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부채질은 그치지 않고 (1)
조선 팔도에 서교(西敎)가 크게 흥성하니, 북변에서는 강 건너 여진족들 따라하듯 천주교가 널리 퍼져 하비에르와 예수회 사람들에게 즐거우면서도 노곤한 나날을 선사하고 있었다.
반면 삼남에서는 그간 각지 명산에 숨죽이고 있던 불교가 일제히 떨쳐 일어나 교세를 중흥하니, 시주 받아 더 목 좋은 곳으로 절을 옮기기도 하고, 폐사된 곳을 중건하기도 하였으며, 조금 더 욕심 많은 쪽에서는 아예 닥나무나 차 따위를 길러 절의 재정에 보탤 생각으로 농장을 차리기도 했다.
(큰 절이 농장을 차리고 수많은 사람을 부린다는 것을 들은 주변 선비들은 영 떨떠름해 하면서도, 그곳에서 나오는 질 좋고 값싼 종이와 차를 접하고서는 알아서 눈을 감았다.)
개중에서도 유별나게 위세 높은 사찰이 있으니, 바로 병해 한 사람 덕에 졸지에 양종(兩宗) 중 으뜸이 된 칠장사였다.
물론 조정에서 세운 대로라면, 양종의 으뜸은 선종본산(禪宗本山) 봉은사와 교종본산(敎宗本山) 봉선사요, 양쪽을 총괄하는 이는 양종판사(兩宗判事) 보우겠지만, 그 보우가 양종판사가 될 수 있게끔 해준 사람이 바로 임꺽정이라는 엄청난 호법신장(護法神將) 거느린 병해였음을 어지간한 승려들은 알고 있었다.
부모형제 모두 잃고 남은 피붙이는 철부지 주상 한 사람뿐인 대비는, 심화(心火)가 타오른 끝에 잿더미가 되어 닷새에 한 번 꼴로 봉은사 찾아와 불공 드리며 겨우 안식을 찾을 뿐이었다. 그 심화에 불 붙인 이가 바로 병해였던지라, 차마 한때 저의 은인이었던 귀한 분이 괴로워하는 것을 볼 수 없던 보우는 병해에게 봉은사를 떠나 칠장사로 돌아갈 것을 정중히 권하였다.
어차피 팔도의 길이 훤히 닦여가는 판에 칠장사에서 한양 오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기에, 병해도 알겠노라며 칠장사로 돌아갔다. 이때 이미 그 이름이 전국에 알려져 있었고, 병해 본인도 재주를 혹세무민에 쓰지 않을 뿐 그럴듯한 말로 사람들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데는 도통한 사람이라, 칠장사 생불 병해대사의 이름은 나날이 높아만 갔다.
그런데 그런 생불 스님 앞에 아주 뻔뻔한 시주놈이 하나 나타나, 보따리 하나를 툭 던졌으니, 멋모르는 사미들은 대체 저놈 누구냐 물었다가 눈치 차리라는 말과 함께 그 빡빡 깎은 머리에 꿀밤 한 대씩 맞았다.
“오다 주웠소.”
뻔뻔함으로는 가히 조선 제일이라 해도 무방할 꺽정이가 저의 사형 병해에게 말했다.
병해가 풀어본즉, 임천당의 그 유명한 주전부리였다. 병해도 한양 오갈 때면 종종 얻어먹곤 했지만, 칠장사의 다른 중들에게는 여전히 이름만 들어본 진미일 테다.
“오다 줍기는 무슨. 간만에 찾아온 주제에 맨입으로 뻔뻔한 청을 건네기가 민망하여 급히 마련해 온 것이겠지.”
“거 말씀이 과하시오. 스님이 시주한테 한다는 말이 참.”
투덜대면서도 정작 병해의 말을 부정하지는 못하는 꺽정이였다.
“되었다, 인석아. 가뜩이나 네 녀석 때문에 온갖 모리배들이 칠장사 기웃거리는데, 시주 이름에 임꺽정 석 자 올라가면 그때는 또 어찌 되겠느냐.”
보따리를 저의 곁에 슬쩍 밀며, 저기 입에 침 떨어지고 있는 사미승들에게 나누어주라 말한 병해가 도로 꺽정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모리배들 같으면 외려 좋겠소.”
“뭔가 뜻대로 아니 되는 모양이로구나.”
