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부채질은 그치지 않고 (2)
난데없이 양반의 집, 그것도 굳이 따지면 민주당과 같은 편이라 할 수 있는 곽월의 집에 들이닥친 임꺽정이, 자리에 모인 생면부지의 향반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상스러운 소리도, 영 뼈 아픈 소리도 하는데, 대체 어떻게 임꺽정이 김해의 사정을 저리 잘 아는지, 그리고 대체 이 자리에서 그것을 꺼내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향반들은 도통 짐작하지 못하였다.
“... 그리고 저기 밤내(栗川) 사는 허 초시는 수절하는 과부를 억지로 저의 첩으로 삼았고, 그 옆 동리 사는 유학 박가는 계집종을 여럿 건드려 그 누구도 비부살이를 하려 하지 않는다 하오. 저런 치들이 하는 말을 그대들은 정녕 믿으시려오?”
일찌감치 은을 넉넉히 풀어두었기에 바람잡이들도 제법 모였다.
“죄다 한통속이오! 도저히 못 믿겠소!”
“노론이고, 소론이고. 다 같은 족속에 다 같은 놈팽이들이오!”
심지어 본인의 행실은 깨끗했던 곽월조차 후처 허씨 집안이 모조리 싸잡혀 욕을 먹는 바람에 곤혹스러움을 면하지 못하였다.
허나 그리 따진다면,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억울하지 않은 양반이 드물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 귀천이 있으니, 간혹 천한 이가 귀한 이를 업신여겼다가 화를 당하기도 하고, 귀한 이가 저의 귀함만 믿고 사람의 귀함은 몰라 남을 해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상궤(常軌)를 벗어나지 않는 정도였다. 간혹 아직 풀지 못한 원한 남은 양반들도, ‘윗선’ 지시에 따라 뒤늦게나마 사과와 보상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은 양반들의 생각이요, 마당에 몰려들기도 하고 어느새 담장에 올라 안쪽 들여다보기도 하는 상것들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럼 그렇지! 어째 저기 저 양씨 샌님이 느닷없이 삼 년 전 일 미안하다고 하더라니, 역시 빈말이었군그래!”
“임 당수 말씀대로다! 겉으로는 우리네 위해주는 척, 서로 싸우는 척하면서 실지로는 다 붙어먹고 있었구나!”
하나둘씩, 바람잡이 아닌 이들 중 목소리 내는 이들이 생겼다. 향리 집안과 연이 많다 보니 아무래도 몇 년 전 향전에서 양반들에게 묵은 원한이 많았던 이들이 앞서나가고, 본디 심성이 모질어 저의 서운함만 알고 남의 사과 소중함 모르는 자들도 하나씩 거든다.
그렇게 꺽정이가 선창하듯 성토하고, 그 왁자지껄함과 저들 머릿수 많음에 이끌린 김해 백성들이 후창하니, 그 기세 짐짓 요란한 듯하여 다시 더 많은 백성들의 외침을 이끈다. 대나무 숲에서는 임금님 욕도 하는데, 이 거뭇거뭇한 군중 사이에서라면 누구 욕을 못하리오.
반면 그 기세를 정면으로 맞이하는 김해 향반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마루에 주저앉아 말로 된 주먹을 얻어맞고만 있었다.
마침내 참다못한 곽월과 송빈이 각각 떨쳐 일어날 무렵.
“자! 그러니 저기 못난 양반님네들은 저들끼리 노시라 하고, 우리들은 슬슬 물러나 보십시다들! 동헌 앞에 사당패가 진을 쳤으니, 지금 그리로 향하면 앞줄에 앉아서 보실 수 있을 것이오!”
보기보다 훨씬 눈치 빠른 임 당수가 선수를 쳤다.
