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89화 (189/259)

56. 만인지적 (2)

“안사람에게 혼나겠군.”

저도 모르는 새 조선의 도원수가 된 임꺽정이 저의 검은 머리를 북북 긁었다. 골치 아플 때 머리 긁는 것이야 그의 버릇이라지만, 평소와 달리 왼손으로 긁고 있었다.

그 옛날 구월산 아래에서 남치근이와 싸웠을 때 이후로 가장 처절하게, 악귀나찰처럼 싸우며 경기병영을 빠져나온 그 후과가, 아직도 몸에 확연하였던 것이다.

겨우 은인을 만나 금창약을 바르기는 했지만, 그것이 영 시원찮았는지, 아니면 때를 놓쳐서 그랬는지, 상처가 덧났다.

배가 조금 느리기라도 했다면, 그래도 조금은 가라앉은 채로 봉산에 당도했을 터인데, 빠르기는 또 어지간히 빨라서 – 덕분에 뒤늦게 추격해오는 경기수영 전선들을 멀찌감치 따돌릴 수 있었지만 – 어느새 대동강 어귀 비파곶(比巴串)에 닿았다.

이제 여기서 작은 배로 갈아타고 물때를 기다려 대동강으로 들어간 뒤 황주와 봉산 경계에 있는 청룡포(靑龍浦)에 내리면 이지함이 마련한 중책(中策)은 시작할 준비가 끝나는 셈이었다.

“화살 맞고 덧났는데 안사람 걱정부터 한다니, 과연 그 신씨 마님의 따님답다 하겠습니다. 저 보거라, 도키치로야. 결혼이 저렇게 무서운 것이다.”

“우리 네네(ねね)는 안 그럴 겁니다.”

배가 청룡포에 닿게 되면 그때부터는 한동안 이런 담소화락(談笑和樂) 즐길 때가 없을 터였으므로, 인천 망양당에 숨어 있다가 꺽정이에게 붙들려 온 서림과 도키치로는 열심히 꺽정이를 놀렸다.

“네네는 또 누구냐?”

“그, 그런 사람 있습니다.”

어머니와 배다른 형제들을 구한 도키치로는, 그사이 약장수 고니시 류사가 빌린 배편으로 조선에 돌아왔다.

그런데 도중에 사카이에서 배를 기다리던 차, 그의 발목 잡는 이들이 여럿 있었으니, 하야시 쇼군의 가신, 그 오와리 얼간이조차 기선으로 제압한 무사에게 저의 여식을 안기려는 집안이 수두룩했던 것이다.

헌데 그 많은 여인들 중, 정작 도키치로 이름도 모르고 사카이에 구경을 왔던 아사노(浅野) 집안의 양녀 네네가 도키치로의 무엇이 좋은지 푹 빠져버렸다. 다른 여인들은 소문과 다른 도키치로의 실체에 경악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며 은근히 거리를 두었지만, 네네만은 졸졸 따라오다 못해 아예 류사의 배에 밀항까지 해버린 것이다.

지금은 도키치로의 가족과 함께 동래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번 난리가 끝나면 그때 어찌할지 결착을 보겠노라 다짐하였지만 막상 떨어진 뒤에는 그 귀여운 얼굴이 눈에 계속 어른거렸다.

“당수, 배를 옆에 대었습니다. 얼른 가시지요.”

강화도 앞바다에서 마주친 배가 포르투갈 카락이었음을 똑똑히 보았던 핀투 선장이, 복잡한 심경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그렇게 다시 대동강 따라 얼마나 거슬러 올라갔을까.

“오랜만이로군.”

“제 눈에는 저게 다 일감으로 보입니다.”

“적어도 나처럼 목숨 걸고 싸우지는 않잖소. 대신 군량미니 마초(馬草)니 대느라 머리는 조금 터져나가겠지만.”

인천에서 서림을 끌고 온 것은, 바로 이것을 위해서였다.

“그대도 우리 당 사람인데, 어디 가서 내세울 벼슬 경력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소? 중군(中軍, 관찰사 아래에서 군정 실무를 맡는 보좌역)이 종6품이던가.“

그렇게 쓸데없는 농지거리나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청룡포가 지척으로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다친 곳 감춰야겠소. 야, 도키치로야, 너도 와서 좀 도와다오.”

서림이 별 생각 없이 꺽정이 겉옷을 벗기자, 다행히 더 붉게 물들지는 않은 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당수?”

