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글과 빛 (2)
그 머슴이라는 것이 같은 기독교인도 사실상 노예로 부릴 수 있게 해주는 용한 제도라고 저들끼리 좋아하며 떠들던 베네치아 상인들은, 정작 라스카사스 본인이 뜨악스러워하거나 미심쩍어하는 대신 선뜻 받아들여버리자 오히려 당황하였다.
“’무언가 계획대로 되어간다면 더욱 조심하라. 그것은 계획이 이미 틀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니.’ 우리 베네치아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지혜 중 하나입니다.”
“걱정도 많소.”
라스카사스에게 붙잡혀 또 여러 시진 동안 심문 같은 대화 나누고 나온 꺽정이가, 앞길 가로막으며 팔자 좋은 걱정이나 늘어놓는 베네치아 사람 주스티아니에게 툴툴대었다.
그나마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탁오와 엘리자베스가 맡았다. ‘머슴’이라는 말이 특이할 뿐, 비슷하게 사람 부려먹는 제도는 명나라에도 있었고, 베네치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도 금방 자신이 아는 유럽의 틀 안에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꺽정이는 자신이 발단 던진 이야기에서 겉돌며 팔짱이나 끼고 있다가 이렇게 바람 쐬러 나온 차였다.
“조심해서 손해볼 것은 없지 않습니까? 이 ‘머슴’ 제도를 저희보다 먼저 들은 경쟁자도 없고요.”
아직 ‘동인도회사’를 제대로 된 경쟁자로 여기지 않던 베네치아 상인들이었다.
“우리 베네치아의 배가 닿는 곳이면 어디든, 신세 고쳐보고자 기웃거리는 상것들이 넘쳐납니다. 그들에게 뱃삯이라며 빚을 씌워 어디 멀리 보내버린다면··· 흐흐, 그 누구도 살아서 돌아와 증언을 하지는 못할 테고, 우리는 일손 팔아넘기며 신대륙의 황금을 쏠쏠히 챙기고.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셀림이 우애 좋지 못한 아우와 생이별하며 선물이랍시고 붙여준, 조선말 할 줄 아는 투르크 역관 테르취만(통역가) 알리가 저의 새 주군 바예지트는 버려두고 주스티아니 곁에서 열심히 통변을 해주었다. 필시 라틴어나 아랍어보다 더 지중해 일대에서 잘 통하는 두카트 어(語)로 꼬드긴 것이리라.
“그러면 얼른 가서 그 좋은 장사 할 궁리나 하시오. 왜 내 앞에서 얼쩡대고 있소?”
“그야 부탁드리고자 하는 바가 있어서지요. 이처럼 이 제도가 가져올 이익이 막대한 만큼, 신중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저희로서는 도저히 라스카사스 수사께서 여기에 찬동하신 이유를 알 수가 없더군요.
라스카사스 수사께서 내일모레 바로 이곳 술레이마니야를 떠나지는 않으실 테니, 그사이 그분의 진짜 의도를 파헤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쩌면 누에바에스파냐나 페루의 부왕보다도 더 서인도 경영에 입김 셀 수도 있는 사람이 라스카사스였다. 그 입김으로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대신 흑인 노예무역 반대처럼 아예 실현 가능성이 없던 주장이나 펼치고 있었으니 티가 나지 않았을 뿐.
그러니 이 ‘머슴’ 제도를 법으로 정하는 데 있어, 라스카사스가 어떤 생각과 말로써 이를 제기하고 옹호할 것인지 미리 아는 것은 베네치아 입장에서도 중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베네치아가 에스파냐 사람들에게 골탕먹은 것이 한두 해여야지요.”
베네치아 사람들이 에스파냐, 아니, 에우로파 전체를 골탕먹인 것은 그보다도 더 이력이 길었으나, 그러한 사실을 쉽게 망각할 수 있는 사고의 유연함이 없다면 베네치아의 상인을 자칭할 수 없을 터였다.
