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69화 (169/259)

51. 큰 바람 일어나고 (2)

귀국하는 동방 사절단과 함께 모카를 떠난 대선단 중 두 척은 도중에 가라앉고, 한 척은 수리하는 비용이 너무 클 것이라 하여 말라카에서 반값에 처분하였다.

또한 이탈리아 사람들이 빌린 카락 세 척 중 두 척은 무역풍 타고 향료 제도로 직행하였기에 말라카에서 고별하게 되었다. 허나 그러고도 레가스피의 에스파냐 갈레온은 네 척, 핀투 선장의 카락은 여덟 척이 남았다. 그 여덟 척 중 바예지트의 배는 세 척, 이탈리아 측에서 빌린 배는 한 척이었다.

“··· 그리고 그사이 나는 빠른 배를 타고 조금 일찍 조선으로 돌아왔소. 자, 다 알아들으셨소?”

“꺽정아, 모든 사람이 다 율곡 같지는 않다. 지필묵이라도 주고 받아적으라 해야지, 무슨 무리한 말을 하고 있느냐.”

“내가 보니까 밤골 도령 닮은 사람이 세상에 널려 있던데, 그냥 저이가 좀 모자란 것 아니오? 좀 배운 사람이라면, 대충 말해도 그 자리에서 다 외우고 그래야지.”

저도 모르는 사이 이탁오와 엘리자베스 튜더, 술탄 쉴레이만 등과 견줌을 당하게 된 심의겸은 얼떨떨할 뿐이었다.

“암만 조선 사람들 견식이 옛날보다 넓어졌다 해도, 느닷없이 베네치아 유리가 어쩌고, 누에바에스파냐 땅에서 넘어온 약초가 저쩌고 하면 알아들을 리 있겠느냐?”

“사형은 알아들었잖소?”

“아니,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나나 율곡 녀석 같지는 않다는 말이다.”

방금 전까지는 실로 도성 가운데서 이인(異人) 만난 듯하던 심의겸은, 그 사람이 지금 눈앞에서 저의 사제와 투닥거리고 있는 이와 같은 사람인가 일시 의심하였다.

그러나 의심이 깊어지기 전, 이지함이 소매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려주었다.

“자, 저 녀석, 아니, 임 당수 말은 그냥 한 귀로 흘려도 괜찮소. 여기 미리 적어놓은 것이 있으니, 차근차근 읽고 머릿속에 담아가시오.”

이탁오가 틈틈이 정리하여 조선으로 미리 가는 꺽정이 편에 보낸, 동방으로 오고 있는 귀인들과 각종 물산을 정리한 목록이었다.

이미 혼이 절반쯤 빠진 심의겸은 무심결에 그것을 받아 펼쳐보았다. 그런데 딱 펼치자마자 진서와 국문이 범벅 된 어지러운 글이 튀어나오고, 그 목록의 면면은 심지어 더욱 심란하였으므로, 아직 그나마 몸뚱이에 붙어 있던 혼백 절반도 얼른 나가야겠다며 발버둥을 칠 지경이었다.

맨 앞에는 당당하게 ‘셰자데 바예지트’라 큼직하게 적혀 있고, 뒤이어 깨알 같은 글씨로 주해(註解)하기를,

‘셰자데란 곧 오씨 태안국(吳氏泰安國, 오스만 투르크) 왕자의 칭호라. 그 땅에서 형을 해치려다 부왕의 미움을 사 동쪽으로 쫓겨났는데, 민주당은 장차 그를 대동양(大東洋) 너머 개척하는 데 보낼 계획이다. 대명에 바칠 국서와 조선에 올릴 국서를 각각 지니고 있으며, 그 거느린 배는 총 세 척이다.’

되어 있었다.

바로 그 다음에는, 피에트로 로레단(Pietro Loredan)이라는 이름과 함께 ‘대존국(大尊國, 가장 존엄한 나라La Serenissima, 베네치아의 칭호) 베네치아’라는 국명이 적혀 있었다.

