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57화 (157/259)

47. 낙불사촉 (2)

기독교 군주의 모범으로 추앙받던 그의 조부, 붉은 수염(Barbarossa)의 프리드리히와는 여러모로 반대되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이러한 실험을 해보았다고 전해진다.

옹알이조차 시작하지 못한 갓난아기들을 그 어미로부터 떼어내어 한곳에 모은다. 아기들을 성심껏 보살피되, 모든 유모로 하여금 침묵을 지키도록 한다.

그렇게 타락한 속세의 말을 일언반구도 접하지 못한 채 자라난 아이들의 입에서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만물의 이름을 지을 때 사용하였던 가장 순수한 태초의 언어가 나올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카를로스가 만난 살라망카 대학의 학자들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주인공만 파라오 프사메티쿠스(Psammetichus, 프삼티크 1세)로 바뀐 채 그대로 이 일화가 등장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프리드리히 2세의 이 비정한 실험 이야기는 당시 황제와 대립하던 구엘프(Guelph) 파가 퍼트린 악의적인 소문일 것이라 추정하였다.

허나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수많은 언어를 구사하는 카를로스의 흥미를 끌 수밖에 없는 일화였다.

“··· 자네의 그··· ‘훈육 계획’을 듣자마자 내게 떠오른 이야기이기도 하다네. 그것이 어째서인지 짐작할 수 있겠는가?”

급조한 계책이 그럭저럭 잘 들어맞아, 이제 어떻게든 성과를 내거나 성과 내었노라 속이는 일만 남았다 여기며 임 당수에게 돌아가려던 이탁오 발길을 카를로스가 붙잡았다.

그러고서 대뜸 그런 고랫적 이야기를 늘어놓으니, 꺽정이라면 역정 내며 노망 시늉은 환갑이나 지내고서 내라 하겠지만 이탁오는 금방 그 속뜻을 파악했다.

“사실상 백지라고 할 수 있을 카를로스 공자가, 스스로 분발하여 군왕의 재목 되기를 구한다면 어떠한 면모를 보일 것인가.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시겠지요.”

“로마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인재는 인재로군. 물론 그 어떤 군주도 자네를 신하로 부리기를 원치 않겠지만.”

“그리 말씀하신 것은, 저희에게 기대를 품으면서도 동시에 뜻을 못 이루리라 짐작하시기 때문일 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네. 카를로스 그 아이의 병증은 쉽게 해결될 것도 아니라네. 고통과 격정이 덮칠 때면 너무나 쉽게 그 빈약한 이성의 목줄을 놓아버리곤 하지. 마치 뜻도 모르면서 어른의 말을 따라하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이 느끼는 고통을 남에게 전해주면서 원초적인 쾌감을 느낄 뿐.

남에게 공포를 줌으로써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은 군주가 지녀야 할 덕목 중 하나라 할 수 있지. 그러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광증일 뿐일세.“

로마 앞에서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달라진 카를로스였다. 그것을 짐작은 하면서도 무엇이 바뀌었는가 콕 짚어내진 못하던 이탁오는, 그제야 무언가 눈치챌 수 있었다.

이전에 만난 늙고 지친 황제와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열정에 불타는 초로의 학자는 분명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이전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말을 꺼내니 놀랐나 보군. 그때의 만남 이후로 나도 나름대로 학문에 힘썼다네. 우리 에스파냐의 가장 훌륭한 학자들부터, 그런 학자들이 경멸해 마지않으면서도 열심히 탐구하는 플로렌티아(피렌체) 사람 마키아벨리의 저작까지.

그리고 비록 어떤 경지에 올랐노라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는 말할 수 있게 되었네.

이 세상에는 군주가 필요하고, 그 군주는 오로지 가장 현명하고 도덕적인 철인(哲人)이어야 한다네. 그런 사람이 있어, 모든 것을 국민을 위해 베풀고, 그러면서도 그 무엇도 백성의 자의에 맡기지 않을 때, 비로소 올바른 신앙이 바로 서고 번영과 평화가 확립되겠지.

