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병자궤도 (2)
고작해야 심통원이 부리는 아랫사람 정도가 걸려들 것이라 예상했는데, 덕흥군이 직접 움직이게 되었으므로, 이번 정난(靖難)을 아예 ‘정난’ 이름조차 붙지 않게 조용히 해결하기를 내심 바라던 이들로서는 가만 내버려둘 수 없는 기회였다.
임금은 이왕이면 저와 연 있는 이들이 피 보지 않고 조용히 투항하기를 바랐으므로, 평소처럼 흑의군 끌고 가려 하였던 꺽정이에게 대신 금군을 붙여주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면, 만사휴의(萬事休矣)의 지경에 달했음을 깨닫고 모두들 순순히 오라를 받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덕흥군이 향할 곳이야 뻔하였고, 그와 만날 이가 누구일지도 뻔하였다. 그들을 그 자리에서 모조리 잡아들일 수 있다면, 이제 믿을 것은 군병의 힘만 남은 두리손의 거사는 시작조차 하기 전 날개 꺾이는 격이 될 터였다.
허나 날개 달린 범에게서 날개를 도로 빼앗는다 한들, 범은 그대로 남는 법. 저들이 최후의 발악으로 그나마 남은 이들을 모조리 한양으로 내몬다면, 이곳 도성이 반드시 무사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리하여 이준경은 어지(御旨)를 받들어, 이지함과 도성에 남은 흑의군, 아직 남은 금군과 주상께서 내어주신 선전관, 그리고 경군을 이루는 다섯 군영 중 확실히 믿을 만한 두 군영을 거느리고서 한양 주변을 평정하기 시작했다.
임꺽정이 금군과 어영청 군교들을 거느리고 도성을 나선 것이 그 신호였다.
“서두르게! 해가 뜨기 전에 역심 품은 세 군영을 모두 제압해야 하네!”
“예, 대감!”
다섯 군영 중 유일하게 사대문 안에 있는 경군중영(京軍中營)은, 다행히 저들에게 포섭된 군관이 딱히 없었다. 어명에 따라 지휘를 맡은 이준경이 저의 막부(幕府, 사령부)를 이곳에 차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별장(別將), 자네는 경군좌영(京軍左營)을 이끌고 경군전영을 들이치게! 그리고 권율 자네는 각미사 사람들과 함께 좌우 포도영으로 향하게! 지금쯤이면 그 무본사에 얽힌 이들을 모두 추포하였을 테니, 필시 사람이 남을 것일세. 포도대장 두 사람 모두 내 필적을 알고 있으니, 이 글을 보여주면 금방 명을 따를 것이야.”
“군영의 장수와 군교들 중 도성 안에 기거하는 자들을 추포하면 되겠습니까?”
“자네 헤아린 대로일세.”
군례 갖추고 뛰쳐나가는 권율을 비롯하여, 대낮처럼 횃불 훤한 경군중영 안팎으로 쉴새없이 병장기 든 이들이 뛰쳐나가고 또 뛰쳐들어왔다. 발 빠른 밤이와 그 아랫것들은 어지간한 파발마보다 더 빨리 한양 곳곳을 오가며, 온갖 군영과 군졸들이 섞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내 다시는 한양이 함락되는 것을 보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네.”
“이르신 대로 될 것입니다.”
이번 일에서 이준경의 막료(참모)를 맡게 된 이지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 아차! 대감! 아차! 대감 어르신! 명하신 대로 경군후영(京軍後營)의 군교와 사졸들을 모조리 제압했는데, 막상 잡고 나서 대질해보니 절반가량이 사라져 있었습니다요!”
다년간 경험 끝에, 그 뒷골목 말투만 제하면 군을 이끄는 재간이 어지간한 군관 뺨치게 된 양벽이 달려들어와 고했다.
“사대문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당장은 상관없는 일일세. 필시 전영이나 우영(右營)과 합류하려는 것일 터. 아직 후영에 남아 있던 이들은 이번 일에 가담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으니, 그들은 지금의 위치를 지키도록 하고, 자네는 흑의군들을 이끌고 우영을 치게. 전영이 제압되는 즉시 좌영 군사를 증원해주겠네!”
“예, 어르신!”
