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95화 (195/259)

59. 스스로 일으키는 재앙 (2)

북경의 유월은, 쾌청하면서도 가물던 봄이 끝나고 열풍과 더불어 비 소식 잦아지는 계절.

저 하늘 어딘가 떠 있을 보름달은 먹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고, 부슬비만 포석을 때릴 뿐이었다.

“귀국 선왕이 지었다는 그 책은 매우 감명 깊게 잘 읽었소.”

내각수보 장거정이 펠리페 2세의 특사 예로니모 데 쿠리엘(Jerónimo de Curiel)을 향해 운을 떼었다.

탁자 위에는 공연히 김만 내는 찻잔 둘, 그리고 압스부르고(합스부르크)의 카를로스라는 이가 지은 『로마 공화정의 쇠망에 대한 논고』 첫 권.

이 땅에 닿아, 소위 ‘하늘의 제국(天朝)’ 사람들이 이방인들을 어찌 대하는지 제법 잘 알던 쿠리엘은, 동창의 통역 거쳐 전해지는 장거정의 말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 사람의 마음 속 막혔던 곳은 뚫어주고, 미처 생각지 못한 곳에는 눈 닿게 하였으니 어찌 좋은 책이라 아니 하겠소이까. 마치 그대 나라의 선왕과 독대하며 천도(天道)를 논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소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마키아벨리가 리비우스의 『로마사』 첫 열 권을 비평하며 공화정의 정신과 그 바람직한 모습을 논한 것처럼,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학구열 불태운 카를로스는 살루스티우스와 키케로를 바탕으로 공화정의 한계와 몰락, 그리고 계몽된 군주정의 필연성을 논하였다.

그러므로 이 거대한 제국의 멈춰버린 뇌를 대신하는 이목구비 장거정이 『쇠망론』을 감명 깊게 읽었다 하는 것은, 그저 예의상 하는 말이거나, 아니면...

“저의 주군이신 펠리페 폐하를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뜻밖의 호평인지라, 일순 놀란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몇 년 사이에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시나 정부와 ‘동쪽 창고(동창)’에서 에우로파 사정을 아는 이들 여럿을 포섭하였음을 쿠리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서방의 속사정을 알지언정, 그의 주군의 아버지 카를로스가 지은 이 책을 이해할 만한 지성과 교양은 없을 터.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뜻밖이라. 어찌 그리 여기시었소? 중화 사람들이 위아래 막론하고 모두 눈을 감았으니, 누군가는 먼저 잠에서 깨어 바깥을 노려보아야 하지 않겠소이까.

무릇 천조(天朝)가 그 이름에 걸맞게 되려면, 이 땅의 모든 오랑캐를 위하여 전(傳)을 지어주어야하는 법. 지금은 비록, 귀국 선왕이 지은 이 명저의 훌륭함 알아보는 이가 드물지만, 하늘이 이 사람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허여해 준다면 수십 년 안으로 모두가 이 글을 읽게 될 것이오.“

불과 오 년 전까지는 라틴어를 아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는 이곳 페킹(북경)이다. 선왕 카를로스의 책을 번역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만큼 더 많은 지성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눈앞의 장거정이, 어쩌면 에우로파의 그 어느 군주보다도 더 강대한 힘을 지녔을 그가 에우로파에 그토록 진심이라는 것은, 자랑스럽기보다는 외려 근심스러운 일이었다.

“자, 그러면 그대가 기다리던 답변을 들려주도록 하겠소.”

쿠리엘의 맡은바 임무는 이러하였다.

첫째, 시나 황제의 대리인 돈 림이 정말로 시나 황제의 뜻을 받들었는지, 만약 그렇다면 에우로파에서 행한 그 많은 일들 중 어디까지가 돈 림의 독단이었는지를 파악하는 것.

둘째, 만일 돈 림에게 반대하는, 보다 정확히는 그의 세력에 대항하는 이들이 시나 정부 안에 있다면 그들의 손을 잡을 것.

돈 림에 대한 아버지의 견해와는 별개로, 아버지가 물려준 세계제국을 더욱 키울 마음뿐이었던 펠리페가 직접 써서 쿠리엘에게 전한 지령이었다.