“역시 생불스님답게 중생의 번뇌를 금방 꿰뚫어보시는구려. 그게 그 관심법인가 뭔가 하는 그거요?”
“관심법이 아니라, 머리통에 눈알이 두 개 달려 있는 것이다. 지나가는 소나 말도 금방 알아챌 만큼 우거지상을 하고 있지 않으냐.”
그러면서 병해가 주변에 눈짓을 하니, 임 당수 맞이하러 나온 칠장사 승려들은 다들 알아서 물러났다. 주지스님보다 더 주지 같은 생불 스님 덕분에 속세의 즐거움을 깨닫게 된 사미들이 행복하게 쩝쩝대는 소리를 끝으로, 겨울 산의 정적이 돌아왔다.
“어디까지 알고 계시오?”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이었으나, 꺽정이 주변 사람들 중 가장 처음부터 임꺽정 화술(話術)을 접한 사람이 바로 이 병해였으니 쉽사리 이해하였다.
“네 녀석이 전국 유세를 떠난다는 것까지 들었다. 듣기로 그 헌법을 둘러싼 여론의 추이가 썩 우리 당에 이롭지만은 않다던데.”
꺽정이가 순순히 일어나 또 다른 보따리를 꺼냈다. 이지함이 사람을 부려 만든 지도를 간략하게 줄인 것이었다.
“그 말씀대로요.”
“어디 보자...”
꺽정이는 아주 거하게 전국을 돌며 유세를 벌일 심산이었다. 은 대신 쓸 은표(銀表)를 이황의 은정고에서 융통하고, 볼거리로는 평양의 이름난 사당패, 니탕카이에게 신세 져 가며 – 요동의 혼란으로 인해 건주위 쪽 사정도 영 불안하던 차였다 – 빌려온 마르틴 데 고이티의 용병대, 그리고 프랑스 남부에서 이미 그 실력을 입증한 흑의군 녀석들을 대동하기로 하였다.
남들에게 알리는 것이 목적이니 금의야행(錦衣夜行)은 아니 될 말이라, 공보에 아주 거하게 광고를 싣고, 당당하게 조정 및 각도 감영에 사업당 명의로 소지(所志, 민간인이 관에 올리는 문서의 총칭)를 보내어 곧 이러이러한 패거리가 그쪽으로 갈 터이니 과히 놀라지는 말라고 전하였다.
그리하여 정월 추위 가시는 대로 동래로 내려가, 봄이 찾아오는 순서대로 삼남을 돌고 경기도로 돌아올 계획이 척척 준비되어 갔다. 코스탄티니예에서 로마까지 가는 것도 아니요, 고작 조선의 절반을 도는 일정이니, 그리 어려울 것은 없었다.
헌데 그사이, 서림이 전국에 풀어 각지 향회의 여론 살피라 한 이들로부터 뜻밖의 보고가 들어왔다.
“어디 보자... 생각보다는 우리 쪽이 유리하구나.”
“그렇소? 저 지도 논상원에 붙이자마자 분표 값이 십분지일(10%) 가까이 떨어졌다고 서림이가 퍽 투덜대던데.”
“논상원에? 아니, 논상원이 이것과 무슨 상관이냐?”
“나나 서림이보다 사업당 흥망에 더 목숨 거는 이들이 논상원에 수두룩하오. 우리네 분주(分主, 주주)들 얘기요.”
조선의 나머지 군현에서야 재조론의 기세가 드높을지 몰라도, 한양에서는 정 반대였다.
심통원과 그의 문중을 비롯해, 어떻게든 저 민주당과 탕평당의 기세 꺾어보려는 이들이 적잖이 있었고, 또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든, 아니면 그저 운이 없어서든 민주당과 제때 결탁하지 못하여 바뀐 세상에서 영 재미를 못 보는 장사치들도 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밖에서는 말 한 마디 함부로 못 하였는데, 바로 사업당 분표 지닌 사람들이 도처에 있기 때문이었다.
재조론에 따라 헌법이 만들어지고 그 뒤에 있는 이들이 마침내 나라의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하더라도, 민주당은 망할지언정 사업당은 망하지 않을 터였다. 망하기에는 이미 너무 덩치가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설령 사업당은 남아있더라도, 그 주인은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것, 또 그에 따라 사업당 분표의 값어치도 수직으로 하락하리라는 것은 명백하였다.
