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 흘러야 한다
“파드레 누에스트로 케 에스타스 엔 엘 시엘로, 산티피카도 세아 투 놈브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오며)."
무수한 흠이 아로새겨진 톨레도 강철이, 여전히 낯선 산하를 뒤덮은 눈밭 위에 닿았다.
“아마 이 구룬 엉걸런지키니, 아마 이 허서 압카 더 야부부러 송코이 나 더 야부부키니 (그분의 나라가 임할지니,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전히 어설프지만, 한 세대 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였을, 주션 사람 손으로 만든 주션 사람의 쇠가, 그 곁에서 함께 눈에 닿았다.
한 사람은 눈밭을 뚫고 박힌 장검을 십자가 삼아, 다른 이들은 합장하듯 두 손 모으고 주기도문을 마저 암송하였다.
“아멘.”
“아멍.”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이 머나먼 땅에 닿은 에스파냐 사람들과, 반대쪽으로 지구를 돌아온 믿음을 저들 가슴에 새긴 압카이 아파시 구룬의 하늘 싸움꾼들이 함께 눈밭에서 일어섰다.
“죽지들 말라. 죽는 놈 몫은 산 놈들끼리 나눠가질 테니.”
“어이쿠, 그럼 죽으면 안 되겠습니다그려.”
잠시의 거룩함은 아멘 소리와 더불어 하늘로 두둥실 떠나가고, 다들 칼과 활, 조총을 꺼내들어 싸움을 준비했다.
저 북쪽에서 다른 주션 족속들과 싸울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대신 오늘은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될 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 사정을 전해들어 알던 마르틴 데 고이티(Martin de Goiti)는 다시 한 번 속으로 짧은 기도를 바친 뒤, 장검을 휘휘 돌렸다.
때맞추어 멀리 골짜기에서 사람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빠르게 가까워졌다.
“이쪽으로 온다.”
무엇이 이쪽으로 오는가? 사람이 달려오며 함성 내지르는 것이 아니요, 미리 길목마다 배치되어 있던 이들이 저들 앞에 표적 지나갔음을 뒤늦게 깨닫고 외치는 것이었다. 살길을 찾아 내달리는 네발짐승의 빠르기가 그와 같았다.
“잘 되었다. 수르베일레르(Surbeyler, 수러 버일러) 각하께서 우리 실력을 보이라 하셨으니. 다들 들어라, 놈이 모습을 드러내더라도 내가 지시하기 전까지는 쏘지 마라. 우선 칼과 창으로 제압한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카피탄(Capitan) 어전?”
“죽어도 내가 죽지, 네가 죽겠냐.”
북변 ‘구루니아(만주)’ 땅으로 보내진 삼백여 명의 에스파냐 병사들은, 대부분은 하나의 중대를 이루어 압카 아파시 구룬이 건주나 해서 무리들과 거하게 싸우는 전장에 투입되곤 했다.
니탕카이 요한은 이들을 그저 화살받이로 쓸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승기가 확실히 잡혔을 때 더욱 그 승리를 확고히 다지고자 할 때만 투입하였으므로, 이들은 어느새 백전불패의 ‘상치야고 바투르(산티아고 용사들)’라 불리며 제법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로부터 거의 삼 년이 되어가는 지금, 전투와 질병으로 죽은 이들을 제하고도 여전히 이백육십여 명이 남아 있었는데, 개중 유별나게 욕심 많은 이들은 아예 따로 떨어져 나와, 저들만의 조그만 용병 패거리를 만들곤 했다. 다시 북쪽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언제든 돌아가 테르시오에 합류한다는 조건 하에서였다.
그리고 마르틴 데 고이티는 스물넷 나이에 카피탄 소리 들을 만큼 제법 수완 좋은 용병대장이었다.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저의 고용주 및 잠재적 고용주 앞에서 무용 선보일 마음으로 만용을 저지를 만큼 야심이 가득하기도 했다.
“저기 있다! 저쪽입니다, 카피탄!”
눈 사이가 들썩이며, 거대한 맹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무서운 쇠 대롱이 없는 것을 알아챘는지, 더욱 맹렬하게 뛰어든다.