“지금쯤이면 짐작하였겠지만, 그대들이 ‘돈 림’이라 부르는 임거정이 에우로파에서 행한 것은, 아니, 애초에 그가 그곳까지 간 것은 모두 황상의 뜻을 벗어난 독단이었소.”

임거정과 그 일당이 감히 천사(天使)를 사칭하며 서방 여러 나라를 주유하였다는 것을 장거정은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지 그자가 바다 위로 날다시피 하여 북경 떠나 조선으로 도망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사칭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아예 황상의 존귀함을 팔고 다니며 온갖 난장판을 다 벌이고 다녔다던가.

허나 장거정은 딱히 노여워하지는 않았다. 그들 덕택에 이렇게 더 넓은 세상을, 중화가 다시 중화의 이름에 걸맞게 되기 위하여 장차 복속시켜야 할 드넓은 천하를 알게 되었으므로.

“둘째로, 우리 조정은 귀국 에스파냐와의 동맹에 관심이 있소. 기실 에스파냐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언제고 그대와 같은 사절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이탁오가 떠벌린 서방의 이야기, 그 뒤를 따라 들어온 서방 사절들. 그리고 말라카를 넘어 오가게 된 수많은 사람들이 떠드는 근거 있는 소문과 명백한 헛소문들. 모두 동창을 통해 장거정의 귀로 들어왔고,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로 엮였다.

“허나 제가 듣기로, ‘천조’는 결코 ‘오랑캐’와...”

“함부로 동맹을 맺지 않는다. 잘 알고 계시는구려.”

예부에 소속된 다른 관료들, 아니, 그들을 말할 것도 없이 저 천진이나 항주의 지방관들만 보아도, 능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 밖의 모두를 오랑캐로 낮추어보며, 그에 맞게 대해 왔소. 허나 그렇게 아무리 오래 자처를 해도, 그저 자처로 끝날 뿐이더군. 그러나 우리는 이제 달라질 것이오. 허울뿐인 복속, 겉치레 조공은 바라지도 않소.”

장거정 그의 마음속 대업이, 그의 대에서든 그 다음 대에서든 완수된다면, 그때는 천하의 모든 오랑캐들이 스스로 복속되기를 청해 올 것이다. 황제의 교화 따위 헛된 명분이 아니라, 가장 강성한 나라의 군사와 수사(水師, 수군)를 두려워하고 또 그 울타리 안의 막대한 재화를 탐내기 때문에.

당장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두 나라가 기꺼이 천조 대명의 손을 잡으려는 것도 그 때문 아니던가. 장거정은 능히 이를 꿰뚫어본다 자신하였다.

저들은 아직 그런 자각조차 없겠지만, 곧 보게 되리라. 공동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맺은 동맹에, 어느새 위아래가 생기고, 종국에는 스스로 목줄을 차게 되는 그 날이 올 것이다.

당장 지금도 막대한 빚으로 말미암아 이탈리아 쪽에 약점을 잡힌 에스파냐는, 어떻게든 그 포토시라는 곳에서 나오는 은으로 더 많은 이익을 올리고자 하고 있지 않던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이 나라 대명은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저들은 이곳 북경까지 왔다.

“곧 마닐라로 사람을 보낼 것이오. 장차 닥쳐올 파란 앞에서는, 우군이 많을수록 이로울 터.”

‘장차 닥쳐올 파란’이 이곳 동아시아에만 있는 줄 아는 쿠리엘은, 감사를 표하면서 은근슬쩍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장거정은 덥석 그 손을 잡으며 웃어주었다. 오랑캐의 예법 따위를 따른들 무슨 부끄러움이 있으리오.

그렇게 쿠리엘을 돌려보낸 뒤에도 아직 비는 내리고 있었다. 다 식은 차에도 나름의 맛이 있다 여기면서 장거정은 다시 낯설게 장정된 책의 표지를 펼쳤다.

그가 알지 못하는 오랑캐 글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사이사이에 진서로 옮긴 종이가 툭 삐져나왔다.

천하의 모든 것을 그 뜻대로 할 수 있는 군주는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반대로 군주가 서야 할 때 제때 서지 못한다면, 그때야말로 천하는 더욱 어지러워지며 그 다음을 기약한다.

