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물 흐르듯 (2)
민주당과 탕평당은 명색이 하나의 당을 자처하는데, 두리손과 그 일파는 이른바 재조론을 따른다는 것 외에 딱히 다른 이름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 당’이라고 할 뿐.
이는 무엇보다 그 당의 다른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조정의 심통원과 군의 남치근이 두리손을 견제하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당을 자처하며 묶이게 되면, 두리손이 그 당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 명백하였으므로.
바깥에서 보면, 이제 겨우 거사를 치를 만한 세를 모은 판국에 벌써부터 서로 질시하는 것이니 실로 소인배 모임답다 할 만하였다. 허나 안쪽 사정을 들여다보면, 심통원과 남치근 두 사람의 시기란 실제로는 두려워하는 것에 가까웠다.
당장 심통원과 남치근 두 사람이 찾아온 광주의 한적한 산장도, 두리손을 따르는 자칭 도사 지함두(池涵斗)가 집주인을 풍수의 설로 꼬드겨 거저 얻은 것이었다.
맨손으로 시작한 두리손이 한쪽에서는 향반들의 마음을 두루 사고, 다른 한쪽으로는 민주당에 들지 못한 온갖 모리배와 불한당들을 모아 그럴듯한 세력을 꾸리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감께서 긴히 발의하실 바가 있으시다 들어, 이 누추한 산장을 급히 소제(掃除)하였습니다. 감히 대감의 의중을 듣고자 합니다.”
산장의 본채 마루에 앉아 두 사람을 맞이한 두리손이 운을 떼었다. 말투는 자못 공손하되, 그뿐이었다. 산장을 지키는 것은 두리손의 사람이요, 산장의 주인 또한 두리손이니, 주(主)와 객(客)의 분별은 확연하고 두 대감과 천한 얼자 사이의 분별은 드러나지 않았다.
당장 운을 떼며 던진 저 말도, 풀이하면 ‘네놈이 불러서 이렇게 자리 마련하였으니 얼른 할 말이나 해보거라’ 하는 뜻 아니던가.
그저 권세를 탐내는 사람과 그 이상의 무언가를 욕망하는 자의 마음가짐과 독함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이치를 알지 못하는 심통원과 남치근은 그저 어쩌다 상하(上下)가 이렇게 뒤집혔는지 속으로 은근히 한탄하고 질투할 뿐.
“흠흠, 그렇소. 무릇 계책 중의 으뜸은 장계취계(將計就計) 아니겠소이까. 경사(京師, 서울)를 차지한 무뢰한과 도적들이 국론(國論)을 어지럽히고 가짜 선비들만을 세우고자 온갖 헛된 법도를 만들었는데, 이제 그것을 우리가 이용하여 마침내 옳고 그름을 바로잡을 만한 방도가 이 사람에게 떠올랐소.”
심통원이 헛기침 한 번 하며 답했다.
“부민고소를 금하는 옛 법을 폐할 때부터 소위 전정공회를 열 때까지, 저들의 수법이란 곧 난민(亂民) 무리를 모아 도성을 어지럽히며, 저들의 뜻을 마치 모두의 공의(公義)인 양 속이는 것이었소. 이제는 우리가 앙갚음할 때가 아니겠소이까?”
저들은 지금껏 백성의 의권이니, 군주민수니 하는 음험한 말을 꾸며내어 국사를 전횡해 왔다. 그러니 이번에 그들 당의 입김 닫는 선비들을 모아, 그들로 하여금 상경하여 나라의 큰 법 – 심통원이 훔쳐온 말로는, ‘헌법’ – 을 세워달라며 연명으로 복궐상소(伏闕上疏, 궐 앞에 엎드려 상소함)케 한다.
“이미 저들의 전력이 있으니, 저 음험한 임거정이나 그 아래의 간사한 이지함, 서림 등의 무리도 겉으로 우리 당 선비들을 막을 명분을 찾지 못할 것이외다.”
