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74화 (174/259)

52. 물 흐르듯 (3)

『경국대전』 서문에서 고 상신(相臣) 서거정이 이르기를,

‘... 천지(天地)와 사시(四時)에 맞추어도 흐트러짐이 없고, 옛 성현들에 견주어도 틀림이 없으며, 백세(百世) 뒤에 성인이 다시 나타난들 의혹이 없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부터 성자신손(聖子神孫)이 대를 이어가 이룩한 법(成憲)을 따르면서 그르치지도, 잊지도 않는다면, 어찌 우리 국가의 문명한 다스림을 융성하였던 주나라에만 비하겠는가?’

하였다. 대저 성묘(성종) 때부터 산림의 훌륭한 선비들이 조정에 출사하여 문풍(文風)을 바로잡기 전까지는 문장에 이처럼 과하게 뽐내고 절제를 모르는 폐단이 있었으니, 서거정 또한 그러하였다.

『경국대전』을 지으면서 그것이 한당(漢唐)의 뭇 제도보다 훌륭하고 감히 『주례』에 견줄 수 있다 하였으니, 세조의 성덕을 기리기 위하여 그리 썼다면 이는 아첨이요, 스스로 정녕 그리 믿었다면 이는 교만이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주례』는커녕 기자(箕子)의 홍범(洪範)을 지으려 하니, 사가정(四佳亭, 서거정)을 탓할 일이 아니로군.”

헌법을 세우자는 이이의 말에 동의하였으나, 막상 그 초안을 짓자니 영 뜨악하였던 조식이, 참고를 위해 빌려온 『경국대전』을 덮으며 자조하였다.

서문 어디에도 이 법이 무엇에 기초하는지, 그것이 지향하는 조선의 모습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었다. 그저 법률의 정교함을 자화자찬하는 문장뿐. 허나 이 어찌 서거정 한 사람의 잘못일까? 『경국대전』을 지은 모든 이들을 살려내어 묻는다 한들, 그런 물음을 애초에 왜 던지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일 테다.

“이 헌법이라는 것을 세우는 일이 불가하다고 나는 분명 말하였네.”

늘 점잖은 이황이었지만, 이렇게 조식과 둘이서만 있을 때는 짐짓 언행을 가볍게 하곤 했다.

“허나 이미 조정의 공론이 굳어지고 상께서도 그리 말씀하셨거늘 물릴 수도 없잖은가.”

한숨과 웃음 사이의 미묘한 말투였다.

“그것도 그렇지. 이왕 이리된 것, 조종의 성헌(成憲)에 부족한 붓을 놀릴 수 있게 됨을 광영으로 알아야겠지.”

한쪽에서는 이러한 일은 가당치도 않다는 유생으로서의 생각이, 다른 한쪽에서는 이전에는 발상조차 불가하였을 일에 손을 댄다는 그 두근거리는 느낌이 교차하였다.

광화문 앞에서 복궐상소하던 이들 사이에 갑자기 한양의 장사치들이 끼어들어 난동을 부린 이래로, 몇 가지 ‘사실’이 명확해졌다.

첫째로, 소위 헌법을 세우자는 것은 재조론을 입에 담는 향반들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뜻이기도 했다.

둘째로, 그 헌법을 어찌 세울지에 대해서는, 국론이 둘로 나뉘어 팽팽히 갈리고 있었다.

허나 이는 그저 얄팍한 눈속임일 뿐, 조선 팔도 전체로 따진다면 두 가지 모두 참이 아니었다.

만약 지금 조선 땅에서 두 발로 걷는 모든 사람을 붙잡고, 헌법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재조론이 말하는 조선과 민주당이 지금껏 만들어온 조선 중 하나를 – 그리고 단 하나만 – 골라야 한다면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묻는다고 해 보자.

