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68화 (168/259)

51. 큰 바람 일어나고 (1)

그리고 개중에는 정말로 민주당 산하 사업당이나 자민당 사람으로서 먼 남쪽 바다를 오가는 이들도 없지는 않았다.

“말라카가 완전히 뒤집혔다더라!”

“태수 소단씨(蘇丹, 술탄)가 위엄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더라!”

말라카가 뒤집힌 것은, 실제로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갈레온과 카락 함대에 재보급할 만한 식량과 식수를 마련하느라 그랬던 것이요, 어영부영 시장직을 유지하고 있던 조호르 술탄 알라우딘 샤가 무릎 꿇은 것은 실은 꺽정이 환대하러 부두까지 가다가 돌에 걸려 재수없게 넘어진 것이었지만, 여하간 소문은 그렇게 났다.

어쨌든 상 투메 한 척이 서쪽으로 갔다가 여러 척 거느리고 온 것은 사실이었고, 또 꺽정이 지시를 받은 서림이 아예 이 기회에 말라카에 확실히 기틀 마련할 심산으로 경제사 밑천을 말라카에 계속 밀어넣었기에 말라카가 다시 흥성할 기미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소문에 점점 살이 붙으면서, 몇몇 사람들은 의심을 품게 되었다.

“임거정 그자가 낡은 조운선 몇 척을 끌고 한양에 올라오니 팔도가 뒤집혔다. 그렇다면 그자가 대선 수십 척을 몰고 오는 것은 무엇을 도모하기 위함이겠는가?”

그저 떠들기 좋아하는 자들, 그리고 나날이 그 수가 늘어가는, 임거정 패거리 미워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헌데 열심히 떠든 보람도 없이, 무오년(1558) 여름이 지나고 있는 지금까지도 임꺽정은 도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인천과 동래 앞바다에는 지난해보다도 더 많이 배들이 오갔지만, 소문 자자한 그 양이대선 대선단은 보이지 않았다.

궁금함을 이기지 못한 임금이 마침내 전교하기를,

“민주당 당수 임거정이 황지(皇旨) 받들어 해외(海外) 여러 나라의 원통한 사정을 살피러 나간 것은 실로 국조(國朝)에 없던 일이다. 헌데 돌아올 때가 되었건만 유언(流言)만 무성하니, 여항(閭巷) 백성들은 그저 놀라고 근심할 뿐이다. 어찌 사람을 보내어 헤아리지 않겠는가? 미원(薇院, 사간원)에 명하여 조처케 할지어다.”

하였다.

이러한 일을 승정원도 아니요 사간원이 맡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이유인즉 이러하였다.

본디 삼사(三司) 가운데서 감히 지존에게 간쟁하여야 하는, 간 큰 간관들만 모은 곳이 사간원이었다. 그런데 임금이 뭔가 하는 일이 있어야 그것을 논박하든 말든 할 터인데, 성상께서 무위지치(無爲之治)를 이룩하사 국정의 기무(機務)를 중추부에 툭 던지고 공회에 슥 넘기다 보니 사간원도 할 일이 없어졌다.

그러다 보니, 제발 저들에게 일감 떨어지기만 기다리며 옥음을 귀기울여 듣게 되었다. 예컨대 임금이,

‘유구국 상씨(尙氏, 쇼 잇시)가 임거정의 당여인 이이와 정혼한 지가 오래인데 아직 혼사 소식이 없구나.’

하면, 사간원이 척 나서서 그것을 알아오게 되었다.

‘전 수운판관 이원수의 자(子) 이(珥, 이이)는 그 천성이 실로 선비다워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으니, 계월당 상씨가 크게 상심한바 마침내 얼마 전 주안상을 손수 들고 처소로 찾아갔다 하였습니다.’

하고서, 아무리 그래도 사간원 본연의 목적이 있으니 ‘이 모든 것이 군주가 부덕한 소치다’ 소소하게 덧붙이곤 했다.