“그러나 성상의 곁을 지키는 폐행(嬖幸, 아첨꾼)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지존의 눈과 귀를 막는다면 효험은 없고 저들의 경계만 살 것입니다. 계책이 과하면 때로는 발목을 잡기도 하는 법이니, 반드시 기책(奇策)만이 답은 아닙니다.”
남치근이 토를 달았다. 그는 내심, 자신을 따르는 관군 장수들을 모아 오십여 년 전 폐주(연산군) 쫓아냈던 것처럼 한양으로 그대로 진군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물론 심통원이 금상의 외척인 데다가, 역모가 역모 소리 듣지 않기 위해 명분이 필요하다는 것만은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바람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바로 그러니 복궐상소를 하는 것이오. 주상께서는 실로 성정이 성인과 같으시나, 다만 아직 뜻을 완전히 세우지 못하시어 어심(御心)이 굳게 서지 못하고 종종 바람에 휘곤 한다오. 이래 봬도 이 사람은 나라의 은혜를 입어 척신(戚臣)이 되었소이다. 마땅한 계기만 있다면 그 바람을 이 사람이 불게끔 할 수도 있을 터.”
근래 말업(末業)이 오히려 본업(本業)보다 흥성하여 선비와 농군을 모두 괴롭게 하는 세태를 고발하고, 나라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 근거이자 기틀이 될 큰 법도 세울 것을 건의한다.
옛날 같았더라면 어디 벼슬조차 하지 않는 산야의 선비들이 국사(國事)를 함부로 논하느냐며 바로 벌하였겠지만, 이미 국기(國紀)가 문란해진 지 오래요 그렇게 국기 문란케 한 자들은 바로 민주당이었으므로, 욕하려 한들 제 낯에 침 뱉는 격만 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치근은 신통치 않게 여기는 듯, 계속 발목을 잡으려 하였다.
“그렇게 국법을 새로 정한다 하면, 과연 저들이 가만 있겠습니까? 설령 법도를 만든다 한들 조석간에 뒤엎고, 오히려 이를 빌미삼아 저들에게 반하는 자들을 죄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조금 더 멀리 보시오. 멀리. 백성의 뜻 받들겠다며 주상께 간교한 말을 올려, 그 공회도 세우고 그곳에서 국사를 논하게 하였는데, 그것을 하루아침에 뒤엎을 수 있겠소?”
‘여하간 무부(武夫)의 식견은 참...’이라는 사족을 슥 흘리며 심통원이 말했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남치근의 낯빛이 붉어지며, 무어라 독한 말이 목울대에 맺히던 차,
“욱재(심통원) 대감의 계책이 참으로 좋습니다. 삼남에 연통을 돌리고, 장차 그 뜻을 모아 상경토록 정론보 등에도 광고(廣告) 싣도록 하겠습니다.”
두리손의 한 마디에 막 열리려던 남치근의 말문이 가로막혔다. 심통원이 없더라도 다른 외척, 그리고 외척 되고자 하는 벌열가는 있고, 남치근이 없더라도 민주당 놈들 했던 것처럼 저들도 권세 부리고 싶어하는 어리석은 무관은 넘치도록 많았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이는 오직 두리손뿐이었으므로.
“하하, 내 그대 또한 계책의 진가를 알아볼 줄 알았소이다.”
그리하여 당론은 그렇게 정해졌다.
허나 여전히 분 풀리지 않은 남치근은, 심통원이 사라지자마자 도로 산장으로 돌아와 두리손 앞을 막았다.
“저 헌법인지 하는 법도 놀음이 과연 뜻대로 되리라 보시오?”
“그렇게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어느 쪽이든 우리가 손해볼 바는 없습니다.”
