한 꺽정이는 돈 카를로스와의 삼차전에 들어갔다.
“야, 꼬맹이. 이리 와 봐라.”
“무어라? 지금 나를 무어라 부른 것이냐?”
어디서 들고 온 채찍을 내보이며, 어디에 때릴까 고민하던 카를로스가 고개를 돌렸다.
“꼬맹이라고 했다. 퍼뜩 안 올 것이냐?”
질 수 없다는 듯, 정원의 석물 하나를 발로 뻥 걷어차는 꺽정이였다.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모습에 경악하는 카를로스였으나, 아직 그 기가 다 죽지는 않았다.
“이게 지금···”
물론, 한 번 위협으로 기가 죽지 않는다면 한 번 더 하면 될 일이었다.
“잘 들어라. 나는 사실 네가 어찌 되든 하등 관심이 없다. 그리고 네가 죽으면 오히려 내게는 이득 되는 면도 있고. 너만 죽으면 이 나라가 잉글랜드 임금님 아들 것이 된다지?”
“이··· 못하는 말이 없구나! 바로 부왕께 말씀드릴 것이다!”
“네놈이 고변하면 퍽이나 믿어 주겠다. 시끄럽게 하지 말고 가만 들어보아라.
너는 무식해서 모르겠지만,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이 있다. 그것을 길러야 사람이 아주 군자답게 허리 펴고 사는 것인데, 네놈은 그게 없으니 허리가 굽어 있는 게다. 그 호연지기를 어찌 기르는지, 너는 아느냐?”
“내가 그딴 걸 어떻게 알겠어? 그리고 지금 날 뭐라고 불렀어?”
슬슬 얼굴이 붉어지는 카를로스였다. 그러나 암만 고함을 질러도 눈앞의 거한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호연지기를 어찌 기르는가 하면, 산천을 유람하며 그 웅대한 기상을 마음에 담으면 된다.”
“대답 안 해? 정말 부왕께 이를 거야! 내가 가만 있을 줄 알고?”
그러나 가만 있지 않는 것은 꺽정이였다. 카를로스 눈앞에서 뭣이 번쩍 하더니, 또 대리석 파편이 흥건하니 사방으로 튀었다. 잔뜩 붉어져 있던 얼굴이 금방 하얗게 질렸다.
“네놈의 뜻이 무에 중하냐? 네놈 아버지 말만 들으면 되는 것이지. 잘 들어라. 네가 차도를 보이지 않느다면, 나는 네 아버지께 청하여 너를 데리고 저 바닷가로 유람을 갈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네놈을 바닷속에 쳐넣고, 그 자리에서 배를 타고 도망칠 것이다. 내가 바로 투르크 쪽으로 도망친다면, 네 아비가 암만 잘났다 한들 뭘 어쩌겠느냐?
자, 그러니까 네가 임금의 재목이라는 것을 내게 보여라. 그러지 않으면 죽는다. 쉽지 않으냐? 기한은··· 어디 보자. 한 달. 그래, 한 달이 좋겠다.”
그러고서는, ‘옛다, 기분이다’ 하면서, 또 발길질 한 번으로 정원을 더 박살냈다.
이제는 질려서 고함도 못 지르는 카를로스에게, 임꺽정은 씩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정원에 아주 못된 짓을 해놓으셨군그래. 네 아버지께서 아시면 참 임금의 재목이 있다고 여기시겠구나, 하하.”
난생 처음으로 저보다 더한 놈을 만난 카를로스는, 동양의 거인이 사라질 때까지 한 마디도 더 꺼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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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옛 성세를 다소 잃은 바야돌리드는, 카스티야 왕국의 사실상 수도로서 에스파냐가 사실상 통일된 이후에도 비슷한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상술한 것처럼, 바야돌리드는 에스파냐 전체가 아닌 카스티야의 수도였고, 그마저도 국왕이 주로 거하는 곳이기 때문에 관료들이 상주하고 의회가 자주 열릴 뿐 어떤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수도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요. 일생의 4분의 1을 자신이 통치하는 수많은 영지를 오가면서 보낸 카를 5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겨를도 없었고, 그 후계자 펠리페 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수도를 톨레도 인근의 소도시였던 마드리드에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7세기까지도 바야돌리드가 지녔던 사실상 수도로서의 기능은 유지되었지요.
