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죄의유경 (1)
반란이 끝나면 삼족을 멸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였으니, 자칭 가장 문명한 나라라는 중화 대명에서 이 분야에서는 가장 앞서 있었다.
반란이 성사되었다면 끝까지 시류 읽지 못한 치들의 삼족이 멸함을 당하고, 반란이 도중에 거꾸러졌다면 시류 읽지 못하고 그 반역도당에서 제때 빠져나오지 못한 자들이 멸해지기 마련.
“적어도 고식(姑息)은 얻었구나.”
그러므로 구사일생으로 인천을 빠져나와 겨우 북경에 닿은 이성량의 보고를 받은 장거정은, 고소(苦笑)일지언정 미소를 지었다.
금번 조선국 동란에 있어 장거정과 동창의 뜻은, 이왕이면 임거정과 그 무리가 고꾸라지면 좋겠지만 설령 실패하더라도 손해보다는 이득이 클 것이라는 데 모여 있었다. (물론 죽다 살아난 이성량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었다. 서로 끝까지 싸워 나라의 힘을 다하였다면, 굳이 대국의 힘을 보일 것도 없이 슬쩍 밀어붙이기만 하여도 다시 복속되었을 것이므로.
그러나 어떻게든 반란이 끝났으니, 이제는 숙청의 때가 올 수밖에. 장거정이 고식 얻었다 평하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두리손이라는 자 역시 임거정과 마찬가지로 사학(邪學)을 흉중에 품었으니, 어쩌면 이렇게 패하여 무너지는 것이 우리 천조에 더욱 이로울 수도 있을 터.”
사학이란 무엇인가? 바로 조선이 끝내 헌법을 세웠다는 소식을 (신선술에 빠져 몇 달 늦게) 들은 천자가 친히 지은 조서에 나오는 말이요, 그를 슬슬 꼬드긴 장거정의 말이기도 했다.
무릇 올바른 학문이란 경세치용(經世致用)을 벗어날 수 없고, 경세치용이란 곧 만사를 공(公)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요, 공(公)이란 곧 황상과 그 황상 모시는 조정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러니 밖으로는 충실한 번국이 조유(詔諭)를 어기게끔 만들고, 안으로는 강남과 화북의 유학(幼學)들이 감히 사사롭게 정사를 논하도록 만드는 그런 학문은 곧 사학(邪學)이라 아니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의권의 논변까지 사학이라 보지는 않소. 조선국에서도 오히려 그 의권을 바탕으로 군신상생(君臣相生)이라는 훌륭한 논의 개진한 이가 있더이다. 호를 회재(이언적)이라 하였던가.”
조선의 어정헌법 반포 이후로, 영문도 모른 채 삭탈관직을 당한 고공의 뒤를 이어 새로 저의 내각 꾸린 장거정은, 곧 저의 집을 활짝 열어 저와 뜻 같이하는 이들이 언제든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결코 검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엄숭이나 다른 권신들에 비하면 딱히 사치스럽지도 않은 그런 정원의 누각에 장거정과 조정길, 해서, 풍보 등 그의 당여들이 함께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그 인민 운운하는 것은 과하다 못해 가히 천하를 어지럽힐 수 있는 것이었소. 임거정과 그 무리가 세운 헌법 안에 담긴 단초를, 아예 겉으로 드러내어 휘둘렀달까. 여현(汝賢, 해서) 그대는 이를 헤아려주기 바라오.”
장거정 앞에서 자칫 사학 두둔하는 것으로 몰릴 수 있는 – 지금 어지간한 명의 큼직한 도회에서는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다 – 말을 꺼낼 사람은 해서 한 사람뿐이리라. 일동 중 가장 연장자로서 조정길이 한 발 앞서 해서를 타일렀다.
“물론 그 말씀에는 이 해 아무개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천조가 번국을 혼란케 하는 그런 계책은 잘못이지만, 조선이 스스로 어지러움을 일으켜 그것에 얽매이는 것은, 불자들의 말을 빌리면 응보(應報) 아니겠습니까.”
한성(한양)의 함락이 머지않았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만 하여도, 장거정과 그 당여들은 내심 걱정하였다. 그치들이 내세운 그 ‘인민의 정부’라는 것은, 민주당이 내세우는 사학보다도 한 술 더 뜬 것이기 때문이었다.
