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84화 (184/259)

54. 원형이정 (2)

잘 끝나가던 권점의 논의에 임금이 느닷없이 어깃장 놓기 한참 전, 그러니까 꺽정이가 흑의군 이끌고 광주 산장을 급습했다가 영 재미 못 보고 돌아온 뒤의 일이었다.

“왜 또 접니까?”

이이가 대뜸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아니, 우리가 어디 하루이틀 보는 사이도 아니고, 무리 당(黨)으로 치면 같은 당이요 집 당(堂)으로 치면 옆집 사는데 너무한 것 아니냐?”

찾아오자마자 한숨으로 맞이하는 근본 없는 예법에, 꺽정이 입도 불쑥 튀어나왔다.

“제가 뭔가 훌륭한 발상을 떠올릴 때면 이렇게 난입하여 훼방을 놓으니 한숨이 아니 나올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어떤 제자가 저의 스승에게 일을 떠넘기느냐?”

요새 부쩍 저를 따라다니는 상씨를 피해, 간만에 서양에서 새로 들여온 책이나 조금 읽을까 했는데, 서안 위에 검손이 그 요물단지가 떡하니 앉아 있었던 것부터 화근이었다.

저의 무엇이 그리 좋은지, 야옹대며 그 검은 털을 여기저기 묻히며 다녔는데, 암만 쫓아내려 해도 피하기만 할 뿐 어느새 또 옆으로 다가와 얼쩡대곤 하였다.

그렇게 한 각(15분)쯤 지났을까. 도저히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녀석이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도망가더니, 곧 그 누구도 다섯살배기로 보지는 않을 바우가 저의 외삼촌 방에 어기적 걸어들어와서는 고양이 어디 갔느냐 물었다.

생긴 건 아비 빼닮은 녀석이 말투는 어머니 닮아 자못 귀여웠기에, 이이는 (스스로 생각하기엔)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만큼 쉽게 검손이 위치를 알려주었다.

“들어보십쇼. 이렇게 두 선을 십자로 긋고, 각 선에 눈금을 그리는 겁니다. 여기 가운데가 지금 우리 있는 곳이라 치고, 대충 기둥과 기둥 사이를 일간(一間)으로 잡은 뒤 검손이 있는 곳을 도식하면, 그러니까 북삼(北三), 서사(西四) 지점의 기둥을 타고 검손이가 지붕으로 올라갔다. 이렇게 설명을 했는데, 그 뒤에 골똘이 생각해보니 이 방식으로 다른 산법(算法) 문제를 다룰 수도 있겠다 싶어서...”

꺽정이도 이해 못하는 이야기를 바우가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리하여 녀석은 대충 알겠다고 고개만 끄덕인 뒤, 세상에서 제일 힘 세고 또 무슨 일이든 척척 해결해주는 사람인 아버지 찾아 쫄래쫄래 나갔다.

때마침 이이를 찾던 꺽정이는, 아들 이야기를 듣고 곧장 그쪽으로 향했고, 그 결과 이렇게 임 당수와 독대하게 되었다. 검은 고양이는 흉조라는 서방 사람들의 지혜에 일리가 있다 할 만하였다.

“지금 그게 중하냐?”

“두리손 그자의 제안에 대한 이야기라면, 몇 번을 이야기해도 결론이 나지 않으니 지금으로서는 하나마나지요. 언쟁에 귀한 시일 허비하느니, 뭔가 더 유용한 다른 궁리에 마음을 쓰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광주에서 다녀온 꺽정이는, 죽고 다친 이들을 수습하자마자 중진들을 모조리 불러모아 머리를 맞대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처럼 쉽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헌법 권점이 다가오면서, 각지 군현의 민주당 아전들이 처리해야 할 일은 늘어나고 있었고, 그만큼 실무를 맡고 있는 이지함과 서림 역시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처음부터 두리손을 죽이거나 어디 먼 곳으로 쫓아내지 않고 조선 땅에 남겨놓았던 것이, 바로 장차 그들이 바라는 나라 세워나가는 것을 가로막을 만한 자들을 한데 묶어 치워버리기 위함 아니었던가.

그런 치들에게 빠져나갈 길 만들어달라는 두리손의 요청은 받아들이기도 난망하거니와, 설령 받아들인다 치더라도 어찌 그것을 이룰지도 묘연하였다.