그러나 불행히도 내 손주는 그러한 덕목에 반대되는 기질만을 가지고 있지. 그러니 타고스 박사 그대가 의술을 모른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내세운 이 ‘계책’은 처음부터 그 귀결이 정해진 것과 다름 없었다는 말일세.”

그저 지나가듯, 그가 이탁오의 심계를 꿰뚫고 있노라 언급하는 카를로스의 말에, 천하의 ‘타고스 박사’조차 일시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실패하더라도 나와 내 아들은 상심할 뿐,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얻는 바가 제법 있다네. 더구나 내 불우한 손자에게도 제법 흥미로운 경험이 될 테지.”

프리드리히 2세의 일화에 따르면, 그의 실험은 이렇게 끝났다.

황제는 아기들의 입에서 가장 순수한 언어가 나올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태어난 이후 사람의 말을 한 마디도 듣지 못한 아기들의 입에서는 옹알이는커녕 울음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했고, 결국 하나도 남김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두고야 말았다.

마찬가지로, 군주의 덕목 중 그 무엇도 갖추지 못한 어린 카를로스 역시, 설령 죽음의 공포가 닥친다 하더라도 그러한 덕목을 배울 수는 없을 것이다. 군주의 덕목이란 오로지 군주만이 가르칠 수 있으며, 또 그것을 지닌 이가 밖에서 배우고 안에서 수양한 뒤에야 비로소 완벽에 닿을 수 있을 것이므로.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제왕의 재목이라는 것이 기실 숲 속의 아무 나무나 베어와도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군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는 천형(天刑)을 받은 카를로스는 제대로 된 임금의 시늉조차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카를로스는 타고스가 언제고 실패를 자인하며 고개 숙이게 되리라 믿으며, 서글픈 흥미를 품은 채 지켜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굽은 허리와 짝짝이 팔다리. 그리고 대대로 내려오는 툭 튀어나온 턱.

그러나 장차 왕, 그것도 에우로파 최강인 에스파냐의 왕이 될 카를로스의 몸이므로, 그 누구도 흉물스럽다 여길지언정 겉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매일같이 찾아오고, 사라지기보다는 조용히 머리 한쪽에 쌓이는 두통. 매주 한두 번씩 그간 쌓인 두통이 함께 터질 때면 카를로스는 눈앞이 벌게져, 저와 함께, 아니, 저보다 더 많이 고통받을 자를 찾아 궁을 헤매고 다녔다.

그것이 안 될 때면, 가시 돋힌 말로도 충분하였다. 자신이 무어라 한 마디 할 때마다 누구든 함께 아파해 준다면, 그것이 아버지든, 할아버지든, 시종이든, 귀족이든 상관 없었다.

누군가는 비참한 삶이라 일컫고, 누군가는 흉측한 삶이라 하겠지만, 돈 카를로스라 불리는 아이가 알고 있는 삶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어린 카를로스는 일생 최대의 난적과 그 난적이 낸 난제로 인해 평소보다도 더욱 고통을 받고 있었다.

“거기 너! 그래, 너 말이다!”

지나가는 시종 하나를 불러세웠다. 외국인 사절들의 ‘치료’ 또는 ‘훈육’ 때문에 카를로스의 동선이 평소와 달라졌다는 것을 미리 알지 못한 시종은, 그 실수의 대가를 곧 치르게 될 터였다.

“당장 아버지께 가서, 그 동양 거인이 나를 죽이려 한다고 고해라! 그 괘씸한 놈을 당장 투옥하고, 이왕이면 고문도 하고, 그렇게 해서 죗값 치르게 해야겠다고. 그놈이 힘 좀 쓰게 생겼으니 병사도 한 백 명쯤 내어달라 해라.”

정원에서 그 거인에게 받았던 모욕과 두려움, 그것을 어떻게든 풀어내어야 했다. 그 어떤 생각도 거치지 않고, 가슴속 심화가 그대로 가시가 되어 튀어나온다.