나라의 기묘한 이력도 이력이거니와, 여백에는 언문으로 ‘로레단 어르신에게 두카트 세 닢을 받고 그 이름을 바예지트 녀석 바로 다음으로 올려두었소. 나중에 술이나 한 잔 사 드리리다. - 탁오’하는 글이 적혀 있었으므로 심의겸은 더욱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략 여기 적힌 것과 같은 이들과 물산을 실은 배가, 약 한 달 보름 안으로 인천 앞바다에 당도할 것이오. 그곳에서 먼저 작은 배 한 척을 대국으로 보내 입조(入朝) 청할 것이고.”

해금령이 내려진 이후, 일락(日落) 사신 자처하는 상인이 내조(來朝)한 이래로 제대로 된 서역 사신을 맞이한 적 없던 명국 예부는 곧 발칵 뒤집힐 터였다. 오스만 술탄 쉴레이만과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 이탈리아 연맹 여러 나라, 조호르와 류큐, 잉글랜드까지 수많은 나라의 국서가 한 번에 들어갈 것이었으므로.

(잉글랜드는 실제로는 그 어떤 사절도 보내지 않았는데, 엘리자베스 이름을 사서에 올려주고 싶은 마음 절반, 조공을 빙자하여 포르투갈 ‘한인(漢人)’들에게 장사판 깔아줄 마음 절반으로 이탁오가 ‘리즈’를 꼬드겨 언니 대신 저의 이름으로 국서를 쓰게 하였다.)

“그리고 임 당수는 그때 인천에 그 일행과 함께 닿아, 한양으로 직행하여 주상을 먼저 뵐 것이오.”

“그러니까 나는 아직 조선에 없는 것이다, 그 말이지.”

그제야 심의겸도 조금은 정신을 차렸다.

“지금 제게 기군망상(欺君罔上)을 범하라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 지금 우리 사형께서 그 목록까지 건네주지 않으셨소? 그것을 읽고, 돌아가서는 ‘임꺽정이 따라온 그 양이대선 선단이 대략 한달 보름 뒤에 당도할 것이며 그 배에는 아무개와 무엇무엇이 실려 있다 하옵나이다’ 고하면 될 일이지. 그렇게 하면 딱히 기군망상도 아니지 않소?

뭐, 정 아니꼬우면 밖에 나가서 실은 임꺽정이가 한양에 몰래 기어들어와 숨어 있다더라 외쳐보시오. 누가 믿어나 줄까 모르겠지만.“

듣고 보니 그랬다. 황명을 받아 바다 바깥의 제이(諸夷, 여러 오랑캐)를 둘러보고 왔다면, 그것도 엄청난 귀인들을 대동한 채 막대한 재물과 함께 돌아오고 있다면, 어지간한 사내는 성대한 환영 받으며 금의환향할 생각을 품지, 이렇게 도둑놈처럼 몰래 돌아와 뭔가 엉뚱한 짓을 꾸미려 하지는 않을 터였다.

허나 세상에는 임꺽정이가 도둑놈이라 욕하는 자들은 많을지언정, 그 도둑놈 심보가 얼마나 깊은지 아는 자는 드물었다.

“그러니 얼른 나가서, 우리 사형이 시킨 대로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시오. 그리하면 그대는 명 받은 대로 행하였으니 좋고, 그대 집안 사람들은 나름 임꺽정이 동태 알게 되었다며 좋아할 것이고, 우리네는 또 우리대로 좋을 이유가 있소.”

조선에서 뭔가 해보려는 사람이라면, 그가 문반이든 무반이든, 그저 세상 원망하는 선비든, 요행만 바라면서 놀고먹던 잡배든, 모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소식.

임꺽정의 귀환은 그만한 소식이라 할 만하였다.

“그대가 조정에 이러한 답을 사업당의 아무개로부터 들었노라 고하는 순간, 팔도가 시끄러워질 것이오. 조정에서, 또 그대 문중에서 어딘가로 사람이 달려나갈 것이오. 고을에서 고을로, 들에서 산골짜기로, 또 포구에서 섬으로 전해지겠지. 우리는 그것을 살필 것이오.”

