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 달까지의 거리
아직 일본국 구주 땅에서의 격물이 한창 이어지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와, 아바마마, 달을 보시옵소서.”
아명 대신 진짜 이름을 얻은 조선의 세자가, 저보다 높은 얼마 안 되는 사람인 아버지 임금에게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그래, 보이는구나.”
“이 대롱으로 보니, 맨눈으로 보는 것과 비할 바가 되지 않습니다.”
임금도 저 이 만리안(萬里眼, 천체망원경)이라는 대롱을 몹시 보고 싶었지만, 세자가 너무나 천진난만하게 구경을 하고 있어 꾹 참았다. 친가가 풍비박산난 이래 도통 미소를 볼 수 없던 중전도, 멀리서 은은한 달빛 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라 안에, 어쩌면 하늘 아래 아직 하나뿐일지도 모르는 대롱이었다.
서양을 다녀온 임거정이 그 땅의 재주 좋은 장인들을 여럿 데려온 이래 여러 해가 지나, 이제는 번듯한 공방이 인천 일대에 세워지고 조선 사람들 중 그 재주 배우고자 문하에 드는 자들도 꽤 생겼다.
그 공방 중 하나가 바로 귀하디 귀한 유리를 만들어내는 곳으로, 아직 문을 제대로 연 지 몇 해 되지도 않았으나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그런 공방에서 얼마 전, 기존의 백리안보다 더 정밀하고 멀리 볼 수 있는 것을 만들어보라는 민주당의 명을 받들어 이 만리안이라는 것을 창안하였는데, 만들어지자마자 공방에 도둑이 들었다.
‘이것은 원래 진상하려고 했는데, 얼핏 보아도 쓸모가 매우 많아서 한 번 궁에 들어가면 정작 임금님께서는 보기가 어려울 듯합디다. 하여 미리 훔쳐내었소.’
성을 임(林)이라 하는 그 도둑놈은 만리안을 훔치자마자 궁궐에 나타나, 임금에게 그것을 바쳤다.
원래 임금의 모든 일상은 바라보는 눈이 있기 마련이니, 만약 이 만리안이 제대로 진상이 된 뒤에 임금이 만리안을 밤마다 끼고 살다시피 한다면 곧장 완물상지(玩物喪志, 쓸데없는 물건을 가지고 노는 데 바빠 올바른 의지를 잃음) 운운하는 말이 나올 터였다.
‘그래서 생각한 게, 아직 이 만리안이 무엇인지 모를 때 실컷 보신다면, 시끄러운 작자들도 무어라 못하지 않겠소? 나중에 우리 쪽에서 제대로 진상할 때 돌려주시면 아주 감쪽같아 아무도 모를 것이오. 저기 저 상선만 입을 다문다면야.’
그리하여 원래는 임금 혼자 보려던 것을, 어쩌다 보니 세자 생각이 나 세자도 불러 만리안을 보게 하였는데, 지금 저 웃는 모습을 보니 나름대로 보람이 있었다.
말려 올라갈 일 없을 듯하던 상선의 입꼬리도 슬쩍 올라가 있었으니, 입단속 걱정은 없는 셈이었다.
“달에 토끼가 있다고 들었사온데, 이제 보니 허황된 말이었습니다. 검은 자국과 무늬만 있는데, 형상이 참으로 묘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도, 기(氣)가 구슬처럼 두르고 있어 구름이 생기고 비가 내리지 않더냐? 달 또한 같은 것이니라.”
임금이 아는 체를 하였다.
“아바마마의 현량하신 가르침에 감읍하나이다.”
어디서 들었는지 어울리지 않는 말로 사례하는 세자였다.
‘그렇게 가르침을 바란다면, 학문에 힘써야 하지 않겠느냐. 엊그제 서연(書筵)에서도 끝내 서연관의 말을 듣지 않고 얼른 파하자 하였다니, 이렇게 사체(事體, 지체)를 잃어서야 되겠느냐.’
하는 답은 끝내 임금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경연 싫어하는 자신이 할 말도 아니거니와, 지금 저 천진난만한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저런 해맑은 웃음을, 저도 한때 지었을 것이다. 어머니 대비와 외숙 윤원형이, 인종(仁宗)이라는 묘호를 받은 저의 형을 해치려 했을 때. 외숙의 말을 듣고, 마치 자신이 훌륭한 임금이라도 될 것으로 알며 친정을 선언했을 때 등등.