“베네치아 사람들이 악덕을 행하는 것을 보면, 다른 에우로파 사람들은 그저 베네치아 사람이 베네치아스럽게 행동한다 여기고 넘어갈 뿐입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옛 시인이 노래했듯, ‘죄 짓는 것을 허용받은 자는 죄를 덜 짓는(Cui peccare licet, peccat minus)’ 법이지요.
뒤집어 말하면, 라스카사스 저분처럼 선량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한 번의 실수로 죄를 짓게 되면 파장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겠지요. 그러니 어찌 저희가 가만 있겠습니까? 마침 임 당수처럼 어디든 불쑥 들어가 물어보기에 적당한 사람도 옆에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꺽정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저희는 다른 인색한 에우로파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하하. 이것을 조선 말로 ‘인정(人情)’이라 칭한다는데, 참으로 좋은 말이 아닐 수 없더군요.”
사람 사이의 우정과 호의란 것도 결국에는 두카트로 환산된다는 뜻이니, 어찌 동방의 지혜가 아니겠는가? 주스티아니가 씩 웃으며, 주머니 안쪽의 번뜩이는 금화가 슬쩍 보이게 하면서 그것을 꺽정이 손에 올려주었다.
“걱정 마십시오. 굳이 흥정할 필요도 없을 만한 양이니까요. 저희에게 라스카사스 수사의 심중을 알려주신다면 이것의 갑절만큼을 더 드리겠습니다.”
별 희한한 걱정도 다 한다 싶었지만, 준다는 금을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제 발로 나온 방에 제 발로 돌아가 물음 하나 툭 던지고 돌아오면 그만일 터.
그러므로 더 길게 따져묻는 대신, 주머니를 슥 챙겨넣고 다녀오겠노라 하였다.
방에 슬쩍 고개 들이밀어보니, 라스카사스는 온데간데없고 이탁오와 ‘리즈’ 둘이서만 있었는데, 그 모습이 세상사 논하는 선비 두 사람 같기도 하고 뭔가 흉험한 작당을 하는 두 악한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밀회하는 정인(情人) 같기도 하여 그냥 발길을 돌렸다.
“뭐, 이미 황금은 받았으니 하루쯤 허비한다 하여 저들이 무어라 할까.”
주스티아니는 ‘인정’이라는 조선말은 알면서, ‘고양이더러 어물전 지키라 한다’는 속담은 모르는 듯하였다. 이미 두둑한 두카트 주머니는 꺽정이 손에 들어왔으니, 하루이틀 뜸 들인다 하여 꺽정이가 아쉬울 것은 없었다.
그런데 저녁이 되도록 이탁오도, 엘리자베스도 거처에서 나오지 않고, 라스카사스도 볼 일 다 보았다는 양, 자신이 데려온 수도사들과 개종한 노예들과 함께 어디 다른 데 틀어박혀 고개를 내밀지 않았다.
결국 빈둥대기도 질린 꺽정이는 해 떨어질 무렵 도로 몸을 일으켜 나왔다.
“이보쇼, 재미 좋소?”
두 사람 말소리는 들려오는데, 그것이 남녀간 콩닥거리는 소리인지 공자왈 플라톤왈 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이지요. 조만간 떠나야 하니 지금 흉금 터놓고 이야기 아니하면 언제 또 나누겠습니까.”
“흉금 터놓는다? 옷고름 푼 게 아니고?”
슬쩍 고개 들이밀어 보니, 놀랍게도 흉금은 정말 말로만 터놓았는지 이탁오와 엘리자베스 모두 의관이 멀쩡하였다.
서화담 선생 아래서 한창 글 배울 때, 대체 어떤 숙맥 같은 남녀가 ‘관저(關雎)’ 시에 나오는 것마냥 거문고 타고 북이나 치며 (琴瑟友之 鐘鼓樂之) 노느냐고 비꼰 적이 있었는데, 이제 보니 정말 그렇게 사귀는 남녀도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사귀는 사이는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더구나 리즈 저이가 어디 얼굴로 사내 사귈 만한 사람도 아니고요.”
그랬더니 뒤에서 헛소리 말라며 베개인지 방석인지 싶은 것 하나가 날아온다.