‘백 인 중 구십 정도는 묻는 바가 무엇인지 아예 헤아릴 엄두도 못 낼 것이요, 남은 십 인 중 칠팔 인은 재조론 쪽이 그나마 더 솔깃하다 할 것입니다. 나머지 두셋도 설령 마음만은 작금의 조선이 좋다 여길지언정, 대놓고 가부를 말하라 하면 한 번쯤은 더 고심하겠지요.’

세월의 무게란 그러하였다. 조선, 그러니까 단군이 세운 옛 조선 때부터 지금까지 농사짓고 살아온 이들의 마음은 비슷하였고, 그 마음은 아비로부터 아들로, 어미로부터 딸로 이어져 내려왔으므로.

그나마 한양에서, 그것도 민주당이 삼남에서 향반들 상경하는 사이 면밀히 사람들을 부추기고 준비한 덕에 그토록 용이하게 맞불을 놓아 구경하는 이들을 모두 속여넘길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날 상소하러 올라온 이들이 한결같이 미묘한 표정으로 흩어진 뒤, 탕평당 사람들 찾아와 그간 사정 털어놓은 이지함에 따르면 그러하였다.

‘하면 욱재 대감이 말한 대로, 이대로 전국 군현의 여론을 모두 취합하면 재조론 쪽에 힘이 실리겠군.’

‘만약 우리 두 당이 모두 가만 있는다면, 자연히 그리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임 당수와 자네가 가만 있을 리는 만무할 테고.’

‘하하, 그 말씀대로입니다. 조선 땅에서 우리 민주당과 임 당수에 대해 조금이라도 들어본 자라면, 다들 그리 생각하겠지요.’

‘그렇다면, 지금 그대들 당이 마음에 두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을 알려드리기 전, 두 분 선생께 제가 먼저 여쭙겠습니다. 이 헌법에 대한 탕평당의 뜻은 무엇입니까? 아직 당론이 모이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송구함을 무릅쓰고 답을 재촉드리겠습니다.’

즉 이번 일에서 탕평당이 민주당과 함께 재조론에 맞서겠노라 확답하기 전까지는 알려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 말과 함께 이지함은 고별하고 떠나갔는데, 그것이 열흘 전의 일이었다. 좌장인 이준경이 평양에 있을 뿐 나머지 탕평당 사림은 한양에 모여 있었으므로, 논의에 그리 오랜 시일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수산(이지함) 그이가 언제쯤 다시 오겠다 이야기를 했던가? 내 이제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종종 깜빡한다네.”

“이 사람, 나보다 여섯 달 늦게 태어났으면서 나이를 탓하는가?”

농담으로 타박하며 조식이 얼마 전 장만한 안경을 벗고 맞은편 벽에 걸린 역편(달력)을 들여다보았다.

“어디 보자... 그것이 아마 내일이었을 텐데. 아니, 오늘이로군! 허 참.”

“그래도 그제 밤에 다들 모여 당론을 정했으니 다행 아닌가. 얼른 이 글이나 마치세.”

이미 임거정이 이끄는 은과 욕심의 시운(時運)이 더 어질고 올바른 삶 가하게 하리라 믿으며, 그 흐름에 흠뻑 젖지는 않을지언정 다들 탁족(濯足)은 한 탕평당 사림이다.

이 헌법이라는 것, 나라의 다른 모든 법 위에 설 그 큰 법을 백성의 뜻에 맡기겠다는 것은 인의와 예법에 비추어볼 때 저어되는 바가 허다하였다.

하지만 다른 탕평당 중신들은 한결같이 지적하기를, 국법의 제도를 한 번쯤 일신(日新)할 필요는 있다 하였다. 기존의 법률과는 벌써 맞지 않는 실태가 하나둘 생기고 있었고, 더구나 임거정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사초(史草)를 메우기 시작한 이후로는 더욱 그러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그 헌법이라는 것이 그저 기존의 법보다 이름만 조금 거창할 뿐이라 여기는 이들도, 『경국대전』을 조금은 고쳐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고 있었다. 당장 한전법이나 대동법, 균역법만 하더라도, 바꾸어야 할 조문이 한둘이 아니었으며, 상업의 일이나 국외인(國外人)을 다스리는 일처럼 국초에는 아예 그런 일 있으리라 생각도 못한 사안도 적지 않았다.