어려울 것 없다. 달려드는 기병을 장검으로 제압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기병을 정면에서 장검으로 제압하는 것은, 쉽지도 않거니와 고이티가 실제로 해본 적도 없는 일.
허나 이제 와서 망설인들 무슨 소용이랴. 검을 꼬나쥐고, 에스파냐 사람의 상징이 된 ‘산티아고!’ 함성과 함께 앞으로 뛰쳐나간다.
눈 깜빡할 사이에, 무언가 질기면서도 부드러운 것이 칼 끝에 와닿는다. 투구와 흉갑에는 묵직한 충격이 와 닿고, 온몸이 뜨거워진다. 흥분 때문인지, 아니면 저의 피와 짐승의 피가 섞여 흘러내리기 때문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이윽고 묵직한 것이 온몸을 덮치고, 의식이 끊어졌다.
“살아 있답니다! 그저 잠시 혼절하였을 뿐이라 하니, 곧 일어날 것입니다.”
오랑캐 젊은이가 맨몸으로 범을 잡으려 달려들 때만 해도, 서쪽 땅에는 범이 없는 모양이라 여기며 저 객기가 어떤 참화로 돌아올까 내심 걱정하던 평안도관찰사 이준경은, 사람 죽지 않았다는 말에 은근히 안도하였다.
허나 그 옆에서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던 서림만큼 안도하지는 않았을 테다.
“어떻습니까, 대감? 저만하면 실로 믿고 맡길 만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저러한 용사가 하나도 아니요 삼백이나 있고, 더구나 그들이 저들 식으로 병학(兵學) 가르친 야인들 또한 수두룩합니다.”
칠 년 전, 한 사람은 똑같이 평양 감사요 다른 한 사람은 그저 밑바닥 아전이던 때에는 상상도 못하였을 말투로 서림이 말했다. 허나 지난 삼 년간 바쁘고 바쁜 사업당 일로 말미암아 어지간한 고관들을 독대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어느새 이런 자리도 어렵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길이 험하다 한들, 결코 도중에 주저앉거나 붙잡혀 사직에 누가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 때문에 저어한 것은 아니었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청이 저에게 들어왔다면 거절하기는커녕 아예 미친 소리로 여기어 무시하였을 것이다.
북방의 야인들을 부려 몽고 땅까지 가서 교역을 할 것이니, 사람과 재물이 압록강 너머 오가는 것을 허용해달라는 사업당의 청.
그러나 그사이 세상은 바뀌었고, 허무맹랑한 말은 더 이상 옛날만큼 허황되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이준경 본인도, 탕평당의 사림도 그만큼 옛날과 달라진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종묘사직에 대한 그의 단심(丹心)처럼,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하면 대감의 심중을 여쭈어도 될지요?”
“이 사람이 잠시 재상의 자리를 내려놓고 이곳 평안도로 온 까닭이 무엇인지, 그대도 알 것이오.”
앞으로 십여 년은 더 영의정이든 영중추부사든, 의정대신(議政大臣) 소리는 계속 들을 것이라고들 하던 이준경이 느닷없이 칭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평양 감사로 명하는 교지가 내려왔다.
혹자는 성상께서 드디어 사림을 멀리하고 심통원과 그 일당을 높이 세우려는 뜻을 세우셨다고 여겼고, 또 몇몇 사람들은 근래 사림과 탕평당 행보를 보았을 때 그리 처신함이 온당하다고 하였다.
“세간에서는 아무래도 사족(士族) 사이의 공론이 좋지 못하여 그렇다고들 떠들곤 한다 들었습니다.”
“그 말이 아예 틀리지는 않소. 다만 그뿐은 아니었소이다.”
상께서 전정공회를 높이시며, 아예 그곳에서 열성조의 기업과 종사에 관한 일까지 논의하는 것을 허여하신 이래로, 탕평당은 그러한 성심 떠받들어 공회의 일에 민주당만큼이나 열심히 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공회의 열의가 지나치게 되었을 때 찬물을 제때 끼얹지 못하였다. 오히려 민주당이 하나 발의하면 대응하여 사림이 원해왔던 것 하나를 함께 발의하는 식으로 어울려 노니는 형세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럴수록 민주당의 난동을 막기는커녕 소위 경장(更張)을 위해 그들과 어울리는 탕평당에 대한 몇몇 사족들의 불평도 커져갔다. 그리고 그들의 불만이 고조될수록, 그것을 모아 자신의 힘으로 삼는 자들도 나타났다.