내가 틀린 말 했냐는 이탁오와, 아무리 그래도 그게 본인 앞에서 할 소리냐 하는 엘리자베스와, 투닥거리다가도 어느새 사람의 미(美)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로 넘어가는 꼬리대가리 없는 이야기에 질색한 꺽정이는 제 발로 다시 걸어나왔다.
다행인지 아닌지, 때마침 저 멀리 골목길 초입에서 도키치로 녀석과 함께 얼쩡거리는 테르취만 알리가 보였다. 보나마나 도키치로가 저의 대롱 장사에 끌어들여, 일부 떼어주겠노라 하고 통변으로 부리는 것이리라.
대체 하루에 몇 탕을 뛰는 것인지는 몰라도, 황금 욕심 가득한 게 참으로 민주당 놈팽이들과 어울리는 자가 아닐 수 없었다.
“어어, 당수, 여기 이 사람은 제가 이득 나눠갖기로 약조하고 이미 빌렸습니다.”
어제의 훈육이 다소 부족하였는지, 이제는 대들기도 할 줄 아는 도키치로였다.
“내가 더 큰 이득을 약조하면 될 일 아니냐? 이보쇼, 알리. 나를 좀 따라와야겠소. 순순히 따라오면 사지 멀쩡하게 오늘 밤 잠들 수 있도록 해주리다.”
그 어떤 황금보다도 값진 것이 목숨 아니겠는가. 알리 녀석은 일말의 고민 없이 꺽정이 옆에 붙었다.
다행히도 그 뒤로 라스카사스 찾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들이 머물던 몇 달 사이 마을에서 이제 읍(邑) 하나 칭할 만한 규모가 된 술레이마니야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천주교 스님이 흔하지는 않았으므로 조금만 수소문해도 금방 그 머무는 곳을 알아낼 수 있던 것이다.
“필시 그 ‘모숨(머슴)’을 두고 묻고자 하는 바가 있어 찾아오셨겠군요.”
“역시 스님들은 믿는 바가 무엇이건 신통력이 있나 보오.”
혹시 저의 사형 병해처럼 하늘 나는 술법도 부리느냐 물으려던 차, 라스카사스가 담담하게 그 말을 끊었다.
“합리적 추론일 뿐입니다. 베네치아 사람들이 제 면전에서 그토록 모숨 제도에 열광하는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은근히 저를 압박하기 위한 뜻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오히려 제가 덜컥 찬동해버렸으니, 어찌 당황하지 않았을까요. 직접 묻기는 무엇하니 돈 림을 부추겼겠지요.“
“딱 들어맞는 것을 보니 신통력 맞는 것 같은데. 여하간 그 물음 물으려 온 것 맞는데, 답을 구할 수 있겠소?”
라스카사스는 마치 마음속 실타래를 푸는 양, 꺽정이 말에 바로 대답하는 대신 한참 창문 밖의 바다와 달을 보았다.
꺽정이가 알리 옆구리를 찔러 닦달하게 시키려던 차.
“요새 프란치아(프랑스)의 문필가들이 새로운 뜻을 부여해 쓰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이라는 말이지요.”
라스카사스의 말을 옮기다가, 막판에 얼버무리는 테르취만 알리였다.
“통변이 시원찮아, 그 씨위 어쩌고 하신 말씀은 못 옮겼소. 무슨 뜻으로 그리 말씀하신 것이오?”
“모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 같은 에스파냐 안에서도 널리 쓰이지는 않는 말이니까요. 허나 저는 그 단어를 듣자마자, 그간 신대륙에서 제가 행하려던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원주민들이 참된 신앙을 받아들여, 무지의 고통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곧 밝혀진바, 그들이 신앙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살갗의 색에 따라, 혀 위에 감도는 말의 종류에 따라, 그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이 참된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달라진 점은, 그들 발목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지의 족쇄에서 그들의 조상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금속, 철로 만든 족쇄로 바뀐 것뿐이었다.
“제가 바랐던 것은, 그리고 주님께 맹세코 지금도 바라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인간의 육신과 정신을 지닌 모든 존재가 같은 인간으로서, 자유와 권리를 누리며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이지요.