양벽의 어설픈 군례를 성의껏 받아주는 이준경이었다. 그가 다른 선전관들 제치고, 흑의군과 금군 사졸 여럿 섞인 무리 하나를 이끌게 된 것은 모두 이준경의 재량에 따른 것이었는데, 아직까지 그는 깐깐한 이준경을 실망시키지 않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잘 되어가는군. 이 늙은이가 또 한 번 주상께 죄를 짓지는 않게 되기를.”
임거정이 역모를 꾸미는 수괴들을 모조리 추포하고, 그 손발마저 미리 묶고 잘라낸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내릴 지시를 모두 내려 잠시의 한가함을 얻은 이준경은 옆의 교상(交床, 간의의자)에 털썩 앉았다.
“저 또한 그리 되기를 바랍니다. 다만...
이준경과 달리 여전히 서성이는, 아니, 방금 전보다 조금 더 초조해 보이는 이지함이었다. 항상 여유만만하던 그가 의외의 모습을 보이니, 이준경은 근심 반 궁금함 반으로 물었다.
“다만?”
“소생이 실언하여 영상 대감의 마음을 흩뜨렸습니다. 부디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지요.”
“지금은 잠시 한가함을 얻었으니, 털어놓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이만한 적기도 없을 것이오.”
“만일 두리손이 실로 범상한 적괴로, 세태가 변한 것을 알지 못하고 옛날처럼 작변(作變)하고자 한다면, 그 또한 반드시 덕흥군을 만나는 자리에 나타날 것입니다.”
대저 역적질이란 새로 임금을 세우는 데서 시작하는 법이었다. 적어도, 의민당이 한양을 쳐서 듣도 보도 못한 정변을 성공시키기 전까지는 그랬다.
“두리손 그자에 대해 이 사람은 수산 그대만큼은 알지 못하오. 허나 그 한 사람이 개명(開明)하였다 한들, 나머지 무리들은 그저 시세에 어둡고 탐욕에 눈먼 무부(武夫)들 뿐일 터. 그런 자들은 반드시 나타나지 않겠소? 그리고 그런 자들이 사라지면, 두리손이 아무리 비범하다 한들 무엇으로써 그 군세를 이끌겠소?”
“만약 그자가 올봄에 이를 때까지 뜸을 들인 것이, 실제로는 그러기 위한 방책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생살부』에는 나라의 무장들 중 그 품계가 장군에 닿은 이들이 수두룩하니 적혀 있었는데, 그와 더불어 그런 자들과 이름 나란히 하기에는 영 부족한 이들도 많이 들어있었다.
병사(兵使, 병마절도사)쯤 되는 이가 명령을 내리면 그 아래에서 직접 군을 거느리고 적진으로 뛰쳐들어가는 그러한 젊은 장수와 군교들.
이준경은 그런 이들까지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은 만에 하나 아랫사람들이 미리 눈치를 채고 고변할 것을 두려워하여 포섭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라 보았으나, 이지함은 그 말 일리 있다 여기면서도 다른 대책들을 마련하였다.
“그대의 말이 맞다고 치면, 오늘밤의 일에 달라지는 것이 있겠소?”
“만사가 뜻대로 풀린다면,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요. 허나 반대로, 매사가 우리 뜻과 달리 흘러간다면 그때는... 미리 준비한 다른 방책을 속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기민하게 징조를 알아채고 대처하는 것만이 답이겠지요.”
“무릇 병가(兵家)의 일은, 칼자루에서 칼이 뽑힌 뒤로는 언제 그르쳐도 이상하지 않은 법이오. 허나 먼저 칼을 뽑은 것은 우리요, 그 칼날은 가히 만인지적이라 할 만한 임 당수이니, 과히 염려치는 마시오.”
“허나 지금 임 당수와 함께하고 있는 것은, 흑의군이 아니라 금군입니다. 그들이 비록 지난날 이후 스스로 분발하여 그 강용(剛勇)함이 예전에 감히 비할 수 없게 되었다지만...”
“흑의군처럼 임 당수의 수족과 같이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 말이로군.”
이익을 취할 수 있는 모든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위태로움이 함께한다. 이지함 본인이 정리한 상학(商學)의 기초 중 하나였다. 만약 자신이 나라의 모든 일을 뜻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있었다면, 이지함은 그런 위태로움에 대비하기 위해 반드시 꺽정이 옆에 흑의군을 붙였을 것이었다.
허나 임금의 뜻과 그 뒤의 심정 또한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었으므로, 그에 따랐다. 부디 그것이 실수가 아니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때였다. 열심히 사대문 안팎 오가며 소식을 전하고 있던 임밤이가 튀어들어왔는데, 어깨죽지에는 붉은 자국이 선명하였다.