‘그자가 벌이려는 일은 곧 역모나 다름없다. 그자의 거사가 실패하게 되면, 자연스레 그에게 동조하던 이들은 입을 닫게 될 터. 다만 그 제안은... 실(失)만큼이나 득(得)도 명백하니 여간 고심스럽지 않구나.’

두리손을 믿을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저쪽에서 어떤 더러운 술수를 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무력으로 맞붙겠다 나서게끔 하는 것은 분명 득(得)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지금껏 추진해온 대계가 완수되지 못한다면 이는 명백한 실(失).

‘저는 이러한 일에 대해서는 식견이 짧습니다만, 이제 대계의 성사가 얼마 남지 않은 듯한데 이제 와서 계책을 바꾼다는 것은 썩 이롭지 못하지 않은가, 그리 생각합니다.’

이지함과 서림 두 사람이 앞장서서 반대하였다. 탕평당과 달리, 재조론 따르는 이들은 공회를 비롯해 꺽정이 패거리가 세운 모든 제도에 반대하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이것이 국인 대다수의 뜻이라 밝히고 그 사사건건 반대하는 입을 막기 위해 헌법의 권점을 떠올려 오늘에 이르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이대로 밀어붙이기만 해도, 이지함의 형 지번이나 이언적처럼 순수하게 저의 신념 따라 재조론을 지지하는 이들이라면 모를까, 그저 세상 변하는 것이 못마땅하여 노론에 가담한 이들은 알아서 고개를 숙이게 될 것이었다.

애초에 오활하고 꽉 막힌 선비들을 싫어하는 이탁오의 생각은 더 물을 것도 없었다. 그들이 동참하지 않으면 모조리 죽이려 한 것도, 또 반대편에서 이쪽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벽을 세운 것도 아닌데 그저 저쪽에 콕 머리 박고 있는 자들까지 챙겨줄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두리손 그놈 하자는 대로 해주고 싶단 말이지.

가장 좋은 길은, 역시 우리네 뜻대로 헌법도 세우고, 반대하는 자들은 앞길에서 치우되 양달에 자리 한 곳쯤은 마련해주는 것이겠지. 그런데 그런 길은 딱히 안 떠오르고, 다른 사람들은 권점 때문에 바쁘니, 머리 좋은 우리 처갓집 도련님을 쥐어짜는 수밖에.”

“당수님 벗인 탁오 그이도 있지 않습니까.”

“거 좋은 생각이다. 그놈도 잡아와서 함께 쥐어짜야겠다. 찾아서 이리 데려오려무나.”

“싫습니다. 당수님 벗인데 당수가 잡아와야죠.”

이탁오는 사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이와 죽이 잘 맞았고, 서양 다녀온 뒤로는 더욱 더불어 말할 거리가 늘어났다. (단 하나, 남녀간의 정분에 대한 이야기에 있어서는, 꺽정이처럼 이탁오도 이이를 뭔가 안타깝고도 한심한 눈으로 보곤 했는데, 누이동생과 금슬 좋은 꺽정이라면 모를까 ‘리즈’를 수에즈에 두고 온 이탁오로부터 그런 눈길 받는 것은 어째 억울하였다.)

허나 바우와 검손이 덕에 찾아온 기발한 발상을 얼른 어디에 적어 정리하고 싶은 마음뿐인 이이는 한사코 반대하였다. 이탁오는 이이의 벗인만큼이나 꺽정이의 벗이기도 했고, 그만큼 제멋대로 여기저기 쏘다니곤 하였던 것이다.

“내 벗이지만 네 벗이기도 하지 않으냐.”

“그러면 수세령(手勢令, 가위바위보)으로 결착을 내십시다.”

몇 년 전 투전과 더불어 명에서 조선으로 넘어온 놀이 중 하나가 수세령이었는데, 이이는 틈날 때 여기에서 반드시 이기는 전략을 궁리하기도 했기에 제법 익숙하였다.

“좋다. 지면 군말 없이 갔다오기다.”

꺽정이가 소매 걷어붙이며 말했다.