성직자로서의 저는, 그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신앙임을 외칩니다. 그러나 에스파냐로 돌아온 뒤 여러 해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들은 뒤, 역사가이자 지식인으로서의 저는, 신앙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조심스레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게 무어요?”
“앞서 말씀드린 그것입니다. 야만으로부터 벗어나, 더 좋은 상태로 나아가는 것.”
“여전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소. 더 좋다는 게 무어요?”
“그것은, 말하지 못하였던 것을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생기고, 그것을 말할 수 있는 무대가 생기며, 말한 것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도구와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힘 없는 자. 가진 것은 사람의 언어와 지성뿐인 자들에게 조금은 더 상냥하고 관대하며, 몽둥이 대신 설득이, 창칼 대신 서책이 앞서는 세상.
어린아이는 두려움도, 좌절도 없이 자신이 되고자 하는 어른의 모습을 말할 수 있고, 노인은 자신이 그 그늘 아래 앉지 못할 묘목을 후대 위해 거리낌 없이 심는 세상.
그런 세상이 하루아침에 오지는 못하겠지만, 올바른 방향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걸어나가다 보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그러한 희망만은 인간에게 허락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차마 말하지 못하여 폭력과 인습에 맡겨져 있던 어두운 구석에 등불을 비추고, 그곳에 갇혀 있던 영혼들을 구해내며, 이로써 우리가 차마 더 발전하였다고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어제보다는 낫다’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머슴이 노비보다는 좋다는 것이오?”
깐깐한 노스님 향해 꺽정이가 물으니, 날카로운 웃음과 함께 답변이 돌아왔다.
“노예제와 마찬가지로 그 머슴 제도 역시, 언제든 타락하고 변질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바닷가에 우리와 함께 있는 베네치아 사람들도, 그리고 곧 그들의 서신을 받아볼 에우로파 사람들도, 어찌하면 제도를 뒤틀어 더 많은 이들의 발목에 노예 아닌 노예의 질곡을 채울지를 고민하겠지요.”
“그러면 머슴이나 노비나 똑같다는 말이오? 대체 배운 사람들은 왜 이리 말을 꼬는지.”
“하하, 그건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 늙다 보니, 그리고 지은 죄가 많다 보니, 구차한 언변만 늘더군요.”
겸양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상처 가득한 말이었다. 허나 라스카사스는 그런 겸양 속의 아픔은 밀쳐내고 저의 생각을 토해내었다.
“모든 제도는 타락하고, 부패하며, 언젠가 무너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저의 일생에 걸쳐 겪은 일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어떤 제도는 다른 제도보다 타락의 위험이 적고, 부패하기 전까지 더 많은 행복을 사람에게 베풀어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깔고 무너지는 대신 스스로 조용히 사라지기도, 더 나은 씨앗을 뿌리고 썩어문드러지기도 하지요. 이렇게 더 나은 것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입니다.”
또 그 ‘씨위’ 어쩌고 운운하는 라스카사스의 말에, 꺽정이가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그러니까, 노비보다는 머슴이 그런 면에서 덜 나쁘다?”
“그렇습니다. 계약이라는 것은 같은 사람 사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지요. 나귀에게 화물 운송을 계약하고, 닭에게 달걀 생산을 의뢰하는 그런 계약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그저 다른 색의 살갗을 지녔다는 이유로 사람을 노예로 삼아버린다면, 그 살갗의 색을 바꾸거나 노예를 사고파는 이들 모두의 마음을 돌리기 전까지는 노예를 해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계약은, 언제든 그 당사자도, 또 법률을 만들고 집행하는 이들도 관여하여 바꿀 수도, 물릴 수도 있지요.
그러므로 저는 여기에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굳이 더 반박하기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현실을 위하여 어떻게 이 새로운 제도, 노예제만큼 악랄하고 또 악덕을 촉진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더 많은 개선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이 제도를 세상에 퍼뜨릴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종일 유지하나 싶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라스카사스가 말을 이어갔다.
“대체 그 말씀을 어떻게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옮겨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구려.”