갑인대훈의 사례처럼, 그러한 사안까지 모두 국법으로 다스릴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정도는 마땅히 할 만한 것이요, 혹여 ‘이것은 선왕의 구법(舊法)이 아니다’하고 저 재조론자들처럼 볼멘소리하는 이들이 나올 것에 대비하여 어찌하여 저들 탕평당의 당론이 타당한지 설득하는 서문(序文)을 앞에 내세워야 할 것이었다.

또한 지금껏 민주당이 종종 그래왔듯, 새로운 것을 내세우다가 과한 지경에 빠져 자칫 더 큰 어지러움을 일으키지 않도록, 그 헌법이라는 것이 상도(常道) 벗어나지 않도록 이끌어야 할 터였다.

아무리 이지함이 일세의 수재요, 그 제자 율곡은 이미 청출어람 소리 들은 지도 오래된 기재(奇才)라 하지만, 이쪽 탕평당의 사림은 그 수가 훨씬 많기도 하거니와 조야(朝野) 양측에서 숱한 일을 겪어보았다. 그들의 경륜을 한데 모아 좋은 안을 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경장으로 세워진 신법들을 모두 아우르는 헌법의 초안을 내는 것은 쉬웠지만, 이번 헌법의 대의(大義)가 이러이러하다 논하는 글을 쓰기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이렇게 『경국대전』을 비롯해 이전의 여러 법전을 상고하고 있었지만, 딱히 참고할 만한 선례가 없었다.

“우리도 이러할진대, 저쪽도 아직은 미진할 것일세. 욕속부달인즉 무리하지는 마세나.”

‘이리 오너라’하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필시 수산 선생 이지함이 찾아온 것일 터.

‘사형, 아무도 안 오는 듯한데 그냥 담 넘어가십시다’하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이지함의 사제이자, 이황과 조식은 물론이요 수많은 선비들로부터 애증(愛憎)을 모두 사고 있는 임거정이 따라온 모양이었다.

다행히 제때 빗장이 열려, 담장에 얹은 기와가 수난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잘들 계셨소? 이 헌법 때문에 두 분 어르신네 당도, 또 조정도 제법 시끄러웠다 들었소이다.”

임거정이 늘 그렇듯 건들건들 걸어와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저것이 임거정 딴에는 예의 갖춘 것임을 알았으므로 두 사람 모두 흠을 잡지는 않았다.)

“시끄러웠다마다. 허나 성상께서 뜻을 정하시니 곧 조정의 대신들 사이에서도 욱재 대감의 안을 따르는 쪽으로 공론이 정해졌소이다.”

‘그’ 성상이 뜻을 정하였다면, 이는 곧 성상이 가깝게 여기는 임거정이나 역시 가깝게 여기는 외척 심통원의 말을 들었기 때문일 테다. 아마 둘 다일 것이었다.

(사 년 전 임거정이 어전에서 세조대왕의 성덕에 대해 다른 선비들이 다들 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목숨이 아흔아홉 개라도 하지 못하였을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임거정과 성상 사이는 돈독하였으니, 이는 그 누구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랬구려.”

이황과 조식은 그저 추측만 할 뿐이었지만, 꺽정이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며칠 전, ‘아, 제발 좀!’이라며 선비답지 않은 소리나 하는 심의겸을 또 붙잡아 와서는, 전국 군현에서 어찌 권점을 할지 그 방도를 심통원에게 전하게끔 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임금이 저를 불러 네 녀석 생각은 어떠하냐 묻는 것을 들어보니, 또 그것을 심통원이 그대로 저의 계책이라며 임금에게 고하였던 모양이었다. 꺽정이는 자신과 임금과 심통원 세 사람 중 대체 누가 가장 생각 없이 사는지 잠시 쓸데없는 궁금함을 품기도 했다.

