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물 흐르듯 (1)
무릇 사람으로 하여금 지킬 것을 지키게 하는 데는 세 가지 방도가 있으니, 덕(德)이 상책이요, 예(禮)는 중책이며, 법(法)은 하책이다.
덕이 있는 군자가 교화를 베풀면, 풍속은 자연스레 아름다워지고 사람의 언행은 절로 올바름을 되찾는다. 형(刑)은 이름만 남고, 사람의 성(性)이 막힘없이 발하여 잘못을 범하면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 뉘우치고 되갚는다. 그러므로 이것이 상책이지만, 그러한 군자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으니 취하기 어렵다.
나라에서 법을 만들어 올바른 행실은 권면하고 그릇된 것은 징벌하면, 백성은 두려워하며 벌을 피하고자 복종한다. 그러나 덕으로써 교화하지 않는다면 백성은 마음으로 따르지 않고 겉으로만 지킬 뿐이니, 이것이 법이 하책인 까닭이다.
그러니 상책인 덕과 하책인 법은 완전히 따를 수도, 완전히 버릴 수도 없는데, 오로지 중책인 예는 아무리 중하게 여겨도 하등 허물될 바가 없다. 작게는 인륜을 밝히고 크게는 정사를 다스리니, 실로 나라의 치란(治亂)과 안위(安危)는 예를 지키고 따르는지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 있어서는 이지함도, 이황도, 조식도 일말의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조정에서 제정하는 것도, 삼대(三代)의 성왕(聖王)이나 기자와 같은 성현이 내리는 것도 아니요, 그저 국인(國人, 국민)의 공론을 모아 법을 만들고 때때로 이것을 고칠 수 있게끔 한다 해보자.
과연 이것을 법이라 할 수 있는가? 만약 이처럼 국인들의 공변된 뜻을 모아 세운 법이라면, 이것은 덕이나 예에 견줄 수 있겠는가?
소위 재조론을 내세워 조선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막기 위해, 나라의 큰 법을 국인이 스스로 세우게 하자는 주장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민주당과 탕평당 두 당에서 머리 노릇하는 큰 선비들이 모두 모였으니, 하필 사업당 깊은 곳에서 논쟁하는 것이 조금 아쉬울 뿐 실로 중한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황은 민심의 중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국헌(國憲)이니 헌법이니 하는 것은 말하자면 법도 가운데의 리(理)에 해당하는 것인데, 한때에 일어나는 기(氣)를 한데 모은 것이 리와 같을 수 없다면서 반대하였다.
그러니 정학의 이치 논함에 있어, 이황이 양(陽)을 말하면 저는 음(陰)을 말하고 저쪽이 가(可)라 하면 이쪽은 부(否)부터 꺼내고 보는 것이 습관이 된 조식은 곧장 이황의 말에 반박하고 나섰다.
저의 제자 이이가 들고 온 생각이라 하여 무조건 옹호해줄 마음은 없던 이지함은 때에 따라 이황의 편도, 조식의 편도 들며 저의 얘기를 하였는데, 중재하는 사람은 없고 저의 생각만 털어놓는 사람만 셋이 있었으므로 결론이 쉽게 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당장 하루아침에 이러한 법도를 마련할 수는 없다는 데는 동의하였다. 몇몇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에서 두 당 사이의 당론으로, 나아가 공회와 양보(兩報, 정론보와 공보)에서 오가는 이야기로 뻗어나가며 오래토록 숙의한 끝에야 비로소 할 수 있는 일.
당장 사소한 형률(刑律)조차도 쉽게 정할 수 없는 법일진대, 나라의 근본과 직결되는 큰 법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을 끝내 설득하려다 실패하고 밖으로 뛰쳐나가다시피 한 이이가 뜻밖의 원군을 데려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뭐 그리 오래토록 고심들을 하고 계시오? 공자님 제자라는 자로(子路)도 좋은 얘기 들으면 바로 행하려 했다던데.”
