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58화 (158/259)

47. 낙불사촉 (3)

그 우거지상으로 인해 바야돌리드의 궁전을 오가는 다른 수많은 관료들과 확연히 구분되던 돈 카를로스의 가정교사들이, 갑자기 기묘한 활기를 띈 채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돈 카를로스의 이름을 내세워 무슨 자료를 부탁하지를 않나, 근래 국왕 펠리페 2세의 심중에 있는 정책의 현안이 무엇인지 넌지시 수소문하지를 않나.

무릇 소문(所聞)이라는 것은 그 문(聞) 자가 보여주듯, 문 사이로 전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문이라 함은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통하는 것이므로, 곧 가정교사들이 돌아다니는 곳마다 돈 카를로스의 무언가가 변하긴 한 모양이라는 소문이 함께 퍼졌다.

“흠흠, 부정하지는 않겠소. 타고스 박사의 처방이 카를로스 공자의 심경에 변화의 계기를 주었을 지는 모르겠으나, 그 계기를 공자께서 살릴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는 것은 이 사람이니.”

개중 몇몇은 벌써부터 이렇게 헛바람 든 콧대를 높이 세우곤 했다.

무릇 군주의 위엄이 세워지게 되면, 그 위엄이 마치 저의 것인 양 착각하는 자도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아예 근거 없는 착각은 아니었다.

왕자의 부족한 학문이, 그저 성의 없는 태도와 광증 때문만은 아님을 눈썰미 있는 자들은 알고 있었다. 설령 그 광증이 일거에 사라지고, 모든 가르침을 성심껏 듣는다 하더라도, 돈 카를로스는 지성에 있어서든 교양에 있어서든, 이름이 같은 그의 조부는커녕 아버지의 발끝조차 따를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아주 잘 풀려봐야 범부(凡夫)에 지나지 않을 재능이라면, 결국 근시(近侍)하는 이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을 터.

아직 성인이 되기조차 몇 년 남은 돈 카를로스였지만, 동시에 펠리페 슬하의 유일한 아들이기도 했다. (잉글라테라의 ‘찰스’는 아직 왕자Infante로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에스파냐의 왕위를 다른 집안에 넘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펠리페는 이 부족한 아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에스파냐의 빚더미만큼이나 그 위세와 강력한 군사력은 잘 알려져 있었다. 설령 펠리페가 자신의 손에 쥐어진 힘 중 극히 일부만을 어린 아들에게 허락한다 한들, 그것은 어지간한 에우로파 군주를 넘어서는 힘이리라.

더구나 가정교사들 중 몇몇은 아직 젊었다. 왕자의 상태를 알음알음 들어 아는 노회한 이들은 알아서 그 자리를 사양했고, 멋모르고 들어온 자들은 저의 후배들을 천거한 뒤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왕자가 장성하여 아스투리아스 공작(Principe de Asturias, 에스파냐 왕실 후계자의 직함)을 칭하게 된 뒤에도, 어쩌면 왕위까지 물려받은 뒤에도 그들은 살아서 권세를 누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카를로스가 주문한 ‘거창한 일’에서 두각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아시다시피, 이곳 바야돌리드는 카스티야 시절부터 왕실의 중심지로 기능해 왔지만, 포르투갈을 제외한 나머지 이베리아 전체, 나아가 우리 에스파냐의 모든 강역을 다스리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정부 일각에서는 조심스럽게 마드리드를 공식적인 수도로 선포하고 궁정과 의회를 이전하는 것을 논의하고 있다 하는데, 이것을 공자의 이름으로 정식으로 부왕께 진언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마드리드? 그게 어딘데?”

“톨레도 인근의 작은 도시입니다. 바야돌리드와 톨레도, 살라망카 등 우리 에스파냐의 주된 도시들과 모두 교통이 편하면서도, 그런 도시들에 거점을 둔 귀족들의 영향력에서는 완전히 자유로운 곳이지요. 그러니 새로운 수도로서는 최고의 입지라 하겠습니다.”

“수도를 정하는 것을 넘어, 아예 우리 왕국의 모든 위엄을 드러내면서도 통치에 필요한 모든 기능을 갖추도록 여러 건물을 한데 묶어 거대한 궁궐을 짓는 것도 좋겠습니다. 통상의 궁궐뿐 아니라, 박물관, 도서관, 의회, 수도원 등을 모두 포함하여···”

가정교사들은 이 급조된 ‘궁정’에서, 때로는 자신의 생각을, 또 때로는 훔쳐온 생각을 자신 있게 꺼내며, 모자란 왕자의 환심을 사려 노력하였다.