“그러면 정말로 명년에 이 헌법을 두고 권점을 하게 되었군요.”

“그렇소. 곧 상께서 공회에 명하여 헌법의 안을 올리게 하실 것이오. 그것을 각지 군현에 전하여 수령으로 하여금 향회에 전하게 한 뒤, 명년 겨울에 다시 각 향회에서 의중을 모아 올리도록 하게 되었지.”

두리손 앞에서 당당하게 제안한 ‘자신의’ 계책이 뜻대로 되지 않자, 딴에는 수습하기 위해 심통원이 (역시 ‘자신의’ 계책으로) 새로 헌책한 바는 이러하였다.

각지 군현의 향회는, 비록 근래 권점 법도가 여기저기서 시행된 이래로 조금 이상한 자들이 종종 섞여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향반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개중에는 대놓고 탕평당을 따르는 이들도 있고, 또 당색을 표하지는 않았지만 농계나 다른 ‘사업’ – 이제는 사대부들이 주고받는 서한에도 당당히 쓰이는 말이 되었다 – 에 손 대는 이들도 있었지만, 수로 따지면 과반은커녕 삼분지일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각 향회에서 그간 모인 헌법 초안에 대해 권점을 시행하고, 그 결과에 따라 ‘모 현에서는 이러이러한 안을 지지하옵나이다’ 하고 글을 올리게 한다. 당장 전국의 호구, 그러니까 관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도 그저 추산할 뿐인 판이었으므로, 각 군현에 권점과 추계를 맞기는 것이 타당하였다.

물론 그저 고을 대표할 사람 뽑는 것이 아니라, 조종의 성헌(成憲) 중에서도 특히 중대한 법을 세우는 일이므로, 저의 이름 석 자나 겨우 쓰는 자들을 함부로 논의에 끼워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한 논리 내세우며 심통원은 주장하기를, 향회 또는 그에 준하는 사족의 모임 사람들만 권점에 참여토록 하자고 하였다. (이는 향반들끼리 향회 외에 따로 사마소司馬所 같이 저들끼리 모임을 따로 차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 전국 군현 거의 대부분이 재조론을 따른다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예컨대 민주당 세가 아주 강한 양주나 충주라 하더라도, 향회 사람 일백 중 쉰하나만 재조론을 따른다면 곧 그 고을의 여론은 재조론을 따른다고 초계(抄啓)될 것이다.

여항의 일반 백성들은 물론이요, 공회의 어지간한 사람들조차 일전 복궐상소 때 향반들과 한양 장사치들 수가 비등하였던 것만 알고, 실제로 팔도 군현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사는지, 그 비율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였다.

비슷한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다면, 심통원이 진언한 이 절차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라도 어딘가에서 나왔겠지만, 참고할 만한 전례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여쭙겠습니다. 금번 헌법 권점에 대해 두 분 선생과 탕평당 쪽에서는 어찌 보시는지요.”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탄다는 고사도 있거늘, 근래에는 심지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베네치아와 조선 사람이 한 배도 차지 않았소? 그러니 우리라고 어찌 힘을 합치지 못할까. 더구나 우리 두 당의 사이를 오월(吳越)에 비하기에는, 이미 이토록 양측이 가깝지 않소? 제나라와 노나라 사이라면 모를까.”

조식이 뼈 있는 농담을 섞어가며 답했다.

“나라의 법을 이렇게 제정하는 것이 옳다고만 여기지는 않소. 그리고 사사롭게는 저 재조론을 처음 발의하신 분이 내 스승이기도 하니, 어찌 언행에 주의하지 않겠소. 허나 이미 우리 당의 당론은 정해졌고, 헌법과 같은 중한 일에 있어 눈과 입을 닫는 것은 나라의 은혜를 받은 몸으로써 할 일이 또한 아니오.”