그러니 사업당 분표 지닌 분주(分主, 주주) 앞에서 재조론의 ‘재’자라도 꺼낸다면, 개중 점잖은 이들은 부모님 안부를 묻고, 거친 이들은 수지부모(受之父母)한 신체발부(身體髮膚)를 열심히 훼상(毁傷, 상해)코자 달려들 것이다.
“하도 여기저기서 묻기에, 아예 그곳에 지도를 붙여두어 전국의 공론 형세를 볼 수 있게 해두었소. 이 지도처럼 말이오.”
“하하, 참 네 녀석도 재밌게 사는구나. 그 어떤 도술로도 못 이루었을 요지경이다.”
“요지경 타령은 관두고, 얼른 말씀이나 마저 해주시오. 암만 보아도 불리한데, 대체 어떤 부분이 유리하단 말씀이시오?”
“의외로 사풍(士風) 강한 곳에도 우리네 당을 지지하는 이들이 있다고 되어 있지 않으냐.”
해가 넘어갈 무렵, 마침내 헌법을 두고 사족들이 둘로 나뉘었는데, 겉에서는 다들 예의 차리면서도 속으로는 서로 은근히 헐뜯곤 하였다. 이미 시류(時流)를 잘 탄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로 사족들이 나뉘고 있었으므로, 그 갈래가 더욱 확연해지고 나아가 서로 싸잡아 부르는 이름이 생기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탕평당을 따르는 한쪽에서는 다른 쪽을 노론(老論)이라 부르고, 재조론을 따르는 다른 한쪽에서는 상대를 소론(少論)이라 칭하곤 하였다.
“노론과 소론이라. 하, 누가 양반들 아니랄까봐 이름도 참 음험하게 짓는구나.”
세상을 비웃고 다니던 옛적 전우치 모습이 살짝 말투로 드러났다.
“엥? 어찌 그렇소?”
“아마 겉으로는, 한쪽은 노인과 같이 신중하고 지혜로우니 노론이라 부른다고 둘러대고, 다른 한쪽은 의기 높고 굳건하니 젊은이와 같다며 소론이라 부른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속내는 서로 헐뜯는 것이겠지. 노론이란 곧 늙다리 소리라는 뜻이니 물정 어둡고 뒤쳐졌다는 뜻이요, 소론이란 어린것들 소리라는 뜻이니 치기 어리고 경솔하다는 뜻 아니냐.”
“뭐, 아무리 그래도 양반씩이나 자처하고 다니는데, 마음에 안 든다고 곧장 찾아가 쥐어박고 다닐 수는 없으니 그렇게 고상하게 돌려서 욕하는 것 아니겠소.”
“그럴지도. 우선 네 말부터 마저 듣자꾸나. 너는 어찌하여 이 형세가 불리하다 보느냐?”
“그걸 굳이 말해야 아시오?”
노론과 소론이 갈렸다 하여 양측의 세력이 비등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꺽정이가 전국을 돌며 유세하겠노라 밝힌 뒤로, 서림은 사람을 풀어 각 군현 향회에서의 여론을 파악하였다.
향회는커녕 양반이랄 것도 딱히 없고, 여러모로 민주당 이전 조선에 대해 불만 많았던 함경도와 평안도의 군현들은 잘 해보아야 백중세요, 대개는 민주당이 무어라 말하든 우선 그쪽을 지지할 이유부터 찾고 볼 기세였다.
이미 의민당 시절부터 꺽정이가 사실상 관찰사 노릇을 했던 황해도는 더 말할 것도 없었으니, 봉기를 한 이후에야 의민당 손에 들어온 구월산 서쪽의 몇몇 고을들에서나 조금 재조론 이야기가 오갈 뿐이었다.
허나 이 세 도를 다 합쳐본들 군현의 수로는 경상도 하나에 비길 뿐이요, 그나마 북변 방위를 위해 억지로 둔 도호부와 군들 덕분이었으니 인구로 따지면 더욱 암울하였다. 인구 대신 각지 군현별로 권점하여 그 뜻을 파악하자 한 심통원에게 고마워해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수산이나 율곡 두 사람이 그 형세를 예측하지 못한 것은 아니겠지. 듣기로 욱재 대감이 사마소와 유향소가 따로 있는 고을들 때문에, 권점에 참여할 수 있는 이들을 향회 ‘및 그와 비슷한 선비의 모임’으로 정하였다 들었는데, 이 부분을 노리려 했던 것 아니냐?”
