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85화 (185/259)

外. 바람 늙은이

붓이 먹물을 머금고, 종이 위를 훑는다.

‘가정 39년(1559) 정월 십칠일. 전 동지중추부사 주세붕이 졸(卒)하였다.

세붕은 영남 사람으로, 마음가짐이 너그럽고 온화하였으며 어진 이와 선한 일을 좋아하였다. 선현(先賢)의 좋은 글을 매양같이 창이나 벽에 붙여두고 끊임없이 외웠으며, 집안의 제례(祭禮)는 지극히 효성스러우면서도 한결같이 주문공(周文公)의 가례(家禮)로 법을 삼았다.

또한 오로지 풍속의 교화에 힘써 효제(孝悌)와 농상(農桑)을 가르치고 사대부부터 서인(庶人)까지 그 집안을 가리지 않고 배우고자 하는 자는 배우도록 하였다. 출사하여 수령방백의 직을 맡을 때에는 서원을 세우고, 물러나 야인이 되었을 때는 학당을 세우니, 세붕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도리와 생업의 재주를 배운 백성은 그 수를 셀 수 없었다.

그러나 당초 옥당(玉堂)에 들 때는 허자(許磁)와 남곤(南袞)의 천거를 받았고, 을사년의 권간(權奸)들에 대해서는 굽신거리며 두려워하였으며, 황해도 관찰사로 있은 뒤로는 임거정의 무리와 결탁하였다. 식견 있는 이들이 이를 비루하게 여겼으나, 세붕은 개의치 않았는데, 특히 말년에 학당을 세운 뒤부터는 오로지 그곳에 마음을 쏟아 더욱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이때에 이르러 자신이 세운 삼락서원에서 자는 듯 졸하였는데, 상이 듣고서 크게 애도하며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하고, 또한 그 널을 호송토록 하였다. 그러나 경기 일원에서 학당의 은덕을 입은 백성들이 길을 막다시피 하여 성지(聖旨)를 모두 받들지 못하였은즉, 실로 기이한 일이다.’

“오늘이 지나면 또 언제 이렇게 만날까 싶소.”

“조선 팔도가 넓으면 얼마나 넓다고 다시 만날 날을 걱정하시는가?”

올해로 나이 열아홉인 류성룡과 스물두 살 이산해가, 한양의 한 조촐한 다점에서 찻사발을 기울였다. 이제는 제법 어른 티도 나고, 주변에서도 나름대로 어른 대접은 해주며, 말투와 행동거지 모두 어른답게 꾸미려 노력하지만 딱 그뿐일 나이.

그러나 머릿속 품은 꿈과 그 꿈 이룰 재간은 중추부의 여느 고관 못지않다 자부하였다.

그리고 그들 자신 외에 그 재간과 꿈을 알아주던 큰 어르신, 그들의 스승 주세붕을 이승에서는 더 이상 뵙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두 사람은 다시금 숙연히 찻사발을 바라보았다.

신재 선생 주세붕의 상을 당하여 삼락서원은 올 가을까지 문을 닫게 되었다. 본디 그가 세운 학제에 따르면, 군현의 학당은 모내기철과 가을걷이철을 피해 일 년에 두 번 휴과(休課, 방학)를 하고, 그것을 기준삼아 여름과 겨울의 두 과기(課期, 학기)를 두고 있었으므로, 가을걷이 끝난 뒤에야 서원 문은 다시 열릴 터였다.

이처럼 다시 만날 날이 언제일지 분명 기약 있건만, 어찌하여 두 젊은이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가?

주세붕이 졸하기 며칠 전, 몸살감기로 심하게 앓다가 겨우 회복하였을 때의 일이었다.

삼락서원의 수재라 하면, 류성룡과 이산해가 있고, 또 저들의 학우보다 부족한 만큼 노력으로 벌충하는 성혼과 정인홍이 있으며, 그 지재와 괴팍함이 모두 특출난 정여립이 있었다. 그들을 모두 불러모은 뒤, 평소 보기 어려운 진지하고도 결연한 낯빛 지은 채 주세붕은 당부하였다.

‘내가 이제 너희에게 이야기해주려는 것을, 다른 데 가서 떠들지 말거라. 아는 이들은 다 알고, 모르는 이들은 아직 모르는 쪽이 나은 그런 이야기니.’