그리하여 그저 쳐들어올 때 쳐들어와 할 말만 하고, 상대가 정신 차릴 무렵 잽싸게 빠져나가는 얌체스러움이, 구경꾼 김해 사람들 눈에는 그 당당함에 콧대 높은 양반들이 한 마디도 못하고 끙끙 당하기만 한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하계의 시끄러움이야 알 바 아니라는듯, 이미 낙동강 넘어와 머리 위를 비추던 겨울 해는 어느새 서쪽으로 휘릭 사라져버리고, 어둠이 그 자리 차지하며 내려왔다.
허나 김해 관아 앞에는 횃불이 마치 어둠 바라보며 이 자리는 저들 것이니 다른 데 알아보시라 대꾸하는 듯 환하게 불탔다.
어름줄타기하는 남녀 광대는 재주를 넘으면서도 재담을 그치지 않는데, 그 재담은 하나같이 양반을 욕하는 것이요, 덩실덩실 흥겨우면서도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탈놀음은 이름하기를 양반춤이라 하였다.
“에헴! 삼대 째 온갖 벼슬 역임한 문중의 생원 어르신... 아차차! 흠흠, 행차시다!”
유유자적 걸어오다 돌에 걸려 넘어지는 시늉을 제법 우스꽝스럽게 하는 양반탈 쓴 광대가 헛기침을 한다. 도포는 해지고 갓은 구멍이 났는데, 마치 아무 변고 없는 양 배 앞으로 내밀고 팔자걸음하는 것이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라, 웃음이 한 바탕 나왔다.
“그렇게 벼슬 많이 하셨다는데, 우리 ‘아차차’ 어르신께서는 무슨 벼슬을 하셨습니까?”
건들거리는 상놈 말뚝이가 묻는다.
“이놈이 예의가 없구나! 그런 것은 물어 무엇하느냐? 우리 문중은 그 옛날 은나라 기자가 동래(東來)한 이래로...”
“은(殷)나라 기자의 후손이라면서 어째 수중에 은(銀)은 한 푼도 없으시오?”
말뚝이 물음에, 은과 연 별로 없기는 매한가지인 구경꾼들이 왁자지껄하게 한바탕 웃는다. 거기 어울리듯, 이번엔 반대편에서 싸구려 천을 화려하게 동여매고 대국 동전 가득한 쌈지를 무당 방울 흔들듯 흔드는 다른 양반님이 나온다.
“거 말 잘했다! 상놈의 식견이 제법이로구나! 내 바로 탕탕평평 탕평당에 아는 사람 수두룩하고 강남과 유구에 벗도 많은 아무개 초시니라!”
“그렇게 아는 사람 많으신 분이 왜 지나가는 장사치들은 아는 사람으로 아니 대해주시오? 일면식 없는 외국 사람은 벗인데, 같이 장사하는 처지 사람들은 벗에 들지 못하니, 과연 훌륭한 선비가 아닐 수 없소!”
“무어라? 가난뱅이가 무얼 안다고!”
초시가 쌈지를 던지는 시늉을 하니, 말뚝이는 짐짓 기겁하는 척 하며, 헤진 옷 입은 생원에게 가서 고자질을 한다.
“아이고, 아이고! 생원 어르신! 저기 저 초시놈이 가난뱅이는 선비도 아니랍니다!”
“무어야? 내 오늘 저 위군자(僞君子)와 사생결단을 낼 것이다!”
능청스럽게 둘 사이를 이간질하니, 허름한 선비와 으리으리한 선비가 곧 서로 달려들어 태껸 겨루는 시늉을 한다.
“자! 싸움 붙는다! 싸움 붙어! 이기는 쪽은 위군자요 지는 쪽은 아래군자라!”
양반 능멸하는 이 탈놀이는 김해에 원래 있는 것이 아니요, 바로 꺽정이가 황진이 인맥으로 데려온 해서 사당패의 양반춤 마당이었다.