두리손이 여전히 말투만 공손하게 한 채로 대꾸하였다. 아비에게 아들로 인정받지도 못한 천한 사람이지만, 오로지 종묘사직의 앞날과 이 나라의 문명함을 지키기 위해 한 몸 불사른다. 그러한 핑계 내세우며 – 삼남의 향반들에게는 제법 잘 먹혔다 – 지키는 시늉 하는 공손한 태도.
“저들은 지금껏 국인의 뜻을 내세워 국정을 농단해 왔지요. 하지만 전국의 모든 사람들을 세워, 그들에게 어떠한 나라에 살고 싶느냐, 한 번 고르면 다시는 옛날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렇게 윽박지르면 재조론의 손을 들어주는 이가... 글쎄요. 열에 일곱은 족히 넘길 것입니다.”
“그렇다 한들, 저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오! 저들은 한양을 여전히 손에 꽉 쥐고 있지 않소이까.”
“그렇다면 그때야말로, 저들이 지금껏 백성의 뜻이며 무엇이며 외치던 것은 거짓에 불과하고, 오직 사사로운 욕심을 위해 나라를 뒤흔든다는, 아주 좋은 명분이 생기겠지요.”
“명분, 명분, 그놈의 명분! 선비 시늉이 과한 것 아니오?”
그러나 두리손은 그 겉치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껄껄 웃을 뿐.
“하하하! 명분이 전부는 아니지만, 거의 전부이기는 하지요. 그래야 역모가 아닌 반정(反正)이 될 것 아닙니까.”
저의 속마음을 들킨 남치근은,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따라오시지요. 제가 믿는 구석이 또 있는데, 대감께만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산장 한 구석에서 남치근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들을 만났다.
그날 이후 남치근이 두리손 앞에서 섣불리 말을 꺼내는 일은 없어졌다.
한양 모처에서는 헌법 – 이제는 이쪽으로 명칭이 굳어졌다 – 의 초안을 두고 여러 사람들이 몰래 논의하며,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두고 간 분화두(紛華豆, 커피 콩)를 축내었다.
그사이 삼남의 향반들에게 연통이 돌고, 정론보에는 영 글솜씨 모자란 향반들이 연달아 기고하여 국법으로 근래의 어지러운 세태를 바로잡아야 함을 역설하였다.
어지간한 국법으로는 부족하고, 경국대전 같은 선대의 법령으로도 부족하니, 이 나라가 무엇을 위해 세워졌으며 장차 무엇으로서 다스릴 것인지, 그것을 국인들에게 명명백백히 드러내는 그러한 법을 세우자. 그리하여 선비의 쓰임은 다하지 않고, 농군의 곳간은 비워지지 않도록 만들자.
조식과 이황 모두 이러한 글을 손수 반박할지언정, 글을 도저히 실어줄 수 없다며 거절하지는 않았다.
“마침내 날짜가 잡힌 듯하다, 꺽정아.”
“누가 점잔빼는 것들 아니랄까봐, 퍽 오래도 걸렸소.”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걷이가 끝나갈 무렵. 마침내 삼남의 향반들은 하나둘씩 짚신 챙겨 먼길을 떠났다.
“전라도 장흥에서는 생원 김 모가 저의 일가붙이와 친족들을 이끌고 상경하고 있답니다. 총 서른 하고도 넷인데, 상경하는 길에 정읍에 들려 다른 친척들까지 함께 데리고 올라올 것이라더군요.
그리고 경상도 선산에서는 진사 박 아무개가 무리 스물을 거느리고 올라오고 있고요.“
명희가 저의 손에 한아름 안긴 종잇장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읽었다. 그 말 따라 이지함은 조선 지도 곳곳에 새로 깃발을 꽂았다.
“선산이라 하셨습니까? 이미 그쪽에서는 유학 정 모가 상경하고 있다 들었는데, 혹 잘못된 것은 아닌지 재차 살펴주시지요.”
“한 패가 더 올라오려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충주에서는 단양과 영월에서 상경하려던 이들이 읍내에서 가로막혔다더군요.”