허나 두리손은 한성 곁 싸움에서 일패도지하였고, 권토중래는 생각지도 않은 채 곧장 투항하였다. 뒤이어 인천 앞바다를 메우던 수사(수군)도 포르투갈 카락선들이 빠져나갈 때까지만 버틴 뒤 곧장 투항하였다.
그리고 아직 죽지 않은 이들과 제 발로 투항한 이들은 모조리 묶여 한성과 각지 수영 등지에 구금되어 있다 하였다. 몇몇 군영에서는 갇힌 이들 감시할 간수마저 부족하여 급히 경군과 북병을 파견할 지경이라 하였다.
이들의 수효가 이처럼 많으니, 필시 민주당 안에서도 다툼이 일어날 것이다. 저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 외에 잘못이 무엇이냐. 저들이 내세운 그 인민 운운은 우리도 내놓던 말 아니냐.
거기에 두리손과 그 일파가, 저들만 죽지 않겠다며 다른 이들까지 끌고 들어가면 나라가 두쪽으로 갈라지지 않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이 모든 것의 근원을 따지면, 세상 어지럽게 만드는 논변을 내놓은 데서 기인한 것. 그러므로 응보라는 해서의 말에 장거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일리가 있소. 허나...”
“흠흠, 수보 대인, 우선은 여기 이 백호(百戶)의 이야기를 마저 듣고 논함이 어떻겠소이까.”
조정길의 언질에, 장거정도 해서의 말에 더 꼬투리 잡는 대신 전각 아래서 고개 숙이고 있던 이성량에게 다시 주의를 돌렸다.
“말씀이 옳소이다. 자, 마저 이야기하게나.”
이성량의 백호 벼슬은, 어디 요동총병 아래의 어설픈 백호가 아닌, 형식상 동창에 파견된 것으로 되어 있는 금의위(錦衣衛)의 백호였다. 여기서 더 올라간다면, 어디까지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오랑캐의 침공도, 내부로부터의 반란도 아니요, 고작 은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무너진 요동. 그 요동을 빠져나와 겨우 얻은 동아줄을 부담된다 하여 내칠 만큼 출세에 욕심 없는 이성량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군말 없이 하던 보고를 마저 이어갔다.
“... 결국 마지막 싸움에서 다툰 것은 고작 이만오천과 일만오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세만은 가히 용호상박(龍虎相搏)이라 칭함이 가당할 것이었습니다.”
“하, 양측을 다 합쳐도 사만 아닌가.”
도마뱀과 고양이 싸움이라면 모를까, 용과 호랑이에 그만한 다툼을 빗대는 것은 과장이 지나치다 할 만하였다.
그런데 조정길이 좌우를 둘러보니, 해서와 장거정은 동의하지 않는 듯하였다.
“양측의 형세와, 동원한 병법을 그대가 알아본 그대로 낱낱이 고하게. 우리가 문관이라 군문의 일에 어둡다 여겨 빠뜨리거나 하지는 말도록.”
“예, 대인.”
그리고 이성량은 장거정의 명에 따라, 자신이 그 전관평(살곶이벌)이라는 곳에서 본 싸움의 내막을 보다 상세히 고하였다.
그럴수록 장거정과 해서 두 사람의 표정은 어두워졌으나, 그럼에도 이성량에게 멈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군무에 어둡기로는 세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장거정은 자신의 대일통이 탁상공론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군병의 힘이 있어야 함을 깨우친 지 오래였고, 해서를 부려 우선 천조 대명이 지닌바 힘이 얼마나 되는지를 추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얻은 결론은 참으로 심각하였다.
“그래본들 소국(小國)의 사소한 다툼 아니오?”
주로 나라 안의 사론(士論) 다스리는 일에 바빠 군무는 잘 알지 못하던 조정길이 물었다.
“흠흠, 우리 사이의 이야기지만, 만일 임거정의 일만오천과 두리손의 이만오천이 합심하여 그대로 우리 요동을 치려 하였다면, 우리는 치중을 걱정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도 전에 그들이 산해관에 닿았을 것이니까요.”
“그 정도요?”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천조 대명의 저력은 실로 천하의 중심이라 할 만하였다. 장거정의 거친 계산으로도, 이 중원 땅에서 뽑아낼 수 있는 병력은 족히 이삼백만은 될 터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삼백만 중 실제로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는 군졸은 얼마 되지 않아, 지금처럼 겨우 섬서와 산서, 운남, 요동 등지를 방비하는 정도에 그친다는 것이었다. 수군으로 들어가면 더욱 참혹한 지경이었다.