그러면서, 자신이 탕평당과 민주당, 그리고 심의겸에게 동시에 전해들은, 장차 한양에서 병란(兵亂) 일어날 기미 농후하다는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전해주었다.

‘다 늙은 나는 성정이 어리석고 벗을 가리지 못하였으니, 싸움이 어찌 끝나든 해는 입지 않을 것이요 설령 휘말려 죽는다 한들 아쉬울 게 없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하나가 이대로 갈고 닦으면 나라의 동량(棟梁)이 족히 될 만한 인재이니, 화란이 비껴가기를 기원하느니 차라리 미리 몸을 피함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금번 동과(冬課, 겨울학기) 끝나고 봄이 올 성싶으면 즉시 한양을 떠나거라.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주세붕은 말년에 못된 버릇 하나가 생겼으니, 이야기를 제때 끊지 못하고 꼭 사족을 붙이는 것이었다. 하여 원생들은 가벼운 농담으로, 스승의 별호는 곧 우일(又一, 한 가지만 더) 선생이라 하곤 하였다.

허나 주세붕이 하려는 말이, 어쩌면 유언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들 알았으므로 지금은 그 누구도 주의를 다른 데 돌리지 않았다.

‘너희가 한 마음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한다면, 설령 걸주(桀紂)가 임금이요 왕망(王莽)이 정승일지라도 능히 성세(盛世)를 이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반목하여 서로 원한을 품는다면, 설령 요순의 치세라 한들 국론이 갈라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바라건대 너희는 파당을 만들지언정 정의(情誼)만은 상하지 말거라.‘

평생 사람을 잘못 사귄다는 흉을 들으면서도, 그 누구와 척 지지 않으려 힘썼던 스승다운 말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이 말씀을 다 죽어가는 늙은이 잔소리라고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속에 담긴 통찰의 무거움을 능히 알아들을 수 있었으므로.

“파당이 갈린다... 우리 생각보다 근시일 안에 벌어질 일일지도 모르겠구려.”

“그렇지. 당장 이 사람부터 명년에는 성균관에 들어갈 테니, 만에 하나 서원의 문이 이대로 닫힌다 할지라도 몇 년 안에 다시 중추부에서든, 공회에서든 만나게 되지 않겠소.”

사발을 비우며 이산해가 말했다.

이산해는 이지번의 아들보다는 이지함의 조카로 더 잘 알려졌고, 그 본인도 숙부와 그 벗들의 생각에 동의하는 바 많았다. 반면 류성룡은 집안부터가 노론 일색이요, 상학의 이치를 깊게 궁구한바 오히려 은이 너무나 마음대로 돌면 나라와 백성에 해로울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어쨌든 오늘의 일은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이곳 장사 생각해서 슬슬 일어나십시다.”

“그러세나.”

은표라는 것이 세상에 나타나자마자, 그것을 위조하여 은이나 여타 귀물로 바꾸려 드는 악한들도 나타났다. 그러므로 암만 보아도 시골뜨기나 한량같은 자가 은표를 내민다면, 어지간히 몰지각한 가게 주인이 아니고서야 호패부터 보여달라 할 것이다.

허나 이산해와 류성룡 두 사람은 딱 보아도 귀한 집 자제요, 더구나 이곳 다점은 꾸밈새 조촐할지언정 누추하지는 않아 인접한 삼락서원 사람들이 종종 찾는 곳이었으므로 주인도 두 사람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러니 두 사람이 은표로 값을 치르고 나오는 데 하등 지장은 없었다.

몇 년 새 말끔해진 거리는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주세붕이 기거하는 터전이기도 했던 삼락서원 찾아와 조문하는 이들은, 조문 마치고 나와서는 근처 다점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리고 저들도 조문하고자 찾아온, 딱 보아도 지체는 없는 이들까지 한쪽에 가지런히 줄을 서 있고, 비록 노리개나 싸구려 주전부리 따위를 파는 잡상인은 없을지언정 사람이 많으니 자연히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골목 쪽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군.”

서원 뒤쪽에는, 그들이 머무는 서재(西齋) 향해 난 쪽문이 있었다. 아는 이들만 아는 쪽문이었으니, 그리로 향한다면 굳이 인파를 헤치고 들어갈 필요도 없을 터.

그런데 골목 초입에서 느닷없이 시끄럽게 언쟁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들 앞에 한 스물대여섯이나 되었을 법한 젊은 서생 하나가 갓끈 풀어진 채로 뛰쳐나왔다.

