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65화 (165/259)

50. 글과 빛 (1)

개종한 오로모인 노예 몇 명과 함께 수에즈에서 술레이마니야에 도착한 수도사가, 다름아닌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베네치아 사람들 발등에도 불똥이 튀었다.

“라스카사스 그분을 대체 맘루크들이 어떻게 모셔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간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말을 조금만 일찍 해줄 수는 없었소? 아직도 귀가 멍멍할 지경이니, 원.”

한참 잘근잘근 씹히고 돌아온 꺽정이가 베네치아 사람 주스티아니에게 투덜대었다. 허나 그 남루한 수도사와 그 일행이, 누에바에스파냐 경영에 있어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와 선왕 카를로스 다음으로 영향력 크다 할 수 있는 라스카사스 본인일 줄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으므로 – 심지어 맘루크들 역시 잘 모르는 듯했다 – 미리 알 방도는 없었을 터였다.

라스카사스는 일개 수도사였지만, 국왕 직속 인도위원회(Consejo de Indias)보다도 더 누에바에스파냐 경영에 목소리 크다는 세간의 평이 있었다.

더구나 돈줄이 막힌 에스파냐 정부가, 어떻게든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콩키스타도르들의 엔코미엔다(Encomienda)를 더욱 축소하고 그들의 권리를 빼앗으려 하고 있었으므로, 평소 그들의 부덕함과 엔코미엔다 제도의 문제를 앞장서서 외치곤 했던 라스카사스의 권위는 지금보다도 더욱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스카사스는 여전히 바야돌리드 대학가의 작은 방에 세들어 살며 검소한 생활을 꾸려가고 있었고, 이곳 술레이마니야에 찾아올 때에도 누추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주스티아니라고 뒤통수가 아니 얼얼할 수 있을까.

“이제라도 로마에 사람을 보내어 교황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어떨지요?”

꺽정이와 함께 호되게 데였지만 그나마 먼저 정신 차린 이탁오가 한 마디 꺼냈다.

그 말마따나, 이미 보편교회 수장으로서의 지위를 이탈리아 연맹 및 교황령을 위해 휘두르고 있는 교황청이었으므로, 에티오피아에서 흑인 노예 들여오는 데 문제가 없다는 말 한 마디만 받아내면 될 일이었다.

흠이라면 딱 하나, 상대가 라스카사스라는 점이었다.

“교황청의 위엄을 사칭하는 것이 아니라, 숫제 교황 성하 본인을 여기 모셔오더라도 저이의 뜻을 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 어쩌자는 말이오? 이대로 저 스님 말대로 노비 들여오는 걸 없던 일로 하자고?”

“저희도 어지간해서는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적당히 협상을 했다면 모를까, 알렉산드리아에서 셰자데 바예지트가 그런 난리까지 쳤는데 감정이 고울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맘루크들은 이전보다도 일꾼 빌려주는 값을 훨씬 높게 부를 것이고, 그게 전부 우리 이탈리아 도시들의 부담으로 돌아오겠지요.”

그러면서 슬쩍 꺽정이 쪽을 보는 것이었다. 너희라면 뭔가 기똥찬 해법 하나쯤 또 꺼내지 않겠느냐 하는 은근한 기대를 담아.

있던 왕은 없애고 없던 왕자는 만들어낸 동방인들이었으니, 아예 허황된 기대도 아니었다. 지금껏 그렇게 좌충우돌하면서 쌓이고 쌓인 업보가, 맘루크들이 말과 글 몇 번으로 라스카사스 같은 거물을 이곳까지 데려올 수 있게끔 하는 결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때, 문이 발칵 열렸다.

“여기 계셨군요, 임 당수.”

반질반질한 머리에 햇빛이 번뜩이는 라스카사스였다. 어찌 이곳까지 찾아왔는가 물으려던 차, 라스카사스가 휙 뒤돌아 저의 길잡이에게 먼저 선뜻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나이 지긋한 고승이 제게 먼저 고개 숙인 것에 화들짝 놀란 앞잡이 도키치로도 저도 모르게 합장을 하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저의 ‘멀리 보는 대롱’ 발상을 비싸게 팔 심산으로 술레이마니야 저자를 돌아다니느라 라스카사스 소식을 미처 전해듣지 못하였던 도키치로가, 웬 말 안 통하는 스님이 손짓발짓으로 너희 큰어른 계신 곳 알려달라 하였으므로 거기 홀랑 넘어갔던 것이다.

