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거경궁리 (2)
민주당 산하 자유민주당은, 한편으로는 임 당수의 명을 받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림의 사업당에 협력하는 관계였다.
오늘날 그 사업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강남과 인천, 동래와 규슈를 잇는 항로를 운영하는 용선(傭船)이 가장 컸다. 왕직 아래에 뭉쳤을 때도 기실 해적 노릇보다 잠상 노릇이 훨씬 비중도 크고 이문도 많이 남겼으니, 그 규모가 비할 수 없이 커진 것을 제하면 옛날과 비슷하였다.
자유민주당의 내선(萊船)에 실려 히라도를 드나드는 물산만 하더라도, 조선과 북변의 인삼, 강남과 조선의 다완(茶碗), 일본의 어지간한 사람들은 이름조차 모르는 진기한 당물(唐物, 중국 제품의 통칭), 류큐의 설탕 등등.
오가는 사람 또한 그만큼 각양각색이었다. 일본 각지에서 모인 상인과 일꾼들은 부산히 저들먹고살기 위한 일을 하고, 류큐 진량사에 고용되어 ‘대사탕국(대만)’ 농장을 타카사고(高沙, 대만) 오랑캐로부터 지키고자 배 기다리는 시마즈 가문 무사들은 술집에 모여 근래 조선에서 들어온 투전 놀음에 열중하였다.
오다나 모리 씨 등 뒤에서 몰래 가네야마 총이나 남만 화포 구해볼 요량으로 두리번거리는 자들은, 필시 타지 다이묘들이 보낸 시노비(닌자)들일 것이요, 대로 한쪽에 나무 궤짝 가져다 놓고 포교하는 이는 얼마 전 고국 포르투갈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예수회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였다.
그리고 그 앞에서 듣는 이들 중에는 신도도, 곧 신도가 될 사람도 있지만, 저 괴상한 믿음에서 말하는 ‘예수’가 혹시 언제고 하생(下生)하실 그들의 미륵불과 같은가 궁금하여 귀 기울이는 백련교(白蓮敎)의 밀정도 있었다.
아직도 바깥 세상을 어설프게만 아는 일본의 자칭 식자들은, 히노모토의 모든 것은 사카이에 모이고 바깥 천하의 모든 것은 히라도에 모인다고 떠들곤 했다. 이 모습을 본다면 그 말에 일말의 진실 담겨있음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평소에도 이처럼 북적이는 도시가 히라도인데, 지난 며칠간은 그 정도가 더 심해지고만 있었다.
“이게 다 그 린죠 놈 때문 아닌가.”
저의 성 누각에서 그 모습 바라보던 마츠라 타카노부가 영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 ‘린죠 놈’이 곁에 없으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야시 쇼군을 곁에서 모시는 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함부로 사람을 거둘 리 없으니, 말을 조심하시지요.”
소식 듣고 고토 쪽에서 넘어온 또 다른 영수 소 모리타네가 조용히 대꾸했다.
“흥, 이곳 히라도도, 저 고토 다섯 섬도 모두 본디 이 마츠라 당의 것인데...”
“땅이야 공(公)의 것일지 몰라도, 그 땅이 지금 누리는 영화는 열에 여덟아홉이 다 하야시 쇼군 덕 아닙니까.”
자유민주당 세 영수가 서로 견제하느라 썩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허나 그들끼리 다투는 일이나 남의 이간질 당하는 일은 아직껏 없었는데, 그야 그들 윗선이 바로 ‘흑염룡’이니 수작 잘못 부렸다가 무슨 꼴이 날지가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개중 소 모리타네는 그저 하야시 쇼군을 옛 무사들이 주군 섬기던 것처럼 섬기고, 그 흑염룡과의 첫 대면부터가 썩 살갑지 못했던 마츠라 타카노부는 하야시 쇼군을 주군처럼 섬기기는 하되 마치 주군을 일곱 번씩 바꾸는 요즘 무사처럼 섬겼다.
그리고 서해는 자유민주당 영수 노릇하며 챙겨먹고 대접받는 재미에만 빠져 있었으므로, 그저 가게 점원이 주인 따르듯 따를 뿐이었다. 조만간 다시 잠상질(밀무역)과 해적질을 바짝 할 때가 올 테니 대비하라는 민주당의 지령 받들어, 저의 고향 휘주로 가서 뭔가 수작질을 하고 있었기에 이 자리에 없었지만.