“왜 그러느냐.”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

청룡포 나루터 옆 언덕배기에, 치마자락 강바람에 휘날리며 어린아이 하나와 갓난아기 하나 대동하고 있는 여인이 있었는데, 암만 생각해도 임꺽정 어깨 두르고 있는 비단이 그 눈을 피해갔을 것 같지는 않았다.

짝- 하는 차진 소리와 함께, 꺽정이 얼굴이 휙 돌아갔다.

그리고 뒤이어, 꺽정이 품에 그 보드랍고 따뜻한 몸이 푹 안기며, 흐느꼈다.

“미안하오.”

“어쩔 수 없었던 것은 알아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소.”

“다음부터는 아예 이런 짓을 하지 마세요.”

명희가 그저 낭군이 도검을 무릅쓰는 것을 두려워하여 하는 말이 아님을, 꺽정이는 알 수 있었다. 자신도 똑같은 생각을 하였으므로.

지금껏 꺽정이 저의 장기로 삼았던 수법. 온 세상에서 먹혀들었던 바로 그 수법은, 저 일신의 무용으로써 적진을 헤집고 다니는 것이었다.

허나 상대가 과감하게 적장만 사로잡아 승리를 날로 먹으려 하는 그 도둑놈 심보를 예상치 못하였을 때는 제법 효험을 볼 수 있었을 계책은, 반대로 상대가 능히 그것을 간파할 수 있게 되면 쓸모는커녕 독만 될 터였다.

두리손이 한 일을, 꺽정이가 수두룩하게 만들고 다닌 그의 다른 적들이라고 못하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교지가 내려왔어요. 축하드립니다, 도원수 영감.”

엄밀히 따지면 품계는 오르지 않고 그저 수(守) 자 붙은 원수직이었으니 ‘영감’은 아니었다. 허나 여전히 젖은 명희의 눈망울을 보면, 영감 두 글자에 토를 달거나, 그 축하한다는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거나 하지는 못할 터였다.

“도원수? 내가?”

“도성의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좋지 못하답니다.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바로 이 교지였다고 하더군요. 물론 도체찰사를 맡으신 숭덕재 대감께서 직접 군을 이끌고 남하하시겠지만, 도원수는 엄연히 우리 낭군이랍니다.”

도성 안에서 자력으로 포위를 풀 방도는 없었다. 굳이 방도를 구한다면, 아예 도성을 버리고 온 힘을 다해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이었는데, 그 뒤로는 결국 경기와 강원, 충청 군사와 나머지 도의 군사가 맞붙어 결판을 내는 것밖에 답이 없었으니 이것은 곧 하책(下策)이었다.

이지함이 마련한 중책은, 빠르게 북병을 끌고 남하하여 한판 싸움으로 ‘인민군’을 꺾는 것이었는데, 도성 싸움에서는 이미 두리손이 승세를 잡아 ‘이길 수 있느냐’보다는 ‘이길 때 어떻게 이길 것이냐’를 고민하는 판국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두리손의 눈을 잡아끌어, 도성을 하루빨리 함락하는 대신 한판 거하게 붙도록 유도해야만 했고, 임꺽정이라는 이름 석 자를 내걸기로 한 것은 그 일환이었다.

“그래서 더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에요. 제발, 제발 더는 다치지 마세요.”

어찌하여 그런 수를 써야만 했는지는 십분 이해하였으나, 지금까지 남편이 보여준 모습을 돌이켜보면 도원수의 직이 반드시 어울린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대도 직접 조총 들고 싸워보지 않았소. 싸움터에서 그런 약조는 의미가 없소.”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아시잖아요.”

결국 꺽정이가 한숨 내쉬며, 풀썩 주저앉았다. 엄마와 아빠가 뭔가 심각한 이야기 하는 것을 깨달은 바우는, 동생과 함께 알아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내가 아는 재주는 그뿐이오. 일신의 무예로 치고박는 것 제하면 남는 것이라곤 도둑질 재주뿐인데, 그것으로 무슨 군사를 이끌겠소.”

처음 이지함이 마련한 중책(中策)에 따르면, 꺽정이는 어떻게든 북쪽으로 빠져나가 북병과 함께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저는 이윤경 아래에서 종사관 정도나 하면서, 니탕카이 놈과 함께 맨 앞을 맡아 이리 치고 저리 박을 줄로 알았는데, 도원수 교지가 떡하니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사형과, 내 벗들이 숱하게 도성에 갇혀 있는데, 내 이름 석 자만 내걸고 뒤에 빠져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러므로 약조를 못 하겠소.”