아마 그 카를로스라는 이가 염두에 둔 것은 그의 나라였겠지만, 저 하늘 아래 그 말에 가장 어울리는 나라가 어찌 그 이름뿐인 ‘신성로마제국’이나 저의 빚조차 감당 못하는 에스파냐겠는가? 오직 이 나라 황명(皇明)만이 거기에 어울렸다.

‘그러나... 과연 금상(今上)도 그에 어울리는가?’

스스로 품으면서도 소름 돋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천안문의 변 이후로 황제의 집착은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다. 표문에 ‘헌(憲)’ 자가 들어가는 것을 엄금하였고, 나날이 조선을 꾸짖었다. 황명(皇命)이 바로 서지 못한다며 개탄하고, 강남의 지방관들에게는 그 헌법 같은 무엄한 소리를 하는 자들의 목을 베어 올리라는 지시를 내리곤 했다.

그 위엄 없는 모습을 조선의 사신들에게 보이지 않으려 했기에, 그나마 조선 사신들은 황제의 그러한 노여움도 잘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을 꾸짖는 것은, 한 사람의 통쾌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대명에게 이로움을 주기 위해서만 이루어져야 할 일.

과연 금상은 그것을 알고 있는가? 누가 말한들, 그 어두워진 귀와 아둔한 머리를 뚫고 깨우칠 수 있는가?

만천하의 황제, 모든 별을 아우르는 자미원의 북신(北辰, 북극성).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어쩌면 장거정 그는 매우 큰 짐을, 차마 말할 수 없는 무엄한 짓을 저질러야 할지도 몰랐다.

그것이야말로 중화의 이름을 빛내고 황명을 황명답게 높이며, 나라의 은혜를 갚는 길일지도.

잠시 돋았던 소름은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그러고 보면 유왕(裕王, 훗날의 융경제) 전하께서는, 제왕에 걸맞는 배움을 아직 익히지 못하셨지...’

한 모금쯤 남은 찻잔에, 어느새 광기가 들어선 눈빛이 비쳤다.

사업당 깊은 곳에서는 명이 조선을 정벌할 것을 상정하여 놀이인듯 놀이 아닌 기묘한 판을 벌이고 있고, 그것 바라보던 임거정은 도저히 조선이 대국을 상대할 수 없으니 아예 천하를 통째로 어지럽게 만들어버리자 하였다.

그러한 이야기가 심의겸 통해 탕평당으로도 들어가니, 족히 그 중진들을 오밤중에 모을 만한 사안이었다.

헌데 어째 모여든 중진들 면면이 조금 이상하고, 그들 모여앉은 정자는 영 비좁았다.

“당의 중진들을 모으셨다 들었소. 당명이 달라서 그렇지, 탕평당이든 민주당이든 다 같은 당 아니겠소? 하여 우리 쪽도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소이다.”

정자를 비좁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임꺽정이 태연자약하게 말을 꺼냈다. 그 곁에는 이지함 이하 다른 민주당 사람들은 그나마 양심이 있어, 고개는 끄덕이지 않고 멀리 인왕산을 보았다.

예외라면 그들 가운데 아주 자연스레 앉아 있는 검손당 이씨였는데, 그쪽에서는 이씨 대신 영 불편한 기색인 탕평당 서생들이 열심히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흠흠, 기왕 모여 당론(黨論)을 정하게 된 것, 아예 저희 쪽이 품은 뜻을 훤히 듣고 헤아리시는 것이 더 옳지 않겠습니까.”

이지함이 헛기침을 했다.

“잘 아시다시피, 지난 병란의 배후에는 대국의 동창이 있었습니다. 아시는 분들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조선을 책망하는 조서가 내려온다 한들, 그저 지금껏 경(敬)과 예(禮)로써 삼가고 있던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다들 아는 이야기지만,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 항상 녹록하지는 않았으므로 불편한 기색이 잠시 여러 얼굴을 스쳤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사대자소(事大字小)란 어느 한쪽에서 쉽게 무너뜨릴 수 없는 법도요.”

얼마 전부터 탕평당 모임에 들어온 권철이, 저와 비슷한 심정인 다른 사람들의 의심까지 모아서 물었다.

“과연 장 수보도 그리 여기고 있겠습니까?”

“그리 여기지 않으리라는 증좌도 없지 않소?”