“대감마님! 모주님! 큰일입니다! 좌영이 패퇴했습니다!”
“무어라?”
“두리손, 그자가 지금 저의 수하와 함께 마포에 있습니다! 전영과 합세해서는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화포까지 꺼내어 쏘아대는지라, 좌영은 견디지 못하고 퇴각했습니다.”
그 와중에 밤이도 어디서 날아온 조란환에 재수없게 맞아버렸다.
“당황할 것 없다. 그자가 남치근과 다른 장수들을 버려두고 혼자 와 있다면, 오히려 잘 된 일이다.”
지방 각 병영에서 보고된 불온한 움직임이라 해보아야, 평소보다 훈련이 잦은 것 정도였다. 그들을 한곳에 모아 도성으로 일제히 진격하려면, 결국 각 도의 병사쯤 되는 이가 군령을 발하여야 할 터인데, 이준경이 알기로 아직 그러한 일은 없었다.
그러니 경기병영에서 임꺽정이 저들의 남은 수뇌부를 쳐낸다면, 설령 경군전영과 두리손의 사병들, 그리고 아직 제압치 못한 나머지 경군들까지 합세한다 한들 도성의 성벽 아래에 고립될 뿐, 그들의 뒤를 받쳐줄 원군은 오지 못할 것이었다.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거친 말발굽 소리 달려와 바로 이준경 앞에서 멎었다.
“대감 어르신! 큰일입니다! 지, 지금 알 수 없는 군사들이 수백씩 강을 건너오고 있는데, 흑의군만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습니다!”
범상한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보고를 부정하며, 어리석은 상것들이 허황된 말을 한다는 둥 헛소리나 했겠지만, 이준경은 그러기에는 너무나 지닌바 재간과 책임이 큰 사람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판단이 끝나고, 지시가 내려진다.
“수산, 이렇게 된 이상 중책(中策)으로 넘어가야겠소. 막료들은 들어라! 지금껏 우리 수중에 들어온 군병을 모두 사대문 안으로 물린다! 양벽 자네는 흑의군과 고이티의 외군(에스파냐군)을 거느리고 숭례문을 지키게!”
그 단호함에, 한발 때 산불처럼 퍼지던 당황함은 주춤하고, 곧 방금 전보다 훨씬 절도 있는 호령이 아우성을 갈음하여 퍼졌다.
상책은 글렀으니 바로 중책으로 넘어갈 뿐. 허나 멀리 수원 쪽을 바라보는 이지함의 미간에서는 걱정하는 주름이 펴지지 않았다.
“내 이렇게 경들을 모두 불러모은 것이 어째서인지, 다들 알 것이라 믿소.”
경기병영이 가까워질수록, 두려움에 떨던 일개 종친 덕흥군의 허리와 어깨는 점점 펴졌다.
그리하여 병영 안에 들 무렵에는 이 나라 조선의 왕자군이 되고, 병영 안에서 가장 넓은 마루에 올라 저를 찾아뵙는 장수들을 맞이할 때에는 이미 조선의 새 임금이 된 듯하였다.
“듣기로, 그대들이 곧 이 나라를 바르게 하려 기의(起義)한다 들었소. 허나 봄이 다 되도록 소일만 하다가, 마침내 소문이 먼저 퍼져 온 국인들이 그 기미를 알게 되었소이다. 이 어찌 된 일이오?”
필시 지난날 폐주(연산군)를 몰아낼 때 그랬다는 것처럼, 막상 거사의 때가 다가오자 주춤거리는 이들만 남아 마지막 큰 결단 하나를 내리지 못했던 것일 테다.
그러한 생각에 빠진 덕흥군은, 모여든 무장들 면면이 당혹스러움에 물드는 것을 뒤늦게야 알아챘다.
애초에 경기병영에는 경기병사 원준량 한 사람만 있는 것이 마땅할 텐데, 어찌하여 남치근을 비롯하여 이 대계에 동참하는 어지간한 고관들이 경황 없이 도망친 덕흥군의 말 한 마디에 다 몰려들었단 말인가? 그제야 덕흥군도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송구하오나, 저희 또한 그에 대하여 두리손 그자가 해명할 바 있다 하여 이렇게 모였습니다. 장차 대계를 어찌 수행할지, 그에 대해 긴밀히 논하고자 한다 하여 찾아왔사온데...”