지금 조선 팔도에서 그처럼 기민하게 소식을 주고받을 만한 이들이라면 민주당을 제하면 몇 되지 않았다. 이를테면, 심의겸조차도 그 내막을 잘 알지 못하는, 허나 심통원이 종종 경솔하게 떠들고 다니곤 하는, ‘우리 당’이라던가.

그 당의 세력이 대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우두머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심의겸은 알지 못했다. 그저 종조부 심통원이 안다고 자부하는 것보다는 더 뿌리 깊고 넓음을 짐작할 뿐.

눈앞의 두 사람은, 그것을 임꺽정 본인의 소식을 미끼 삼아 파헤쳐내려는 것이리라. 민주당에게 있어, 각 도, 각 군현에 사람을 풀어 살피는 것 정도는 아무런 일도 아닐 테니.

조선 팔도를 거대한 장기판으로 삼아 벌일 엄청난 다툼. 그리고 저도 모르는 새, 자신이 그 다툼의 첫 포석을 두는 일에 발을 들여놓았음을, 심의겸은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마에 그사이 식은땀 몇 방울이 서렸다.

“이 모든 것을 그대로 전할 필요는 없소.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든 더 소략하게 고해도 되고, 아니면 문중에 일러바치는 것과 주상께 계달(啓達)하는 것을 달리해도 괜찮소. 물론 그것이야말로 기군망상에 해당하는 일이니, 그대가 스스로 알아서 어찌할지 정해야 하겠지만.”

“그, 제가 당수나 수산 선생의 본뜻까지 그대로 문중에 고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어찌하실지···?”

심의겸은 어째 자신이 괜한 것을 묻는 것은 아닌가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물었다.

“그 또한 그대 마음대로 하면 되오. 이 소식을 가지고 돌아가서는, 민주당이 장차 이를 바탕으로 뭔가 계책을 꾸미려 하니 유의하라 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갑자기 그대가 찾아가서 그런 소리를 하면, 그대의 종조부 되시는 만취당(晩翠堂, 심통원의 별호)께서 어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소.”

어찌 생각하겠는가. 심의겸이 대체 어떻게 그런 이지함의 깊은 속내까지 들었는가 의심하고, 또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반간계(反間計) 아닌가 의심할 것이다. 가뜩이나 심씨 문중에서 유별나다 소리 듣는 심의겸이었으므로.

그러니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심의겸은 알아서 오늘 본 바 중 일부를 스스로 덜어내어야 하리라.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오. 이미 그대의 성정 어떠한지, 문중의 일에 대해 평소 어찌 여기고 있는지는 이 사람도 잘 알고 있으니. 어차피 그대는 언제고 눈 밖에 나거나, 아니면 스스로 걸어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오. 조금 일찍 그 기로에 섰다고 생각하시오.”

“기로라 하셨습니까?”

“사업당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다오.”

이지함이 넌지시 제의하였는데, 여전히 눈앞 젊은이가 영 모자라다 여기는 꺽정이는 과한 상냥함으로 덧붙여주었다.

“실제로는 유시(酉時, 17~19시)에 퇴청 준비하고 술시(戌時, 19~21시)에는 문 걸어잠그니 오해는 하지 마시오.”

심의겸이 비틀거리며 사업당 밖으로 내쫓기듯 나가고, 다시 전각 안에는 평온이 돌아왔다.

“앞으로 남은 한 달 보름은 제법 재미있겠소. 한양 한가운데서 모두와 숨바꼭질 하는 격이니.”

꺽정이가 돌아온 것은 당 안에서도 몇몇 사람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입 가벼운 작자들이나 머리가 가벼운 작자들은 어디를 가나 있었기에, 그런 치들을 제하고 정말로 알아야 할 사람 몇몇에게만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입은 가볍지만 머리는 훨씬 묵직한 이이 한 사람은 예외였다.)

그러니 숨바꼭질이라는 저의 말이 참 절묘하지 않으냐, 말하면서도 자화자찬을 하는데, 어째 이지함 대꾸는 들려오지 않았다.

고개 돌려보니, 마치 무언가로부터 눈과 귀를 돌리려는 양 지도만 열심히 쳐다보는 이지함이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피하여 저리하는 것인가? 갑자기 등 뒤에 범이라도 한 마리 있는 양 섬뜩함이 느껴지더니···

“그러게요. 참 재밌겠네요.”