그렇게 보름쯤 지났을까. 마침내 마드리드로의 천도 계획이 완성되자 돈 카를로스는 곧장 아버지의 시종장에게, 아버지꼐 긴히 아뢰고자 하는 바 있으니 알현 일정을 잡아달라 청하였다.

돈 카를로스가 떼를 쓰는 대신 무언가를 정중히 청하는 일은, 아버지 앞으로 불려가는 대신 스스로 나아가는 일만큼이나 드물었으므로 이는 곧 궁정의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정말로 신의 은총이 있어, 아니면 동방의 신비가 효험을 드러내어 돈 카를로스의 광증이 나은 것일까? 고개 푹 숙이고 돌아다니는 대신 갑자기 거들먹대기 시작한 가정교사들의 말에 따르면 대체로 그러하였다.

경미한 변덕과 짜증 증세는 있을지언정, 이제는 감히 군주의 아들이라 내세울 만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소문은 종잇장과 같아, 홀로 있을 때는 바람만 불어도 금방 여기저기 날리는 반면 여럿 겹치고 쌓이면 바위처럼 묵직해져 진실과 착각하기 쉬웠다.

바야돌리드 왕궁의 여러 정원 중에는 아름다운 대리석 기물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작은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날 그 기물 중 여럿이 산산히 조각난 채로 발견되어 큰 충격을 주었다.

돈 카를로스는 동방인들의 우두머리인 거한 코우지오니스가 그런 짓을 하였노라 주장하였으나, 상식을 갖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 카를로스가 말썽을 부려놓고 엉뚱한 이에게 뒤집어씌웠다 지레짐작하곤 했다.

그러나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대체 심약한 만큼이나 병약한 왕자가 무슨 힘을 쥐어짜 그런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였다.

허나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이요, 일거리는 일거리라, 정원사들과, 그들의 조수 및 하인들은 그저 망가진 기물의 자리를 애써 화훼로 메꾸고, 또 다른 데서 가져올 수 있는 장식은 가져와 빈자리 채우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멀리서 돈 카를로스가 어기적대며 걸어오고 있는 것을 모았으니, 모두가 연장을 내려놓고 왕자를 피해 달아났다. 남은 것은 국왕 펠리페와의 접견이 어찌 진행되었을지 촉각 세우고 있는 가정교사들뿐이었다.

“여기서 뭣들 하고 있어?”

“그, 펠리페 폐하는 잘 뵙고 오셨는지요.”

“그야 당연히 잘 뵙고 왔지.”

아들이 웬일로 멀쩡한 이야기를 꺼내더니, 국정에 대해 제법 그럴듯한 계획까지 내밀며, 딴에는 조리 갖추려 노력한 말을 늘어놓는 것을 본 펠리페는 내심 놀라워하면서도 기뻐하였다.

그러나 내심이라는 것은 밖으로 나오지 않으므로 내심이었다. 펠리페는 그 계획에 일리 있다고 고개 끄덕이면서도, 더 보완되어야 할 점은 무엇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생각 아님이 명백한 것을 자신의 것처럼 꾸미는 태도도 고쳐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평소 꾸중할 때와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챈 카를로스도, 제 성질머리를 못 이기고 아버지 면전에서 제안서를 산산이 찢어버렸다.

그런 무례를 가만 좌시할 펠리페가 아니었다. 곧장 축객령을 내리고, 아직 갈 길이 먼 듯하니 행실을 모두 고치지 전에는 알현을 청하지 말라 하였다.

(카를로스는 알지 못했으나, 아들의 절뚝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지자마자 펠리페는 즉시 시종들을 불러 찢어진 종잇조각을 한데 모아 붙이라 하였다.)

“그래도 이만하면 제법 괜찮은 결과라 하더군.”

나오는 길에 ‘우연히’ 만난 이사벨의 해석에 따르면 그러하였다.

아직 갈 길 멀다는 것은 진전은 있다는 뜻이요, 또 은근히 다음 번에 또 이렇게 찾아와도 된다는 것을 암시하였으므로.

“그,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저희는···”

“네놈들 도움을 받았다고 이실직고하긴 했다. 아버지께서는 썩 기껍게 여기시는 눈치는 아니시던데. 그래도 내가 조금 나아졌다 여기실 테니 네놈들에게도 포상이 내려지지 않겠어?”