서경덕이 <논어>를 강할 때 자로 얘기만 귀담아들었던 꺽정이다운 말이었다.
“임 당수, 무릇 법이라는 것은 형률(刑律)과 맞닿는 것이요, 형(刑)이란 그 중(中)을 잃으면 곧 없으니만 못하게 되는 것이라오. 사람이 중(中)을 잃는 것은 곧 치우치기 때문이며, 시급함을 내세우며 당장 눈앞에서 이루어지기만 구한다면 편벽함을 면할 수 없소.”
“더구나 그러한 국헌을 국인의 말과 뜻의 조각만을 모아 세운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한 일이라오. 여기에 대해서는 근래 정론보에서도 논한 바 있는데...”
“이 사람, 사단칠정의 논변까지 여기 끌고 올 심산인가?”
“천지인(天地人) 사이에 리와 기의 운행이 닿지 않는 것이 없거늘, 어찌 여기서 함께 논하지 않겠는가?”
꺽정이가 막 서쪽으로 떠날 때 시작한 사단칠정논변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자신이 조금 성리지학(性理之學)에 식견 있다 자부하는 사족들은 모두 여기 끼어들어, 간혹 정론보에 기고하기도 하고, 또 탕평당이나 민주당을 옹호하거나 매도하다가도 이 논쟁으로 도로 빠져들곤 하였다.
더구나 정론보에 글 싣는 몇몇 사람들이, 소위 ‘정수법(淨水法)’이라 불리며 거의 모든 반가 규수들이 알고 또 따르게 된 신씨 부인의 그 글을 떠올리면서 논쟁은 더욱 커졌다. 정지운(鄭之雲)이 저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정론보에 기고하면서, 저의 가산을 털어넣어 목판 그림까지 첨부하게 되자, 사람들은 세태를 한탄하면서도 은근슬쩍 그림 없는 글은 잘 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이러한 논쟁에 낄 힘도, 머리도 없는 향반들에게 이러한 시세는 좋은 핑계가 되었다. 저들의 고매한 뜻이 비루한 풍속으로 인하여 알려지지 못한다는 둥, 저들이 논쟁을 이해하지 못해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는 둥.)
“흠흠, 두 분 선생 모두 진정하시지요. 임 당수, 국헌 세우는 일의 가부를 떠나, 그것을 향회에서 권점하여 향임 정하는 것처럼 세운다는 말은 이치로 보나 실제로 따지나 어려움이 많소.”
이지함이 꺽정이를 ‘임 당수’라고 번듯하게 칭해주는 것은, 주로 다른 높은 사람들 앞에서 그의 체통 지켜주기 위함이었다.
“해보고 영 마음에 안 들면 그때 사람들 뜻 다시 모아 고치면 될 일이지. 우리가 무슨 만세불변의 법도 세우는 것도 아니고.”
하늘과 땅이 열린 이래 처음 만들어지는 ‘국헌’을 이토록 가볍게 논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애초에 임금의 목숨이나 체통조차 가볍게 다루는 꺽정이였으니, 고작해야 법도 따위를 무겁게 여길 리 없었다.
“허나 지금 국인들, 그러니까 막 면천한 노비부터 명문거족의 자제까지 모두 합하여 그 뜻을 모은다면, 오히려 재조론이 더욱 그럴듯하다 여김을 받을 것이오.”
이지함답다면 이지함다운 논거였다. 리와 기의 논변이 아닌, 실제 백성들의 생각. 딱히 문집을 내지도, 학당을 열지도 않았건만 어느새 학풍(學風) 비슷한 것이 생겨, 젊은 선비들 중 조금씩 따르는 이도 생기고 있었다.
물론 그런 선비들, 주로 기대승이나 고경명 같은 대양서생들의 소개를 받고 찾아오는 이들은, 이지함 따라다니다가 잘못하면 사업당 안으로 끌려들어가 다시는 못 나온다는 것을 깨닫고 그 대신 허엽이나 박순 문하로 들어가곤 했지만.
