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97화 (197/259)

60. 거경궁리 (1)

장거정은 붓을 잡았다가 내려놓기를 거듭하였다. 하늘은 흐리고, 달빛은 보이지 않는데, 호롱불만 일렁였다.

『의산문답』에 반박해야 한다. 중화의 나아갈 길이 대일통임을 명명백백히 밝혀야 한다.

그러나 도저히 글이 나아가지 않았다.

무엇으로써 저 백성들, 그리고 그 백성들보다 아주 약간 나은 정도이면서 사인(士人)이라 자처하는 향신들을 설득할 것인가? 자신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는 것을, 훨씬 부족한 무리에게 풀어서 설명하려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자신이 그러한 궁리에 끌려가야 하는 것을 분하게 여기면서, 그저 황제에게 직고하고 동창을 동원하여 피바람을 불게 할까 하는 유혹이 그 마음에 들어왔다.

그러나 장거정은, 옛날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것이 우책(愚策)임을 능히 알 수 있었다.

“슬프도다! 천조 대명의 내각수보조차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는 이치를 피해가지 못하는구나!”

자조와 고소 섞인 탄식. 그러나 소리내어 외친 덕에, 잠시 흩어진 마음은 도로 모였다.

어떻게든 자신의 뜻을 밝혀야 한다. 그리하여 저의 마음으로 장거정에게 찬동하는 자들을 얻어내야 한다. 형벌로써 사민(士民)을 제압하는 것보다, 사민으로써 사민을 제압하는 것이 훨씬 나은 방책이었다.

‘사민이라... 그렇다! 그것이 있었군!’

그리고, 깨우쳤다.

서안 위를 메우고 있는 구겨진 종이를 소매로 밀어 단숨에 치우고는, 집에서도 나라의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서재에 쟁여 놓았던 온갖 수본(手本, 노트)을 꺼내 왔다.

나라의 옛 모습과 지금의 모습. 글자와 행간이 장거정의 머릿속에 맺혔다.

어찌하여 이 나라는, 허울뿐인 천조에서 참된 천조로 거듭나야 하는가? 어찌하여 이 대업이, 헌법이니 의권이니 하는 또 다른 허물에 가로막혀서는 안 되는가?

답은 단순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사민을 널리 설득할 수 있고, 설득된 자들이 스스로 힘으로 나머지 무리를 억누르게 할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하게는...

곧 주인의 손아귀에 되돌아온 붓이 휘날려, 종이가 모두 채워질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한양 성내에 있는 호조 진휼청(賑恤廳)에는 본디 작은 창고가 하나 딸려 있었다. 그런데 관리의 녹봉은 은으로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 진휼할 일은 줄어들다 보니, 진휼청 관아는커녕 한강 강변의 광흥창(廣興倉)만으로도 곳간이 남아돌았다.

그렇게 쓸모가 없어지는 줄로 알았던 진휼청 창고에, 웬일로 쌀섬이 쌓이고, 사람 여럿이 모여들어 좌우로 그것을 옮겼다.

허나 기묘하게도 일꾼들은, 기껏 옮긴 쌀섬을 도로 들어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고, 거기서 도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식으로 헛수고만 하고 있었으며, 또 그 옆에서는 벼슬아치 한 무리가 그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뿐이랴? 벼슬아치들과 함께 서 있는 자들의 면면은 더욱 괴이쩍으니, 사치스럽지는 않지만 검소하지도 않은 승복 차림의 병해대사가 하나요, 그 아래에서 ‘기학’이니 뭐니 한다는 무리 중 몇몇이 또 병해 옆에 서 있었으며, 민주당 당수 임거정과 그 아들도 옆에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아고고... 더는 못하겠습니다요.”

“쇤네도 더는...”

일꾼들이 하나씩 주저앉았다. 사흘을 굶고 나서 고작 마(藷)인지 토란인지 싶은 것 몇 덩이를 먹은 것이 끼니의 전부였으니 몸에 힘이 돌 리가 없었다.