전국 팔도 중 반상의 법도가 유독 해괴하게 지켜지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황해도였다. 황해도는 본디 이렇다할 유풍(儒風)이 없었는데, 선대왕 시절부터 한양과 경기 일원의 거족들이 황해도 갈대밭을 노리면서, 양반의 권세 빌어오는 이는 있는데 정작 그렇게 으리으리한 양반님네는 한양에 머물며 황해도에 발 하나 들이지 않는 꼴이 다년간 이어졌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그것을 비꼬고 싶은 사람들도 생기고, 남의 마음속 차마 하지 못할 말을 우스꽝스럽게대신 풀어주는 값으로 먹고 사는 재인(才人, 광대)들이 그들 대신하여 양반을 욕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봉산 장터에서 하면 봉산 탈춤이라 부르고, 은율에서 하면 은율 탈춤, 해주에서 하면 해주 탈춤이라 할 뿐이었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문거족들의 손길은 닿지만 눈길은 그렇게 잘 닿지 않는 해서의 이야기요, 삼남, 예컨대 안동 같은 곳에서는 설령 광대들이 탈춤을 출지언정 그 날선 정도는 훨씬 덜하였다.
그러니 걸쭉한 욕만 아니 나올 뿐, 양반을 이리 흉보고 저리 비꼬는 해서 탈춤을 처음 보는 김해 농군들은, 처음에는 그 매운맛에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다가도, 어느새 하나둘씩 춤사위와 재담에 이목을 기울였다.
“자, 이것이 바로 황해도 봉산 고을 탈놀음이었소이다! 구경하는 값은 따로 받지 아니하니, 바로 여러분이 우리네 이야기 들어주는 것이 값을 치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오.”
태껸 싸움을 하다가 지쳐 나가떨어지는 시늉을 한 양반탈 광대 둘이, 둘러싼 구경꾼 향해 꾸벅 인사를 올리고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하면 우리네 이야기란 무엇이냐! 김해 양민 여러분은 귀를 기울여주시오!”
“노론이든 소론이든, 한양 거족이든 동리 향반이든, 양반은 모두 한패요 우리네 백성이 또 한패라!”
“인생에 제일가는 복이 바로 오복이니, 법 중 제일가는 것은 바로 민주당 오복헌법(五福憲法)이구나!”
“하면 오복이란 무엇이냐...”
상것들도 다 같은 상것이 아니다. 백정이나 광대 같은 천한 놈들보다는, 그래도 명색이 양민인 자신들은 낫다 여기는, 조선 사람 대부분을 이루는 농군들.
그들에게 양반이란, 그저 미워하기만 할 수도, 또 그저 좋아하기만 할 수도 없는 분들, 또는 놈들이었다.
바닷가에서 뱃일을 한다든가, 향리 집안 사람이라든가, 아니면 일확천금 노리며 사업을 벌인다든가 하는 사람들이야, 저들 양반과 상종할 생각도 아니하고, 또 어차피 그들 먹고사는 일에 양반과 그리 상종할 일이 많은 것도 아니었으나, 농군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런 이들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여차하면 그 헌법 세우는 권점에 학당 나온 사람 자격으로 끼워주겠다는 둥, 헌법이란 것은 이러이러한 연고로 아주 좋은 것이니 자신이 말하는 쪽을 찍으라는 둥 유독 곰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어째 옆구리 찔려서 나선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그간 서운한 일에 저들 잘못도 없지는 않았다며, 마치 허리라도 숙일 것처럼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고을 양반님네들은 비록 높으신 분들일지언정 계속 같은 고을에 살며 부대낄 이들이요, 민주당 향리와 장사치들은 비록 같은 상놈들일지언정 영 가까이하기 어려운 이들이라 여겨왔다. 몇 해 전만 해도 향전을 벌이며 치고박고 싸웠지만, 끝내 저쪽에서 조심스럽게 상놈들에게 내줄 것 내주기 시작하자 이쪽에서도 불길이 잦아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허나 지금은 어떤가. 마치 하나의 마당놀이처럼, 임 당수가 양반님네 돌아가며 성토하는 것을 보고 이어서사당패의 흥겨운 놀음을 보면서, 남 따라서 환성도, 탄성도 내지르며 놀다 보니, 한쪽의 벽은 어제보다 높아보이고, 다른 쪽 벽은 다시 보니 온데간데없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상놈 신세요, 어찌 되었든 지체 높으신 양반님네들은 그대로 양반이라. 그렇다면 뉘 말을 믿어야 할까? 흔들린 마음은 웃고 떠드는 사이 조금씩 한쪽으로 기울어만 갔다.