낙향한 이언적의 제자를 자처하며 나타난 천인(賤人) 두리손. 그리고 그가 내세우는 ‘재조(再造)’론.
그저 세상에 불만 품은 용렬한 자들이, 비루한 술수와 떳떳지 못한 흉계로써 남을 해치는 정도였다면 쉽게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사림만 지니고 있을 줄 알았던 재주로써 이빨을 드러내니,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북변의 경계를 살피고자 할 뿐이오. 다행히 이 사람에게 부족하게나마 재주가 있어, 병가(兵家)의 일을 아예 모르지 않으므로.”
“우리의 상행이 북변과 그 일대를 어지럽힐 것을 염려하시는 것인지요?”
“그뿐이겠소? 우리 조선이 그나마 천하에서 덜 어지러우니, 이를 노리는 승냥이와 같은 무리는 안팎 어디에든 있을 것이오. 그러니 두려워하고 걱정하며, 다만 경계하고 미리 헤아리는 수밖에.”
이준경은 해외(海外)의 놀랍고도 거친 사정을 들었고, 그것을 이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괴력난신의 범주를 넘나드는 그 기묘하고도 괴악한 것들을 다스려, 선비가 논할 만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그와 같이 늙고 완고한 선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대신, 그는 저의 후학들이 그러한 대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안정된 나라를 만드는 데 여생을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마저도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당장 조선의 관군 중 함경도 다음으로 가장 정예한 북병(北兵)이 있는 평안도만 해도 그러하였다.
지난 병진년(1556), 상국(명)에서는 소위 아개국을 제대로 된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그 우두머리 니탕카이에게 ‘아개위(兒凱衛) 도독’만을 내렸다. 또한 칙서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교역을 불허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이미 바다 건너 일본의 왜은(倭銀)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고, 조선과의 교역을 원하는 이들은 알아서 인천으로 배 타고 건너오게 되었다. 그러니 조선의 물산이 북쪽으로 넘어가는 대신 북변 물산이 남쪽으로 넘어오는 정도의 차이만 생겼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요동을 떠받치던 산동 및 강남의 은과 조선 및 여진의 물산이 모두 요동을 벗어나 인천을 거치게 되었고, 갑작스레 기둥 여럿이 사라진 요동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허나 압록강 이남도 혼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잘 지어지지도 않는 농사 따위 때려치우고, 요행을 바라며 은이나 쫓아다니는 자들이 도처에 생겨났다. 개중 그나마 성실한 이들은 나날이 부풀어오르는 각지 대읍(大邑)에 새로 둥지를 틀었으나, 적잖은 수는 부랑배와 무뢰한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이 땅에 전란이 일어난다면, 북병을 움직이든, 아니면 북병이 되려다가 떨어져 나온 이들을 끌어모으든 할 공산이 컸다. 이준경이 평양감사를 다시 맡고자 한 것은 이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하늘에 맹세컨대, 저희가 조선의 사정을 바깥에 알려 화란을 불러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번 상행을 직접 맡게 될 아개국 통령(統領) 니탕개, 즉 수러 버일러 니탕카이 요한이 훨씬 덜 어눌해진 조선말로 옆에서 끼어들었다.
“우리가 나라를 세우기 전만 해도 조선은 우리 여진 사람들의 상국이었고, 또 지금은 제가 모시는 임 당수께서 계십니다. 그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임거정이 조선국을 떠난 것이 을묘년(1555) 초여름이었다. 그리고 사림 중진들은, 그 우악스러운 백정이 조선국 한가운데를 떡하니 지키고 있을 때가 그나마 나았음을 그해 가을이 되기 전 깨닫게 되었다. 정사년(1557) 초겨울인 지금은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임거정은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본인 손으로 그것을 짓누르고 헤쳐 없애버리기도 곧잘 하였다. 가운데를 묵직하니 지키며 단속하는 이가 사라지니, 말하자면 냇가에 가물치는 사라지고 미꾸라지만 남은 격이라, 한 번 흙탕물 되니 도통 물이 맑아지지 않았다.