“잘 아시는구려.”
“내가 귀를 닫으려 해도 세상이 계속 찾아와 떠들어대니 알게 되더구나.”
“말씀하신 대로, 우리도 당초 그렇게 생각했소. 내가 전국을 돌면서, 우리네 당이 세운 학당에서 수학한 이들도 배운 사람이라 할 수 있으니, 향회에 자리를 마련해주든, 아니면 그들끼리 모임을 세워 그 모임에 이름 올린 자들은 모두 권점을 할 수 있게끔 해주든 하라고 요구할 심산이었지.”
헌데 저쪽에서 의외의 움직임을 보이면서, 아직 유세 행렬이 다 준비되지도 않았는데 일이 꼬일 조짐을 보였다.
“몇몇 고을에서, 노론 얼간이들이 학당에서 배운 이들도 비록 사족만은 못하지만 도리를 분별할 만큼은 배웠다면서 헌법 권점을 할 수 있게끔 하자고 먼저 제의하고 나섰소.”
민주당이 정정당당하게 나서리라 예상치 않았던 이들은, 저쪽에서 정말로 정직하게 유세만 하리라는 점이 밝혀지자 일순 당황하였다. 그러는 사이 탕평당 쪽에서 열심히 사람을 모아주었으니, 노론 일색이던 삼남 여론에서 소론이 이곳저곳에 고개를 내밀 수 있게 된 것은 그 덕이었다.
허나 저쪽에서도 의외로 빨리 대응에 나섰고, 이지함과 이이가 예상했던 것보다 그 대응은 제법 효험이 있었다.
“허, 내일은 동이 서쪽에서 트겠구만.”
주로 딱히 다른 돈벌이 없이 농사만 짓는 군현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데, 좋든 싫든 사족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고, 또 천것 대접받은 한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대로라면, 우리가 헌법 이야기를 꺼내면서 판을 깔아준 것이 오히려 우리네 명줄을 스스로 재촉하는 꼴이 되게 생겼다는 말이오.”
애초에 헌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헌법에 적힐 구절 하나하나가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아는 이들은 드물고, 남이 가르쳐주었을 때 그것을 단번에 이해할 만한 이들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꺽정이는, 자신이 직접 요란한 패거리를 몰고 돌아다니면서 아무튼 저들 헌법은 좋은 것이요, 재조론 헌법은 몹쓸 것이라 설득하고 다닐 생각이었다. 고상한 양반님네들은 체통도 있고, 또 그간 향전으로 인한 원한도 있을 테니, 선뜻 나서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푸하하! 아까 요지경이라 하였던 것은 내 물려야겠다. 그것이야말로 정말 요지경이로구나.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백성을 교화하네, 올바른 풍속을 퍼뜨리네 하던 이들이 마침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구나!”
이제는 정말로 전우치스러워졌다. 이대로 손짓하여 대웅전을 통째로 띄운다 한들 이상하지는 않으리라.
“웃는 것은 좀 나중으로 미루시고, 사형의 고견이나 좀 들려주시오. 한양에서는 작은 사형이랑 율곡 녀석에 내 아내까지 함께 머리 맞대고 있는데, 동문의 의리로 사형도 좀 거들어주어야 하지 않겠소?”
화담 문하 사람들 중, 이 나라 조선 사람들의 심리를 가장 잘 알고, 한때 그것을 이용해먹는 것을 업으로까지 삼았던 사람이 바로 병해였다. 아마 이지함도 그것을 알고 꺽정이를 이곳 칠장사로 보냈을 테다.
“하하, 동문의 의리라. 그래, 의리는 중한 것이지. 좋다. 방도가 있을 것도 같구나. 내가 앞서 생각보다는 유리하다 하지 않았더냐?”
“오, 얼른 말씀해주시오.”
노론과 소론으로 여론이 갈렸다는 것보다 병해의 눈길을 끈 것은, 아무리 노론이 유리한 고을이라 하더라도 소론, 그러니까 탕평당을 지지하든, 아니면 스스로 민주당과 한통속이 되었든 하는 선비들이 적어도 한둘씩은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쯤, 노론이 유리한 모든 고을에서는 저들끼리 완전한 공론의 일치를 이루고자 열심히 수작을 부리고 있을 터.
“그것을 이용하면 사람들 생각을 돌릴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아직 무언가 뚜렷하게 짚어 말하지는 못하겠다. 잠깐만 고민해보마.”