정 군사를 원한다면 자신이 직접 아버지를 찾아가도 부족할 테니, 결코 지나가던 시종 하나로는 무엇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남을 괴롭히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가능한지의 여부는 그리 중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아버지가 나타났다. 할아버지와 함께 동방 사절단의 무슨 박사와 만나고 있었다 들었는데, 어느새 그 모임이 파한 모양이었다.

“언제까지 허황된 말로써 이 아비를 괴롭게 할 것이냐.”

“아, 아버지! 하지만···”

“이미 사절단의 사람으로부터 모두 들은 이야기고, 나 역시 너의 아버지이자 주군으로서 동의한 계획이다. 내가 어찌 네게 일어날 일을 모를 것 같으냐?”

‘정말로 모르고 계십니다, 아버지! 그놈은 저를 죽일 심산이라고요!’라는 말이 머릿속 한쪽에서 나왔다가, 끓어오르는 격정 속으로 가라앉았다.

대신 애꿎은 포석만 쿵쿵대는 발에 짓밟힐 뿐. 그러나 앞서 본 거한은 제멋대로 정원의 대리석 기물들을 때려부수었건만, 자신의 힘없는 육신으로는 포석에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더구나 내 정원도 또 한 번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았다고 들었다. 너 스스로 병폐를 고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니 어찌 신께서 네게 은총을 내려주시겠느냐?”

“으으... 아악!”

말이 나오기에 앞서 비명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저를 쳐다보던 아버지는 그대로 등 돌려 사라지고, 아버지 뒤를 따르던 시종들이 ‘괜찮으십니까’ 하는 겉치레 말만 던지며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채찍! 채찍을 가져와! 이게 다 네놈들 때문이야!”

그래도 이만하면 마구간의 말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눈이 멀어 도축만 기다리게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던가. 결국 시종 중 하나가 채찍을 가지러 가게 되었다. 시종이라지만 모두 귀족의 자제인 고로, 채찍을 가지러 가는 길에 자신 대신 매 맞을 운수 없는 하인도 하나 붙잡아 올 터였다.

그런데 그때, 주변에 영 이상한 놈들이 나타났다.

“네, 네놈들은 무어냐? 못생긴 걸 보니 그 거인 놈의 수하들인가 보구나!”

누가 누굴 보고 못생겼다 하는가, 하는 대꾸는 다행히도 흑의군 중 그 누구도 에스파냐 말은 몰랐으므로 나오지 않았다.

“아이고, 우리 왕자 나리를 여기서 또 뵙는군그래. 하하!”

그사이 시종 하나가 비장한 표정 지으며 채찍과 더불어 울먹이는 하인 두엇을 대령했건만, 이미 카를로스의 눈길은 온통 곁의 거한에게 쏠려 있었다.

“화풀이 위해 하인을 매타작한다 듣고 이리 왔다. 네놈을 가르쳐주기로 했으니, 사람 때리는 방법도 빠뜨릴 수는 없지 않겠느냐? 자, 숙달된 이 몸을 보고 배우거라. 위치로!”

“위치로···”

흑의군들이 맥아리 없이 말하면서도, 제법 단단하게 자세를 잡았다. 지구 반대편에서 청석골의 옛 ‘추억’을 또 한 번 강제로 떠올리게 되었으니 기분이야 좋을 리 없지만, 꺽정이 상대할 때 진심으로 아니 대했다가는 큰일난다는 것을 모두가 몸과 마음으로 배워 익혔으니 다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곧, 카를로스와 시종들 모두 넋이 나간 채 곡예에 가까운 폭력의 현장을 목도하게 되었다.

“임자들 집에서는 따라하지 마시오들.”

시종들 향해 (못 알아들을 조선말로) 친절하게 한 마디 덧붙인 꺽정이가 주먹을 휘릭 내지르고 몸을 펄럭 내던지니, 곧 불쌍한 흑의군들은 이리 날아가고 저리 튀어나갔다.