카를로스의 마음가짐이 조금 변하고, 두통이 조금은 잦아들기는 했지만, 결국 카를로스는 옛 모습 그대로였다. 여전히 눈앞이 벌게지면 머리 거치지 않고 손과 입이 먼저 움직였고, 몸이나 마음이 아플 때 남이 저보다 더 아픈 것을 보면 그 통증 줄어들고 즐거움을 느끼는 증세 또한 여전하였다.

“그 말은, 곧 내가 무엇을 하든 나는 이전보다 나아진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겠지. 조금 나아지는 듯하더니 다시 예전처럼 돌아갔다고 하면 사람들이 누굴 탓하겠어?”

이 또한 이사벨의 꾀였는데, 눈앞의 가정교사들 사이에 오가는 불안한 눈빛을 보니 제법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의 말을 못하는 토끼 따위를 산채로 태울 때보다도 더 즐거웠다.

“어디 보자··· 얏!”

조경 담당자들이 급히 몸을 감추느라, 미처 고정을 못 시키고 난간 위에 올려만 두었던 새 모양 석상을 돈 카를로스가 슬쩍 밀쳤다. 몇 번 비틀거리던 석상은 그대로 땅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자, 알아서 날 변호해 달라고.”

돈 카를로스의 상태는 호전된 것이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간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가르치려 애썼던 가정교사들에게 응당의 명성과 보상이 돌아오게 될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으니, 그 망나니 심성도 고쳐졌으리라 여겼건만, 안타깝게도 광증이 아주 약간 걷어진 자리에서 모습 드러내는 것은, 여전히 더러운 성질머리뿐이었다.

“물론 네놈들도 영 시원찮은 구석이 있으니, 한계가 있다는 것이야 알지. 앞으로 나도 나름 자제는 하려고 노력할 테니 그리들 알라고.”

석상이 있던 쪽 난간에 몸 기대며, 어디서 배웠는지 시정 건달마냥 건들대는 - 아마 돈 림의 해로운 영향일 테다 - 카를로스였다.

그러나 하늘이 무심치 않아, 이미 수난을 여러 차례 당했던 그 난간도 그대로 부서지며 카를로스도 땅에 나동그라졌다.

이는 카를로스 본인에게는 불운이지만, 석상이 부서진 것과 카를로스의 부상 모두 날림으로 복구 공사를 한 놈들 잘못으로 몰아갈 수 있게 되었으므로 그의 얼뜨기 측근들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돈 카를로스, 괜찮으십니까?’ 외치며 후다닥 달려가느라, 다른 한편으로는 방금 전 카를로스가 말한 것을 되새기느라 정신 없던 가정교사들은, 몸과 마음이 모두 뒤틀린 왕자가 방금 전 자신이 앞으로도 선을 지키려 노력하겠노라며 전례 없던 자제와 배려를 보였다는 것은 잊고야 말았다.

그날 밤, 카를로스는 하인 두엇만 거느린 채 또 몰래 숙소를 나와 이사벨을 만나러 갔다.

“어찌 되었던가요?”

“모두 네, 아차, 누님 말대로 되었어. 다들 정신을 못 차리더라고, 헤헤.”

누군가를 좋아하지도 않고, 딱히 그를 좋아하는 이도 없는 카를로스였지만, 이사벨은 싫지 않았다. 생긴 것도, 하는 짓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 아니거니와, 무엇보다 카를로스 저의 말을 제법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곧 사람을 함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될 것이었다.

“거 잘 되었군. 나도 보기보단 착한 놈이라서, 멀쩡한 사람을 물귀신 만드는 것을 즐기진 않으니.”

“뭐야? 누구냐?”

이사벨 곁에서 스윽 나타나는 것은, 며칠 전부터 악몽 시달릴 때 나타나곤 하는 그 거대한 그림자.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이지, 무어.”

“어딜 봐서 당수가 부처님입니까? 끽해야 금강역사(金剛力士)지.”

“서유기인가 보니까 원숭이도 부처 되던데, 백정이라고 부처 못 될 것 무에 있겠소.”

뒤이어 일전에 보았던 타고스 박사를 필두로, 동방인 패거리들이 카를로스를 둘러쌌다.

“잠깐, 그러니까··· 이사벨이랑 네놈이 한통속이라고?”

