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63화 (163/259)

49. 악마와 같이 검고 지옥과 같이 뜨거운 (2)

에티오피아의 네구스 갈라우데워스의 삶은 전쟁의 연속이었다.

이미 그의 선대부터 에티오피아는 사방에서 공격당하고 있었다. 반대로, 그들을 공격하는 이들은 에티오피아의 네구스가 먼저 범한 잘못을 앙갚음할 뿐이라 주장하곤 하였다.

두 주장은 양립할 수 없었으므로, 결국 전쟁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갈라우데워스의 아버지 다윗 2세는 불공대천의 원수였던 아달 술탄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같은 신앙의 형제인 포르투갈의 손을 잡았고, 대패한 아달 술탄국은 같은 신앙의 형제인 오스만 투르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포르투갈은 멀고 오스만 투르크는 가까웠으므로, 아달 술탄국은 더 빨리,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네구스들의 조상 솔로몬이 부렸다는 악마의 숨결과 같은 화약 무기 수백 정을 들고 그들은 고원으로 진격해 왔고, 끝내 에티오피아 고원 전역이 불바다가 되고야 말았다. 갈라우데워스가 갓 성인이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갈라우데워스와 그의 조언자들은, 화약 무기는 화약 무기로만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을 값비싼 대가를 치른 뒤에야 깨닫게 되었다. 마사와(Massawa) 항에 구축한 거점을 통해 보내진 포르투갈 지원군은 수백에 불과했지만, 화약과 납탄의 힘을 빌렸기에 수천 기병보다도 더 강력했다.

에티오피아는 삼백여 년 전 성지를 둘러싼 전쟁에서 그러했듯, 다시 한 번 나머지 기독교 세계와 이어져야 했다. 겨우 이어진 이 연줄이 끊어지는 날, 솔로몬의 후예들은 다시는 바다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었으므로.

그러나 포르투갈인들과의 교류는 그들의 적 오스만 투르크의 눈길을 동시에 끌어왔다. 예멘의 외즈데미르 파샤는, 이 기회에 하베쉬(에티오피아의 다른 이름, 아비시니아의 어원)의 바닷가를 모두 점령하여 그 어떤 기독교인도 얼씬대지 못하도록 만들 생각이라 하였다. 정복의 명분만 주어진다면, 그는 곧 이 무시무시한 발상을 실천으로 옮길 것이었다.

아달 술탄국과의 전쟁으로 양측이 모두 피폐해지기 전에도, 에티오피아는 북쪽의 맘루크들조차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였다. 하물며 국력이 크게 쇠한 지금, 오스만 투르크를 상대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전전긍긍하던 갈라우데워스는 포르투갈의 도움을 한 번 더 받고자 하였다. 저들의 뒤틀린 교회 전례까지 겉치레로 받아들일 각오를 한 채.

“죄송합니다, 폐하. 저희 역시 어떻게든 도와드리고 싶지만··· 방도가 없습니다.”

마사와 항의 포르투갈인들은, 그들이 알 수 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를 하며 난색만을 표했다. 분명 자신의 앞에서, 포르투갈의 힘이 지구의 바다 절반을 뒤덮는다 자랑하였던 자들이 무엇을 두려워한다는 말인가?

허나 그가 막 절망하려던 차, 놀랍게도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예수회 신부들로부터 묘한 소식이 들려왔다.

“지금 에우로파 땅에서는 두 믿음 사이의 평화가 논의되고 있다 합니다. 폐하의 어려운 사정을 밝히며 도움을 청한다면 반드시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나서서 멀리 떨어진 나의 나라까지 도움의 손길을 뻗쳐주겠소? 신앙의 형제는커녕, 피를 나눈 형제라 하더라도 그만큼 우의가 돈독할 수는 없을 것이오.”