도끼눈 뜬 명희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삼 년 만에 돌아왔으면, 그래도 조금은 더 가내(家內)에 충실하리라 여겼는데, 낭군께서 외유(外遊)에 심취하시니 규방(閨房)에는 한탄만 남겠네요. 뉘 집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참 그 집 사람들은 설움이 크겠어요. 그러지 않을까요?”

“그, 그래도 한 사흘은 함께 집에 틀어박혀 있었지 않소?”

“그리고 나흘째 되자마자 뛰쳐나갔지요. 무슨 우임금도 아니고.”

“그렇지만 바우 그 어린것하고도 놀아주고, 나름대로 그간 못한 애비 노릇은 했소. 녀석이 딱 보자마자 아빠 하고 알아보던데. 누가 엄마 안 닮았달까 봐 좀 영특한 게 아니오.”

눈 달려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꺽정이가 바우의 아비임을 알 것이었다. 허나 꺽정이 보기에는, 세살배기 바우가 고작 며칠 사이에 아빠 소리 하는 것이 여간 기특하지 않았다.

“아이고, 그렇게 아들을 아끼시는 우리 낭군께서 오늘은 어쩌다가 바우를 버려두고 여기 전각 대들보 위에서 소일을 하셨을까요? 바우가 오늘 마당 돌아다니다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어린 이순신의 이간계는 제대로 들어먹혔다. 명희는 저의 스승에게 아들놈 단속 좀 똑바로 하라고 날을 세우고, 머쓱해진 이정은 아들녀석 붙잡아 제대로 호통을 치려다가, 바우에게 군것질도 시켜주고 저는 아버지 말씀 따라 가르침을 구하러 갔을 뿐인데 왜 그러시냐는 말만 들었다.

그리하여 이정은 셋째아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다음부터는 어지간해서는 뭘 시키면 안 되겠거려니 하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물론 암만 그래도 아비로서의 마땅한 책무가 있으니, 회초리 몇 개는 부러뜨려야 했지만.

“그, 그거야 사정이 있지 않았소.”

허나 이 모든 것이, 애초에 꺽정이가 바우를 데리고 다니기만 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 그러니 꺽정이는 저도 모르게 한 구석이 찔려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바우 녀석은 어린 마음에 밖에 나가서 뛰어다니며 놀고 싶어하는데, 나는 아직 모습을 함부로 드러낼 수 없잖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답하는 낭군을 보며, 명희가 웃었다.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지요, 헤헤.”

“헤··· 헤? 어째 무서워지는데.”

“낭군님 생각하며 저는 지난 열흘, 아니, 이레 동안 바쁘게 일했어요. 얼마나 바쁘게 일했는지 아세요? 한 달 가량은 아예 손을 놓아도 될 만큼, 말끔하게 정리를 해 두었지요.”

“한 달?”

“그리고 병해 스님께서 청해서, 좋은 곳도 하나 마련해 두었고요. 지금은 안 쓰는 절간이라는데, 우리가 이곳에서 못다 푼 회포를 마저 풀 수 있지 않겠어요? 거기서 한 한달 푹 쉬다 보면 말예요.”

홍천 우적산(牛跡山)에 있던 일월사(日月寺) 주지는 평소 봐두었던 옆 골짜기 명당으로 절을 옮기고, 이름을 수타사(壽陀寺)로 고쳤다.

그런데 옛 도량을 다 헐어 새 도량 짓는데 쓰려던 차, 명망 높은 것을 넘어 팔도 양종(兩宗) 그 어느 석문(釋門) 사람도 함부로 못 대할 보우대사께서 찾아와, 옛 절간을 다 허물지는 말고 조금 남겨놓는 것이 좋겠다 하였던 것이다.

“그, 절간에서 그래도 될까 싶소. 내가 아무리 세상 무서운 것 없이 산다지만은···”

“그렇게 독실하신 보살님께서 남의 나라 대웅전 공사는 그렇게 훼방을 다 놓으셨어요? 그리고 이미 폐사(廢寺)된 절터인데 무슨 상관이겠어요.”