“굳이 따지면 내가 윗사람이긴 한데.”

“자꾸 그렇게 위아래 따지면 당수랑 같이 조선까지 간 다음에 레이디 리(명희) 보는 앞에서 팔짱 낄 거니까 그런 줄 아세요.”

마치 하인이 곁에 있을 때처럼, 사람이 있어도 있는 것으로 대접하지 않으며 저들끼리 떠드니, 이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한 카를로스는 그저 그나마 아는 얼굴인 이사벨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 하여간 고생 많았다. 네 녀석도 나름대로 마음고생은 했을 게다. 물론 제 성질머리 다스리는 게 어렵지 남이 알려준 대로 읊는 것이야 별 수고도 안 들었겠지만.”

“남이 알려준 대로라니? 다 내가 한 일인데! 물론 도움을 조금 받긴 했지만···”

“헛소리 집어치워라, 어린것아. 그게 네놈 그 머리통에서 나온 꾀일 리가 없지 않으냐.”

“뭐라고? 이게 정말···!”

“공자, 체통을 갖추시지요. 기껏 펠리페 폐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움직였는데, 못난 짓을 하게 되면 다시 가망이 없어지지 않겠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 이사벨 말에 따라 반쯤 올라온 손바닥을 다시 허리춤으로 내리는 카를로스였다.

“그래서, 이제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이젠 볼 장 다 보았다. 네 할아버지 얼굴 봐서 네 녀석 상대해 준 것이었지, 너 좋으라고 이런 일 했겠느냐.

네가 임금 노릇할 깜냥이 되건 말건, 이미 사람들은 너를 다시 보게 되었고, 또 저들 권세 욕심 차리기 위해서라도 네놈이 곁에 두고 있는 잡것들은 모든 수를 다 써서 네가 참으로 훌륭하다 떠들고 다니지 않겠느냐. 애초에 임금 노릇하는 데 그만하면 되었지.”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고 너무 말이 심한 것 아닌가?”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목소리의 뒤를 이어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나, 그 주인이 늙은 카를로스임을 알렸다.

“자네가 만에 하나, 처음 타고스 박사를 통해 알린 계획에서 벗어나지는 않는가 싶어 사람을 붙여두었다네.”

이사벨(엘리자베스)을 감시하기 위하여 붙인 사람도 따로 있었지만, 굳이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내 가여운 손주를 더 괴롭힐 거리가 없다면 그만 놓아주게나. 우리에게는 승패를 가려야 할 내기가 있지 않은가?”

딱히 떨쳐낼 명분도 없고, 그렇다고 바퀴 달린 의자에 붙박이 신세로 앉아 있는 어르신을 달음박질로 따돌리기에는 조선 사람으로서 머릿속에 못박힌 것이 너무나 컸던 고로, 꺽정이는 어린 카를로스는 버려두고 늙은 카를로스를 따라갔다.

그 뒤를 이탁오도 따르고, 엘리자베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나름 같은 왕족이자 명목상 조카인 어린 카를로스 쪽을 챙겨주기로 하고 뒤에 남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카를로스가 거처로 쓰고 있는 큼직한 방에 닿았다. 한때 에우로파의 유일한 황제를 자처하던 사내의 방 답게, 화려하지는 않을지언정 위엄이 서린 듯했다.

타닥타닥 소리 내며 객을 맞이하는 벽난로 옆에 의자 두엇이 놓여 있었다.

“비켜주게나.”

의자에 두 사람이 앉고, 꺽정이 털썩 앉은 쪽에서 의자의 비명이 그치자, 카를로스는 저의 시종들에게 명하여 주변을 비웠다.

“그래, 타고스 자네의 그 훈육이 그럭저럭 성공을 거둔 듯하더군.”

“하하, 하찮은 술수에 불과합니다.”

“나도 동의하네.”

이탁오가 겸양하는 말을 꺼내니, 카를로스는 진담으로 맞장구를 쳤다.

“실로 하찮은 술수였지. 그저 손주가 지닌 지위를 이용해 모리배들을 끌어모으고, 그들로 하여금 머리 맞대게 하여 그럴듯한 정책 제안을 했을 뿐이지 않은가?

자네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내가 보기에 자네들은 내기에서 이기지 못하였네. 말하자면 눈속임 부리며 반칙을 쓰다가 상대편에게 걸린 셈이랄까.“

군주를 군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군주가 아닌 이가 스스로 깨우치거나 배울 수 있는 것인가?