여하간 이 세 사람이 지금껏 묘한 균형을 이루어 여기까지 왔다. 헌데 느닷없이 당 윗선에서 평민의 아들을 내려보내 이곳 규슈에서 뭔가 거한 일을 벌이겠노라 하였으므로, 그 균형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대도 린죠 그자가 무슨 짓 벌이려 하는지는 들어 알고 있지 않은가? 쿠니 하나를 쥐락펴락하는 사람으로서 아무 생각이 없는가?”
“생각이야 있지요.”
마치 내려놓을수록 더 얻게 된다는 선(禪)의 가르침처럼, 대마도 소 씨 내에서 한창 벌어지던 가독(가장의 권한) 둘러싼 집안싸움의 마지막 승자는 바로 그 싸움 싫어하여 고토 열도로 넘어온 소 모리타네가 되었다.
배들이 굳이 대마도를 거치지 않고 곧장 동래와 히라도를 오가게 되면서, 그간 경유지로서 번영하던 대마도는 빠르게 쇠락해버렸다. 동래와 히라도로 넘어가 일하는 사람들 없이는 섬 전체가 굶어죽을 지경이 되고야 말았는데, 그렇게 되니 자연스레 대마도의 유일한 목숨줄은 그 하야시 쇼군과 독대까지 한 바 있던 소 모리타네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대마도 소 씨의 흑막 내지는 실세 노릇이 시작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도주(島主) 자리도 조선처럼 권점으로 뽑으라고 할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뭐라?”
“어차피 누가 윗선에 앉든 별반 달라질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권점이라는 것이 개명된 법도라 하니 따르는 쪽이 이롭지요. 제가 올바르게 이해했다면, 어차피 이번 ‘격물’이라는 것이 끝나면 규슈 땅은 몇 년 안으로 모두 그렇게 바뀔 것입니다.”
모리타네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다. 그저 소 씨 집안에 태어나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재능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더욱 눈을 치뜨고, 적어도 조선에서 벌어지는 일들만은 이해하려 갖은 힘을 기울였다. 배후의 세력만으로 따지면 자유민주당에서 가장 달리는 모리타네가 세 영수 중 하나로서 아직껏 굳건히 버티는 것도 그 덕이리라.
“흥, 아직 이 난세가 시작한 이래로 통일은커녕 어느 한 집안 아래에 뭉치지도 못한 규슈요.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오우치조차 절반이나 겨우 얻었던가.”
“그렇지만 그런 규슈의 모든 무가(武家)에서 이번 부름에 응하지 않았습니까.”
이 무렵 규슈 땅은 대략 넷으로 갈라져 있었다. 마츠라 당의 히라도도, 그 부강함으로 따지면 저 네 집안 중 가운데 쯤에는 들 수 있었으나, 차지한 땅의 넓이와 영민의 수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그 부유함과 위세가 이미 서국(西國, 일본 서부) 제일이라 불리는 모리 씨가 북쪽에 한 토막.
음흉함과 냉혹함, 그리고 그에 어울리지 않는 푸짐한 몸매로 인해 ‘히젠의 곰(肥前の熊)’이라 불리는 류조지 타카노부(龍造寺隆信)가 히라도 코앞에 한 토막.
오우치 씨가 무너진 자리에 저의 깃발을 꽂으려다 모리 씨의 개입과 류조지 타카노부의 배신으로 쓴맛을 보고, 호시탐탐 다음 기회를 노리는 오토모 ‘돈 프란치스코’ 요시시게(大友義鎮, 오토모 소린)가 동쪽에 한 토막.
저들의 속국쯤으로 여겼던 류큐가 민주당 손을 잡더니 훨훨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한때의 상전에서 이제는 류큐 진량사의 요짐보(경호원) 신세가 된, 그러나 거기에 만족할 마음은 전혀 없던 남쪽 가고시마의 시마즈(島津) 씨가 한 토막.
그리고 거기에 들지 못하는 온갖 잔부스러기 집안들.
이러한 모든 집안에 린죠 히데요시가 자신의 이름으로 소집을 명한 것이 고작 이레 전이었다.
‘이번달 말일에 히라도에서 규슈의 앞날에 대한 중대사를 논하고자 하니, 집안의 사람을 보내어 자리 빛내주시기를 삼가 청합니다.’