“제가 왜 찾아왔는지는 잘 아시겠지요? 앞서는 당수께서 황급히 달아나시는 바람에 말을 마치지 못하였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마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뒤따라온 수사들이 스리슬쩍 창문들 앞에 자리 잡고 서서, 퇴로를 모두 막았다. 힘으로 따지면 꺽정이는 물론이요 이탁오도 밀쳐내고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늙은 라스카사스와 그를 따르는 수사들의 눈빛을 보니 어째 해쳤다가는 천하의 몹쓸 놈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결국 라스카사스의 입이 열리는 것을 그 누구도 막지 못하였다.

헌데 ‘회개하십시오!’로 시작할 줄 알았건만, 오히려 자책이 먼저 튀어나왔다.

“임 당수를 꾸짖기에 앞서, 먼저 이 부족한 사람이 범한 죄악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제가 임 당수께서 똑같은 죄를 범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도요···”

아직도 서쪽의 인도(아메리카)와 동쪽의 인도가 같지 않다는 의심이 아직 의심으로만 남아 있던 시절,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는 히스파니올라(쿠바) 섬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그는 그 땅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두 눈으로 보았다. 나머지 기독교 세계도 이것을 알아야만 했다. 알기만 하면, 어떻게 신앙의 이름으로 그것에 반대되는 일이 행해지는지를 깨닫는다면, 모두가 나서서 이를 멈추리라 믿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세상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라스카사스라는 사내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1537년의 교황 칙서 ‘지고하신 하느님께서는(Sublimis Deus)’에 의거하여, 서쪽과 남쪽의 모든 인도 사람들(아메리카 원주민)은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설령 이교도일지라도 자유와 사유재산권을 누리며, 이를 부인하는 자는 곧 인류의 대적(大敵) 사탄과 한편이라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라스카사스의 공헌이 컸다.

이어서 1542년에는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의 이름으로 엔코미엔다를 지닌 에스파냐인들이 인도인들을 학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들을 노예로 삼는 것도, 부리는 것도 금지되었고, 각지의 지방관들은 현지 인도인들이 학대받지 않도록 할 의무를 부여받았다.

그렇다면 누가 그 넓고도 넓은 농장을 경영할 것인가? 서인도 제도의 수익 좋은 사탕수수 밭은 누가 돌볼 것이며, 광막한 바닷속의 숨은 재보인 진주를 캐낼 것인가? 나날이 늘어가는 에스파냐의 빚을 그나마 갚게 해주는 신대륙의 금은은 또 누구의 손으로 대지 깊은 곳에서 날라올 것인가?

라스카사스는 말했다.

‘이미 우리에게는 노예를 부리는 법이 있습니다. 카스티야 땅의 노예들을 서인도로 보냅시다!’

라스카사스는 인도 사람들이 사악한 이교도라는 이유를 내세워 그들을 학대하는 것보다, 법의 보호를 받고 또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 해방될 수 있는 노예를 부리는 것이 훨씬 도덕적이고 정당하다 여겼다.

그러나 카스티야뿐 아니라 아라곤, 카탈루냐, 심지어 나바르나 포르투갈까지 다 합친다 한들 그만한 노예가 있을 리는 없었다. 카스티야에 사는 이들 중 노예는 고작해야 사람 열 명 중 하나 꼴이었으므로.

‘우리 땅의 노예가 부족하다면, 그 노예의 원산지인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리스토텔레스도,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어떤 인간들은 복종의 습성을 타고났음을 인정하였다. 순결하고 또 믿음에 기꺼이 귀의하는 인도인들보다는 신체적으로 뛰어나고 순종적인 흑인들을 부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렇게 떠들기만 했는데 모두가 다 받아들였다는 말이오? 설법도 한 삼십 년 하면 자연스레 이루어지나보구려.”

그렇게 설법만 하여 세상이 바뀌는 것이 이치라면, 조정이 억불(抑佛) 거두기를 바라며 대비의 마음 사는 데 열중한 조선국 보우는 퍽 헛수고를 한 셈이었다.

“하, 저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마침내 은총이 깃들어, 세상이 올바르게 되어가는 줄 알았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종을 곧 달콤한 무지에서 건져내시어 자신의 죄악을 직시하게 하셨습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서아프리카는 포르투갈의 것이었으므로, 그 해안에서 노예를 붙잡아 서인도에 넘기는 것은 포르투갈 사람들의 몫이었다.