이미 지난 며칠간 명희에게 지난 삼년 사이의 사정을 소상히 고하였던 – 저 대신 선단 이끌고 올라오고 있는 이탁오가 명희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 꺽정이였기에, 명희도 저의 부군 행적을 부군 상대로 거론할 수 있게 되었다.

하비에르 같은 이들이야, 그렇게 성 베드로 대성당이 ‘대웅전’으로 굳어져가는 것을 알게 되면 차마 욕도 못하고 그저 미간만 움켜쥐겠지만.

“한 달이라.”

그제야 얼떨떨함이 가시고, 명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게 되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늦게 샘솟는다. 이 무심한 남편을 위해 삼 년간 기다려주고, 그것도 모자라 그런 자리까지 마련해주는 아내.

저의 미련함을 탓하느니, 차라리 말로 심경을 드러냄이 나으리라.

“고맙소. 그리고··· 그리웠소.”

“저도 그리웠어요. 많이.”

이지함의 머쓱한 헛기침 소리가 났다.

“사형은 눈치도 없소? 헛기침할 겨를이 있으면 얼른 나가시오.”

“이놈아, 그게 삼 년만에 상봉한 사형한테 할 소리냐?”

“아니꼬우면 사형도 다음부터는 조총 쏘는 걸 연습하시든가. 사형 검술은 예나 지금이나 나보다 한참 못하지만, 안사람 조총은 맞기만 하면 죽는다오.”

“말이나 못하면.”

그리하여 며칠 뒤, 우적산 산속에 덩그러니 남은 아주 한적한 절터에, 수상쩍게도 덩치 큰 사내와 수상쩍게 아리따운 여인이 들어갔다. 사내와 여인 손 잡고서 아이 하나도 함께 들어갔다.

뒤이어 일손 같아 보이기도 하고 산적 같아 보이기도 하는 놈팽이 몇몇도 들어갔는데, 사내와 여인, 아이는 그 이후로 한 달간 도통 바깥에 나오지 않고, 산적 몇몇만 주변 돌아다니며 궁시렁거리고 물을 긷고, 나무를 하곤 하였으므로 간혹 지나가는 산골 사람들은 더 깊게 파고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난 수 년 사이 – 지난 3년 사이에는 더욱 부쩍 – 조선과 대국 사이의 바다를 오가는 배가 늘어났다. 워낙 배로 오갈 수 있는 바다가 많다 보니, 옛날처럼 뭉뚱그려 ‘남양(南洋)’이니 ‘동해(東海)’니 할 수만은 없었다.

특히나 ‘동해’가 애매하였는데, 대국의 동해는 곧 조선의 서해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조선해’라 부르자니 산동에 사는 대국 사람들이 발끈할 일이요, ‘산동해’라 부르면 남북 직례(直隷, 북경 및 남경 일대) 사람들이 또 발끈할 일이었다.

그러므로 누군가 좋은 발상을 내기를 – 주로 이런 시시콜콜한 싸움으로 인해 손해를 보는 자유민주당 뱃사람들이었다 - 그 바다로 들어가는 가장 큰 강의 이름을 따서 바다도 호칭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였다.

마침 훨씬 작은 규모기는 했지만, 발해(渤海, 보하이 만)니 요해(遼海, 랴오둥 만)이니 하는 전례도 있었으므로, 다들 그것을 명안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대명 천자도, 조선왕도 알지 못하는 사이 바다의 이름은 황하에서 따와 황해(黃海)라 불리게 되었다.

그렇게 바다의 이름이 생길 만큼 이 ‘황해’를 오가는 배가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으므로, 양이의 대선 여러 척이 북상하고 있다는 사실은 곧 소문이 아닌 제대로 된 장계(狀啓)로서 한양에 닿았다.

자유민주당에서 동래와 제주로 사람을 보내, 곧 그런 배들이 지나갈 것이니 놀라지 말라 통보하였고, 이윽고 부쩍 늘어난 조선 수군의 전선들도 초계하던 중 그 배들의 고산준봉 같은 돛대를 발견하고서는, 다소 경계하면서도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게 문정(問情)하는 절차를 밟았다.