저 교토의 쇼군조차 마음대로 못 하는 소집을, 일개 평민의 아들이 어찌 명하였는가. 겉으로만 따지면 명령보다는 초청이나 부탁에 가까운 글의 맨 뒤에 붙은 문장 한 줄의 힘이었다.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할 불이익에 대하여 본 당은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린죠가 히라도에 닿자마자 먼저 빠른 배를 띄워 돌아가는 사정 귀띔해준 모리 모토나리가 가장 먼저 히라도로 삼남 타카카게(小早川隆景)를 보내기로 공언하였다.
지나치게 빠른 성장세로 주변의 경계를 두루 사는 바람에, 조선의 천하인이 구해주는 화포와 용병의 힘이 필요하던 모리 씨로서는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서국 최강이라는 그 체통을 고려하여 미리 귀띔해준 하야시 쇼군의 배려에 감사할 뿐.
이렇게 모리 씨가 움직이니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은근히 모리 씨와 하야시 쇼군 사이가 멀어져 자신에게도 기회 닿기를 바라며 일찌감치 천주교로 개종까지 한 바 있던 – ‘하비에르 화상’이 하야시 쇼군의 아들에게 이름까지 지어줄 만큼 사이 돈독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 오토모 ‘프란치스코’는 아예 본인이 오기로 하였고, 이렇게 되니 류조지와 시마즈 쪽에서도 오지 않기가 더욱 곤란하게 되어버렸다.
규슈를 쥐락펴락하는 거의 모든 가문이 모이겠노라 하였으므로, 그간 눈치를 보던 나머지 잡다한 집안들은 이제 끌려오다시피 할 것이다.
“회의를 열 준비도 보아하니 다 끝나가는 듯하고, 이제 모여드는 사람들 구경할 일만 남았군요.”
“어지간히도 볼 만하겠군. 천한 것들까지 무사들과 어울리는 그 꼬락서니를 보아야 한다니.”
비단 마츠라 타카노부뿐 아니라, 히라도로 모여든 어지간한 무가의 사람들은 이맘때쯤 대개 당혹과 모욕감에 빠져 있었다.
린죠 히데요시가 초청한 것은 크고 작은 규슈의 무가들에 그치지 않았다. 이곳 히라도의 호상(豪商)들, 그리고 규슈 곳곳에서 제법 알찬 세력 거느린 사찰의 승려들까지, 이 규슈에서 끼니걱정 하지 않을 법한 이들을 죄다 모으다시피 하였다.
그나마 이름 높은 무가에서 나온 이들은 범속한 무리와 어울리지 않도록, 단상을 이층으로 높게 쌓아두기는 했다. 그러나 모리 씨나 오토모 씨, 시마즈 씨와 어깨 나란히 못할 자잘한 집안들, 적어도 그런 집안의 수행원들 중 몇몇은 상인 무리와 섞여 일층 바닥에 앉아야 할 터.
“그 ‘천한 것들’ 덕에 히젠노카미 자리도 지키고 계시고, 또 규슈는 물론이요 온 히노모토가 마츠라 공의 명성을 알게 되었지 않습니까.”
계속 툴툴대는 타카노부의 말을 견디다 못한 소 모리타네가 한 마디 쏘아붙였다.
허나 타카노부는 타카노부대로 그 말에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대가 아니더라도 내게 그 점을 상기시켜주는 무리가 이 히라도에만 한가득일세! 그리고 이번 모임은 보나마나 그놈들이 더 기어오를 명분만 더해주겠지!”
조선 땅에서 사람들이 나라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 저의 뜻을 밝히고, 나아가 그 뜻을 이루어내는 것까지 보고 들은 히라도 상인들은, 예전에는 왕직과 마츠라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쳤다면 이제는 숫제 영주님의 권세 중 절반은 저들 것과 다름없다며 지분을 요구하고 나섰다.
물론 상인들도 칼자루 쥔 손은 두 눈으로 똑바로 보고 있었기에, 히라도 저자 안쪽의 사정 중 일부만 저들의 뜻대로 운영하고, 그마저도 반드시 후에 타카노부에게 보고하는 등, 적당히 선은 지키고 있었으나, 애초에 이 나라 일본의 무사라면 – 어지간한 괴짜가 아니고서야 - 저의 영민들이 그런 선을 긋고 또 지키는 것 자체를 못마땅히 여길 터였다.
두 사람 사이에 심상찮은 시선이 막 오갈 무렵, 문이 발칵 열리고 린죠 히데요시가 성큼성큼 들어와 그 팽팽함을 깨뜨렸다.