임금은 아들의 웃음에 그러한 사정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뒤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마음 아파하는 일도 없이, 그저 아이로서, 장성한 뒤에는 아들로서, 그리고 그 뒤에는 자신과 달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훌륭한 임금으로서 서기를 바랐다.
나라의 제도가 몇 년 사이 일신되었으니, 조금만 주의한다면 그 뜻을 이루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곧 닥쳐올 풍파, 그것 하나만 견뎌낸다면...
아니, 그 또한 능히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벗 임 아무개가 있었으므로. 그놈이 없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풍파일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그 임가 놈이 앞을 가려가며 행동하는 작자였다면 저에게 벗이 생기는 일도 없었을 테다.
그리고 이렇게 만리안이라는 놀라운 기물을 만져보는 일도, 세자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만리안을 들여다보는 데 다시 열중하던 세자가 또 아버지 향하여 물었다.
“아바마마, 소자가 이 만리안으로 하늘의 운행을 보니 또한 궁금한 것이 있사옵니다.”
“무엇이냐? 내 모두 답하여 주마.”
아들 앞에서 아버지는, 세상 무엇보다도 힘 세고 아는 것 많은 사람. 임금도 결국 사내요 아버지였으므로, 그 어쩔 수 없는 심경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감당 안 될 장담을 하고야 말았다.
“그것이...”
그로부터 며칠 뒤, 경복궁 구석에서 임금을 만나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이 만리안은 아주 잘 보았다. 세자가 매우 기뻐하더구나.”
“다행이오. 미리 훔쳐서 나온 보람이 있구려.”
나름 예의 갖춘다고 두 손으로 받는 꺽정이였다.
“잠깐, 꺽정아...”
대충 인사 올리고 돌아서려는 꺽정이를 임금이 잡아세웠다.
“왜 그러시오?”
“왜 그러기는. 내가 궁금한 것이 있어 그렇지. 내 듣자하니, 요새 학설에 따르면 우리가 밟고 있는 이 곤여(坤輿, 땅)는 둥글어 지구라 부르고, 일월성신(日月星辰) 움직이는 것은 기실 지구가 홀로 도는 것이라 하더구나.”
여기까지는 꺽정이도 얼추 들어 알았다. 고아 종교재판소를 날려버릴 때 이탁오가 사람들 눈길 끈답시고 늘어놓았던 이야기였다.
“그리고 둥근 지구 반대편에서도 사람이 밖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우주에 육합(六合)이 따로 없기도 하거니와 지구 위의 뭇 사람과 물건을 안쪽으로 누르는 기(氣)가 있기 때문이라고도 하더구나.”
여기서부터는 꺽정이도 잘 모르는 이야기였으나, 왠지 임금 앞에서까지 무식하다는 소리 들으면 굉장히 억울할 듯하여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달은 안 떨어지는 것이냐? 정말로 그러한 기의 작용이 있다면, 애초에 모든 것이 어느 한 쪽으로 떨어져야 하지 않겠느냐? 아니면 그저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며 서로 멈춰 있거나.”
허나 여기에 이르러서는, 저에게 대뜸 그런 심오한 철리(哲理) 묻는 것을 황당하게 여기는 마음이 앞섰기에 결국 대꾸하고야 말았다.
“낸들 알겠소?”
“아니, 당연히 네 녀석이 알 것이라고는 생각을 안 했지. 허나 네 주변의 수산이나 율곡 같은 이들은 다들 총명하지 않으냐? 심지어 네 부인 검손당 이씨만 해도 그 지재가 여간한 사내 대여섯 합한 것보다 뛰어나다고 하던데.”
임금이 의도치 않게 면전에서 험담하고는 도로 그 부인 칭찬하는 술수를 부렸기에, 돌아오는 말도 제법 고왔다.
“뭐, 우리 안사람이 대단하긴 하오. 그러면 내 가서 한 번 물어보겠소. 다들 요새 바쁘기는 한데, 개중에 비슷한 고민 한 사람이 하나 없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없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업당 사람들, 규슈 땅 격물의 뒷처리로 인해 바다 건너 히데요시와 열심히 손발 맞추고 있는 서림. 그리고 그 외에도 이미 각자 맡은 일과 스스로 벌인 일 한아름씩인 이지함과 명희, 이이 등등.