“저리 되면 다들 민주당의 말을 솔깃하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헌법이 무엇인지, 재조론은 무엇이며 임 당수의 민주당이 내세우는 바는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사족들의 헌법과 달리 저들 범상한 백성들에게까지 이롭고 또 복을 주는 헌법이라 여기게 되겠지요.”
한편에서 사당패들이, 남해 바닷가까지 내려오는 길에 달달 외운 ‘오복헌법’ – 오복이라는 말이 워낙 백성들 사이에서도 익숙하다 보니, 이지함 뜻과는 무관하게 저런 이름이 붙어버렸다 – 설명을 주워섬기는 것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꺽정이와 병해 뒤에서 사람 목소리가 났다.
두 사람이 돌아보니 바로 앞서 썩 좋지 않게 만난 사이인 김해 소론의 좌장 곽월이었다.
저 앞에서 떠들고 있는, 소론을 풍자하는 ‘초시’와 달리, 여느 시골 샌님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검소한 복식을 하고 나온 곽월 곁에는 어린아이 하나가 있었는데, 아비가 나라의 높은 분(그리 높지 않게 생기긴 했지만) 대면하든 말든 여전히 멀리서 줄타고 있는 광대에게만 눈이 쏠려 있었다.
“어린 셋째아들이 워낙 보고 싶어하는 눈치라, 이렇게 데리고 나오게 되었소. 나오는 길에 두 분이 보여, 이렇게 찾아뵙고 궁금한 바를 여쭙게 된 것이니 청컨대 괴이쩍게 여기지는 말기 바라오.”
앞서 저의 집 대문을 부수고 들어온 무리의 수괴 대하는 것 치고는 제법 점잖은 말투. 비록 그 이름이 한양에까지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꺽정이네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저 사족들 욕하고자 그런 수작 부린 것 아님을 눈치챌 만큼 만만치 않은 사람인 듯했다.
“아드님의 관상이 실로 영특하니, 장차 집안을 빛내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하군요. 그 덕에 이렇게 곽 공을 한 번 더 뵙고 혹 있을지 모르는 오해를 풀게 되었으니 고맙게 여길 일입니다.”
눈앞의 스님이 광통교 위로 나는 절묘한 도술을 선보이며 격물법 이치를 전국에 널리 알린 병해대사임을 알지 못하는 어린 곽재우는 그제야 아버지와 이야기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서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덕담에 감사드립니다.”
곽월도 눈치껏 첫째아들 재희를 불러, 재우를 데리고 줄타기 광대 쪽으로 구경을 가게끔 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묘하게 한적한 이곳 구석에 세 사람만 남았다.
“참으로 눈썰미가 훌륭하시군요. 과연 시류를 읽고 좋은 일을 하시는 분 답다 하겠습니다.”
“하여, 두 분께 여쭙고자 합니다. 이 모든 일은 대체 어떤 발상에서 나온 것인지요? 혹 괜찮으시다면, 그 심계 무엇인지 대강만이라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졸지에 꺽정이에게 납치당하여, 유세 행렬에서 임시로 모사를 맡게 된 병해의 발상은 이러하였다.
유신현 시절의 아픈 기억으로 인해, 함부로 ‘옛날이 좋았다’ 소리 했다가는 얻어맞을 지도 모르는 충주 고을이나, 이지함의 형 이지번의 눈치를 보느라 재조론을 옳게 여길지라도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보령 고을 등, 삼남에도 소론이 우세한 고을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허나 병해가 삼남의 여론 형세가 생각보다 유리하다 하였던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자, 보거라. 아무리 노론이 기세등등한 고을이라 하더라도 소론에 속하는 사족들이 최소 한둘씩은 있지 않겠느냐?’