이탁오가 내놓은 답은, 그러므로 카를로스가 보기에는 반칙을 넘어 지독한 냉소였다.

진정한 군주와 군주의 시늉을 하는 미치광이를 어찌 구분할 것인가?

그 미치광이가 자신의 주변 모두를 강압하여, 자신의 모든 행위가 지극한 현명함에서 말미암은 것이며, 소위 광증에 대한 모든 소문은 그저 음해일 뿐이라 주장하게 만든다면?

“하지만 그것이 어찌 진실한 군주의 덕목이겠는가? 그대들이 가르친 것은, 백 번 양보해보았자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도 경계하는 법. 그들을 끌어들이고 거느리며 통치하는 법에 불과하지, 권력을 지키고 늘리는 데 있어서는 그 어떤 가르침도 주지 못하였네. 애초에 카를로스 그 가여운 아이가 무언가 배웠는지도 확실치 않지.”

그 ‘시오크(촉)’ 나라의 어리석은 황제 이야기를 이탁오 통해 들었던 카를로스는, 그 나라가 어찌 멸망에 이르게 되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돈 카를로스의 가정교사 중 다른 자들보다 총명하고 야망 넘치는 이 있어, 펠리페가 죽을 때까지 기다린 뒤 왕위에 오른 카를로스의 눈과 귀를 가로막고 국정을 농단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군주의 덕목이란 고작해야 그 자리에 조용히 존재하는 것뿐이며, 그가 올바른 통치를 할 수 있도록 보좌하는 신하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군주를 지킬 신하들이 언제고 그 군주에게 반하여, 나라의 이익 대신 사익만을 추구하고 그들의 주군 대신 자기 자신이나 외국의 다른 군주를 섬기게 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결국 타고스 자네의 냉소 뒤에 남는 것은 혼란뿐일 것일세.”

카를로스의 지적에 이탁오는 숙고에 빠지고, 꺽정이는 꼼지락대다가 부지깽이에 손이 닿아, 장작이나 뒤적거렸다. 불길이 과하게 따사로웠지만, 늙은이 무릎 시리는 것을 알았기에 딱히 불평하진 않았다.

그러는 사이 이탁오의 반박이 마련되었다.

“신하가 미덥지 못하다면, 그 신하들을 감시하고 올바른 행실 권면하는 방도를 세우면 그만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사사(士師, 춘추전국시대의 벼슬)가 있었고 지금은 명국에 어사가 있으며 조선국에는 언관이 있습니다.”

“그래, 자네 말대로 제도를 잘 두는 방법도 있겠지. 아예 옛 로마인들이 했던 것처럼, 권력을 여럿으로 쪼개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도록 할 수도 있을 터. 허나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네. 자네 말대로 감시자들을 두어, 군주의 권력을 대행하는 신하들을 감시한다고 치세나. 그렇다면 그 감시자들은 누가 감시할 것인가 (Quis custodiet Ipsos custodes)?”

“경(卿)이 미덥지 못하다면 대부(大夫) 가운데서 스스로 새로 뽑게 하고, 대부가 미덥지 못하다면 백성들 가운데서 스스로 가려 뽑게 하면 될 일입니다. 나라의 명운은 그 나라 모든 국인(國人)에게 달린 것이므로, 스스로 어육(魚肉) 되기를 구하지 않고서야 알아서 자신의 나라 안위를 걱정하겠지요.

모든 사람에게 양지(良知)가 있고, 의권(권리)이 있다면 어찌 이것이 이루지 못할 경지겠습니까?”

언쟁은 이어진다. 자신이 황제가 된 것, 수십 년 동안 -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 사리사욕이 아닌 더 큰 목표. 에우로파 전체의 통합이라는 목표를 위해 달려왔다 여기며, 자신의 후대에는 그 목표를 달성해내기를 바라며, 늙고 지친 몸을 놀려 배움에 불태우는 옛 황제가 열변을 토한다.

이미 그 소위 더 큰 목표. 천하를 위한다는 큰 거짓으로 말미암아 하나로 묶인 채, 나라의 족쇄와 선비 스스로 찬 차꼬에 시달리는 나라에서 더 큰 세상을 찾아 떠나온 선비는 차가운 냉소와 함께 스스로 변호하고 반박한다.

그리고 가만 듣던 백정은, 무심결에 한 마디 툭 던진다.