가장 완고한 탕평당 사람들조차 이 무렵에는 중추부에서 국사를 먼저 논의하고 후에 성상의 처결을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었다.

허나 그들 중 누구도, 이 엄청난 권병(權柄)이 저의 것이라 여기지는 않았다. 백성이 만들고 임금이 그들에게 맡긴 것이었으므로.

그렇기에, 그들로서는 더더욱 천하를 어지럽힌다는 그 말에 경계하는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재론(再論)하여도 늦지 않소. 이왕 임 당수와 그 당여들이 이렇게 귀한 걸음을 하여주었으니, 먼저 그 품은바 뜻을 모두 들어보십시다.”

이황이 중재하여, 권철에 이어 한 마디씩 하려던 이들도 다시 그 입을 닫았다.

“먼저 여쭙겠소. 지금껏 우리가 이 나라의 법도를 고치기도 하고 새로 세우기도 하였소이다. 천하를 우리 조선처럼 고치기 위하여, 우리 조선이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 가하다 보시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꺽정이가 지도를 펼치며 물었다.

“그게 어디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인가? 바르게 하는 일이지.”

촌음의 망설임 없이 나오는 것은 조식의 답변이었다. 그의 벗 이황의 조금 더 숙고 거친 답이 뒤따랐다.

“이 자리에서 함부로 논할 일은 아니요, 오로지 성상의 뜻과 국론(國論)으로 뒷받침된 뒤에야 공공연히 가부(可否)를 말할 수 있을 터. 허나, 이 사람의 사사로운 마음을 말한다면, 역시 남명이 옳다고 보네.

다만, 천하를 바르게 하는 일이란 곧 정도(正道)를 벗어나서는 아니 되겠지. 만에 하나 우리 국인(國人)을 속여 싸움터로 내몰아 어육(魚肉)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이 사람은 가로막을 수밖에 없네.“

탕평당에서 가장 말 많고 글 많이 써내는 두 사람이 입론(立論)하니, 곧 다른 이들도 한마디씩 하였다. 그렇게 다시 몇 마디 오가고, 자연히 임 당수와 그 당여들로 눈길 쏠리자, 꺽정이가 안심되는 답을 해주었다.

“염려 마시오. 우리 국인들에게까지 전화가 미치게끔 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나 이이가 그새를 참지 못하고 덧붙였으므로, 잠시 안심한 선비들은 도로 불안에 빠졌다.

“어차피 압록강 남쪽까지 전화가 미치게 되면 도저히 이길 방도가 없으니, 빠른 투항만이 답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업당에서 며칠간 장래의 싸움을 계산한 결과, 조선은 어떻게 싸워도 명을 이길 수 없었다.

어떻게든 선공을 가해 산해관을 넘어도, 사람의 바다에 파묻혀 기껏 키운 정병(正兵)을 모두 소모하고 밀려나는 길밖에 없었다.

요동의 험지를 점거하고 그것을 간성(干城) 삼아 버티려 한들, 결국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기어이 한두 곳이 뚫리게 되면, 마치 구멍 난 방죽처럼 우르르 무너지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싸우지 않는 것이 낫지 않소?”

“싸우지 않고 그저 요동과 황해를 사이에 두고 서로 노려보기만 한다면, 그때도 먼저 지쳐떨어지는 것은 백이면 백 아국 조선일 것입니다.”

한없이 느슨하던 명의 기강이 일신되고, 그 거대한 덩치가 진실로 한 몸처럼 움직이게 된다면, 그저 가만 앉아 숨만 쉬어도 능히 이웃한 조선을 압박할 수 있을 터였다.

이미 에우로파는 명국에 닿았다. 굳이 민주당의 바다를 거치지 않더라도 서방에서 은을 들여올 수도 있을 것이요, 아예 힘으로 온 나라를 찍어눌러 조선과의 일체 통행을 금하는 식으로 서로 피를 흘리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오?”

“우리 힘만으로 감당할 수 없다면, 온 천하를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래야 저쪽에서 못 이기고 밀고 들어오든, 우리 쪽에서 이만하면 할 만하다 여기고서 쳐들어가게 되든 할 것이오. 아무렴 내가 괜히 여기에 이 지도를 들고 왔을까.”

뒤늦게야 모두의 시선이 꺽정이가 펼친 지도에 닿았다.