“자, 다들 고생하였네. 금일 격물(格物, 실험)은 여기까지일세.”

어느새 앞으로 나선 병해의 말이었다.

“암만 그래도 몸 가눌 힘은 남지 않았는가? 저기 옆방에 김 모락모락 나는 이밥 차려두었으니 얼른 가보게나들.”

이밥 소리에 모두 귀가 번뜩 뜨여, 언제 자리에 주저앉았냐는 듯 벌떡 일어나 후다닥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이번에는 그 뒤에 서 있던 ‘기학도(氣學徒)’ 두엇이 열심히 무엇을 적고는 저들의 스승 겸 우두머리와 관복 입은 저들의 물주에게 고하였다.

“저 ‘난저(卵藷, 감자)’가 가장 효험 좋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여기 적어둔 것을 보시지요.”

“허, 과연 약초는 약초로군.”

“생긴 것은 마와 비슷하고 토란과도 흡사한데, 소출은 곱절이나 되고 곡량으로서도 저리 훌륭하다면, 구황에 요긴하다는 말조차 부족할 것이외다.”

호조 관원들 모두 깔끔하게 인정하였다.

“금번 격물안(格物案, 연구용역)은, 이만하면 통(通, 합격)이라 할 수 있겠소.”

격물안이란, 병해가 삼남에서 전우치 이름 내세워 온갖 돌팔이들 한데 모은 다음 세운 기학도들이 그 배움을 드러내고자 세운 제도였다.

사업당의 후원을 받으면 그깟 잔재주 드러내는 것쯤이야 무엇이 어렵겠느냐만, 병해의 생각은 장차 이들 방외인(方外人, 주류 체제에서 밀려나거나 벗어난 자들의 통칭)들에게도 마땅히 설 자리와 당당한 명성을 주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헌법 권점으로 시끄럽던 중에도 호조와 공조를 돌며 여러 ‘격물안’을 받아내었고, 오늘 그 중 두 번째가 결실을 드러내게 된 것이었다.

첫 격물안인 ‘선방포안(善放砲案)’ – 화포가 가장 멀리 날아가는 각도를 찾는 안 – 은 협조해야 할 수영과 병영들이 죄다 두리손에게 붙었다가 한바탕 뒤집히는 바람에 아직 그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방포안 이후 받아낸 두 번째 격물안인 ‘구황찰요안(救荒擦要案)’이 먼저 이렇게 그 이치를 드러내 보이게 되었다.

경장 이후로 진휼할 일이 드물어져 졸지에 한직이 된 진휼청에서, 그저 중추부에서 보고할 때 저들도 나름대로 국사(國事) 돕고 있음을 보이고자 기학도들에게 맡긴 안이었는데, 그것이 어느새 여기까지 굴러왔다.

동일한 수의 일꾼을 부려 동일한 양의 벽곡(辟穀, 곡식을 쓰지 않음) 음식을 마련하고, 사흘 굶긴 일꾼들에게 – 물론 보상은 두둑하게 주었다 – 그것만 먹인 뒤 이렇게 쌀섬 옮기는 일을 시켜 얼마나 기력이 돌아오는지를 확인하였다.

쌀섬의 무게는 당연히 같았고, 일꾼을 뽑을 때도 그들의 근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흑의군의 조련법 바탕으로 계측하여 힘이 얼추 비슷한 자들로만 뽑았다. 무릇 격물치지(格物致知)에는 거경궁리(居敬窮理)가 짝하기 마련이니, 만사를 대함에 있어 ‘경(敬)’으로써 주변을 단속하고, 격물을 흐트러뜨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일통(一統)함이 마땅하였다.

이처럼 그 기법이 – 적어도 호조 관원들 보기에는 – 치밀하고도 정교하였으므로, 구황의 으뜸이 느릅나무껍질 떡도, 솔잎죽도, 천금주(千金酒)도 아니요 생전 처음 보는 토란와 마의 잡종처럼 생긴 덩이줄기라 하여도 납득할 수 있었다.