“그런데 우리가 이 논쟁을 왜 하고 있는 것이오? 그 어린놈이 어르신 손주지 내 아들이오? 어차피 그놈이 이대로 자라서 왕위 물려받으면 그만인데.”

그제야 늙은 카를로스는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니, 옛 로마 시인이 말한 것처럼 실로 희극과 같아 이번에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영명한 군주가 모든 것을 다스리는 절대적인 통치자로서, 국민을 위하여, 그들의 주인이자 으뜸가는 종으로서 모든 것을 바친다. 그가 생각한 완벽한 모습. 앞으로 이 세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었다.

그러나 카를로스 자신은 그리할 수가 없지 않은가. 꺽정이 - 이제는 카를로스도 그 이름의 원 발음을 귀에 익혔다 - 가 말한 것처럼, 현실은 현실이요, 마음의 병이 그저 숨어들었을 뿐 뿌리는 그대로인 손주를 위해 미리 대비해두어야 할 법도는 지금 타고스가 말한 것과 같이 견제와 균형, 그리고 권력의 분산을 통해서만 마련될 수 있었다.

“흐흐··· 하하하!”

정답이 무엇인지 안다 여기면서도, 스스로 손으로 오답을 따라야 한다니, 이 어찌 슬프면서도 우습지 않은가.

한참 웃던 카를로스 입에서 기침이 나왔다.

“괜찮으시오?”

“물론이고말고. 몸의 노쇠함이야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만, 이런 즐거움은 또 언제 찾아오겠는가.”

“돌아가면 용한 의원이라도 하나 보내드리겠소. 이쪽에서야 백약이 무효라지만, 세상에 약이 어찌 백 가지만 있겠소. 동쪽에서 여기 이 탁오 선생 말고 진짜 명의가 온다면 어르신 무릎팍도 고칠 수 있을지 누가 알까.”

꺽정이가 자못 걱정하며 물었다. 어쨌든 적으로 만날 때도 항상 그를 벗처럼 대해주었던 사내였으므로.

물론 꺽정이도, 그것이 카를로스 본인의 선량함보다는, 자신의 칠정(七情)과 나라 및 가문의 이익을 분간할 수 있는 냉철함에 더욱 기반 두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허나 그렇다 한들 상냥함은 상냥함이었다.

“아니, 그건 괜찮네. 내 몸은 내가 잘 아니, 아마 자네가 고향에 돌아갈 즈음이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야.”

“내가 만나본 늙은이들은 죄다 ‘늙으면 죽어야 한다’ 말하면서도 막상 숨 끊어질 성싶으면 죽기 싫은 티 팍팍 냅디다.”

“날 위해줄 성의가 있다면, 대신 다른 부탁이나 하나 더 들어주게. 타고스 박사가 장차 동방의 서책을 이쪽 에우로파로 전할 것이라 들었네. 그 길에 내가 쓰려는 책도 옮겨서 동쪽에 전해 주게나.”

“책? 무슨 책 말씀이시오?”

“자네와 타고스 모두 틀렸고, 종국에는 내가 옳다고 밝혀지리라는 내용의 책을 써낼 심산이라네.”

“그 대강이 어찌 될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책 얘기를 하니 귀가 쫑긋한 이탁오가 물었다.

“지금의 세상에는 문제가 있네. 다들 거기엔 동의하겠지. 비록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보기에 따라, 또 민족과 그들이 거하는 대륙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내가 판단하기에 결국 모든 잘못의 원인은 하나로 귀결된다네. 바로 군주다운 군주가 없다는 것이지.

그 어떤 군주도 자신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진실로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네. 사실 나조차도 그러했지. 만약 자네들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눈을 뜨지 못한 채 그저 낙담한 채로만 죽었을 테니 어찌 자네들을 벗으로서 환대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덕목은 무엇인가?

카를로스는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계몽된 군주의 손에 쥐어지는 절대적 주권. 그것을 위하는 것이 군주의 덕목이었다. 스스로 남의 위에 서서 남을 위해줄 수 있도록 모든 힘을 장악하고, 그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뒤, 나는 내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 동안 에우로파에서 보고 들은 것을 다시 검토하였네. 그리고 곧 두 번째 결론에 닿았네.

이대로 군주와 군주가 부딪히고 정통과 이단이 힘겨루기를 한다면, 결국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이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일세. 그리고 그 이치에 따라 자신의 나라를, 나아가 나머지 세상 전체를 뜯어고치려 하겠지.