그러한 흙탕물 속에서도 끝까지 지켜지는 것이, 그 뿌리가 도적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민주당 아랫사람들 사이의 신의라니, 어찌 묘하지 않은가.
“이미 우리는 기호지세(騎虎之勢)의 형국에 처했습니다. 그 범의 이름은 바로 은이지요. 은의 흐름이 멈추는 순간 우리는 범의 등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서림이 ‘우리’라 칭하니, 장고하던 이준경의 입에서 대답 대신 장탄식이 떨어졌다.
이미 그들은 같은 편에 섰다.
처음에는 그저, 나라의 잘못된 제도를 바꾸고, 은이라는 새로운 재보가 세상을 더 좋게 만들 것이라 여기며 함께하였다. 가난은 모두의 적이자 백성의 원수요, 은은 그 원수를 무지르는 가장 좋은 병장기였으므로.
그러나 은이라는 짐승은 만족함을 모르고, 지금껏 농(農)이 차지하고 있던 천하의 대본(大本) 자리를 노렸다. 탕평당 선비들에게는, 짐승의 등에서 내리는 것과 끝까지 타고 가는 것, 두 가지 선택만이 남았다.
은이 만들어낸 온갖 어지러움을 해결할 방도는 오직 둘 뿐이었다.
나라의 법도 자체를 뜯어고쳐가며 더 많은 은을 나라 안으로 끌어들이거나, 아니면 은을 아예 끊어 없애버리거나.
그리고 안타깝게도, 탕평당과 민주당 외에도 이러한 사실을 꿰뚫어본 자가 하나 있었다.
정녕 그 두리손이라는 자가 자신의 힘으로 이를 깨달았는지, 아니면 어영부영 세상에 원한 품은 이들의 말과 뜻을 모으다 보니 그러한 결론에 이른 것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허나 과정이 어찌 되었든, 두리손의 ‘재조론’은 제법 많은 선비들의 마음을 끌어냈다. 학식 높지 못한 선비들이 혹할 수밖에 없는, 그저 두루뭉술하고 듣기 좋은 말을 엉성하게 끌어모은 것에 불과한 주장.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그저 좋다고 따르고, 총명한 자는 엉성한 만큼 자신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으리라 여기며 그 논변에 동참하였다.
삼 년 세월 동안, 뼈대가 생기고 살점이 붙었다.
그리하여 나온 재조론의 핵심. 그것은 바로 은이 필요치 않은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나라의 문을 걸어잠그고, 이 땅에 오로지 선비와 농군만 남도록 나머지 말업(末業)을 다시 억누른다.
나라는 거대한 창고가 되어, 농군의 소출을 하나로 모으고, 필요한 이에게는 나누어주며, 더 많이 가진 이에게서는 거둔다.
그리하여 사람들 사이에 신분은 갈리고, 경장이 벌어지는 마지막 한 번을 끝으로 다시는 바뀌지 않게 되며, 다만 같은 신분 안에서는 그 누구도 남의 머리 위에 서지 못하게 된다.
‘더 나은 내일’은 없을 것이지만, 적어도 ‘어제만 못한 오늘’도 없어질 것이다.
더 나은 내일을 약속하게 된 새로운 세상에서, 내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날뛰다 다리 부러진 자들, 자신보다 앞서가는 이웃을 질시하는 이들, 그리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갈길 잃고 그저 두려움과 어지러움으로 주저앉은 자들이 조금씩 쌓여갔다.
그리고 그런 자들의 마음은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다. 고작 삼 년 사이에 벌어진 일. 누군가 뒤에서 부추기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못하였을 일이었다.
그러니 그 반대편에 선 민주당과 탕평당도, 결국 하나로 모일 수밖에 없으리라.
“좋소. 내 그대들이 압록강 넘는 것을 허여하리다. 단 어떤 일이 있어도 이번 일이 나라 바깥의 화란을 안으로 들여오는 것으로 귀결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승낙은 마치 한탄과 같았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풍토(風土)의 다름도, 산천(山川)의 험함도 쉽사리 사람의 발목을 붙잡지 못하고, 오로지 사람이 스스로 만든 법도만이 그 발길을 가로막을 뿐이었으므로.