모든 군현에 있는 민주당 사람들이 고하고, 또 몇몇 경우에는 민주당에 속하거나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공회 사람들이 찾아와 알리기도 했다.
“가로막혔다?”
“옛날만큼 노복들을 많이 대동하지 못하다 보니, 사족들을 좋지 않게 보는 충주 사람들이 만만히 여긴 것 아니겠어요?”
모든 법도가 그러하듯, 한전법의 시행이 그렇게 아름답게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농지를 받은 옛 노복들이 작정하고 저들 상전이 한전법을 피하려 편법 부린다고 고변하기도 하고, 더 많은 농지를 얻고자 상전의 은결(隱結, 토지대장에서 누락된 농지)을 신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평소 원한 있던 다른 사족이나 요민(饒民, 부유한 상민) 집안이 민주당 향리들과 작당하여 헐값에 농지를 뜯어내는 경우도 있었고, 한창 향전이 격렬할 때 마구 사람을 해쳤다가 그 값을 물어주느라 가산이 탕진되는 경우도 있었다.
“양반들이 수십씩 떼를 지어 다니는데 몰매를 맞을 지경이라니, 순 가난뱅이들만 모였나 보오.”
“물론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체통 지켜가며 무사히 상경하는 무리도, 또 남은 재산을 털어 떳떳하게 대열 이뤄가며 상경하는 이들도 있다고 하더군요.
아, 그리고 부안에서는 전 부호군 한 모와 그의 벗이라는 유학 최 모가 무리 이십오 인을 이끌고 배를 빌리려 했는데, 삯을 내지 못하여 곤란하던 차에 한때 은혜 입었던 아전 하나가 대신 삯을 내어주어 무사히 배에 올랐다 하네요.”
재조론에 열광하는 모든 향반들이 곤궁한 처지로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 체통을 지킬 만큼의 가산은 남았으나, 진심으로 나라가 잘못된 길로 나아간다 여겨 먼길 나선 이들도 있었고, 재조론을 내세우며 향회에서 문중의 지체 높일 심산으로 목청 돋우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대개 문필에 의해서든 혼사를 통해서든, 다른 고을의 사족들과도 연이 있기 마련이었다. 한 이삼백년 정도 나라의 모든 선비들이 당을 나누어 다투지 않는 이상 이러한 연이 알아서 끊기지는 않을 것이었다.
“거 많기도 하다.”
지도 가뜩이나 많이 꽂혀 있던 깃발들이 또 새 동무를 구한 것을 보며 꺽정이가 말했다.
“국조(國朝, 조선)가 열리기 전부터 토호들은 있었고, 그들이 스스로 선비 시늉을 하게 된 것도 벌써 이백여 년이다. 어찌 수가 적겠느냐.”
“이러다 정말로 머릿수로만 권점하게 되면 우리가 밀릴 수도 있겠는걸요.”
명희가 끼어들어 한 마디 했다. 저 깃발 꽂힌 고을마다 재조론을 설파하는 선비가 수십씩 있는 셈이요, 상경하지 않은 향반들과 은연중 찬동하는 상민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원래 법이라는 것은 물 흐르듯 만들어졌다 하여 법(法) 아니겠습니까. 물이라는 것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를 뿐이니, 정해진 길 없이 둑에 막히고 물길을 따를 뿐이지요.”
조선국에 사는 이들 열에 아홉에게는 아직도 농사일이 세상의 전부였다.
허나 반대로 생각하면, 이제 열 중 하나는 농사 대신 다른 일로 입에 풀칠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한양은, 그렇게 손에 흙 아니 묻히는 이들이 가장 많이 모인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부인의 낭군이 잘 보여준 것처럼, 물길이라는 것은 터만 잘 잡으면 쉽게 낼 수 있지요.”