“머나먼 동쪽에서 찾아온 교회의 보호자 코우지오니스 경이 곧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할 것이라 들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일면식 없는 우리 예수회 신부들에게도 크나큰 호의를 베풀었고, 또 이탈리아에서도 많은 훌륭한 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두 믿음 사이에 조심스러운 평화가 찾아오고, 이탈리아 사람들이 운하 공사 현장을 들락거리게 되면서, 포르투갈인들을 따라 에티오피아로 들어온 예수회 사람들은 그쪽을 통해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편하게 바깥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다만 그 소식은 예수회를 통해 한 번 거쳐진 것이라, 아무래도 그들이 보고 싶은 것만 골라내고 또 윤색한 채로 전해졌다. 특히나 리스본에서의 사소한 일로 말미암아 예수회가 새로운 후원자를 얻게 된 이후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코우지오니스 경은 이교도 술탄과도 연이 깊다 하였습니다. 그분의 힘을 빌린다면 술탄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다 건너편 모카 항에 기이한 이방인들이 찾아왔다는 소문은 이미 홍해 전역에 떠들썩하였다. 그들이 들어본 적도 없는 먼 서쪽에서 찾아온 이들은 외즈데미르 파샤의 환대를 받았는데, 그렇다면 살갗의 색깔이 어떠하든 저주받을 이슬람의 주구이자 교회의 적이었다.

그러나 그 이방인들의 이름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암하라(Amhara) 말로 옮겨지지 않았으므로, 교회에 크나큰 해악을 미친 것을 자랑스레 떠들었다는 그자들이 바로 예수회의 은인으로 포장된 임꺽정과 같은 사람임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네구스 갈라우데워스는 자신의 궁정에서 가장 총명하고 신중하며, 투르크인들의 말과 에우로파인들의 말에 모두 능통한 자를 선발하여 밀사로 삼았다.

그리고는, 저 먼 남쪽 예르가체프 땅에서 나는 가장 질 좋은 원두를 들고 상인으로 위장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잠입토록 하였다. 이교도들은 카흐와(Qahwa, 커피)라 하면 사족을 못 쓰니, 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코우지오니스를 기다리는 동안 결코 그들의 신원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 그리하여,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보호자시여!”

그러한 중임을 맡고 때를 기다리던 두 밀사는, 수중의 원두가 다 떨어져갈 무렵 마침내 동방인들이 어느 주점 하나를 빌려 연회를 벌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술탄에게 들키지 않으면서 코우지오니스를 만나기에 이만한 기회도 없을 터.

그들이 이곳에서 수소문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모카 항에 닿았다는 ‘림 파샤’와 코우지오니스는 같은 인물인 듯했다. 그렇다면 그저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이교도 앞에서 거짓을 말한 것일 테다. 과연 비범한 인물다운 지략이 아닐 수 없었다.

“코우지오니스 경의 기품어린 모습을 눈앞에서 뵈니, 그간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음을 비로소 알겠습니다. 부디 저희의 청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술탄의 흉계로부터 신앙의 형제들을 구해주십시오!”

여인으로 착각할 만한 외모를 지니고 있음에도, 군주다운 기상을 지니고 있는 붉은 머리의 사내 앞에 끌려가자마자 순순히 저들의 정체를 밝히며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두 사람이었다.

그토록 고결한 신앙의 보호자가, 도시 한구석에서 이렇게 술판을 벌인다는 것을 조금은 의아하게 여기고 있던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름대로 성심껏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레 다가오고 있었음에도 금방 간파당하여, 이렇게 그를 경호하는 이들에게 붙들린 것을 보면, 연회는 겉치레요 분명 무언가 중대한 일을 논하고 있는 것일 테다.

“그대들 얘기는 잘 들었소. 다만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겠소.”

그런데 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이들이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목소리 내는 이는 코우지오니스가 아니라 그의 경호대장인 듯한 거한이었다.

그가 어째 영 못마땅한 말투로 말을 이었고, 앞서 ‘코우지오니스’를 위해 통역해주던 깡마른 사내가그 말을 옮겨주었다.

“첫째로, 나를 찾아왔다면서 엉뚱한 사람에게 고개 조아리는 건 어느 동네 예법이오?”

“예?”

“림 파샤 찾아왔다면서. 그게 나요.”

암만 보아도 고결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인상의 사내였다. 이제 보니 딱히 고결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삶에 불편함이 없었을 듯한 생김새요 완력이었지만.