“이 정도로 그쳐서야 되겠느냐. 똑바로 서라, 이놈들.”

다년간 수련으로 그 기법이 실로 조선국 제일에 달한 낙법으로, 도키치로와 밤이 이하 흑의군 전원 모두 나가떨어질지언정 뼈와 힘줄을 다치진 않았다. 허나 보는 사람 눈에는, 옷이 찢어지고 흙먼지 일어나는 것만 들어왔다.

“자, 이렇게 하는 것이오. 그 같잖은 채찍으로 때려본들 어디 사람 하나 제대로 상하게 할 수나 있겠소?”

그리고 손짓을 하니, 역시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셀림의 ‘조선어 역관’이 그제야 통역을 해주었다.

저의 손에 건네져 있던 채찍과 눈앞의 거한 및 그 일당을 몇 번이고 돌아가며 고쳐보던 카를로스는, 끝내 분을 못 이기고 애먼 채찍만 땅에 던졌다.

그러자 그의 머리에 뒤늦게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까지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제게 잔소리를 하거나, 스승을 억지로 붙이려 하거나 - 지금도 공식적으로 그는 에우로파 최고의 가정교사들에게 학문을 배우고 있었다 - 할 때마다, 카를로스는 더욱 큰 패악질로 보답하곤 했다.

그것이 그에게 기쁘고, 또 그의 답답함을 해소해주기도 했건만, 무엇보다도 그들이 저를 버리지 못하게끔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카를로스가 아무리 우둔하다지만, 어찌 주변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모두 놓치겠는가.

간혹 그의 스승 중 조금 끈기 있는 자는, 그것이 두렵다면 오히려 더욱 열심히 학문에 임하여 스스로 가치를 증명하면 된다고 간곡히 카를로스의 발목을 붙잡곤 했다.

허나 카를로스의 귀에는 그런 청원이 들리지 않았다. 학문은 무슨 학문이란 말인가. 아무리 책을 들여다 본들 글자 하나 머릿속에 남지 않고, 절망과 짜증, 그리고 두통만 심해지는데.

그런데 이제 그런 방법이 먹히지 않게 되었다.

카를로스는 자신의 깨달은 바는 금방 머릿속 어딘가로 가라앉히고는, 밤이 되자마자 시종들을 거느리고 사절단의 숙소 곁 조그만 마당으로 향했다.

“너희는 이 장작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라. 너는 저기 가서 ‘불이야!’ 외치고.”

“돈 카를로스, 지금은 날씨가 제법 건조하고 바람이 셉니다. 이러다가 잘못하면···”

“시끄러워! 너희는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

완력이야 결코 그 거한을 따를 수 없지만, 이 도시 바야돌리드는 그의 아버지 펠리페의 - 그러므로, 그 아들인 자신의 - 도시였다. 그러니 모두의 귀에 들어갈 만한 거한 말썽을 부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아버지도 저 무도한 거한과 그의 음험한 계획을 꿰뚫어 보고 그를 쫓아낼 것이다.

적어도, 카를로스는 그렇게 믿었다. 지금까지 그가 처해 왔던 모든 곤경에서 ‘해결책’은 이렇게 한바탕 난장판을 만들어놓는 것뿐이었으므로.

그런데 이게 웬걸.

“아이고, 이 야심한 때까지 무얼 하고 계시오? 내가 이래 봬도 여러 집에 불도 지르고 그사이 도둑질도 제법 쏠쏠하게 해본 사람인데, 그렇게 해서는 죽도 밥도 안 되오. 마침 여기 화약을 모아두고 있었으니 잘 보시오. 전각을 날려먹을 때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오.”

기다렸다는 듯, 마당 한쪽에서 거한과 그 패거리가 걸어나왔다. 그리고 장작을 놓고 불 지르려 마음 먹었던 건물 옆에는, 영 수상한 나무통 여럿이 놓여 있었다.