‘남녀의 도리는 곧 강상(綱常)이요, 여러 강상은 모두 하나로 통하는 법입니다. 옷깃이 흐트러지면 소매에 주름이 잡히듯, 군왕의 도심(道心)이 흔들리니 그 징후가 여염에서 나타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본연의 기능이 있으니 말미에 ‘이 모든 것이 군주가 부덕한 소치다’ 하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윤원형과 임거정으로 단련된 임금의 귀에는 그저 마이동풍(馬耳東風)일 뿐이었다.

그뿐이랴? 성상께서 황송하옵게도 국무를 문무대신에게 나누어 맡기시니, 재상들 역시 군부(君父)를 본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온갖 조정 신료들이 사간원을 제멋대로 부려먹으며, 이것 알아봐 달라, 저것 찾아달라 하곤 했다. 본디 조계(朝啓)며 상참(常參)이며, 온갖 조정의 일에 죄다 끼어들곤 하던 사간원이었으니, 이제 와서 저들 일 아니라며 모르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돌고 돌아 임거정이 어디쯤 있는지 수소문하는 것도 사간원의 일이 되었다.

“임거정의 동향은 실로 큰일이니, 사직뿐 아니라 우리 당과 문중에도 그러하다. 공사(公私) 양면으로 공히 중한 일이니, 내 문중의 힘을 조금 써서 네가 그 수소문하는 일을 맡도록 하였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거라.”

저의 종조부 심통원이 그리 말하니, 이번에 갓 사간원 정언(正言)이 된 심의겸(沈義謙)은 적당히 고개 끄덕이다가 나와서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지금 조정은 크게 세 파벌로 갈려 있었다. 하나는 탕평당의 사림으로, 이준경이 얼마 전 평양감사로 내려갔음에도 불구하고 공회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보니 여전히 가장 목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다른 하나는 그저 ‘우리 당’ 내지는 ‘올바른 당’이라고 쉬쉬하며 말할 뿐인 심통원의 파벌로, 말이야 거창하게 근왕이니 세론(世論) 바로잡느니 하지만 실제로는 그저 탕평당 발목잡기만 하는 무리였다. 허나 그 수가 적지 않고, 또 명문 벌열가들 중 탕평당의 하는 행태에 눈살 찌푸리는 이들이 은근히 동조하곤 하였다.

마지막 하나는 사실 파벌이라 하기에도 무색하였으니, 허엽과 박순 두 사람이 전부였다. 고작 참상관 둘이었지만, 그들의 스승은 서경덕이요 사형은 이지함이며, 사제는 임꺽정이므로 어찌 보면 탕평당보다도 더 힘이 센 파벌이었다.

당장 박순이 급제하여 여기저기 인사를 다닌 이래로 조정의 유서 깊은 악습 면신례(免新禮, 신고식)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던가. (박순 본인은 그저, 사형 이지함에게 부탁해 저의 새 상관들에게 골고루 좋은 자리 마련해주려 하였을 뿐이었는데, 중간에 누군가 ‘좋은 자리’의 뜻을 오해하여 기생이나 악공들 대신 흑의군을 잔치판에 보내주었던 것이다.)

작년에 갓 벼슬살이 시작한 심의겸도, 면신례는 면하고 대신 눈치껏 값진 선물만 여기저기 뿌리는 것으로 갈음하였으니 – 종조부 덕에, 인천에서 마음껏 귀물(貴物)을 사들일 수 있었다 – 그 덕을 본 셈이었다.

허나 심의겸 저는 엄연히 지존의 외척인 심문(沈門), 그것도 국모(國母) 되시는 분의 아우. 당당하게 사업당에 들어가서 너희 당수 어디 계시느냐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그놈의 권세가 무어라고 그 ‘재조론’ 따위 들먹이는 작자들과 어울리며 탕평당과도, 민주당과도 각을 세우는 종조부를 원망하고, 또 하필 이런 시국에 이런 집안에 태어나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난리통 한가운데서 출사한 것을 원망하며, 심의겸은 터덜터덜 길을 걸어갔다.