하물며 격물에 쓰일 ‘난저’를 기르는 동안 밝혀진 장점, 예컨대 다른 오곡(五穀)을 훌쩍 뛰어넘는 재배의 용이함까지 세세히 기록되어 올라왔으니,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소. 구황찰요안은 통으로 간주하겠소. 판서 대감께 그리 품의(稟議)드릴 수 있도록, 이에 관하여 정리한 모든 수본(手本, 노트)은 절목(節目, 보고서)으로 정리하여 명월 보름까지 본 아문에 제출하시오.”

두 관원은 기학도 중 으뜸인 김돌손을 향해, 흐뭇하니 웃으며 말하였는데,

“두 분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이 늙은 중도 실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뜻밖에도 김돌손 대신 나이 지긋한 병해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아무 중놈도 아니요 바로 그 병해대사였다. 더구나 그들 바로 뒤에는 임 당수까지 있었으므로 호조 관원들이 당황하여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아, 아니, 소관들이야말로...”

“하, 하하. 그렇지요. 암. 나라 불문(佛門)의 종주(宗主)와 다름없으신 대사께서 이처럼 천하에 이로운 일을 해 주시니 어찌 사의(謝意) 외에 다른 뜻을 더 품겠습니까.”

그것을 은근히 즐기는 듯한 병해가 몇 번이나 더 사례하니, 그 부담스러움이 극에 달한 호조 관원들은 급히 핑계 대고는 사라졌다.

그렇게 갈 사람은 가고, 이밥 먹고 기운 차린 일꾼들은 저들이 나르던 쌀섬을 그대로 보상으로 받아, 희희낙락하며 진휼청을 떠났다.

남은 기학도들이 뒷정리하는데, 꺽정이가 어느새 바짝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암만 괴팍한 늙다리 중이라지만, 그렇게 사람 괴롭히는 것을 재미로 삼아도 괜찮소?”

“이게 다 불도(佛道) 위한 것 아니겠느냐.”

물론 오늘날 불가의 흥성함에 있어 가장 큰 공로는 봉은사 주지 보우에게 있겠지만, 병해가 이렇게 당당히 가사(袈裟) 차림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큰일을 벌이고 다녔기에 고루한 선비들이 ‘어디 중놈이 감히...’ 할 명분이 사라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대로 수 년만 지나도, 승려가 저자를 거닐다 선비를 만나 고담준론을 말하거나 사업당 분표의 값어치 변하는 것을 함께 걱정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모습이 아니게 될 테다.

“그나저나 이 기학인지 뭔지 하는 것도 제법 모양새가 그럴듯하게 되었소. 처음에는 그냥 모자란 놈들 밥벌이할 구색 갖춰주려 하시는 일인 줄 알았는데.”

“나는 말년에 그간 배운 것을 써먹을 수 있어 좋고, 또 불문의 다른 동도(同道)들도 내 덕을 보고, 내 아래의 학도들은 저들의 좋은 잔머리를 세상에 도움 되도록 쓸 수 있어 좋고. 그러니 어찌 흐뭇한 일 아니겠느냐.”

꺽정이가 병해와 함께 삼남에서 오복헌법 유세를 돌 때, 양반가 흉볼 건더기를 뜯어내고자 여기저기서 불러모았던 도사며 박수무당이며 하는 무리들은, 이 무렵에는 대개 세 갈래 길 중 하나로 갔다.

하나는 병해 아래에서 기학도로 일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인천과 한양 등지에 마련된 기학재(氣學齋)에서 잡일꾼으로 일하는 것이요, 마지막은 옛날처럼 혹세무민 돌팔이 노릇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물론 어느 쪽을 택하든 저들 마음대로였지만, 개중 세 번째 길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병해의 따뜻한 한 마디가 뒤따르곤 했다.

‘그러고 보니 두리손 그자를 따르던 치들 중 지함두라는 도사가 있었다는데, 문하에 나름대로 제자도 여럿 두었다지? 어쩌면 그 무리가 모조리 쓸려나가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군. 그냥 하는 얘기이니 너무 귀담아듣지는 말게나.’