이 나라의 가운데이자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한양에는, 삼남을 메우다시피 하고 있는 ‘재(再)’자 깃발을 비웃는 듯한 ‘민(民)’자 깃발이 떡하니 꽂혀 있었다.
“허어, 세상에.”
“이곳이 정녕 그 한양이 맞다는 말인가?”
시골 선비들의 벌어진 입이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았다.
오가는 물산이 늘어나다 보니, 짐꾼을 쓰는 것보다 수레를 쓰는 것이 더 편하게 되었고, 길은 닦이다 못해 아예 바닥에 돌을 깔기도 했다.
그뿐이랴? 이층 다락집도 한둘이 아니니, 좋은 털가죽이 북변에서 쏟아졌기에굳이 구들장 아니 깔아도 겨울에 버틸 만하기 때문이었다.
가게에서 파는 주전부리는 유구국 사탕이요, 거리 오가는 자들은 하나같이 비단옷. 화려한 저자 뒤편에는, 개천가 다리 아래에서조차 쫓겨나 부둣가 전전하는 막일꾼과 가난뱅이, 부랑배들.
“인천만 심한 줄 알았는데, 도성도 이렇게 금수지경이 되었다니!”
막북 상행에서 성공 거두고 한양으로 돌아와서는, 집안의 오라버니나 삼촌 따라 동방으로 온 콩키스타도라(여성 콩키스타도르) 꽁무니를 쫓아다니고 있던 마르틴 데 고이티는 저도 모르는 사이 금수 소리를 들었다.
“자, 얼른 가십시다! 광화문까지 얼마 남지 않았소.”
삼 년 전 안경 사러 한양 온 덕에 그나마 일동 중 도성 지리에 밝은 이 하나가 나머지를 이끌었다.
몇 해 전만 해도, 나라의 온갖 고을에서 수많은 이들을 모아 같은 날 같은 때에 거하게 복궐상소 올린다는 것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모두 은이 이 나라 팔도에 마치 사람의 피처럼 흐르기 때문에 가하게 된 일. 그러나 그러한 이치를 온전히 깨우쳐 아는 이들은 향반들 중 그리 많지 않았고, 설령 알더라도 그것이 꼭 바람직하다 여기지는 않았다.
모든 문물이 편리하고, 은만 있으면 그 어떤 귀물도 구할 수 있는 금수의 나라에서 사느니, 차라리 사람이 자신이 태어난 고을 바깥으로 굳이 나갈 필요가 없는 문명한 나라에서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육조거리 앞은 벌써부터 도포자락 날리는 선비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냉수로 속 차리고 이 자리에 찾아온 향반들마저도 그 옷차림만은 그럴듯하였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바라옵건대 다시금 큰 가르침을 내려주소서!!”
이미 맨 앞에 엎드린 이가 상소문을 모두 낭독하였는지, 다들 통촉해 달라는 후렴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떤 상소문일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었다. 나라의 본말이 뒤집힌 지 여러 해. 사민(四民, 사농공상)의 순서는 뒤집히고 그와 더불어 나라의 모든 질서가 하나씩 무너지고 있으니, 이제라도 헌법이라는 큰 법으로써 조종의 구법(舊法)을 밝게 드러내고, 그것을 근거삼아 나라를 다시 세우자(再造)는 것이었다.
“헌법을 세워,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우시옵소서!”
한 발 늦게 온 무리도 그 뒤에 따라붙어, 부복하고 외쳤다.
어느새 모여든 금군과 어영청, 포도청 사졸(士卒)들이, 역시 주변에 몰려들어 웅성거리는 백성들과 향반들 사이에서 사람의 띠가 되어주었다.
이 무슨 무엄한 짓이냐며, 얼른 흩어지라 하는 자가 하나쯤 나올 줄 알았건만, 저 금군 중 그 누구도 그런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차마 궁금함을 이기지 못한 부여 고을의 김 진사라는 자가, 부복하는 이들 사이에서 슬쩍 몸 일으켜 물었다.