그나마 경술의 변 이후 서계가 이미 조금씩 군제를 고쳐나가고 있었고, 또 ‘어디선가’ 많은 은이 강남에 유입되고 있었으므로 이제라도 바꿔볼 엄두를 낼 수 있는 것이지,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이삼십 년은 잡고 일생의 대계(大計)로써 나라의 군대 일으켜 세우는 일을 꾀하여야 했을 테다.
“그러니 이번 조선의 병란(兵亂)은 우리에게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조가 되어서 어찌 번국의 어지러움을 다행이라 칭하겠느냐, 하는 그런 말은 이 자리에서 나오지 않았다. 설령 그런 생각을 품는다 한들, 장거정 앞에서는 꺼내지 못할 것이었다.
“저들이 인민을 운운한 덕에, 나라 안의 인화(人和)가 크게 깨지게 되었습니다. 연루된 이를 찾아 없애고 무너뜨릴 터인데, 두리손 그자가 나라의 군관들을 대거 저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하지 않았습니까. 임거정이 끌어들일 수 있는 군세의 날개 한 쪽이 스스로 꺾인 것과 같지요.”
해서와 조정길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예 마음을 놓지는 않았다. 조선의 헌법이 그대로 서 있는 것은 변함 없었고, 헌법 따위 무엄한 것을 용납치 않는 황상의 뜻 또한 변함이 없었으며, 어느 하나는 굽혀져야만 했으므로.
그저 잠시 시일이 미루어진 것이요, 누가 먼저 굽힐지, 이미 시작된 그 다툼에서 소소하게 한 수씩 주고받은 것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경주에서 급히 상경하던 노선비 이언적은, 잘 깔린 길 덕에 어느새 충주에 이르렀다.
“역적의 일당이 어찌하여 우리 고을에 기어들어오느냐!”
“썩은 선비는 꺼져라!”
어디서 말이 퍼졌는지, 충주 읍내로 들어서는 길목 좌우에 사람이 가득 늘어서 있었다. 처음에는 욕설, 그리고 뒤이어 흙과 자갈, 이어서 돌멩이까지.
선비님 지나가신다며 눈도 마주치지 못하였을 상것들이, 거리낌 없이 모욕을 던졌다.
그러나 이언적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저를 미워할 만하였으므로.
윤원형에 대한 원한이 깊은 충주였다. 난을 일으킨 두리손은, 그 윤원형의 얼자라 하였다. 그리고 충주 사람들이 지지하는 – 그들과 뜻 달리하는 향반들은 이미 진작에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 임 당수의 민주당을 뒤엎으려 한 그 두리손은, 급히 상경하느라 부득불 충주를 지나게 된 이언적의 제자라 하였다.
그러니 어찌 저들이 돌을 던진다고 미워하겠는가. 모든 것은 제자를 잘못 거둔 이언적 자신의 잘못일진대.
“멈추시오!”
“그대들 마음은 알지만, 이것은 감사와 목사 두 분께도, 또 도성 되찾은 임 당수에게도 좋지 못한 일이오! 멈추시오들!”
급히 관아에서 뛰쳐나온 아전과 나졸들이 백성들을 가로막았다. 저들이 고을 수령방백과 임 당수를 논하니 그제야 침 뱉으며 흩어졌다. 지방관들이 인심 얻은 덕을 본 셈이었다.
“선생, 저희는 감영에서 나왔습니다. 고을 민심이 이와 같으니, 속히 저희와 함께 가심이 어떨지요.”
역시 이언적을 미워하는 기색 역력한 아전이 애써 공손한 시늉을 하였다.
이번 난리에서 경기와 충청, 강원 세 도 관찰사들은 비록 군권(軍權)은 없다지만 저의 도에서 역모 벌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며 호된 탄핵을 받게 될 터. 그런 와중에 경내를 지나던 이언적이 백성에게 화를 당했다 하면 더 큰 탄핵의 원인이 될 것이니 이리 조처한 것이리라.
과연 아전을 따라 동헌 옆 객사에 들었더니, 주변에 나졸을 보내 객사를 지킬 뿐 감사도, 목사도 인사하러 오지 않았다.
