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81화 (181/259)

53. 백아절현 (3)

“입헌(立憲)! 입헌!”

“대명을 오히려 새롭게(維新)! 금은을 없애고 옛날로 돌아가자!”

“헌법으로 대동단결! 공상(工商) 진흥하여 모두 부자되는 세상으로!”

“쌉니다! 그저께 나온 정론보, 화남공보 팝니다! 고향 소식을 북경에서 들어보세요!”

자유민주당의 세 두령 중 하나인 서해가,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격으로 광동부터 절강까지 모든 항구에서 천진까지 오가는 뱃삯을 반값으로 깎아주기까지 하였으므로, 강남의 사인(士人)들은 이때가 아니면 언제 경조(京兆, 수도) 구경을 하겠느냐며 무리지어 상경하게 되었다.

그들을 막아야 할 북경 성문의 무관들 중에는 아직도 엄숭 시절에 그 자리 앉은, 무인보다는 상인으로서 더 대성(大成)할 법한 자들이 많았다. 문을 열어두면 그만큼 문앞에서 뜯어내는 것도 많아질 터인데, 무엇하러 성문을 걸어잠그겠는가?

그리하여 자연스레 북경 저자에서 사대부끼리 마주쳐, 관화(官話) 및 그와 엇비슷한 화북 말씨, 시끄러우면서도 유들유들한 강남 말씨, 그리고 남북 어디서든 두드러지는 객가(客家) 말씨까지 섞이게 되었다.

허나 말씨 섞이는 곳에서는 주먹도 섞이기 마련. 그저 한 곳에 함께 모아두어도 언행과 습속이 달라 싸우기 십상인데 헌법을 두고 편까지 갈렸으니, 해동(海東)의 명유(名儒) 회재 이선생(이언적)의 통찰에 감탄한 이들은 중원 북쪽 사람이라 하여 북인(北人)을 자처하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강남 서생들은 싸잡혀 남인(南人)이라 칭해지게 되었다.

“북인은 무슨.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듯한데, 식견이 동이(東夷)보다도 낮으니 그냥 북적(北狄, 북녘 오랑캐)이라 부름이 가당하리라.”

“무어라? 그러는 너희야말로 목욕하고 나온 원숭이(沐猴而冠, 초나라 사람의 멸칭) 떼 아니더냐?”

여기서는 언쟁, 저기서는 권법 대련. 심지어 복건성에서 올라온 이들 중에는 계투(械鬪)로 다져진 무예를 뽐내는 작자들도 있었다.

“이, 이것이 대체 무엇이냐? 짐이 있는 이곳, 화, 황성에서 무슨 무엄한 짓거리란 말이냐?”

천자의 귀에도 결국 그 떠들썩한 소리가 들어가고야 말았다.

옛 버릇 못 버리고 여전히 정사를 멀리하며 신선술만 수련하던 천자는, 다만 내단(內丹)이니 외단(外丹)이니 하는 것은 접어두고, 오로지 저의 ‘병’(수은 중독)을 치유하는 데만 주력하고 있었다.

오늘은 성 바깥에 마련한 제단 위에서 후들대는 사지를 겨우 놀려 천강칠성보(天罡七星步)를 수련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가뜩이나 몸과 마음 불편하던 차에 주변이 시끄러우니 짜증이 아니 날 수 없었다.

“대체 저, 저들이 말하는 헌법이 무엇이냐?”

황제의 어가를 수행하던 병필태감 겸 동창제독 풍보(馮保)가 잠시 고민한 끝에, 장거정이 얼마 전 조선에 글 부친 사정을 슬그머니 누락한 채 그 외 자신이 아는 바를 모두 고하였다.

“아니, 구, 군주 위에 서는 법이라니. 그것이 가당키나 한 말이냐? 그것을 감, 감히 짐에게 세워달라 한다고?”