그렇게 들어온 히데요시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이야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회의장 잘 만들었다며 타카노부에게 연신 감사하다는 말만 주워섬겼다.
그렇게 다시 여드레가 지나, 마침내 모임의 날이 되었다.
쿠로코(黑子) 섬과 히라도 성이 마주 보이는, 바닷가 널찍한 언덕 위에 나무 뼈대와 장막으로 큼직한 건물을 세웠으니, 히데요시가 일전에 런던과 파리에서 보았던 극장과 비슷한 형상이었다.
그 무대 한쪽에서 선 히데요시가 좌중을 살핀즉, 이층에 올라가 있는 여러 집안 사람들은 그 그릇에 따라 이 광경을 흥미롭게도 보고, 불쾌하게도 보고 있었다.
반면 위세 높은 이들에게 떠밀려 상인들 사이에 앉게 된 무사들은 자연스레 불만이 가득했다.
“이보시오, 린죠 공 되시오?”
히데요시를 보았는지, 개중 하나가 용기 있게 떨쳐 일어나 물었다.
“무사를 이리 박대하는 법도가 어디 있다는 말이오? 아무리 그대가 조선 천하인의 위세를 등에 업었다 하나, 무사의 자긍심은 천하인은 물론이요 신불(神佛)의 신통력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것! 이 결례에 대해 해명과 사과를 요구하는 바요.”
위층 무사들은 좋은 구경거리 나왔다는 듯 고개 내밀고, 아래층 무사들은 ‘옳소’ 하며 찬동하고, 그 옆의 상인들은 숨죽이며 비웃었다.
히데요시의 얼굴에도 잠시나마 비웃음이 서렸다.
평민들이 고작해야 천옷이나 훈도시 차림으로 창이나 휘두를 때, 당세구족(當世具足, 전국시대 말에 등장한 전신 갑주) 차려 입고 명검 휘두르며 일당백의 무공을 세우는 무사.
그런데 그런 무사도 요즘 세상에는, 아랫것 떨거지가 쏘는 조총 한 방에 절명하기 마련이었다. 목숨값이 똑같으면 사람의 값어치도 똑같이 할 터. 오히려 그 재산으로 조총수 여럿 고용할 수 있는, 나리 옆의 상인들이 더 귀한 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말로 쏘아붙이기에는 히데요시의 시분(시간)이 너무나 귀했다. 대신 뒤에 서 있는 이에게 손짓할 뿐.
“실례하겠소. 존함이 어찌 되시며 적(籍)은 어디 두고 계시오?”
무대 가장자리에 서 있던, 말투와 복식 모두 조선 사람인 자가 히데요시 대신 올라와 대꾸했다.
“누가 묻는가?”
“허어, 대뜸 하대부터 하다니, 이것이 일본국 예절인가 보구려! 이 사람은 조선에서 공보에 기사 싣기 위해 나온 박 아무개올시다.”
“무어라? 공보?”
“그렇소. 얼른 하려던 말 마저 하시오. 그래야 일본국 모 고을의 아무개 선달이 좋은 자리에서 대뜸난동 부리며 식견 얕은 소리 했다고 싣지. 온 세상에 이름 떨칠 기회요.”
느닷없이 넓은 세상 얘기가 튀어나오니, 시골 무사는 그저 기가 죽을 수밖에. 붉으락푸르락한 채 그 자리에 앉는 것이, 오늘밤 잘못하면 애먼 여관 점원이 화를 당할지도 모를 듯하였다.
“멀리서 오신 귀빈께 조심스레 여쭙겠소. 조선의 공보에서 이곳에 찾아온 까닭이 무엇이오?”
풍채가 상인에 가까운, 나이 지긋한 무사 하나가 일어나 물었다. 대개 나이 많은 무사는 실력이 출중하든 성품이 좋든, 둘 중 하나가 아니고서는 그 나이 먹도록 숨이 붙어있을 수 없었다.
“그야, 온 천하가 이곳 규슈에서 벌어질 일을 눈여겨보기 때문이지요. 곧 설명을 들으시면 이해하게 되실 터이니 조금만 참아주시지요.”
“알겠소이다.”
그사이에 장막 안에 들어올 이들은 다 들어왔다. 이제는 모두의 눈길을 잡아끌 때가 되었다.
린죠 히데요시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히라도에 감도는 것을 눈치 채고, 급히 한양으로 연통을 보내 필요한 조처를 모두 취했다.