“나리, 혹여 불편하신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소관이 부족하게나마···”

“아니, 괜찮소이다.”

지나가던 어영청(御營廳) 경관(警官) 하나가 횡재라도 할까 싶었는지 말을 걸어왔다.

조선 팔도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지만 예외는 있었다. 특히 이곳 도성은 그러하였으니, 넘쳐나는 은 덕분에 많은 제도가 바뀌었던 것이다.

사람이 늘어나니 못된 자도 늘어나고, 더럽고 추잡한 일도 생겨나곤 했다. 그것을 보다못한 성상 이르시기를, 근래 경제사에 소득도 많은데, 궁궐 안에서 금군을 놀리느니 차라리 바깥으로 내보내 포도대장을 도우면 좋겠다 하셨다.

그리하여 주상의 내탕으로 만들었다 하여 어영청이라 이름 붙은 이 신영(新營)의 경관과 경졸(警卒)들은, 기자가 팔조금법을 정한 이래로 가장 청렴하고도 공명정대하게 법을 집행했다. 이유인즉, 사람을 많이 붙잡아들일수록 더 많은 늠료를 받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싸움이 나면 슬쩍 다가가 눈 감아주는 값을 받는 포졸들과 달리, 이들은 없던 싸움도 만들어 일단 붙잡아들이곤 하였다. 물론 그러다가 악명 높은 황언징 같은 작자에게 걸리면 곤란해지니 어느 정도 선은 지켰지만.

“소관은 금일 이 동(洞)의 일직(日直, 당직)을 맡았습니다. 만에 하나 불편한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기별을 주십시오.”

이제 보니 주변이 온통 부산하였다. 값진 비단옷에 흙탕물 튈까 두려워하는 이들의 돈을 모아, 말라카에서 흘러들어온 서양인들이 잘 사는 동리의 길에 포석을 깔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 그것도 아직 완전히 낯익지는 않은 이들이 바쁘게 오가며 일에 열중하고 있었으므로 어영청에서도 경관 하나를 붙인 것이었다.

“일 없으니 걱정 마시오.”

그런 사정 알 바 아니었던 심의겸은 손을 휘휘 내지르며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조선 팔도가 갑자기 은방석에 앉게 되면서, 특히 번영하는 도시가 이곳 한양이었다. 은정고에서 빌린 은으로 뭔가 일을 벌인다든가, 한전법 시행 이후 새 전주(田主)들을 모아 아주 규모 큰 농계(農契, 농업조합)를 꾸렸다든가, 어떤 식으로든 큰돈 만지게 된 이들은 모두 한양에 집을 마련하려 하였다.

그러다 보니 거리는 번듯해지고, 집은 좁아지면서 동시에 화려해졌고, 개울가나 큰길가에 종종 보이던 움막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람도 함께 사라졌는데, 그 안에 살던 가난뱅이들이 어찌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직은 몇몇 동리가 그렇게 바뀌는 정도지만, 이대로라면 심의겸이 당상관 오를 즈음에는 옛 한양의 모습이 거의 남지 않을 터였다.

허나 지금은 그런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종조부 심통원의 도움은 미덥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기실 썩 받고 싶지도 않았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임거정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라는 어명을 신자(臣子)로서 아니 받들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심의겸에게는 믿을 만한 구석이 하나 있었다.

한참 발걸음 끝에 마침내 심의겸은 삼락서원(三樂書院) 현판 아래를 지나, 아무런 꾸밈 없는 마당에 섰다.

“뉘시오?”

고작 몇 달 듣고 말았지만 쉽게 잊히지는 않는 늙은이 물음 소리. 바로 이곳 서원을 세운 주세붕 본인이었다.

“불초 제자 방숙(方叔, 심의겸의 字)이 신재 선생을 뵙습니다. 긴히 여쭙고자 하는 바 있어 찾아왔습니다.”