“이보게들, 이리 들어가지 말게나. 웬 미친 아이 하나가 패거리를 이끌고 길을 막고 있다네.”

옷차림을 보니 제법 권세와 부귀 있는 집의 자제인 듯하였는데, 그것이 무색하게 여기저기 흙이 묻어 있었다. 보아하니 저 골목 가로막고 있다는 ‘미친 아이’와 드잡이질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눈앞의 서생은 귀한 집 자제답게, 그 곁에 제법 노복답잖게 차려입은 가복(家僕, 집안의 종) 두엇도 곁에 두고 있었다. 그런 자들도 싸움박질에 휘말린 티가 역력하였으니, 범상한 골목대장이었다면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미친 아이’가 누구인지는 더 물을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최대한 점잖게 모른체하며 제 갈 길을 갔다.

거유(巨儒) 조문하여 저의 이름과 얼굴을 알리고는 싶으나 아랫것들과 섞이기는 싫어, 쪽문 찾다가 봉변까지 당한 젊은이는, 도통 저의 말 듣는 자 없음에 답답하여 옆의 애먼 가복들만 괴롭혔다.

“거기 멈추시오들.”

아니나 다를까, 골목을 막고 있는 미친 아이란 바로 그들의 동문이라면 동문이랄 수 있을 이순신이었다.

“이제는 머리도 제법 굵었으면서, 아직도 이런 짓이나 하고 있는가.”

“형은 사정을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게요. 방금 쫓겨난 저치가 먼저 손찌검을 했소.”

아버지 이정을 통해 어깨 너머로 배운 흑의군 단체법(鍛體法, 체력단련술)을 연마한 것인지, 아니면 본디 태생이 무골인 것인지, 이팔청춘(16세) 이순신은 앳된 용모와 달리 제법 몸이 다부졌다.

헌데 어디 가서 맞고 다닐 녀석은 아닌 순신의 얼굴에도 멍이 들어 있었으니, 필시 정철이 먼저 나잇값 못하였다는 그 말이 사실일 테다.

“손찌검을?”

“내가 여기 길목 막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의연(義捐, 기부) 청하는데, 그자가 대뜸 반가의 자제가 무슨 구걸이냐며 시비를 걸지 뭐요. 구걸이 아니라, 오로지 신의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암만 설명을 해도 얼른 비키기나 하라고 윽박지르니, 결국 이렇게 되었소.”

류성룡이 아는 이순신은, 남이 타당한 이유를 대며 뭔가를 시키면 어떻게든 그 일을 완수하고, 반대로 도통 납득 못할 짓을 시키면 어떻게든 그 일을 망칠 방도 궁리하는 성품이었다.

“대체 길목을 막는 게 무슨 신의를 위함이란 말인가?”

“스승님과 약조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요.”

스승님 이야기가 나오니, 이산해와 류성룡 모두 숙연해졌다.

“그러니 우선 두 분도 조금 도와주시오. 다른 길손들에게는 통사정하고 의연을 청하지만, 스승님 은혜 받은 제자분들이시라면 굳이 그럴 것도 없겠지.”

명색이 반가의 자제라고, ‘있는 것 다 내놓으라’ 하는 말은 최대한 돌려서 하는 이순신이었다.

“아니, 암만 그래도 무슨 사연인지는 조금 알려주어야지. 무슨 약조를 스승님과 하였는지라도 좀알려다오.”

그러자 지금껏 당당하던 이순신이 무언가 주저하는 눈빛을 보였다.

지금까지 이곳 골목으로 들어온 이들, 그러니까 스승님 조문을 위해 뒷문 찾아 들어온 이들에게 하였던 이야기보다 조금 더 상세한 내막을 알려달라는 눈치였던 것이다.

“네 말마따나 우리는 스승님 은혜 받은 제자 아니냐.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또 누구에게 알려주겠느냐?”

서원의 진짜 원생들 중 저와 가장 친한 류성룡이 채근하니, 결국 이순신은 눈 한번 질끈 감고 모두 털어놓았다.

“스승님께서 며칠 전, 몸살 한창 앓을 때의 일이오...”

그때 주세붕은 몸살에 열까지 올라, 의원의 처방도 큰 효험이 없고 정신마저 가물가물하였다.