어떻게 그들이 붙잡히는지, 그들의 자유를 빼앗고 저항의 의지를 꺾기 위해 어떤 잔학한 수법이 동원되는지, 그들이 어떻게 가축보다 못한 신세로 배에 실려 광막한 대양 너머로 보내지는지, 라스카사스는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였을 때, 라스카사스는 깨닫고야 말았다.

도덕이 승리하는 것은 오로지 이익이 약속될 때 뿐임을.

라스카사스의 울부짖음에 기꺼이 응하여 인도인들을 놓아준 엔코미엔다의 영주들. 그들은 선량함이 아니라 탐욕에 따랐을 뿐이었다. 이미 오랜 학대 끝에 인도인들의 수는 격감했고, 그들의 값은 치솟았으므로, 무한정 공급되는 흑인 노예가 더욱 수익성이 좋았다.

교황 칙서가 나오자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로스는 이를 받아들였고, 반발하는 이들이 저명한 석학 세풀베다(Juan Gines de Sepulveda)를 내세워 인도인들의 노예 상태를 옹호하였을 때에도 논쟁에서 라스카사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로써 라스카사스는 카를로스의 선량함을 믿게 되었다. 허나 곧 깨달은바, 카를로스의 선량함은 저 간사한 마키아벨리의 표현대로, 국왕으로서의 선량함일 뿐이었다. 그는 그저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막대한 권리를 독점하는 귀족들의 권한을 빼앗아 왕관 아래에 두기를 바랄 뿐이었고, 인도인들의 권익을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피 위에 세워진 귀족들의 황금탑을 빼앗는 데 있어 아주 유용한 명분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곳에 섰습니다. 적어도 서쪽에서 벌어진 잘못이 동쪽에서 똑같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님께서 별 생각 없이 찾아오신 것 아님은 알겠소. 헌데 이대로라면 스님 뒤에 있는 그 거지발싸개 같은 맘루크들에게 놀아나는 꼴 아니오?”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교도들 앞에서 기독교인들이 죄를 짓도록 내버려두는 것이야말로 좌시할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설령 그로 말미암아 저 맘루크들이 자신의 욕심을 차리게 된다 하더라도, 이는 노예를 붙잡아 부리는 악행을 지금보다도 더욱 만연케 하는 것에 비하면 사소한 일일 뿐입니다.

운하를 파기 위해 에티오피아 땅에서 노예를 데려온다면, 운하가 다 파인 뒤에는 어떻겠습니까? 개중 몇몇은 계속 운하에 목줄 매인 채 이 땅에서 목숨이 다하겠지요.

허나 그뿐이겠습니까? 운하가 다 파인 뒤에도 노예는 계속 들어올 것입니다. 두 믿음 사이에 평화가 깃들었으니, 이제는 어느 쪽도 접하지 못한 순진무구한 야만인들, 신앙을 접할 기회조차 없던 이들을 납치해 지중해 전역에서 노예로 부리겠지요! 한쪽에서는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모하메트(무함마드)와 알라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라스카사스는 이미 그것을 넘치도록 듣고 또 보았다. 흑인은 태생부터 저열하여 노예의 천성을 타고난 자들이라는 궤변. 심지어 흑인들은 노아의 죄악 가득한 둘째아들 함(Ham)의 자손이므로 그들을 노예로 삼는 것은 성경에 따르는 것이라는 신성모독까지.

그들이 성경을 가져오든,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인용하든, 결코 그 무엇도 서아프리카의 노예 해안에서,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누에바에스파냐의 은광에서 벌어지는 악행을 정당화할 수 없었다. 그것이 라스카사스가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갈 신념이었다.

“임 당수께는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방지할 수 있는 힘이 쥐어져 있습니다. 물론 당수께서 우리 신앙의 보호자를 자처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복음을 맞아들이지는 않으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동방의 그 철학에서는 모든 인간에게 선량함이 내재되어 있노라 주장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동방의 철학’ 이야기가 나오니, 그것이 에우로파 전역의 모든 대학에서 이야깃거리가 되는 데 일조한 바 있던 이탁오가 불편함에 뒤통수를 긁었다. (하필 앙리 2세의 죽음 때문에 명성이 자자해진 노스트라다무스와 미리 출판 계약을 맺어둔 것이 화근이었다. 아직 원고가 도착하려면 몇 년이나 남았음에도, 3쇄까지 예정되어 있다 하였던가.)