‘그야 그렇지만, 고작 한줌 아니오? 더구나 그들은 따지고 보면 우리 당과 잠시 뜻을 같이할 뿐 아예 우리 당의 사람인 것은 아니고.
‘그건 그렇지. 허나 네가 어느 고을 향회의 좌수쯤 되는 사람이라 생각해보거라. 천하의 우환 임꺽정이가 찾아오는데, 말로는 중하다 중하다 하지만 언제 흔들릴지 모르는 여항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느니 그 한줌 소론을 설복시키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사족이란 자들은, 대개 그 고을에서 명성으로든, 지닌 농토로든, 거느린 노비로든 어지간한 사람 위에 있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인만큼, 지켜야 할 것도 많았다. 체통이면 체통, 가산이면 가산.
‘그러니 그들은 설령 백성을 위하는 시늉을 하고, 그들 사이로 들어가 재조론을 설파하며 저들의 헌법을 지지해 달라 한들 끝까지 갈 수는 없다. 애초에 양반 노릇을 앞으로도 대대로 하고 싶어서 노론으로 뭉치는 것인데, 그것을 위해 양반 체통을 다 던진다면 배보다 배꼽이 큰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임꺽정의 행렬이 다가오는 판에, 그들은 이곳 김해에서 그러했듯 백성들을 결집하여 어떻게든 다가오는 먹구름을 막아내려 하기보다는 소론 집안과 결판을 내려 할 공산이 컸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저들 모두 한통속이라는 아주 좋은 증좌(증거)가 되어주리라.
“... 그리하여 오늘 보신 것처럼 같이 사람들 마음속 불길에 부채질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멋스럽게 옮기자면, 글쎄요. 부채질하여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니 선동(煽動)쯤 될까요.”
그 무렵, ‘오복헌법’이 보장하는 다섯 가지 복을 아주 거칠면서도 귀에 쏙 들어오는 말로 정리한 사당패 광대들이 또 새로 양반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저쪽에서 부녀 탈을 쓴 이들이 나와, 반가 규수들에게 지조 지조 타령하면서 정작 저들은 기생을 옆구리에 끼고 삼처사첩이라도 하려는 양 노닌다며 꼬집었는데, 여인은 여인이되 규수는 아닌 이들이 뭐가 좋은지 웃고 떠들었다.
한참 말 없이 생각에 빠져 있던 곽월이 다시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아마 이 사람 전에도 수많은 선비들이 당색 막론하고 임 당수께 말해주었으리라 믿습니다. 이 나라의 큰 기틀은 바로 사족이니, 그들이 나무와 같이 우뚝 서 저 산의 숲처럼 있으니 이를 산림(山林)이라고도 하고 사림(士林)이라고도 일컫지요.
이 사람은 지금껏 당수께서 설파하신 바를 듣고, 장차 나라의 앞길이 달라질 것을 믿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치 않고 있지요. 하지만... 그 계책대로 양반과 상민들 사이를 갈라놓게 된다면, 그 앞날이 꼭 밝지만은 않을 듯하여 우려가 됩니다.”
“갈라진들 무슨 상관이오?”
“오늘 임 당수께 매도당한 노론 사람들은, 비록 완고하고 고루한 면이 있을지언정 그러한 욕을 당할 만한 이들은 아니었습니다.
소생은 물론 지금까지 이 나라의 선비들이 만들어온 것이 모두 옳다거나, 만세불변토록 지켜가야 할 상도(常道)라 여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족들이 이 땅에 있어, 각지 군현의 민심을 다독이고, 때로는 그들을 위해 나서며 또 때로는 그들을 가르치고 다스리는 일을 돕기도 하므로 지금까지 나라가 태평하였던 면도 있습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전란이 일어난다면, 저 바다 건너 왜인들이 느닷없이 모여 전조 말에 그러했듯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소론이고 노론이고 언제 갈렸냐는 양 모두가 힘을 합쳐 죽음으로 싸울 것이다.
적어도, 그들 중 선비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이들은 그리할 것이요, 또 지금 저기서 양반춤에 열광하는 많은 이들도 그 곁을 따를 것이다.
