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70화 (170/259)

51. 큰 바람 일어나고 (3)

바닷바람 크게 일어, 제물포 앞바다 가득 메우다시피 한 카락과 갈레온의 하얀 돛을 한껏 부풀렸다. 마치 뭉게구름이 떠다니는 듯한 장관.

그러나 그것도 한때라, 결국 닻은 내리고 돛은 접었다. 구경꾼들의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뱃전까지 닿았다.

이 모든 배가 강화도를 빙 돌아 한양까지 올라갈 수는 없는 고로, 카락과 갈레온 각 한 척에 중요한 사람들만 싣고 다시 양화진까지 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제물포 포구에 온갖 화물과 사람이 내리고 다시 오르는데, 위세의 당당함은 기벌포 앞바다에 소정방(蘇定方) 닿은 것과 같고 생김새 기묘함은 개운포 앞바다에 처용(處容) 나타난 것보다 더하였다.

언덕 위에서 감탄하고 부두에서 놀라는 군중 사이에서, 덩치 큰 사람 하나가 불쑥 나타나 구경꾼에서 구경거리로 소속을 옮겼다.

“나머지 동무들 내버려두고 혼자 고국 땅 먼저 밟으니 좋습디까? 그새 때깔이 고와졌네, 아주.”

저는 리즈 생각이 아직 다 가시지 않아 아직도 서쪽 땅이 어른거리는데, 눈앞의 임꺽정이는 그사이 조선에 먼저 가서는 저의 배필과 즐거운 나날 보냈으니라 여기는 이탁오는 처음부터 영 삐죽한 말투로 대했다.

“탁오 선생 그대는 대신 자금성 구경을 가게 되지 않았소? 내가 일전에 가서 보니까 제법 장관이던데.”

이탁오 본인을 포함해 모두가 종종 잊고는 하였지만, 이탁오는 엄연히 임거정을 감시하기 위해 천조에서 붙인 관원의 신분이었다.

그러므로 바예지트를 비롯해 각국 ‘사신’들을 데리고 북경에 입조할 때도 이탁오가 함께하게 되었다. 애초에 예나 지금이나 이탁오가 아니고서는 저들 모두와 말이 통하는 사람도 없었다. (천자의 칙서를 거짓으로 옮길 때와 달리 지금은 정말로 서양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정도의 소소한 차이는 있었다.)

“그보다 당장 답을 들어야 할 물음이 있소. 혹시 오는 길에 어딘가에서 베네치아 상인들이 저들 두카트를 흩뿌린 일이 있었소?”

이곳저곳에 팔 물건과, 민기아(Mingia, 명)라고도 불리는 시나 황제에게 바칠 물건, 디오시온 국왕에게 선물할 물건 등을 나누어 하역하는 베네치아 상인과 일꾼들을 바라보며 꺽정이가 물었다.

“황금이야 세상 어디서든 통용되지 않겠습니까. 다만 말라카 동쪽에서부터는 저들과 말 통하는 에우로파 사람이 드물다 보니 딱히 돈 쓸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꺽정이가 두리손 그놈이 잔치에 한 자리 내달라며 내놓은 두카트 세 닢을 꺼내보임으로써 대꾸를 갈음하였다.

“엥, 거 절묘합니다그려. 하필 세 닢이라니.”

“방금 뜨끔하는 것 다 보았소. 얼른 해명해 보시오.”

“해명하고 말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분명히 저는 로레단 그 사람에게 받은 두카트로 좋은 술 대접하겠노라 공언했고, 약조를 지켰을 뿐입니다. 류큐에 들렸을 때 나하 항에 대국의 귀한 술을 파는 이가 있기에, 이게 아주 귀한 금화라면서 값을 후려치고는 여러 병 사들였지요.”

그렇다면 그놈이 두리손과 연 닿은 장사꾼이었을 것이다. 장거정이나 동창을 통해 연이 닿았는지, 아니면두리손 본인이 어디선가 기연(奇緣)을 얻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모든 장사의 일을 틀어쥐는 것이 아니라, 장사의 기반만을 독점하는 것이 사업당 방침이었으니, 그 만들어 놓은 기반 위에서 허튼 짓하는 것을 아예 차단하기는 어려웠다.