허나 언뜻 주변 둘러보니, 그 누구도 이 거한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있었다. 귀인을 기다리며 이 도시에서 몇 달을 보낸 주제에, 그 귀인 생김새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여 민망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으니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일단 거기서 한 번 마음에 안 들었고, 둘째로, 뭐? 술탄의 흉계? 지금 우리도 외즈데미르랑 맘루크 놈들이 헛소리하는 것 때문에 골치아픈데 왜 그걸 멀쩡히 계신 쉴레이만 어르신께 덮어씌우는 게요? 그분 아드님도 뻔히 여기 계시는구만.”

“저기, 임 당수, 나는 여기 몰래 온 것인데···”

““걱정 마시오. 누가 소문 내면 여기 이놈들이 세작(간첩) 노릇하면서 헛소문 퍼뜨렸다고 몰아가면 되지.”

이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상의 배불뚝이 사내가 투덜거렸다. 금발이 두드러지는 것을 제하면 딱히 특색은 없는 사내였건만, 이제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 발 늦게, ‘쉴레이만 어르신의 아드님’이 무슨 뜻인가 짐작한 두 밀사 얼굴은, 방금 전보다도 더욱 우거지상이 되었다. 임무는 실패하고 저들 목은 효수되며, 그들의 고국은 그대로 망하는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좌우지간 그게 둘째고, 셋째로 엉뚱한 사람을 나로 착각한 것을 넘어서, 멀쩡히 여인인 우리 대군마님을 사내로 착각했으니 이 또한 모자란 짓이오.”

“이 자리에서 그대들 나라에 대해 아는 대로 모두 털어놓는다면, 조금은 사정을 참작할 여지가 생길지도 모르지요. 자, 얼른 마저 말해보세요.”

조금 전까지 코우지오니스로 착각했던 사내, 아니, 여인의 고운 목소리가 절망하는 두 사람 귀에 닿았다.

워낙 황망한 상황이다 보니, 그들 앞의 거한이 그 말에 놀라고, 저쪽에서 무언가 속셈 있으니 가만 있으라 눈치를 주자 다시 놀라지 않은 척 얼굴빛 바꾸는 것은 두 밀사 모두 알아채지 못했다.

미스르(이집트) 에얄레트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맘루크들이, 운하를 파는 데 있어 저들의 도움을 원한다면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라는 요구를 코스탄티니예에 전한 지도 여러 날이 지났다.

먼저 베일레르베이를 통해 그들의 무엄함을 준엄하게 꾸짖는 술탄의 전언이 올 것이요, 그 다음으로는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진중하게 고려해 줄 테니 우선 협상을 해보자 하는 비제르(재상)의 말이 전해질 터.

그런데 정작 맘루크들에게 전해진 답변은 이도저도 아니요, 할 말 있으니 이스칸다리야(알렉산드리아)로 모이라는 기묘한 지시뿐이었다.

어쨌든 술탄은 맘루크들의 주군이기도 했으므로 – 비록 원해서 모시는 주군도, 외즈데미르 파샤처럼 야심인지 충심인지 모를 것 품은 이들을 제외하면 진심으로 모시는 주군도 아니었지만 – 따르는 시늉은 해야 했다.

그리하여 내노라하는 맘루크들은 하나둘씩 이스칸다리야, 정확히는 이스칸다리야 앞바다를 조망하는 카이트베이(Qaitbay) 요새로 모여들었다.

“흐, 카히라(카이로)에서 만났다가는 우리네에게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그런 것 아니겠는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찾아오는 이가 제법 겁이 많은가 보지. 우리로선 좋은 일일세. 이스칸다리야든 카히라든, 우리 없이 다스릴 수 없는 땅이라는 것은 똑같으니.”

몇몇 오만하고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자들은 심지어 저들이 거느린 병사들을 배에 태워, 조그만 함대를 꾸려 ‘귀빈들’을 모시겠노라 나서기도 했다.

그만큼 수에즈 운하는 미스르 땅에 큰 이익을 줄 것이었으므로, 이때 제대로 윗분들을 길들여 놓아야 그들에게 떨어지는 것도 많지 않겠는가.

“외즈데미르 어르신이 술탄께 뭔가 그럴듯한 제안을 했다던데, 어쩌면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이 내려올지도.”