“아, 오랜만이로군그래! 얼른 들게나. 마침 차를 내리고 있었다네.”

하루라도 스승으로 모셨으면 스승 아니겠는가. 그리고 심의겸이 아는 주세붕은, 자신이 이곳 삼락서원 원생으로 지낸 지 몇 달만에 못 버티고 나갔다 하여 실망하거나 원망할 이는 아니었다.

삼락(三樂)이란 곧 맹자가 이른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중 셋째로, 천하의 영재를 득하여 교육하는 것을 가리켰다. 서원이 세워진 까닭은 그 이름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았다.

늙고 지쳤지만 가르치려는 뜻 하나는 여전히 불타는 주세붕은, 모든 백성이 가르침을 구할 수 있는 학당의 제도가 어느 정도 기틀 다지자마자 새로운 일에 착수했다.

‘당색(黨色)과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총명한 이들이 훌륭한 스승을 마음껏 구하여 배울 수 있는 터전을 만들고자 하오. 부디 제현(諸賢)께서는 이 모자란 사람의 뜻에 귀를 기울여주시기 바라오.’

그리하여 학비와 숙식은 민주당이 모두 대고, 가르치는 스승은 탕평당 쪽에서 물색하기로 하였다. 원생이 되려는 이는 그 집안이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뽑되, 오직 영재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이들만 들게 하였다.

그리하여 조식과 이황 – 둘 다 한 달에 한 번씩은 학문을 강론하러 직접 찾아왔다 – 은 자신들의 제자와 그 제자들의 제자를 먼저 들여오고, 또 사방에 연통 돌려 뛰어난 스승을 구하였다.

한편 공짜로 가르쳐준다는 소문 듣고 여기저기서 모여드는 학도들 중 백에 두셋 정도나 겨우 원생이 될 수 있었는데,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요, 그저 학문의 성취를 검증하는 일을 이이가 맡았기 때문이었다.

장차 문중에 귀중한 연줄 만들 심산으로 심통원은 심의겸을 그 시험에 밀어넣었는데, 나름 심씨 문중에서는 간만에 훌륭한 문사(文士) 자질 나왔다며 칭찬받던 심의겸은 겨우 통과하였다.

그리고 기껏 들어간 서원에서도 몇 달 지나지 않아 그냥 과거나 준비하겠다며 제 발로 걸어나왔다.

성혼(成渾)이나 정인홍(鄭仁弘) 같은 이들이 저들은 사실 둔재였다며 자조하고, 이산해나 류성룡(柳成龍) 같은 이들은 마침내 저들의 동류(同類)다운 사람 만났다며 즐거워하였던 것이다. 저의 나이 절반도 되지 않는 댕기머리 소년들조차 마치 먹물 빨아들이는 종이처럼 배움을 빨아들이고, 구름 토하는 용처럼 저들의 날 선 생각을 내뱉고 있으니 스스로 범인(凡人)임을 깨달은 심의겸은 겸허하게 밖으로 나갈 수밖에.

(그사이 더욱 천하의 기재들이 모여들어, 전주의 이름난 수재 정여립(鄭汝立)이라는 소년도 얼마 전 이이의 극찬 받으며 입학하였다고 하였다.)

그때의 그 아찔한 기억을 되살리며, 주세붕 뒤를 따라 중문을 넘어 안으로 들었다. 이쪽 마당은 주세붕이 거하는 사랑채와도 맞닿아 있어, 검소하게나마 나무 두어 그루를 심어두고 한쪽에는 화단도 마련해두었다.

그런데 마당에 선객이 있었다. 이제 막 열서넛이나 되었을까 싶은 아이가, 생김새는 서너살 같고 덩치는 예닐곱 같은 꼬마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께서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라 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소년이 주세붕과 심의겸을 번갈아 보더니, 제법 당돌한 말투로 말했다.