“그런데 소생이 제대로 이해하였다면, 반상 간에 틈을 만들고 그 사이를 벌리며, 숫제 쐐기까지 박으시려는 것이 임 당수와 병해 대사 두 분의 뜻인 듯합니다.”
병해가 무어라 답하기 전, 꺽정이가 먼저 나섰다.
“어르신 말씀이 틀렸소.”
“그렇습니까?”
“쐐기 박으려는 것은 맞지만, 반상 간의 틈은 아니오.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의 틈을 만들어서 노릴 뿐이지.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싫다면, 그대들이 나서서 틈을 메우든, 아니면 새로 흠을 내고 쪼개서 그 조각을 모으든 하면 될 일이오.”
못 배우고 별 생각 없다 스스로 여기는 꺽정이다. 그러나 자신이 무얼 하려 하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화두 하나를 지니고 서쪽으로 향하여 많은 것을 보고 들은 뒤 동쪽으로 돌아왔다. 그것을 풀이해줄 좋은 벗과 좋긴 한데 조금 이상한 벗 – 대개 후자가 더 많았다 – 도 주변에 많았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도 읊는데, 꺽정이라고 어디 못 읊을까. 그 개가 그냥 개가 아니라, 서당을 세우고 지킨 개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찢어발기고, 쪼개고, 나누고, 부수고 하다 보면 무엇이 남겠소? 그저 사람 하나하나가 남겠지. 지금은 엄두도 못낼 일이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든, 아니면 적어도 스스로 생각한다 착각하든 하게 될 것이오. 내가, 우리 당이 노리는 것은 그것이라오.
그리 되면 그 누구도, 적어도 저보다 많이 가지고 집안 훌륭한 사람이 말한다 하여 그것을 철석같이 믿는 일은 없겠지. 의심부터 하고 볼 것이요, 내가 네놈 말 믿으면 뭘 줄 수 있느냐 물을 것이오.”
“하면 그렇게 쪼개진 나라는, 정녕 임 당수 따르는 이들이 바라는 좋은 나라가 되겠습니까? 인화(人和)가 사라지고 인의(仁義)마저 여럿이 되어버린다면...”
“그것은 우리 당 혼자서 할 일이 아니지. 여러 인의가 세상에 나타나 서로 견주고 다투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옳다고 다른 사람들을 설복시켜야 할 것이오. 같이 엣헴거리는 사족들뿐 아니라, 저기 저 바다에서 노 젓는 뱃놈들, 저 줄 위에서 날뛰는 광대들, 그리고 어르신 댁에 있는 높고 낮은 여인들까지.”
어설프고 조악하지만, 그러면서도 묘하게 짜임새 있는 언변. 곽월은 그것을 듣고, 마지막 대꾸를 끝으로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세 사람이 있으면 그 중 스승이 있다 하였던가요. 이 곽 아무개, 오늘 귀인을 뵙고 좋은 가르침을 받습니다. 비록 그 가르침은 도의에 맞지 않고, 사리에도 어긋나는 바가 많습니다만,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더 세상에도, 선비에게도 이로운 것일지 모르지요.”
그러면서, 꺽정이 저도 부담스러울 만큼 꾸벅 허리를 숙였다.
“별 이상한 양반도 다 있소.”
“이 나라에 저런 이들이 있으니, 어찌 선비가 끊어지겠느냐.”
등 뒤에서 그런 말 오가는 것은, 시끄러운 광대놀음에 묻혀 곽월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동래에서 김해로 넘어올 때 빌린 배는 아직도 낙동강 나루터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으므로, 김해 다음 순서로는 강을 따라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나오는 밀양이 낙점되었다.
사당패와 흑의군, ‘서양 도깨비’ 에스파냐 용병들이 차례로 배에 오르는 것을 보며, 꺽정이가 슬쩍 병해에게 물었다.
“사형, 내 궁금한 게 하나 있소.”
“보통 내게 세상사를 물어보는 이들은 두둑하니 시주도 하곤 하던데.”