“그 재조론이라는 것은 실로 어설프고, 더구나 자칭하기로는 소강(小康)을 이루려 한다 하지만 정작 경세(經世)의 일에 있어서는 월나라 사람이 진나라 걱정하듯 할 뿐이오. 견식 있는 이들이 어찌 그것을 따르겠소?”
실사(實事) 중시하는 것이 수산 선생 학풍이라면, 남이 하는 이야기라면 우선 저의 눈으로 뜯어보고 씹어보는 것이 남명 선생 학풍이다. 꺽정이가 반론하기도 전에 조식이 끼어들었다.
“그것은 우리들 서생의 생각이고, 여항(閭巷) 백성들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백성의 마음이란 그러하였다. 한편으로는 저들 잘났음을 보이고자, 읽지도 않을 정론보와 공보, 그리고 근래 인천과 동래 등지에 자리를 잡은 온갖 방사(坊肆, 출판사 겸 서점)에서 나오는 서책들을 사들이곤 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요즘 세상이 영 잘못 돌아간다며,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저들의 삶은 예전과 같이, 그러니까 언제였느냐 묻는다면 제대로 답도 못하겠지만 어쨌든 ‘그 좋은 옛날’에 머물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저의 아들은 저보다 더 좋은 대접 받으며 더 편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 미묘한 모순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도 그들에게 ‘그래서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는 무엇이냐’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그들의 뜻을 묻지 않았고, 설령 그 뜻을 듣더라도 그저 한 귀로 흘릴 뿐이었다.
만약 지금 밖에 나가, 지나가는 이를 붙잡고 나라의 대강(大綱)을 어찌 정하면 좋겠는가 묻는다면 큰일날 소리 하지 말라며 도망치기 십상이리라.
“그뿐입니까? 나라에 현명한 사람도 많지만 어리석은 사람의 수효는 그 몇 곱절에 달합니다. 지금과 같이 교화하고 또 백성 스스로 가르침을 구하게 한다면, 다음 대에 이르러서는 어쩌면 그들 스스로 나랏일을 고심하고 논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유학자가 아닌 그냥 학자로서의 이지함은 그럴 공산조차 매우 낮다고 여기고 있었다. 애초에 모든 사람들이 나라의 앞날을 고민해야 하는 그러한 나라라면, 그 나라는 곧 어딘가 잘못되어 있을 터였다.
“그러니 백성의 뜻을 널리 듣는다는 말을 그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국헌을 세우는 기틀로 삼는다는 말은, 곧 모래 위에 누각을 짓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적어도 금세(今世)에는 그러할 것입니다.”
당장 각지 군현에서 공회에 나갈 사람을 향회 거쳐 뽑는 것도, 그나마 뜻있는 이들 몇몇이 애써 이끌기 때문이었다. 권점(투표)에 참여하는 백성들도, 그저 재밌는 여흥, 석전 대신 사람 머리수로 다투는 놀이라 여길 뿐, 진지하게 나라나 저들 군현의 앞날 생각하여 그 자리에 서는 자는 드물 테다.
물론 갑인년 대훈(大訓)과 이후의 한전법 시행으로 공회에 조금씩 힘이 실리면서, 공회에 목소리 큰 사람 보내면 저들 고을과 동리에도 이롭다는 이치를 깨우치는 사람도 하나둘 생기고 있었지만, 아직은 말 그대로 하나둘이 전부였다.
“그, 사형.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십시다.”
이이도 돌리지 못한 세 사람 마음을 어찌 자신이 여기서 돌릴까. 하지만 이지함 한 사람 상대라면 조금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었다.
“밤골 도령한테 얘기 들었을 때는 나름대로 좋은 발상이라 여겼는데, 선비님들 보시기엔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오.”
“나라의 근본과 장차 나아갈 길을 정할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인데, 성현의 도리 배우며 위정(爲政) 고민한다는 자들이 가볍게 여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더냐.”