옛날 같았더라면, 놀란 백성들의 소문 속에서 ‘양선 여러 척’은 ‘양선 수백 척과 수만 대군’이 되고, 지레 놀라 여기저기서 피난도 가고 도둑질도 하고 했을 터였다. 그러나 요새는 그런 배 서너 척쯤은 종종 인천에 닿곤 하였으므로, 다들 구경거리라 여길지언정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 대신 벌어지는 일은 이러하였다.

“임 당수께서 돌아오신답니다! 강화도 목 좋은 곳에서 구경하십쇼!”

“사람 다섯 구경하는 데 한 냥이오! 명일(明日)부터는 두 냥이니, 오늘 미리들 사시오!”

도성 곳곳에 저렇게 외치고 다니며 장사하는 이들이 생겨났는데, 얼마 전 오붓한 한 달을 아쉬움과 함께 마치고 흑의영 한 구석으로 몰래 들어온 꺽정이 귀에까지 그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저 장사를 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꺽정이 맞이하는 연회를 어찌 준비할지, 꺽정이 본인과 함께 열심히 논의하고 있던 서림이 문득 농을 던졌다.

“이미 자리 장사는 하고 있지 않소?”

“그건 여기 흑의영에서 잔치 벌일 때 자릿값 걷는 것이고요. 더구나 자릿값 받아서 우리 곳간에 넣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대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은, 먹을 것 찾아 소문 듣고 기웃거리는 잡인(雜人)들이 궁시렁대며 하는 말이었다.

허나 말이 그렇지, 어지간하면 찾아오는 이에게 국물 한 사발은 내주고, 선비의 행색을 하고 있다면 국수까지도 두둑이 말아주는 것이 조선국 상정(常情). 그러니 투덜대면서도 잔치만 벌어졌다 하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리고, 또 잔칫상 상석 앉은 이 체통 때문에라도 그런 이들에게 국수든 국밥이든 한 사발씩은 돌리곤 했다.

어디 시골 진사 회갑연만 해도 그리할진대, 천하의 임 당수 오신다면 얼마나 많은 잡인들이 몰리겠는가? 그저 사람 깔려죽는 것 막는 데에도 흑의군 전원이 달려들어야 할 판국이었다.

그때, 꺽정이 왔다는 소식을 사임당으로부터 듣고 미리 찾아왔던 황진이가 제안하기를, 그러면 연회 자리에 드는 값을 따로 걷자고 하였다. 그 값을 받아다 어디 좋은 데 쓰면, 예컨대 근래 도성이나 송도 주변에 부쩍 늘어난 가난한 이들 구휼하는 데 쓰면, 온갖 못난 놈들이 연회 흥 깨뜨리는 것도 막고, 동시에 좋은 일도 할 수 있으니 서로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과연 왕년에 어지간한 연회는 모두 다녀보았던 황진이다운 발상이었다. 그사이 송도에서 스승이 쓰던 초당을 개수해 ‘화담여숙(花潭女塾)’ 세운 황진이는, 틈틈이 자신이 쥔 사업당 분표만큼 이익이 들어올 때마다 송도의 어려운 이들 돕는 데 쓰곤 했다.

그리하여 곧 공보에 임 당수 및 그분 찾아온 각국 귀인들 맞이하는 잔치 열린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흑의영에서 열릴 그 큼직한 잔칫판에 들고자 하는 이는, 좋은 뜻에 쓴다 생각하고 값을 내라는 공고도 함께 실렸다.

(또한 아래에 짤막하게 덧붙이기를, 은과 사업당 분표, 은정고 은표銀表만 받으며, 쌀이나 포목은 아니 받는다 하였다.)

“도성에 나날이 사람 늘어가니, 어디 오가는 것도 고역이구나. 다 꺽정이 네 녀석 때문이다.”

꺽정이와 명희 상경 소식 듣고 뒤늦게 나타난 이지함이 농담 섞인 투정을 부렸다.

“그사이 여기저기 길도 제대로 닦고 있던데, 수레나 타고 다니시지 그러시오.”

“아서라, 차라리 정말로 축지법을 배우고 말지.”