“그러니 다시 한번 간곡히 청원드립니다. 죄악이 뿌리를 내리기 전 뽑아주십시오.”

어느새 갈라진 라스카사스의 목소리가 마침내 그치고,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설교와 설득 사이 그 무언가라 할 만한 라스카사스의 이야기는 해가 떨어질 때까지 이어졌다.

이탁오는 문득, 맹자를 맞이한 모든 군주들이 그 말에 반박하다가도 종국에는 찬동하였던 것이 어쩌면 그저 맹자가 입을 다물게 하려는 뜻은 아니었을까, 그런 무엄한 생각을 품게 되었다.

별 도움 안 되는 그런 생각을 고개 흔들어 떨쳐내곤, 어째 생각 가득한 –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 꺽정이에게 물었다.

“내일 또 찾아오겠다 하였습니다.”

겨우 식은 땅 위로, 짭짤한 바다바람이 불어왔다. 저들이 머무는 집 옥상에서 잠시 먼 하늘을 보던 꺽정이가 고개 돌려 대꾸했다.

“노스님이 참 원기도 왕성하오.”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더욱 곤란합니다. 세상 이치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운하가 뚫리다가 막히기라도 하기를 오매불망 바라는 포르투갈이 가장 먼저 라스카사스를 기리고 나설 것이다.

어쨌든 라스카사스 덕분에 저들의 노예무역이 큰 이익을 올리게 된 것도 사실이었으니, 어찌 그를 진심으로 숭모하지 않겠는가.

그들 뒤에서 사다리 타는 소리가 나더니, 엘리자베스의 붉은 머리칼이 드러났다.

“베네치아 사람들하고 거칠게나마 계산을 해 보았어요. 바깥에서 노동력을 들여오지 않는다면 운하 공사는 몇십 년은 걸릴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 정도요?”

“이 일대에서 일꾼을 구해 부린다면, 그러니까 숙식을 제공하고 노임을 제대로는 아니더라도 어쩄든 조금씩 주면서 부린다면 빠듯하게나마 감당 가능한 비용이 들 것이라 하더군요.”

“그러면 뭐,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저 까무잡잡한 족속들은 돌려보내고 맘루크 놈들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은 어떻겠소?”

꺽정이가 웬일로 남에게 굽히고 들어가자는 소리를 하니, 엘리자베스와 이탁오 모두 눈이 크게 뜨였다.

“방금 말씀드린 건, 어디까지나 가운데서 비용이 더 발생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에요. 맘루크들이 자신의 영민들이 우리에게 직고용되는 것을 허용할까요? 분명 가운데서 농간을 더 부리려 하겠지요. 우리가 굴복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더욱 기고만장해질 테고요.“

“그렇지만···”

라스카사스는 노예제의 부도덕함을 설파하면서,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꺽정이는 개중 묘하게 자신의 심금 울리는 대목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조선국에서 내 사형과 장모님, 장인어른, 그리고 서림이까지 모아두고 천지신명께 맹세하였소. 귀천의 분별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그건 조선국이고, 여기는 만리타향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하지만 내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지 않겠소?”

새삼스럽게, 눈앞의 두 사람 모두 저와는 다른 세상에서 태어나 자랐음을 떠올리는 꺽정이였다.

백정이라는 것은, 사실 때로는 노비보다도 더 바닥에 있는 몸이었다. 노비야 나름 귀한 가산(家産)이니 양반댁의 보살핌을 받지만, 백정은 당장 조선국에서 하루아침에 씨가 말라도 그 누구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고작해야 소 잡기가 조금 어려워지고, 버들고리 값이 조금 오르는 것을 아쉬워할 뿐이리라.

그리고 라스카사스가 말하는 이 땅의 노비 다스리는 법도는, 그것보다도 더 악랄하고 잔악하였다. 저의 이름 내걸고 그러한 일이 이 땅에서 벌어지는 것. 예로부터 어지간한 악행은 스스럼없이 범해온 꺽정이였지만, 그것만은 어째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저 검은 사람들을 노비로 부리지 않는다면 운하 파기가 난망하고, 노비로 부리자니 영 켕기고. 이대로 꼬리 내리자니 그 또한 아니 될 일이라 하고.”

꺽정이는 애먼 머리만 북북 긁었다.

그때 저 아래에서 곡소리가 났다.

“아이고, 당수! 저 좀 봐 주십시오!”