그때, 어가가 급히 멈추었다. 천자가 부들거리는 눈을 억지로 치켜뜨며 바깥을 보니, 더벅머리 유생들이 천자 위에 새로 법을 세우려는 것을 넘어 숫제 천자의 어가를 세운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 이놈들이 짐을 능멸하는구나! 모, 모조리 잡아들여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잡아들여!”

그리하여 천안문 앞에서 만승천자의 수레를 가로막은 서생들이 옥고를 치르고, 이어서 북경에 좋다고 구경 왔던 이들과 제멋에 겨워 헌법 운운하던 이들이 모조리 붙잡혀 들어가게 되었다.

북경에 나가 있는 조선 역관들은, 인삼 무역이 영 재미를 못 보게 된 고로 대신 저들이 들은 대국 소식을 공보에 전하는 것으로 쌈짓돈이나마 벌곤 하였다.

그들이 전한 이 사화(士禍)의 내막은 이러하였다.

『서유기』 덕에 제법 돈을 번 강소성 사람 오승은(吳承恩)은 헌법 핑계로 저의 벗들과 함께 황성 구경을 왔는데, 개중 겉멋 든 몇몇은 입헌 운운하는 깃발을 비싼 값에 사서는 좋다고 흔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가 행차 알리는 소리가 났는데, 안타깝게도 오승은도, 그의 벗들도 관화에 썩 능통하지 못한 시골 서생들인지라 비키라는 말을 조금 늦게 알아들었다. 뒤늦게야 무슨 일인지를 깨닫고 황급히 부복하였는데, 경황없이 엎어지다 보니 그 엎드린 자리가 남들보다 서너 척쯤 앞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자 주변의 다른 겉멋 든 서생들은 눈이 돌아갔다.

‘아니, 저 초나라 원숭이 놈들이! 좋다!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 목숨 한 번 못 걸까!’

‘강남 서생이 되어서 의기를 부리려면 길 한복판까지 가야지! 저 촌뜨기들에게 질 수는 없다!’

그러자 세간의 명성을 얻기 위해 – 정론보와 공보가 그들이 아는 세상의 절반에서 통용되고 있었으므로, 천하에 이름 떨치기가 이제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 눈이 돌아간 남북 양쪽 사람들 몇몇이 더 앞으로 나왔고, 그 기묘한 경쟁 끝에 길 한복판까지 나와 고개를 조아리게 된 것이다.

거기까지가 공보에 실린 사연이었고, 역관들이 조금 더 두둑한 웃돈 받은 뒤에 천진에 나가 있는 사업당 사람들에게 전한 소식은 더 심각했다.

천자의 분노는 자신의 길 앞을 가로막은 서생들에게만 머물지 않았던 것이다.

‘경들은 무, 무엇하였던 것이오? 이 헌법이라는 것이 무슨 꿍꿍이에서 나왔는지, 그, 그대들은 정녕 모른다는 말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것인가?’

이 헌법이라는 발상이 실제로 어디서 나왔는지는, 온 천하에서 민주당 식구들과 이황과 조식 두 사람, 그리고 얼떨결에 휘말린 심의겸 하나만 알고 있었다.

‘삼가 가르침을 청하옵나이다.’

허나 설령 장거정이나 서계가 진실을 모두 알고 있다 하더라도, 노여움에 가득한 황제 앞에서 함부로 그것을 고하지는 못했을 터였다. 비록 눈은 멀었을지언정 용은 용이었므로.

‘이 헌법이라는 못된 것을 처음 발의한 자가 바로 조선의 외척 시, 심통원이라 하지 않았더냐? 이것은 필시 그자가 유약한 조선왕 환(명종)을 법을 빌미로 좌지우지하며 국권을 전횡코자 고안한 못된 꾀일 것이다! 그 사특한 마음이 마침내 우리 천조에까지 미쳐 오늘의 화란을 일으켰으니, 어찌 벌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곧 대명 조정에서 조선으로도 무언가 글을 내려보낼 것이라고 역관들은 말했다.