즉 기학의 무리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요즘 시쳇말로 ‘자유(自由)’지만, 만일 혹세무민의 정도가 지나쳐 민주당 귀에 들어오게 되면 그 뒤가 좋지 못할 것이라는 섬뜩한 경고였다.

“헌데 꺽정이 네 녀석이야말로 여긴 무슨 일이냐?”

“아들녀석 앞인데, ‘꺽정이 네 녀석’이 무엇이오.”

“그러면 네가 어린아이 앞에서 사형을 ‘괴팍한 늙은 중’이라 부르는 것은 괜찮고? 안 그러냐, 철수(鐵洙)야?”

올 여름에 바우는 제대로 된 이름 ‘철수’를 얻었다. 아들녀석이 바윗덩어리가 아니라 무쇠덩어리에 가까운 천생 무골(武骨)이라며, 꺽정이는 ‘쇠돌이’ 정도를 생각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반가 규수의 아들 이름이 ‘쇠돌이’는 너무하였다.

이미 바우 아명 지을 때 한 차례 다툰 바 있기에, 이번에는 그래도 쉽게 명희와 꺽정이 사이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즉 항렬이니 자획에 따른 길흉화복이니 따지지 않되, 그래도 진서로 이름을 짓자는 것이었다. 하여, ‘쇠돌이’의 앞글자만 남겨, 철수로 이름이 정해졌다.

딸아이도 지금은 그냥 아기(阿只)라고 부르지만 – 기실 ‘아기’만 하여도 부네니 언년이니, 서운이니 하는 이름보다는 훨씬 귀한 것이었다 – 내친김에 연숙(姸淑)이라는 이름까지 미리 지었다.

“아부지께서 잘못하셨네요.”

“역시 우리 철수가 어머니 닮아서 현명하구나. 아고, 귀여운 것.”

이미 그 완력이 어지간한 장정과 비슷한 철수를 귀엽다 할 만한 사람을 꼽으면 열 손가락을 넘지 않을 텐데, 병해는 그 중 하나였다.

“자, 이제 너희 아버지랑 얘기 좀 하게 비켜주려무나. 여기 비키는 값이다.”

“네, 헤헤.”

병해가 철수 귓바퀴에서 금평당(콘페이토) 과자 꺼내는 ‘도술‘을 선보이니, 어울리지 않는 배시시 웃음과 더불어 고맙다며 고개 숙였다.

“저거 저놈은 어째 아비 말은 죽어라 안 듣고 백날 딴죽만 거는데, 사형이랑 제 어머니 말은 용케 듣는단 말이지.”

“딱 보아도 임꺽정이 아들 아니냐. 몸집도 성미도 닮는 것이지.”

따지고 보면 꺽정이 저도 철수 나이때는 그랬다. 꺽정이는 그 무렵에 어머니가 죽은 지 오래라 사실상 그 누구 말도 안 듣고 제멋대로 쏘다녔다는 차이는 있었지만.

“그나저나 뭔 일이시오?”

“요새 네가 퍽 한가한 것 같아서 말이다. 내 짧은 식견으로 헤아려봐도 도통 한가할 수가 없는 시국인데 말이지.”

오늘 이곳 진휼청에 온 것도, 원래는 꺽정이 혼자 오려고 했는데 철수가 끝내 졸졸 따라와서 함께 구경하게 되었다던가.

꺽정이가 조식과 함께 천자의 조서를 훔친 뒤 그것을 조롱하면서도 논박하는 글을 지어 널리 퍼뜨린 지도 벌써 여러 달이 지나, 겨울이 성큼 문턱까지 다가왔다.

그사이 조선이 감히 천자의 뜻을 거스르고 헌법 따위를 어정(御定)하였다며 꾸짖는 조서는 한양에 닿았고, 이를 비꼬는 『의산문답』이라는 글이 중원에 나돈다는 것도 조선에 잘 알려졌다. (조식은 한동안 입이 간지러운 것을 참느라 고역을 치렀다.)