“소생도 그런 쪽으로는 영 재주가 없어서 말입니다. 천생 문인(文人)이라 글을 다루는 데만 능한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판 처음 듣는 서양 말도 금방 배워 익힌 것이겠지요.”
“돌고 돌아 자화자찬이구만.”
“원래 유유상종이라고, 당수도 고양이 검손이라면 몰라도 겸손 두 글자와는 별 연이 없잖습니까.”
그나마 한가해 보이는 이탁오마저도, 저는 그쪽 재주는 없는 듯하다며 딱 잡아떼었다.
“결국 율곡 녀석을 붙잡아와야 하나.”
“뭘 그리 고민하십니까? 애초에 이 일은 관상감에서 마땅히 다루어야 할 일인데요.”
“그런가?”
그리하여 세자가 품은 궁금함은 천체가 운행하듯 돌고 돌아 다시 관상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구름재(雲峴)에 있는 관상감 맞은편에는, 제법 말쑥한 동리가 있었는데, 언제고 기이한 소문이 돌기를, 도참과 풍수에 통달한 격암 선생 남사고가 이 일대를 삼백 년 뒤에 왕재(王才)가 나올 아주 좋은 터라고 평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남사고 본인은 극구 부인하였고, 어영청에서 밝혀낸 바 그곳의 집값을 높여 부르려던 악독한 집주인의 농간이라. 그 집은 관에 몰수되고, 차마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묘한 뒷거래 끝에 어영청 군관 민 아무개의 처갓집에서 집을 헐값에 사들여 다점을 열었다.
저를 알아보는 이 많은 삼락서원 주변 대신 굳이 이쪽까지 나아와 찻사발 기울이는 이산해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사연이었다.
‘세상은 이리도 넓건만, 내 나아갈 길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겉보기에는 참으로 앞날 창창한 젊은이가 바로 이산해였다.
그 아버지는 탕평당 사림에게 명망 높은 이지번이요, 숙부는 백의재상 이지함이었다. 숙부와 호형호제하는 이가 바로 임꺽정이고, 그 임꺽정과 말 터놓는 사람 중에는 심지어 이 나라 조선의 지존도 있었다.
더구나 일신의 권세가 전부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산해는 온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영재만 모은 삼락서원의 원생이었고, 그를 만나본 이들은 입을 모아 그 지재를 칭송하였다.
그러니 남이 보기에 이산해라는 젊은이는 앞날이 구만리와 같아, 벼슬길로 나아가면 당상뿐 아니라 정승까지도 따 놓은 셈이요, 상공(商工)에 뜻을 둘 것 같으면 온 천하가 그의 장사판 되기를 청할 터였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한창 생각 많을 나이의 이산해를 괴롭게 하였다.
그의 지재 칭송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과연 그 숙부에 그 조카, 또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하였다.
한편으로는 그를 칭찬하는 말이지만, 듣는 이로서는 태산같이 무거운 칭찬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그가 할 일이 또 무엇이 남았는가? 나라의 경장은 이미 이준경과 이지함 두 사람 손에서 마무리되고 있었고, 천하로 나아가는 일은 이미 대양서생들과 민주당이 선례를 남겼으며, 하다못해 저 동쪽 큰바다 너머로 나아가는 것조차 노선비 이언적이 이미 해버렸다.
이산해 그가 막 남명 선생 조식의 문하에 들었을 때만 해도, 이 세상에는 그의 손길만 기다리는 일들이 참 많아보였는데, 장성하여 눈 비비고 다시 보니 그러한 일들은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 또한 성암 선생의 자 산해도 그 문명(文名)이 높아, 세간에서는 부친에 버금간다 하였다.’
‘아계(鵝溪, 이산해의 호) 선생의 경세(經世) 계책은, 혹설에는 그 숙부에 비하여 딱히 드러남이 없다고 하지만, 깊이 살피면 족히 취할 만한 바가 없지 않다.’
아직 나이 서른도 되지 않았건만, 저 떠난 뒤에 후대에 이런 평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때로 엄습하곤 했다.
그러고 보면, 근래 저의 숙부가 당의 중진들과 함께 장차 닥쳐올 무언가에 대해 깊게 논의한다는 소문도 있지 않던가. 장차 숙부의 뒤를 이어 민주당의 동량이 되겠노라며, 거기에 함께하는 것은 어떨까?