“되었다, 이놈아! 너는 오늘 밤은 잠 다 잤으니 그리 알거라!”

엉뚱한 사람 길잡이 노릇한 죄로, 꺽정이의 ‘각별한 단련’을 받고 있던 도키치로가 아래서 앓는 소리를 내었다.

“내가 무슨 멍석을 만 것도, 매질을 한 것도 아니고, 다 네놈한테 득 되는 일만 시키고 있지 않으냐? 감지덕지는 못할 망정 뭔 우는 소리냐.”

흑의군 단련은 모름지기 기골의 장대함을 키우고 단단한 몸을 만드는 데 그 뜻이 있었으니, 꺽정이와 이지함의 발상과 청석골 겪은 흑의군들의 다년간 경험 덕에 나름 무공(武功)이라 칭할 만한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허나 중원의 그 어떤 무인도, 흑의영 단련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차라리 무당산 들어가 무작정 기연을 구하겠노라 할 만큼 무지막지하기도 하였다.

“이러다 골병 들겠습니다!”

“아직 스물도 안 된 놈이 뭔 골병이냐, 골병은!”

골병은 몰라도 내일 아침 일어나면 – 일어날 수만 있다면 – 온몸의 힘줄에 알이 박여 목 한 번 까딱하기도 어려울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꺽정이 낯빛이 평소보다 조금 부드러워져 있던 것을 깨달은 도키치로는, 이때다 싶어 온 힘을 다해 대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부하인데, 이렇게 노비처럼 부리는 게 어딨습니까?”

“너처럼 잘 먹고 잘 입는 노비가 어딨다고 그러냐?”

“짐꾼이나 머슴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마구잡이로 부리면 다들 도망갈 겝니다!”

“하! 여기서 도망을 하면 네가 어디로 갈 것이냐? 잔말 말고 도로 엎드리기나 해라.”

그러다가 잠깐 멈칫 하였다.

“야, 도키치로야!”

그랬더니 은근슬쩍 엎드려 있다 일어나면서 몸 몇 번 풀고는 대답했다.

“예, 당수?”

“방금 전에 했던 말 다시 읊어보거라.”

“에, 그러니까··· 짐꾼이나 머슴이라고 하더라도···”

“그렇지, 흐흐! 그러면 되겠어!”

다행히도 꺽정이는 뭔 못된 생각을 품었는지, 도키치로 보고 도로 엎드리라는 말은 안 하였다.

졸지에 유구국에서 벌이려는 사업 – 일본국 사람들 꼬셔와 일꾼으로 싸게 부려먹기 - 으로 인해 돌아오자마자 거하게 책 잡힐 위험에 처하였던 서림은, 저도 모르는 사이 도키치로 덕분에 곤경을 면하게 되었다.

“스님 말씀을 듣고 보니, 이 땅에서 노비를 부리는 법도가 그토록 가혹하다면 함부로 누굴 데려다 노비로 삼아서는 안 될 일이겠소.”

다음날 아침, 도키치로의 하품 소리 및 뒤이은 비명과 함께 일어난 꺽정이는 바로 저의 일행과 베네치아 상인들, 그리고 라스카사스를 모두 불러모았다.

“오오, 참으로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나는 우리 조선국에서 노비 부리는 것만 생각하고 저 검은 족속들을 일손으로 부려먹게 할 심산이었소. 헌데 이 일대의 사람들이 그토록 가혹하게 노비를 대한다고 하니 마음이 바뀌었소이다.”

디오시온의 노비가 어떤 법의 보호를 받는지는 몰라도, 말하는 것을 보면 얼추 카스티야의 노예들과 같은 모양이었다. 라스카사스가 흑인 노예를 들일 것을 주장하였을 때 했던 것과 같은 착각이었으므로, 그는 금방 눈앞의 동방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이 땅에서 노비를 부리는 법도가 그처럼 가혹하다면, 노비 대신 다른 방도로 사람을 부리면 될 일 아니겠소?”

“예? 그게 무슨···”

“세상에 노비만 있나? 머슴도 있지. 어차피 그 까무잡잡한 놈들은 이곳까지 끌려온 이상 밥벌이할 길도 없지 않소. 그러니 당초 계획한 대로 새경 주겠다 하면서 꼬드기면 그만이오. 자매문기(自賣文記, 자신을 노비로 파는 문기) 대신에 머슴살이 하겠노라 약조하는 문기를 쓰게 하면 될 일이지.