헌데 그 뒤로 아무 일도 없이 몇 달이 지났다.

꺽정이의 민주당으로서야, 그 몇 달도 제법 소중하였다. 어차피 벌여야 할 일은 많았고, 조용히 지나가는 하루하루가 곧 닥쳐올 거대한 싸움을 대비하는 틈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손옹’이라는 이름이 미리 정해진 카락의 뒤를 이어 다른 대선들을 만들고, 장사포(長蛇砲, 컬버린)를 베껴 대선에 실을 총통을 주조하고, 일본 땅을 제압할 방편을 마련하기 위해 자유민주당 끄나풀들을 움직이고...

허나 그 평온함도, 무언가 터져야 할 것이 터지지 않는 평온함이었으니 일말의 불안은 항상 남았다. 분명 장거정이 가만 있을 성정도 아니요, 조서의 내용이 유출되어 중원 전체와 그 너머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는 꼬락서니를 가만 내버려두지도 않을 터였다.

조서를 받들어본 이래, 세자에게 해코지될 바 없겠느냐며 걱정하던 임금은, 조심스레 그 『의산문답』으로 중원 선비들의 공론이 휙 돌아선 덕에 천조에서도 발이 묶인 것 아니겠냐며 꺽정이에게 희망 가득한 소리를 하기도 했다.

“우리로서는 그저 할 일을 묵묵히 할 뿐이오. 우선은 도키치로, 아차, 히데요시 그 녀석을...”

그때, 진휼청 대문을 가로막고 혼자 놀고 있던 철수가 본의 아니게 아버지 말을 끊었다.

“아부지! 아부지 찾는 사람이 하나 왔소!”

명문가 자제에서 졸지에 심부름꾼이 되어버린 심의겸은, 대문 막고 있는 이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를 어찌할까 고민(만) 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임꺽정을 ‘아부지’라 부르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신중함에 스스로 만족하였다.

“그, 흠흠. 퇴계 선생의 정론보에 실어달라 청하는 글 하나를 받았는데, 그것이 널리 알려지면 파란이 작지 않을 글이라 미리 상의코자 합니다. 하여 민주당 사람들을 모아달라 청하고자 이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무슨 글이길래 그러시오?”

“『의산문답』을 논박하는 글이라 자처하였는데, 글쓴이가...”

“글쓴이가?”

“상국의 유왕(裕王, 훗날의 융경제 주재기)이시라 하였습니다.”

정론보에 실린 글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생각건대, 나라의 물산이 곤궁하고 백성의 삶이 어려움에는 근본된 원인이 있으니, 국기(國紀)가 문란하고 탐오한 관리가 많은 것은 그에 들지 않는다.

나라의 민호(民戶) 수를 바탕으로 사람의 수를 헤아리면, 홍무(洪武, 주원장) 연간에는 고작해야 육십오 조(兆=100만, 65조=6천5백만)‘에 불과하였으나 지금은 일백오십오 조(1억 5천 5백만)에 달한다. 이와 같게 불어나면 삼십여 년 뒤에는 능히 이백 조(2억)를 넘을 것이니, 천조가 개창하고 이백 년 사이에 세 곱절로 불어나는 것이다.

민호의 번성은 곧 치세(治世)의 징표이나, 땅은 그대로요 사람은 늘어나니, 옛날과 같은 풍족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 배로 많은 소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황전(荒田)을 아무리 개간하고, 산을 갈아내고 호수를 메운다 한들 국초의 두 배도 채우기 어려울 것이니, 이것이 곧 모든 곤궁함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중화는 뻗어나가야 한다. 황천후토(皇天后土)는 광대하고도 은혜로우니, 아직도 하늘 아래에 땅이 넓고도 넓다. 그러한 땅은 대개는 오랑캐의 땅으로 비록 사람이 있더라도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중화는 부유해져야 한다. 가장 문명한 나라의 백성이 가장 부유하지 않다면, 문헌과 예악을 모두 갖추었음에도 그 삶이 곤궁하여 오랑캐만 못하다면 이 어찌 올바르다 하겠는가?