꺽정이의 모주(謀主)에서 사형으로 돌아온 이지함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건 그렇지만, 어차피 우리가 무얼 하고 있는지, 우리도 잘 모르지 않소?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금껏 여기저기 파란 몰고 다닌 것 중에 처음부터 우리가 뜻하여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 얼마나 되오?”
따지고 보면 그러하였다. 윤원형이 고꾸라뜨리고 좋은 나라 만든다는, 그들 대계(大計)의 큰 틀은 이루어졌지만, 깊게 따져보면 그때그때 욕심껏 덧붙인 것이 엉뚱한 쪽으로 풀려나가기도 하고, 또 일이 틀어진 것을 수습하려 임기응변이란 응변은 모두 하다 보니 다른 쪽으로 새어 나가기도 했다.
그러므로 꺽정이나 이탁오는 물론이요, 외인(外人)이라 할 수 있는 쉴레이만이나 카를로스 같은 이들도 당한 뒤에야 깨닫곤 하지 않았던가.
“아직 나라의 백성들이 어리석어 스스로 앞길을 정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리 따지면 우리네가 당 만들어 일어서기 전까지 윤원형이에게 쥐락펴락 놀아난 작자들도 제 앞가림 못한 것은 마찬가지요. 무엇이 올바른 길이고 바람직한 길인지 고민하는 것도 좋지만, 우선 질러놓고 나중에 고민해야 할 때도 있는 것 아니겠소?”
“그래서, 백성을 속이고 천하를 속여서라도 지금 당장 내 제자 녀석이 말한 그 국헌을 세우자는 것이냐?”
“우선은 그렇소. 다만 언제고 다시 고칠 수 있도록 훗날을 위해 여지를 남겨 놓아야겠지. 그리고 우리네만 이득 볼 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골고루 이득 보게 해주고, 심지어 우리에게 반하는 이들조차 숨구멍 정도는 남길 수 있게 해야 할 것이오. 그래야 나중에 돌은 안 맞지 않겠소?”
돌 안 맞는 것도 안 맞는 것이지만, 이왕이면 다른 나라에까지 널리 조선의 법도 – 와 자신의 이름 – 알려지기를 원하는 꺽정이였다. 서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욕심이 부풀어오른 터라, 이왕이면 그럴듯하게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숙헌(이이)과 저 안에 계신 두 분 선생쯤이나 되니 이 발상을 조금은 이해하는 것이다. 팔도 백성은 둘째치고, 성상께 윤허를 받고 조정의 사람들 설득시키는 것만 해도 제법 수고로울 터.”
여전한 사제 녀석 고집을 꺾으려고 또 다른 현실을 이야기하니, 이번에는 흐흐 웃는 소리가 돌아온다.
“그것은 걱정 아니해도 되오. 이 내게 좋은 생각이 있거든.”
“또 누굴 괴롭히려고 그런 험상궂은 미소를 짓고 있느냐.”
“험상궂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웃으면 복이 온다는 이야기도 못 들어보셨소?”
“이놈아, 탁오 그이가 다 불었다. 네 녀석이 서쪽에서도 워낙 근심걱정을 몰고 다녀서 그 일대의 참서(讖書,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네 이야기가 나올 정도가 되었다던데, 네가 어디 가서 복이 오고 가는 것을 논할 처지가 되겠느냐?”
“일단 들어보고서 내 흉 마저 보시오. 제법 좋은 계책이 떠올랐단 말이오.”
꺽정이는 스스로 못 배우고 어리석다 자처하지만, 남을 괴롭히는 못된 궁리에 있어서는 소소한 장난부터 군략(軍略)에 이르기까지 제법 머리가 돌아가곤 했다. 의민당 난리 때 이를 여실히 겪어보았던 이지함은, 그러므로 귀를 기울여보기로 했다.