대신 인편으로 전하기를, 이미 나라와 군부(君父)께 죄지은 몸으로서 함부로 사람 만날 수 없다는 핑계를 내밀었다.
그러면서, 사나운 백성들을 피해 이곳 객사에서는 몸만 뉘이고 동틀 때 바로 떠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였으니, 아무리 사정이 있다지만 명백한 박대였다.
이언적 자신이, 도성을 에워싼 무리가 감히 인민의 정부 운운하는 말을 꺼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상경길에 올랐음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으리라.
허나 이언적은 정녕 이번 상경에 저의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도중에 두리손은 패하고 그대로 투항하였으며, 임거정이 한양에 북병과 함께 입성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그 뜻은 변하지 않았다.
늙은 몸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한강에 섞여드는 피 한 방울로 화한들, 두려울 것은 없었다.
다만 두려운 것은 하나, 자신이 처음 두리손이라는 자가 제자 자처하며 찾아왔을 때 내주었던 재조론의 모습, 위에 군부(君父) 한 분을 모시고 아래의 신자(臣子)들이 영세토록 화해(和諧, 조화) 이루며 살아가는 그 아름다움이 완전히 뭉그러지고, 다시는 선비의 논변으로서 글과 말에 실리지 못하는 그 지경이었다.
이대로라면, 두리손 그 간악한 자가 재조론을 입에 담으며 저의 잘못 없음을 논하게 된다면, 그러한 참혹함은 피할 수 없을 터. 오직 그것을 막기 위해 이언적은 달려왔고, 또 남은 며칠을 더 달려갈 것이었다.
모반(謀反)은 십악대죄(十惡大罪) 중에서도 으뜸이요, 두리손은 그마저도 실패하였으니, 참부대시(斬不待時, 대기 없이 바로 집행하는 사형)는 물론이요 그 자리에서 능지처참을 하여도 모자람이 없다 할 만했다.
그러나 도저히 투항한 인민군을 모두 수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모르는 병졸들부터 석방하여, 군관과 두리손의 사병들만 모조리 압송해 흑의영과 도성 전옥(典獄) 등지에 나누어 가둘 수 있게 된 지금도 두리손 본인은 명을 붙이고 있었다.
바로 도원수 임거정의 뜻이 확고하기 때문이었다.
“두리손 고놈이 저를 꼭 통의부에 세워달라 하였소.”
금번 역모의 주범이 두리손임은 그 누구도 의심 못하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저의 손으로 『생살부』를 미리 바쳤으니, 그 흉계에 동참한 이들이 누구인지 굳이 더 고신을 가할 것도 없었다.
“허나...”
“나와 두리손 둘이서 서로 약조한 바가 있소. 어르신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아니 일어날 것이외다.”
걱정하는 이준경과 형조판서 권철에게 꺽정이는 딱 잡아떼었다.
의금부에 갇힌 채, 금방 두리손이 저를 구하러 올 줄로만 알고 있던 – 남치근의 명운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 심통원과 이량은, 그 군은 무너지고 두리손은 투항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그대로 물귀신으로 화하였다.
저들이 명색이 임금의 외척인데, 이제라도 열심히 그 일파를 고변하면 형을 감등(減等, 감형)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물론 그들이 아무리 떠들어본들, 그 입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대개 이미 경기병영 뒷산 으슥한 곳에 묻혔든, 『생살부』에 이름 올라간 채 각지 군영에 붙잡혀 있든 하였으므로 별 효험은 없었다.
허나 두리손은 달랐다. 재조론을 내세우며 삼남 향반들 사이에서 그 이름을 높였으며, 권점에서는 노론 전체를 쥐락펴락하였으니, 사람의 이름을 대려 한다면 각 군현별로 능히 십수 명은 댈 수 있을 것이다.
“당장 호관(변호사)을 하려는 이도 없지 않겠는가?”
“기실 남명(조식)이 호관을 하겠노라 나서기는 하였습니다.”
이준경 묻는 말에 권철이 대신 답하였다.
두리손이 투항하며 저를 통의부에 세워달라 하였다는 말이 나돌자마자, 추관으로 서려는 이가 여럿 줄을 섰다. 허나 호관을 하려는 이는 단 하나뿐이었다.