“하베쉬(에리트레아 해안과 에티오피아의 통칭) 정벌? 뭐, 그것도 나름대로 이익이 되긴 하겠지.”

“나름대로 ‘이익이 되는’ 정도가 아닐세! 그 운하가 뚫린다면 홍해로 얼마나 많은 재보가 오가겠는가.”

“그건 모르겠고, 자네에게 이미 많은 재보가 들어간 건 알겠네.”

“흠흠, 외즈데미르 파샤의 제안에 동의할 뿐일세. 약간의 설득을 거치긴 했지만.”

그나마 온건하다는 맘루크들도, 이스칸다리야로의 소집에 응하면서도 이렇게 불온한 소리들을 당연한 것처럼 나누고 있었다.

그때였다.

“줄피카르 깃발! 술탄의 명을 받들고 오는 배입니다!”

요새의 망루에서 바다를 살피던 이들이 외쳤다.

“잠깐, 저건···?”

외침을 듣고 바깥을 본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줄피카르 깃발 내건 배가 정말로 입항하고 있었다. 그 옆에 수십 척 넘는 함대를 거느린 채.

“흥, 저렇게 우리를 위압하려고 카히라 대신 이곳 이스칸다리야로 부른 것인가?”

“두고 볼 일일세. 뭔가 일이 우리 생각처럼 돌아가지는 않는 듯한데.”

“하! 저 함대로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없으면 그 운하의 공사가 이루어질 수도, 유지될 수도 없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데?”

그러나 방금 전에 비하면 언사는 똑같이 오만할지언정 그 말투는 한결 덜 빳빳하였다.

셰자데께서 직접 찾아오셨으니 모든 맘루크들은 요새에 모여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지자, 다들 속마음이야 어찌 되었든 군말 없이 따랐다.

이 맘루크들과 교섭하기 위해 찾아올 셰자데라면, 셀림 하나뿐이지 않겠는가? 누울 자리 보고 자리 뻗는 이들은 이미 코스탄티니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뻔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셀림이, 어떻게 자신의 편으로 돌린 바르바리 해적 함대와 함께 찾아온 것은, 보나마나 이 기회를 틈타 후계자로서의 모습을 아버지 앞에 더 보이기 위함일 터. 이는 그를 상대로 협상하는 맘루크들에게는 더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셰자데의 위신까지 걸린 문제였으니, 더욱 그들 맘루크에게 관대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흥, 내가 모습을 드러내면 어떤 소리가 나올지 정말 궁금하기 이를 데 없군.”

이제는 이름만 셰자데인 바예지트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의 감시역 겸 투자자 겸 앞으로의 상관으로서 곁에 따라붙은 림 파샤는 그저 그러려니 했지만, 미스르의 베일레르베이를 대신해 셰자데를 수행하게 된 외즈데미르는 영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주로, 바예지트의 한 손에 들려 있는 빈 술병 때문이었다.

“왕자님 형 되시는 이보다 주량이 약한 것 같은데, 이대로 괜찮겠소?”

“뭐 어려울 게 있겠소? 그냥 그대가 읊어준 대로 그대로 말하면 될 텐데, 좀 취해도 상관 없지. 그리고 그 주정뱅이랑 달리, 이놈의 몸은 술조차 제대로 담지 못하니··· 우욱!”

셰자데로서의 위엄은 어디 팔아먹고 속을 게워내는 바예지트였다. 그 위엄 강매하게 만든 꺽정이가 걱정해줄 일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불쾌해진 바예지트가, 술병을 그대로 내던지려다가 그나마 남은 체면을 생각해 참았다.

참으로 불공평하신 신께서는, 저에게 술병 속으로의 도피조차 허하지 않으셨다. 맨정신으로 이 굴욕을 감내하도록.

그 머릿속의 냉철한 구석에서는, ‘이것이 어찌 굴욕이냐’, ‘오히려 저의 이름을 조금이나마 되돌리고, 나아가 정말로 자신이 그 ‘칼리피야(칼리프의 땅)’인지 ‘칼리푸르니야’인지로 향하게 될 때 그를 후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림 파샤에게 쓸모를 인정받기 위한 기회 아니더냐’ 하는 말이 감돌고 있었다.