아니, 장수라면 모를까 선비는 이미 한가득 있다. 세상에서 자신이 나름 잘났다 여기던 이산해는, 저보다 불과 세 살 손위임에도 벌써 학문으로 일가를 이룬 이이를 삼락서원에서 만난 이래 뜻이 조금은 꺾였다.
그뿐 아니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저의 숙부도 있고, 잘은 몰라도 비범한 구석 많아 보이는 탁오 선생도 있고...
문득 가슴이 답답하여, 그 이파리를 말린 다음 피우면 심중이 아주 쾌활해진다는 담박고(淡泊膏, 담배)라도 한 번 수소문하여 피워볼까 – 임 당수가 가져온 여러 약초 중 하나였는데, 아직은 조심스레 재배하여 그 약효를 검증하는 중이라고 했다 – 생각까지 하는 이산해였다.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가 그 귀로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아니, 대체 저 달이 저렇게 운행하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물어서 무엇하겠다는 말인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래, 자네 말 잘 했네! 하늘은 무심(無心)한 것이야. 그저 스스로 그러한(自然) 것인데, 대체 무슨 소이연(所以然, 까닭)을 묻는다는 말인가?”
시끄러운 소리 나는 옆 자리를 보니, 사람은 넷인데 상 위의 찻사발은 고작 하나였다. 다점 점주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차마 입으로 험한 말은 못하는 것을 보니, 아마 이 집 단골인 길 건너편 관상감 관원들일 터였다.
“저 삼락서원 영재들, 아니, 그렇게 총명하다는 율곡 선생이나 퇴계 선생까지 모두 모아서 궁리한다 한들 알 수가 없을 것이야. 애초에 사람이 궁구하여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란 말일세!”
“어디 하소연이라도 해 보면 어떻겠는가?”
“자네 미쳤나? 대체 누구한테 하소연을 할 심산인가? 어디 대감댁 앞에 엎드려 간곡히 말씀 올린다 한들, 애초에 관상감이 할 일 아니냐는 말이나 돌아올 텐데.”
삼락서원이 어쩌고, 율곡과 퇴계가 저쩌고 하는 말에 귀가 간지러워진 이산해는, 품에서 쌈지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는 여전히 쌓인 말을 하지는 못하고 부들대고만 있는 점주에게, 저쪽 상에 차 세 사발 더 올려달라며 주머니를 슬쩍 건네었다.
“그러면 저기 기학 하는 작자들에게 시켜보는 건 어떨까? 요새 그 격물안이라는 것 여럿이 제법 성과를 내어, 찾는 아문(衙門)이 많다던데.”
“그치들이야 그저 잡기(雜技) 다루는 이들 아닌가? 그런 놈들이 무슨 천하의 이치를 궁구한다고.”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여겼지만, 시키는 대로 궁구하여 척척 답을 찾아내지 않는가.”
“그래, 그리고 그 우두머리가 바로 임 당수의 사형 병해 대사지. 퍽이나 그 잡것들이 입단속을 잘 하겠다. 물음은 우리 관상감에 물었는데, 정작 답은 엉뚱한 기학재(氣學齋) 쪽에서 나온다면, 당수께서 우리 관상감을 얼마나 예뻐하시겠는가?”
그렇게 한탄에, 세상 욕에, 다시 한탄으로 돌아오곤 하는 이들 사이로 이산해가 비집고 들어왔다.
“사람은 여럿인데 차가 부족한 듯해, 이 사람이 더 내오라 주인에게 청하였소. 나랏일로 심신 고단하신 이들에게 이 차마저 없다면 얼마나 서럽겠소?”
“아이고, 감사합니다.”
관상감 관원들이 딱 보아도 귀한 집 자제인 이산해에게 다들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때맞추어 차가 나와, 모두들 다시 한 번 사의 표하려던 차, 이산해가 총통 쏘듯 툭 저의 정체를 밝혔다.
“실은 이 사람이 수산 선생의 조카 된다오.”
“예?”
만약 그 말이 참이라면, 열심히 임 당수 험담하던 것을 다 들었다는 뜻이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다들 허여멀건해진 얼굴로 이산해의 말을 경청하였다.
“곁에서 귀동냥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궁금한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더이다. 대관절 무슨 전초로 이렇게 고심들 하고 계신지?”
“그, 그것이...”
이제 와서 잡아떼려니 잡아뗄 수도 없거니와, 듣는 이 없을 줄 알고 임 당수 험담까지 마구 하였던 관원들이었다.