무언가 일을 벌일 듯하던 히데요시가, 좌중 대신 무대 뒤편에 손짓하는 것을 본 이들은, 저의 옆에 누가 앉아 있는지, 이런 상스러운 자리에 무가의 자제가 참석하게 된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따위는 잠시 잊고 저들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대가 잠시 쿵-쿵 울리더니,
“잘들 와주었다. 내가 바로 임꺽정이다. 흑염룡 운운하는 놈 있으면 이 자리에서 그 좋아하는 용을 구경할 수 있도록 용궁에 보내줄 테니 그리들 알거라.”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누군지 알 만한 거한 하나가 올라와, 못 알아듣는 놈이 손해라는 듯한 당당한 조선말로 말했다.
“내가 궁금한 것이 있어 너희를 불렀다.”
무사들이 잠시 체통 내려놓고, 옆의 상인들에게 혹시 조선말 아느냐고 물어야 하는가 진지하게 고민할 무렵, 때맞추어 히데요시가 그 말을 옮겨주었다.
“그 궁금함이 얼마나 크시기에, 우리를 이렇게 모으셨습니까?”
이층에서 당당히 묻는 자는, 오토모 프란치스코 또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일 테다.
“이놈들아, 좀 우리 공보든 정론보든 읽고 살아라. 얼마 전에 대국 유왕이 실은 글도 보지 못하였느냐?”
대국은 어느 나라인가, 유왕은 대체 뭐하는 작자인가, 수근대는 소리가 잠시 아래층에서 나돌다가 금방 잦아들었다.
“말하기를, 땅은 좁고 사람은 많은데, 그 소출을 늘리지 못하니 이로써 가난하게 된다더라. 어떻게든 나라의 힘을 한데 모아서 땅을 넓히고 사람을 여기저기 옮겨 살게 하고, 또 이웃한 땅에서 재물을 뜯어와 백성을 풍족하게 해야 한다더군.
그런데 꼭 그래야만 하는지, 따져보기 전에는 알 수 없지 않겠느냐? 그래서 이곳 규슈를 택했다. 자세한 것은 여기 린죠의 말을 듣거라.”
모두의 눈길을 확실히 끌었다. 이 한 단락 말을 위하여 임 당수를 데려온 보람은 있는 셈이었다.
“흠흠, 소개말씀 올리겠습니다. 민주당에서 당수를 모시고 일하고 있는 린죠 히데요시입니다. 당수께서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당이 이번에 규슈에서 해보고자 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유왕의 이름을 빌린 (아마도) 장거정에 따르면, 소출은 쉽게 늘지 않고 사람의 입은 빠르게 늘어난다 하였다. 그리고 여기 대처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하나된 힘이 필요하다 하였다.
이를 반박하려면, 그 반대 사례를 온 천하에 내보여 입증하면 그만이었다.
“사공육민(四公六民, 40% 세율)이니, 오공오민(50% 세율)이니 하는 것을 이듬해 한 해 동안 멈추고, 딱 일공구민(一公九民)으로 하는 것입니다. 올 겨울 동안 영민들에게 널리 알려, 가장 어리석고 물정 어두운 자들도 이듬해 에이로쿠(榮祿) 5년(1562)에는 세곡을 매우 적게 받을 것이니, 거두는 대로 모두 저의 것이 된다는 것을 알게끔 해주십시오.
그리고 쿠니의 경계를 넘나들며 장사를 벌이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평소의 세금에서 팔 할을 면하여주는 것입니다.”
그 말에, 임 당수 등장으로 조용해졌던 장막 안이 마치 몰아치는 태풍과 같이 시끄러워졌다.
사공육민이 무엇인가. 요즘과 같은 난세에는 칠공삼민(70% 세율)까지도 치솟는 것이 세곡의 비율이었다. 그렇게 걷어가면 당연히 남는 것은 굶주린 입뿐이니, 갓 태어난 아이를 태어나지 않은 것으로 치고 몰래 죽여 묻든, 아니면 전쟁에 종군하여 밥벌이를 하든, 식구를 류큐에 팔아 호구지책 마련하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난세의 법도였으므로, 다들 그래야 하는 줄로 알고 순응해 왔다. 물론 가끔씩, 이대로 죽느니꿈틀거리기라도 한 번 해보겠다며 잇키(농민반란 또는 징세거부 소요)를 일으키는 자들도 있었고, 간혹 일향종의 과격한 승려들이 앞장서서 백성만의 쿠니를 세우자며 날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그런 곳도 있다더라’ 정도의 머나먼 소문으로 그칠 뿐. 무사들도 그저 탐학스러워 그렇게 수탈하는 것이 아니요, 어떻게든 영지를 지키고 세력을 키워 난세에서 살아남고자 할 뿐임을, 백성과 상인들도 알고는 있었다.