허나 꺽정이가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이이가 여러 날에 걸쳐 그 눈썰미로 수세령 필승 전략을 궁구한바, 그러한 계책은 따로 없지만 사람마다 자주 내곤 하는 것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다는 결론을 얻었다는 사실이었다.

예컨대 꺽정이는 항상 개구리(오늘날의 보자기에 해당)를 먼저 내는 버릇이 있었다.

“엥? 뱀?”

“흐흐, 제가 이겼습니다.”

뱀(오늘날의 가위에 해당)을 낸 이이가 단판에 싱겁게 이겨버리니, 꺽정이가 못내 아쉬워 군소리를 했다.

“그, 내가 내 입으로 군말 없이 갔다오기라고 하긴 했지만... 사내 대장부끼리 붙어서 삼세판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머리 긁적이며 꺽정이가 영 구차한 소리를 하는데, 이이는 비꼬는 대신 꺽정이 주먹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아닌가.

“그거다!”

“뭐가?”

“우리의 일망타진 대계를 어그러뜨리지 않으면서 두리손 그자의 제안을 받아들일 방책 말입니다.”

“이거? 수세령?”

“얼른 가서 탁오 그이나 찾아오십시오. 오늘 해가 떨어지기 전에 뭔가 뾰족한 수를 마련해드릴 테니까요.”

그리하여 술자리 손장난이 나라의 대계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스무날 가량이 지나, 근정전에서 권점의 결과 읽는 이준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것을 가로막은 임금은, 경악한 대소 신료들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말을 이었다.

“천도(天道)의 원형이정(元亨利貞)은 곧 상도(常道)이니, 변하지 않음에 있어서는 인도(人道) 중의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고 변함에 있어서는 계절이 그치지 않고 흘러 바뀌는 것과 같다.

생각건대, 헌법이란 곧 군부(君父)와 신자(臣子) 모두를 아우를 금세의 홍범이다. 허나 기자가 계고(戒告)하기를, 홍범이 갖추어지고 거두어짐은 곧 하늘의 뜻에 달린 것이라 하였다. 어찌 이 헌법이 지금 나라의 공론으로 올라왔다 하여 함부로 어정(御定)하겠느냐?

경들은 깊게 헤아려, 국인들이 공론을 모아 내게 청한 유학 이지함의 안을 고치게 하여 다시 올릴지어다.”

꺽정이가 노론의 불만 품은 사족들까지 아우를 방책을 들고 찾아왔기에 그저 절묘하다 여기기만 할 뿐, 그 방책이 어디서 연유했는지는 알지 못하는 이준경은 짐짓 고개를 숙였다.

“신 등이 계책을 세움에 치밀하지 못하여, 자칫 성려(聖慮)를 번거롭게 하였으니 결코 작은 잘못이 아닙니다. 가르침을 내려주시옵소서.”

그제야 돌아가는 사정을 조금은 눈치 챈 이들이 재빨리 선창하였다.

“하교하여 주시옵소서!”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하기로 하였는지 깜빡한 임금은,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흐른 뒤 다시 옥음을 내렸다.

“무릇 사람의 법은 천도(天道)와 같지 않아서, 한때 명안으로 여겨진 것이 후대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악법으로 밝혀지기도 하고, 처음에는 경제(經濟)의 훌륭한 법도였으나 나중에는 폐단의 극치로 전락하기도 한다.

국인들이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뜻으로 국론을 양갈래로 모아, 그 크고 작음을 견주었는데, 그렇게 세워진 헌법이 훗날 오히려 이륜(彛倫, 인륜)을 해치는 근원이 된다면 이 얼마나 원통하고 안타깝겠느냐? 그러므로 생각건대, 헌법을 때에 따라 고칠 수 있도록 그 법에 명시함이 마땅하겠다.”

“그러나 이번과 같은 권점은 전국 삼백삼십여 군현의 여론을 모두 모으는 것이니, 그 절차가 번잡하고 수령과 이서(吏胥), 그리고 사민(士民)을 모두 번거롭게 합니다. 폐단을 미리 막고자 하시는 그 뜻은 참으로 훌륭하오나, 감히 아뢰옵건대 다른 방도를 구함이 상책일 것입니다.”