“그 두리손이라는 자가 무엇하는 놈이기에 그러십니까?”

꺽정이의 이야기 솜씨를 개울 건너는 것에 빗대자면, 바윗돌 두엇을 개울 중턱에 힘껏 던진 다음 그것을 밟고 알아서 넘어오라 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이미 여러 번 겪어서 능히 빠진 부분을 채워넣을 수 있게 된 이탁오나 명희 같은 이들은, 금방 그 전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자가 그저 임 당수 눈길을 끌기 위해 그리한 것인지, 아니면 천하의 드넓음을 저도 조금은 알고 있노라 과시하고자 한 것인지는, 본인에게 직접 듣기 전까지는 알 수 없겠군요. 허나 만약 소생이 헤아린 것이 맞다면···”

주변을 살피며 이탁오가 말을 흐렸다. 그러나 그 뜻은 얼추 꺽정이에게 전해졌고, 험상궂은 미소가 답변을 대신했다.

어찌하여 두리손을 굳이 살려두었는가? 그저 범상한 악한, 시운(時運)의 가차없는 흐름에서 밀려난 쭉정이일뿐인 자. 그런 자를 일찌감치 쓸어 없애지 않고 도리어 더 해보라며 부추겼는가? 원한다면 그저 그 자리에서 찍어 누를 수도 있었을 터인데.

필시 무언가 꾀하는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생이 생각하는 그 뜻이 맞습니까?”

“지금 떠올린 생각이 영 터무니없고 황당무계한 것이라면, 아마 그것이 맞을 것이오.”

“하하하! 이 ‘타고스 박사’가 어디 농서(隴西) 같은 벽지가 아닌 천주에 태어나 임 당수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게 되었으니 어찌 하늘의 보우하심이 아니겠습니까?”

이탁오가 폭소하며, 시 한 수를 읊었다. 꺽정이도 얼추 들어 아는 시구였는데, 말 그대로 얼추 알기만 하는지라 뒤의 몇 글자 바뀐 것은 알아듣지 못했다.

“큰 바람 일어나고 구름 떠 가니 / 위엄을 해내(海內)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왔구나 / 어찌하면 사방을 얻어 용사를 지킬까? (大風起兮雲飛揚 / 威加海內兮歸故鄉 / 安得四方兮守猛士)”

사간원 정언 심의겸이 ‘사업당에 정중히 찾아가’ 들은 바를 그대로 조정에 고하니, 이는 다시 정론보와 공보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어찌 좋은 이야깃거리 아니겠는가? 그리고 좋은 이야깃거리란 곧 좋은 장삿거리가 아니겠는가? 이 이치 깨달은 이들도, 깨닫지 못한 이들도 모두 오로지 서쪽에서 찾아오는 귀인들 이야기에 하루가 가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면서 이미 한 번 넓어진 조선 사람들 머릿속의 천하는 더욱 넓어져만 갔다. 어쩌면 이 하늘 아래 어딘가에는 여인국(女人國, 여인만 사는 나라)도, 일목국(一目國, 눈 하나 달린 사람만 사는 나라)도 있겠지만, 그곳은 왜국이나 유구국 너머 어딘가가 아니라, 한참 더 멀리, 그러니까 아메리카나 마겔라니카(현 호주~남극 일대에 상정된 가상의 대륙) 쯤에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나라의 임금인 이 나는, 어찌하여 그들을 만나보지 못한다는 말이더냐? 너를 만나자마자 하소연하니 군왕(君王)의 체통이 참으로 안타깝게 되었지만, 그래도 답답한 것은 답답한 것이니라.”

양화진에 닿자마자 꺽정이는 경복궁으로 향하여 임금을 뵈었는데, ‘죽지도 않고 살아돌아왔구나’ 하고 반갑게 맞이하자마자 나오는 것은 푸념이었다.

“너희 흑의영에서도 벌이는 연회를, 왜 이 경회루에서는 못 한다는 말인지, 참.”