만약 유례없는 타초경사 수법에 당한 덕흥군이 바로 경기병영으로 내빼는 대신 심통원의 집 솟을대문을 두드렸다면, 그 역시 심통원에게서 이곳 경기병영으로 모이라는 두리손의 전언을 받았을 터였다.
“기다릴 것이 무엇이 있소? 애초에 그자 또한 성품이 비루하여, 끝내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때를 기다린다는 핑계만 대고 있던 것이겠지! 이 자리에 제공(諸公)이 모두 모였은즉, 흰뱀을 베는 그 뜻으로써 (斬蛇起義)...”
그러나 말주변 없는 덕흥군이 암만 떠들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딱히 없었다. 이유인즉, 이 자리에 모인 장수들 또한 대계가 무엇인지 얼추 알기만 할 뿐, 정확히 언제 거병하여 무엇을 할지는 몰랐던 것이다.
그나마 군략(軍略)을 조금 아는 이들 생각하기로는, 일시에 한양을 들이치고, 만일 주상- 계획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아마 폐주 경원군(慶原君)이 될 – 이 몽진한다면 수륙병진(水陸竝進)으로 황해도를 삼면에서 공격하여 도중에 사로잡는다는 것 정도를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 어떻게 사방의 민심을 다독일 것이며, 곧 근왕의 기치 내걸고 남하할 북병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 또 민주당 이권은 어떻게 나눌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그들 당의 우두머리이자 유일한 모주(謀主) 두리손에게서 들려오는 바 없었으므로, 남치근 이하 군관들도 알지 못하였다.
한쪽은 채근하고, 다른 쪽은 곤란함 절반, 정말로 두리손 그놈을 배신하고 저들의 군세만으로 정변 일으킴이 어떠한가 하는 솔깃함 절반으로 고민하는 사이. 병영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원준량이 곁의 무관에게 물었다.
“여봐라, 지금 들려오는 저 소리는 무엇이냐? 저토록 많은 마병(馬兵)을 데리고 금일 조련을 하기로 한 바가 있었던가?”
군략보다는 기생집 공략에 더 재주와 관심 많은 원준량을 대신하여 병영의 실무를 맡고 있는 종사관 홍언성(洪彦誠)이 태연하게 답했다.
“금군입니다. 주상을 곁에서 모시는 이들이 스스로 신분 밝히며 영문(營門)을 열라 하니, 어찌 병영의 군사들이 가로막겠습니까?”
“아니, 금군? 금군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제 보니 맨앞에는 임거정이도 있군요. 이것 참, 계획대로 대어(大魚)가 걸려들어버리니 오히려 당황스러울 지경입니다그려.”
알 수 없는 말을 끝으로, 상관 내팽개치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홍언성이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 아니, 이 사람아, 어디를 가는가? 상관을 버려두고 도망을 쳐?”
원준량은 허둥대고, 남치근은 이 어찌 된 일이냐며 원준량을 채근하고, 다시 그 남치근은 덕흥군에게 멱살이 잡혔다.
그러는 사이 ‘와아’ 소리와 함께 대청을 에워싸는 무리 있으니, 척 보아도 금군이요 다시 보아도 금군이라.
그리고 그 금군 이끄는 것은 여느 선전관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 미워하면서도 질투하고 또 두려워하는 임거정이었다.
“여기들 있었구만. 다들 반갑소. 내가 임꺽정이오. 지금 투항을 하면, 잘하면 사약 먹고 끝나고 안 되어도 몸뚱이가 머리와 몸 두 조각으로만 갈리겠지만, 만약 저항을 한다면 거기서 끝내지 않을 것이오. 그리들 알고 처신 잘 하시오.”
그 섬뜩한 엄포와 더불어 다른 금군들이 외쳤다.
“다들 나와 오라를 받아라!”
“죄 없는 자는 두려워할 것이 없고, 죄 있는 자는 지금이라도 그 죄를 줄여야 할 것이오!”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며 발버둥치던 남치근은, 전생과 이번 생의 위엄이 무색하게, ‘이거 한 번 꼭 해보고 싶었다’는 영문 모를 소리 하는 임꺽정에게 그대로 메치기 당해 자빠지고, 정신 못 차린 원준량은 ‘게 누구 없느냐’ 소리나 하다가 꽁꽁 묶였다.