휠체어의 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제갈공명의 이미지, 즉 부채를 든 채 휠체어에 앉은 모습이 명대 목판본 삼국지 삽화에서부터 기원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중국에서는 그 전통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반면 유럽에서는 이것이 단절되었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말년에 극심한 통풍으로 고통받은 펠리페 2세의 지시로 1595년에 이르러서야 기록에 남은 첫 근대적 휠체어가 제작되게 됩니다. 작중에서는 한 세대 일찍 그런 아이디어가 등장하여 카를 5세가 말년에 덕을 보게 되었습니다.
돈 카를로스는 카를 5세의 손자이자 펠리페 2세의 아들로 태어난 순간부터 순탄치 못한 삶이 예정되어 있었고, 그의 짧지만 비극적인 인생은 카를로스 본인의 실제 모습과 무관하게 제멋대로 부풀려지고 왜곡되었습니다.
그의 상대적 저지능과 어눌함, 그리고 그 외의 각종 신체적•정신적 장애가 과연 완전히 유전적인 것이었는지는 이미 19세기부터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장애와 갖은 병치레로 인한 고통, 그리고 카를로스를 아꼈지만 그를 어떻게든 통치자의 재목으로 길러내고자 엄격한 교육을 지시하였던 아버지 펠리페로 인한 스트레스가 극도의 가학증으로 표출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당시 에스파냐에 머물던 각국 대사들의 기록을 통해서도 검증되는 사실이지요.
특히 1562년 계단에서 미끄러져 머리를 크게 다친 사건은, 가뜩이나 뒤틀려 있던 카를로스의 성격을 완전히 파탄 상태로 몰고 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고작해야(?) 토끼를 산 채로 태워 죽이거나 마구간의 말을 모조리 실명시키는 정도로 그쳤던 그의 광증이, 저지대의 국왕이 되려고 모의하거나 공공연히 아버지 펠리페를 살해할 것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등 보다 심각한 쪽으로 발현된 것이 이때부터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정작 기록을 검토해 보면, 그의 머리 부상은 성격을 바꿀 만큼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외과의였던 베살리우스(원 역사에서는 마상창시합으로 부상당한 앙리 2세의 수술을 집도하기도 했습니다)의 철두철미한 기록을 검토해 보면, 카를로스의 머리 부상 자체는 경미한 뇌진탕 정도로 끝났고, 정작 문제가 된 것은 두피 및 안면부 열상을 통한 감염이었지요 (Villalon, 1995. “Putting Don Carlos TogetherAgain: Treatment of a Head Injury in Sixteenth Century Spain.” The Sixteenth Century Journal 26(3)).
그렇다면 돈 카를로스의 광증을 도지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한 가지 가능한 추측은, 이 사고를 계기로 아버지 펠리페가 카를로스 대신 다른 후계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던 것이, 어떤 식으로든 카를로스의 뒤틀린 심리를 자극했으리라는 것입니다. 감염으로 인하여 카를로스가 고열에 시달리던 5월 9일 저녁, 주치의들마저 카를로스가 곧 사망할 것이라 조심스러운 예측을 내놓을 무렵, 펠리페는 아들의 병석을 지키는 대신, 자신의 가장 가까운 벗들과 함께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깥에서 질주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미 십여 년 넘게 아들을 올바른 통치자로 교육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던 펠리페의 피로와 절망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모든 에스파냐 도시에서 성직자들이 성당의 성유물을 들고 쾌유를 기원하는 가두행진을 벌이고, 수많은 국민들이 왕자의 고통을 대신 받겠다며 흑사병 시절의 채찍질 고행을 자청하던 때 정작 아버지는 자기 곁에 없었다는 것이 카를로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을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아들의 행각이 저지대 제후들에게 언제든 이용되어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올지 모른다는 판단을 내린 펠리페 2세는, 1568년 카를로스를 마드리드의 궁궐에 유폐시킵니다. 카를로스는 몇 번이나 단식을 시도한 끝에,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되었지요. 침묵공 빌럼을 비롯한 저지대 제후들은, 이것을 부풀려 신교에 호의를 보이던 아들 카를로스를 펠리페가 독살했다는 흑색선전을 퍼뜨렸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에스파냐에 감정이 좋지 않던 신교 세계 전체로 퍼졌습니다. 이후 19세기를 거치며 이러한 이미지는 질풍노도의 자유주의자 청년 카를로스와 이를 억압하려는 구시대의 화신 펠리페라는 구도
로 재생산되어, 실러의 희곡과 베르디의 오페라로 이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