“고민은 문경새재 넘을 때 하시오.”
“그래, 그때 해도 늦지는 않을... 아니, 잠깐, 뭐라고?”
“계책은 그것 낸 사람이 행할 때 비로소 더 효험이 있지 않겠소? 갑옷 번뜩이는 에스파냐 놈들이나 황 사저(황진이)가 보내준 사당패만큼 칠장사 생불스님도 사람들 이목 끌기에 좋기도 하겠지. 지금쯤이면 나랑 함께 온 서림이 아랫사람들이 주지스님께 가서는 사형 빌리는 대신 시주를 거하게 하겠노라 수작 걸고 있을 게요.”
“야, 이 도둑놈아!”
“칭찬으로 듣겠소.”
욕하면서도 제 발로 일어나 행장 꾸릴 생각부터 하는 병해였다. 그것을 보고서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헤벌쭉 웃는 꺽정이가 얄미워, 죽비 들어 그 큼직한 머리통을 한 대 딱 때렸다.
“아!”
“매를 벌어요, 매를. 네놈이 불당에서 꾸벅꾸벅 졸 때부터 알아봤다. 절에 와서는 어떻게 그 절 스님을 훔쳐갈까 작당이나 하고 말이야, 에잉...”
그로부터 스무날 뒤, 마침내 온갖 잡다한 이들을 거느린 임꺽정의 무리가 마침내 한양을 떠나 영남대로를 타고 남하하니, 가는 곳마다 소란이 끊이지 않고, 멍들고 부러진 곳에 바르는 고약의 값은 치솟았으며, 팔도 엿장수의 절반 가량은 임 당수 뒤를 따르든 앞질러 가서 좋은 길목을 차지하고 있든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동래에 닿아 유세의 첫 일정을 시작하였는데, 동래에서 민주당 지지를 호소하는 것은 곡부(曲阜) 찾아오는 유생들에게 만세사표 공자의 성덕(聖德)을 거론하는 것과 같아서, 굳이 살피지 않더라도 그 결과를 익히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동래 다음이라면 바로 북쪽의 양산 또는 낙동강 건너편 김해일 텐데, 동래에 온갖 부가 쏠리면서 한편으로는 동래에 매달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질시하게 된 양산의 사족들과 달리 김해 사족들의 여론은 완전히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임거정은 김해를 먼저 ‘치고’ 그 여세를 몰아 양산으로 향하지 않겠는가? 병법을 알음알음 공부한 이들은 그렇게 떠들곤 하였다.
걱정거리와 그 패거리가 낙동강을 넘어온다는 우려를, 금관가야가 신라에 망한 이래 정말 오랜만에 하게 된 김해 사람들이었다.
“임 당수가 동래에서 배를 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런... 자네 말대로라면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우리 김해에 닿을 터. 이를 어찌해야 하겠는가?”
김해 ‘노론’의 좌장 격인 참봉 허세절(許世節)에게 급히 달려온 젊은 송빈(宋賓)의 말에, 허세절뿐 아니라 함께 대책을 논의하던 이들이 함께 웅성대었다.
허세절은 꼿꼿한 – 물론 양반들 눈에 – 선비로서, 나름대로 재조론을 이해하고 그것을 널리 퍼뜨리려 노력하는 이였다. 젊은 만큼 의기도 높아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소매 걷고 나서는 송빈– 이 두 사람은 얼마 전 사람을 모아 상경하여 복궐상소를 하기도 했다 – 과 더불어 김해 노론 일파의 중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향론(鄕論)을 정해야 합니다. 정암(定庵) 선생께 찾아가십시다.”
“정암? 지난 몇 달, 아니, 몇 해 동안 움직이지 못한 그 마음을 오늘 안으로 움직일 수 있겠는가?”
“의리를 논하는 자리에서 어찌 함부로 이익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날은 짧고 일은 시급하니, 부득불 권도(權道)를 택할 수밖에요.”
정암이란 곧 몇 해 전 현풍에서 일가를 이끌고 옮겨온 곽월(郭越)이요, 권도를 택한다 함은 그간 외지 사람이라 하여 은연중 그를 멀리하던 것을 모두 철회하고 김해 사족들 사이에서 그 자리를 인정해준다는 뜻이었다.