이황 역시 진지하게 답하였다.

“그리하여, 이번 헌법의 일에 있어 우리 당은 그대 민주당과 함께하기로 하였소.”

“감사합니다.”

이지함이 고개 한 번 꾸벅 숙이고는, 소매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무엇이오?”

“저희 당에서 만든 헌법 초안입니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아니, 그사이에 벌써?”

“산부재고요 유선즉명(山不在高有仙則名)이라 하였습니다. 나라의 앞길을 논함에 있어 굳이 번잡함을 추구할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꺽정이가 눈치껏 서안 하나를 번쩍 들어 이황과 조식 앞에 가져다주었다.

“이것 때문에 우리 모주님과 율곡 두 사람이 밤깨나 새었다오.”

무언가 불안한 예감이 들었으나, 애써 이겨내며 조식이 그 표지를 슬쩍 들었다. 그리고 불안한 예감은 결코 허투루 들지 않았음이 곧 밝혀졌으니, 첫 문장부터 경천동지할 만하였다.

초장부터 이르기를,

‘살피건대 우리 조선의 국인(國人)이 한마음으로 태조대왕을 받들어 임금으로 모시고 새 나라를 조조(肇造)한 이래, 군신(君臣)은 화합하여 마치 성주(成周)에 비길 만하고 조종(朝宗)의 성덕(聖德)은 동방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하였으니, 이는 정도전이 ‘장자방이 한고조를 쓴 것이다’ 한 것보다도 더욱 과격하여 차마 참람되다는 둥 패역하다는 둥 하기도 어려웠다.

“이것을 정녕...”

서두부터 당당히 드러나는 ‘우리 조선 국인(我等朝鮮國人)’ 여섯 글자에 눈이 박힌 조식이 물었다.

“물론 맨 앞에, ‘신 등은 삼가 엎드려 생각하옵나이다’ 등의 문구는 덧붙일 것입니다.”

그사이 이황은 놀란 마음 가라앉히며 – 임거정이 돌아왔으니, 이런 일이 앞으로 다시 자주 벌어질 터였다 – 책에 적힌 이지함 손글씨를 마저 읽어내려갔다.

‘마침내 이어 내려오기를 여러 대에 걸쳐, 오늘에 이르러 아국 조선의 문명은 해내(海內)에 떨치고, 그 문헌(文獻)과 물산이 모두 해동성국(海東盛國) 넉 자에 부끄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때를 맞이하여 상께서는 다음과 같이 밝은 도리를 널리 밝히시어, 나라의 근본과 앞날에 대해 한 점 의혹도 남지 않게 하시옵소서.

아(我) 대조선국 국인들이 생각건대, 대조선국의 국체(國體)는 곧 국인이요, 모든 법과 권병(權柄) 중 국인에게서 나오지 않음이 없습니다.

기자가 홍범을 전하며 황극(皇極)을 이름에, 오복(五福)을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어야 비로소 백성이 임금의 법을 따른다 하였습니다. 이 다섯 복은 곧 모든 사람이 응당 누려야 할 의권 중에서도 가장 중한 것이요, 곧 모든 법이 나오는 근원이요, 곧 임금이 사람 위에 서는 까닭입니다. 성상 전하께옵서는 삼가 살피시어 조종에 길이 남을 헌법을 세우시옵소서.

오복의 첫째는 수(壽)이니, 그 누구든 법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함부로 죄를 받지도, 죽임을 당하지도, 부림을 당하지도 아니하며, 자신의 삶을 능히 지켜 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복의 둘째는 부(富)이니, 그 누구든 자신의 가산을 능히 지니고 화식(貨殖)에 힘쓰며 까닭 없이 이를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복의 셋째는 강녕(康寧)이니, 그 누구든 스스로 강녕함에 이르기 위해 배우고자 할 때 배우고, 일하고자 할 때 일하며, 까닭 없이는 원하는 배움과 일로부터 내쫓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복의 넷째는 유호덕(攸好德)이니, 그 누구든 덕이 있는 자를 천거하여 국사를 도우며, 또 스스로 덕이 있는 자는 나아가 벼슬함으로써 나라와 국인을 돕는 것입니다.