“여기서부터는 한 번 들으면 돌이킬 수 없소.”

그러나 이 자리 모인 이들은, 차라리 듣고 나서 화를 당할지언정, 눈앞에 보이는 것을 아예 모르쇠 하고 넘어갈 성정의 사람들은 아니었다.

여러 차례 끄덕임이 오가자, 꺽정이가 저의 뒤에 앉아 있던 녀석의 어깨를 떠밀었다.

생김새가 자못 우스꽝스러워, 먼발치서 가끔 보기만 하였음에도 그 얼굴 기억에 남는 민주당 젊은이가 나섰다.

“자네는... 등길랑(도키치로)라 하였던가?”

“한때는 그랬습니다. 다만 한 달 전에 새로 이름을 지어, 지금은 린죠 히데요시(林徐秀吉)라 합니다.”

조선에서 난리 났다는 소식 듣고 딸 찾아 황급히 조선으로 온 아사노 씨 사람들 상대하고자, 딱 보아도 평민 같은 저의 이름을 갈아치운 도키치로였다.

도키치로 생각에 자신이 민주당 아래서 받은 은혜가 있는데 남의 묘지(苗字, 성)를 쓰는 것은 배은망덕한 짓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존경하는 두 사람의 성씨를 합하여 ‘린쇼(林徐)’ 씨를 자처하고, 이름은 저의 아명 ‘히요시(日吉)’를 조금 비틀어 ‘히데요시(秀吉)’로 정하였던 것이다.

“흠흠, 그, 우선은 일본을 끌어와야 합니다.”

머뭇거리던 도키치로가 말문을 열었다. 급히 불려와, 장차 세상을 위하여 네 도움 필요하다는 말 듣고 얼떨떨하게 여겼지만, 누가 머리 좋은 녀석 아니랄까봐 이제는 마음 속에서도 정리가 끝났다.

“일본을?”

“일본 예순여섯 주를 모두 합치면 조선보다도 크고, 전답은 비옥하니 소출이 어쩌면 조선보다 많을지도 모릅니다. 허나 서로 나뉘어, 그저 땅을 빼앗고 남의 위에 서고자 다툴 뿐이니 그 힘은 드러나지 않고 백성의 피만 흐를 뿐입니다.”

말이 이어질수록 조금씩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 전까지는 그저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참고 받아들였던 그의 어린 시절. 류큐로 팔려가기 전 겨우 상봉하여 눈물 흘리던 어머니와 동생들. 그리고 알면서도 그들을 내버려둘 뻔하였던,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 여겼던 오다 노부나가.

도키치로는, 아니, 하야시 쇼군의 가신 린쇼 히데요시에게는, 이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러고도 모자란 것이 있다면, 든든한 그의 스승이자 벗들, 그리고 형 같은 주군이 뒤에 있었다.

“임 당수와 여러 당여 분들께서 세우신 이 논변으로 능히 나라를 세울 수 있습니다. 소출의 절반을 빼앗겨도 조세가 가볍다 칭송하게 되는 우리, 가진 것 없는 일본의 백성들을 위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뒤에는 어떤 계산이 있는지 모르지 않는 히데요시였다. 설령 실패한다 한들, 규슈와 주고쿠만 틀어막아도 충분한 은과 사람, 군사를 확보할 수 있었으므로.

그러나 히데요시는 결코 거기서 만족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녕 그의 주군이 세상을 뒤엎을 파도를 일으키고자 한다면, 그 파도를 타고 누구보다도 멀리 나아가며 더 멀리 바라보고 싶었다.

“조선과 일본, 양쪽의 힘을 합하면, 그나마 명국을 상대로 그렇게 밀리지만은 않게 될 수도 있소. 허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나는 천생 도적이고, 도적놈은 싸워서 이길 것 같지 않은 그런 싸움은 나서지 않거든. 그러므로 일본에서 그치지 않고, 온 세상을 헤집어놓을 것이오. 여기, 명부터 시작해서, 세상 끝까지.”

“물론,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이 나라와 온 천하를 위하여 최상이라 할 것입니다. 무릇 나라는 스스로 벌(伐)해진 뒤에야 다른 나라에 의해 정벌된다 (國必自伐而後 人伐之) 하였으니, 온 세상을 깨우치고 널리 알려 대국조차 우리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만든다면, 설령 병장기를 내세워 다툰다 한들 그 싸움이 백성에게 미치지는 않겠지요.”