압카이 아파시 구룬의 탄생을 알린 하다 부 정벌로 인해 해서여진의 판도는 크게 뒤흔들렸고, 그 덕에 예허 부도 하다 부에 대한 옛 원한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었다.
니탕카이가 그 인연을 언급하며 이번 상행을 위해 길을 빌려달라 하니, 그들에게 신세를 지우면 저 ‘상치야고’ 무리가 입고 다니는 무시무시한 병장기와 무구를 구할 길 열리리라 여긴 예허 부에서는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묵직한 궤짝을 짊어진 말과 사람의 대열은, 초겨울 추위를 뚫고 북서쪽으로, 또 북서쪽으로 향했다.
주션 사람들이 거하는 산과 숲의 땅이 끝나고, 몽골 사람들의 초원과 사막이 눈앞에 열릴 때까지.
“이렇게 멀리 북쪽까지 온 에우로파 사람은 우리가 처음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각하?”
장검 한 자루로 호랑이를 잡은 공으로, 그냥 ‘카피탄’도 아니요 ‘카피탄 바투르(용사)’라 불리게 되었고 이번 상행에서 니탕카이 곁을 지킬 수도 있게 된 마르틴 데 고이티가 니탕카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마 아닐 것이오. 하비에르 신부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수백 년 전에 이미 이곳에 신부님들이 여럿 찾아와 복음을 퍼뜨리셨다 하였으니.”
그러나 주변의 초원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민망해진 고이티가 화제를 돌렸다.
“곧 타타르 사람들과 만날 것이라 들었습니다. 이 초원에서 그들이 우리를 어찌 찾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러나 그 물음마저도 금방 허무하게 풀리고야 말았다.
야트막한 언덕 하나를 넘으니, 성대한 천막의 무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에스파냐 사람들과 물정 어두운 주션 사람들 모두 놀라면서도 좋아하는데, 니탕카이 한 사람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예허 부에서 들은 바에 따르면, 이번 상행은 결코 저만한 규모의 환대를 받을 만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곧 니탕카이의 근심이 현실로 드러났다.
“모두 고개를 조아리며 은혜에 감읍할지니! 위대한 황금씨족의 피를 이으셨으며 하늘 아래에 고루 위명을 떨치사 카안(대칸)으로부터 게게엔 칸의 칭호를 받으신 튀메드의 정당한 칸, 알탄 칸께서 너희에게 알현을 허하셨다!”
북경을 포위하고 그 일대를 약탈하면서 얻어낸 재물과 가축, 노예로 더욱 세력을 키워, 마침내 오이라트는 서쪽으로, 이론상 자신의 주군인 카안(대칸)은 동쪽으로 몰아내고 몽골 여섯 부 중 가장 강한 자가 된 알탄 칸이 직접 만남의 자리에 찾아온 것이다.
그러한 성의를 선뜻 저쪽에서 보였으니, 이쪽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저 환대를 거절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니탕카이와 그 일행 몇몇은 나머지와 동떨어진 채 칸의 천막으로 나아갔다.
서림이 신신당부하기를, 말이 대원(大元)의 후신이지, 실지로는 그저 막북(漠北)으로 쫓겨난 촌뜨기들이니 꼭 에스파냐 사람을 대동하여 모두를 놀라게 하라 하였는데, 그 말을 따라 니탕카이는 저의 케식(친위대)이라면서 고이티도 함께 데려갔다.
과연 그 소소한 책략이 적중하여, 칸의 앞에 나아가자 주변 모두가 놀라는 것이 확 드러났다.
“주르첸(여진)의 보잘것없는 추장이 차하르나 코르친도 아니요, 우리 튀메드와 직접 교역하기를 원한다는 보고를 듣고, 재미있다 여겨 직접 행차하였다. 이제 보니 내가 헛걸음을 한 것은 아니로군. 하하하!”
칸이 웃으니, 천막 안이 웃음으로 가득 찼다. 누구는 물정 모르고 웃고, 누구는 저자가 노인들의 옛이야기 속에나 나오던 색목인임을 깨닫고 한때 몽골이 누리던 영광을 떠올렸다.