“녀석, 허허. 걱정 말거라. 내 어찌 이 나이를 먹고 신의를 깨뜨릴까.”

그러나 그런 천둥벌거숭이 말투와 달리, 소년은 후다닥 달려와, 섬돌에 오르는 주세붕을 부축해주었다.

“자, 받아가려무나.”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러면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헤헤, 사탕이다. 할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곧 방 안에서 주세붕이 주머니 하나를 건네주니, 녀석은 고개 꾸벅 숙이고, 헤 입 벌리고 있던 꼬맹이도 함께 허리를 숙였다.

“재미있는 아이일세. 각미사라는 그 한량 모임에 있다가 임 당수와 어울리게 된 이정이라는 이의 셋째아들인데, 당돌한 것과는 별개로 그 재주가 실로 기재(奇才)라 할만허이.”

골목을 막고 장수 시늉을 하는 녀석이 재미있어서, 주세붕은 녀석을 데리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는데, 학문의 이치에는 그리 밝다 할 수 없으나 그 재치는 실로 병학(兵學)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늘처럼 서원이 쉬는 날에는, 임천당 주전부리를 미끼로 녀석을 불러와 사서에 나오는 전란 이야기를 해주면서 녀석의 생각을 듣곤 하였다. 갑자기 손님이 찾아와, 저에게 올 군것질거리가 대신 손님 다과상에 오를까 싶어 ‘남아일언중천금’ 운운하였던 것이었다.

“당장 저기 저 아이 데리고 다니는 것도 녀석 딴에는 이간계를 부린 것이라네.”

녀석은 그 아비가 일하는 곳 마당을 돌아다니고 있다가 주인마님에게 붙잡혔는데, 그 마님은 허송세월할 것이라면 차라리 아이나 보아달라 하였다.

그런데 또 그 직후에 그의 아비가 녀석을 붙잡고는, 아비 일터에서 허송세월하느니 차라리 어디 글방에라도 가서 풍월 읊는 소리나 들으라며 쫓아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주인마님 사이 싸움 붙일 생각에, 이렇게 그 집 아들 손을 꼭 붙잡고 이곳 서원까지 왔더랬다.

“나름대로 천하의 영재를 모으겠노라, 이렇게 내 만년의 마지막 큰일이라 생각하고 서원을 세웠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인재 찾는 체의 구멍 사이로 빠져나가는 이들이 있지 않은가? 저런 이들 하나 놓치지 않고 모두 그 재주를 펼칠 수 있게 된다면, 그 세상은 얼마나 훌륭하고 살기 좋겠는가.

요새 이 늙은이가 하는 두서없는 고민 중 하나라네.”

그리고 주세붕 그가, 늙어서 단 맛 쓴 맛 다 보면서도 저의 뜻 펴기 위해 민주당과 함께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 벼슬살이는 조금 어떤가? 요새는 면신례도 없고, 조정이 갈라져 다투면서도 정작 궐내에서 목소리 높이는 일은 없다고 들었는데.”

“실은, 그 때문에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아, 요새 대간(臺諫)의 일이 예전같지 않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그것이 참인 게로군.”

예로부터 주세붕의 잘난 점이자 못난 점은 벗을 가리지 않고 사귄다는 것이었다. 대윤과 소윤, 사림과 외척, 그리고 지금은 민주당까지. 조선국에서 가장 발 넓은 사람을 꼽는다면 민주당의 우두머리들 다음으로 주세붕이 꼽히리라.

그리고 염치 불고하고 심의겸이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 하여, 혹 소생에게 도움 될 만한 이의 이름을 들을 수 있을까 하여 이렇게 번거로움을 끼쳐드리게 된 것입니다.”

“허어, 자네도 참 사정이 딱하게 되었군.”

한양에 온갖 문물이 모이게 되면서, 중화(中華)에 빗대어 서울의 세련됨을 뜻하는 경화(京華)라는 말도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심의겸은 주세붕의 침침한 눈으로 보아도 변명의 여지 없는 ‘경화’한 사족 젊은이였다.