격의 없이 대할 수 있는 유일한 말벗이 삼 년 간 사라졌다 돌아왔으므로, 임금의 말투는 조회(朝會)에서 쓰는 말과 미복잠행 나갔을 때 쓰는 말이 섞여 있었다.

“거 예나 지금이나 꽉 막힌 꽁생원들이구만. 뭐가 문제라고 그런답디까?”

“지금껏 상국(上國)에 입조한 적 없는 나라의 사신들을 번국에서 먼저 맞이할 수는 없다더라. 가뜩이나 근래 천조의 그 장가 놈이 우리네 하는 일에 번번히 간섭을 한다던데, 그놈에게 빌미를 주어선 아니 될 일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지만.”

장거정은 조선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당을 경계하는 것이었지만, 그 내막은 민주당 본인과 탕평당사람 몇몇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왕세자 책봉을 미룬다던가 하는 식의 치졸한 수를 쓰지는 않고, 그저 사신이 오갈 때마다 나라 사정을 묻고 ‘이것은 옳지 못하다’는 둥 트집을 잡고, ‘요새 은이 그리 많이 난다니, 국초의 예를 상고하여 다시 은을 진상하라’ 하는 식으로 – 물론 옛날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조선에서는 경제사에서 쉽게 충당할 수 있을 만큼 적은 양이었다 – 견제를 하고 있었다.

“대국 천자보다 먼저 궁에서 손님으로 맞이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난다면, 임금님께서 흑의영으로 거둥하시면 되지 않겠소? 그러면 다 같은 객(客)으로 서로 만나는 것이니까. 나랑 같이 따라온 사람들 면면 살펴보면, 족히 임금님 바로 아랫자리에 앉을 수 있는 자들이라오. 하필 나랑 동행해서 좀 격이 떨어져 보일 뿐이지.”

핑계 내세우기로, 한양에서 민주당이 서방 귀인들에게 연회 베푸는 것은 그들을 환영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북경까지 가는 길 중간에 여독을 풀어주기 위함이라 하였다. 그런 자리에, 미리 천조의 제일가는 번국인 조선의 국왕이 찾아가 좋은 말씀 해주는 것 정도는 딱히 문제될 것 없지 않겠는가.

“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허나 서양의 귀인들 구경도 하고 또 이런저런 사람들과 연도 맺을 심산으로 비싼 돈 내고 임 당수 환영회 자리를 사들인 이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춤추는 사람은 없었지만, 악사들의 춤곡은 끝없이 이어졌다. 마드리갈(Madrigal), 파반느(Pavane), 사라반드(Sarabande), 알레망드(Allemande)···

누군가는 흉측한 음률이라며 흉을 보고, 누군가는 처음 듣는 이 곡조에 매료되어 술과 안주의 맛을 잊었으며, 지구 반대편까지 넘어온 악사들의 우두머리 조반니 다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는 ‘나는 누구이며 여긴 어딘가’ 하는 표정 일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능숙하게 연주를 지휘했다.

동방 나라들이 예악(禮樂) 숭상한다는 말을, 그들이 예식(禮)을 중시하는 만큼이나 음악(樂)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잘못 알아들은 피렌체 사람들이, 때마침 바오로 4세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팔레스트리나를 거금을 주고 영입하였던 것이다.

이에 질세라 다른 도시들도 실력 있는 악공들을 죄다 모아 배에 태웠는데, 태풍으로 인해 말라카에 한동안 머물던 중 그나마 합을 맞춰볼 수 있었기에 연주하는 솜씨는 제법 나쁘지 않았다.

“좋구나, 좋아! 기독교도 놈들이 그림 그리는 재주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 음악도 나쁘지 않다!”

셰자데 바예지트는 ‘림 파샤’가 아버지 술탄과 다른 이교도 임금을 대하는 것을 보았을 때 동방의 왕실 예절은 나머지 세계에 비해 훨씬 간소하고 실용적이라는 엉뚱한 결론을 내린 바 있었다. 그로 인하여 주상 옆에 앉아서도 딱히 언행을 주의하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히, 바예지트 옆에 앉은 이가 임꺽정이었으므로, 그 누구도 바예지트가 예절을 모른다 여기지는 않았다.)