“칠장사 산속에 틀어박혀 계시는 전국 스님들의 우두머리 되시는 분을 데리고 전국 유람을 다니는데 이만큼 공덕 쌓는 일이 또 어디 있겠소?”
“거 의외로 언변이 정곡을 찌른단 말이지. 좋다. 뭣이 그리 궁금하냐?”
“나름 진지한 물음이오. 김해 고을이야 동래 코앞이라 어지간한 양반들 구린 뒷사정을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지만, 앞으로 우리가 삼남을 모두 돌아야 하는데 장차 어찌하실 생각이시오? 당장 밀양만 하더라도 동래에선 조금 거리가 있어서, 그쪽 사족들 집안 사정은 동래 아전들도 다는 모른다 하였잖소.”
그 말대로였다. 동래야, 선소(船所)에서 일하는 선공들, 조총 만드는 공인(工人)들, 그리고 자유민주당과 거래하는 상인들까지, 모조리 민주당에 딸린 사람들이므로, 에우로파 기준으로 따진다면 조선국 동래도호부가 아니라 조선왕의 봉신 코우지오니스의 동래 공국쯤 된다 할 수 있었다.
그 덕에 김해 향반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전광석화처럼 배를 마련하여 건너올 수도 있었고, 또 종종 낙동강 양쪽 오가는 민주당 사람들로부터 김해 내부의 이런저런 소식 – 대개는 그저 ‘카더라’ 소문이었다 – 전해듣고 곽월의 집에 몰려든 노론 향반들 상대로 쏠쏠하게 써먹을 수도 있었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래 주변에서만 가한 일이었다. 양반들이 다 한통속이라며 싸잡아 욕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모월 모시에 한 곳에 모여 뭔가 숙덕대었다는 것 이상의 증좌 내지는 흠잡을 거리가 필요했는데, 그런 흉볼 거리가 없다면 꺽정이의 이 불 지르고 부채질하는 술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미리 풀어서 이런저런 뒷사정을 들으면 될 일 아니냐.”
“두리손 그놈은 우리네가 유세를 돈다는 말을 듣자마자 곧장 저 허리 꼿꼿한 작자들로 하여금 백성들 위해주는 시늉이나마 하게 만들 만큼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 놈이오. 더구나 시골 샌님들도 암만 물정 어둡다지만 바보들은 아니니, 김해에서 무슨 일 일어났는지는 다들 알고 있겠지.”
“녀석, 어울리지 않게 머리도 쓸 줄 아는구나. 그렇게 머리 돌아가는 놈이 말이야, 사형을 이렇게 부려먹고 있어?”
병해가 꺽정이 머리를 장난스레 툭 쳤다.
“네 말대로, 사람을 풀어서 모든 군현의 양반들 뒤를 캐고 다닌다면 한 해가 아니라 십 년은 잡아야 겨우 삼남을 다 돌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이 그 말이오.”
“허나 이미 그런 뒷사정을 샅샅이 캐어 밥벌이에 써먹는 족속들이 도처에 있지 않더냐? 그런 놈들을 불러모으면 되지.”
“나물 캐어 밥벌이에 써먹는다는 얘기는 들어봤어도 반가의 뒷사정 캐서 입에 풀칠한다는 얘긴 못 들어봤소.”
“그야, 당연히 너희 어리석은 중생들은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지, 흐흐. 점쟁이와 무당, 자칭 도사들 등등. 백에 아흔아홉은 돌팔이인데 어떻게 밥들 얻어먹고 사는지 궁금하게 여겨본 적 없느냐?”
“딱히 없는데.”
꺽정이가 정직함이 뚝뚝 묻어나는 대꾸를 했다.
“엥이, 쯧쯧. 이런 놈이 해동 조선국 대표로 서방을 다녀왔다니, 나라의 앞날이 어둡기 이를 데 없구나. 이왕 이리된 것, 내 지금 알려줄 테니, 입 무거운 놈들을 풀어서, 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여기저기 전하고 다니게 하거라.”