그것이 예부 자문(咨文)이 될지, 아니면 칙서가 될지, 그것도 아니라면 워낙 전례없는 일이다 보니 조서(詔書)가 될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어쨌든 조선 사람의 글과 언행이 이러한 파란의 근거가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으므로 어떤 식으로든 조처가 취해질 터.

허나 지금은 그 용틀임의 후과가 아직 북경의 내각에만 미치고 있었으니, 아마 가을이나 되어야 조선에 무언가 영향이 닿을 것이었다.

“당수와도 안면 있는 서 대인께서 내각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에는 고공(高拱)이라는 이가 대신 입각(入閣)하였다더군요.”

옛 효사정(孝思亭) 터에 얼마 전 새로 세워진 정자 위에서, 이이가 북경 소식을 갈무리하여 전해주었다. 바위절벽 아래 펼쳐진 한강 경치에서 딱히 운치 못 느끼는 꺽정이가, 기다리기 지루하다며 아무 얘기나 해보라 하였더니, 정말로 아무 얘기나 한다는 게 오늘 아침에 막 들어온 천하의 중대사 얘기였다.

“그 어르신이? 정 잘못이 있다면 우리 장꺽정(장거정) 형일 텐데.”

진서로 썼을 때 저와 이름이 비슷하다고, 그 와중에도 멀리 북경에 있는 장거정을 놀리는 꺽정이였다.

“아마 우리는 알 수 없는 묘한 농간이 가운데서 있었을 것입니다. 당장 그 고공이라는 자도 내각수보 자리를 맡기에는 인망도, 경력도 족하지 못하다고 하니까요.”

“세간에서는 우리 사형께서 축지법에 능공허도(하늘을 걷는 도술)를 한다 하던데, 모르는 사이 그 제자분께서는 천리안도 새로 개안(開眼)하셨나 보군그래.”

“요즘 세상에는 돈만 있으면 천리안까지는 무리여도 백리안(百里眼)은 장만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천하 사정쯤이야, 쓸 만한 소식통이 있고 머리만 적당히 총명하다면 방 안에서도 금방 헤아릴 수 있지요.”

제 집마냥 발라당 누워 있던 이탁오가 한 마디 덧붙였다.

백리안이라는 것은 이제 겨우 인천 한 구석에 저들 살 곳과 일할 곳을 마련한 잉글랜드 공인들이 만들어낼 ‘멀리 보는 대롱’의 제대로 된 명칭이었다. ‘망원경’이니 ‘망원통(望遠桶)’이니 하는 이름은 영 멋이 없고 무엇보다 잘 안 팔릴 것 같다 하여, 서림이 남사고를 시켜 짓게끔 한 이름이었다.

“그나저나 이건 좀 그만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탁오가 은근히 저를 칭찬해주었음을 눈치채지 못한 이이가, 딴소리를 하였다.

그러자 벌떡 일어난 이탁오는, 벌떡 일어나 조선말 대신 어설픈 관화로 외쳤다.

“아아! 음률을 알아주는 이가 없으니 이 얼마나 서글픈가! 거문고 줄을 끊는 수밖에!”

그러면서, 정자 한가운데를 관통하여 절벽까지 이어진 새끼줄을 툭 건드리니, 곧 절벽 아래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다 큰 사내가 질질 짜면서 울고불고하는 것은 보기 좋은 광경도, 듣기 좋은 소리도 아니었던지라, 이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게 싫으면 우리랑 같이 다니지 말고, 도령 좋다는 그 공주님이랑 좀 같이 다니시오.”

쇼 잇시는 그사이에 정말 이이에게 홀라당 빠져버렸는데, 명색이 공주인 자신 앞에서 이토록 목석과 같이 행세하는 이이를 보면 볼수록 더욱 그렇게 되었다. 처음 조선에 내던져졌을 때야 저의 구명하는 것이 급하였으니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만, 임천당 사업도 어느새 제법 안정되고 조선의 풍토에도 익숙해지니 조금씩 마음이 그렇게 물들어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용기를 내어, 꺽정이 본인에게 직접 찾아가 제발 저의 낭군 될 이가 배필 대신 다른 이를 따라다니는 일 없게끔 도와달라 했는데, 꺽정이는 그것을 아주 저다운 방식으로 이루어주고 있던 것이다.