“근래 선비님네들이 사형 따라하면서, 구름 속에만 있던 머리통을 하계(下界)로도 돌려서 아랫것들 사정도 조금 살피곤 한다 들었소. 그렇다면 방금 사형께서 말씀하신 그런 이치를 떠올릴 사람이 그 두리손이 따르는 못난 것 사이에도 한둘쯤은 있지 않겠소?”
“그건 그렇지... 아, 그런 방도가 있겠구나!”
꺽정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일지, 되짚어 헤아려가던 이지함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헌데 그건 그렇다 치고, 정말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모아 법을 세우게 된다 하였을 때 그 백성들의 마음을 속여서 모으든 훔쳐서 모으든 하는 일은 어찌 할 생각이더냐?”
“거기서부턴 사형이랑 율곡 도령이 생각해야지. 원래 우리 당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소? 생각하는 건 배운 사람들 몫이지. 나라는 근심걱정 덩어리가 계책 세우는 일에까지 사사건건 간여하게 되면 어디 조선 팔도가 남아나겠소? 이게 다 천하를 위한 일이라오.”
“말이나 못하면.”
가벼운 타박과 함께, 이지함이 다시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내 말의 가부를 열심히 고심하시는 듯하구려. 이이 녀석도 끌고 오겠소.”
“고맙다.”
여전히 이황과 조식 두 사람과 팽팽히 맞서고 있던 이이가 얼마 지나지 않아 꺽정이에게 붙들려 왔다.
“자, 두 분이서 열심히 마저 말씀 나누시구려. 안에 계신 두 분 선생은 내가 알아서 잘 내쫓겠소.”
세간에서 조선국의 큰 선비 셋을 꼽으라 하면, 아마도 퇴계와 남명 두 사람은 그 안에 들고 나머지 하나가 수산 선생이냐 율곡 선생이냐만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율곡 선생’이 나이 지긋한 노선비가 아니라 그저 스물을 겨우 넘긴 철부지임을 공보나 정론보만 보는 시골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큰 선비라 해도, 정말로 덩치가 크거나 힘이 센 것은 아니요, 또 꺽정이에게 여러모로 신세 진 바도 많았던 고로, 슬쩍 나와서는 자신이 서쪽에서 난장판 벌인 이야기 해드릴 테니 자리를 옮기자 하는 말에 순순히 따랐다.
그렇게 이지함과 이이 두 사람이서 또 얼마나 논쟁을 벌였을까. 지나가던 서림과 명희가 슬쩍 고개 들이밀었다가 내빼기만 몇 번.
석반(夕飯)이나 좀 들고 나서 마저 하라는 신씨 부인의 강권이 있은 뒤에야 두 사람은 사업당 밖으로 나왔다.
“어찌들 되었소?”
그 강권하는 말을 전해주러 온 꺽정이가, 할 말 다 한 다음 곧장 물었다.
“네놈 때문에 내 마음은 흔들리고, 여기 율곡은 한 번 마음을 정하면 쉽게 고치지 않으니, 논의의 향방이
기울고야 말았다.”
“사형 귀가 얇은 것인데 왜 내 탓을 하시오.”
“삼 년 바닷바람 쐬더니 낯짝이 더 두꺼워졌구나. 네놈이 충동질을 하니 그런 것 아니냐?”
아직도 정해야 할 일은 많았다. 정말로 그 국헌을 세우기로 국론이 정해지면, 민주당과 탕평당 쪽에서는 어떤 안을 내놓을 것인가?
그러한 말이 나왔을 때, 그저 얼떨떨하게 여길 민심을 무슨 수로 붙잡아, 재조론 대신 이쪽 편을 들도록 만들 것인가?
그러나 꺽정이 말마따나, 우선 무언가 해보고 나서 마저 고민할 일이었다.
조정의 권세가 예전같지 않다는 말이 몇 년 사이 부쩍 많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의 수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었다.