결국 그대로 이실직고하게 되었다.
“저 하늘의 달이 이 땅을 돌면서도 떨어지지 않는 연유라.”
“그, 그렇습니다.”
하늘의 일을 사람의 입으로 논하니, 별빛이 눈앞에 스치는 듯하였다.
지금껏 다른 뛰어난 선비들, 특히 그의 바로 앞 대(代) 사람들이 미처 궁구하지 못하였던 것 아닌가?
고작해야 기학도를 자처하는 잡배들이, 격물법을 동원하여 자질구레한 일만을 맡고 있을 뿐.
“이 사람이 대신 맡아 궁리해보아도 되겠소? 임 당수께서 만약 묻는다면, 그대들 이야기는 빼고 그저 밤하늘을 보다가 문득 궁금함을 품었노라 답하겠소이다.”
“예, 예, 물론입지요!”
“저, 송구하오나 혹시 어떻게 궁리하실 심산이신지...”
“이 사람아, 삼락서원을 나오신 영재 앞에서 무슨 소리인가? 당연히 우리 같은 범부(凡夫)들 따위는 알지 못하는 심오한 방도가...”
“무릇 재주 중의 으뜸은 재주 있는 이들을 부리는 재주 아니겠소?”
“예?”
“하하, 걱정 마시오. 필요할 때가 되면 관상감에 찾아갈 테니.”
뭔가 잘못 걸렸다는 난감함이 주변에 번지는 것 따위는 개의치 않으며, 저의 차를 마저 마시는 이산해였다.
구름재를 떠난 이산해는, 이튿날 인천에 있는 기학재로 직행하였다. 뒤늦게 시작한 선방포안의 궁리가 한창이라, 총통 쏘는 소리로 멀리서부터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대사님을 뵙습니다.”
“허어, 도령께서 이곳에는 무슨 일이신가?”
나이 지긋한 병해대사가 반갑게 그를 맞이하였다.
“선방포안의 궁리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요?”
“그야, 멀리서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아주 시끄럽게 이루어지고 있지. 그래도 제법 놀라운 결과가 많이 나오고 있다네.”
“실은 그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듣고 보니 서로 도울 수 있는 바가 있을 듯합니다. 떨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비로소 떨어지지 않음이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이산해의 머릿속에 떠오른 첫 번째 가설.
천하의 이치는 크고 작은 것과는 무관하게 어디서든 같다. 이 땅 위에서는, 만 리 하늘 위에서든, 아니면 저 깊은 바다속에서든.
태극과 오행의 운행으로 저 해와 달부터 미세한 티끌까지,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던가. 다만 지금까지는 그 말이 너무나 웅대하여 그러한 생각을 설령 품더라도 입 밖에 내지 못하였을 뿐.
천상(天上)은 불변한다고 저 아리수도인가 하는 옛 서방 사람은 말했다지만, 예수회 신부들과는 달리 조선의 선비들은 그러한 옛 서방의 논설이 엉터리임을 알고 있었다. 개중에는 물론 후대에 취할 만한 것도 간혹 있었고, 특히 논변에 있어서는 옛 명가(名家)보다 낫고 다스림의 이치에 있어서는 유가보다 못하지만 묵가와 법가보다는 나은 정도였다.
그러나 이 기학에 있어서는 시종일관 오류투성이라, 애초에 오행(五行)이 뻔히 있거늘 고작 네 ‘원소’만 있다고 우기고, 흙과 쇠붙이의 성질이 다르고 물과 나무의 성질 다른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천하의 이치는 하나뿐. 오직 똑같은 리(理)와 기(氣)가 있어 때와 곳에 따라 다르게 발할 뿐. 그렇게 가정하였다.
“마침 잘 되었군. 아무리 여러 번 시행해도 당초 생각했던 것과는 결과가 달라서, 우리 기학도들도 제법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네. 아마 다른 격물안과 달리, 이것을 들고 병조로 향한다면 꽤 많은 논쟁을 겪게 되겠지.”
암만 임꺽정과 병해 대사의 이름값이 높다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거둔 기학도들에 대한 의심까지 단번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보다는 조금 나아졌어도, 아직은 그들을 그저 혹세무민하던 잡배로 보고 무시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격물안을 행할 때에는, 항상 저쪽에서 시비를 걸고, 이것은 어떤 연고로 이렇게 되었느냐, 그대들이 뭔가 잘못하거나 착각한 것 아니라는 증좌는 무엇이냐 물을 것을 대비해야 했다.