“그건 어쩔 수 없지요. 사람이 노력하여 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좋게 바꾸어나간다는 발상이,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는 없으니까요.”
당장 베네치아 사람들도, 개중 지독한 인문주의자로 소문한 이가 아니고서는 비슷하게들 생각할 것이다.
행운이라는 잔학한 여제가 다스리는 이 세상에서는, 누구든 저 높은 곳으로 들어올려질 수 있고, 언제든 다시 밑바닥에 메다꽂힐 수 있다. 규칙 없음만이 규칙인 이러한 세상에 규칙과 질서를 부여하려는 것은 바보나 할 생각. 그럴 힘이 있다면 차라리 자신과 가문을 위하여, 올라갈 때는 더 높이 오를 수 있도록, 떨어질 때는 덜 낮은 곳에 떨어질 수 있도록 쏟아야 하리라.
당장 바야돌리드에서의 논쟁에서, 자신을 설득하려던 수많은 사람들도 몰래 제게 찾아와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던가.
이 혼란과 악덕 가득한 세상에서 누군가는 노예가 되어야 하며, 다만 인도 사람들(아메리카 원주민)이 거기에 들 뿐이라고.
그렇게 다시 옛 생각에 빠져들었던 라스카사스에게, 당돌한 말이 툭 던져졌다.
“스님, 들어보시오. 그리 말씀하시니 떠오른 것인데, 사실 내가 조선국에서 하던 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소이다.”
그리 생각하니 조금은 라스카사스의 복잡한 논변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꺽정이는 자신이 조선국에서 하였던 일이나 라스카사스가 하려는 일이나, 결국 그 도(道)는 똑같이 않느냐며 – 그런 이야기라면 저도 언제든 베네치아 사람들 앞에서 세련되지 못하게나마 주워섬길 수 있었다 – 조선에서 지난 몇 년간 벌어졌던 일을 소략하게 늘어놓았다.
“천한 사람이 없는 나라, 사람이 자신의 배움으로 인해 화를 당하지 않는 나라, 그 어떤 법도도 때에 따라 고칠 수 있는 나라라··· 정말 그런 나라를 만들고 계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다 만들었다곤 못하겠소. 내가 이렇게 서쪽으로 넘어온 것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직 모두 이루기에는 때가 무르익지 않은 듯해서 그런 것도 있고. 하지만 그런 나라 만들려고 당수 노릇 하는 건 맞소이다.”
가벼운 웃음이 꺽정이를 맞이한다.
“과연. 그토록 자신만만하셨으니 에우로파 땅에서도 거침없이 그토록 활보할 수 있으셨겠군요. 그 용기가 부럽습니다.”
저의 도둑놈 심보를 용기라 불러주니, 너무나 진지하게 나오는 아첨 같은 말에 머쓱해질 지경이 되었다.
“어쩌면 그것이 섭리일지도 모르지요. 동방에서 핀 꽃이 서쪽에서 열매를 맺고, 다시 서쪽의 열매에서 나온 씨앗은 동쪽에서 더 큰 꽃을 피우는 것이.”
“미안하지만, 또 무슨 말씀이신지 감이 안 잡히오. 이것도 통변 잘못이오?”
애먼 알리를 째려보며 꺽정이가 물었다.
“말씀드린 것처럼, 원래 배운 사람이 늙으면 뜬구름 잡는 소리만 성행하는 법입니다. 너무 괘념치 마시지요. 어쨌든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전해줄 답은 구하셨지 않습니까?”
라스카사스는 저의 사형 이지함 같은 사람으로, 더 좋은 세상을 꿈꾸는데 마침 노비를 머슴으로 바꾸는 것이 그 세상에 들어맞아 지지할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귀가 딱 들어맞긴 했다.
“뭐, 그렇긴 하오. 그나저나 아까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던 그 ‘씨위’ 어쩌고 하는 말을 스님네 꼬부랑 글자로 좀 적어주시겠소? 나중에 물어보리다.”
이지함 생각을 하니, 여기서 주고받은 문답을 전해주면 저의 사형이 먼 땅에 동도(同道) 있노라며 꽤 좋아할 것도 같았다.