“후... 자네 말이 맞네. 나는 여차하면 좌수 자리까지 내려놓겠네. 나머지 사람들도 사태의 비상함을 깨닫고 각오들을 하시게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임꺽정이라는 큰 우환을 맞이하여, 각지 군현의 노론 사람들이 택한 방책은 대개 비슷하였다.
결국 백성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고, 누군가 앞장서야만 뒤를 따를 뿐이다. 그것은 그들이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일에서든 맨 앞에 서는 것이 늘 토호 – 지금은 양반이라 불리는 – 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반란이라면 토호가 가장 먼저 나아가 목을 내놓을 것이요, 전란이라면 지체 없이 가산을 내놓아 고을을 지키기 위한 군대를 일으킬 것이다.
임꺽정이 당도하기 전 고을의 모든 유력한 이들을 포섭한다면, 임꺽정이 떠난 뒤 그를 대신하여 고을 여론을 뒤흔들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라면, 그간 그들이 굳게 지켜온 어떤 이익도, 체통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원수 집안에게는 먼저 사과하고, 향리에게도 먼저 고개를 숙이고, 하다못해 천한 백정이라 할지라도 권점이 끝날 때까지는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어차피 그들이 유향소나 사마소의 문턱을 넘어올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상것들을 위해주어야 하느냐며 볼멘소리가 나왔겠지만, 향반들도 다년간 말로든 돌멩이로든 얻어맞으며 많은 것을 깨우쳤기에 지금은 다들 대의를 위한 약간의 희생은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였다.
“오늘 중으로 정암 그이와 담판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뭔가 해보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내 비록 그이를 험담하고 싶지는 않지만, 애초에 이익을 얻기 위해 이곳 김해로 넘어온 이 아닌가.”
그러므로 충분한 이익을 내세워 흥정하면 저쪽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느냐. 험담을 하지 않는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험담에 가까운 말을 하는 허세절이었다.
곽월은 한전법이 막 시행되려던 차 현풍의 막대한 가산을 처분하고 바닷가 갈대밭을 사들인 뒤, 그 처분한 가산을 밑천삼아 사업당에서 일꾼을 고용해 바닷가를 간척하여 논밭을 만들고 있었다.
‘곧 세상이 한바탕 어지러워지면서도 동시에 태평해질 것이니, 사람은 늘어날 것이요 입 또한 따라서 늘 것이다. 무릇 곡식이 부족하면 작은 어지러움도 대란(大亂)이 되고, 나라의 곳간이 풍족하면 배우지 못한 백성도 예를 알게 되니, 어찌 이 간척이 작게나마 나라 위하는 길이 아니리오?’
아예 외지인도 아니요, 곽월의 후처가 바로 김해 허씨였으므로 이곳에 연고가 아예 없지도 않았다. 더구나 그 학문과 문장은 족히 벼슬할 만하였고, 남명 선생 조식과 종종 글도 주고받는 사이라 하므로 함부로 배척하지도 못하였다.
그리고 그 슬하 자제들도 하나같이 뛰어났으니, 심지어 올해 나이 여덟에 불과한 삼남 재우(郭再祐)조차 비범한 기색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런 이가 재조론은 틀렸고, 오직 민주당의 헌법이야말로 금세의 치도(治道)로 부끄럽지 않다 하고 다녔으므로, 고작 곽월 한 사람의 말이지만 김해 사족들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사족들도 그러할진대, 김해의 여염 서민들은 오죽하겠는가. 재조론이 그리는 앞날이 김해 고을과 이 나라 조선에 더 이롭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족들이, 겨울 내내 직접 지나가는 이들을 붙잡고 설득하였지만, 임꺽정이 찾아와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빈틈이 없냐 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을 잘 아는 노론 사람들은 곧장 무리를 이루어 곽월의 집으로 찾아갔다.
“연락도 없이 이리 들이닥친 것에 먼저 깊이 사과드리오. 다만 시급한 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소이다.”
좌중을 대표하여 허세절이 고개를 숙였다.
말이야 연락이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발 빠른 노복 하나를 급히 보내 한두 각 전에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물론 그것 역시 썩 예에 맞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월은 그 덕에 마당을 조금이라도 소제하고 객 맞이하는 주인답게 처신할 수 있었다.
“괜찮소이다. 시국이 비상하니 어찌 예(禮)를 모두 지키겠소이까. 다만 무슨 좋은 말씀을 하시든, 이 사람은 세운 뜻을 거둘 수 없은즉...”