“네가 이토록 좋은 눈요깃거리까지 주었으니, 어찌 내 관대함을 베풀지 않겠느냐? 그러니 네게 말할 기회를 주겠다, 주르첸의 보잘것없는 양치기야. 네 스스로 너의 언행을 해명해보거라.”
“칸의 튀메드 부는 일찍이 남쪽의 니칸(한인漢人)들을 정벌하여, 그들로 하여금 다시 교역에 응하도록 강요하였다 들었습니다.”
“그 말이 맞다. 네가 사는 그 깊숙한 숲속까지 소문이 전해졌으니, 몽골의 사내이자 위대한 다얀 칸의 손자로서 보람이 있구나.”
“저는 칸께, 그들 대신 저희에게 군마를 파실 것을 제의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니탕카이는 미리 준비한 말을 꺼내면서도, 뒤이을 반응을 익히 예상하였기에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금방 다시 떴다. 그는 니탕카이 한 사람이 아니라, 그의 새로운 나라를 이끌어달라며 수많은 동포로부터 부름을 받은 자, 하늘의 뜻을 이 땅 위에 바로세우는 위대한 여정을 가장 앞에서 이끄는 자. 지상의 우정과 신의는 지킬지언정, 그 권세에 억눌려서는 아니 될 터였다.
“무어라?”
“이 어리석은 주르첸 놈이!”
몽골은 한인들에게 말을 팔고, 그들에게 필요한 수많은 물산을 받아오곤 했다. 어리석은 주르첸 추장이 그러한 이치도 모르고 주제넘는 말을 꺼냈다 여긴 이들이 발끈하였다.
“그만.”
칸의 말 한 번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노여움보다 궁금함이 앞서는구나. 자칫하면 말 대신 화살만을 받아갈 수도 있는 교역을 제의한 까닭이 무엇이더냐?”
방금 전 니탕카이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당당하게 주변의 노여움을 받아낸 것을 흥미롭게 지켜본 알탄 칸이 물었다.
“저희가 값을 치르기 위하여 준비한 것을 보시면, 칸께서도 생각이 달라지시리라 믿습니다.”
고갯짓 한 번에, 고이티가 미리 준비한 궤짝을 직접 꺼내왔다. (이는 서림의 제안을 니탕카이가 지나치게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이를 모르는 고이티는 ‘케식’이 타타르 말로 짐꾼을 뜻한다 착각하게 되었지만.)
“열어라.”
알탄 칸이 아랫사람 부리듯 명하니, 니탕카이와 고이티는 군말 없이 궤짝을 그대로 열어 속에 든 것을 내보였다.
“아니, 저것은···?”
“오오···”
은괴와 은자. 모두 은이였다.
알탄 칸이 눈짓하니, 케식 하나가 각각 하나씩 챙겨 저의 주군에게 그것을 바쳤다.
“바깥에 준비한 궤짝도 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알탄 칸은, 저의 품에 놓인 묵직한 은괴 위에 새겨진 문양에 집중하느라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이 천막 안에서는 고이티 한 사람 외에 그 누구도 읽지 못하는 문양. 허나 니탕카이 요한은 저 궤짝의 내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문양의 의미를 모르는 것 정도는 그리 중하지 않았다.
“이 문양은 무엇이냐?”
“그 은괴가 난 곳을 뜻합니다.”
“이러한 문자는 그 어디서도 보지 못하였다. 너희 주르첸 놈들이 한때 글을 쓰던 시절에도 이러한 문자는 쓰이지 않았다. 바르게 고하여라. 어디에서 빼앗은 것이냐?”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정당하게 교역을 통해 벌어들였습니다.”
니탕카이가 심호흡 한 번 하고, 자신이 부디 그 낯선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기를 – 그래도 하비에르 덕택에 조금은 능숙해졌다 ¬– 바라며 말을 이었다.
“그 은은 페루 부왕령의 포토시(Potosi) 은광에서 나왔습니다. 이와미 은광의 몇 배, 아니, 몇십 배는 될 지도 모르는 은. 그것이 동쪽 대양을 넘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저의, 아니, 우리의 손에 넘어왔지요.”