가벼운 담소가 한 순 도니, 자연스레 좌중 눈빛이 한결 진중해졌다.

“그나저나, 그때 그 일은 어떻게 잘 되었소? 내가 돌아온다는 소식 퍼뜨린 일 말이오.”

“그것 때문에 이렇게 인파 헤치고 찾아온 것 아니겠느냐.”

이지함이 흑의영 한쪽에 걸려 있는 조선 팔도 지도를 내오며 말했다. 사업당 깊은 곳에 있는 것만큼 정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대체 네가 두리손 그놈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어지간히 독기가 올랐던 모양이다. 우리 생각보다 훨씬 넓게 손발을 뻗고 있더라. 이번에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언제고 낭패를 볼 뻔하였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좋지 않소? 삼 년 전에 우리가 세웠던 대계를 생각하면 말이오.”

“그건 그렇지만··· 일단 마저 들어보아라.”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은, 무본사 통해 모인 한양 한량들.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별 쓸모 없는 잡다한 무리였지만, 이들은 그저 민주당 천하를 못마땅해 하거나 그저 훗날 대비하여 양다리 걸치는 도성 벌열가들을 묶어주는 거간꾼일 뿐이었다.

그리고 청송 심문 및 그들과 연 닿는 여러 사족들. 이쪽은 탕평당 사림과도 여러모로 인맥이 겹쳤으므로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대체로 도성과 그 근교에 머무는 소위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이었다. 목소리는 클지언정, 스스로 나서서 무언가 횃불을 들지 못할 자들.

“그리고 관군이 있다. 남치근 그이를 기억하느냐?”

“기억하고 말고. 조금 연이 깊은 게 아니잖소.”

“그이가 제법 군관들을 모은 모양이다. 언제고 한양까지 쳐들어올 수 있을 만큼.”

물론 옛날 폐주 연산 몰아낼 때처럼, 한양 하나 장악하는 것으로 민주당을 물리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치를 깨달았다는 것은, 곧 남치근이나 다른 식견 짧은 군관들 뒤에 누군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육신전> 소동 때 근왕을 운운하며 여기저기서 모였던 각지 군현의 별 볼일 없는 사족들. 여기까지는 이지함도 예상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 ‘재조론’을 내었을 만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지.”

부디 이언적까지 이 일에 완전히 관여하지는 않았기를, 이이와 이지함 모두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바람이 이루어져, 이언적에게는 그 누구도 임거정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두리손 그놈이 어디서 그런 논변을 구해왔다는 말이오?”

“그것을 알 수 없으니 골머리만 썩이고 있지 않겠느냐.”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 꺽정이 부르는 소리가 났다.

“당수! 큰일입니다!”

어쩌다 이번 연회 준비에 끌려들어 고생하고 있던 전직 역관 홍순언이 멀찍이서 달려왔다. 꺽정이 ‘귀환’이 다가올수록 꺽정이 소재를 아는 이도 늘어나고, 또 준비해야 할 일도 함께 불어났기에, 저렇게 얼 빠진 실수 하는 자도 간혹 생기곤 했다.

“당수는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무슨 소리냐? 헛소문 날라.”

꺽정이가 저의 존재를 부정하니, 그제야 홍순언도 실수를 깨달았다.

“아차차, 별감 어르신! 큰일입니다!”

공보에 임 당수 환영 잔치 소식이 실린 이래로, 도성과 그 바깥의 제법 위세 높다 하는 자들이 앞다투어 석패(席牌, 입장권) 사겠노라며 여기저기서 재물을 보내곤 하였는데, 이것을 정리하는 것도 제법 큰일이었다.

개중에는 형편이 어려운데 나중에 나누어 내겠다는, 영 변변찮은 소리 하는 작자도 있고, 참으로 좋은 뜻에 재물을 모은다며 상찬하는 글과 함께 은표 보내오는 서생도 몇몇 있었다. (근래 농계 꾸려서 큰돈 만진 대양서생 고경명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뭐가 큰일이라는 말이냐? 누가 우리네 연회에 어깃장이라도 놓았느냐?”