‘통의부의 제도는, 선비가 장차 이유 없이 화를 당하지 않게끔 하려는 데 뜻이 있다. 임꺽정도 그 자리에 서고, 윤원형도 그 자리에 섰거늘, 이제 와서 두리손이 그 자리에 못 서게 된다면 만에 하나 다음에 사화(士禍) 닥칠 때 어찌 통의부에 의지할 수 있겠느냐?’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당당히 나선 조식의 말이었다. 이황 또한 그와 함께하려 했으나, 두리손이 겉으로나마 이언적의 문하를 자처하였기에 차마 나서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번 일에 얽혀서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 않소. 가뜩이나 적 많은 남명 어르신이 그 호관 노릇까지 하면 곤란할 것 같더란 말이지. 하여, 다른 호관을 구했소.”
“그게 누구인가?”
“여기 눈앞에 있잖소.”
“임 당수 자네가?”
“윤원형이 통의부에 섰을 때 추관을 했으니, 이제 와서 호관 못할 것이 있겠소?”
통의부 세워진 지 열 해가 지나, 이제는 황언징처럼 대송(代訟)으로 이름 떨친 이들도 제법 있었다. 유자(儒者) 자처하는 자들이 그 일에 뛰어들다 보니, 딱히 나라에서 정한 적은 없었으나 추관과 호관으로 설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리는 기준이 조금씩 생기고 있었다.
허나 꺽정이는 그런 기준 생기기 전의 사람, 아니, 애초에 통의부를 세운 사람이자 한 번은 한양을 점령하고 다른 한 번은 한양을 구해낸 – 그리고 소소한 사실이지만, 여전히 도성 및 그 주변에 흑의군과 에스파냐 용병대, 니탕카이의 여진 마병들이 머물고 있는 – 장수였다.
“자네가 나선다 하면 누구도 무어라 말은 못할 것일세. 그리고 감히 대역죄인을 옹호하였다 하여 탓하고 나서는 자도 없겠지.”
아무리 통의부 세운 까닭이 선비가 화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지만, 말이 그렇지 반란쯤 되면 원칙이 지켜지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굳이 두리손을 통의부에 세운다면, 호관을 임거정이 맡는 것이 그나마 후에 화근 덜 남기는 일이기는 했다.
“그러면 그리들 알고 계시면 되겠소.”
며칠 지나지 않아 통의부에 사람이 가득 찼다. 윤원형과 임꺽정, 그리고 기묘명현 신원 이후로 간만에 아주 큰일을 맡게 된 셈이라, 통의부에서 일하는 이들은 물론이요 지난 싸움에서 도성을 지키느라 기진맥진해진 포도청과 어영청 사람들도 불려나오게 되었다.
그 자리에 꺽정이와 두리손이 섰다.
아무리 도성 포위가 딱히 싸움다운 싸움 없이 흘러가, 심지어 포격을 할 때조차 총통 쏜다고 말 하고 쏘았다지만, 그래도 죽고 다친 사람이 제법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분명 멀쩡히 감옥에서 차꼬만 차고 있었어야 할 두리손은 제법 퀭한 얼굴에 이곳저곳 멍도 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리는 곧고 눈은 똑바로 떴으니, 통의부 안을 가득 메운 구경꾼들은 과연 독하기는 사갈(蛇蝎, 뱀과 전갈)과 같은 놈이라 수군대곤 했다.
송사 시작한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런 수군댐은 잦아들었는데,
“잠깐.”
토 달고 나오는 사람 있으니 바로 임꺽정이었다.
그사이 통의부에서 많은 재판이 벌어지고, 판결도 제법 내려졌는데, 꺽정이는 그 세세한 과정과 의례가 어찌 되는지 알지도 못하고 개의치도 않았다.
“다들 이 사람이 어찌하여 여기 두리손이의 호관 자처하였는지 궁금하게 여기고 있으리라 믿소. 만일 다른 분들이 괜찮다면, 거기에 대해 변(辯) 한 번 하고자 하오.”
호관의 명단에 딱 한 줄, 임꺽정 석 자만 적혀 있을 때부터 이러한 파격은 다들 예상하였고, 또 저를 역적으로 몰아간 두리손을 굳이 옹호하고 나선 사정 무엇인지 다들 궁금하게 여기기도 했으므로 – 저기 구석에는 사간원에서 (끌려) 나온 관원 몇몇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 곧 꺽정이 청이 받아들여졌다.
“여기 두리손이는 천하의 잔학무도한 죄인이오. 참부대시는 물론이요 어떤 극형을 당해도 싸다 하겠소.”