술을 좋아하지도, 잘 마시지도 않건만, 하필 두 조선 사람 사이에 끼어 있게 되어 거나하게 취해버린 바예지트가 좋다고 손뼉을 쳤다.

“옳거니! 참으로 흥겨운 곡조가 아닐 수 없다. 여봐라, 저 악공들의 이름을 적어두고, 후에 상급으로 비단을 내리거라. 서양 사람들이 그토록 비단을 중히 여긴다 하니 좋은 포상이 될 것이다.”

꺽정이와 주거니받거니 하더니 어느새 이곳이 궁 한 가운데인 줄 알 만큼 취한 임금도, 덩달아 박수를 치면서 외쳤다.

“비단 내리시랍신다.”

“예, 당수!”

이처럼 예절이 크게 어그러지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 와 있던 이황과 조식은 오음(五音)을 벗어나는 음계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진지하게 토론하느라 저들의 임금이 체통을 잃건 말건 알지 못하였다.

그사이 이탈리아 사람들은 어느 도시에서 데려온 악공이 가장 뛰어난지를 두고 다투고, 그 와중 베네치아 사람 로레단은 지구 반대편에도 자신들과 같이 세상 물정 아는 현인(賢人) 있다며 서림과 열심히 사업을 논하고 있었다. (가운데 낀 역관 알리는, 지아웃딘 선생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영험한 원숭이(손오공)처럼 저의 머리털로 분신을 만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저 돈 내고 들어온 조선 사람들은 어떤 심정이었는고 하니,

“주상 전하 천세!”

“천세!”

저들끼리 취하여 천세를 산호(山呼)하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것도 벙벙한 것이지만, 술잔이 돌다 보니 어느새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이다.

어지럽기 이를 데 없고, 예악의 법도는 오뉴월 얼음마냥 녹아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이 모든 잡탕 같은 광경이 그 나름대로 기이하고 또 즐거웠으니.

이러한 자리를 또 언제 즐길 수 있겠는가? 또 지금껏 그 누가 이러한 연회를 즐길 수 있었겠는가? 난잡함에 혀를 차던 이들도 술이 들어가고 또 들어가니 – 주로 저 눈치 없는 놈 어떻게 해야 한다 여긴 주변 사람들의 말없는 강권에 따라 – 어느새 혼란 그 자체인 이 잔치판을 즐기게 되었다.

“어찌 좋지 않은가! 옛날 진왕(陳王, 조식曹植)이 한 말에 만 냥 되는 비싼 술로써 평락전(平樂殿)에서 잔치 벌였을 때에도 이러한 광경은 없었을 터인데!”

“하하, 선생 말씀이 옳소!”

“어찌 ‘선생’이라 하시오? 이 드넓고 황망한 천하에 우리가 이토록 만났으니, 가히 호형호제할 만하지 않소이까?”

“그렇지! 형의 말씀이 참으로 온당하구려!”

과연 이 모든 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우애인가? 그렇지 않으면, 비싼 돈을 내고 그 값에 상응하는 자리에 앉아, 자신과 마찬가지로 나머지 어리석은 가난뱅이들 머리 위에 선 이들과 사귀는 재미에 취한 것인가?

어느 쪽인지는 그들 본인도 정확히 분간할 수 없을 것이요, 포도청과 어영청, 그리고 흑의군들에게 떠밀려 멀찍이서 흑의영 담장이나 구경하는 저자 백성들도 그저 시기할 뿐 제대로 헤아리진 못할 것이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술잔을 비우지 않으시오?”

“하하, 깨어 있는 눈과 귀로 담기에도 풍광이 가득하니, 어찌 술로써 이목을 흐리겠습니까.”

개중 가만 앉아, 미소만 지으며 모든 것을 관찰하는 젊은 객이 하나 있었다. 말쑥한 서생 같으면서도 또 어딘가 선비답지 않은 젊은이였는데, 이름을 묻는 이에게는 빙긋 웃어보일 뿐이요, 이 자리 앉은 내력이 나올 것 같으면 능수능란하게 천하의 다른 이야기로 – 예컨대 유구국에서 근래 나온다는 그 기묘한 돌가루라든가 – 화제를 옮기곤 했다.