그런 젊은이가 성이 심씨라면, 누구든 바로 청송 심문 사람임을 깨달을 테다. 더구나 이미 <육신전> 시절 한바탕 난리 겪은 이래로 사업당 사람들은 왜놈이나 코쟁이는 믿을지언정 같은 조선 사람은 쉽게 믿지 않게 되었으므로, 직접 민주당 중진들을 상대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만 구슬려 당수의 소재에 대해 듣는 것은 불가할 터였다.

그때, 주세붕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수가 하나 있다네. 다과상 차린 것이 무색하긴 하지만···”

“예?”

“방금 나간 그 어린아이 있지 않았던가? 그이의 아버지가 사업당 쪽에서 일하고 있다네. 무릇 동심(童心)이라는 것이 다 큰 어른의 마음보다는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 아이를 잘 구슬려보면, 뭔가 길이 생길 수도 있겠지.

다만 조심해야 하네. 나는 자네의 성품을 얼추 알지만, 아이의 부모는 그렇지 않으니. 만약 자네가 내게 말하였던 것과 달리, 문중이나 당파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술수를 부리려 한다면, 뒤탈이 날 수도 있네.”

“뒤탈이라 하시면···”

“하하, 가보면 알게 될 것이야.”

얼떨떨해 하면서도, 뭔가 기회가 될 것임을 직감한 심의겸은 감사 표하며 급히 일어났다.

방금 나갔던 그 아이는 여전히 꼬맹이 손을 잡은 채, 자신이 부리는 듯한 동년배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심의겸은 주세붕의 말을 떠올리며, 녀석에게 수작을 걸었다.

그리고 곧, 스승의 말씀이 무슨 뜻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녀석의 이름은 이순신이요, 녀석이 이간계 위해 데리고 나온 꼬마의 이름은 임바우였던 것이다.

주세붕이 일러준 대로 하였더니, 과연 심의겸은 사업당 안쪽 깊숙한 곳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사업당 옆 골목에서 이르렀을 때부터는 제 뜻으로 걸어들어온 것은 아니요 끌려들어온 것이었지만, 어쨌든 지금껏 심통원이 풀었던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깊숙히 들어온 셈이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야 늘 근심걱정이지만, 이 사람은 아이가 무언가 자질이 있다고 믿소이다. 사람을 곧잘 꿰뚫어보고, 계책을 세우거나 남의 계책을 미리 알아채곤 하니.”

“신재 선생께서도 비슷하게 평하셨습니다.”

“그런 아이가 그대를 이르러, 나쁜 뜻으로 오지는 않은 듯하다 하였으니, 그대를 믿을 만한 여러 이유 중에 또 하나가 되겠소이다.”

“나머지는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직은 한참 이르다오.”

세간에서 백의재상이라 일컬음 받는 수산 선생 이지함이 말했다. 나긋하면서도 단호한 말투에, 그러면서도 심의겸 저를 샅샅이 흩는 듯한 눈빛. 심의겸은 지금껏 박순이나 허엽 같은 이들이 저들의 사형 이야기 나오면 입 모아 칭송하던 데 이유가 있음을 깨달았다.

“헌데 어찌하여 성상께서 그러한 교지를 내리셨는지, 그것은 알 수 없구려. 그저 이 사람이나 두 사제들에게 명하여, 아는 대로 고하라 하셨다면 그만이었을 텐데.”

“신자(臣子) 되어 어찌 이를 함부로 논하겠습니까.”

보나마나 임금 본인은 아무 생각 없이 한 마디 하였는데, 그것을 기회라 여긴 심통원이 또 얕은 수를 부린 것일 테다. 금상의 사람됨을 얼추 아는 이지함 머릿속에서 그런 결론이 바로 내려졌다.

“여하간, 그대가 이리 찾아온 것은 우리 당에도 실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소이다.”