순간 몇몇 사람들은 임 당수가 호관과 추관을 착각한 것 아닌가 의심하고, 나머지는 그저 임꺽정과 두리손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볼 뿐.
허나 두리손이 순순히 고개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으므로, 벌어진 턱은 다물어지지 못했다.
“그렇소. 모반(謀反)은 십악(十惡) 중에서도 으뜸이니.”
“이놈은 나 하나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나라 안의 못된 놈들을 죄다 저의 편으로 끌어들였고, 말 듣지 않는 놈들은 거리낌 없이 죽였소. 호환 당했다 알려진 전 동래부사 곽순수 역시 이놈과 그 패거리가 죽였다 하오.”
“나는 본성이 간악하고 질투가 심하여, 그저 임 당수를 거꾸러뜨리고 그 자리에 서기를 바랐소. 오직 그것을 위하여 이처럼 거대한 흉계를 꾸몄으니 그 죄가 무겁소.”
이번에도 두리손은, 딱히 악에 받쳐 반발하거나 하지 않고 그저 동의할 뿐이었다.
“게다가 포르투갈 그 잡놈들을 나라 안 싸움에 끌어들였으니, 그 또한 큰 죄가 아닐 수 없소이다. 심지어 투항하면서 그놈들만은 몰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조처하였으니 더 괘씸하지.”
포르투갈뿐 아니라 동창까지 협력하였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판관과 호관들 사이에, 임 당수가 무엇을 생략하였는지에 대한 귓속말이 오가는 듯, 심란한 낯빛 내보이는 자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이번 난리의 전말에 대해서는 미리 이지함이 세세하게 정리하여 중추부에 보내주었던 것이다.) 물론 두리손이나 임꺽정이 알 바는 아니었지만.
“그뿐인가? 이 못된 놈은 천하를 속이려 들었소.
지난 헌법 권점은, 만일 군현으로 세지 않고 사람으로 세었더라면 이른바 재조헌법이 오복헌법보다 그리 뒤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요, 어쩌면 더 앞섰을 수도 있소이다. 이놈은 그것을 알고서 교묘한 말을 꾸며내었소. 이놈아, 말해보아라.”
“나는 재조론을 훔쳤소. 초야에 묻힌 회재 선생이 재조론이라는 좋은 논변을 내놓았다 듣고는, 회재 선생의 제자를 자처하며 그것을 훔쳐 세상에 퍼뜨렸소.”
“그리하여 세간은 이놈의 추악한 진상은 알지 못하고, 그저 재조론에만 이끌렸던 것이오. 회재 선생도, 또 그 노론인가 하는 작자들도, 말하자면 뜻은 나쁘지 않았으나 벗을 잘못 둔 셈이지.”
어느새 꺽정이와 두리손이 번갈아가며, 하나는 자신이 옹호해야 할 놈을 욕하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열심히 비판하였는데, 그 모습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그리고 헌법의 권점이 이루어지게 되었소. 알 사람은 알겠지만, 군현으로 치면 오복헌법이 민심을 훨씬 더 크게 모았으나 사람으로만 따지면 재조헌법 따르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 아마 정말 머리 하나하나까지 셌다면, 재조헌법이 제법 바짝 오복헌법을 따라잡았을 것이오.
그리고 여기 이놈은 거기서 기회를 잡았소. 민주당과 탕평당 두 당이, 다음 권점에서 패할 것을 짐짓 두려워하여 역모를 꾀하였다는 그런 거짓말을 꾸며내고, 뭇 사람을 속여 가짜 역모를 고발한 것이지.
덕흥군과 남치근 등등, 저와 지금껏 함께 공모하였던 자들을 모조리 토사구팽하고서는, 멋모르는군졸과 군관들을 수없이 역적질과 죽음으로 내몰았소. 이런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못된 짓을 범하였으니, 어찌 죽더라도 그 죄를 다 치루겠소?
아직 다 말하지 않은 죄상도 제법 있는데, 이것들도 하나같이 극악하여, 죽더라도 그 죄를 모두 치를 수 없소. 그러나 단 하나, 인민의 정부를 말한 것은 오히려 죄가 아니라 여기니, 이를 판가름할 때 죄의유경(罪疑惟輕, 죄가 의심스러우면 형벌을 가볍게 함) 넉 자를 떠올려주기 바랄 뿐이오.”