그리하여 비로소 온 천하에 사람다운 사람이 가득하게 되고, 중화는 번영을 얻고 오랑캐는 교화를 얻게 되면, 이를 일컬어 대일통이라 한다.

무릇 하나로 모여야 비로소 강해지고 여럿으로 나뉘면 약해지는 것이 천하의 이치다. 어찌 나라의 힘을 모으지 않고 대일통의 대업을 이루겠는가?

오직 이를 도모함이 곧 공(公)이요, 곧 황명(皇明)의 대업이며, 곧 중화를 위함이다. 오랑캐의 법은 오랑캐를 위한 것이요, 그것이 중화의 앞길을 막는다면 치움이 마땅하다. 존화(尊華, 중화를 높임)가 이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화하(華夏)를 가운데에 두고 높이 올리지 않는 도의를 어찌 도의라 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우리 태조고황제(주원장)께옵서 천명을 받으시니, 실로 중화의 기상이 다시 세워지고 문명은 부흥할 기틀을 얻었다. 그 아름다움을 금세에 이르러 무너뜨린다면, 이것이야말로 조종 사직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삿된 글이 세상을 현혹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나 유왕은 감히 글을 짓는다.‘

금상 천자는 신선술에 빠지기 전만 해도 여색을 매우 밝혔는데, 그에 비해 자식복은 없어, 무사히 장성한 황자는 유왕과 그 아우이자 아버지와 유독 사이가 나쁜 경왕(景王) 둘뿐이었다.

어리석은 황제는 이룡불상견(二龍不相見)을 운운하며 사실상 하나 남은 아들을 멀리하였다. 두 용, 즉 황제와 황자가 서로 마주보게 되면 그로 말미암아 황자가 요절할 것이라 하는 도사의 말을 맹신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왕은 아버지의 사랑도, 대명의 황통을 이어받을 만인지상으로서의 가르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자라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유왕은 황자였다. 유왕이 스스로 저 글을 짓지 않았다 한들, 그의 이름으로 내각수보 장거정이 글을 썼다면 그 함의는 명확하였다.

장차 저 글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 장꺽정 형님한테 여러모로 허를 찔렸군. 엄숭 그 노인네가 내각수보를 오래 해먹었다기에 그게 아무나 앉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가 보오.”

꺽정이가 농지거리를 던졌으나, 지난번 탕평당 쪽에 모인 것을 되갚는 뜻으로 사업당에 모인 양당 중진들의 심각한 낯빛에는 볕이 들지 않았다.

장거정이 재빨리 유왕을 꼬드기든 가르치든 하여 그를 끌어들인 것이 찔린 허의 하나요, 동창을 풀어 언론을 모조리 막고 탄압하는 대신 논변으로써 설득하고 같은 편을 얻으려 한 것이 둘째로 찔린 부분이었다.

“이 사람이 틈틈이 살핀 상학(商學)의 이치에 따르면 저 말은 능히 반박할 수 있을 듯하오. 다만...”

이황이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소진이나 장의를 데려와도 논변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지요. 조선왕 전하께서 직접 글을 쓰신다 하더라도 권세로는 이기기 어려울 텐데, 심지어 장 수보 그이가 아주 교묘한 수까지 썼으니까요.”

저의 나라 임금 아니라고 이탁오가 무엄한 소리를 했으나, 꺽정이에게 익숙해진 다른 사람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장거정을 슬슬 건드려, 그로 하여금 저의 속내를 모두 드러내게끔 한다는 꺽정이와 민주당의 첫 계책은 제대로 이루어졌다. 이제 장거정의 뜻이 명확해진 만큼, 그에게 반대하는 이들 또한 일어날 것이요, 조선이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도 이전보다 훨씬 분명해졌다.

그러나 계책이 너무 성공한 것도 문제였다.