“이보시오.”
“주상 전하의 뜻 받들어 수선(首善, 서울) 지키는 어영청 군관 이 아무개올시다. 무엇을 도와드리리까?”
어째 답하는 말이 조금 이상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잠시 묻어두고 물었다.
“그... 우리네가 묻기엔 조금 무엇한 물음이지만... 정말 이대로 우리를 내버려둘 심산이시오?”
“아직 주상께옵서도 행차하지 아니하셨고, 또 소관이 속한 어영청은 물론이요 그 어떤 다른 군영에서도 어찌 하라는 방침은 내려오지 아니하였습니다. 어찌 밝은 뜻을 드러내었다는 것만으로 국인(國人)의 언로를 가로막겠습니까?”
“오오, 그렇구려. 고맙소.”
“그, 헌데 혹시 상경하시는 길에 불편하신 것은 없으셨습니까? 이를테면, 영 수상쩍은 장사치가 싸구려 물건을 팔려 한다던가...”
그러나 김 진사는, 저 ‘국인의 언로’ 운운하는 말만 귀에 담아두고서는,
‘아아, 우리의 대의가 저 보잘것없는 군관들조차 감격케 하였구나! 아직 이 세상에 도의는 살아있도다!’
하는 생각만 차올라 어떻게든 실적 올리려는 어영청 군관의 물음은 그대로 흘려버렸다.
그때였다.
“아니? 이 무슨 소리인가?”
함께 부복해 있던 이들이 하나둘씩 허리를 세웠다. (지나치게 몰입하였던 몇몇 늙수그레한 자들은, 저의 허리 건장함을 맹신하였다가 뒤늦게 몸 일으키며 ‘아이고’ 소리를 내었다.)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데, 어째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요란해지고, 또 선명해지는데, 먼저 묵직한 징과 가벼운 꽹과리 챙챙 둥둥 하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북과 장구 두드리는 소리가 나며, 경망스러운 쇄납은 가죽과 쇠 두드리는 그 소리 사이를 파고들며 음률을 더했다.
“이것은 군악(軍樂) 아닌가? 이거 영 기세가 사나운데...”
개중 겁 많은 몇몇은 벌컥 무서운 소리부터 하며 퇴로 찾아 슬그머니 고개 돌리고,
“어쩌면 취타(吹打) 음률일지도 모르겠네. 상께서 우리의 청원을 들으신 것 아니겠는가?”
아는 체 하고픈 마음이 실제로 아는 것보다 훨씬 큰 자들은, 궁의 악공(樂工)들이 듣는다면 어떻게 저 자진모리와 휘모리 뒤섞인 엉터리 장단을 취타에 비기냐며 볼멘소리할 말을 당당히 내놓았다.
그리고 곧 부복하는 것도 잊고 좌우를 열심히 살피던 향반들은 경악을 금하기 어려워졌다.
“와아아! 헌법! 헌법을 세웁시다!”
“정직하게 땀 흘려 벌어먹는데 언제까지 말업, 말업 소리 듣고 살 게요? 법으로써 우리네 앞길을 지킵시다!”
패거리를 모아 위세를 부리는 것은 의민당 시절부터 임 당수의 장기였다. 부민고소 금법 풀어달라며 의민당 깃발 휘날리며 상경하였을 때부터, 연고도 없는 말라카 한가운데서 난리 일으켰을 때까지, 사람들 모아 생떼부리며 높으신 분들 겁박하기에는 이골이 났다.
“선비님네들 말씀이 맞소! 헌법을 세웁시다!”
“배우신 분들 말씀대로다! 사농(士農)만큼 상공(商工)도 귀하다!”
대국의 문명을 받들어 세금도 은으로만 걷자는둥, 국법으로 아예 말업이라는 말 자체를 폐해버리자는 둥, 엉뚱한 소리가 향반들을 에워쌌다.