오히려 길이 널리 트이고 소식도 빨리 나돌다 보니, 시골 선비들이 식년시(정기시험)뿐 아니라 온갖 별시(비정기시험) 열릴 때에도 제법 많이 응시할 수 있게 되어 옛날보다도 더욱 어사화 꽂기가 어려워졌다.
게다가 하필이면 이황도, 조식도 과거를 볼 때 굳이 부정한 수를 써야 하는 사람들 사정 따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할 생각도 없는지라, 부정한 짓 하다가 걸리면 곧장 그 이름 석 자를 정론보에 박아넣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족의 자제로 태어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과거는 보아야 하는 것이라고들 여겼으므로 – 당장 장사에 손을 대더라도, 유학(幼學) 아무개의 무슨무슨 국(局)보다는 진사 아무개의 국이 더 있어 보였고, 자본 모으기도 쉬웠다 – 과거 준비하는 이들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그래서 내게 도움을 청하고자 한다?”
모락모락 김 나는 찻사발 내려놓으며 심의겸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방숙 형.”
퇴청하는 길에 차라도 한 잔 하자며 저를 잡아끄는 이 있기에 따라갔더니, 바로 삼락서원 들어가려 시험 준비할 때 안면 튼 김효원(金孝元)이었다.
“서원에 들지 못한 이래로 도저히 글이 손에 잡히지 않아, 이렇게 존형께 여쭙게 되었습니다. 이 각박한 시국에 어찌 그리 쉽게 급제를 하셨는지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대로 김효원은 저의 동네 친우 류성룡을 따라 삼락서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주 제대로 기가 꺾여서 돌아왔으니, 심의겸으로서는 동병상련의 감이 아니 들 수 없었다.
“그야 어렵지는 않네. 아니, 따지고 보면 어렵기도 하겠군. 그러니까 무슨 글을 쓰든 책문(策文)처럼 쓰면 된다네.”
저도 벼슬살이 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마치 수십 년은 녹봉 받았던 것처럼 이야기 늘어놓는 심의겸이었다. 젊은 나이에 급제한 이들은 대개 비슷하였다.
“책문이라면... 율곡 선생의 천도책(天道策) 같은 것 말씀이신지요?”
“하하, 우리 같은 범부는 백 년을 공부해도 그런 글은 못 쓸 것일세.”
천도책이라 하면, 금년 별시에서 이이가 써내었다가 낙방한 것으로 유명해진 글이었다. 이런저런 서양 글을 인용하면서, ‘자세한 것은 제가 쓴 <격몽요결>과 여타 서적을 참고하십시오’ 따위 군더더기를 남발하였기에 차마 급제를 시킬 수는 없었지만, 그 논변이 전례없는 것임은 분명하였다.
특히나 어떻게 군주의 인덕(人德)이 천운(天運)과 감응하는지를, 마키아벨리의 소위 ‘운덕지설(運德之說, 포르투나Fortuna와 비르투Virtu)’을 인용하여 개진한 것이 모두의 화제가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이이가 낸 책은 더욱 불티나게 팔리게 되었다.
“조정의 위엄이 다소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막상 육조와 그 아래 여러 관서에서 맡는 일은 훨씬 늘어났다네. 당색 막론하고, 예전처럼 실무를 아전이나 향리들에게만 맡겨서는 아니 됨을 모두가 알게 되었으니. 그러니 중한 것은 책문을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자네가 실무에도 마음을 두고 있음을 드러내는 데 있네.
말하자면 수학호고(修學好古)뿐 아니라 실사구시(實事求是)도 하는 사람이 바로 나 아무개다. 이렇게 글로써 드러내어야 비로소 인재라 불릴 수 있다는 것이지.”
“아... 그렇군요. 한 마디 말씀이 실로 천금과 같습니다. 이제야 조금 실마리를 잡은 듯하군요.”
김효원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관례를 치르고 얼마 전 혼사도 치루었다지만, 나이 스물도 되지 않은 터라 아직 그 마음속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나저나 내 어디 있는지는 어찌 알고 그렇게 앞에 나타났는가? 여기 임천당에는 또 무슨 수로 방을 얻었고?”