뒤늦게 소식 듣고, 집에서 하던 글공부 내팽개치고 달려온 이순신은, 그런 스승 말벗이라도 해주려고 해 떨어질 때까지 아무 이야기나 곁에서 주워섬겼다.

“그러다가 얼마 전 인천 앞바다에서 경기수영 수조(水操, 수군 훈련)하는 것을 본 이야기를 하였소. 주사도감 생기고서 새로 건조된 큰 배들이 종횡무진 바다 위를 누비는데, 여간 장관이 아닙디다. 허나 얼마 뒤면 더 큰 배도 수사(水師, 수군)에 합류할 것인즉, 더 큰 장관이 기다리는 셈이오.“

동래에서 만들어지는 배의 다수는 복건성 출신 선공들이 조선 선공들, 그리고 말라카 선공들과 힘을 합쳐 만들어낸 내선(萊船)이었고, 주사도감에 구비된 새 전선도 대개는 그것을 조금 더 키우고 화포를 탑재한 어양선(禦洋船)이었다.

망망대해를 마구 가로질러야 겨우 어딘가에 닿을 수 있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배들과 달리, 이곳 동방에서 에우로파 오가는 항로는 중간중간에 배들이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아주 많았다. 그러다 보니 내선으로도 말라카나 그 너머까지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더 큰 배라니?”

“동래에서 양이대선(카락, 갈레온 등의 통칭)을 모방하여 만들고 있다 하오. 나라의 무관들이 그 녹봉을 헛되이 받지 않는다면, 어찌 그런 큰 배를 민간에만 남겨놓겠소? 내선을 따라 어양선 만든 것처럼, 카락이나 갈레온도 수사에 추가하려 하겠지.”

동래에 마침내 카락이나 갈레온을 능히 건조할 수 있는 선소가 완공되었고, 조선 사람 손으로 그 선소에서 큰 배도 여러 척 만들어 내놓았다. 그리고 이제는 제대로 된 카락을 만들고자 불철주야 힘쓰고 있다 하였으니, 배 좋아하는 이순신으로서는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거기까지 이야기를 풀어놓으니, 스승님께서 입을 여셨소. ‘거 정말 보기에 훌륭하였겠구나. 언제고 바다 구경을 함께 가자꾸나.’ 그리 말씀하셨지.”

보나마나 혼수에 빠져, 꿈결 잠꼬대하듯 말한 것일 테다.

“암만 병으로 경황이 없을 때 하신 말씀이라지만, 내가 들었던 스승님의 마지막 말씀이었소.”

그 뒤로 주세붕은 회광반조(回光返照) 격으로 쾌차하였고, 며칠 뒤 자는 중 숨을 거두었다.

“그래서 나는 스승님과 신의를 지키고자 하오. 바다 구경을 함께 하자 하셨으니, 바다 구경을 하실 수 있게 해드려야지.”

“그것이 어찌 가하겠느냐?”

류성룡과 달리 이순신에게 썩 좋은 감정 없는 이산해가 물었다.

“동래에서 곧 카락이 완공되어 바다로 나올 것이오. 서양 사람들은 배에 사람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는데, 우리라고 못할 것 무엇이겠소? 그 배에 우리 스승님 아호(雅號)를 붙였으면 하오.”

“그것이 예법에 맞는지는 둘째치더라도, 동래 선공들이 암만 우리 스승님을 존경한다 한들 그런 청을 받아줄까?”

“그들로 하여금 받아줄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소? 우리가 그 배를 사들이는 것이오. 내선도 종종 파는데, 카락이라고 안 팔까.”

사업당은 자본을 장사의 수단으로 삼곤 했고, 배는 그런 자본 중에서도 은에 버금가는 중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업당은 배를 좀처럼 팔지 않았으며, 설령 팔더라도 믿을 수 있는 상대에게만, 또는 믿음을 능히 살 수 있는 상대에게만 팔곤 했다.

“너, 그런데 대선 한 척 건조하는 데 수용(需用,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고 있니?”

“동래 선거(船渠)에 있는 배는 삼천 료(料, 약 450톤)쯤 된다 하였소. 그러니 은자로 사천 냥은 받겠지. 그러므로 이곳 길목을 막고 사람들에게 의연을 받고 있는 게요. 티끌 모으다 보면 태산 되지 않겠소? 다 들으셨으면 얼른 은표라도 주시오.”