이러한 세상 자체를 뒤바꿀 수 있는 힘은 백성도, 상인도, 교토의 공경들도 아니요, 오로지 무사들과 몇몇 승려들에게만 있었고, 그마저도 오닌(應仁) 연간 이래(전국시대의 시작) 일본 예순여섯 나라에 고루 흩어져 어느 한 사람 손에 머물러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저 사람끼리 약조하여 일순 그 법도를 바꿀 수 있다면?
한 번 바뀐 것은 두 번도 바뀔 수 있고, 두 번 바뀐 것은 세 번, 네 번도 바뀔 수 있으며, 그렇게 쌓이고 또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영영 바뀐 채로 굳어질 수도 있었다.
“자, 자, 진정들 하시지요.”
저 원숭이 닮은 왜소한 청년의 뒤에 누가 있는지 이제는 모두 알았으므로, 나지막한 한 마디에도 모두들 조금씩 정숙을 되찾았다.
“우리 당이 세운 주장이 옳다면, 이렇게 하더라도 오히려 규슈 각지의 무가들이 걷는 세곡은 평시보다 더 늘어날 것입니다.”
“아니, 그 무슨 이치에 반하는 소리요?”
“...라고 하신 분 존함은 조금 이따 적도록 하겠습니다.”
“...”
“노자 왈, 지모(智謀)를 끊고 계책을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 배가 된답니다. 하나를 쪼개어 절반을 취하는 것보다, 백을 쪼개어 십을 취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겁박과 더불어 이탁오에게 들은 풍월을 읊으니, 솔깃하게 여기는 눈치는 없어도 대놓고 허튼소리 말라 떠드는 자도 사라졌다.
“린죠 공에게 묻겠소. 다들 알겠지만, 무가의 사람들이 모질고 간사하여, 오직 평민들을 괴롭게 하고자 사공육민으로 수취하는 것은 아니외다. 무(武)란 곧 창(戈)을 멈추는(止) 것. 슬프게도 난세의 이치는, 무가로 하여금 상쟁을 그치지 않게 하고 있소. 일 년 사이에 다툼이 벌어져, 막대한 전비가 소요된다면 그때는 어찌해야 하겠소이까?”
이층 좌석에서 일어나 묻는 이의 가슴팍에 십자 목걸이 있는 것을 보니, 아마 오토모 요시시게인 모양이었다. 나름대로 하야시 쇼군에게 잘 보이겠다며 직접 찾아왔는데, 그것이 무색하게 이렇게 반론 꺼낸다는 것은, 그만큼 당황하였거나 의구심 가득하다는 뜻일 테다.
“아, 좋은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께서 이듬해 한 해 동안 서로 싸우지 않으면 그만이지요. 모리 씨를 제하면 규슈 바깥에 따로 영지가 있으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모리 씨로서도 사실 영지에서 나오는 세곡쯤이야 은광의 소득에 비하면 별것 아닐 테고요. 그러니 이 자리에서 서로 화평을 합의하면 다음 한 해 동안은 규슈 전체가 평온할 것입니다.
원래 격물이라는 것은, 그 결과에 영향 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가지런히 통제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것을 격물법에서는 경(敬)이라 부르지요.”
듣는 무가 사람들 관자놀이에 열기가 뻗치든 말든, 조목조목 맞는 말이 나왔다. 새삼스레, 눈앞의 저 왜소한 사내 뒤에 있는 세력이 그들보다 얼마나 거대한지를 깨달았기에, 차마 목을 넘어오는 험한 소리를 함부로 내놓을 수 없었다.
“린죠 공께 여쭙겠소. 만일 우리 영지의 사정이 유난히 곤궁하여 도저히 지금 말씀하신 바를 따를 수 없다면 어찌해야겠소?”
시마즈 집안 쪽에서, 몇 번을 걸러 순해진 채로 나온 불만이었다.