“보다시피 세상은 꽤 험하고, 가까이서 보면 이렇게 못 볼 꼴도 많이 있거든. 그 공주님이 도령을 얼마나 연모하는지 아시오? 저를 이렇게 대한 사람은 도령이 처음이라던데.”

그사이 경치 구경하듯 난간에 기대어, 슬슬 한 발로 새끼줄 건드리며 아래 대롱대롱 매달린 이와 정다운 이야기 나누던 이탁오가 두 사람 말에 끼어들어 이이의 답변을 가로막았다.

“이제 정말로 실토하겠다 합니다.”

“흐흐, 역시 거문고 타는 솜씨로는 천하의 명인이라 할 만하오.”

마치 팔레스트리나와 그의 악공들이 연주한 음률을 들은 임금이, 어떻게든 그와 비슷하게 듣기 좋은 음악을 지어내라며 장악원을 닦달하고 있는 것처럼, 살갗이 다르고 말이 다를지언정 어디서든 통하는 것은 있었다.

“끌어올려줄까요?”

“흠, 글쎄.”

꺽정이가 새끼줄을 붙잡고 조금 당겼다가, 짓궂은 웃음과 함께 별안간 툭 놓았다.

또 한 차례 비명. 그리고 아까보다도 조금 더 진솔한 간청이 들려왔다.

장거정에게 ‘포섭’되어 동창 간자로 조선에 들어온 이탁오였는데, 당장 그 상전인 장거정을 비롯하여 그를 믿지 못하는 이들이 동창 주위에 많았다. 허나 장거정이 꾸미고 있는 대계에 있어 이탁오만큼 유용한 인재도 없었으므로, 반신반의하면서도 그에게 사소한 일 하나를 슬쩍 맡겨 시험해보았다.

물론 이탁오가 조선에 들어오자마자 자수하였으므로 – 약속된 포상금은 서림의 극렬한 반대로 결국 받지 못했지만 – 그 얼마 안 되는 믿음은 바로 배신당하게 되었다. 저쪽에서도 이를 알고 이탁오에게는 정말 최소한의 알아야 할 것만을 알려주었지만, 그 얼마 안 되는 단서도 이이와 이지함, 이탁오 세 사람 앞에서는 마치 사서삼경처럼 훤하고도 방대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에 있는 동창 사람들의 수장격이라는 자와 북경 사이의 연통을 맡는다는 놈이 광주에서 인천으로 가는 것을 중간 양재역(良才驛)에서 붙잡아, 이곳 정자까지 끌고 와 ‘거문고를 타고’ 있던 것이었다.

“저, 정말로 다 불겠습니다! 당수님! 아니, 아버지! 아버지!”

꽤 유창한 조선말로 – 어쩌면 정말로 요동으로 건너가 명나라 백성으로 살던 조선인일지도 몰랐다 – 이탁오의 상전인 임꺽정에게 직접 간청하는 간자였다.

“오냐, 어디 새로 생긴 아들놈 재롱 한 번 보자꾸나. 허나 네놈 이야기보따리 다 풀리기 전까지는 이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할 게다.”

속절없이 아는 바를 다 털어놓는 간자였다.

그리고 녀석이 떠들기를 그칠 무렵, 정자 위의 세 사람 표정은 갈렸다.

“그 뒤의 일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올 겨울 권점은 이긴 것과 진배없겠소, 흐흐.”

꺽정이는 웃고,

“그 뒤의 일이 문제 아닙니까.”

이이는 찡그리고,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외에 다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얼른 돌아가시지요. 여기 이놈은 그냥 풀어주시고요.”