그때, 골목 초입에서 호각피리 부는 소리가 났다. 방금 전 이순신과 우격다짐한 그 젊은이가, 끝내 뒤끝을 못 떨쳐내고 조문행렬 감시하던 어영청 군관을 찾아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를 부리고 있느냐!”

이순신이 거느린 패거리들 – 간만에 저들 우두머리가 불렀기에 좋다고 따라왔던 상민 아이들이었다 – 은 바로 얼어붙었으나, 이순신 눈빛을 보고 정신 차리고서는 그 뒤로 모여 대열을 이루었다.

설령 당할 때 당하더라도, 저들은 정의로운 무리이니 결코 당당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그들 대장의 가르침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이 뭔가 얘기하려던 차, 이산해가 한 발 앞섰다.

“그러는 그대야말로, 이곳이 어디인 줄 알고 함부로 나서는 것이오?”

이순신과 그 뒤의 아이들 (그리고 저의 실적)만 바라보고 달려온 군관은, 번듯한 젊은이가 반공대하며 나서니 당황한 기색 역력하였다.

“그, 그것이...”

그러나 그에게 얼른 저 골목 가서 못된 놈들 쫓아내라면서 저의 이름 밝힌 그 젊은이는, 다른 사람도 아니요 선왕(인종)이 아끼던 후궁 소의(昭儀, 정2품) 정씨의 터울 큰 아우 정철(鄭澈)이었다.

저 서생이 정철보다 더 위세 높은 사람일 공산이 얼마나 되겠는가? 일순의 당황함을 떨쳐내고, 돈벌이 욕심, 나아가 나라의 높은 이와 연 만들 욕심을 기틀삼아 다시 떳떳하게 섰다.

“흠흠, 이보시오. 본관은 엄연히 어영청의 군관으로서, 도성의 사민(士民)을 도와 질서를 지켜야 한다오. 저기 저 아이는 감히 벌열의 자제에게 모욕을 주고, 나아가 길을 막고 많은 사람을 불편케 하였소이다. 자꾸 본관을 막는 것을 보니 그대 또한 수상한데, 호패부터 보여주시오.”

이산해는 차갑게 웃으며, 저의 호패를 꺼냈다. 지난해 초시를 통과하며 새로 만든 말끔한 호패가 소매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거기 적힌 이름 석 자를 본 어영청 군관은 그대로 굳었다.

“자, 그러면 얼른 질서를 지켜보시오.”

어영청 안에는, 어지간한 군관들이 외우고 다니는 『물금록(勿禁錄)』이라는 책이 있었다. 거기에는절대로 건드리면 안 될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임꺽정이나 서림 같은 이들이야, 어지간해서는 건드릴 엄두도 못 낼 것이므로 굳이 말할 것도 없었으나, 그 주변 사람들, 예컨대 겉보기로는 평범한 백정인 가도치 같은 이들은 주의하지 않는다면 큰일이 나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물금록』의 ‘민(民)’ 자 단락에 있는 이름 중 하나가 바로 이산해였다.

결국 우물쭈물하던 군관은, 뭐라 못 알아들을 말을 대충 흘리고는 나 몰라라 하며 내뺐다.

“이현(류성룡의 字), 자네를 위해 호패 내민 것일세.”

이산해가 류성룡을 돌아보며 말했다. 즉 이순신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허무맹랑한 일에 스승님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은 그분을 욕되게 하는 일일세. 더구나 어느 세월에 사천 냥이나 되는 은을 모으겠는가? 당장 집어치우게.”

그리 단언하고, 이산해는 곧 뒷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형은 여기 남아있는 걸 보니, 저기 여수(이산해의 字) 형과는 뜻을 달리하는 모양이오. 그렇지 않소?”

은근히 계책을 내놓으라며 종용하는 이순신이었다. 그러나 그 눈빛을 못 이기는 듯하던 류성룡도 끝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네가 스승님 기리고자 이런 일 하는 것은 나름 훌륭하다 보지만... 사천 냥 은은 도저히 못 모을 것 같은데.”

“해보지도 않고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오.”

“배움이 깊으면 능히 천리 밖의 일도 헤아릴 수 있는 법. 애초에 그러려고 닦는 것이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 아니겠느냐.”