“그렇다면 술 대신 이야기는 어떻겠소?”

그렇게 가만 앉아 주변을 살피던 젊은이 곁에, 슬쩍 다가와 수작 거는 이 있으니,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상석 근방 어딘가에 있던 수산 선생 이지함이라.

“담소화락(談笑和樂)이 어찌 군자의 즐거움에 들겠습니까?”

“그대 또한 군자는 아니지 않소? 내 벗 하나가,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한 보따리 품고 있는데, 그대 또한 비슷하게 많은 이야기를 속에 품고 있는 듯하오.”

“어찌 그러 여기시는지요?”

“이 사람은 알고 있다오. 여러 해 전에 단양 향교 뒤의 대숲에서도 그대의 그 이야기 솜씨는 감명깊게 보았다오. 얼마나 훌륭하던지, 복심(腹心)을 파고드는 듯하였지.”

“그 경황없는 밤중에 잘도 내 얼굴을 기억하셨소. 내 이름 대고 들어온 뒤로 딱히 누구를 붙이시진 않았던 듯한데, 잘 찾아내셨구려.”

“누구를 붙일 필요도 없었지. 들어오는 순간부터 나도, 내 사제 녀석도, 눈에서 그대를 놓치지 않았다오.”

그러고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지함이었다.

“그리고 그간 살핀바, 그대는 통(通, 합격점)을 받았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냥 맨몸으로 오지 않았소. 옛날처럼 얄팍한 술수도, 흉계랍시고 어설픈 짓거리도 꾸미지 않은 채로. 그러니 포상은 받아야지. 임 당수가 기다리고 있소이다. 이 자리 파하면 저기 상석 있는 쪽 뒤편으로 오시오. 이 사람과 당수 둘이서 맞이해 드릴테니.”

한때 저의 뱃가죽에 흉터 남긴 이를 상대하는 것 치곤 퍽 곰살궂게 어깨 한 번 두드리며 일어나는 이지함이었다.

모든 좋은 일은 제때 끝이 나야 비로소 좋은 일로 남는 법. 연회는 파하고, 흑의군들과 사업당 일꾼들은 이 난장판 언제 다 치우냐며 한숨이나 쉬고, 너만 좋은 구경 하느냐며 성급히 떠오른 달은, 이미 잔치 끝났음을 깨닫고 안타까운 달빛이나 발하였다.

“참으로 재미있는 이들만 모아 오셨소. 바예지트라고 했던가? 그이는 어째 나와도 죽이 잘 맞을 것 같더이다. 나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 삼 년 사이 제법 사람이 바뀌었구나.”

이제는 너스레도 다 떨 줄 알게 된 두리손을 보며, 꺽정이가 피식 웃었다.

“다 임 당수 덕분 아니겠소? 그때 놓아주시면서 좋은 말씀 들려주셨으니 절치부심하며 여기에 이르게 되었소.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말이오.”

임거정에 대한 원한, 그리고 자신이 그치보다 못할 게 무엇인가 하는 분함. 모든 것은 눈빛 속에만 담고, 얼굴에는 그저 이언적의 제자요 재조론을 내세우는 기수로서의 두리손만 있었다.

저 또한 마침내 무언가를 이루었음을 알기에, 그리고 그것을 다른 이들 모두 알 수밖에 없음을 또 알기에 내보일 수 있는 당당함. 수락산 산장에서 만났던 그자와는 분명 속내는 같되 그 위에 쌓인 것이 달랐다.

“그래,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두카트 금화까지 보내면서 이 자리에 빠득빠득 기어들어온 게냐?”

“그야 임 당수에게 우물 안 개구리 소리 듣고 싶지 않아서였지. 내가 바깥 세상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나라 문 걸어잠그자 하였다면, 그렇게 나를 보지 않으셨겠소? 어쩌면 개구리도 아니요 올챙이 대접 받았을지도.”

“녀석, 못 본 사이 도마뱀만큼은 되었군그래. 금화야 그렇다 치고, 굳이 얼굴 들이민 까닭이나 듣자꾸나.”

“당수께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였소.”

“맨입으로?”