“이미 공회를 두어 전국의 여론을 모으고 있지 않으냐? 이지함이 올린 헌법의 안을 어정함에 있어, 군왕(君王)에게 헌법 고칠 것을 공회에서 건백(建白, 건의)할 수 있도록 함이 가당할 것이다.

또한 내가 알기로, 아직 각지 향회에서 사람을 뽑아 공회로 올리는 법도가 정해지지 않아, 간혹 뜻 펴기를 원하는 사족들이나 억울함 있는 여항의 백성들이 의혹을 품는다 하였다.

무릇 원형이정의 이치란, 음양 두 기운이 형통(亨通)하여 사물의 본성이 화해(和諧, 조화로움)케 하는 데 그 근본이 있다. 그러니 공회 또한 때에 따라 바뀌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하면 이번 헌법의 권점이나 그 전후의 국사에 원통함 품은 이들도, 능히 때를 기다려 사람을 모으고, 널리 그 뜻을 펼쳐 무리를 모아 마침내 양책(良策)을 바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누가 임금의 이 말을 들으며, 삼세판을 하자 조르던 꺽정이로부터 계책 말미암았음을 짐작할 수 있으랴.

허나 그 원리는 똑같았다. 끝내 오복헌법에 국론이 모여 좌절하게 된 이들도, 그저 나라를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던 옛날로 돌아가는 대신, 다음 번은 다를 것이니 두고 보자면서 후일을 기약하고, 그들이 한때 경멸해 마지않던 공회며 무엇이며 하는 제도에 새로운 희망 품고 동참하게 될 터였으므로.

올해 권점에서는 결국 때를 얻지 못하여 패배하였지만, 재조론 또한 그 지지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시류에 재빨리 올라탄 이들도 탕평당을 만들어 공회에서 헛기침을 하곤 하는데, 그들 노론이라고 못할 것은 무엇이랴?

다는 아니어도, 충분히 많은 향반들은 임금의 이 말을 전해들으면 성은에 감격해하며 속으로 그렇게들 여길 것이다. 그들이 한때 근왕(勤王)을 기치로 내걸며 일어났기에, 밝으신 임금께서도 그들에게 재차 기회를 내려주셨노라 말하면서.

“성상의 헤아리심이 지극히 이치에 맞으니, 실로 종사의 홍복이옵나이다. 마땅히 유사(有司)와 공회에 전교하신 바를 전하여, 그 뜻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마침내 임금이 종묘에 제사를 올리며 함께 헌법을 세운 까닭을 고유(告由)하고, 대조선국 어정헌법(御定憲法)을 해내외(海內外)에 공표하니, 이때가 경신년(1560) 춘정월(春正月, 1월)이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기묘한 서신 한 통이 사업당 앞에 당도하였다.

이전의 약속을 되새기고자 하니, 오 년 전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는 문장 달랑 한 줄이 쓰여 있었다.

오 년 전 그곳이란, 보나마나 꺽정이가 두리손과 대면하였던 수락산의 옛 윤원형네 산장일 터.

헌법의 제정을 축하라도 하듯 함박눈이 내려 산길을 그대로 덮었으나, 평범한 길손도 아니요 명색이 뿌리가 산적인 꺽정이와 그 패거리에게는 별반 어려울 것도 없었다.

“아직도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것이 제법 왁자하구려.”

이제는 불야성(不夜城)이라고도 슬슬 불리게 된 한양. 그곳의 소리가 수락산 중턱까지 전해질 리는 만무하였으나, 멀리 간간이 보이는 불빛은 저자의 모습을 짐작케 하였다.

임금이 금군을 도성에 푼 이래로 한양 한 곳은 더 이상 인정(人定)을 치지 않게 되었으니, 밤에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사고도 일으키고 해야 저들 벌이가 더 좋아지는 금군들이 역시 사람이 많이 쏘다닐수록 좋은 상인들과 손을 잡고, 그들로 하여금 공회 통하여 탄원케 한 덕이었다.

“아무래도 오복헌법 덕에 다들 저의 벌이를 지키게 되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 헌법에 담긴 이치를 모두 안다고는 자부 못하겠소. 저들이라고 알겠소?”

“사람이 술 먹고 떠드는 데 무슨 깊은 학식까지 필요하겠느냐? 그냥 핑계만 있으면 족하지.”