나라 안에 들어오는 은. 그 중에서도 한양 저자에 나도는 은의 양을, 류성룡은 일찍이 조사한 바 있었다. 삼락서원에는 그러한 가르침을 직접 내려주는 스승은 없었으나,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모든 것을 배울 수 있게끔 원하는 자료는 언제든 구할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추산하면...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이 방식대로라면 결코 사천 냥 은을 모을 수는 없을 것이다. 스승님 조문하는 이들이 항상 이곳 골목을 지나지는 않을 것이니. 차라리...”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소. 이것은 스승님과 나 사이의 신의를 지키기 위한 일인데, 어찌 사사로운 위세에 기대겠소?”

일전에 서원에 찾아와 주세붕에게 인사를 올렸던 윤두수(尹斗壽)라는 이가, 이순신의 이야기를 듣고는 대양서생 이정의 아들이요 멀리는 덕수 이씨 문중의 사람이니, 무과 급제는 당상관 따놓은 것과 매한가지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더랬다.

그 말을 들은 이순신이 노여워하며, 서원 나가는 길을 가로막고 어찌하여 젊으신 분께서 그러한 잘못된 말씀을 하시느냐고 따져물은 적이 있다던가.

묘한 데서 올곧은 그 성품을 잘 아는 류성룡은, 이순신의 말에 더 토를 달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사천 냥은커녕 사백 냥도 다 못 모을 것이다. 이건 바꿀 수 없는 현실이니, 받아들이고 다른 길을 찾는 수밖에.”

그의 패거리와 류성룡 사이에서, 이순신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정(正, 정공법)으로써 맞서고 기(奇, 기책)로써 이긴다...”

느닷없이 그의 입에서 병법의 구절이 나왔다.

“그래서, 어찌 되었는가?”

저의 아들이 또 무슨 사고를 쳤는가 노심초사하며 듣던 이정이 물었다.

한양 저자에 흔한 한량에서 대양서생 중 한 사람이자 민주당 임 당수와 마주하는 사이까지 올라간 이정은, 실로 조선국 한량들 사이에서 추앙받는 이라 할 만했다.

조금 더 뜻 있는 몇몇 한량들은 이렇게 이정을 직접 찾아와 그와 이야기 나누기도 하였는데, 이정도 나름대로 사람을 가려 받았으므로, 이제는 미신을 훼파하는 것보다는 그저 뜻있는 한량들 모임에 가까워진 각미사의 질은 오히려 세월이 지날수록 올라갔다.

“어찌 되었긴요. 강화도로 막 돌아가려던 저를 포위해서, 이러이러한 전고로 앞잡이 노릇할 이가 필요하니, 천생 한량인 어르신께서 조금 도와달라 하더군요.”

“뭐? 천생 한량?”

“아드님께서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

헌법이 제정되는 이 중한 시기에 형조판서를 맡고 있는 조정의 중신 권철(權轍)에게는 귀한 막내아들이 있었는데, 오냐오냐 키운 늦둥이치고 성품은 괜찮았으나, 그 대신 사람됨이 느슨하고 만사를 귀찮게 여기는 듯하였다.

“그나저나 묘하군. 자네가 어디 가서 그렇게 쉽게 당할 사람은 아닐 텐데?”

“아드님이 병법에 제법 소질이 있는 듯하더군요. 요새 시국이 수상하다 보니, 뭔가 좋지 못한 뜻 품은 무리가 저를 노린다고 여겨 나름대로 피했는데, 한신의 십면매복(十面埋伏)도 이만큼 치밀하진 못했을 겝니다.”

허나 그 느슨함 뒤에 가히 훌륭하다 할 만한 재주 있음을, 이정은 진작에 알아보았다. 만약 그가 저의 아비 이름만 믿고 으스대는 그런 작자였다면, 진작에 내쫓았을 것이었다.

당장 이번에도, 곧 헌법으로 인해 한바탕 큰 싸움 벌어질 것을 간파하고 다른 한량들을 규합해 자신이 뭔가 도울 일 없겠느냐며 찾아오지 않았던가.

무슨 대가나 권세를 탐하는 것도, 이 기회에 임 당수에게 잘 보여 벼슬이나 당직(黨職) 받겠다는 것도 아니요. 그저 국인의 뜻으로 세운 헌법이 훼철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저의 목숨을 걸고 나서겠다 하였다.

“그렇게 한참을 쫓고 쫓기다가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서 포위되었는데, 그렇게 저를 쫓아온 무리가 알고 보니 아드님께서 거느린 코흘리개 아이들이지 뭡니까. 그러고서는 그 사이에서 아드님이 당당히 걸어나와 말을 걸더군요.”