자네들이 말하는 것. 국민이 스스로 다스리고 군주는 그저 대행자일 뿐인 그러한 나라도 어쩌면 가능할지 모르네. 하지만 그것은, 감히 말하건대 시기상조일세.

오직 절대적인 군주가 등장한 뒤에야, 그리고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 더 이상 한 시대의 정답이 정답으로 통용되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그러한 군주의 권력이 바로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며, 군주를 모시느니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 다스리겠노라, 적어도 자신의 뜻에 따를 대행자를 세우겠노라 말할 수 있을 것일세.

정녕으로 깨우친 군주 한 사람도 세상에 없는 지금, 정녕으로 깨우친 수많은 백성의 나라를 어찌 만들 수 있겠는가?”

이탁오는 귀기울여 듣고, 또 길어지는 말에 흥미 잃은 꺽정이는 조용히 일어나 늙은이에게 물 한 잔 가져다 주었다.

고맙다며 잔을 받은 옛 황제가 말을 이었다.

“자네가 말한 시나 땅의 옛 철학자들은 통치자의 정당성이 오로지 백성에게서 나온다 하였지. 그렇다면 이번에는 대답해 보게, 타고스 박사.

그 철학자들이 태어나고 죽은 지 이천 년이 지났네. 그 철학은 이 땅에 이루어졌는가? 그대의 시나 땅에 있는 황제는, 정말로 백성을 위해 군림하며, 백성의 뜻을 거스른다면 곧장 그 자리에서 폐해지는 그러한 존재인가?”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실이 내 주장을 방증하는 한 가지 근거라고 할 수 있겠지. 여름을 거치지 않고는 그 어떤 곡식에도 낱알이 영글지 못하는 것처럼, 그대들의 나라도 아직 완전히 계몽되지는 못한 것일세.”

카를로스는 눈앞의 두 동양인을 마주보았다. 깊은 고민에 빠진 타고스, 그리고 아무 생각 없는 꺽정이가 침침한 두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둘 중 힘을 지닌 자, 그리고 지붕이 자신의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기둥을 무너뜨릴 만한 자가 누구인지는 명백하였다.

“허나 그렇다 한들, 이 늙은이가 아무리 이 자리에서 떠든다 한들 자네들은 뜻을 굽히지 않겠지.”

“그 말씀 맞소.”

“그렇다면 동방으로 돌아간 뒤에 자네를 기다리는 것은 분쟁과 탄압뿐일 것일세. 설령 자네의 나라 디오시온에서 반대하는 자들을 무너뜨린다 한들, 그 다음에는 시나의 황제가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일세.”

그리고 카를로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답이 돌아온다.

“뭐, 해볼 때까지 하는 것이지. 만약 말 안 듣고 헛소리하는 놈이 있으면 이 두 주먹으로 막힌 성정을 틔워 주고.

내가 무엇을 하든 아직 너무 이르다 하셨소? 아예 시대를 통째로 훔쳐서 순서를 뒤틀어버리는 것도 제법 재밌는 도적질이 되겠군.”

카를로스는 또 한 차례, 기침이 끝을 알릴 때까지 폭소하였다. 그리고 그 웃음의 울림은, 벽난로의 장작이 재로 화한 뒤에까지도 카를로스의 늙은 가슴 속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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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전쟁이 에스파냐의 군사적 완승으로 끝나는 대신, 신생 이탈리아 연맹이 실리를 취하고 에스파냐는 허울뿐인 영향력만을 인정받는 쪽으로 귀결되면서 에스파냐의 역사도 여러모로 변하고 있습니다.

작중 언급된 마드리드도 그런 사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카스티야의 실질적 수도였던 바야돌리드가 에스파냐와 그 식민제국 모두를 다스리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인식은 이미 펠리페 2세에게도 있었고, 그는 1557년 이탈리아 전쟁을 에스파냐의 승리로 결정지은 생캉탱 전투의 승전을 기념해 마드리드에서 약 45km 떨어진 아반토스(Abantos) 산에 에스코리알 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561년에는 마드리드로의 천도를 선포하게 되지요. 이후 펠리페 2세의 아들 펠리페 3세 시대에 잠시 바야돌리드로 복귀한 왕실은 곧 마드리드로 돌아왔고, 그 이후로 에스파냐의 수도는 마드리드로 죽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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