“돈 코우지오니스! 그게 정말로 화약입니까?”

카를로스를 모시는 시종 하나가 저의 본분도 잊고, 주군 옆을 벗어나 거한을 향해 뛰어가 물었다.

“아무래도 나는 본디 도적이라, 이렇게 웅장한 건물을 보면 첫째로 안에 얼마나 귀중한 것이 있는지를 헤아리게 되고, 둘째로 어찌하면 저 건물을 무너뜨리고 안의 재보를 훔쳐갈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된다오. 헌데 격물치지의 이치를 따르자면, 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지 않겠소? 그러니 화약으로 궁전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 확인해보아야지.”

장난감처럼 횃불을 휘휘 놀리며 꺽정이가 태연히 말을 이어가니, 결국 나머지 시종들과 그들의 하인들까지 모두 카를로스는 버려두고 화약 통(추정) 놓인 곳으로 달려갔다.

“아, 안 됩니다!”

“여봐라! 얼른 저 통 치워라!”

“안에 사람 있는가 확인해! 너는 당장 시종장님께 보고하고!”

그 소란 속에서, 머리 지끈거리는 카를로스가 악쓰며 비명지르는 것은 그대로 묻혀버렸다.

결국 카를로스는 제 풀에 지쳐 주저앉았다.

“나리, 통 안에 있는 건 화약이 아닌 듯합니다요!”

“일단 다 치우고 나서 확인해보거라!”

“확인할 것도 없소. 그냥 흙이라오. 아무렴 그렇지, 내가 고작 왕자님 한 사람에게 교훈 주려고 궁궐 전각을 부수겠소? 보통 그런 일은 뭔가 더 큰 이익이 있을 때나 하는 일이라오. 예컨대 궁궐의 보물을 털어간다든가 할 때 말이오.”

시덥잖은 말이 오가고, 뒤늦게 허겁지겁 달려온 시종장이 무어라 꾸짖으려다 대신 저의 머리만 쥐어짜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보통 그것은 카를로스 본인이 하곤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 앞서 정원에서 깨달았다가 금방 잊었던 것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지금껏 카를로스는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있을 때마다 난동을 부려왔다.

그런데 그가 난동을 암만 부린들, 그때마다 더 큰 난장판을 누군가 곁에서 함께 부린다면 어찌 될 것인가?

그 누구도 그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을 것이요, 그렇게 한 달이 다 지나가게 되면···

저도 모르게 카를로스는 제 목을 움켜쥐었다. 그곳을 자르면 죽는다는 것을, 수많은 짐승들을 해코지하며 깨달았던 것이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이러다가 정말로···?’

아버지께 달려가 읍소한들 (그럴 말주변도 없었거니와) 믿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 또한 마찬가지.

‘그놈이 무어라 했더라? 군주의 제목? 아, 재목이었지. 그걸 보여 달라 했던가? 그게 그런데 뭐지? 어떻게 보여줘야 하지?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그냥 모른 체 하고 날 죽여버린다면?’

공황. 무엇을 붙잡고, 때려부수고 불태운다 한들 사라지지 않을 공황이 카를로스의 병든 머릿속을 채웠다.

“돈 카를로스. 밤이 깊었습니다. 우선은 처소로 돌아가시고 후일을 기약하시지요.”

문득 옆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얏!”

더 생각하기도 전에 눈앞이 벌게지더니, 어느새 오른손이 목소리 난 쪽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곱사등이에 한참 어린 카를로스의 손은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턱 붙잡히고야 말았다.

“이, 이것 못 놔! 너 누구야?”

이제 보니, 손의 주인은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모 후아나나 궁정의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기품이 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카를로스 본인보다도 어째 힘이 더 센 것 같았다.)

“저도 한 나라의 왕위 계승권이 있는 사람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공자보다도 더 왕위에 가깝지요. 공자께서 쉽게 대할 만한 신분은 아니에요. 그러니 물어보시려면 말부터 똑바로 하세요. 그러면 알려드리지요.”