서양에서 볼 꼴 못 볼 꼴 다 보면서 담이 제법 커진 이탁오는 가볍게 말했다.

“아, 고된 이승살이에서 풀어달란 말인가?”

꺽정이가 품에서 칼을 뽑았는데, 이탁오가 하는 말이 조금 더 섬뜩하여 그 즉시 매달린 밀정 놈은 아예 민주당 사람이 되겠노라고 확언하게 되었다.

“아니, 그냥 풀어주시지요. 아직 붙잡아야 할 끄나풀이 몇 놈 더 있는데, 그치들에게는 여기 이놈이 밀고해서 붙잡혔다고 밝혀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명 화북과 강남이 모두 시끄러워지고, 이어서 북경까지 그 소란이 닿는 사이 조선국 민심은 더욱 요동치고 있었다.

임 당수의 유세는 잠시 경주에서 멈췄다가 다시 움직여, 영남을 한바퀴 돈 뒤 섬진강 넘어 전라도로 넘어가고, 이어서 충청도를 관통해 북상하며 수원에서 흩어졌다. 중간중간에 꺽정이가 한양을 몇 번 오가기는 했지만, 그 무렵에는 병해도, 사당패들도 대충 꺽정이 수법을 익혔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중에는, 그 유세가 일으킨 불길이 이곳저곳으로 번지는 바람에 유세길이 막힐 지경이 되었다.

고을 사족 전체의 이름이 걸린 일이라 하여, 노론과 소론, 그리고 어느 쪽에도 들지 않던 양반 집안들이 모두 합심하여 상민들을 모조리 설득한 뒤, 우리 고을의 공론은 우리가 힘 닿는 한 공정하게 모을 터이니 부디 당수께서는 발걸음 삼가달라 청하는 곳도 종종 있었다.

반면 임 당수 오시는 날 결딴을 내겠다며 양반과 상민들 사이에 또 한 차례 향전이 붙어서, 이미 불 붙은 판에 섶까지 던져넣지는 말아달라며 고을 수령이 옆 고을까지 달려와 간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꺽정이와 병해가 삼남을 돌면서 여기저기 불장난한 것은 제법 효험이 좋았다. 이제 어느 쪽으로든, 모든 고을에서 헌법을 두고 갑론을박 벌이게 되었고, 모자란 자들, 어리석은 자들마저도 저들이 뭔가 하기는 해야 한다 여기게 되었으므로.

그렇게 가을로 슬슬 접어들 무렵 한양에 돌아온 꺽정이는, 신씨 집안 체통도 있는데 임 당수가 얼굴 한 번 비춰줘야 하지 않느냐는 장모님 말씀 따라 강릉이나 한 번 다녀올 생각이었다. 가는 길에는 감영 있는 원주를 거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춘천 거쳐서 오면 딱 되겠거려니 싶었다.

헌데 꺽정이가 막 이른 단풍 찾아오는 대관령 넘을 무렵, 북경으로부터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천안문의 변’으로 붙잡힌 서생들은 대부분 며칠 지나지 않아 풀려났고, 개중 죄질 나쁜 몇몇이 유배형을 당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엄명 떨어지기를, 헌법 운운하는 자가 한 번이라도 더 적발될 시 국법의 지엄함을 보이겠노라 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수가 없거나 머릿속에 든 게 없던 이들 몇몇이 본보기로 붙잡혀 극형을 당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천자가 직접 지은 조서가 조선에 내려졌다.

금상 천자가 예법을 무시하고 친히 지은 조서를 조선 한 나라에만 내리는 일이 스무 해 전에도 있었지만, 이처럼 조선 조정의 뜻에 직접 관여하는 조서는 영락 연간 이후 처음이었다.

조서에 이르기를,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가 조(詔)하노라.

짐이 황조(皇祖)의 기업을 물려받아, 중외(中外)를 다스리는 보명(寶命)을 받들었으니 공경하고 삼가며 이어가기를 올해로 서른아홉째 해가 되었느니라.