허나 머릿속 가장 뜨거운 부분에서는, ‘이것이 어찌 굴욕이 아니냐’, ‘쉴레이만과 휘렘 술탄의 아들이, 이 천한 이방인의 사실상 아랫사람이 되어 그 시키는 대로 따르게 되는 꼬락서니가 볼썽사납지 않으냐’ 시끄럽게 외쳐대고 있었다.

바예지트는 지금껏 항상 전자의 조언을 듣다가도 결정적일 때에는 후자로 기울곤 하였다. 이성은 그러한 충동이 그를 파멸로 몰고가리라 말해주었지만, 정작 충동이 닥쳐올 때는 침묵하였다.

결국 이렇게 되었으니, 목숨이라도 부지한 것에 감사해야 했다. 그러나 도저히 감사할 마음은 나지 않으니,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은 끝없는 냉소와 자조뿐.

“그래서 관두실 게요?”

“아니, 그대로 나아가 그대 하라는 대로 말할 것이오. 꼭두각시 노릇을 하더라도 누군가를 괴롭게 하고 모욕을 주어야만 직성이 풀릴 듯하니.”

대체 쉴레이만 그 잘난 어르신은 자식 교육을 어떻게 했기에, 한 놈은 주정뱅이에 한 놈은 망나니를 키웠단 말인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나이 먹도록 따로 세자를 안 정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편, 바예지트와 꺽정이, 외즈데미르 파샤 뒤에는 꺽정이 패거리가 우르르 따라다니고 있었는데 – 셀림과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결국 작별하였다 – 개중에는 영 어색하니 서 있는 두 에티오피아 사람도 있었다.

분명 한 달 전 그 주점에서 코우지오니스는, 딱한 사정 알겠으니 도와주겠노라 하였다. 도저히 도와주려는 사람의 말투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밀사들로서는 불평할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막무가내로 통보하기를, 곧 이스칸다리야로 향할 것이니 따라오라 하였다. 물론 임무를 어영부영 완수하였으므로 고국으로 돌아가려면 그쪽으로 향해야 하긴 했지만, 대체 코우지오니스가 무슨 심산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하였다.

그러나 불안하다 하여 아니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 그저 그들의 네구스와 나라에 은총 깃들기를 – 그리고 은총 깃드는 김에 그들 목에도 은혜가 내려 부디 이어진 채로 남을 수 있기를 – 기원할 따름이었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 마음이야 알 바 아닌 바예지트는, 던지려던 술병을 외즈데미르에게 떠넘긴 뒤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경비병들이 눈치껏 대문을 여니, 섬돌 아래 죽 늘어선 맘루크들이 보였다. 언뜻 보아도 수백은 되어 보였은즉, 개중에는 아버지 쉴레이만조차 그 이름을 기억해야 할 만한 자들도 몇몇 있을 터였다.

“셰자데 바예지트다. 전능하신 신과 파디샤이자 술탄이신 아버지 주군의 이름으로, 모두 예를 갖추어라.”

만약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저 신과 아버지 술탄만 거론하였다면, 저들은 조금은 더 진지하게 예를 갖추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불현듯 바예지트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귀하신 분께서 이곳에 이리 왕림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곳에’를 강조하며 한 맘루크 영주가 물었다. 셀림에게 밀려난 패배자 주제에 무엇을 위하여 찾아왔느냐 하는 말을, 최대한 함축하고 빙빙 돌려 묻는 것일 테다.

“미스르 땅을 다스리는 그대들은, 셰자데를 맞이할 자격이 있지 않으냐.”

“이 땅은 오로지 신과 그분의 대리자이신 술탄의 것입니다. 저희가 어찌 감히 다스린다 하겠습니까?”

아무런 의미 없는 겉치레 문답이 한 번 오갔다.

“그대들이 숭고한 문의 재상들이 아버지의 명 받들어 추진하는 운하의 대업을 두고 감히 갑론을박한다 들었다. 그것이 사실인가?”

“비록 과장되었을지언정, 완전히 거짓이라 부인할 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저희의 사정도 전해주십사, 간곡히 청할 뿐입니다.”