“두카트 세 닢으론 부족하오?”

“그건 자릿값이었지. 나와 문답하는 값은 따로 내야 한다.”

“좋소. 그렇다면 당수 먼저 내게 물으시오. 아마 묻고 싶은 것이 하나쯤은 있으시겠지.”

네놈이 내게 궁금해하는 것, 알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히 하나쯤 있을 것이라 여기는 자신만만함. 이 또한 삼 년 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그만하면 받아들일 만하군. 알겠다. 그러면 먼저 물으마.”

“보나마나 돌아오신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두리손 그놈이 그간 무엇하고 지냈는가 수소문하셨겠지. 틀림없이 재조론 그 엉성한 논변에 대해 묻고 싶으실 터.”

“그새 눈치도 좋아졌구나. 그런데 재조론은 너희 무리가 내세우는 것인데, 그것을 엉성하다 평한단 말이냐?”

“엉성하니 엉성하다 할 수밖에. 임 당수 그대가 암만 열심히 찾아보아도, 재조론을 처음 창안한 자도, 그것을 정리하여 언설로 만들어낸 자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오. 물론 처음에 이언적 그이의 도움을 조금 받기는 했지만.”

가만 듣던 이지함 입에서 ‘허’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떤 거유(巨儒)나 은일(隱逸)이 도운 것도 아니요, 두리손 스스로 창안한 것도 아니라면, 대체 누가 그러한 논변을 고안했다는 말인가?

“굳이 재조론을 지은 이를 찾는다면, 글쎄, 삼남과 기호의 사족들. 고작해야 저의 이름으로 못난 문집이나 하나 남기고 진사니 생원이니 하는 소리나 듣다가 생을 마칠 그런 못난 자들 전체를 찾아야 할 것이오.”

처음에는 그저, 자그만 씨앗이었다. 이언적의 주장. 은이 천하의 근본이 되는 세상에서 다시 농(農)의 세상으로 돌아가자는 것.

그러나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옛날의 좋지 못하였던 것을 고쳐, 더욱 더 성현의 말씀에 맞는, 삼대(三代)의 대동(大同)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사방이 평안한(以綏四方) 소강(小康)에 이를 수 있도록 나라를 다시 만들자 하였다.

그렇다면 그런 나라는 어찌 만들 것인가? 단순히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세상, 더는 사람들이 ‘더 나은 내일’을 희구할 마음 품지 못하도록 할 만한 그런 세상을 어찌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나는 삼 년간 팔도를 주유하며 그들에게 이 화두를 던졌소. 이언적 그이 이름을 대니, 모자란 자들이 하나씩 생각을 내어놓았고, 나는 그저 산삭(刪削)할 뿐이었소.

처음에는 나도 이것이 될까 싶었는데, 정말 되더군. 식견은 대체로 나보다도 못하였지만, 보는 관점이 조금씩 다르다 보니, 그리고 어떻게든 이 세상을 옛날, 다들 안심하며 살던 그때로 되돌리고 싶어하다 보니, 뜻이 모이며 무언가 만들어졌소.“

씨앗 주변에 생각이 뭉치고, 거기에 어떤 것은 덧대어지며, 어떤 것은 떨어져 나갔다.

“결코 현명한 방책은 아니라 하겠소. 하지만 어차피 국사의 십분지구는 그들, 이름은 있으나 없는 것보다 겨우 나은 정도인 군현의 작은 사족들이 이루는 것 아니겠소? 조정에서 무엇을 하든, 결국 그들의 뜻대로 뒤틀리고 바뀌어갈 것이오.”

“우리만 없다면.”

“그렇소. 민주당이니 탕평당이니 하는 이들, 그리고 그 공회. 은을 가져와 농간 부리는 상인들. 이들 모두 없다면, 나라에 꼭 필요한 이들만 남기고 모두 억말(抑末, 상공업을 억누름)의 뜻에 따라 규제한다면, 자연스레 세상은 사론(士論)에 따르게 될 터.”