“궐외각사 밖에서 서성이는 이들이 몇몇 있던데, 그들에게 물었더니 금방 존형 나오시는 곳 어디쯤일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심지어 여기 임천당 가가(街家)에 자리 알아주겠다며 선뜻 도와주기도 하던데, 아직 도성 인심이 완전히 각박해지지는 않은 듯합니다.”
근래 부쩍 장사하는 집이 늘어났는데, 이들은 주로 새로 닦인 말끔한 저자에 맞닿은 곳 집을 사들여 장사를 벌이곤 했다. 속언(俗言)에 이를 ‘가개’라 부르곤 했는데, 이를 다시 그럴듯한 진서로 바꾸어 길가에 있는 집이라 하여 ‘가가(街家)’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가가 중에서도 으뜸은 임천당이라. 한양 성내에서는 제법 거리가 있었으나 그곳에서 맛볼 수 있는 진미가 여간 진미가 아니었던 고로 여간해서는 방을 빌릴 수 없었다.
“잠깐, 각사 밖에 서성이는 이들이 있었다고?”
청송 심문의 자제요 주상의 인척이라지만 고작 사간원의 미관말직에 불과한 심의겸이다. 그런 저를 기다리는 자가 있었다는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렇게 구하기 어려운 임천당 방까지 선뜻 빌려줄 정도라면...
그 의심이 열매를 맺기도 전에, 방문 활짝 열리며 저녁 노을 대신 시커먼 도적놈이 들어왔다.
“내가 그래도 임금님과의 의리가 있는데, 열심히 조정에서 일하는 신료를 함부로 붙잡아올 수는 없지 않겠소. 그리고 또 집에서 만나자니, 그대 집안 사람들 눈치가 보이고.”
“누구십니까?”
“이 가가에 네 놈 자리 마련해준 사람이다. 볼 장 다 본 듯하니 썩 꺼지거라.”
김효원이 멋모르고 물으니, 급히 심의겸이 끼어들었다.
“흠흠, 민주당 임 당수일세.”
“예에? 임 당수? 임 당수가 왜?”
그 말에 넋이 빠져 쳐다만 보던 김효원은 임꺽정에게 옷깃 채로 붙잡혀 밖으로 떠밀렸다. 바깥에서 기다리던 검은 옷 입은 무리가 김효원을 넘겨받아, 그를 슥 끌고 나가며 문을 닫아주었다.
“또 무슨 일이십니까? 제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문자로 형용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 튀어나오는 속마음이었다.
당장 조정과 문중에 임거정의 소재를 고할 때, 사실을 온전히 고하지 못하고 일부만을 전하면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그때의 그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아직도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내가 할 소리요. 내가 뭔 잘못을 했다고 그렇게 칠색 팔색인지, 참.”
마치 범이 산길을 가로막고서 왜 저를 두려워하느냐며 이빨 드러내는 격이었다. 그 해괴한 말에 구천으로 날아가려는 넋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다시 물었다.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신지요?”
“별 건 아니오. 그대 종조부 심 대감께서는 안녕하시오?”
“그... 강녕하시기는 하신데...”
“잘 되었네. 그쪽에 가서 계책이나 하나 진상해주시오. 내가 전해주었다는 말은 하지 말고.”