꺽정이가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 즉 이이를 닦달하여 – 찾아낸 문자까지 덧붙였는데, 사람들은 그 넉 자보다는 임 당수가 지금 내놓은, 사실상 첫 변론이 가지는 묵직한 함의를 두고 떠들 뿐이었다.
재조론을 내세운 것도, 조선인민군 자처하며 인민의 정부가 세워져야 비로소 만족할 것이라 외치던 것도 모두 죄가 아니라 주장하였다. 만일 그 말대로라면, 범인이 놀랍게도 적은 역모가 아닐 수 없었다.
재조론 소리에 이끌린 삼남의 노론 향반들도, 인민의 정부 소리에 이끌려 따라온 세 도 군사들도 죄가 없고, 그나마 『생살부』에 이름 올린 무반들이 역모의 혐의 있을 뿐인데 그마저도 태반이 이미 죽었던 것이다. 나머지는 아무리 보아도 주범이라고 할 수 없는, 지금 흑의영에 갇혀 있는 품계 낮은 무리뿐.
이처럼 그 여파가 컸으므로, 끝내 그날의 변론은 제대로 진행조차 되지 못하고 파하였다. 바깥에서 귀 기울이던 공보 사람들이 열심히 그간 적은 종잇장을 주변에 넘기고, 이번 일로 가족을 잃은 이들과, 그 가족이 역모에 가담하여 흑의영에 갇히게 된 이들은 한 마음으로 통의부 나오는 두리손에게 돌을 던졌다.
두리손은 그러나 임꺽정 서 있는 곳을 보며, 굳은 얼굴로 고개 끄덕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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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왕직과 엄숭 에피소드에 등장하였던 금의위는 본디 동창과 더불어 명 황실의 친위부대 겸 비밀경찰 역할을 하였던 기관입니다. 동창과 마찬가지로 황권을 등에 업고 초법적 권한을 휘둘러 악명이 높았는데, 가정~만력 초에는 역시 동창과 마찬가지로 중앙권력 다툼에 휘말려 역으로 별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황권을 등에 업는 친위기관의 성격상, 황제가 무능하고 아래에 권력욕 불타는 권신(엄숭, 장거정 등등)이 있다면 의외로 별 힘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곤 했던 것이지요. 작중 언급된, 동창에 파견된 금의위라는 것은, 명실상부 환관들의 기구인 동창에 非환관 인원을 집어넣기 위해 마련된 꼼수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십악(十惡)은 본디 불교의 십악을 본떠 정리된, 동아시아 전통 형법에서의 열 가지 대죄(大罪)를 말합니다. 그 뿌리는 불교지만, 남북조시대부터 당, 송, 명으로 이어지면서 그 내용은 유교 통치윤리에 관한 것으로 바뀌었지요. 모반(謀反)은 작중 언급된 것처럼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본디 명과 조선의 법률 체계에서는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때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사람을 교화하기 위한 형벌이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아무 때나 이를 집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매년 추분과 춘분 사이, 그것도 날씨가 좋고 자연재해나 기근 등이 없을 때만 사형 집행이 가능했는데, 다만 모반 등 중범죄를 범한 경우에는 참부대시라 하여 딱히 때를 기다리지 않고 사형에 처하곤 했습니다.
최후의 한족 통일왕조인 명은 그 전의 송에 비해 훨씬 군사적으로 강력했고, 적극적으로 이를 외부에 투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체계적인 군사제도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러한 군사제도는 오히려 후대로 갈수록 번잡해지고, 또 폐단을 쉽게 고칠 수 없는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엄숭이 몰락하고 다시 국가권력이 그나마 제대로 작동하게 된 1550년대부터 명의 군사력 역시 재정비 기로에 올라, 가정 연간만 해도 고작 왜구 수십에게 남경이 위협당하던 지경에 처하였던 명의 군사력은 만력 연간에는 그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른바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 보바이의 난, 양응룡의 난, 임진왜란 파병)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장거정의 사망과 만력제의 태업으로 인해, 이러한 군사력 증강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재정적 기틀을 마련하지 못한 채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군사력 증강은 고스란히 백성의 조세 부담으로 이어졌고, 고질적인 군제의 비효율도 제때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결국 명은 외환이 아닌 내홍 – 이자성의 난 – 으로 먼저 무너지고야 말지요 (Swope, 2013. The Military Collapse of China’s Ming Dynasty, 1618-44. London: Routle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