“정말 그런가요?”

명희가 다시 한 번 지아비 눈을 직시하였다.

“낭군께서는 늘 스스로 배운 것 없는 도둑놈, 어리석은 백정을 자처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그것뿐이냐고요.

우리 낭군은 천하에서 가장 많은 것을 겪어본 사람이지요. 글로는 배우지 않았을지언정, 그 눈과귀로 접하였고, 그 손으로 행하였지요. 북변의 숲속에서부터 남쪽의 바다 위에 이르기까지, 북경부터 서역의 이름 모를 도성에 이르기까지, 그간 겪었던 것이 과연 허사, 고작해야 술자리 안주감으로 끝날 일이었나요?“

꺽정이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에, 엄마 아빠 사이에 험악한 이야기 다 끝났다 착각한 바우가 돌아와 버렸다.

“저는 낭군을 믿고 있어요. 늘 그래왔답니다.”

아무래도 도적놈은 꼼짝없이 도원수가 되어야 할 모양이었다.

“놓친 그 무리 중에 선전관이 끼어 있었다고?”

여전히 포성 간간이 울리는 도성. 두리손은 급보를 받아보았다.

“예, 추격하던 이들 중 하나가, 한량 시절 인연 덕에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평산 곁 살여울에서 기습당한 추격대는, 먼발치서부터 조총을 얻어맞았기에 죽고 다친 이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다.

허나 인명이 덜 상하였다는 것보다, 사람을 놓쳤다는 것이 지금은 더 중하였다. 물론, 추격대가 전멸하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귀중한 첩보를 얻을 수 있기도 했지만.

“그리고 그 이후로, 포위를 뚫으려는 어떤 시도도 없었다는 말이지...”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도성 성벽. 허나 저쪽은 사기는 꺾였을지언정 군량은 충분하였다. 더구나일찌감치 은정고를 터뜨린다는 해괴한 수로 피난 행렬을 일으켰으니 도성 안의 입은 꽤 줄었을 것이다.

하지만 군량 풍족한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 고작 오만 관군 움직이느라 나라의 곳간이 텅 비고 곳곳에서 도저히 곡식 못 바치겠다며 소요가 벌어졌던 시절과는 천양지차가 있었다.

더구나 명분 싸움에서도 저쪽은 재미를 보지 못했다. 헌법을 때려부수고 국왕을 폐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국왕이 내건 위민(爲民)의 뜻을 받들고 또 헌법을 지키기 위해 인민의 정부를 세우겠다 하였으므로, 저쪽은 은근히 ‘설령 진다 하더라도...’를 생각하고 이쪽은 더욱 기세가 올랐다.

그리고 성 안에는 생각 많은 이들이, 너무나 많이 있었다. 연일 쏘아대는 화포, 성가퀴가 모두 박살나, 거병 첫날처럼 조총으로 막아내는 것도 여의치 않게 된 성벽. 그리고 언제든 성을 넘을 채비가 된 이쪽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다못해 사소문(四小門) 중 하나를 열고 그나마 포위가 허술한 북쪽을 찔러보려는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저 성벽을 슬슬 건드리려는 시도에 조총으로 답하여, 싸움은 싸움이되 일국 도성을 둘러싼 공성전이라 하기에는 부족할 만큼의 사상자만이 조금씩 나올 뿐이었다.

“저들은 정녕 북병이 남하할 때까지 버틸 심산이로군.”

“원수, 저쪽의 군병이 정예하고, 특히 흑의군과 양이 군사들은 개중에서도 특출나 우리 군사 서넛을 당할 만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수가 있고, 또 지난 며칠간 포격으로 아예 기세까지 꺾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명분에서 조금 손해 보는 것을 감수하고, 지금이라도 도성을 치시지요. 고양 쪽을 터놓고, 남은 삼면에서 쉴새없이 들이친 다음 도망치는 무리를 임진강에서 섬멸하는 것입니다.“

군막에 든 막료들이, 거리낌 없이 저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들이 두리손에게 열광하는 것은, 비단 그가 약속한 군부의 이권과 권세 때문만은 아니리라.