이것이 심통원 귀에, 재조론을 국헌으로 정하자는 계책이 들어간 까닭이었다. 과연 삼락서원에서 천하의 기재들과 동문수학한 보람이 있다며 그의 어깨 두드린 심통원은, 문중 내에서는 내 것 네 것이 없다면서 그 계책을 자신이 낸 것으로 꾸몄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양 교외 광주의 한 조용한 산장에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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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개념이 동아시아에 들어온 것은 서양의 입헌군주정과 민주정 개념이 소개된 19세기 중반 이후입니다. <국어(國語)>에 나오는 ‘헌법’이라는 표현을 ‘Constitution’의 역어로 택한 것은 메이지 일본에서였지요. 하지만 ‘모든 법 위에 있는 절대적인 규범’이라는 발상 자체가 아예 동아시아에 부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특히 공자 이후로 형벌을 필요악으로 보면서도 그것을 궁극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규범으로서 예를 숭상하였던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있어, ‘삼대의 정치’나 ‘선왕의 도’로 표상되는 이상화된 과거 및 그 과거에 지켜졌던 규범은 일종의 최상위 법원(法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론 이러한 지적 전통을 아예 ‘유교 입헌주의’로 칭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습니다. 함재학, 2006. “유교전통 안에서의 입헌주의 담론.” <법철학연구> 9(2))
우리말 ‘가게’는 본디 평상을 뜻하는 말 ‘가개’에서 나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이 확장되어, 음식을 파는 노점 바깥에 있는 평상을 뜻하게 되었고 – 이는 16세기 초에 편찬된 <노걸대언해>에서도 확인되는 용법입니다 – 나중에는 길가에 세워진 가건물이라는 뜻으로 가가(假家)라는 말로 변형됩니다. 작중에서는 비슷하지만 살짝 다른 방식으로 가가(街家)가 되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심의겸과의 갈등 끝에 동서분당의 원인을 제공하였던 김효원은 이황과 조식의 문인으로,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의 벗인 탓에 종종 윤원형의 집에도 드나들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한참 뒤에 이 점이 문제가 되어 심의겸의 공격을 당했고, 이것이 신진 사림과 그 이전 세대의 사림 사이의 갈등으로 비화되어 동서분당에 이르게 됩니다. 작중에서는 그럴 일이 (아직) 없고, 오히려 이황과 조식, 그리고 이이와 서경덕 문하에 들어갔을 이들이 삼락서원 하나로 뭉치게 되어 그 인맥에 한 다리를 걸친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에도 연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여담으로, 원 역사에서도 김효원은 소싯적 건천동에 살며 류성룡과 교우관계를 맺었고, 이러한 개인적 인연은 이황 문하에서의 학연과 더불어 류성룡이 동인 쪽에 가담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1550년대 건천동은 지나가는 동네 도련님이 류성룡이고, 골목대장 놀이를 하는 개구쟁이가 이순신이었으며, 평범해 보이는 길거리 소년도 훗날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거물 정치인이 되는 곳이었던 것이지요. 동네 건달 겸 이장이 유방이고, 시청 말단 직원이 소하였던 기원전 210년대 패현과 비슷한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작중 언급된 <천명도설>은 원 역사에서 사단칠정논쟁을 일으킨 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정지운은1537년 주희의 <성리대전>에 언급된 우주론을 그림으로 정리하여 하나로 엮고, 이어서 소옹(소강절)의 우주론까지 통합해 도식화한 뒤 해설까지 덧붙였는데, 이 과정에서 이황의 자문을 구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 기대승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사단칠정 논쟁이 시작되지요.
원 역사의 <천도책>은 이이가 1558년 별시 초시에서 제출한 답안지로, 여기서 이이는 세 번째로 장원급제함으로써 구도장원공 전설(또는 민폐)에 한 획을 더하게 됩니다. 본디 천도책의 요지는,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라는 유교 전통의 천인합일설을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이기일원론에 의거해 풀이한 것이었는데, 작중에서는 이기일원론 대신 마키아벨리가 인용되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변화무쌍한 운명을 지칭하는 포르투나는 통치자의 비르투(탁월함, 미덕)로 어느 정도 제어될 수 있는데, 마키아벨리는 이를 넘실대는 강물과 제방에 각각 비유합니다. 원 역사의 천도책에서도, “리의 상(常)과 리의 변(變)을 어찌 항상 천도(天道)에만 맡기겠습니까?”라면서 통치자 개인의 태도가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