그리고 그 살풍경한 모습에 얼어붙은 덕흥군은 다행히 지체 상하는 일 없이 오라를 받았다. 그제야 저는 무고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이거 영 이상한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임 당수?”
그렇게 굴비두름 된 작자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끌려나오고, 나름 덕흥군은 종친인지라 곁에 시위하듯 붙은 금군 둘만 둔 채 제 발로 나왔다.
헌데 있어야 할 놈이 아니 보였다. 이 자리에 있어야 할 두리손은 아니 보였고, 정작 이 자리에 있을 이유 없는 남치근 등등만 있던 것이다. (남치근이 그 속내 알았다면, 무작정 메치기하기 전에 물어나 보지 그랬느냐 하였을 일이었다.)
“두리손 그놈은 어디 있느냐?”
“우, 우리도 모르오!”
“그놈 소재에 대해 아는 대로 고해바칠 터인즉 부디 죄상을 참작해주십사...”
“내, 내게 짐작가는 바가 있소! 내 말 좀 들어보시오!”
도적놈 겁박 한 번에 무너진 어느 장수가, 말문을 먼저 트니, 고관대작 벼슬이 무색하게 아우성이 나왔다.
물론 그들 딴에야, 안전할 줄로만 알던 병영 한가운데서 임금이 보낸 금군에게 추포당한 지금,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솟을 구멍 찾을 수밖에.
그리고 개중 하나가 마침내 저의 아는 바를 그나마 논리 갖추어 내놓았다.
“그놈이 우리에게는 모두 이곳 경기병영으로 모이라 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본인은 도성에 무슨 일이 있다고 그곳으로 간 듯하오. 임 당수가 두리손 그자를 붙잡고자 한다면, 필시 마포나 여타 성저(城底, 성 바깥) 동리들을 찾아보면 될 것이오.”
“뭐? 도성?”
“그렇소이다. 또한 수사(水師)가...”
허나 그자가 말을 마치기 전, 바람 가르는 소리와 더불어 그 목을 뚫고 화살촉이 삐져 나왔다.
“쳐라! 감히 우리 성상을 해치려 모의한 역적이다!”
“보아라! 금군조차 한통속이구나!”
“임거정 저자도, 이제 헌법이 다 세워졌으니 임금마저 갈아치우려는 것일 테다! 붙잡아라!”
앞서 금군이 내질렀던 것에 비할 수 없는 함성이 우레처럼 사방을 에워쌌다.
“대소인민(大小人民)의 뜻에 반하는 적당을 처단하라!”
“인민의 적에게 죽음을!”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뒤에 누가 있었는지, 어떤 고민이 있었는지 훤히 보이는 함성도 개중 몇몇 도드라졌다.
“햐, 녀석, 머리 좀 썼구만.”
“임 당수, 어떻게 합니까?”
“어쩌기는. 너무 쉬웠을 때부터 뭔가 낌새 이상하다 느끼지 않았소? 이제 눈치껏 빠져나가는 수밖에.”
숭례문 앞, 한때 임꺽정이 의민당 거느리고 상경하여 진을 치기도 하고, 조운선 타고 숭례문 칠 때 지나기도 했던 그 대로에 깃발 하나가 세워졌다.
창의군(倡義軍) 같은 진부한 이름 대신, 조선국 대소인민의 참된 뜻을 받든다 하여 지금껏 이 땅에 없던 이름을 내걸었다.
그리하여 휘날리는 깃발에는,
‘조선인민군 원수 두리손 (朝鮮人民軍 元帥 豆里孫)’
열 글자가 각각 진서와 국문으로 나누어 적혔다.
“원수, 수원에서 막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우리 뜻대로 되었다 합니다.”
“홍언성 그자가 제대로 하였나 보군그래.”
“그렇습니다. 다만 홍언성은 끝내 임꺽정 손에 목이 달아났다 합니다.”
두리손의 측근, 도사 지함두가 담담히 말했다. 죽은 사람은 저 자신이 아니었으므로.
“임꺽정은 어떻게 되었나?”
“함께 병영에 들어온 금군은 열에 일곱이 죽었고, 나머지는 모두 붙잡혔습니다. 다만 임꺽정은 금군 열댓과 더불어 병영 영문을 뚫고 달아났는데, 영문을 지키던 홍언성 본인을 비롯해 병영 군사들은 모두 도륙이 났지만 임꺽정도 화살 두어 대를 맞았다 합니다. 그러니 필시 오래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기병영을 이끄는 것은 홍언성 하나만이 아니었다. 머리 하나를 벤다 한들 아홉이 남아 있는 격이니, 한둘쯤 중간에 고꾸라진다 하여 크게 발목을 잡히진 않을 것이다.