“그, 누구냐, 아니, 누구신가요?”

“잉글라테라(잉글랜드)의 이사벨(엘리자베스)이라고 합니다. 동인도 회사 사장이고, 제 언니인 마리아는 공자의 아버지이신 펠리페 폐하의 아내이니, 따지고 보면 공자는 제 조카가 되겠네요.

잘 들으세요. 피 안 섞인 사이지만,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워 도움을 드리고 싶으니까요. 물론 싫다면야, 알아서 자신의 운명을 잘 피해가야 하겠지요.“

그러면서 은근슬쩍, 새벽에 저를 만나러 나오라며 귀띔을 해주고는 사라졌다. 카를로스는 그사이 이사벨이 어딘가를 향해 슬쩍 손 흔드는 것은 보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카를로스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시늉을 했다. 두통과 불안이 엄습할 때면 종종 잠을 설치곤 하였으므로, 지금의 피곤함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시종을 불러, 그의 교육을 맡고 있던 모든 이들을 당장 불러모으라 명을 내렸다.

‘과연 이게 될까?’

희미한 이성의 목소리는, 이사벨이 알려준 대로 하는 것 외에 다른 뾰족한 수가 없지 않느냐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 이왕 이리 되었으니 해보는 수밖에 없지.’

카를로스는 어리고 또 어리석었으며, 그만큼 견문도 좁았다.

하지만 견문이 좁기에 그만큼 쉽게 멋모르는 용기를 낼 수도 있는 법.

그의 난데없는 부름을 받고, 의아해 하면서도 하나씩 모습 드러내는 그의 가정교사들을 바라보며 카를로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카를로스를 불안하게 바라보던 교사들은, 그들 모두의 상관이자 이 병약하고 심약하면서도 난폭한 후계자의 교육 총책을 맡고 있던 호세 산체스-몰레로의 옆구리를 넌지시 찔렀다.

“흠흠, 돈 카를로스. 부름에 응하여 이렇게 저희 모두 모였습니다. 공자의 의중을 여쭈어도 될지요.”

주변에 흉기나 둔기로 활용될 만한 것이 없음을 곁눈질로 확인하며, 산체스-몰레로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그것이···”

카를로스가 대뜸 화를 내거나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는 대신 우물쭈물하는 것을 본 교사들이 모두 조심스레 그의 안면을 살폈다.

“너희 모두는 구제불능의 쓰레기다. 나 한 사람 제대로 못 가르쳐서 내가 욕을 보게 만들지 않았느냐? 하지만··· 하지만 내가 간밤에 깊게 생각을 해보니, 어쩌면, 그러니까 아주 약간쯤은 내 잘못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늘상 나오는 욕지거리 뒤에, 그들의 귀를 의심케 만드는 문장이 붙어 있었다.

“내가 만약 한 달 내로 군주로서의 자세를 보이지 못한다면 나는 어떤 벌을 받을지 모른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싫다.”

돈 카를로스를 고치겠다며 찾아온 타고스 박사와 그의 야심만만한 선언에 대해서는 교사들도 모두 들어 알고 있었다. 그들 모두, 남들 듣지 않는 곳에서는 저들끼리 모여 저 동방인들이 과연 언제쯤 포기하고 실패를 받아들일지를 두고 즐거운 뒷담화를 나누지 않았던가.

그런데 카를로스가 이런 모습을 보일 줄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뒤이어 나오는 말은, 그들 모두 그날 아침 먹은 빵에 혹시 맥각(麥角)이 들어 있던 것은 아닌가 의심케 만들었다.

“그, 그러니 도와다오. 내가 만약 죽게 되면 너희도 멀쩡하진 못할 것 아니냐?”

“돈 카를로스, 송구한 질문이지만··· 그렇다면 저희의 수업에 진지하게 임하겠다는 말씀이신지요? 공자의 훈육은 저 동방인들이 대신 맡기로 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카를로스의 변심. 그러나 그의 행패만큼이나 변덕도 심함을 알기에, 산체스-몰레로와 교사들 모두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는 않았다.