이번에는 나이 지긋한 다른 영주가 나아와 말했다. ‘들어주십사’가 아니라 ‘전해주십사’ 한 것을 바예지트의 기민한 귀는 놓치지 않았다. 즉 아무런 권한도 없는 그와 굳이 협상할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는 말일 터.

“그대들의 사정이라!”

“그 운하를 파는 것은, 실로 이 땅에 없던 큰일이 될 것입니다. 진(Djinn, 정령)을 부리지 않는 한, 결국 사람과 가축의 힘, 그리고 저희들의 세금으로써 운하를 파게 되겠지요. 황금과 사람, 가축 모두 자애로우신 신과 현명하신 저희들의 주군의 은총으로 보장된 저희의 재산이 아니겠습니까?

때마침 실로 충성스러운 신하이자 현명하기 이를 데 없는, 셰자데 곁의 외즈데미르 파샤께서 실로 훌륭한 제안을 올렸다 들었습니다.“

남방 정벌이 반드시 맘루크 모두에게 이익을 주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이스칸다리야로 소집하는 사이 저들끼리 그럭저럭 말을 맞추었는지, 늙은 영주의 말을 마뜩잖게 여기는 자는 있을지언정 목소리 내어 반대하는 자는 없었다.

“하베샤 땅의 이교도 군주는 이미 오랜 전쟁으로 힘을 잃었습니다. 그 땅에 부르투갈(포르투갈)인들이 뿌리를 내리게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해안의 몇몇 도시만 점령하여, 믿을 수 있는 이들을 이 땅에서 뽑아 지킨다면 그 누가 이를 두고 옳지 못하다 하겠습니까?

저희들 중에는 운하가 과연 성공할지, 설령 뚫리더라도 약속된 만큼의 이익을 가져다줄지 의심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습니다. 허나 그렇게 이 잘 보호받는 나라의 모든 이들이 함께하게 된다면, 그런 어리석은 자들도 비로소 깨우치게 될 것입니다.”

운하의 이권을 더 나누어달라는 말을 역시 장황하게 빙빙 돌려 늘어놓는 늙은이였다.

“다른 방안은 없겠는가?”

“현명하시고도 위대하신 술탄과 그분 곁의 재상들은 더 좋은 길을 찾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허나 부족한 저희는 이것이 최선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여전히 바예지트 한 사람과 따로 협상을 한다는 가능성은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바예지트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지어졌다.

“그대들 모두, 내게 하베샤 정벌을 청하는 것인가?”

“술탄께 그리 말씀해 주십시오.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들 모두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참으로 오만하구나! 지금 나를 반역으로 이끌 생각이더냐?”

“셰자데, 지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나라에서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아버지이시자 주군이신 술탄의 명에 따라야 한다! 지금 내가 아버지로부터 벌을 받았다 하여, 나를 꼬드겨 반역에 동참케 하려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내 앞에서 그토록 쉽게 정벌을 운운할 수는 없겠지.”

터무니없는 꼬투리 잡기에 맘루크 영주들 모두 입이 벌어졌다.

“어찌 저희의 충심을 의심하십니까? 저희는 그저 이 땅이 술탄의 것으로 남을 수 있도록 도울 뿐입니다. 사십 년 전 술탄께 복속한 이후로 지금까지 저희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은근히 저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음을 언급하며 위협하는 영주들이었다. 가운데 낀 외즈데미르 파샤만 옆에서 열심히 눈짓을 했지만, 바예지트의 뒤틀린 입꼬리만 더 올라갔다.

“솔직히 말해도 좋다. 그대들을 쓸어 없애고 미스르를 온전히 술탄의 것으로 삼기에는 이미 너무나 적이 많기 때문에 그대들의 힘을 빌려 이 땅을 다스리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 아니더냐.”

“셰자데, 말씀이 과하십니다! 비록 아주 거칠게 말하면 그러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구나! 그냥 인정하면 될 것을.

자, 정직하지 못한 너희 대신 내가 먼저 진실을 이야기해주겠다. 그간 나의 아버지께서는, 서쪽에서, 그리고 백해(지중해)에서 기독교인을 상대해야 하셨고, 동쪽에는 파르스(페르시아)의 자칭 샤한샤가 있었다. 그러므로 여력이 없어 너희를 방치하셨고, 너희가 겉으로나마 충성을 바치는 한 더는 문제삼지 않으셨다.