그러고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겠다며 은표를 슬쩍 내밀었다. 그의 아비가 형조판서라는 것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앞서 일은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사업당 쪽에 거래를 청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데, 보시다시피 연소하여 제가 직접 나선다면 그리 진지하게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리하여 저 대신 나서줄 이를 구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패거리에게 지시 내리며 저를 쫓아오던 것은 언제였냐는듯, 공손하게 말을 꺼내는 이순신이었다.

‘혹시 사업당에서 만드는 배의 이름을 파는 새로운 장사를 시작할 마음이 없느냐, 그렇게 사업당 쪽에 제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장사의 첫 손님이 되기를 원하는데, 지금 동래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카락의 이름을 사고 싶다. 그렇게 함께 전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이름을 산다? 어떤 이름을 원하기에 그러느냐?’

‘얼마 전 작고하신 신재 선생은 실로 큰 선비이신데, 그분의 아호를 배의 이름으로 정하고 싶습니다.’

‘신재 선생이라면 그럴 만한 분이시지. 허나 배의 이름으로 재(齋)는 조금 이상하지 않으냐? 어디 한 군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배인데.’

‘하면 다른 아호는 어떻겠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손옹(巽翁)이라는 별호도 쓰셨다고 하였는데.’

‘손옹이라! 그만하면 배의 이름으로도 훌륭하구나.’

손은 곧 팔괘(八卦) 중 하나로, 그 표상하는 바는 다름아닌 바람이었다. ‘바람 늙은이’라면, 바람의 힘으로 바다를 누빌 배의 이름으로 조금은 기이할지언정 아예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좋다. 내 그러면 네 말대로 해 주마.’

‘감사합니다. 여기, 저희가 모은 금은보화 전부입니다. 일이 성사되면 남은 것은 모두 선생의 몫으로 가져가시면 되겠습니다.’

거기까지 이야기 들은 이정이 혀를 찼다. 자신의 품행을 돌이켜보면, 오히려 아들이 더 나은 면도 있었다. 그로 인해 아들 녀석이 벌이고 다니는 일의 규모도 훨씬 커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이니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허, 녀석...”

“제가 어르신과 이렇게 교분 있는 사이임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어찌 하였는가?”

“사내 대장부가 신의는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사업당으로 향하여 동래 선소(조선소) 일을 맡아보는 이에게 그 제의를 그대로 건네었지요. 이번에 나올 조선 최초의 가락선 이름을 손옹으로 해 달라고.

그랬더니, 어쩐 일인지 임 당수 본인이 나타나서, 그것은 불가하다 단언하더군요.”

“임 당수가?”

“때마침 근처를 지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덕분에 안면도 트게 되었고, 곧 닥칠 싸움에서 나름 할 일도 맡게 되었으니 다 잘 된 것 아니겠습니까.”

남치근의 모의에 가담한 관군 장수들의 명단이 조정에 그대로 넘어간 이래, 도성과 그 인근 모든 군영에는 기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생살부에 그 이름이 오른 장수를 미리 쳐내려고 하면 저쪽에 움직일 빌미를 줄 것이요, 또 조용히 그 머리만 베어내자니 남치근과 얽힌 군관이 너무나 많았다. 또한 그 명단에 적힌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 어쩌면 저쪽에서 오히려 노리는 바일 수도 있었다. 그 정도는, 정정당당한 싸움에서도 족히 부릴 만한 계책이었으므로.

이러한 내막을 모르는 이들도, 눈과 귀가 있었으므로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훌륭한 선비의 이름을 단 배가, 곧 벌어질 다툼에서 불탄다든가, 가라앉는다든가 하면 그 또한 좋지 못한 일이니까요. 만약 싸움이 끝난 뒤에도 배가 멀쩡히 서 있고, 또 그 배에 딱히 원한 같은 게 서릴 일도 없이 싸움이 잘 풀린다면, 그때는 이름을 ‘손옹’으로 정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임 당수가 그런 세세한 내막까지 말해준 걸 보니, 어지간히 그분 눈에 든 모양이로군그래.”

“아니면 어르신의 명성 덕에 저까지 도움을 받은 것일지도 모르겠지요.”

“자네는 어디를 가든 주머니 속 바늘처럼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일세. 너무 겸양은 하지 말게나.”