“퇴로를 뚫어주는 것도 좋은 방책이지만, 우리가 지닌 최고의 병장기는 곧 사졸(士卒)의 수입니다. 저들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여러 곳에서 동시에 송곳 찌르듯 성벽을 때리시지요. 그리하면 사흘 내로 저들이 지쳐 나가떨어질 것입니다.

제 셈이 맞다면, 이삼천 정도만 잃고 도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 방책은 잘못되었소. 오늘 아침에 동대문 쪽에서 성벽을 돌파한 이야기 못 들으셨소?”

연배가 한참 위인 군관이, 저의 나이와 경험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논변으로 설득하였다.

“잠시나마 성벽 잔해 위에 올랐을 때, 저들이 대로란 대로는 이미 모두 수레와 집기 따위로 가로막고 항전할 태세 갖추었다는 이야기 말씀이십니까?”

“그렇소이다. 우리 원수도, 또 우리네 군교들도 알고 있는 것처럼, 이번 거사에서는 명분이 가장 중하오. 저들도 알고 있는 게요. 그러니 어떻게든 우리가 우리 손으로 도성을 불태우도록 만들려는 것이지.

차라리 저들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것이 낫소. 저들의 전의를 꺾고, 우리 명분에도 일리 있으니 타협하자며 먼저 나서도록 만드는 것이 옳다는 말이오.“

덕흥군과 마찬가지로, 지금쯤 땅에 묻혀 있을 남치근이, 아직 말직에 있는 군교들까지 모두 모의에 동참시키자는 두리손 말에 냉소로 답한 일이 있었다.

요즘 군교들은 다들 머릿속에서는 자신이 제갈무후쯤 되었다 여긴다던가. 허나 두리손 생각에,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군교가 녹봉 받는 값을 하기 위한 길이었다. 어리석은 무부(武夫) 소리를 듣기 싫다면, 어리석지 않으면 될 일 아닌가.

아마 『생살부』에 살(殺)로 이름 올라간 자들도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잡상을 떨쳐낸 두리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훌륭한 계책을 내고 있으니 참으로 흡족한 일이오. 다만 공들이 모두 놓치는 바가 있으니, 바로 앞서 우봉 근처에서 놓친 그 무리 중에 선전관이 있었다는 사실이오.”

만약 경기병영을 들이친 그 한 번의 공격으로 모든 수가 다하여, 궁여지책을 짜내야 하는 상황이라면, 선전관을 보내는 대신 차라리 이지함 같은 이가 직접 도성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무언가 왕명을 받든 선전관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성(出城)하였다는 것은, 즉 미리 짜놓은 계책이 또 있으며, 그저 그것을 계획대로 실행하라는 말만을 전하고자 했다는 뜻.

“... 그리고 그 뜻은, 보나마나 북병을 끌고 남하하라는 것일 테요. 아마 그사이에 저들은 필요한 준비를 모두 마쳐두었겠지.”

아무리 십 년 사이 나라의 군제가 일신되었다 하나, 허울뿐이다가 얼마 전 일신된 군영과 그 전부터 최소한의 내실은 유지하고 있던 군영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북병 두 글자가 나올 때 움찔하지 않는 군관이 없었다.

“원수의 의중을 듣고자 합니다.”

“내 생각은 이렇소. 이미 도성 안의 저들은 뜻이 흔들려 있소. 허나 우리가 죽기로 저들을 들이치면, 저들 또한 죽기로 항거할 것이오. 금군은 그렇다 쳐도, 흑의군이나 다른 민주당 놈들은 아직 드러내지 않은 술수 한둘쯤은 가지고 있겠지.”

그 말에는 모두들 동의하였다.

“반면 북병은 어떻소. 저들이 어떤 대비를 미리 해놓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급히 남하하다 보면 기강은 흐트러지고 군사는 피로해질 수밖에 없소. 그리고 아무리 거침없이 남하한다 해도, 예성강과 임진강 두 강이 도성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지.

남은 시일 동안 무리하여 도성을 공략해, 지치고 명분도 떨어진 채로 북병을 맞이하느니, 차라리도성 안의 적들이 눈앞에서 마지막 실낱같은 바람이 끊어지는 것을 보도록 만드는 것이 더 좋다고 이 사람은 보오.“

그러나 두리손의 주장을 두고 제장(諸將)의 뜻이 갈리니, 두리손은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대신 반나절 여유를 두고 재고하자 하였다. 아직 그만한 여유도 있었거니와, 자신의 직감이 맞다면 장차 닥쳐올 싸움에서는 모두가 있는 꾀를 쥐어짜야 겨우 당해낼 듯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반나절은, 예성강 너머로부터 새로운 급보가 전해지기에 족하였다.