오복의 마지막은 고종명(考終命)이니, 그 누구든 만물 중에서 가장 귀한 사람으로 태어나 천수를 다할 때까지 그 존귀함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기자가 또한 이르기를, 백성은 별과 같고 별은 비와 구름을 사랑하며, 해와 달이 별들 사이를 지나니 비로소 비와 구름이 생긴다 하였습니다. 붙박이 별들 사이에서 일월(日月)이 영원히 운행하듯 조종의 대업 또한 헌법으로써 영세토록 이어지게 하시옵소서.’

거기까지 눈이 닿은 이황과 조식 모두,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이지함과 천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낯선 것에 대한 불쾌함. 전례에 맞지 않는 것을 볼 때 느끼는 불편함. 생각지 못하였던 것을 볼 때 느끼는 궁금함. 그리고 지금껏 금해졌던 것이 갑자기 허해졌노라, 마음 속의 그 금기가 풀렸을 때 느끼는 흥분.

두 사람이 지금껏 고민하며 심중에 교차하였던 그 여러 느낌이, 더욱 거센 파도가 되고, 한바탕 용오름이 되었다.

“’일월이 영원히 운행하듯’이라. 이것이 과연 영세토록 이어갈 법이라 할 수 있겠소? 그러기에는 다소... 과한 듯한데.”

마침내 조식이 한 마디 내었는데, 이지함은 능글맞게 웃을 뿐이었다.

“소강절(邵康節, 소옹) 선생에 따르면 자회(子會, 상수학에서 말하는 우주의 시작)에는 땅조차 없었다는데 어찌 일월인들 그 시작과 끝이 없겠습니까.”

“무어라?”

글에 따르면 만세토록 이어지는 큰 도리를 밝히는 듯하였는데, 정작 그것을 지은 사람은 저토록 가볍게 언제든 바꿀 수 있음을 말하니, 물은 조식이 절로 뜨악해졌다.

“한 번 해보고 나중에 바꾸면 되지. 나도 다 안 읽어봤지만, 그 뒤쪽에 보면 공회의 권한이 어쩌고 하는 대목에 헌법 새로 정하는 이야기도 있소. 우리 율곡 도령이 지은 부분이라오.”

“허...”

그 말 듣고 책 뒤편을 훑어보니 정말 그런 내용이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애써 주워담으며 – 이 또한 다시 익숙해져야 할 느낌이었다 – 물었다.

“참으로 기문(奇文)이 아닐 수 없으나... 이러한 글은 군현의 사족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오. 가뜩이나 향회의 여론이 우리에게 불리할 터인데, 이러한 초안으로는 어렵지 않겠소이까.”

“누가 사족들에게 이것을 보여준다 했소?”

“무어라? 아니, 그러면 대체 누구에게...”

“백성들, 아니, 이젠 국인이라고 해야 하나? 그들이 어떤 법을 따를지 정할 텐데, 이왕이면 사람들 이목을 쏙쏙 잡아끌 만한 것으로 고르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오.”

어차피 누가 쓰든 헌법의 내용을 그대로 진서로 읽고 이해할 만한 사람은 조선에 몇 없다. 공보를 통해서든, 아니면 사람들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서든, 쉬운 말이나 글로 옮겨진 것을 보게 될 터. 그렇다면 인의니 선왕의 법도니 하는 것보다, 자신이 당연히 누려야 할 이득과 의권에 대해 말하는 것이 훨씬 사람 눈길을 잡아끌지 않겠는가.

“그것이... 정녕 가하겠는가? 아니, 애초에 저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겠는가? 사족들은 사족대로, 서민들은 서민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데.”