저들 밥값에, 뱃삯까지 다 갚으라 하면서 말이오.”

조선의 노비문기는 수촌(手寸, 왼손 중지 첫째와 둘째 마디 사이를 그린 것, 천민의 서명)으로써 약조하게 하니, 살갗의 색깔이며 마음속 믿음이며 일체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 어찌 훌륭한 제도가 아니겠는가?

하물며 노비 대신 머슴으로 삼는다 하면, 신분이 천민도 아니요 양민인즉 하등 문제될 바가 없었다. 다만 그 약조를 파기하려면 엄청난 재산이 필요할 뿐.

그러한 제도 있노라 하고 이탁오가 꺽정이 말을 막 다 옮길 무렵.

“오오, 그런 묘안이 있었군요!”

탄성이 엉뚱한 쪽에서 튀어나왔다. 어느새 소문을 듣고 몰려든 베네치아 상인들 쪽이었다.

“그렇지! 꼭 노예로 삼아야만 사람을 값싸게 부릴 수 있는 것은 아니잖은가? 흐흐.”

“저 방도라면 기독교인이라 해도 노예, 아차차, 무어라 했더라? 무스모? 모숨? 하여간 그것으로 부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지. 굳이 노예라는, 흠흠, 죄악 가득한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도 일손을 구할 수 있다는 게 중하지. 얼른 본토에 보고하도록 하세. 동방의 뛰어난 제도를 우리가 가장 먼저 시급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암, 저런 제도라면 교황청의 인가도 쉽게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당수님 말씀마따나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지.”

돌이켜보면, 이미 비슷한 제도가 알음알음 기독교 세계 곳곳에서 운영되고 있었다.

당장 기독교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말타의 구호기사단조차,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빚쟁이들을 데려와 변제를 조건으로 노잡이로 부려먹고 있지 않던가. 다만 관습이나 필요악이라는 이름 하에 암암리에 유지되는 편법일 뿐이어서, 다른 곳에 떳떳하게 적용하지 못할 뿐.

상상조차 불허할 만큼 머나먼 미래의 일도 아니요, 오히려 이렇게 손으로 잡힐 만큼 가까운 발상을 들었으므로, 베네치아 상인들은 더욱 탄복하며 이것이야말로 명안이라고 찬사 보내길 그치지 않았다.

더구나 실제야 어찌 되었든 겉으로는 로마 교황청과도, 에스파냐 상왕 카를로스와도 사이 좋은 코우지오니스 경의 말씀 아니던가?

이만하면 라스카사스도 만족할 만한 타협안이라 생각하며, 베네치아 사람들도 동의를 구했다. 정작 사람의 양심에 대한 믿음은 끝내 버리지 못하고 사람의 뻔뻔함을 간과하는 버릇도 끝내 고치지 못한 라스카사스 본인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지만.

“듣자하니 노예로 부리지 않으면서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라 생각합니다. 양해해 주심이 어떠할지요?”

물론 라스카사스가 이 자리에서 무어라 답하든, 저 동방의 선진 제도는 곧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전해질 것이었다. 이름이야, 계약직 하인(Indentured servant)이 되든 다른 직관적인 무언가가 되든, 본질은 그대로일 테다.

한참의 정적이 흐른 뒤, 마침내 라스카사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심 저들의 몰양심함을 꾸짖지 않을까, 제 발 저려 걱정하던 베네치아인들의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 나왔다.

“그··· 머슴이라는 제도에 대해 더 알고 싶구려. 그것을 서인도 제도와 그 너머에도 적용할 수 있겠소?”

불똥이 지구 반대편, 아메리카 대륙으로 튀어나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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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는 유색인종의 권익을 위해 평생 투쟁하였지만, 아메리카 대륙에 흑인 노예가 들어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오명을 오랜 세월 동안 써 왔습니다. 그가 아랫돌 빼어 윗돌 괴는 식의 어리석은 해법으로 흑인 노예제를 아메리카에 도입했다는 통념이 퍼지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라스카사스 본인이 평생 그렇게 여기면서 자책하고 반성하는 삶을 살았고, <(서)인도 제도의 역사>, <(서)인도의 파멸에 관한 소고> 등 여러 저작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가감없이 밝혔기 때문입니다. 만년의 대작 <(서)인도 제도의 역사>에서 라스카사스는 본인에 대해 이렇게 서술합니다.