그러나 근래 부도한 무리가 널리 날뛰어, 사민(士民)이 공히 놀라고 또는 현혹당하니 그 해(害)는 해내(海內)까지 미치고 만성(萬姓)에 닿는다. 그러한 부도 가운데 유독 하나가 있으니, 이르기를 ‘헌법’이라 하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참람함이 여기에서 말미암는다.

아아, 생각건대 짐의 선대이신 태조 고황제(주원장)께서 황조를 개창하시니 그 총명(聰明)은 하늘을 꿰뚫고 신무(神武)는 땅을 아울렀다. 천하로 나아가 소유하신 이래 가르침을 내리시니, 예(禮)와 법(法)으로써 신하를 제어하라 말씀하시었다 (馭臣下以禮法). 대통(大統)을 이어가며 그 가르침에 따르니, 백성이 생긴 이래로 우리 황명보다 번성한 때가 없었고, 천명이 중원에 내린 이래 우리 황명보다 태평한 때가 없었다.

훌륭하시도다! 태조 고황제의 가르침이여! 천지의 도리 중 육유(六諭, 주원장이 내린 여섯 가지 가르침)에서 벗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그 여섯 중 소위 헌법은 어디에도 들지 않으니, 천하의 뭇 왕후(王侯)는 깊게 생각하고 스스로 다스릴지어다! 특히 너희 조선은 곧 우리 천조의 내복(內服, 같은 나라)과 같으니, 같은 하늘을 모시고 살거늘 어찌 그 도리가 둘일 수 있겠느냐? 이에 각별히 너희 해동(海東)에 분부하여 알게 하노라.’

하였다.

헌법 운운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아예 집어치우라는 엄명. 명 태조의 신무(神武)까지 거론하였으니, 그 행간에 은근히 겁박하는 뜻 담겨 있음을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임금조차 바로 이해하였다.

임금은 두려워하며 좌우에 뜻을 물었는데, 임금 본인보다 더 두려움에 가득찬 심통원은 즉시 상국의 말씀 받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언제 저의 발상이라고 우쭐대었냐는 듯 심의겸을 불러 호되게 꾸중하였다.)

허나 나라의 세 당파 중 하나는 임금의 조부가 저의 조카 죽인 천하의 못된 놈이라고 바로 그 임금 앞에서 떠들었던 놈을 당수로 모시고 있고, 다른 하나는 같은 임금에게 애비 없는 놈이요 그 어머니는 과부라고 욕하는 글을 써낸 이가 당의 중진으로 버젓이 있었다.

“신이 그 조서의 뜻을 옮긴 글을 보건대, 그 망극한 은덕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헌법을 둘러싼 사정이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니, 흠례(欠禮, 결례)로 말미암은 것 아니겠습니까? 청컨대 이번 동지사 편으로, 아국이 헌법을 제정하는 까닭과 그 이치, 전후 본말을 상세히 상국에 고하도록 하시옵소서. 그리하면 능히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입니다.”

관찰사 임기를 마치고 막 중추부로 돌아온 이준경의 뜻이었는데, 탕평당 당론도 대체로 이와 같았다. 즉 어디까지나 상국의 ‘오해’라는 것이었다.

그나마 심통원이 조심스레 주장하는 것처럼, 상국이 이리 나오니 아직 때가 아님을 인정하고 헌법 논의를 거두자 하는 말에 찬동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꺽정이와 민주당이, 뜻하지 않게 큰 소득 얻었다며 좋아한 까닭이었다.

꺽정이가 굳이 다시 강릉에서 한양으로 돌아올 필요도 없었다. 붙잡은 간자와 함께 거문고 타며 즐거운 한때를 보낸 이후로 이러한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미리 대책을 세워났으니, 이제 실행만 하면 될 터였다.

조서가 한양에 닿은 지 며칠 되지 않아, 수상쩍게도 기민하게 각 고을의 민주당 사람들이 재조헌법 따르는 노론 선비들에게 찾아갔다.