그런데 신의 은혜로 파르스의 우두머리는 이미 두 해 전 아버지 술탄께 고개를 조아렸고, 기독교인들과의 다툼도 이제 잦아들게 되었다.

그대들 중 그나마 머리 돌아가는 자들이, 그렇게 남은 힘으로 남쪽, 하베샤 땅을 치자고 제의하였다던데, 굳이 그럴 것도 없이 아낀 힘을 써서 집안의 묵은 짐덩이들을 치울 수도 있지 않은가?”

짐덩이. 그 말이 맘루크들 모두의 마음을 찔렀다.

“저렇게 대놓고 겁박하기까지 하였으니, 맘루크라는 놈들은 꼬리를 내리고 하베샤 어쩌고 하는 헛소리 집어치우고 공사에 협조하겠노라 나오든, 아니면 아예 반기를 들든 할 것이오. 어느 쪽이든 그대들 나라에는 이득 될 일 아니겠소?”

물론 맘루크들이 아예 반란에 호소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럴 때에 대비하여 미리 셀림을 통해 쉴레이만의 허락까지 받아두지 않았던가.

어차피 운하가 뚫리게 되면 미스르 땅은 코스탄티니예에서 제대로 다스리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잃거나, 둘 중 하나의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가뜩이나 가치가 높은 땅이, 운하로 인해 더욱 귀하게 될 것이므로, 만약 오스만 가문에서 그 목줄을 단단히 쥐어매지 않는다면 누군가 다른 이들이 채가려 할 것이다.

그러니 이 기회에 한 번쯤 그 높기만 한 콧대를 꺾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셀림은 그러한 논리를 나름대로 저의 말로 풀어서 아버지께 고하였고, 그 덕에 바예지트는 자신의 예상보다 조금 이르게 자신의 고향에 영영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네구스는 뜻을 이루었다. 적어도 마사와 항이 오늘내일 사이에 함락되는 일은 없을 테니.

··· 라고 생각하며, 어쨌든 눈앞의 사람 덕이니 감사하려 하던 두 사람의 말을 앞질러 끊는 꺽정이였다.

“자, 그러니 이제 값을 내시오.”

“예?”

“그럼 맨입으로 이렇게 도와줬겠소?”

“하지만···”

“뭐, 신앙의 보호자가 그래도 되냐고? 그건 남들이 맘대로 가져다붙인 이름일 뿐이오. 내가 들고 다니는 천자의 칙서만 봐도 온갖 잡다한 호칭은 다 가져다 붙였지만 신앙 같은 얘기는 안 나온다오.”

애초에 엘리자베스가 코스탄타니예의 술집에서 벌어진 잔치에서 흥을 깨뜨려버린 두 밀사를 짐짓 용서해주는 척하며 그 나라 사정을 들은 것은, 어떻게 뜯어먹을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에서였다.

(동인도 회사 사장이라는 자리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꺽정이와 이탁오 같은 작자들과 어울리다 보니 그리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짧은 겨를 동안 이탁오도 동의하고, 꺽정이도 어련히 알아서 이해(利害) 따졌으려니 생각하고서는 그에 따랐다.

“다시 말하겠소. 값을 내시오. 바예지트 저 사람이 금방 아랫것들 휘어잡는 것 보시지 않으셨소? 그리고 그 전까지 모두들 그대 나라 쳐들어가자고 하는 것도 보았겠지.

우리는 몇 달 안으로 모카 항에 희망봉 돌아온 배가 닿으면 떠나갈 사람이라오. 그 사이에 우리가 뭔가 손을 쓰지 않는다면, 저놈들 사이에서 다시 험한 말 나왔을 때 누가 이를 막아주겠소?”

대가를 제시하지도 않고 우선 물건을 팔아넘긴 다음, 느닷없이 값을 내라 하는 코우지오니스였다. 소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쯤이야 이미 짐작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두 밀사는 갑자기 고향이 그리워졌다.

그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마사와 항에, 아주 공들여 각종 미사여구를 덧붙이기는 했지만 그 본질은 영수증에 지나지 않는 두 밀사의 글이 닿았다.