이쯤이면 슬슬 역정을 내며 다시 험한 말이나 몸짓이 나올 줄 알았는데, 얼굴이 벌게지면서도 끝내 그것을 삼킨 돈 카를로스 입에서 더욱 놀라운 말이 나왔다.

“솔직히 동방인들보다는 너희들이 더 나은 것 같다. 수업에 정말 진지하게 임한다는 약속은 도저히 못 하겠지만··· 적어도 갑자기 너희의 뺨을 때리고 뛰쳐나가거나 하지는 않겠다. 아니, 때린 다음에는 꼭 사과를 하겠다. 아니, 사과까진 안 하더라도 뛰쳐나가진 않으려고 노력은 해보겠다.”

이것만 하더라도, 옛 신화에 나오는 시시포(Sisifo, 시시포스)보다도 더욱 험난한 고행을 하고 있던 교사들에게는 족히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의심 사이에서, 어쩌면 이번에는 뭔가 해볼 만하지 않겠느냐는 조심스러운 희망이 손을 들었다.

“흠흠, 좋습니다, 공자. 그렇다면··· ”

“한 달 사이에 뭔가 보여주어야 한다. 그냥 수업만으론 안 될 것이고, 뭔가 거창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가 도와다오.”

대뜸 제안이 나갔다. 이것 역시 예상치 못한, 하지만 분명 예전의 그 카를로스보다는 나은 모습. 어떻게 하면 이 기회를 살려, 카를로스에게 아예 없는 줄 알았던 학문에 대한 열정을 길러낼 수 있을지, 교사들은 저들끼리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울상을 지으며, 그에게 가장 호되게 당한 이들조차 일말의 동정심을 허할 수밖에 없는 처량한 모습을 하고 있던 돈 카를로스는, 남몰래 못된 미소를 지었다.

“하하! 이사벨 누님 말대로 되었어! 맞아, 맞아. 저렇게 머리 쓰는 것은 하찮은 놈들이 해야지, 히히.”

사람을 대놓고 괴롭히는 것보다, 교묘하게 골탕먹여 자신이 당하는 줄도 모른 채 당하게끔 하는 것이 훨씬 즐겁다고 하였던가. 과연 그 말이 맞았다.

어제 새벽, 약속한 대로 사람 없는 복도에 하인 두엇만 거느린 채 나타난 카를로스를 이사벨은 (비교적) 곰살궂게 맞이했다. 일순 그 모습이 재수 없게 느껴졌지만, 이미 종일토록 그 코지인가 코조네인가 하는 사람에게 시달린 터라 딱히 주먹도, 손바닥도 나가지 않았다.

이사벨은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를로스 자신이 처한 곤경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돈 카를로스 그대에게 제법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도 하나 알고 있지요. 시나라고 흔히 알려진 중국의 어느 용렬한 군주 이야기랍니다.’

먼 옛날, 그러니까 한창 로마 제국이 군인 황제들로 인해 흔들리던 무렵. 중국은 셋으로 쪼개져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시오크(Siok, 촉蜀)였는데, 그 나라의 황제는 아주 어리석은 인물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갓난아기였을 때 아버지가 말 위에서 그를 집어던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쳤다고도 하더군요.’

그 대목에서는 어째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아 카를로스도 귀를 기울였다.

시오크의 황제 아우추(Auchu, 후주後主 유선)는 아버지와 달리 그 어떤 재능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흔 두 해 동안이나 나라를 다스렸다. 반란은 드물었고, 전쟁은 일어날지언정 그의 나라가 전장이 되지는 않았다. 나라는 작았으나 중국의 다른 어떤 곳보다 풍요로웠다. (여기에 있어서는 오히려 카를로스의 할아버지보다 낫다고 해야 할 터였다.)