육조거리 양 옆에서 나타난 시끄러운 패거리가, 어느새 향반들 양 옆을 가득 메우더니 제멋대로 외치고 지껄였다.
“아니, 우리가 대체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이... 이! 간악한 놈들! 저리 꺼져라! 꺼져!”
그러나 졸지에 헌법 세우자는 말을 눈앞에서 도둑맞은 향반들이 암만 꾸짖어도, 저 시끄러운 자들에게는 통할 리 만무했다. 민주당 사람들이든, 아니면 그들이 끌어들인 다른 한양의 장사치들이든, 처음부터 이러려고 작당을 하였으므로.
농사짓는 이보다 농사 안 짓는 이가 훨씬 많은 한양이다 보니, 삼남에서 상경한 선비들만큼이나 주변에 새로 몰려든 장사치들도 수가 많았다. 머릿수는 같고 시끄럽기는 두세 곱절 되는 이들이,
‘조종대업 영세토록 제헌(制憲)하여 번영 찾자’
‘일한 만큼 버는 세상 헌법으로 이룩하자’
따위의 글까지 포목에 써서는 깃발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한쪽은 체통을 지켜가며 외치고, 다른 한쪽은 애초에 지킬 체통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 멋모르는 구경꾼들 듣기에는, 저들 선비들의 점잖은 말이 새로 끼어든 장사치들에게 묻혀, 두 패거리가 똑같은 말을 외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선비들이 다 같이 외치는 말이야 ‘통촉하여 주시옵소서’가 전부인데, 이쪽은 대체 무엇을 통촉해 달라는 것인지, 나라에 무엇을 원하는지 명백히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 선비님네들 하시려던 말씀이 저 뜻이었군.”
“아까는 분명 말업을 억누르니, 은을 없애니 하였던 것 같은데...”
“난 그 헌법 세우자는 말밖에 못 알아들었네. 지금 그러니까 양쪽에서 똑같은 주장을 펴고 있는 것 아닌가?”
좀 멀리서 구경하던 이들은 그렇게 혼동하고,
“허, 그럼 그렇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국론(國論)이 뒤집혔나 했네. 이제 보니 시골의 물정 어두운 양반님네들이 작당하고 상경한 것이었군그래.”
“어찌 그리 단정하는가?”
“지금 저기 보게. 나라에서 상공을 억누르자 하는 이들보다, 아예 법으로 상공의 업을 중히 여기게끔 못박자 하는 이들의 목청이 더 크지 않은가? 세력으로 따지면 그러니까 비등한 셈일세.”
나름 물정 밝다고 자부하며, 길가의 목 좋은 가가 다락방을 빌려 주전부리와 함께 구경하던 이들은 그렇게 떠들었다.
어떤 말이 오가는지는 몰라도, 결코 그들의 뜻한 바는 아니요 저쪽 시끄러운 무리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한 부여 고을 김 진사가 몸을 일으켜 급히 두리번대었다.
다행히도 앞서 문답 나누었던 그 어영청 군관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엿장수 하나를 붙잡아두고 뭔가 수작을 걸고 있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방금 전 불편한 것 있으면 알려달라 하지 않았소? 저들, 저치들이 지금 큰 뜻 품고 상경한 선비들을 욕보이고 있소이다! 얼른 군사를 풀어 단속하여 주시오!”
그사이 엿장수에게 동전 – 근래 명국에서 많이 들어와, 한양이나 송도 등지에서는 제법 널리 쓰이고 있었다 – 몇 닢을 받아든 군관이 고개를 저었다.
“송구하오나, 그것은 저희 소관이 아닙니다.”
“그 무슨 말씀이시오? 분명 방금 전에는 국인의 언로를 막아서야 되겠느냐며, 우리네를 탄압하거나 흩어버리지 않을 것이라 하였지 않소?”