“그, 그건 아닙니다만··· 은 대신 다른 것을 내면서 표를 달라고 한 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값 치른 것이 어째 묘하여···”

홍순언이 곧장, 누가 제게 주고 갔다며 종잇쪽 한 장과 주머니 하나를 내 주었다.

그리고 곧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묵직한 것이 모습을 드러내고, 덩달아 종이에 쓰인 글 한 줄도 모두의 눈에 들어왔으므로, 이지함과 서림, 임꺽정 모두 말을 잃었다.

모습 드러낸 것은 금빛 번뜩이는 베네치아 두카트요, 종이에 쓰인 것은 이러한 문장이었다.

‘이만하면 값을 치르고도 남으리라 믿소. 곧 뵙겠소이다. – 두리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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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언급된 일락국 또는 일라국(日羅國)은 <명사(明史)>에 언급되는 서양 국가(추정)로, 영락~홍치 연간(15세기)에 수 차례 입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워낙 기록이 소략해 그 정체에 대해서는 논쟁이 많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던 베네치아 상인이 사칭을 하였다는 설부터, 체사레 보르자의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보낸 사절단이라는 설까지 추정만 무성할 뿐이지요. 더구나 당시 남중국해와 인도양에서 활동하던 상인들은 조공체제의 허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사절을 사칭하며 후한 대접을 받곤 했습니다. (명 조정도 이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체통 때문에 모르는 척 넘어가곤 했지요.) 작중에서 이탁오가 엘리자베스를 국제 외교문서 사기극에 끌어들이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명희가 꺽정이를 놀리면서 언급하는 우임금은, 왕위에 오르기 전 한창 치수(治水)에 열중할 때 워커홀릭의 진면모를 드러낸 바 있습니다. <사기>에 따르면, 13년 동안이나 치수 현장을 떠돌았는데 집앞을 지날 때조차 얼굴 한 번 들이밀지 않았다고 하지요. 혼사를 치른 지 나흘 만에 다시 치수를 위해 나섰다는 것도 그에 대해 전하는 전설 중 하나입니다.

홍천에 있는 수타사(壽陀寺)는 본디 708년 창건된 일월사로, 원 역사에서는 1568년 현재 위치로 옮기면서 이름도 수타사(水墮寺)로 바꾸게 됩니다. 이후 임진왜란 당시 한 번 불타고, 인조 연간에 재건된 뒤 조금씩 확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름의 한자는 순조 연간에 한 번 더 바뀌어 지금과 같이 되었지요. 작중에서는 불교가 훨씬 일찍 흥성한 데다가, 상업경제 발달로 종교계 역시 간접적인 혜택을 보고 있기에 수타사의 이전도 조금 이르게 이루어졌습니다.

황해는 중국의 전통적 관념 하에서는 동쪽의 거대한 바다(東海) 중 일부일 뿐이었고, 하나의 독립된 해역으로 인식되지는 않았습니다. 중국인들이 고대부터 활발한 해상활동을 벌인 것과는 별개로, 이러한 교역과 상호작용, 그리고 그로 인해 축적된 지식은 전통적 지리관념에 반영되지 못했던 것이지요. ‘황해’라는 명칭 역시 원 역사에서는 18세기 서양에서 처음 쓰이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황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1737년판 <新중국지도첩 (Nouvel Atlas de la Chine)>에서는 황해를 ‘Hoang-hai, ou Mer Jaune(호앙-하이, 또는 노란 바다)’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지도의 저자는 ‘황해’가 서양에서 임의로 붙인 이름이 아니라, 이미 당대 중국에 쓰이고 있던 표현이라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정작 서해를 ‘황해’라 부른 당대 중국 문헌이 없는 것을 감안하면 기묘한 일인데, 가능한 설명 중 하나는 이렇습니다. 당시 중국에 머물던 서양인들이 조선의 황해도와 산동을 오가던 중국 밀무역상들이 ‘황해(도)를 다녀온다’라고 하는 것을 오해하여 ‘황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것으로 기재하였다는 것이지요. 만약 그렇다면 ‘황해’라는 명칭의 기원은 바다의 색깔이 아닌, 황해도 황주와 해주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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