“’우리’라! 너희의 그 나라, 너희 말로 아이신 구룬(金)이 부활하기라도 했단 말이냐?”
“동쪽 바다에는 오직 임꺽정 당수의 민주당이 있을 뿐입니다.”
알탄 칸은 비슷한 이름을 들어보았다. 솔롱고스(조선)의 권신이라 하였던가. 허나 지금껏 그와도, 튀메드와도 맞닿을 일 없었으므로, 그저 기억 한 구석에 두고 넘어갔을 뿐이었다.
“장차 쪼개져 있던 세상은 하나가 될 것이며, 그 세상에서 은은 끝없이 흐르고 흐르며 부(富)를 몰고 다닐 것입니다. 그 세상에 칸의 튀메드 부도 함께하실 수 있으시도록, 이 은을 가져왔습니다. 이만하면 군마를 저희에게 대신 팔기에 적절한 대가 아니겠습니까?”
그 군마는 다시 남쪽 솔호(조선) 땅에 비싸게 팔릴 것이다. 그리고 팔지 않은 군마는 그대로 주션과 민주당의 것이 되어, 곧 들이닥칠 지도 모르는 한판 싸움에서 든든한 자산이 될 것이다.
허나 거기까지 말해줄 이유는 없었다.
“칸이시여! 저 주르첸 야인의 간사한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우리의 말만으로도 충분히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충당할 수 있으며, 만약 남쪽의 더러운 자들(한인)이 그 천성에 맞는 더러운 수를 부린다면 그때는 화살로써 배움을 내려주면 그만입니다!”
“칸이시여! 부디 위엄을 보이소서!”
알탄 칸이 직접 이런 누추한 만남에 나서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거늘, 감히 그 앞에서 무엄한 말을 서슴지 않는 것을 본 이들이 더더욱 격분하여 날뛰었다.
“참으로 신기하도다. 나의 케식들이 예법 따위 모르는 주르첸 찌꺼기보다도 더욱 식견이 얕으니.”
알탄 칸의 비웃음 한 번에, 다시 한 번 천막에는 정적만 남았다.
“쪼개져 있던 세상이 하나가 된다라··· 너의 말이 옳다.”
오이라트 족속들을 서쪽으로 쫓아낸 뒤, 알탄 칸은 그들의 뒤를 쫓아 할하 부의 영역 너머까지 척후를 보냈다. 이미 지난날의 위업으로 튀메드 한 부의 수장을 넘어 거의 카안(대칸)을 방불케 하는 위엄을 지니게 된 알탄 칸이었으므로, 그 누구도 그의 척후들을 가로막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곧 놀라운 소식과 함께 귀환하였다.
역병과 전란으로 서쪽으로 향하는 길이 끊어진 이래 소식도 거의 끊겼던, 옛 주치인 울루스(킵차크 칸국 및 그 산하/후속 세력)의 몇몇 일파가 아직 곳곳에 남아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놀라운 소식은, 바로 그들 중 몇몇이 이미 새로운 카안을 모시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시비르 칸국을 복속시킨 ‘어러스(루스)’의 ‘차리 칸(차르 이반)’. 그의 수하들이 끝없는 동토와 숲을 뚫고 동쪽으로 향하는 길을 찾고자 초원의 가장자리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 먼 옛날 칭기스 칸의 영광된 시대에 해 지는 서쪽 끝에서 그들이 정복하였다는 무리일 테다.
낯선 문양 새겨진 눈앞의 은괴, 그것을 자신 있게 거래의 대가라며 들고 온 주르첸 사람과 그가 거느리고 있는 색목인. 서쪽에서부터 다가오고 있는 또 다른 색목인들.
알탄 칸은 모든 단서를 짜맞추었다.
“묻겠다. 다시금 하나로 묶인 세상, 그 주인은 누구이리라 보느냐?”
“그 주인은 세상의 사람들이 스스로 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을 정하는 힘은 오로지 은이 결정하겠지요.”
니탕카이가, 그간 서림에게 들었던 말을 얼버무려 답하였다. 이렇게 말하면 배운 것 없는 다른 주션 사람들은 탄복하곤 하였다.