특히, 유왕을 끌어들인 것보다도 저 글의 교묘한 논리가 문제였다. 저의 조상 홍무제의 기상을 이어받아, 딱히 선현(先賢)을 인용하지도, 어색한 유자(儒者)의 말을 끌어오지도 않고, 거의 모든 – 이탁오 같은 별종을 제외하고 – 중화 사람 마음속에 있는 것, 스스로 훌륭하다 여기는 그 마음과 가난을 미워하는 마음을 꼬드겼다.

“선비답지 못한 논변에는 선비답지 못한 논변으로 응해야겠지요. 말씀하신 상학의 이치란 무엇인지요?”

“내 근래 은정고의 일을 맡아보면서, 또 동래부에 차려진 그대들 사업당의 그 ‘공장’이라는 것을 살피며 떠올린 이치가 있었소. 아직 때를 얻지 못하였고, 선현의 말씀에 비추어 스스로 질정(質正)함이 부족하여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였으나...”

그간 논상원에서 오간 여러 주장들, 지금은 허엽과 박순에 의해 정리되어 전국 도회의 학당에서 상인 되려는 이들을 가르치는 그 글에는 제법 날카로운 통찰이 여럿 있었다.

대개 상인 본인들은 그것을 깊게 궁구할 여력도, 이유도 없어 그냥 용한 가르침이라 여기고 지나가곤 했는데, 명색이 선비이자 배우는 사람(學者)인 이황까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국론(富國論)이나 국부론(國富論) 정도라면 좋은 제목이 되겠지만... 아직은 부족하거니와 저 글의 논리를 보면 같은 논리로 상대하기는 난망할 듯하구려.”

“이럴 때 참과 거짓을 가리기 위해 마련된 것이 바로 격물법 아니겠습니까?”

불쑥 끼어드는 것을 보면 이이일 테다. 그 상학의 이치 더 말씀해달라 하려던 서림이 일순 짜증 담은 눈빛을 보였다가 금방 거두었다.

달포 전에 계월당 상씨와 제대로 혼사까지 치렀으나, 새로 마련한 집에 머물며 오붓한 한때 보내는 대신 이렇게 여기저기 부르는 곳과 아니 부르는 곳 가리지 않고 찾아오니, 이이를 ‘리즈’ 다음으로 좋은 이야기 상대로 여기는 이탁오야 좋은 일이지만 계월당 상씨는 속 터지는 일이었다.

허나 지금 이 자리에서는 아무래도 좋은 사정이었다.

“아무리 사람 마음 속 낮은 구석을 노리는 논변이라지만, 엄연히 논변은 논변입니다. 그리고 모든 논변은 입증될 수도, 반박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왕의 손을 빌린 장거정의 주장은 이러하다.

대일통이라는 위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론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나라의 힘을 모으고, 바야흐로 중화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도록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가 하려는 것을 조금 더 열심히, 그리고 더 요란하게 이루어내면 저쪽의 주장이 반박되지 않겠습니까?”

그로부터 다시 한 달 뒤, 도키치로라 알려졌던 린죠 히데요시가 히라도로 찾아와 마츠라 타카노부를 만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 하여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것이 정녕 하야시 쇼군의 뜻이란 말인가? 말이 개혁이지, 내 영지를 내놓으라는 것 아닌가?”

“틀린 말씀은 아니긴 합니다만, 규슈의 다른 다이묘들도 곧 영지를 다 잃게 될 테니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히젠노카미(마츠라 타카노부)께서는 이곳 히젠을 잃어도 자유민주당의 세 영수 중 하나시니 훨씬 사정이 낫다 할 만하지요.”