과연 흔쾌히 펜을 놀려주는 라스카사스였다. 프란치아에서 쓰는 말이라며, ‘civilisation’을 휘갈겨 적어주는 것을 꺽정이는 흡족하게 지켜보았다.
마침내 준비가 끝났다. 모카에 선단을 이끌고 입항하였으니, 얼른 홍해를 건너 넘어오라는 핀투 선장의 연락이 수에즈에 닿았다.
그리하여 1556년 한 해 동안 지중해와 그 너머 땅을 뒤집어놓았던 자칭 ‘시나 황제의 사절’들은, 동방으로 돌아가는 긴 항해길에 올랐다.
그제야 라스카사스가 적어주었던 그 쪽지가 떠오른 꺽정이는, 그날 밤 오갔던 문답 얘기를 하며 이탁오에게 슬쩍 쪽지를 건네주었다.
“··· 하여 나는 두둑한 주머니를 하나 더 받고, 라스카사스 스님은 그 누에바에스파냐인가 하는 곳에서 노예 대신 머슴만 쓸 수 있게 하는 법도를 고하겠다며 다음 배편으로 고국에 돌아가셨소.”
“그런 일이 있었군요.”
남녀 정분과 하등 무관한 나날을 보냈다기에는, 어째 엘리자베스 있는 북서쪽 바다만 물끄러미 바라보는 때가 많은 듯한 이탁오가, 겨우 이쪽으로 주의를 돌리며 말했다.
“내가 잘 얘기한 것 맞는가 모르겠소. 뭐, 이미 받을 돈은 다 받았으니 상관이야 없지만.”
“무어라 전해주셨기에 그러십니까?”
“라스카사스 스님이 딱 나 같은 사람인데, 본인 뜻에 맞아 머슴 두는 일에 찬동하였을 뿐 별 다른 뜻은 없다고 하였지.”
지나치게 축약한 그 답변은 베네치아 쪽에 매우 큰 교훈 두 가지를 주었다.
첫째로, 라스카사스의 성정은 코우지오니스와 같으니,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 (돌이켜보면, 본디 그런 사람이었으므로 뜬금없이 교황청과 바야돌리드 왕궁에 들이닥쳐 인도인들의 영혼과 권리를 주장하였던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둘째로, 그런 사람이 제도에 찬성하고 있으니, 적어도 쉽게 뜻을 굽히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 ‘계약직 하인’ 제도로 어떻게 수익을 낼 지만 고민하면 될 터였다. 지나치게 많은 이익을 얻으려 했다가 그 눈밖에 나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것이었다.
거리상으로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 그러나 서아프리카의 풍토병으로부터는 자유로운 – 오로모인 노예, 아니, 머슴들로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의 노예 시장에 침투할 수도 있을 것이요, 아니면 숫제 누에바에스파냐와 페루에 제법 있는, 라스카사스의 뜻에 따르는 수도사들과 연합하여 현지인들을 노예 대신 머슴으로 만드는 일에 뛰어들 수도 있을 테다.
최후의 거점 빌카밤바에 웅거하며 페루 부왕령의 콩키스타도르들과 영 불안한 평화를 이어가고 있던 사파 잉카(Sapa Inca, 잉카 제국의 군주) 사이리 투팍이 듣는다면, 희소식인 것 같기는 한데 어째 머리아픈 일도 함께 생길 듯하여 아리송하게 여길 일이었다.
“어째 그렇게 정리했으면 안 되었을 것 같기는 한데요.”
“지나간 일이지 않소. 그나저나 그 쪽지에는 무어라 쓰여 있소?”
“시빌리자시옹··· 시빌리자시옹··· 흠. 말씀하신 대로라면 문명(文明) 정도가 그나마 가까운 뜻이 되겠습니다.”
“그 말인즉슨, 내가 당수 노릇 한 이래 조선국이 더 문명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군, 흐흐.”