거사를 여러 달 늦추며 두리손 그가 공들여 준비하였던 것 중 하나가, 오늘에야 그 효험을 드러내고 있었다.
군을 지휘하기는커녕 발목만 잡기 마련인 무능한 장수 대신, 실무를 직접 맡는 군관들끼리 모여 그 지휘의 책무를 나누어 수행토록 하였다. 누군가는 군을 이끌고, 누군가는 계획을 짜며, 누군가는 군량 나르는 일만을 맡는다.
마치 그물 짜듯, 군교들의 씨줄과 날줄을 엮어 그러한 체제를 만들어내었다. 어찌 보면 이준경이 시작한 군제의 개혁을 두리손이 매듭지어주었다 할 수도 있으리라.
물론 가장 위에서 모든 일을 통솔해야 할 사람으로 두리손 저는 턱없이 부족하다. 재주도 부족하고, 몸을 나누어 여러 자리에 동시에 임할 수도 없다. 허나 이번 거사의 싸움은 고작해야 한두 번으로 그칠 터이니,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래 갈 것이다. 그자는 그렇게 쉽게 죽을 자가 아니야. 아마 어떻게든 이쪽 한양으로 넘어와, 저의 흑의군과 함께 우리를 무너뜨리려 할 것이다. 수원에서부터 강 남쪽까지, 모든 나루터를 가로막고 길목마다 사람을 풀어 발목을 잡아라.”
고작 병력을 푸는 것 정도로 임꺽정을 죽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두리손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곳 한양 앞에서 제대로 한 판 붙을 때 두리손 그에게 승산이 생길 만큼은 임꺽정의 힘을 뺄 수 있을 것이다.
“그,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마지막 한 번의 칼부림을 그리던 두리손의 주의를 끄는 이 있으니, 바로 구사일생으로 임꺽정 대면하고도 살아났던 동창의 이성량이었다.
“무엇이 말이오?”
“저 깃발도 그렇고, 내거는 대의(大義)도 그렇고... 장 대인께서 그리 기껍게는 여기지 않으실 텐데요.”
그렇게 되면 가운데서 연락을 담당하던 이성량에게도 화가 미칠 테니, 그가 께름칙하게 여기는 것도 이해는 할 만하였다.
허나 두리손은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 그러니까 백성들을 속이기 위한 – 이제 와서 그럴 여유도, 그럴 수단도 없었다 – 것이 아니라 그저 사만 군세의 대부분을 이루는 일반 군졸들을 설득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은 이러하였다.
그들의 손으로 세운 헌법을 무너뜨리기 위해 덕흥군이 군부의 대신들과 공모하였다. 이를 안 두리손과 의로운 군사들은 마침내 거병하여 그들을 주벌하였고, 이제 이 음모에 함께한 이들, 즉 임금의 눈을 가리는 무리를 색출하기 위해 도성으로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임꺽정 본인이 자신이 판 함정, 어차피 제거하려 했던 무반 고관들을 미끼로 내건 함정에 빠질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다른 이가 역모를 꾸며서 그저 먼저 손을 썼을 뿐이라 우기면서, 임금 주변의 간신을 마저 쳐내겠노라 하는 것이야, 명국이라면 모를까 조선에서는 이미 한 번 먹힌 바 있던 술책이오. 계유정난이라고 들어보셨소?”
두리손의 능청맞은 대꾸에, 이성량이 답답한 가슴을 두드렸다.
“지금 그 얘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 호헌(護憲, 헌법을 지킴)이니, 인민군이니 하는 것 말입니다. 저 무엄한 소리를 언제까지...”
“무엄하다니? 이게 다 조선국 국인의 뜻을 받드는 일인데.”
그러고는 낯빛을 진중하게 고쳐, 이성량의 어깨를 붙잡고 단언하였다.
“임 당수와 약속한 일이오. 그를 죽이고 그의 당을 무너뜨릴지언정, 그가 만들어낸 제도까지 부수지는 않을 것이오. 오히려 더 공고하게 만들고 키워나갈 심산이외다. 다만 그 맨 위에서 권병을 잡고 실세로 행세하는 이가 달라질 뿐이겠지.