사랑방에 모두 들 수 없어 마루 위에 골고루 나누어 앉은 김해 향반들을 향해, 곽월이 무언가 자신의 뜻, 그리고 어찌하여 민주당의 주장대로 헌법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해동 조선국이 나아갈 길이라 여기는지, 늘 하던 말을 다시 한 번 부연하려던 차.
그때였다.
대문이 부서지듯 열리고 – 다시 자세히 보니, 정말 부서졌다 – ‘민(民)’ 자 깃발 휘날리는 무리들이 끝없이 마당으로 밀려들어왔다.
“저기 보시오! 다 한통속이오! 한통속이란 말이오!”
맨 앞에 서 있는 거한이, 마루 위에 둘러앉은 이들을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영문도 모르고 함께 밀려들어온 김해 사람들의 눈에 의심이 서렸다.
“저 양반님네들은 말하기를, 헌법을 저들 원하는 대로 세운다면 세상에 예가 갖추어지고, 여러분 모두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될 것이라며 열심히 그대들 비위를 맞춰주었겠지. 허나 보시오! 저들은 그저 저들끼리 작당하여 사람 머리 위에 서고자 할 뿐이오!”
오늘 저녁에야 당도할 줄 알았던 임거정이 벌써 나타난 것도 의외거니와, 너무나 당당하게 남의 집 – 심지어 굳이 따진다면 임거정과 같은 편이라 할 곽월의 집 – 에 쳐들어와 손가락질을 하고 있으니, 마루 위의 양반들 모두 어안이 벙벙해져 말 한 마디 꺼내지 못했다.
“저토록 저들이 겉과 속이 다른데, 어찌 그대들에게 한 말이 지켜지겠소? 오로지 우리 민주당만이 여러분의 편이라오!”
“흠흠, 임 당수. 이 사람은 김해에서 좌수를 맡고 있는 허 아무개라 하오. 아무리 그대라 하지만 이러한 일은...”
겨우 정신을 차린 허세절이 자리에서 일어나 응대하였는데, 곧 하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었다.
“허 참봉, 삼 년 전 가을에 그대 집안의 노복들이 건넌말 한가네 둘째아들을 몰매 놓아 아이가 실성한 일이 있었다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니, 그것이 왜... 그런 일이 있기는 했지만, 이것과 대체 어찌 연관이 있다는 말씀이시오?”
정말 그런 일이 있기는 했지만, 여기서 거론이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거니와, 허세절 본인은 분명 그때 노복들을 엄하게 벌주고 그 아비 한가에게 후하게 포목으로 보상해주지 않았던가?
허나 멋모르고 그 사실을 인정해버린 것이야말로 실수였다.
“자, 보시오! 허 참봉 저이가 바로 저런 사람이라오! 안하무인도 저만하면 가히 도를 이루었다 할 지경이오.정녕 저런 사람이 하는 말을 믿고 따르시려오?”
풍문거핵 불문언근은 조종의 아름다운 법도라. 이제 그것을 끌어와 헌법을 둘러싼 여론 싸움에 가져왔으니, 옆에서 지켜보던 에스파냐 사람 몇몇은, 잘은 몰라도 왠지 투우장에서 붉은 천 카포테(Capote) 흔들어 소의 이목을 끄는 마타도르(Matador)를 닮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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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절과 곽월, 송빈은 모두 실존인물입니다. 곽재우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곽월은 원 역사에서는 1556년 출사하여 지방직을 전전하였고, 선조 즉위 후 본격적으로 청요직으로 나아가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작중에서는 그렇게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기 전 다른 뜻을 품고 김해로 이사하였는데, 지방관으로 재직하면서 아들 곽재우와 비슷하게 통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그간 누적된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는 것으로 이름을 떨쳤던 바 있는 그의 행적을 감안하면 불가능하지 않은 행보라 하겠습니다.
송빈은 임진왜란 당시 김해에서 일어난 의병장 중 최연장자로서, 임진왜란 발발 직후 지방관들이 달아난 김해를 지키며 싸우다가 전사하였습니다. 작중에서는 아직 스물을 겨우 넘긴 젊은이입니다. 허세절은 참봉 벼슬 외에 딱히 이렇다할 업적은 남기지 않았지만, 그 아들 허경윤이 임진왜란 중 훼손된 수로왕릉을 재건하는 업적을 세워 지역의 명사로 이름을 남겼기에 함께 그 이름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