그리고 나름대로 많은 것을 듣고 배운 알탄 칸은, 탄복하는 대신 또 한 번 웃었다.
“우리가 다시금 이 초원을 벗어나 세상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스스로 주인은 정할 수 있어야겠지. 좋다! 이 은을 받겠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자신이 보낸 코사크 원정대로부터 전리품이랍시고 라틴 문자 새겨진 은괴를 진상받은 이반 4세는 한동안 궁금함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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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 언급된 만주어 주기도문은 실제로 청대에 번역된 만주어 주기도문에서 발췌하여 인용하였습니다.
꺽정이 일행이 서쪽에서 벌인 일의 영향이 벌써 대초원에 이르고 있습니다. 16세기 중반 시점에서 이미 루스 차르국의 영향력은 우랄 산맥까지 미치고 있었고, 수익성이 높던 모피 무역을 위해 모스크바와 현지 귀족들, 그리고 모험가와 도적이 절반쯤 섞인 코사크 탐험가들은 적극적으로 동진하게 됩니다. 이미 작중 시점에서 차르의 봉신국이 되어 있던 시비르 칸국 - ‘시베리아’의 어원이자, 역사상 가장 북쪽에 있던 이슬람 국가이기도 합니다 – 은 이 과정에서 러시아에 저항하다가 결국 완전히 멸망당하고, 그 중심지였던 튜멘 일대는 시베리아 정복의 중요한 전초기지가 됩니다.
마르틴 데 고이티는 원 역사에서 레가스피가 이끈 필리핀 원정대를 따라 루손 섬 정복에 참여하였고, 이후 루손에 남아 주변의 무슬림 군주들을 정복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끄는 한편, 자신의 아즈텍 혼혈 이복누이들을 데려와 주변의 군주들과 통혼시켜 마닐라 일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는 등 여러모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능수능란함을 보였지요. 그러나 마닐라 식민지의 번영은, 해금령이 완화되면서 다시금 전성기를 맞이한 중국 해적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1574년 해적 두령 임아봉(林阿鳳, Limahon)이 마닐라를 습격했을 때 고이티는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게 됩니다.
지나가듯 몇 번 등장한 알탄 칸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북원이 사실상 멸망하며 부족 연합 수준으로 약화된 몽골을 다시금 통합한 다얀 칸의 손자로, 오르도스 지방에 위치한 튀메드 부를 분봉받은 알탄 칸은, 이후 계속 중국 본토를 공격하며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경술의 변 이후 그의 위세는 더욱 높아졌고, 오이라트를 정벌하고 카라코룸을 정복하는 등, 대칸(카안) 대신 몽골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지요. 그러나 그는 단순한 정복군주는 아니었고, 몽골의 장기적인 생존을 위한 대책을 여러모로 강구하였습니다. 특히 명과의 교역을 위해 귀화성(歸化城, 후흐호트) 같은 상설 거점을 건설하고, 티베트 불교를 널리 도입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지요.
그러나 대칸이 아니면서 대칸보다도 더 강력한 권위를 휘두른 알탄 칸의 존재는, 그의 조부 다얀 칸이 추진한 통합 정책을 사실상 무위로 돌려버리고야 말았습니다. 결국 그의 사후 몽골 여섯 부족은 다시 분열되고, 이후 만주족의 후금에 하나씩 정복당하게 됩니다.
“임 당수가 돌아온다!”
언제부턴가 그런 소문이 돌았다.
“서쪽 먼 바다에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이대선(洋夷大船) 몰고 오신다더라!”
이제 조선 사람들에게 ‘먼 바다’라 하려면, 제주도나 유구국이 아니라 말라카 정도는 들먹여야 비로소 멀다고 할 만하였다.
조선 바깥 구경이라도 해본 사람은 (몇 년 전에 비하면 그 수가 수십 배로 늘었지만) 여전히 적었지만, 요즘 조선국에는 워낙 아는 체하기를 즐기는 자들이 많은지라, 에스파냐니 포르투갈이니 – 쓸 때는 嵬壽盤耶, 浦魯渡葛이라 쓰고 읽을 때는 제 음대로 읽는 것이 이제는 관행으로 굳어졌다 – 하는 나라 이름 정도는 다들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