재조헌법을 다시 세우는 것도 오로지 이번 권점의 원리와 원칙을 존중하여 이루어질 것이며, 나라의 법도는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 백성의 뜻에 맞추어 바꿀 것이오.”
그리 된다면, 사후에나마 다시 재조론 따르던 이들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요, 탕평당과 민주당 사람들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다. 임꺽정과의 약조를 지키는 것뿐 아니라 이번 거사가 끝난 뒤에도 계속 집권하기 위한 방도로서도, 이 길이 두리손이 생각한 최선이었다.
물론 그것만 해도 승산 희박한 도박이지만, 다른 보다 쉽고 천박한 길, 예컨대 그저 우직한 수의 폭력으로 밀어붙이는 일은 – 이제는 세상 사람이 아닐, 저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무반들의 생각과는 달리 - 더욱 승산이 희박했다. 설령 성공한다 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었거니와, 두리손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다.
“장 대인이 그것을 꺼린다면, 다른 끄나풀 알아보아야 할 일 아니겠소? 물론 이번 거사가 만에 하나, 장 대인이 도움을 아껴 도중에 고꾸라진다면, 그 후과도 장 대인이 감당해야 하겠지만.”
애초에 장거정이 원하는 것은 임꺽정과 민주당의 축출이 그 첫번째요, 조선을 그 무슨 대일통 타령에 어울리도록 새로이 자리잡게 하는 것은 그 다음일 테니, 협상의 여지가 있지 않겠는가.
“그보다, 저 성을 어떻게 칠 생각이십니까?”
“경기수영과 삼남 곳곳의 수사에서 화포를 빌려오기로 했소.”
“화포를 빌려온다면...”
“화포가 빠지는 만큼 인천 앞바다를 봉쇄한 수사(水師, 수군)의 힘이 약해질 것을 걱정하는 것이라면, 우리 장 대인 덕에 방도를 얻지 않았소이까.”
비록 제대로 된 수군은 아니지만, 인천 앞바다에 오가는 큰 배들은 그 덩치만으로도 위협이라 할 만했다. 지금쯤이면 그 배를 다룰 뱃사람들 태반이 인천에서 억류되어 있을 것이지만, 그들 모두를 묶어둘 수는 없을 터였으므로 화포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공성을 위해 그 화포를 끌어 쓴다면 포위망은 약해질 수밖에 없으므로, 이성량의 참견에는 나름 위해주는 뜻도 있었다.
“겨울 동안 기다린 것이, 그저 군세를 가다듬기 위함만은 아니었소. 포르투갈 배들이 지금쯤 화약과 화포를 싣고 충청도 앞바다를 지나고 있을 것이외다.”
“아!”
“그대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앞으로 우리 계책에 참견하는 것은 허용치 않겠소. 뜻대로 이루어졌다는 그 소식을 북경에 보낼 준비만 하면 되오.”
적어도, 임거정이 그 명 다하였다는 소식 정도는 곧 북경에 부칠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생각에 빠져, ‘뜻과 달리, 우리가 이 위태로운 노름에서 끝내 실패하여 고꾸라졌다고 알릴 준비도 해야겠지만’이라 덧붙이는 두리손의 말까지는 귀담아듣지 않는 이성량이었다.
아무리 임꺽정이 그 무명 드높다지만, 다친 몸으로 숱한 군세를 뚫고, 장강 방불케 하는 저 너른 강을 넘어 한양까지 돌아올 수 있겠는가? 도중에 스러질 공산이 훨씬 더 컸다.
“한양으로 가는 길목은 모두 막혔다 합니다, 당수.”
그 무렵, 어느 이름 모를 동리의 작은 집 안방에 드러누운 꺽정이에게, 역시 이름 모를 집주인은 간곡히 말해주고 있었다.
“알려주어 고맙소. 예상은 하였지만.”
화살 맞은 곳을 칭칭 동여매고 금창약(金瘡藥)까지 발랐으니, 겨우 추격하는 이들을 떨쳐내고, 지쳐 쓰러지려는 몸을 겨우 가누며 걸어가던 꺽정이를 알아본 집주인 덕택이었다.
혹여 그를 밀고하거나 하지는 않을까, 그날 밤 지친 두 눈을 한 각에 한 번씩 뜨면서 몰래 경계한 것이 무색하게도, 집주인은 정말로 꺽정이를 위하는 마음뿐인 듯하였다.