히데요시에 이어 꺽정이와 이지함이 돌아가며 덧붙였다.

“명국의 나라 사정이 비록 빠르게 나아지곤 있다지만, 아직 멀었소. 장거정 그이도 아직 젊어서 굳이 서두를 것 없으니, 아마 적어도 수 년은 여유가 있을 것이오. 하여, 기한을 오 년으로 잡았소.”

조선이 지난 십 년간 어떻게 변했는지를 생각하면, 오 년도 그리 짧다고는 못할 세월이었다. 허나 조선이 아닌 천하를 논하기에도 오 년이 족한지는 알 수 없었으므로, 지금껏 꺽정이 말을 경청하던 탕평당 사람들도 그 말 과하지 않으냐 반박할 채비를 했다.

“내가 여기 계신 우리 사형, 그리고 도적 몇 놈 데리고 시작하여 한양을 함락시키기까지 고작 삼 년이 걸렸소. 시일만 주어진다면 천하라고 못 뒤집을까.

우리가 온 세상에 손을 뻗쳐 여기저기 사람을 끌어모으는 동안, 장거정 그자도 가만 있지는 않을 것이오. 그래서 그 사람 손발 묶어둘 계책을 마련했소.“

장거정은 벌써 제법 적을 많이 두었지만, 아직 그 본의를 알지 못해 딱히 나쁘게만 보지 않는 이들도 많이 있었다.

꺽정이는 장거정이 그 의뭉스런 속을 겉으로 드러내어, 저를 지지하는 무리들을 많이 얻기를 바랐다. 그럴수록 그 적도 늘어날 것이므로.

그 대강을 먼저 간략히 늘어놓고, 이어서 세세한 절목까지 넘어가려 하던 차, 이준경 이하 여러 선비들의 목울대가 움찔하는 것을 보니, 누가 그런 미친 짓을 하겠느냐, 그런 선비답지 못한 언사가 올라오는 것을 열심히 막고 있는 모양이었다.

허나 그와 동시에 옆에서,

“참으로 양책(良策)이로고!”

하고 외치는 이 있으니, 아니나 다를까 조식이었다.

이준경과 이황은 동시에 한탄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글로써 벗을 만나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 (以文會友, 以友輔仁)’는 말을 가슴에 새겨 예순 평생 살아왔건만, 어찌하여 눈앞에는 임거정이 있고 옆에는 조식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소? 내가 생각해도 그렇소.”

“헌데 대강이야 그렇다 치고, 장거정 그자가 어찌 그 품은바 심산을 만천하에 드러내도록 만들 것인가? 이 사람이 그대와 함께하려면 마땅히 알고 넘어가야 하겠지.”

“천자의 조서를 훔칠 것이오.”

“그래, 그러면... 아니, 뭐라고?”

“뭐, 칙서도 마음대로 조작하는데 조서라고 못 건드리겠소? 헌데 다시 생각해보니 조서를 훔친다는 말은 잘못이군. 그 정도까지 험악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니 어르신께서도 안심하시오.”

꺽정이 말에 따라 기함할 뻔하다가 다시 제정신 되찾기를 반복하는 선비들이었다. 그 모습 보는 이이의 얼굴에 잠시나마 눈치 없는 웃음 서린 듯하였는데, 눈의 착각이라고만 여기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그나마 험악한 짓은 하지 않는다 하여 재차 안도하는데, 이어지는 말은 더 심각하였다.

“지금 북경에 가 있는 사신들이 또 한바탕 우리 꾸짖는 조서를 들고 돌아올 것이라 하지 않았소? 그 사신들이 산해관 넘어 돌아오는 길목에서 모조리 때려눕히고 묶은 다음, 잠시 조서를 빌려보고 고대로 돌려줄 것이오. 그러니까 굳이 따지면 훔치는 건 아니외다.”

차마 천금(千金)만큼 무거운 선비의 말을 돌이키지 못하고 난색하는 조식을 보며, 이준경과 이황은 잠깐이나마 군자답지 못한 즐거움을 느꼈다.

“그렇다면 그 조서를 가지고 무엇을 할 심산이냐? 그에 대해서도 다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소이다...”