“어차피 이 내가 저쪽과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벌일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그 말대로, 그 누구도, 심지어 이황과 조식조차 임꺽정과 그의 무리가 이 전례 없는 권점 – 애초에 향회에서 하는 권점이라는 것도 그렇게까지 전례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 에 있어 정직하게 나서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억울하기 그지 없소. 내가 물론 정직하게만 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매사를 속임수로 대충 때우지는 않는다는 말이오.”

“말은 똑바로 해야 하지 않소, 임 당수? 속임수로’만’ 때우지 않을 뿐, 항상 이런저런 속임수는 곁들였던 듯한데.”

그새를 못 참고 딴지 거는 이지함을 무시하며, 꺽정이가 저들끼리 세운 계책의 일각을 드러냈다.

“두 분 어르신도 그리 여기시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소? 다들 우리가 향리들이나 각지 수령들을 데리고 농간을 부릴 것이라 생각하겠지. 허나 나는 그런 얄팍한 속임수를 쓸 생각은 없소.

우리 사업당 안쪽에 있던 조선 지도를 기억하시오? 저들 향반들이 상경할 때마다 우리네 사람들이 따라붙어서, 어디서 온 누구인지 찾아내었소. 그리하여 지금은 지도에 아주 깃발이 빼곡하게 되었지. 이곳 한양 한 곳만 빼고 거의 다 그렇게 되었소.

그러니 이제는 그 깃발들을 뽑아내고, 대신 우리네 깃발을 세울 차례가 되었소. 이 내가 직접 돌면서 은을 흩뿌리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꼬시고, 어르고, 여차하면 주먹으로 깨달음을 주면 되는데, 무엇하러 기책(奇策)을 부린다는 말이오? 저들이 토 달지 못하도록,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도록 해줄 생각이외다.”

그것이 가한 일인가? 의문과 더불어 어쩌면 눈앞의 임 당수는 그저 다스려지는 백성(民)을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人)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는 묘한 생각이 이황과 조식 두 사람 머릿속에 떠올랐다.

“여기 사형 말씀으로는, 백 명 중에서 구십 정도는 헌 법이고 새 법이고 알지도 못하고 알 엄두도 못 내리라더군. 그렇다면 그 구십 중 반의 반의 반 정도만 꼬드겨 우리 편으로 만들어도 우리가 앞서나가지 않겠소?”

그리고 한바탕 대풍(大風)처럼 그들 눈앞을 훑고 지나간, 서안 위의 헌법 초안이 그제야 다시 떠오른다.

“원래 물이라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물길을 내어 돌리고 강둑을 쌓아 막을 수는 있어도, 어떻게든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뒤틀고 구부릴 수는 있어도,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향하게끔 만들 수는 없지요. 우리의 법은 그렇게 세워질 것입니다. 저들이 아직 알지 못하여, 스스로 뜻을 품기는커녕 뜻을 품어도 되는지조차 모른다면, 깨우치고 알리며, 마침내 우리 편이 될 때까지 타이르고 설득할 것입니다.”

조식과 이황, 두 뛰어난 선비가 여러 날, 여러 달, 아니, 여러 해 동안 함께 고심하며 법을 만들었다 한들, 그렇게 사람들을 홀리고 타이르며, 마침내 온 마음으로 따르게끔 할 수 있을까?

불가할 것이다. 그들 두 사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아는 법이란 위에서 세우고 아래에서 따르는 것이었으니.

그리고 또 한 가지 깨달음이 그들 뇌리를 스친다. 그들은 이미, 그들이 생각하던 더 좋은 세상을 위한 길이라 믿으며 민주당과 보조를 맞추어 왔다. 이미 가랑비에 옷 젖듯, 스스로 조금씩 바꾸어 왔기에, 이제 돌아갈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적어도, 지금대로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흐름을 거스르다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은 것만 하더라도 다행이다, 그렇게 여긴다면 그자는 선비라 할 수 없었다.