“근래 아국뿐 아니라 온 천하가 이 헌법의 귀추에 이목 기울이는 듯합니다. 우리 훌륭하신 선생님들께서는어찌하시려는지, 저희 향리들 중 궁금해하는 자들이 몇몇 있기에...”

말이 궁금한 것이지, 여러 전후 맥락을 따져보면 그 뜻은 ‘혹시 겁을 먹으셨습니까?’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선비 체통이 어찌 물러나기를 허하랴.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재조론의 대의에 따랐을 뿐이니, 지금도 그 뜻은 같네. 우리 동방은 작은 나라로 사대(事大)에 힘써왔고, 문헌(文獻)은 능히 대국에 비할 만하지 않은가? 이제 와서 잠시 사소한 오해가 있다는 이유로 뜻을 거둘 수는 없지.”

더구나 재조론의 씨를 뿌린 이언적부터가 죽을 때 죽을지언정 저의 뜻은 굽히지 않을 사람이요, 그 재조론을 따르는 물정 어두운 시골 선비들조차 복궐상소할 때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 즉 ‘죽일 테면 죽여봐라’ – 외치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더구나 금상 황제께서 우리 조선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이미 명명백백하지 않은가? 종계의 변무를 허하여 주셨고, 비록 이 사람은 마땅치 않게 여기지만 어쨌든 우리 조선국 사람인 임 당수에게 칙명을 내려 서방을 주유케 하셨네. 그런 황상께서 어찌 우리 국인들이 보국하는 뜻으로 헌법 세우려는 것을 막으시겠는가? 필시 가운데서 누군가 농간을 부린 것이겠지.”

남이 무어라 하든 저의 갈 길 간다는 외골수 선비 기질이 도진 뒤에야,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이렇게 따라붙었다.

그리고 오복헌법 따르는 백성들이야, ‘그렇다 하여 설마 대국에서 쳐들어오기야 하겠느냐.’, ‘누가 죄를 받더라도 양반님네들이 화를 당하지 어디 우리까지 해가 닿겠느냐’ 하는 마음뿐으로, 그저 대국 사정 신기하다며 떠들 뿐.

개중 정말로 잃을 게 있는 사족들이나, 천성이 겁 많은 이들은 뒤늦게나마 헌법 논의에서 손을 떼겠노라 하였고 – 이 또한 은근히 부추기는 자들이 있었다 – 결국 노론이 다시 갈려버리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꺽정이가 강릉에 닿을 무렵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재조헌법과 오복헌법의 지지 여론은, 재조헌법 쪽 노론을 떠받치던 기둥 한둘이 슬그머니 사라져버리면서 금방 한쪽으로 기울어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가을도 지나고, 어느새 권점이 예정된 겨울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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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에서도 장거정의 일조편법은 향신층의 저항을 맞이하였는데, 이는 기존의 번잡한 세금 제도와 세월이 지나며 허술해진 토지조사를 이용해 지방의 유력자인 향신들이 많은 이익과 혜택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이미 15세기부터 국제교역을 통해 은이 많이 유통되던 강남에서는 지방관들의 재량으로 조세의 은납화가 이루어지고 있던 반면, 화북 지방은 그런 전례가 드물었기에 더욱 저항이 컸지요.

그러나 원 역사에서 만력제의 스승으로서 작중에서보다 더욱 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장거정은 그러한 저항에 대해 회유보다는 정면으로 분쇄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근본이 되는 일(즉 군주의 명령을 받드는 일)을 버리고서 다른 분야의 학문을 따로 이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未有舍其本事, 而別問一門以爲學者也)”(‘答南司成屠平石論爲學’, 『張太嶽文集』 卷二十九)고 주장하였던 장거정은, 일조편법에 대한 반대를 비롯해 국가정책에 반하는 모든 사대부의 담론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했고, 개인이 서원을 세우는 것을 불허하고 유생들이 ‘이단적인’ (즉 국가가 공인한 성리학 바깥의 모든 논변) 사설을 내놓거나 정치를 논하는 것을 엄금했습니다.