재조론이 그리는 조선은 그러하였다. 나라에서 모든 곡식을 하나로 모으고, 다시 그것을 나누어준다. 굶어 죽는 이도 없고, 새로운 환곡과 구휼의 제도 아래에서 농사짓는 모든 이들은 평안을 보장받는다. 거대한 창고와 같은 나라에서, 그나마 필요한 것은 다시 한 번 관의 손아귀에 들어온 한줌 상공인들이 조달한다.

선비는 선비답게, 농군은 농군답게 살아가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굶어죽는 일도,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몰락하는 이가 없으므로 윗선의 빈자리를 아랫것이 채울 일도 없다. 농군의 아들은 농군이 되고 선비의 아들은 선비가 되지만, 적어도 그 누구도 저의 대에 집안이 영락하여 아들이 노비로 팔려나갈까 두려워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것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사이, 두리손이 알아서 저의 말을 고쳤다.

“아니, 내가 잘못 말했소. 세상이 아니라 조선 한 나라지.”

“녀석, 정말로 눈이 트였구나.”

“나는 국인(國人)의 뜻을 모았을 뿐이오. 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귀를 빌려주고 멍석을 깔아주었을 뿐이지. 그리고 민심이 천심 아니겠소? 재조론이 눈덩이처럼 굴러가며, 조금씩 선명해지고 지금보다도 더 조리있게 될수록, 무지렁이 백성들 중에도 따르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오.

앞날을 불안히 여기는 자들은 항상 있고, 지난 삼 년 사이 더더욱 불어났거든. 아무래도 평생 농사만 짓던 자들은 다들, 사람의 재주에 따라 부귀가 오락가락 갈리는 것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라서 말이오.”

이미 낮은 곳에 대대로 갇혀 있던 노비들, 아전들, 그리고 신량역천(身良役賤)의 수많은 사람들은 의민당 시절부터 꺽정이의 편이었다.

반면 조금 살 만해지니 여기서 더 위태로이 높게 올라가는 것보다는 딱 지금에 만족하며 눌러앉기 바라는 이들도, 소소한 좌절로 인해 벌써부터 공포에 휩싸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렇게 분탕질을 쳐서 네가 얻는 것은 무엇이냐? 네가 스스로 뭔가 주장하지 않고 이 나라의 모자란 양반들 마음을 모을 뿐이라면.”

“나는 그저, 그들 중 누구도 엄두 못 내고 있던 것을 앞장서서 행한 자로 남으면 족하오. 임 당수 그대의 뜻이 짓밟히고, 나 두리손이 사직 구했노라며, 그토록 나를 업신여기던 이들이 평생 추앙하는 것. 그리하여 이 나라는 괴악한 놈을 낳은 저 잘나신 분들을 죽어서도 비웃는 것.

어떻소. 참으로 비열하고 비천하지 않소? 하지만 이 뜻만은 나의 것이오. 삼 년 동안 누차 고심해았으나 그 외에 다른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소.”

그러나 꺽정이는 침을 뱉지 못했다. 무언가 이루었노라 인정받고 싶어서 패악질을 부렸던 사람은 이 자리에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고, 둘 사이의 차이란, 개중 하나는 그저 그 패악질을 끝내 끊지 못하여 한 번 더 살게 되었다는 점이었으니.

한참 정적 흐른 뒤, 두리손이 다시 물었다.

“어떻소. 답이 되었소?”

“그래,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답을 들을 차례요. 내가 언제고 이렇게 될 수도 있음을 임 당수 그대는 알지 않았소? 그런데 왜 나를 살려주어 후환을 남기셨소?”

“왜냐니, 그야 네놈이 살아야 비로소 이 내가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는 아주 잘 해주었다, 흐흐.”

“무어라 하셨소?”

“이 조선이라는 나라, 그것이 바뀌는 것을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자들을 네가 다 감싸안게 되지 않았더냐? 두리손이라는 그물 안에 모두 모였으니, 일망타진이 어찌 불가할까.”

“잠깐, 설마?”

“그 설마가 맞다.”

“순순히 무너질 생각은 없소. 애초에 임 당수 그대의 당을 무너뜨리기 위해 피 흘려야 함을 알기에 그토록 열심히 어리석고 욕심만 많은 무관들을 한데 모으고 있었으니. 임 당수 그대라 할지라도 쉽게 무너뜨릴 수는 없을 것이오.