“도원수 임꺽정?”

“그자가 살아있었다는 말인가!”

“이미 인천에서 배 한 척을 놓쳤다고 보고했을 때, 나는 그대들에게 임꺽정이 살아있다고 말하였소이다. 반신반의한 것은 그대들이오.”

급히 다시 모인 군교들 앞에서 두리손이 말했다. 그러나 냉소 없이 진지한 표정이었으므로, 그 누구도 못마땅한 기색 내보이지 않았다.

“임꺽정 그자가 전서(戰書) 같은 무언가를 보내왔다 합니다.”

무릇 전서라 함은 힘 닿는 한 고상한 말로 상대를 꾸짖고 저는 부풀리며, 있지도 않은 백만 대군으로 쳐부수겠다는 호언장담 가득한 글이었다.

헌데 강을 넘어온 ‘전서’는,

‘두리손 보아라. 정정당당하게 한 판 붙자꾸나. 내 곧 그리 간다.’

이것이 끝이어서, 그 뒤에 진서로 쓴 ‘수 평안함경양도도원수 임거정’과 길이가 얼추 비슷하였다.

그 한 문장의 묵직함이 주는 감동은 실로 엄청났던 바, 방금 전까지 갈렸던 막료들의 뜻이 이제는 하나로 모였다.

“그자가 북병을 이끈다면, 분명 비상한 술수를 부릴 것입니다. 앞서 소장이 원수의 뜻에 반하였던 것을 철회하겠습니다.”

정작 임꺽정 본인은 도원수 직함에 영 부담을 느꼈다는 것을 아는 이 있다면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 일이었다.

허나 무관들 생각에, 임꺽정은 언제 그 소매에서 어떤 해괴한 기책(奇策)을 꺼내도 이상하지 않은 작자였다. 십 년 전 의민당 난리는 물론이거니와, 고작해야 관군이 강 건너 여진 부락 몇 곳 불태울 때 북쪽 깊숙히 들어가 왕주 와일란이라는 놈을 참하였고, 대국조차 어찌하지 못하던 왜구 두령 왕직을 한 번 싸움으로 붙잡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들 중 그 누구를 꼽아도, 두리손 한 사람만큼이나 임꺽정 석 자에 천착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겠지만.

“자, 그러면 이대로 도성을 틀어쥔 채, 북병을 쳐서 이기고 도성의 투항을 받아낸다는 것을 우리의 모계(謀計, 계획을 짬)의 대강으로 삼겠소.”

“이의 없습니다, 원수.”

“즉시 계책을 모으십시다!”

조선의 군사가 장기로 삼는 것은 예로부터 첫째가 활이요, 둘째가 기창(騎槍, 마상창)이니, 적어도 무과 과목에 따르면 그러하였다.

허나 국초 이래로 제도가 오래되면서, 처음에는 기창 놀리는 마병이 줄어들고, 그 뒤로는 마병 자체가 줄어들었으니,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큰 문제였다.

“그래도 임 당수 그대 당이 있어, 급히 마련한 군마가 큰 도움이 되었네.”

봉산에서 하룻밤 지낸 뒤 평양으로 달려온 임꺽정을 맞이한 이윤경은 간략한 인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난리에 대비하여 마련한 병력, 그러니까 급파할 준비가 되어 있고 이미 명에 따라 이곳 평양으로 모이고 있는 이들이 일만일세. 이미 이곳 병영에 있는 이까지 합치면 일만이천이고.”

“그리고 곧 우리 전사들도, 우리 모두의 은인이자 동족인 암바 버일러를 돕기 위해 당도할 것입니다. 조금만 더 여유를 주신다면 와르카와 노토 쪽에서도...”

“어차피 많은 것보다는 빠른 것이 더 낫다, 니탕카이야. 지금 있는 삼천으로도 충분하다.”

도합 일만 오천. 이 이상은 오히려 짐이 될 것이다.

“니탕카이가 데리고 있는 녀석들 사정이야 어르신보다 내가 더 잘 알 테니 그렇다 치고, 어르신의 일만이천 군세는 대충 뭐하는 놈들이오?”