결국 나라는 훨씬 강력한 친(Chin, 진晉)에 의해 멸망당했으나, 아우추는 친 황제의 봉신으로서 목숨을 건졌고, 친의 수도에서 볼모 신세로 살지언정 편안하고도 즐거운 대공(안락공安樂公)이라는 칭호가 붙을 만큼 안락한 생활을 영위했다.

심지어 친의 황제가, 연회 자리에서 그의 나라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 묻자, 오히려 이곳이 즐거우니 시오크 따위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답했다는 것이었다 (낙불사촉樂不思蜀).

‘이 이야기의 교훈이 뭘까요?’

‘자, 잘 모르겠다, 아니. 모르겠소.’

‘아우추가 저런 말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후대 사람들은 그가 반드시 어떤 깊은 뜻을 품고 짐짓 어리석은 시늉을 했을 것이라 지레짐작을 하곤 하지요. 정작 아우추는 그의 자리에 있을 때에도, 자리를 잃었을 때에도 딱히 훌륭한 치적은 남기지 않았고, 그의 소위 업적이라는 것은 모두 아랫사람들이 했을 뿐이었는데도요.’

캉벤(孔明, 제갈량)이라는 재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애써 이뤄놓은 공적 덕에 아우추 역시 후대에 저의 재간 이상으로 부풀려진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사벨은 어찌하면 자신이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남들만 그대로 괴롭히면서 모두에게 자신이 군왕의 재목이라는 것을 드러낼 방도가 있노라 귀띔을 해주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뭔가 그럴듯하게 남들을 속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여전히 희뿌연 카를로스의 머릿속이었지만, 어째 어제보다도, 또 그 이전 그가 기억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머릿속이 덜 지끈거리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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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언급되는 언어 박탈 실험은, 작중 서술된 것처럼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프삼티크 1세(재위: 664-610 BCE)와 헤로도토스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그리 넓지 않음을 고려하면, 완전한 허위는 아닐 수도 있는 일화지요. 비슷한 일화는 프리드리히 2세나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 그리고 작중 시점에서는 갓 즉위한 무굴 제국의 악바르 대제에 대해서도 전해지는데, 앞의 두 경우는 그들을 비방하기위한 목적이 배후에 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반면 인도의 악바르는, 언어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된다는 보다 과학적이고 실질적인 가설을 검증하기 위하여 같은 실험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전에 언급된 ‘맹자’를 비롯해, 꺽정이를 거치지 않고 이탁오 입에서 바로 옮겨지는 중국 고유명사는 모두 이탁오 본인이 30대까지 입말로 사용했을 천주의 복건 방언(민남어)을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다만 자료의 한계로 명말 시점에서의 민남어 발음까지는 고증하지 못하고, 현대의 음을 따르고 있습니다. (관련 자료를 가지고 계신 독자님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제보해주시기 바랍니다.)

유비의 아들 유선이 어렸을 적 머리를 다쳐 영 모자라게 되었다는 것은 후대의 농담일 뿐이고, 조자룡이 기껏 구해온 아두(유선의 아명)를 유비가 휙 던져버리는 장면 자체도 <연의>의 창작입니다. 다만 유선이 민감한 유아기를 하필 조조의 형주 침공과 적벽대전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시기에 보낸 것은 사실이고, 그가 이때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까지는 배제할 수 없겠지요.

원 역사의 돈 카를로스는 비록 다양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으나, 아예 사리판단 자체가 불가능한 정도의 저지능에 시달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대신 과대망상과 불안, 그리고 아마도 그의 사인이 된 것으로 보이는 거식증과 우울 증세,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일관적으로 나타난 충동조절 장애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 정도만 해도 일국의 군주는커녕 여느 요직에조차 부적합한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펠리페의 어린 후처였던발루아의 이사벨, 펠리페의 막내 여동생 후아나 등 몇몇 왕실의 인물들이 카를로스에게 동정에 가까운 호감을 보였던 데는 아예 근거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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