“알겠소.”
“전우치가 살아 돌아왔으니 영남의 후학(後學)들은 사람 하나 빠짐없이 밀양으로 모이라고, 그렇게 심산유곡의 땡중과 자칭 도사들, 그리고 박수며 무당이며 하는 자들에게 찾아가 전하도록 하여라. 용하다 알려진 자들이라면, 실제로 용하지 않더라도 내 옛 이름 정도는 다 들어봤을 테니.”
“그렇게 이름을 팔아도 되오?”
“스승님 앞에서 약조하고 또 수계(受戒)하며 옛 연을 끊었다. 내 이름이되 내 이름이 아니니 조금 팔아도 무방하지 않겠느냐.”
물론 병해는 정말 전우치가 살아있음을 세상에 알릴 생각은 없었다. 그 삶은 이미 옛일로 묻어둔지 오래였으니.
그러나 전우치가 정말 그들 고을에 찾아온 줄 알고 왔다가 웬 중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는 것을 본 밀양의 도사와 무당들이, 저들 속였다며 병해를 비난하거나 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들이 모여들자마자 흑의군과 에스파냐 병사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그들이 밥벌이 밑천으로 삼는 밀양 고을의 모든 어두운 뒷사정을 고해바치기 전까지는 못 돌아간다고 엄포를 놓을 것이므로.
“와... 암만 그래도 명색이 동도(同道)들이라 할 수 있는데 그래도 되오?”
“도술이 별 거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때 전우치였던 병해가 그리 말하니, 어째 그럴듯하여 꺽정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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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수록되어 잘 알려진 봉산탈춤 외에도, 황해도 지역에 전해졌던 것으로 알려진 은율탈춤과 해주탈춤 등은 공통적으로 다른 지역의 탈춤에 비해 훨씬 노골적이고 강경하게 양반과 승려들의 위선을 비꼬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류의 탈춤이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퍼진 것은 잘 알려져 있으나, 그 구체적인 기원은 장르의 특성상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작중에서는 16세기에 접어들어 부쩍 강화된 한양 양반가의 황해도 내 대농장 조성이 다른 지역보다 먼저 양반층을 공격하는 내용의 탈춤을 등장하게 한 원인이라고 추정하였으나, 상술한 이유로 인해 그저 추정에 불과할 뿐입니다. 고려 중기에 등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하회탈놀이나 정월대보름 민속과 연계되어 이어내려온 경남 일대의 오광대 등, 경제적으로 훨씬 풍족했던 삼남 지방에도 이미 독자적인 가면극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고, 늦어도 조선 후기에는 모두 양반춤이 레퍼토리에 포함되게 됩니다.
한편, 이렇게 지역별로 독자적으로 발전하던 탈춤이 조선 후기에는 (주로 사대부들 관점에서) 사회문제로인식될 만큼 전국적인 유희로 퍼져나간 데는, 인조 연간 국가재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대규모 나례(儺禮) 의식을 관장하던 산대도감(山臺都監)이 혁파된 것이 한몫 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로 인해 나례에 동원되던 재인 및 그들을 지원하던 무대 기술자들(산대山臺라는 이름도 본디 공연이 이루어지던 임시 무대를 지칭하는 표현이었습니다)은 모두 민간 영역에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그 결과 전국으로 퍼져나가 대중적 취향의 공연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류의 탈놀이를 통틀어 산대도감계통극(山臺都監系統劇)이라 부르기도 하는 데는 이런 연원이 있습니다.
한편, 또 다른 전통예술인 줄타기에서도 비슷한 면모가 나타나는데, 나례의 의례를 계승하여 주로 양반층 앞에서 낮에 진행된 기교 중심의 광대줄타기와, 민간 마을에서 서민층을 대상으로 밤새 열렸던 재담 중심의 어름줄타기로 공연 양상이 나뉜 것입니다. 어름줄타기의 재담 역시 탈놀음과 마찬가지로 주로 양반과 파계승을 풍자하는 성격이 강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