하얀 눈에 둘러싸인 산장. 멀리 보이는 한양의 불빛 – 오 년 전에 비하면 제법 성 바깥까지 퍼져나와 있었다 – 까지. 제법 푸근한 모습이지만, 겨울철 산속의 날씨는 모습과 달리 냉랭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 이 어정헌법이 공포되었으니, 네놈들 쪽은 난리깨나 났겠구나.”

“말씀대로요. 헌법 권점이 이렇게 끝났다는 것을 못 받아들이고 다시 우리네 편으로 완전히 돌아설 줄 알았던 향반들이, 성은에 감읍하며 사 년 뒤를 기약하자 하였으니 알고서든 모르고서든 우리 곁을 떠나게 되지 않았소이까.

그 덕에, 우리는 설령 거사 성공하더라도 임 당수가 만들어낸 이 괴상한 제도들을 다 뜯어고칠 수는 없게 되었소. 기껏 나라의 전권을 장악했는데 팔도 각지에서 반란 일어나는 꼴은 볼 수 없지 않겠소.”

“그렇다면 네가 약조하였던 것은 이미 이루어진 셈이다. 나는 네 말대로 해주었는데, 네가 내게 줄 것은 이미 갖추어졌으니, 값을 따로 치루어야 하지 않겠느냐?”

“물론이오. 나는 임 당수만큼 뻔뻔하지는 않아서. 천출 얼자에 사람 죽이기를 예사로 하는 놈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명문가의 자제인데 도적놈 심보는 못 부릴 일이오.”

눈에 비친 달빛에 드러난 두리손의 모습은, 어째 후련해 보였다.

“자, 받으시오.”

두리손이 소매에서 책 두 권을 꺼내 건네주었다. 꺽정이가 곁에 횃불 든 놈을 불러와 살피니, 하나는 생살부(生殺簿)라 적혀 있고 다른 하나는 겉에 아무것도 써 있지 않았다.

“이 생살부라는 것은 필적을 보아하니 남치근이가 쓴 것이구만.”

“잘 아시는구려.”

“여러 모로 그 작자와는 연이 깊어서.”

“나라의 장수와 군관들 중 남치근 그자에게 포섭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나누어 적어둔 것이오. 거기 생(生)으로 적힌 자들은 곧 남치근의 말에 혹해 거사에 동참하기로 한 이들이고, 살(殺)로 적힌 군관들은 곧 남치근의 제의를 받고서도 거절한 놈들이외다. 개중 몇몇은 어쩔 수 없이 내가 미리 죽였지만 개중 숨 붙인 채 한직에 있는 자들도 꽤 있소.”

얼추 흩어보면, 이번 거사에서 두리손이 어느 곳 군사를 동원하려 하는지 뻔히 드러날 터. 그것을 이렇게 흔쾌히 내준다는 것은, 곧 남의 손으로든 스스로든 도저히 거사를 멈출 수 없을 만큼 계획이 진전되었음을 뜻하였다.

과연 꺽정이가 슬쩍 살펴만 보아도, 생(生)으로 되어 있는 자들 중 꽤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살기로 된 자들 중 몇몇은 또 거사 직전에 내가 죽일 것이오. 저들 욕심에 눈이 멀어, 내 말은커녕 남치근 말도 안 들을 놈들이거든. 그리고 나머지는... 거사 끝난 뒤에도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임 당수 그대가 이긴다면 군문(軍門)에 남겨둘 수는 없겠지.”

“제법이구나. 남치근이 수완만으로는 이만큼 모으지 못했을 텐데.”

“내 공도 컸지. 허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임 당수 그대의 공이 가장 컸소. 내가 임 당수 그대에게 쓰임을 당했듯, 나도 임 당수 덕을 제법 보았소.

만약 흑의군이 그토록 정예하지 않았더라면, 사업당이 그토록 큰 배로 바다 전체를 누비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에스파냐니 포르투갈이니 하는 지구 반대편 강병(强兵)까지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저만큼 많은 이들을 모을 수 없었을 게요.”