“모두 마병이라고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대개는 그냥 말만 탄 보병일세. 기창(騎槍)을 아무리 편곤으로 대체하여 늘린다 해도 한계가 있고, 또 여기 니탕카이 공(公)을 통해 들여온 몽고마들은 힘은 좋지만 아무래도 왜소해서.”

그 천병국(압카이 아파시 구룬)이라는 영 괴이쩍은 이름이 걸리기는 하지만, 이윤경은 제법 나라꼴 갖추어가고 있는 압록강 건너편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슴지 않고 니탕카이를 ‘공’이라 불러주었는데, 꺽정이와 니탕카이 두 사람 모두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만하면 되었소. 방금 말한 것처럼, 말만 타고 있으면 일단 절반은 풀린 셈이오.”

“뭔가 계책이 있는 게로군?”

“이번 난리 끝나고 논공행상 하게 되면 꼭 우리 아내도 이름 올려주어야 하겠소.”

“이 사람, 오랜만에 보았더니 팔불출이 다 되었군그래.”

이윤경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못 들은 체 하며, ‘임 도원수’가 말을 이었다.

“우선은 하루하루가 급하니, 갈 길을 달려나가는 데 주력하십시다. 두리손 그놈이 정녕 나를 일전에 패퇴시키고자 작정을 하였다면, 걸려들 수밖에 없는 그런 술책이 있소.”

“북병이 남하하고자 미리 준비를 갖추었다 한들, 조정에 알려야 할 만큼의 움직임이 있었다면 필시 욱재 대감이 이를 알았을 것입니다.”

“대놓고 군을 움직였는데, 욱재 그이가 눈 어둡고 귀 멀어서 몰랐다고 해두세.”

해가 떨어졌지만, 두리손이 모아둔 군교들의 눈은 어두워지지 않았다.

“그렇다 쳐도 예성강에 이를 때까지 보름은 걸릴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저들이 정말로 빠르기만을 추구하였다면 필시 병력의 태반이 마병일 것입니다. 군량이야, 지금우리가 그러하듯 현지에서 은으로 살 수 있으니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마초(馬草, 말먹이)는 그리 쉽게 구할 수 없지요.“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떠들고 있는 동안에도, 서림과 명희가 애써 준비한 마초는 북쪽에서 남하한 말들이 다음날도 종일토록 뛸 수 있는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보름이 지난 뒤에 예성강에 당도한 북병은 이미 지쳐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성강에서 조금씩 물러나 임진강까지 퇴각하며, 북병을 더욱 지치게 만들어야 합니다. 나루터를 점거하고, 그곳에서 넘어오는 길목마다 조금씩 병력을 배치해, 싸우지 않으면서도 괴롭히는 것입니다”

“잠깐, 저들이 예성강을 반드시 넘는다는 것은 어찌 장담할 수 있습니까?”

“저들이 예성강을 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더욱 이로울 것입니다. 신계나 그 북쪽에 이르면 강이 고작 개울 정도로 줄어드니 어려움 없이 건널 수 있겠지만, 산길을 넘다 보면 말과 사람이 함께 지치고, 늦어지기는 더욱 늦어질 것입니다.

반면 저들이 강을 건너고자 하면, 평소 대군이 건널 만한 배가 구비된 그런 나루터는 몇 곳 되지 않지요. 의주대로 인근에서는 강음 조읍포 정도가 될까요.”

그러나 그 다음날, 임꺽정이 이끄는 일만오천 군세는 평산 살여울에 새로 만든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대략 일만사천번째 되는 이가 지날 무렵부터는 다리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나고 일만사천구백구십번째부터는 목숨을 걱정해야 했지만, 어쨌든 모두 무사히 건넜다.

“너무 뻔한 수요.”

“원수께서는 무엇을 이르시는지요?”

“일일이 강을 건너온다는 것 말이오. 상대가 임꺽정이라고 호들갑 떨던 것은 비단 이 사람 혼자만은 아닌 것 같은데. 내 비록 군략에는 어둡지만, 임꺽정 그자가 이렇게 뻔한 수를 두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 수 있소.

예성강에서 적을 막는 것은 지금 개성에 있는 병력으로 충분하오. 그들로 하여금 다른 일은 하지 말고, 그저 북병에게 어떤 특이한 동향이 있는지만 확인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우선은 강원도와 충청도 병사를 이곳 도성으로 모은 뒤, 임진강에서 적을 막는 것으로 합시다.“

상대가 임꺽정이니, 한 번에 모든 수를 두어버리는 것은 실책이 된다는 말. 비록 군략에 어두운 두리손의 말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군관들이 놓칠 수 있는 점을 짚어주었다.