이지함이 심의겸을 더욱 깊숙한 곳으로 잡아끌었다.

바깥에서 보았던 사업당도 제법 넓은 듯했는데, 안쪽에서 보니 그 깊이는 아홉 겹보다도 더 깊은 듯하였다. 분명 바깥에서 보이지 않도록, 교묘하게 이웃한 다른 집까지 하나로 묶어 한 동을 통째로 저들의 것으로 삼은 것이리라. 만약 그렇다면, 사업당의 규모는 여느 궁(宮) 못지않은 셈이었다.

그리고 곧 그들이 닿은, 큼직한 전각에 들자마자 심의겸은 어찌하여 사업당이 이토록 거대한 규모가 되어야 했는지를 깨달았다.

“<천하전도>는 이제 딱히 기이한 그림이라고 하기도 어렵지 않소?”

“그것은 그렇습니다만···”

이미 <격몽요결>을 비롯해, 천지의 형상을 논하는 글과 그림은 조선에 널리 퍼졌다. 약간의 은전만 있으면, 한양은 물론이요 감영이 있는 고을에서 쉽게 저 지도 – 대개는 그저 조악하게 모양새만 따라한 것이겠지만 – 를 구할 수 있을 테다. 선비의 와유(臥遊, 지도를 보며 이국을 상상하는 취미활동의 일종)에는 <천하전도>만한 것이 없었으니.

허나 눈앞에 걸려 있는 지도는, 무언가 달랐다.

나라와 고을의 이름 대신, 곳곳에 꽂힌 바늘과 깃발, 그리고 깃발 사이사이 이어진 실타래가 지도를 채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실타래가 지도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이 천하의 참된 모습을 드러낸다.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아카풀코를 거쳐 마닐라로, 마닐라에서 류큐와 히라도, 인천과 동래로.

인천에서는 다시 항주와 천주를 거쳐 말라카로, 말라카에서는 고아로.

의주에서는 강 건너 길림성(기린울라), 그곳을 거쳐 저 막북까지.

“멋지지 않소? 저 중 가장 긴 실타래가 바로 우리 임 당수가 만들어낸 것이라오.”

인천부터 지도의 서쪽 끝, 심의겸이 알지 못하는 문자로 ‘Inglaterra(잉글랜드)’라 쓰인 곳까지 이어지며 ‘Europa’ 전체를 관통하고 또 아우르다시피 한 실타래를 짚으며 이지함이 웃었다.

“헌데 그자, 아차, 그분은 아직 당도하지 않으셨잖습니까? 분명 양이대선 수십 척과 함께 오고 있다고 하였는데···”

“그렇소. 하지만 소식은 더 일찍 전해질 수도 있는 법이라오. 아시다시피 동쪽 바다는 우리 당의 것이 되어가고 있고, 이미 조선과 그 일대는 거의 그렇게 되었으니 말이오.

수십 척 대선에 대한 소문은 참이오. 갈레온과 카락 여러 척. 심지어 중간에 불운하게도 대풍(大風)을 만나 두 척을 잃었는데도 그만큼이라지. 지금은 아마 마닐라에서 막 류큐로 항해하고 있을 것이외다.”

태연하게 말을 잇는 이지함, 그 뒤의 거대한 지도.

그제야 심의겸은, 아직 무어라 형언할 수는 없지만 이치 하나를 깨달았다.

어찌하여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들, 민주당을 따라잡지 못하는지.

그리고 어찌하여 민주당이 아무리 은을 풀어도, 끝내 두려워하며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을 붙잡지 못하는지.

천하는 너무나 낯설었고, 너무나 거칠었으며, 너무나 방대했다.

그리고 너무나 빨리, 조선은 천하 한가운데로 밀려들어가고 있었다. 저 수많은 실타래들에 속박되어.

“이것을 보여주시고자 저를 안으로 불러들이신 것인지요?”

조금 전보다 기가 많이 죽은 목소리로 심의겸이 물었다.