선비의 쓰임이 다하지 않도록, 수사(洙泗,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강가) 두 강가에서 행하였던 가르침이 강물처럼 끊어지지 않고 바다를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 또한 달라져야 하리라. 천하를 걱정할지언정 천하의 걱정이 될 수는 없으므로.

그저 배를 고치는 정도로 그쳐서는, 오늘처럼 또 한 번, 그리고 또 다시 한 번 뒤쳐질 뿐. 뭍에 닿았으면 배를 고칠 게 아니라 아예 버리고 말을 구하든 수레를 찾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디까지 바꿔야 할 것인가. 어디까지는 남겨야 할 것인가.

얼마나 고민을 하든, 그들에게 허락된 여유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굳은 다짐이 깨달음 뒤에 찾아온다.

“지금 저 초안으로는, 아직 부족하오. 조금 더 다듬고 고쳐보도록 합시다. 향회의 선비들도, 다는 아니지만 설득하려면 설득해볼 수 있을 듯하오.”

“율곡도 불러주실 수 있으시겠소? 이왕이면 저 초안을 써 내며 참고하였던 서책도 함께 옮겨와 주면 좋겠군. 이왕이면 우리 쪽 사람들도 함께 불러모아 논의해보면 좋겠소.”

저들의 입으로 먼저 헌법 제정을 발의한 셈이 된 심통원과 향반들은, 당연히 임거정이 무언가 부정한 술수 부리리라 생각하며 저들끼리 뭉치고 있었으므로, 또 한 차례 된통 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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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조선에서도, 점차 복잡해지는 (또는 조금씩 이완•해체되어 가는)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명종 연간에 『경국대전』의 보완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지나치게 해석의 폭이 넓거나 잘못 해석될 여지가 넓은 조문에 대해 주해를 달아 – 요즘의 표현으로는 유권해석 모음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편찬한 『경국대전주해』가 그것이지요. 그러나 작중에서는 이 작업이 처음 발의되어야 했을 1550년에 조선이 한바탕 난리를 겪으면서 유야무야되고야 말았습니다.

작중의 헌법 초안에 언급되는 홍범이란, 『서경』에 전하는 글로 기자가 주 무왕에게 전하였다고 하는 통치의 요결입니다. 그에 따르면 기자 역시 홍범을 창안한 것이 아니며, 우왕이 홍수를 다스릴 때 얻은 낙서(洛書)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냈다고 하지요. 이로 말미암아 홍범은 유학의 지적 전통 내에서 우주론과 통치론을 연결하는 핵심적인 텍스트로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특히 홍범 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5(오복, 오행, 오사, 오기 등)와 9(구주)라는 숫자는 상수학적으로도 해석되어, 이지함이 언급하는 소옹의 우주론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 바 있습니다.

원 역사의 조선에서도 양란 이후 사회질서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홍범은 중요하게 다루어졌습니다. 한편으로는 무너진 질서를 더 나은 방식으로 재건하여야 했고, 동시에 ‘오랑캐’ 청의 중원 통일로 인해 새롭게 조선 자신의 문명국으로서의 정체성을 규정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특히 기자는 유학적 세계관 내에서 조선이 지니는 문명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했기 때문에, 기자가 제시했다고 전해지는 홍범 역시 더욱 중요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현실적으로도 16세기의 홍범, 특히 홍범 9주 중에서도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황극(皇極) 조의 해석은 붕당정치와 탕평론 양쪽을 정당화하는 주된 이념적 수단으로 활용되어 17세기 환국 및 탕평 정국에서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김홍수, 2020. “<홍범연의>의 황극 중심의 경세론.” 철학논총 99(1); 소진형, 2020. “17세기 황극 해석과 왕권론 비교연구: 윤휴와 박세채의 황극에 대한 이론적 해석을 중심으로.” 한국정치연구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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