“그 성직자[라스카사스 본인]가 제안한 것, 즉 인도인[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흑인을 데려오자는 것은, 그 어떤 면에서도 훌륭한 해법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무지와 한때의 선량한 의도가, 신의 심판 앞에서 합당한 면책사유가 되리라고는 도저히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당시의 철학과 신학은 – 물론 남미의 참상을 접하지 않은 이들 중심으로 – 흑인 노예제를 옹호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제공할 수 있었고, 라스카사스 본인이 없었더라도 전염병과 가혹한 처우로 급감하는 남미 원주민 인구는 결국 흑인 노예의 유입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았으리라 볼 수 있겠습니다.

1484년 태어나 1502년 그의 아버지와 함께 이스파니올라(쿠바)의 1세대 개척민이 된 라스카사스는, 직접 식민지의 참상을 보고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해결책은, 자유민들을 중심으로 한 식민지 개척 모델을 성공시킴으로써 가혹한 노예제 노동을 종식시킨다는 것이었는데, 여러 문제가 겹쳐 이는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라스카사스는 낙담하였으나,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퍼뜨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게 되지요. 때마침 그가 몸담은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원주민 개종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고, 이는 그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에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후 1543년, 흔히 ‘신법(新法, leyes neuvas)’이라 지칭되는 원주민 권익 보호 법률이 선포되면서 라스카사스 역시 많은 옹호자와 적을 두게 됩니다. 이 법은 그 동안 엔코미엔다(Encomienda), 즉 정복한 영토 및 그 땅의 주민에 대해 통치권을 완전히 위탁받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제도로 특혜를 누렸던 콩키스타도르들과 그 후원자들의 이익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지요. 이러한 갈등은 1550년의 유명한 바야돌리드 논쟁으로 이어졌고, 비록 여기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는 못했지만 라스카사스의 명성과 영향력은 크게 높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비례하여 흑인노예 무역도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라스카사스 본인은 이러한 영향력을 사적으로 활용하는 대신, 검소한 생활을 하며 저술활동을 통해 자신의 관점을 널리 퍼뜨리는데 주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라스카사스는 노예무역의 실무를 맡고 있던 포르투갈 측과 여러모로 접촉하게 되었고, 곧 흑인 노예무역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된 것으로 전합니다. 신대륙의 흑인 노예제는, 라스카사스가 어린 시절 카스티야에서의 경험으로 알았던 것보다 훨씬 비인간적이었고, (그의 관점에서는) 비기독교적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결국 흑인 노예무역의 대안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고, 그의 글 속에 담긴 누에바 에스파냐의 참상은 그대로 영국과 네덜란드로 넘어가 反스페인 선전물(‘검은 전설Black Legend’)로 쓰이게 됩니다 (Clayton, 2009. “Bartolomé de las Casas and the African Slave Trade.” History Compass 7(6); Jablonsky, 1997. “Ham’s Vicious Race: Slavery and John Milton.” Studies in English Literature, 1500-1900 37(1)).

이름만 자유민이고 실제로는 노예와 다름없는 방식으로 기독교인을 부린다는 아이디어는 원 역사의 유럽에 이미 조금씩 존재하고 있었고, 특히 아프리카 노예를 구하기 어려웠지만 대신 아일랜드라는 좋은(?) 노동력 공급원이 있던 17세기 영국에서 본격적으로 쓰이게 됩니다. 흔히 계약직 하인(Indentured Servitude)이라 불리는 이 제도는, 북아메리카와 호주 등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노동인력을 투입할 수 없던 지역을 개척하는 데 쓰였지요. 즉 강제 또는 반강제로 빚을 씌우고, 그 빚을 모두 변제할 때까지 인신의 자유를 구속한 채 노동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17세기 뉴 잉글랜드에 유입된 유럽 인구의 절반 가량이 이러한 ‘노예 아닌 노예’ 상태였다는 추정도 있지요. 이후 이 제도는 19세기까지 이어져, 인도와 동아시아의 값싼 노동력을 나머지 세계 곳곳으로 데려가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법적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어쨌든 ‘계약직 하인’ 제도는 말 그대로 계약에 의거한 것이었기 때문에, 빚을 모두 변제한다는 등의 방법으로 자유를 되찾을 가능성이 항상 존재했습니다. 또한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전제 하에) 자유인으로서의 권리 일부는 보장되었고, 경우에 따라 재산을 축적하거나 교육을 받을 수도 있었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인’ 신분은 자식 대에까지 세습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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