“우리 동리 사람들은 모두 지난 권점에서도 오복헌법을 찍었습니다. 저놈들이 무어라 떠들든, 당수 등 뒤에서 고변하거나 하지는 않을 겝니다.”
“그건 임자 생각이고, 사실 사람이 남을 고변하기가 그리 어렵진 않다오. 그래도 말씀만이라도 감사하오.”
지난 생에서, 청석골을 버리고 구월산으로 쫓겨 들어갈 때 그들 일당을 도와주는 백성은 없었다. 그 누가 남치근의 그 군세 앞에서 감히 임꺽정 저의 편을 들어줄 엄두 내었겠냐만.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도움을 받아, 목도 축이고 상처도 돌볼 수 있게 되었으니, 목석 같은 꺽정이로서도 감회가 없을 수 없었다. 그가 없었더라도, 이지함이 마련한 ‘중책’에 따라 움직일 수는 있었겠지만, 도중에 혼절하여 고꾸라지거나 저 추격하는 무리에게 붙잡힐 공산도 결코 적지 않았으리라.
“자, 그럼 가 봐야겠소.”
벌떡 일어나, 저의 칼을 되찾고 피가 다 지워지지 않은 옷을 도로 차려입는 꺽정이였다.
“아니, 어디로 가시렵니까?”
“화살 맞는 것까지는 계획에 없었지만, 저 몹쓸 것들이 경기 일원 장악하는 것까지는 나름대로 예상하고 계책을 세워두었거든. 아, 그렇다고 임자 공덕을 내가 가볍게 여긴다는 말은 아니오.”
딴에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며, 싸리문 열고 나서는 꺽정이였다.
한강 주변 나루터만 감시하던 ‘인민군’ 군교들은, 암만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아 어디 논두렁에 쓰러져 죽었으리라 은근 기대하던 임꺽정이 살아서 나타났다는 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한강으로 가는 길목만 지키라 한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 경악만 하고 그칠 뿐이었다. 임꺽정이 한양 대신 인천에 나타난 것이 어찌 그들 잘못이겠는가.
그리고 인천에 당도한 임꺽정이 그 옛날 한양 휩쓸던 가락을 되살려, 인천의 뱃사람들 몇몇을 구해낸 것 또한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코쟁이 뱃놈 핀투 선장의 카락과 갈레온 대선들은 모두 닻을 내리고 있었고, 그 배를 몰 뱃사람들도 모두 연금된 채 인천에 붙잡혀 있었으니, 이는 두리손이 미리 알아보고 그들부터 붙잡을 것을 경기수영 및 병영 군관들에게 지시한 덕이었다.
허나 얼마 전 동래에서 완공된, 조선에서 만들어진 첫 카락선은 그 명단에 없었으므로, 고스란히 임꺽정의 손에 들어가 황해도로 넘어갔다.
민주당의 전복을 위해 현지 세력과 적극 협력하라는 리스본 정부 및 고아 부왕령의 지시에 의거하여, 화포와 화약을 넘겨주러 교동도 경기수영으로 향하고 있던 포르투갈 배들은, 그들의 카락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게 생긴 배가 그들 옆을 지나갔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전해주었다.
그리고 첫 번째 탄환이 도성 성벽을 때릴 무렵에야 그 전모를 알게 된 두리손은, 그저 실소 머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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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막부부터 오늘날 자위대 조직까지, ‘막부’나 ‘막료’ 같은 표현은 일본과 주로 연관되어 우리 귀에도 친숙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본디 두 표현은 조선을 포함해 동아시아 전체에서 널리 쓰였던 것으로, 조선시대에도 ‘막부’는 사령부가 위치한 현장지휘소라는 뜻으로, ‘막료’는 야전에서 지휘관을 보좌하는 이들의 총칭으로 자주 쓰였습니다.
홍언성은 원 역사에서는 1555년 을묘왜변에서 강진현감으로 재직하던 중 왜적이 나타나자 가장 먼저 ‘역돌격’을 실시하여 그 이름을 사서에 처음 남겼습니다. 결국 홍언성은 곤장 1백 대와 삼천리 유배형을 선고받았고, 복권 논의가 조정에서 나왔을 때 ‘그’ 명종에게 ‘적합하지 못한 인물’이라는 평을 듣고 복권이 무산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곽순수와 함께 임꺽정을 잡는 공을 세웠고, 겨우 복권되어 벼슬이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이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