이로 인해 쌓인 원한은 장거정 사후 엄청난 역풍이 불어오는 결과로 이어졌고, 어린 만력제로 하여금 정치에 환멸을 느끼게 해 30여 년간의 태업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쌓게 하는 나비효과도 일으킵니다. 그러나 장거정은 그 완고함과 권력욕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명나라가 오랜만에 맞이한 유능한 재상이었고, 환관 위충현 등의 발호로 다시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른 뒤에야 조금씩 장거정의 재평가도 이루어지게 되지요.

한편 일조편법은 곧 ‘일조(一條, 한 가지)’편법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새로운 잡세가 덕지덕지 붙는 결과로 이어졌고, 만력제의 태업으로 인해 명 조정은 이를 제때 수정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인구폭발에 따른 압력 해소를 위해 세워진 일조편법 등의 각종 조치는 오히려 민생을 더욱 옭아매게 되었고, 17세기 초에 접어들면 이전의 해소되지 않은 모순과 새로 생긴 모순이 결합되어 폭발적인 농민봉기로 이어지게 됩니다.

풍보는 『명사(明史)』에 이름을 남긴 환관 중 보기 드물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환관으로, 원 역사에서는 장거정이 집권한 뒤에 병필태감에서 동창제독으로 영전합니다. 서계를 쳐낸 고공을 다시 장거정이 쳐내는 과정에서 그와 손을 잡은 풍보는, 어린 만력제를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리는 대신 장거정과 함께 개혁정국을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만력제의 미움을 사기는 했지만 대신 사대부와 백성 사이에서 인망을 얻었습니다. 장거정이 사망한 뒤 풍보 역시 실각하여 남경으로 추방되었지만, 그간 적당히 축재한 재산 덕에 만력 말년까지 천수를 누리며 편안히 살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있는 효사정은 본디 세종 초의 문신 노한(盧閈)이 모친의 시묘살이를 하던 곳에 세운 정자였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조선 초의 많은 학자들이 찾아 시문을 남겼으나 성종 연간에 헐렸고, 일제강점기에 신사가 세워졌다가 1993년 복원되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정자의 현판은 노한의 17대손(盧泰愚)이 쓴 것입니다.

작중 언급된 육유란 주원장이 유교적 질서에 입각하여 남긴 일종의 도덕규범입니다. 그는 주민 통제를 위해 세운 이갑제(里甲制)를 도입하며 생긴 말단 행정단위인 리(里)마다 이 육유를 가르치고 권장하는 이노인(里老人)을 두도록 한 바 있습니다. 이는 곧 군주의 가르침이 유학의 예법을 갈음하여 직접 향촌사회의 지배규범으로 자리잡도록 만들겠다는 의도로, 후에 성리학 자체를 관제화하려 시도했던 영락제에 의해 계승됩니다.

이전에 꺽정이의 칙서 조작 에피소드에서 작가의 말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조서는 칙서와 달리 천조 중화제국으로서 반포하는 보편적 메시지에 가까웠습니다. 그 내용 역시 세세한 실무나 일개 제후국의 사정에 관한 것이 아니라, 황제의 즉위나 황태자의 책봉 같은 보다 ‘보편적’인 내용만을 담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이었고, 황제가 제멋대로 글을 써서 조서로 내릴 경우 이를 막을 수는 없었지요. 당장 명태조 주원장이나 영락제 주체 등이 이렇게 ‘친히 작성한 조서’를 종종 내렸고 – 주원장은 글을 늦게 배웠기에 글재주가 딱히 없어, 받아보는 이들을 종종 곤혹스럽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 1537년에는 가정제도 아무런 이유 없이 친히 지은 조서를 조선에 내려 중종과 뭇 신료들을 당황케 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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