“그렇습니까?”
“여기, 정리해둔 것을 보게나.”
날개가 있는 것이든, 날개가 없는 것이든, 떨어지는 것은 모두 똑같이 떨어진다.
다만 바람을 뚫고 나아가기에, 그 형상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대장군전을 쏘아 이를 검증하였다.
반대로, 탄환의 형상이 같을 경우 놀랍게도 떨어지는 빠르기가 가까웠다. 이는 연환(鉛丸, 통짜 납으로 만든 탄환)과 석환(石丸, 돌로 만든 탄환), 수철연의환(水鐵鉛衣丸, 철환 겉에 납을 씌운 탄환) 등을 견주어 가며 쏘아 검증하였다.
“그리고 양기(陽氣)를 가한다고 해서 더 멀리 날아가거나 하지는 않는다네. 가벼운 것이 꼭 스스로 떠오르지는 않는 셈이지. 다만 뜨겁게 데운 철환을 쏘면 적선(敵船)에 불을 쉽게 붙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의외의 소득이 있었지.”
그러나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헌데, 언뜻 생각해도 그 연유를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네. 대장군전을 제한 다른 탄환을 쏘면, 사십에서 사십오 도로 쏠 때 가장 멀리 날아가곤 하였네.”
총통을 그래도 조금 쏘아 본 늙은 화포장들은, 화포를 비스듬하게 세워 쏠수록 멀리 나간다고 우기곤 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러게 내가 무어라 그랬느냐’라며 떠들었는데, 정작 왜 그러는지를 아느냐 물으니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들이 어리석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저 달이 하늘에 떠 있는 이치를 지금껏 누구도 묻지 않은 것처럼, 그저 그것을 궁금하게 여길 이유도, 굳이 힘과 돈을 들여가며 궁구할 이유도 아직껏 없었을 뿐.
“혹시 따로 그림으로써 정리해둔 것도 있는지요?”
“있다마다. 여기에는 저 율곡 도령이 아주 도움을 많이 주었네. 산학을 모르는 이가 보더라도 금방 알아볼 수 있게, 이렇게 그려놓았다네.”
자로 대고 그린 듯 보기 좋게, 그리고 아래에 적힌 숫자를 보지 않아도 얼마나 날아갔는지 알 수 있게끔 그린 도표였다.
그리고 그 그림을 보자마자, 벼락이 이산해의 머릿속을 가르는 듯하였다.
“그리고, 혹 처음에는 느렸다가 나중에 빨라지거나, 아니면 느리면서도 멀리 날아가는 경우가 있을 때를 대비하여, 임 당수가 서양에서 가져온 시계를 썼네. 그 덕에 얼마나 빠르게 탄환이 날아가고 떨어지는지도 계측할 수 있었네.
그 외에도 한 번에 얼마나 화약을 많이 넣었는지, 총통의 낡고 새로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있는지 등등, 모두 정리하여 두었지. 모두 이리로 가져오도록 해 둠세.”
“감사합니다...”
성의 없는 답변에, 병해는 그제야 이산해가 저 도표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만약에 말입니다.”
“말씀하시게.”
“대장군전 하나를 제하면 대체로 다 비슷한 모양을 그리며 날아가는군요. 그리고 당연하지만, 화약을 많이 넣을수록 더 멀리, 그리고 더 빠르게 날아가고요.”
물론 조금 더 방식이 정밀했다면, 동그란 철환조차 완전한 포물선을 그리지는 않는다는 것까지 알 수 있었겠지만, 거기까지는 도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오차가, 철리를 궁구하는 이산해에게는 오히려 행운이 되었다.
“그렇지.”
“그렇다면, 만약 매우 큰 총통에 매우 많은 화약을 넣고 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근질거렸다. 아직은 형언할 수도, ‘이것이다’ 단언할 수도 없지만, 무언가 깨달음이 이슬 맺히듯 아른거리는 느낌이 이산해의 머리를 메웠다.
“더 멀리, 더 빠르게 날아가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구는 둥글지 않습니까. 그렇게 더 멀리, 더 빠르게 날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아무리 떨어져도 땅에 닿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먹! 먹 좀 주십시오!”
붓도 없이 먹만 받아, 종이 여백에 거칠게 그림을 그렸다.