민주당 계책의 대강을 들은 조식은 한편으로는 (도적질만 제외하면) 저의 마음에 꼭 들어맞는 짓거리라 여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칼과 방울에 이어 함매(銜枚, 군졸에게 물리는 재갈의 일종)까지 가지고 다녀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과 닷새 뒤, 배 한 척이 은밀하게 인천을 떠나 요동으로 향했다.

--- *** ---

예로니모 데 쿠리엘은 원 역사에서는 에스파냐의 네덜란드 통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외교관 겸 상인 겸 스파이였습니다. 유대계 상인 집안 출신으로, 조금씩 끓어오르고 있던 신교 세력의 불만을 은밀히 억누르면서 네덜란드를 에스파냐의 금고로 유지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지요. 카를 5세의 사생아로서 한때 네덜란드 총독직을 역임한 파르마의 마르게리타(Margherita di Parma)는 쿠리엘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펠리페 2세의 재무장관으로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 신교 세력에 대해 강경책으로 일관했고, 그러한 성향에 동조하는 알바 공작을 신임 총독으로 부임시킵니다. 그간 네덜란드에서 확보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신하였던 쿠리엘은 몰래 알바 공작을 쫓아내기 위한 공작을 펼쳤으나, 이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지요. 쿠리엘은 결국 좌천되어 다시는 중책을 맡지 못했습니다.

작중 등장한 『로마 공화정의 쇠망에 대한 논고』는 함께 언급된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와는 달리 가공의 서책입니다. 로마 공화정의 최후를 지켜보았던 살루스티우스와 키케로의 저작, 특히 역사와 정치에 대한 두 사람의 논평(예컨대 살루스티우스의 『카틸리나 전쟁』)은 많은 수가 중세를 거쳐 살아남았고, 르네상스 후기 정치사상에도 여러모로 심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과는 여러모로 이질적인 일본의 성씨 문화는, 헤이안 시대부터 복잡해지기 시작해 센고쿠 시대에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먼저, 이 무렵에는 제대로 된 성씨보다는 신분세탁과 각종 명분을 내세우는 기능이 더 강했던 우지(氏)가 있었고, 그 아래에 보다 실질적으로 가족 집단을 나타내기 위한 묘지(苗字)가 따로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우지는 형식상 양자로 입적되거나 방계의 후손을 자처하는 식으로, 묘지는 그런 겉치레도 없이 제멋대로 바꾸는 식으로 변경되곤 했지요. 예컨대 원 역사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처음에는 성이 없다가 키노시타(木吉) → 하시바(羽柴) → 도요토미(豊臣) 순으로 묘지가 바뀌었고, 그 와중에 조정의 관직을 받기 위해 후지와라(藤原) 가의 양자로 형식상 입적해 후지와라라는 우지를 따로 얻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하였고 굳이 알려 하지도 않았던 중국과 조선에서는,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씨가 겐지(源氏, 미나모토 씨)의 후예였기에 이를 ‘일본국왕 원씨’로 보았고, 무로마치 막부를 무너뜨린 오다 가는 헤이시(平氏. 다이라 씨)를 자처하였으므로 ‘원씨를 평씨(平氏)가 몰아냈다’고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세력을 계승했기 때문에, 자연히 그도 ‘평씨’로 보아 ‘평수길(平秀吉)’이라 불렀지요.

이는 임진왜란 후 조선과 에도 막부가 국교정상화에 합의하는 데도 제법 좋은 명분이 되었는데,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본래의 마츠다이라(松平) 성을 도쿠가와로 갈면서 족보세탁을 통해 겐지의 후예를 자처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조선의 입장에서 – 이 무렵에는 귀환한 포로 등 여러 첩보원이 존재하였기에 조선 쪽에서도 일본의 내막을 얼추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 도요토미 가문의 몰락과 에도 막부의 성립은 전범 ‘평씨’의 부당한 통치가 무너지고 ‘원씨’의 정당한 정부가 복원된 것으로 간주되어 국교정상화의 명분으로 삼을 수 있던 것이지요.

말미에 언급된 함매(하무)는 야습과 같이 정숙성이 요구되는 임무에서 군졸들이 떠들어 그 위치가 발각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물렸던 재갈의 일종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