“당연히 우리 당에서는 여러 훌륭한 집안이 영지를 다스리는 데 있어 참견하려는 뜻은 없습니다. 영지 안의 일은 오로지 영주와 그 집안에서 알아서 할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온 천하가 궁금하게 여기는 것을 구명하는 데 도움을 달라 청하였을 뿐인 걸요.”
허수아비 조정이요 허울 뿐인 막부라지만, 어쨌든 명분을 신경 쓰는 일본의 다이묘라면 모두 조정의 신하이자 막부의 신하였다. 쿠니 하나를 아우를 만한 영주라면, 히젠노카미(肥前守)니 규슈탄다이(九州探題)니 하는 벼슬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여기 계시는 당수께서는 비록 위세는 높으시지만 엄연히 조선 사람이요, 좌중 제공(諸公)은 모두 일본의 사람이자 조정의 명을 받드는 몸입니다. 어찌 함부로 무엇을 하라 마라 강요하겠습니까?”
그러나 히데요시의 이 말 뒤에, ‘물론 네놈들이 따르지 않는다 하였을 때 네놈들의 아랫사람들이 어찌 생각할지는 조금 다른 이야기겠지만’이라는 뜻이 숨어 있음을 어지간한 무가 사람들은 꿰뚫어볼 수 있었다.
저들의 영지는 오공오민인데 이웃 영지는 일공구민이라면, 과연 이듬해 가을에 백성들이 앉아 저들이 한 해 동안 고생하여 수확한 곡식을 순순히 바치려 하겠는가?
그 뒤로는 별다른 질문도, 이의도 나오지 않았다. 보름 동안 사람 모은 것이 무색하게 그대로 흩어질 뿐.
물론 이런 자리가 또 언제 있을지 몰랐으므로, 만난 김에 서로 술잔이나 기울이자는 이들도 있었고 – 히라도 상인들은 두 팔 벌려 환영할 발상이었다 – 시마즈 쪽에서 데려온 이들과 모리 쪽에서 데려온 이들은 누가 서국 제일이냐를 두고 한판 힘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제법 좋은 구경거리가 되어, 다들 기껏 찾아온 히라도를 금방 떠나는 대신 며칠은 머물며 놀다 가려 하였다.
그리고 불과 보름 사이에 규슈의 모든 상인들에게 그 이름 널리 알린 히데요시 역시, 부르는 자리가 너무 많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또 한 차례 주안상을 두고 잔치 벌이고 나오는 히데요시 앞을 가로막는 이 있으니, 바로 소 모리타네였다.
“아, 언제고 찾아오시리라 생각은 하였습니다, 소 공.”
그러나 모리타네가 아무리 보아도 히데요시는 그저, 졸부처럼 흥과 술, 그리고 갑작스레 얻은 명성에 거나하게 취한 듯하였다. 당장 언제 자객이 습격할지도 모르는데, 그저 허리춤의 칼 한 자루가 대비의 전부이지 않은가.
심지어 이곳 히라도는, 마냥 신뢰할 수만은 없는 마츠라 타카노부의 것.
“걱정 마십시오. 다 믿는 구석이 있어 이리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모리타네도 모르게 한심하게 바라보는 눈빛이 겉으로 드러났는지, 히데요시는 껄껄 웃었다.
“타카노부 그자가 저의 분수를 모르고, 감히 당수의 대업에 훼방을 놓으려 한다, 지금 그런 의심을 품고 고변하러 오신 것이겠지요?”
“아니, 린죠 공! 주변에 귀가 많소이다! 말씀을 삼가셔야...”
“그 귀가 모두 누구의 것이겠습니까?”
그제야 모리타네도 머리 위에 냉수 부은 것처럼 번쩍 정신이 들었다.
“온 천하가 이번 격물의 결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뜻대로 나오지 않으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물론 거경궁리의 뜻에는 다소 어긋나기는 하지만...”
궁리의 과정이 어찌 되었든, 그 끝은 반드시 임꺽정의 뜻대로 될 것이었다.