지구는 둥글고, 그 위에서 아주 강한 총통을 쏘아, 떨어지려 해도 도저히 떨어지지 않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달이었다.
“그리고... 천하의 이치는 하나지요.”
이 땅에서 발하는 기가 땅 위의 모든 것을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는 것처럼, 같은 기가 멀리 달에도 미치고 있을 테다.
다만 그 달이, 눈앞 종이에 어설프게 그려진 탄환처럼, 너무나 빠르게 돌고 있기에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뿐.
그렇다면 같은 이치가, 태양과 지구 사이에도 있을 것인가?
“종이! 종이 좀 더 가져다 주십시오!”
젊은이의 돈오(頓悟)를 막아서야 되겠는가. 병해는 군말 없이 그사이 모여든 기학도들에게 이리저리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태양이 늘 그렇듯 서편으로 떨어진 – 또는 지구가 서에서 동으로 스스로 돌아간 – 뒤에야, 미친 듯 그어지던 먹은 멈추었다. 이미 저도 모르는 사이 부러진 먹이 한가득이요, 방 안은 온통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깨달음의 값이라 생각하면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구가 탄환과 달을 끌어당기듯, 태양이 지구를 끌어당긴다.
어째서 그 반대가 아닌가?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서양의 천문학으로도, 이 땅에서 일월의 식(食)을 계산하는 방식으로도 징험할 수 있는 사실.
아니, 크기 때문은 아니다. 만약 크기에 따라 끌어당기는 힘이 달라진다면, 탄환이 떨어지는 빠르기에 있어서도 다른 것이 있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무게 때문일 테다.
이이의 총명을 질투하며, 언제고 뛰어넘겠다며 열심히 읽었던 동서 양쪽 산술의 서적들이 머릿속에서 그대로 펼쳐진다.
끌어당기는 힘은, 그러므로 그 끌어당기는 기를 발하는 쪽과, 끌어당겨지는 쪽, 양쪽 사이의 무게에 비례한다.
그러나 훨씬 무거운 달도 한 달에 한 번 꼴로 지구를 돈다. 그러므로 끌어당기는 힘은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약해져야 한다. 얼마나? 그 거리만큼. 아니, 그 거리의 제곱만큼.
생각이 거기에 미쳤을 때, 인천 앞바다에 떠오른 달을 향하는 미친 듯한 웃음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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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둘러싼 기의 작용으로 중력을 설명하는 것은 의외로 동서 양쪽에서 모두 나타난 발상이었습니다. 뉴턴 이전에 데카르트가 이미 그러한 발상을 한 바 있고, 케플러 모델은 접했지만 만유인력 자체는 뒤늦게야 알게 된 조선의 최한기 역시 비슷한 ‘기륜(氣輪)’ 모델로 이를 설명했지요. 작중 조선에서 이산해가 ‘기’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를 바탕으로 천체의 공전을 설명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입니다.
데카르트의 소용돌이설은, ‘자연은 진공을 증오한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전제에 입각하여, 천체망원경의 등장으로 조금씩 관측 증거를 확보해가던 코페르니쿠스 모델에 대해 설명을 제시하려 노력했습니다. 즉 태양과 행성 사이를 메우고 있는 미세물질 – 훗날 이는 ‘에테르’ 개념으로 재활용됩니다 – 의 상호작용으로 궤도운동이 이루어지지요. 이는 비록 뉴턴의 만유인력 개념에 비해 훨씬 덜 정밀하고 오늘날 관점에서는 덜 ‘과학적’이었지만, 대신 만유인력 개념과는 달리 멀리 떨어진 물체 사이에서 중력이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최한기의 기륜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데카르트와 달리 최한기는 기가 처음부터 우주 공간을 메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 행성의 땅 속에서 솟아올라 각자 그 주변을 메운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리학적 우주관에서 기는 그 자체로 활동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천체의 궤도운동부터 지구의 조석현상까지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최한기는 보았습니다. 즉 지구에서 뻗어나간 기륜과 달에서 뻗어나오는 기륜이 서로 ‘부딪히면서’ 서로 수렴하고 당기는 작용이 이루어지고, 달이 지구를 도는 것처럼 지구에서는 비교적 가벼운 물이 그 ‘당겨짐’에 이끌려 밀물과 썰물이 벌어진다는 것이지요 (문중양. 2003. “최한기의 기론적 서양과학 읽기와 기륜설.” <대동문화연구>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