“그것도 있지만, 본론은 따로 있다오.”

그제야 천하전도 옆의, 조선 팔도를 모두 그린 지도가 보였다.

“지난 삼 년간 그려낸 역작 중의 역작이라오.”

임금조차도 가지지 못한, 아니, 소식을 듣는다면 당장 빼앗아오라 할 만큼 정밀하게 조선 산천을 그려낸 지도였다. 지리에 밝지 못한 심의겸조차, 그것을 보자마자 정말로 조선이 저렇게 생겼을 것임을, 선이 있는 곳에 강이 흐르고 뾰족하니 올라온 곳에 산이 있을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제 저곳에도 바늘을 찌르고 깃발을 세우며, 실로 그 사이를 이을 것이오. 그것을 조금 도와주어야겠소.”

“그, 그리하면 소생이 청하는 바를 알려주시겠습니까?”

“하하, 어찌 그러겠소이까? 우선 이곳까지 찾아오시느라 고생을 하셨으니 먼저 알려드림이 마땅하겠지. 임 당수가 지금 어디 있는지 물으시지 않으셨소?

우리 임 당수는 그리 멀리 있지 않소. 그는 실로 양상군자(梁上君子)라, 어울리는 곳에 머물고 있다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들보 위에 있다는 뜻이오.”

그야 당연히 심의겸도 알고 있었다. 수산 선생이 희언(戱言)한 것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낯빛이 진지하였다.

그때, 심의겸의 눈가에 무언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대들보 위에서 그림자 하나가 일어서더니, 아래로 툭 떨어졌다.

묵직한 울림 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거의 도술에 가까운 솜씨. 그제야 이지함의 말뜻을 깨닫는다. 그리고 저의 눈앞에서 몸 일으키는 그 그림자의 크기를 보자마자, 굳이 통성명할 것도 없이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내가 조선국에 돌아온 것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되셨소. 축하하오. 이제 미리 알게 된 값을 내셔야겠소.”

임꺽정이 이지함과 함께 웃었다. 한쪽은 백의재상에 어울리는 맑은 웃음이요, 다른 하나는 ‘이제 너는 큰일 났다’하는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는 험상궂은 웃음이었다.

속마음을 감추지 않고 남을 위하여 보여주니, 이 어찌 군자가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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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의 한양에 비하면 아주 느리게, 그리고 훨씬 적은 양의 은이 유입되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중에 나온 것과 비슷한 변화가 원 역사의 조선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17세기~18세기 동안 일본의 은이 조선을 통해 청으로 넘어가는 교역 구조가 작동하면서 조선은 양란과 경신대기근의 피폐함을 벗어나 경제적 부흥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17세기 후반 이후 그러한 경제성장이 한양과 그 일대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이른바 ‘경향분기(京鄕分岐)’ 현상이 일어납니다. 한양은 청과 서양의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는 조선의 유일한 창구가 되었고, 그것을 향유할 경제적, 정치적 여력을 지닌 사족집단이 머무는 곳이 되었습니다.

심의겸은 심통원과 이량 등, 명종이 윤원형 견제를 위해 외척 심씨 집안과 관계자들을 등용하는 가운데에도 자신만의 소신을 지킨 것으로 명성을 높였습니다. 특히 이량의 발호가 극에 달했던 1560년대 초에는 같은 집안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이량을 탄핵하기도 했지요. 그 결과 척신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림 사이에서 큰 명망을 얻었고, 선조 연간에도 더욱 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꼿꼿함은 결국 당쟁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신진 사림 중 하나였던 김효원이 일찍이 윤원형의 집에서 문객으로 지냈던 것을 문제삼아, 그자 인사 분야의 실무를 책임지는 요직 이조정랑 자리에 앉는 것을 격렬히 반대하였던 것이지요. 이는 이미 명종 말기부터 벌어지고 있던 기존 사림과 신진 사림 사이의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고, 잘 알려진 동서분당의 원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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