이리와 승냥이처럼 탐욕스러운 자들. 그들을 겨우 하나로 묶어낼 수 있던 것은, 그만큼 그들이 대적(大敵) 상대하고 있음을 모두에게 상기시켰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전히 몇몇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지만, 거사가 이루어지게 되면 그들은 영원히 정신을 차리지 않아도 무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만큼 끌어모았으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더는 멈출 수 없게 되었겠지.”

“그 또한 맞는 말씀이시오. 아무리 잘 엮어내었다 한들, 그저 머릿수만 많은 무리요. 목표가 없다면 저의 무게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 흙더미와 같소. 그나마 그 흙더미를 지탱해줄 만한 벽도, 이번에 임 당수 그대가 헐어버린 셈이오. 벽은 훗날 다시 세워질 테니 후회는 없지만.”

심지어 그 흙더미의 절반 남짓. 지금까지 두리손이 모아오고 길러온 향반의 여론은 어정헌법으로 인해 두리손의 손을 떠났다. 거사가 성공한 뒤라면 모를까, 거사가 막 이루어지는 중에는 그들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이다.

허나 이제 그들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은 지경까지 왔다. 힘과 힘의 싸움에 어찌 말이 더 필요할까.

“허나 흙더미가 무너질 때면, 민가의 담장 정도는 능히 무너뜨릴 수 있소. 방심은 아니 하는 게 좋을 게요. 아니, 내게는 임 당수 그대가 방심하는 쪽이 더 좋을지도.”

“이놈이 허파에 바람이 들었나, 이제는 농지거리도 제법 던지는구나.”

이번에는 꺽정이 쪽 대꾸에 약간이나마 허세가 묻어 있었다. 그만큼 두리손이 끌어모은 관군은 꺽정이의 예상을 한참 상회하였다. 물론 도저히 당해낼 방도가 보이지 않을 만큼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나저나 이 두 번째 책은 무엇이냐?”

“그 생살부에 이름 올린 자들을 쳐낸 뒤에는, 누군가 다른 이로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하지 않겠소?”

꺽정이가 펼쳐보니, 남치근의 생살부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이름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내 아비에게 인정을 능히 바칠 만한 자리에 있음에도 바치지 않은 자들의 명단이오. 용케도 지난날 한양을불바다로 만들었을 때 무사히 남아서 내 손에 들어왔지. 개중 정말 쓸만한 자들은, 더욱 괘씸하다 여겼는지 내 아비가 따로 이름 옆에 표식을 해두었더이다.”

이번 싸움이 끝난 뒤에는, 몇 년이나 유예가 주어질 지 알 수 없으나 결국 명나라 장거정과 한판 싸움을 또 벌여야 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함에 있어 두 명단 모두 큰 도움이 될 터.

“고맙구나.”

“내 청을 들어주었으니 보답할 뿐이오. 오히려 내가 고맙다 해야겠지. 솔직히 말하면, 그대가 내 청을 받아들일지 확신은 못하고 있었소이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쳐내고 짓이기는 것으로 정평 난 임 당수 그대가, 나와 내 일파를 일망타진하겠노라 밝히지 않았소이까.”

“일망타진은 맞지. 이 일이 끝나면 조선에서 그 누구도 우리 당이 세울 질서 자체를 뒤흔들려 하지는 않을 테니까. 당장 너조차 인정하지 않았느냐. 거사가 설령 성사되더라도 후환이 두려워 제도를 모두 옛날로 돌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네놈들이 만에 하나 뜻대로 싸움에 이기더라도 그럴 텐데, 내가 네놈들을 무너뜨린 뒤에는 오죽하겠느냐?”

“그 말씀 듣고 보니, 이번에도 임 당수 좋은 일만 시켜준 것 같구려.”

두리손이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 나누는 이 대화가, 그들이 그나마 가까이서 나누는 마지막 이야기가 될 것임을, 다음에 만날 때는 둘 중 하나는 창살 뒤에서 차꼬를 차고 있든, 눈 뜬 채 거적을 뒤집어쓰고 있든 할 것임을 알았으므로, 꺽정이는 비웃는 대신 머릿속을 뒤져 한 타래 이야기를 꺼냈다.

“어쩌면 그것이 천하의 이치일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새 성리지학(性理之學)을 익히셨소? 하긴, 화담 선생 제자긴 했지.”

“네놈 따르던 선비들 빠져나올 구멍 마련해주면서, 율곡 선생 그 녀석이 그런 말을 하더구나.