이는 꺽정이가 저의 패거리와 긴밀한 상의 끝에 내놓은 요구를 애써 우아하게 다듬은 것이었다.

‘에티오피아 국왕은 보시오.

내가 조금 힘을 써서 그대 나라의 우환 하나를 없애주었소. 사람 사이의 일은 모름지기 주고받는 게 확실해야 하니, 이제 그대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줄 때가 되었소.

듣기로 그대 나라에 근래 이곳저곳 오랑캐가 밀려들어와 처분이 곤란하다 들었소. 그들을 모조리 붙잡든, 아니면 그들을 꼬드겨 다른 오랑캐 붙잡아오라 하든 해서 바닷가로 데려오시오. 장차 노비로 삼아 운하를 만들게 할 것이요, 그 일이 끝나면 그들로 하여금 배를 끌게 할 터인즉.

다만 노비라 하더라도 부려먹으려면 새경은 주어야 하고, 또 우리가 노비를 데려가지 않으면 그대들 역시 손해를 보지 않겠소? 그러니 노비 값은 그만큼 헐하게 받겠소.

그리고 그대 나라에는 카흐와인가 하는 진기한 콩이 열리는 나무도 있다 들었소. 내가 모카에서 그것 우려낸 차 맛을 보았는데 제법 좋습디다. 그것도 내놓으시오.

콩만 내놓는 게 아니라, 묘목 채로 내놓으시오. 이왕이면 덤으로 그것 가꾸는 방도를 잘 아는 농사꾼들도 여럿 보내주면 고맙겠소. 풍토 다른 땅에 심어서 장사를 하려면, 그쪽이 더 낫지 않겠소?’

너무나 공평하여, 이 정도라면 자칫 마진도 남지 않을 법한, 아예 처음에 운을 떼지 않는 쪽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은 거래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꺽정이 쪽이 아니라 에티오피아 쪽에서 보았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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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국이 되어버린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에티오피아는 전통적으로 홍해 무역의 중계 거점으로서 번성하던 국가였습니다. 한때 에티오피아는 지금의 에리트레아뿐 아니라, 바다 건너 예멘까지 통치하기도 했고, 무함마드가 태어난 ‘코끼리의 해’에는 코끼리 부대를 대동한 에티오피아군이 메카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이슬람의 발흥으로 예멘 일대를 상실한 이후에도 에리트레아 해안을 통해 에티오피아는 유럽과의 교류를 제한적으로나마 이어나갔고, 16세기 초에는 포르투갈과 접촉하기도 했습니다. 포르투갈은 체급과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절대적 우위를 지니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를 상대하기 위해 우군을 필요로 했고, 에티오피아는 그런 면에서 이상적인 동맹이었지요.

그러나 이는 포르투갈의 인도양 진출을 막고자 하였던 오스만 투르크의 경계를 불러오게 됩니다. 이를 기민하게 감지한 아달(Adal) 술탄국은 오스만 측으로부터 화기를 들여와, 한때 자신의 종주국이었던 에티오피아를 공격했고, 이는 약 반세기에 걸친 긴 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아달 술탄국은 한때 에티오피아 고원까지 진출하였으나 결국 밀려났고, 이후 서로 상대의 영역을 초토화하는 소모전 양상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두 세력이 힘을 소진하는 사이, 반농반목 생활을 하는 오로모(Oromo) 인들이 북상하여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지요.

원 역사에서 에티오피아는 예수회와 포르투갈인들을 통해 유럽의 발달한 군사기술을 들여오려 했으나, 에티오피아의 유서 깊은 테와히도 정교회 측에서는 예수회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사와에서 포르투갈 세력이 외즈데미르 파샤에 의해 축출되고, 무슬림으로 위장하여 마사와를 드나드는 식으로 끈질기게 교류를 이어가던 예수회 역시 17세기 초에 추방당하면서, 오스만 투르크의 패권이 쇠락하기 전까지 에티오피아와 나머지 기독교 세계 사이의 연락은 크게 제한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유럽이 다시 에티오피아에 찾아왔을 때에는, 이전의 만남과 완전히 상황이 달라져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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