“그보다, 임 당수가 막무가내로 제가 들고 온 은과 은표를 압수해가는 바람에 아드님께서 약속하신 제 몫은 그대로 사업당 곳간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무엇으로 갚으시렵니까?”

“이번에 선물받은 소흥주(紹興酒)가 한 병 있기는 한데.”

“그만하면 족합니다, 하하!”

권율(權慄)의 통쾌한 웃음이 바깥까지 전해져, 잘 풀렸다고 좋아하던 이순신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어찌하여 저 웃음과 저 말소리가 저의 아버지 사랑방에서 나온다는 말인가?

그러나 자신의 언행에 단언코 부끄러움 없었으므로, 잠시 놀란 마음을 바로 가라앉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저의 방에 돌아가 하루종일 내팽개쳐 두었던 책을 읽는 시늉을 다시 하였다.

그날 밤 이순신은 스승과 함께 배를 타고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꿈을 꾸었다.

--- *** ---

중국 전통의 선박 크기 단위인 료(料)는 본디 톤수와 정확히 상응하지는 않습니다. 그 어원은 곡물의 양을 세는 단위에서 나와, 곡물 1천 료를 실을 수 있는 배를 천료선(千料船)이라 부르는 식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명대를 거치며 근해 및 하천에서 운행되는 배의 적재중량과 크기, 건조비용이 하나로 묶여 규격화되자, 료 단위는 배의 물리적인 크기, 또는 배를 건조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기준으로 해서도 정의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현대적 시각에서는 오히려 단위의 정의가 훨씬 자의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변하게 된 것이지요. 반면 기존의 규격을 벗어나 조선과 중국 정크선, 그리고 포르투갈의 카락까지 다양한 조선(造船) 전통이 집약되고 있는 작중 조선에서는, 료 단위가 다시 당~송대처럼 순수하게 적재중량을 기준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김성준 외, 2004. “배의 크기 단위에 관한 역사지리학적 연구.” <한국항해항만학회지> 28(5)).

16~17세기의 선박 건조 비용을 환산하는 데는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은데, 신대륙 귀금속의 유입으로 화폐가치가 요동쳤을 뿐 아니라 여러 지정학적, 기후적(소빙기) 요인까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규모의 경제 덕에 그나마 선박 건조 비용이 저렴했던 네덜란드나 바스크 지방에서도, 어지간한 중산층의 수십 년치 수입에 상응하는 비용이 요구되었을 것입니다. 작중 류성룡이 언급한 ‘삼천 료 대선에 은자 사천 냥’은 이를 바탕으로 개략적으로 추산한 수치입니다.

시대가 156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선조 연간에 활약한 인물들이 하나둘씩 전면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순신의 용모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최근에는 그의 모습이 선비처럼 단아했다는 주장은 당대인들의 다른 기록에 의해 다소 부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직접 만나본 이들도 딱히 그가 후덕하거나 기골 장대하였다는 평은 하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 딱 당대 무인의 평균 정도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원 역사보다 훨씬 빠르게 류성룡, 이산해와 악연을 맺게 된 정철은, 작중 언급된 것처럼 인종의 총애를 받았던 귀인(작중 시점에서는 아직 소의) 정씨의 아우로, 태어날 때부터 권력의 중심부에서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그의 집안과 연이 깊던 계림군이 을사사화에 연루되면서, 그 역시 파란만장한 유년기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맏형은 곤장을 맞아 죽고, 정철은 아버지와 함께 귀양살이를 해야 했지요. 이러한 경험은 그의 성격이 모나게 되는데 한몫하였을 것입니다.

권율의 아버지 권철은 중종 연간부터 선조 초기까지 조정의 중신으로 봉직한 인물로, 비록 재능이 눈에 두드러지는 않았으나 청렴결백하고 인품이 좋아 많은 이들의 인망을 받았습니다. 윤원형이 몰락하자마자 그는 정승을 역임하며, 이준경을 보조하여 사림 정권의 중핵을 맡았지요. 그 덕에 아버지를 잘 둔 권율은 나이 마흔이 넘도록 과거조차 보지 않으며 유유자적 생활을 하였는데, 야사에 따르면 권철이 임종할 때 권율을 불러 나지막하게 ‘내가 너를 낳았다’ 한 것이 큰 깨달음이 되어 그때부터 과거 준비에 매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머지 않아 비록 병과 15위(거의 턱걸이)기는 하지만 바로 급제를 하였으니,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하는 타입이었던 듯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