정(正)이 있으면 반(反)이 생기기 마련이라고. 그저 반정(反正)으로써 거슬리는 것을 지워 없애고 처음으로 돌아가버리면 달라지는 것이 없으나, 크게 형통하여 바르고 곧은 이로움(元亨利貞)을 취한다면 비로소 정과 반이 통하여 더 나은 무언가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 말하더구나.”

비아냥도, 비웃음도 돌아오지 않고, 그저 사색 가득한 침묵뿐. 어느새 다시 내리는 함박눈이 미리 내려온 동무들과 상봉하는 은근한 소리만 울렸다.

“더 나은 무언가라. 사서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을 권신의 얼자가 그것을 이루는 데 일조하였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겠지.”

따지고 보면 그러하였다. 임꺽정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원망과 집착에만 가득 차 세상을 망가뜨리던 그때, 그저 저의 입신양명을 위해 조선을 장작으로 삼으려던 그때와는 비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임꺽정을 대면하면서도 이렇게 마음 한 구석에 당당함을 품을 수 있게 되었으니, 자신에게는 임꺽정이 곧 저를 키워준 반(反) 아니겠는가.

“자, 그러면 또 다른 천하의 이치를 조선 땅에서 드러내 보이십시다. 이제 또 한 차례 나라의 법도를 두고 싸움이 벌어질 것이니 이 또한 계절이 한 바퀴 돈 것과 같지 않겠소.”

“그래, 마지막으로 한 판, 시원하게 붙어보자꾸나.”

“고맙소.”

그 하직인사를 끝으로 두리손은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 향하는 길 어디인지, 꺽정이의 밝은 밤눈은 능히 쫓을 수 있었으나, 그럴 마음 동하지 않았다. 그저 수락산 올라온 그 길, 펑펑 내리는 함박눈으로 발걸음 지워지는 그 길을 따라 내려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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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좌표계는 17세기 초중반 르네 데카르트가 창안하였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로는 데카르트 이전 및 당대의 다른 수학자들도 비슷한 발상을 하곤 했습니다. 부족한 여백 탓에 후대의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한 것으로 유명한 페르마나, 그보다 한참 이전 사람인 니콜라스 오렘(Nicolas Oresme) 등이 그 예시가 될 수 있겠습니다. 이미 유클리드 기하학이 원 역사보다 한참 이르게 들어온 작중 조선에서 비슷한 발상이 나타나는 것도 불가한 일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가위바위보의 역사는 의외로 그리 오래되지 않아, 16세기에야 명의 술자리 놀이로 기록에 등장합니다. 기본적인 규칙은 오늘날과 동일했으나, 손 모양은 조금 달랐고, 가위-바위-보 대신 뱀-지네-개구리가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17세기에 일본으로 넘어가 ‘나가사키 권(拳)’ 또는 ‘무시켄(虫拳)’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기본 규칙을 유지한 채 손 모양 및 명칭만 달라지며 지역마다 여러 형태로 나뉘어 전승됩니다. 흔히 ‘짱깸뽀’로 알려진 가위바위보 모양의 ‘잔켄(じゃんけん)’은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그러한 경쟁의 최종 승자로 올라섰고, 조선과 서양 등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주역』의 64괘 중 가장 앞에 있는 건괘의 괘사(卦辭)인 원형이정은, 보통 각각 인의예지(仁義禮智)에 상응하는 자연의 네 가지 덕(德)이자, 음양이 순환하며 만물을 형통하게 한다는 전근대 동아시아 우주관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론 세부적인 해석은 학자마다 크게 달랐는데, 예컨대 『주역정의』를 쓴 공영달(孔穎達)이나 의리역학의 거두 정이천은 원형이정이 각각 별개의 덕을 표상한다고 본 반면, 정이천의 제자이기도 한 주희는 이를 ‘원형’과 ‘이정’으로 나누어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작중 명종과 여타 인물들의 입을 빌어 언급되는 원형이정의 이치는 이러한 여러 설에서 각각 따왔습니다. (말미에 언급된 변증법적 사유는, 이이가 원 역사 이상으로 기이한 학설을 많이 내는 과정에서 제멋대로 떠올린 것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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