너무나 황당무계한 말을 너무나 뻔뻔하게 늘어놓는 린죠의 말에, 마츠라 타카노부는 잠시나마 넘어가고야 말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차피 처음부터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조선이 지금껏 거쳐온 십여 년의 가파른 변화를, 더욱 가파르게 하나로 묶어 일본 땅에 풀어놓는다는, 사람이 만드는 태풍 같은 이 계책은 결국 어딘가에서는 시작해야 했고, 히라도만큼 좋은 터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히노모토가 바다 위에 솟은 이래 가장 거대한 격물(실험)이 될 이번 일. 가히 혁명(革命)이라 할 수 있을 이번 일이, 하필이면 자신의 대에, 자신의 쿠니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점이 여전히 안타까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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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언급된 구황작물 이용 식품들은, 모두 『구황촬요(救荒撮要, 1554)』에 나오는 레시피(?)입니다. 당시 국정의 문란에 자연재해까지 겹치고, 전국의 진휼미조차 고갈되자 궁여지책으로 각종 구황작물 식용법을 정리해 배포한 것이지요. 비록 이 책은 널리 퍼지지는 못했지만, 여기서 정리된 구황작물 식용법은 훗날 경신대기근 당시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전국에 전파되어, 기근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다소간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전에 임꺽정의 작중 본명 ‘배도치’ 등에 대해 고찰하며 언급했던 것처럼, 조선 후기까지도 천민의 이름은 대체로 동물이나 생김새를 바탕으로 짓는 고유어 이름이 많았습니다. 반면 조선 중기를 넘어서게 되면 상민의 이름은 점차 한자 비중이 높아져, 조선 후기에는 우리에게 지금까지 ‘한국 이름’으로 익숙한 형태들이 널리 쓰이게 됩니다.

특히 여성을 포함한 대중을 소재 또는 독자층으로 삼는 한글 문헌이 늘어나면서, 종전에는 기록되지 않던 여성의 이름도 많이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1617)』에 나타난 양반 여성 이름만 해도, 박다례(박시氏다녜), 윤례향(윤시녜향), 송숙향(송시슉향) 등 현대 기준으로도 조금 낡은 느낌일 뿐 아예 낯설지는 않은 인명이 나타나기 시작하지요. (물론 서민층과 그 이하에서는 여전히 ‘간난이’, ‘언년이’ 등의 이름이 계속 쓰였습니다.) 또한 오늘날까지 종종 보이는 ‘X수’, ‘X호’ 등의 남성 이름도 조선 중기 이후 많이 보이게 되고, 조선 후기에 서민층이 양반의 작명법을 널리 쓰게 되면서 현대까지 이어집니다. 예컨대 국사 교과서에도 종종 수록되는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사발통문을 보면, 송인호, 최병선, 최홍열, 송주성 등 현대 한국인의 이름과 구별되지 않는 (물론 X오, X칠, X삼처럼 현대 기준으로 다소 ‘낡은’ 이름도 있습니다) 인명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니 꺽정이 슬하 남매의 이름은 당대 시점에서는 ‘트렌디’하거나 트렌드를 약간 앞서나가는 정도인 셈입니다.

오늘날에는 10의 12승을 뜻하는 수사 조(兆)는 본디 100만을 뜻했습니다. 이러한 용법은 한국과일본에서는 사라졌지만 현대 중국어에는 남아 있지요. 마찬가지로 10의 8승을 뜻하는 수사 억(億)은 근대 이전까지는 10만을 뜻했고, 지금의 1억은 ‘일만만(一萬萬)’ 등으로 표현되곤 했습니다.

하필이면 아버지가 가정제요 아들은 만력제라 그 존재감이 희박한 융경제는, 작중 언급된 것처럼 황태자로서의 교육은커녕 태자 책봉도 받지 못한 채 황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위의 두 형이 요절하고, 그 아래인 경왕 주재천은 아버지 가정제의 미움을 받기도 했거니와 가정제보다 일찍(1565년) 사망했기 때문에 융경제는 무사히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요. 비록 여색을 밝힌다는 단점이 있었고, 과도한 호색 행각이 명을 단축했다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융경제는 선대 가정제보다는 훨씬 나은 황제였습니다. 서계, 해서, 장거정 등 유능한 신료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고, 그 덕에 가정 연간에 망가질대로 망가진 명의 체계는 재정비될 수 있었습니다. 흔히 만력신정이라 불리는 만력 초기 장거정 지도 하의 개혁 역시, 융경제의 5년 간의 치세 동안 어느 정도의 기초공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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