“저들 또한 충군애국하고 또 나라에 조세 바치는 순량한 백성들입니다. 다 같은 국인이요 다 같은 언로인데, 어찌 한쪽 편을 들겠습니까? 그리고 소관이 듣자하니, 제공(諸公) 선생들과 지금 막 끼어든 저 장사치들이 외치는 바가 얼추 비슷한 듯한데, 혹 선생께서 오해하고 계신 것은 아니실지요?”
“무어라? 아이고...”
답답함을 못 이기고 김 진사는 그만 바닥에 주저앉고야 말았다.
야속한 꽹과리와 북소리는 도통 그치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머릿수로 치면 재조론 따르는 향반들에게 한참 못 미치는 한양의 장사치들이, 양반님네들과 어깨 나란히 하며 저들 또한 국론의 일각을 대변하고 있노라 널리 알리게 되었다.
어디서부터 향반들이고 어디서부터 장사치들인지 분간은 되지 않고, 다만 후자가 시끄럽게 외치는 소리와, 그 떠들썩한 판을 미리 예견하고 들고 온 종이폭이며 깃발들은 구경꾼 이목에 고스란히 들어갔다.
“국론이 그러하다면 군왕(君王)으로써 어찌 귀를 막겠는가? 조야(朝野)에서 저 소위 헌법을 세워 경국(經國)의 요체를 밝게 드러내라 하니, 공회에서는 그 가부와 방도를 정하여 중추부에 전할지어다.”
듣자하니 그 헌법이라는 것을 세우면 지금껏 모호한 처지에 있던 상공(商工)이 지금보다 더 부흥하고, 그렇게 되면 내탕고는 지금보다도 더 풍족해질 것이었다.
게다가 임금 저의 사리사욕만을 위한 것도 아니요, 광화문 앞에서 격쟁(擊錚)하던 시끄러운 무리들이 한 마음 한 목소리로 헌법으로써 상공의 지위를 보장해 달라 하였다지 않은가? 개중 몇몇 선비들은 그와는 다른 주장을 상소로 올린 바 있었으나, 대저 국론이라 함은 많고 적음을 따져 헤아리는 법.
그리하여 지금껏 권점으로 향임을 정하는 것이 실로 문명하지 못하고 천박한 속풍(俗風)이라 비웃던 향반들과, 이 헌법 발상이 저의 것이라 여기고 있던 심통원 등은, 한 마음으로 ‘한 번만 더!’를 외치게 되었다. 동네 개구쟁이들 손장난도 삼세판은 하여야 결판이 나지 않던가.
며칠 뒤 심통원이 조회 끝나자마자 임금 뵙기를 청하고서는, 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하여 전국 모든 군현에서 권점을 행하여 민심을 살펴야 할 것이라 진언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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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손의 수하로 나오는 도사 지함두는 실존인물로, 훗날 정여립의 난에 가담한 인물로 사서에 이름이 등장합니다. 지함두 외에도 정여립의 난에 관여한 인물 중에는 끝까지 정여립과 함께한 변숭복 등 황해도 출신 인물이 많았고, 이들 중에는 유생뿐 아니라 체제 바깥으로 밀려나 있는 기인(奇人)이나 천인인 듯한 자들도 많았습니다. 물론 당시 고변의 주축이 된 황해도 관찰사 한준,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억지로 가져다 붙였거나 심지어 없는 사람을 있다고 꾸며내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지나가듯 몇 번 언급된 여성 콩키스타도르, 즉 콩키스타도라는 드물었지만 의외로 꾸준히 존재했습니다. 콩키스타도르 전설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코르테스의 원정대에도 뛰어난 무술로 이름을 떨친 마리아 데 에스트라다가 있었고, 그 이후에도 이녜스 수아레스 같은 콩키스타도르들이 종종 그 이름을 남긴 바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개 남편이나 남자 형제들이 콩키스타도르로 참여하면서 함께 따라갔다가 얼떨결에 전투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