이탁오는 꺽정이의 빠르고 단순한 생각을 굳이 고쳐주지는 않았다. 결과만 놓고 보면 아예 틀린 뜻도 아니었고, 또한 가장 문명한 나라인 중화대국보다도 더욱 문명한 나라가 생기게 된다면, 대명천지(大明天地)가 한바탕 뒤집힐 수밖에 없음을 이미 꺽정이도 직감하고 있을 것이라 여겼으므로.
그리고 또 새삼스레 깨닫는다.
문(文)이란 것은 명(明) 천자와 조정의 치하에서는 곧 천자 한 사람의 뜻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일진대, 과연 이탁오 저와 같은 자들이 사사롭게 문명을 더 앞으로 밀고 나가려 한다면 어찌될 것인가?
모카 항이 지척이라는, 뱃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
동방 땅에 돌아가게 되면, 한때 자신의 고향이었던 천주는 부쩍 낯설게 보이리라. 천주뿐 아니라, 그 땅과 사람과 하늘 모두가.
일백오십여 년 전, 태감 정화(鄭和)가 황명 받들어, 보선(寶船) 대함대를 이끌고 일곱 차례 천하 바다를 유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모카 항으로 향하는 작은 배 한 척에 실린 보화, 신대륙의 기화요초와 에우로파의 귀인, 그리고 뒤에 남겨놓고 온 인연은 정화의 보선 수십 척에 실렸던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도 더욱 값지다 할 만했다.
그리고 고작 상 투메 호 한 척과 그 위에 탄 오십 명이 채 되지 않는 동방인들이 세상을 헤집고 다니며 일으킨 파란은, 정화가 설령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에 걸쳐 항해를 하였다 한들 그 규모를 따라잡기 어려울 터였다.
정화의 함대는, 떠났다가 돌아올 때 고작 자칭 기린(麒麟) 정도나 태우고 돌아왔지만, ‘코우지오니스’의 배는 부쩍 달라진 사람들을 싣고 돌아가리라.
“엇? 저건?”
“갈레온! 이스파냐(에스파냐) 배다!”
“전투 준비!”
갑자기 급박한 목소리가 오간다. 오스만 투르크의 위엄이 홍해 전역을 위압하고 있는 지금, 아덴과 모카 일대에서 해적 노릇을 할 만큼 간이 부은 자는 없었으나, 나라 사이의 다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꺽정이 따라 동방 시장 탐사를 나가려던 이탈리아 상인들 태운 배에서도 그 모습 보았는지, 부쩍 부산스러운 소리가 마구 들려왔다.
그때, 배의 선장이 묵직하게 외쳤다. 그의 얼굴에는 도키치로 특제 ‘멀리 보는 대롱’이 올라가 있었다. (그사이 유리알을 몇 개 더 구해 손재주로 주섬주섬 대롱 몇 개를 더 만들었던 것이다.)
“모두 동작 그만! 다시 잘 보거라!
저 배들 모두 멀쩡히 정박해 있지 않더냐! 지금 저쪽에서 작은 배 한 척이 내린 걸 보니, 우리와 적대할 의사는 없는 것이다. 경망스러운 짓은 관두어라!”
무슨 일인가 싶어 선장 쪽으로 온 꺽정이는, 마치 저의 것인 양 자연스레 대롱을 빼앗아 모카 항구를 살폈다.
핀투가 남겨놓고 온 뱃사람들이 그사이 제법 관리를 잘 했는지 꽤 멀쩡한 모습의 상 투메 호를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바다안개가 끼거나 해서는 아니요, 항구가 카락과 갈레온으로 가득 차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카락이야, 핀투가 어떻게 리스본에서 배를 모아오고, 거기에 동방에서 크게 한탕 하려는 ‘한인(漢人) 후예’들과 동인도회사가 잉글랜드에서 모집한 장인들이 타 있을 테니 이곳 항구를 메우고 있을 법도 했다.
헌데 저 갈레온은 무엇이란 말인가.
곧 갑판에 오른 익숙한 얼굴이 대신 답해주었다.
“코우지오니스 경, 건강한 것을 보니 실로 안심되는구려.”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가 어울리지 않게 곰살맞은 인사를 건네었다.