그리고 곧 그 말이 옳다는 것이 밝혀졌다.

“급보입니다! 북병의 소재가 밝혀졌습니다!”

살여울에서 선전관을 놓친 지 보름째 되는 날. 임꺽정과 그의 군세가 어디 있는지 마침내 밝혀졌다.

“이거... 장계가 잘못된 것 아닌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평산에서 바로 토산으로 넘어간 북병은, 그대로 삭녕과 연천을 거쳐 한탄강까지 넘어왔다.

그리하여 지금쯤 예성강 강변에 막 당도하였어야 할 이들은, 포천에 닿아 있었다.

“하루거리까지 왔군. 하!”

“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그러고도 자네가 군관인가! 이럴 때에 대비하여 병력을 함부로 흩지 않고 모아놓았네!”

“원수, 명을 내려주시지요.”

그리고 소란은, 오히려 웃음짓고 있는 두리손에게 모두의 눈길이 쏠리며 자연히 가라앉았다.

“우리는 이곳 도성 앞을 지킬 것이오. 저들이 달려들 수밖에 없도록. 그리고 도성 안의 고관대작들이 싸움을 볼 수밖에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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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네(혹설에는 오네おね)는 출가 후의 법명 코다이인(高台院)으로 더 잘 알려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 부인입니다.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에 충실한 내조뿐 아니라 탁월한 정치력으로 큰 도움을 주었고, 히데요시의 상전 노부나가조차 그를 정중히 대하였지요. 그는 본디 도키치로의 집안보다 아주 약간 격이 높은 정도인 하급무사 집안 태생이었으나, 역시 그보다 조금 더 격이 높은 아사노 집안에 양녀로 들어갔고, 막 오다 노부나가 아래에 들어와 조금씩 사다리를 오르고 있던 히데요시와 눈이 맞아 결혼에 이르게 됩니다. 히데요시의 여성편력과 본인의 불임으로 인해 후일 마음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그의 재능은 노부나가를 비롯해 당대의 많은 유력자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나중에는 일본의 여성으로서 천황가 밖에서 가장 높은 자리라 할 수 있는 종1위 품계까지 받게 됩니다.

다만 두 사람의 풋풋한 연애에는 현대적 관점에서 다소 뜨악한 점이 있습니다. 몇몇 야사에 따르면 혼례 전에 이미 정을 통한 사이였다고 하는데, 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1561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코다이인의 생년은 1548~1549년경으로 추정되지요.

전근대 한방에서 외과수술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외상 치료를 위한 봉합수술은 예외였습니다. 조선에서 편찬된 의서만 보아도, 날붙이에 의한 깊은 상처부터 가정에서 흔히 생길 수 있는 자상까지 다양한 상처에 대한 봉합수술 기법이 기록되어 있지요. 꺽정이가 붕대 대신 포목을 환부에 부른 것은 그 일환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방성혜 외, 2010. “한국 한의학 문헌에 나타난 봉합수술에 관한 소고.” <한국의사학회지> 23(2)).

조선 초 군의 핵심은 기병으로, 창기병과 궁기병이 균형 있게 편제된 것이 조선 초의 여러 병서(兵書)에서 언급된 이상적인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14세기 초부터 실제로는 창기병의 수가 궁기병보다 현저히 적었고, 나중에는 비용이 많이 드는 군마 관리도 허술해지게 됩니다. 실제로 16세기 당시 북방에 근무하는 무관들이 주로 택하는 횡령 방법이, 군마를 몰래 요동에 팔아 은이나 다른 사치품을 들여오는 것이었지요.

니탕개의 난으로 함경도 북부가 큰 피해를 입자, 조선도 이를 인식하고 본격적인 대책 마련에 나섭니다. 그러나 그 대응책은 창기병의 충격력을 되살리는 것보다는 주로 화약무기의 성능을 개량하고 수량을 늘리는 쪽으로 강구되었는데, 정작 이러한 방향에 가장 부합하는 무기인 조총의 도입은 너무나 늦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어딘가 나사가 빠진 채 진행되던 조선의 군사혁신은, 여러 사회적 요인과 군제 자체의 한계가 맞물려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국란 앞에서 총체적 난국을 초래하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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