그런데 그리 될 것을 알면서도, 한 번에 쓸어 없애기 위해 굳이 위태로움을 감수했다는 말씀이시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러다가 정말로 패하여 내 뜻이 이루어지게 되면 어찌하려 그러시오?”

“그러면 그냥 망하는 것이지, 무어. 원래 뭔가 거하게 얻고자 하면 그만큼 판돈도 거하게 걸어야 하는 법 아니겠느냐?”

“···”

“이 어르신은 죽기 전에 이루어내야 할 일이 좀 많아서 말이다. 너는 나라 하나만 훔치면 족하다 여길지 몰라도, 나는 그것으로는 좀 많이 부족해서.”

이지함과 이이 두 사람과 청석골 아랫말에서 문답할 때부터, 승천문 위에서 왕직과 손짓발짓 마지막 이야기 나눌 때까지, 그리고 또 서방에서 카를로스와 쉴레이만을 만나고, 로욜라와 라스카사스 같은 뜻 품은 사람들 만날 때에도 어김없이.

꺽정이는 결코 조선으로 만족할 수 없었고, 또 저의 뜻이 이루어지면 조선 하나로 끝날 수 없게 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어찌 장구지계 따위를 신경쓰리오. 부추김과 선동 끝에 벌어질 장기 놀음 한 판으로, 조선 사람들이 스스로 저들 마음을 정하여 저의 이름으로 확언하고, 아예 물리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자, 그러면 어디 잘 해보아라. 누가 먼저 이 조선국의 사방(四方)을 얻어 뜻을 이룰지, 겨루어 보자꾸나. 어느 쪽이 이기든, 그쪽의 뜻에 따라 이 나라의 앞길이 정해질 것이니. 정해져도 그냥 정해지는 게 아니라, 후대에 함부로 무르지 못할 만큼 확고하게 정해지지 않겠느냐?”

“좋소. 해 보십시다. 그러다 죽는다면 나는 조금은 덜 억울하겠소.”

“많이 컸구나, 두리손아.”

“확실히는 모르지만, 아마 내가 당수보다 손위일 게요. 그것은 알고서 그리 말씀하시오?”

그러나 호방한 웃음 외에 다른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작중 등장한 팔레스트리나는 르네상스 이탈리아 음악의 거장으로, 원 역사에서는 교회 음악 작곡에 경력 거의 대부분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드리갈과 모테트 등 세속 악곡도 많이 남겼지요. 본디 로마에서 성가대를 이끌고 있었는데, 바오로 4세의 지시로 성가대의 지휘자 자리는 오직 순결을 서약한 이들만 앉을 수 있게 되었기에 기혼자였던 팔레스트리나는 일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의 명성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원 역사에서는 금방 다른 대성당에 지휘자가 아닌 ‘음악 감독’으로 편법으로 취직하게 되었지요.

이후 만년에 흑사병으로 가족을 잃고 성직자가 되려 하였으나, 끝내 뜻을 접고 대신 부유한 과부의 재산을 노리고 재혼하게 됩니다. 작중에서는 조금 일찍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 생고생을 하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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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두리손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재조론은, 원 역사의 조선에서도 양란을 극복하고 사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비슷하게 재현됩니다. 환곡을 중심으로 한 국가적 재분배체제는 양반 엘리트 집단과 (농민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았던) 대중 양측에서 안정적인 지지를 받았고, 19세기에 여러 경제적 요인 및 내부 모순의 누적으로 붕괴되기 전까지 장기적으로 유지되었습니다. 비단 조선뿐 아니라 거의 모든 농업 사회에서 나타나는 강력한 평균주의적 지향(‘한정된 재화의 이미지’) 및 보수성을 감안하면, 이러한 재조론은 오히려 상업 자본주의보다도 훨씬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농업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상이 덧붙여지고 덧붙여지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겠지만요 (김성우, 2006. “조선시대 농민적 세계관과 농촌사회의 운영원리.” <경제사학> 41; 김재호, 2011. “조선왕조 장기지속의 경제적 기원.” <경제학연구> 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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