“언제부터 우리가 서로 안부 묻는 사이였소?”
“류큐에서 붙잡힌 내 부하들 몸값 마련하다가, 뒤에 거추장스러운 용병 수백을 붙이게 된 이후로 그리 되었소.”
“그게 무슨 소리요?”
“디오시온 북쪽의 그 구루니아(Gurunia, 압카이 아파시 구룬)인가 하는 나라에 포로가 된 내 군사들을 용병으로 보내지 않았소? 몸값을 내면 풀어주겠다 하였으니 몸값을 마련하여 이렇게 찾아왔소. 카를로스 폐하께서 전액을 부담해주셨지. 때마침 희망봉 돌아 모카로 가는 핀투 선장의 선단이 있다기에, 그 뒤를 따라 여기까지 왔소.”
레가스피는 조용히 저의 부하들만 풀어준 뒤, 지금쯤 발견되었을 태평양 횡단 항로를 타고 아카풀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거의 지구를 한 바퀴 횡단하는 위험한 항해였으나, 자신의 명예를 걸고 책임져야 할 부하들의 목숨이었으므로 감수할 심산이었다.
헌데, 선왕 카를로스가 새로운 원정을 위해 기꺼이 자금을 대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레가스피가 반응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동방의 엘도라도 – 대체 어떤 머저리가 지어낸 말인지 알 수 없었다 – 찾아가겠다며 콩키스타도르 지망생들이 몰려들었다. (심지어 ‘콩키스타도라’(여성)도 몇몇 있었다.)
“나는 내 부하들만 데리고 떠날 것이오. 저기 저자들을 어찌할지는··· 그건 이제 더 이상 내 알 바가 아니라 하겠소.”
이제 보니, 사람만 달라지는 게 아니라 함대의 규모도 크게 달라질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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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종종 작가의 말을 통해 언급되었던 것처럼, 쉴레이만 치하에서 오스만 투르크는 통역관들을 전문적으로 육성하여 외교업무와 첩보 수집, 국내 소수민족 관리 등 여러 분야에 투입하였습니다. 심지어 수석 통역관(바쉬튀르체만)은 술탄의 디반(내각회의)에 참석할 수도 있었지요. 전문적인 통역은 물론이요, 전문적 외교관조차 막 태동하던 16세기 초 유럽에서 이러한 제도는 매우 낯설었고, ‘테르취만’이라는 투르크어는 ‘드라고만(Dragoman)’이라는 고유명사로 굳어져 유럽 내에서 오스만 외교관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끈 떨어졌다지만 여전히 셰자데인 바예지트를 버려두고 테르취만 알리가 이곳저곳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그만한 지위가 있기 때문이지요.
어머니 아라곤의 캐서린을 많이 닮았다고 알려진 – 그리고 불행한 환경과 지독한 근시 등으로 인해 그 외모를 상당히 망쳤던 – 메리 여왕과 달리, 엘리자베스 1세는 아버지 헨리 8세를 빼닮아, 미모는 뛰어났지만 미녀보다는 미남에 가까운 상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본인은 허영 때문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외모를 꾸미는 데 진심이었다고 전해지는데, 특히 다른 왕실 재산은 아낌없이 매각하여 재정에 충당하면서도 보석 컬렉션만은 항상 늘려나갔고, 말년에는 과한 치장으로 인해 타국 외교관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학구열인지 다른 종류의 열기인지 모호한 감정으로 불타는 사이인 이탁오라 할지라도 외모로 흉을 보면 곧장 방석이 날아들 수밖에요.
‘문명’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옮긴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그는 영어 Civilization을 ‘문명’이라는 한자어와 ‘개화’라는 일본식 한자어를 합하여 ‘문명개화’로 옮겼고, 이것이 선풍적인 유행어가 되어 오늘날 각각 문명과 개화라는 두 단어로서 우리의 어휘에까지 편입된 것이지요. 그러나 작중 시점인 1550년대 중후반에는 아직 그러한 용법이 프랑스어에만 막 존재하고 있고, 영어로 조심스럽게 옮겨지는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