“임 당수께서는 하늘이 열린 이래 가장 큰 도적이십니다. 도적이 학문이라고 어찌 멀쩡하게 하겠습니까? 사람을 속이고 세상을 속여 진리를 훔쳐내고자 할 뿐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그늘 사이에서 모리타네가 예상치 못한 무리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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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전, 소 모리타네가 등장할 때 종종 언급되었던 16세기 중반 대마도의 속사정이 다시 언급되었습니다. 항해기술의 발전으로 대마도를 경유하지 않고 대한해협을 바로 횡단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대마도는 조일무역의 중간기착지로서, 그 체급 이상의 경제력과 영향력을 지닐 수 있었고, 얽힌 이권이 많은 만큼 당시 모든 무가(武家)의 고질병인 내분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소 씨의 16대 당주 소 하루야스가 장수하면서 발생한 후계 다툼에서 승리한 소 요시시게는, 일본 특유의 흑막에 대한 묘한 집착을 보여주는 케이스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이복동생 마사노리의 반란을 진압하여 집안싸움에서 급한 불을 끈 요시시게는, 이후 양자 시게히사에게 가독을 물려주는 시늉만 하고는 뒤에서 실권을 장악했고, 시게히사가 요절하자 그 아우 요시즈미를 다음 ‘얼굴마담’으로 내세웠고, 요시즈미마저 요절하자 다시 그 아우인 요시토시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였지요. 이런 기묘한 배후 실세 노릇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를 정벌할 무렵 끝이 납니다. 정치적 격변의 시기를 맞아 요시시게는 다시 전면에 나섰고,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에 동참하여 대마도 통치권을 인정받습니다. 작중에서는 이 싸움이, 대마도가 삼백여 년 일찍 몰락하면서 싱겁게 끝나버렸습니다.
작중보다 조금 늦어지기는 했지만 원 역사에서도 서국 최강의 세력을 일군 모리 모토나리는, 장남 타카모토에게 가문을 물려주기로 하고 차남과 삼남은 각각 킷카와(吉川)와 코바야카와(小早川) 가문에 입적시켜 모리 씨를 보좌하도록 하였습니다. 작중 등장한 타카카게가 모토나리의 삼남임에도 아버지와는 성이 다른 것은 이 때문입니다. (당대 일본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었습니다.) 우직한 장남 타카모토나 전형적인 맹장이었던 차남 모토하루와 달리, 외교와 계략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형 킷카와 모토하루와 함께 모리 씨의 위세를 이어갔고, 임진왜란에도 참전하였습니다.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을 물리치는 등 제법 활약하였으나, 하필 권율을 두 번이나(이치 전투, 행주 대첩) 상대로 맞이하는 등 전적이 그리 좋지만은 못했습니다.
작중에서는 천주교 교세가 훨씬 강성해 조금 일찍 세례를 받은 오토모 요시시게는, 법명 오토모 소린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화포를 도입하는 데 적극적이었고, 허세를 듬뿍 담아 ‘나라 무너뜨리는 포(쿠니쿠즈시)’라고 이름 붙인 컬버린을 운용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여러모로 지명도 높은 행적으로 후대에 자주 회자되는 것과는 달리, 원 역사에서는 한때 자신이 후원했던 류조지 타카노부에게 배신당하고, 남쪽의 시마즈 집안에게 밀려 몰락 직전까지 몰리는 등 영 부족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전근대 일본의 조세 수취는, (겉으로 보기에는) 살인적인 고세율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당대 조선과 명이 10~20% 정도의 세율을 보였을 때 일본은 40~50%, 심한 경우에는 70%에 달하는 세율을 보였고, 에도 막부 시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몇몇 번은 15% 정도까지 떨어졌지만 대체로 사공육민~오공오민 정도를 오갔습니다.
이로 인해 당시 일본 기층 민중의 삶의 질이 조선이나 명에 비해 다소 낮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겉으로 보이는 세율만큼 가혹한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전근대 수취제도는 어쩔 수 없이, 낮은 세율이 필연적으로 높은 부패로 (쉽게 말해, 뜯어먹을 것을 많이 남기면 그만큼 많이 뜯어먹게 되는 것이지요) 이어지곤 했는데, 오히려 일본의 경우에는 세금이 번주인 다이묘와 어느 정도 자치권을 지녔던 마을공동체(무라村) 사이에서 직접 수취되는 구조였고, 때로는 농민의 뜻 – 그리고 제한적인 실력 행사 – 에 따라 영주가 양보하는 등 ‘유도리’가 있었습니다 (Steele & Paik, 2017. “Constraining the Samurai: Rebellion and Taxation in Early Modern Japan.” International Studies Quarterly 61). 역설적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중앙집권화로 이러한 유기적 피드백 구조가 파괴되면서, 전후 맥아더 ‘쇼군’의 농지개혁 전까지 일본 농촌의 삶의 질은 하락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