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작성작광 (1)
때는 바야흐로 원말(元末). 나날이 마르고 죽어가는 화북의 백성들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하늘은 높고 황제는 멀구나! 백성은 적고 나리들(相公)은 많구나! 모조리 매질 당하기를 하루에 세 번.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저 기다릴 뿐.”
미륵불 하생하시기를 기다리다 모든 중생이 도륙날 판이었으므로, 결국 백련교 교인 중 자비심이든 욕심이든 사무친 자들이 떨쳐 일어나 백성을 이끌었다. 애통한 곡소리는 분노한 함성이 되고, 이들이 두른 붉은 두건은 중원을 메웠다.
이들을 홍건적(紅巾賊)이라 불렀는데, 개중에 재주와 운수 유별나게 좋은 주중팔이 있었다.
허나 대머리 중놈 주중팔이가 명태조 주원장이 되었건만, 정작 홍건적에 처음부터 몸 담았던 백련교도들은 그 ‘적(賊)’ 자를 떼지 못하였으니, 『대명률(大明律)』로 못박기를 사교(邪敎)의 우두머리는 목을 매달고, 그 교를 따르는 자는 삼천리 유배형이라.
그렇게 다시 여러 대가 지났다. 변한 것이라면, 몽고 오랑캐가 한인(漢人)을 탄압하는 대신 한인이 한인을 탄압하게 되었다는 점 하나뿐.
개중에도 몽고 달단과 대명 사이에 놓인 산서(山西) 백성들은 더욱 고달팠으니, 툭하면 전란에 군사로 동원되어 끌려나가고, 그 군사들 먹일 군량을 뜯기고, 따로 세곡을 떼어먹히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불만 많은 백련교 교인들이 가장 먼저 북쪽으로 떠났고, 한인 관리 아래보다 오히려 달단 수괴 엄답(알탄 칸) 치하에서 사는 것이 더 좋다는 사실이 밝혀지니 대동 일대의 수많은 한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북경을 불태우며 오히려 한인들의 진정한 힘을 깨달은 알탄 칸은, 이들을 옛날처럼 노예로 부리는 대신 그럭저럭 농사를 지을 만한 곳에 모아 ‘바이신(백성百姓의 몽골식 독음)’이라는 마을을 만들도록 하였다. 백련교도들은 가장 먼저 찾아왔고, 또 가장 충성스러웠으므로 바이신의 두령이 되었다.
이리하여 원나라를 무너뜨린 백련교는 불과 이백여 년만에 그 후예 알탄 칸의 앞잡이가 되었다.
가장 먼저 대동을 탈출해 알탄 칸에게 귀순한 백련교 무리 중, 산서성 운천(雲川) 사람 조전(趙全)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비록 글재주는 없으나, 제법 견식이 넓고 익힌 잔재주가 많았으며, 무엇보다 알탄 칸을 따르는 한인들 중 명나라 조정을 가장 거세게 증오하였다.
조전은 알탄 칸을 섬기며 많은 공을 세워, 마침내 알탄 칸이 새로 세운 도읍, ‘푸른 도시’ 후흐호트 – 또는 한인들이 부르기로는 풍주豊州 - 주변의 모든 바이신을 관리하는 자리에 올라 일만 백련교도와 오만 한인을 이끌게 되었는데,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초원 너머 세상에서 놀라운 일대 변혁이 일어나고 있음을 저희 두목(頭目, 투항한 한인들의 우두머리)께서 깨닫게 되셨습니다. 칸께서도 초원 남쪽과 동쪽의 일을 알아내기에는 한인들이 더 적합하다 말씀하셨지요.
그리하여 저희 교인들이 이렇게 중원과 조선, 일본 등지로 나아가 물정을 살피게 된 것입니다. 저는 저희 두목이자 사사롭게는 제 형님 되시는 조전 두목의 명을 받들어, 그 일의 총책을 맡게 되었고요.”
꺽정이에게 붙잡혀 온 백련교 끄나풀 두 사람 중 스스로 조룡(趙龍)이라 이름 밝힌 젊은이가 술술 불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그 자리에 모인 이씨 (및 신씨) 사람들은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모처럼 좋은 자리 망친 계월당 상씨는 투덜대었으며, 백정 임가는 어차피 똑똑한 이씨 사람들이 알아서 요약해주리라 믿고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저희는 보았습니다! 임 선생께서 저희의 나아갈 길을 계시해 주셨으니, 진실로 우리 하계를 깨끗이 하고 뭇 백성을 안온케 할 방책이 비로소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풍주에 계시는 저희 두목 이하 모든 교인이 뜻을 모은바, 마침내 이를 하계에 실천하여 모든 중원 백성들이 고루 복을 누리도록 하고자...”
사실 백련교 교인이라고 딱히 배운 것이 많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워낙 많은 수의 한인들이 월경하여 알탄 칸의 새 도읍으로 향하였기에, 그 중 머리 명민한 이들이 여럿 있었을 뿐.
그리고 머릿속에 든 것은 별로 없으나 빈 자리 채울 깜냥은 그득한 이들이 빠르게 변하는 바깥 세상을 접하였으므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며 저들 멋대로 해석한 것이 금세 머리를 가득 메웠다.
“잠깐, 임 당수가?”
“아마 우리 당 전체를 일컬어 말하는 것이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 낭군이지만 선생 소리는 본인도 꺼릴 텐데...”
“마저 들어 보십시다. 이거 재밌게 될 지도 모르겠는데요.”
이어서 이탁오는 교인들을 채근하여, 그들이 이해한 ‘임 선생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모조리 털어놓으라 하였다.
그랬더니 나오는 소리가 점입가경이었다.
백련교는 본디 온갖 환난 가득한 이승보다는 그 뒤의 복락(福樂)을 구하는 무리였다. 그러니 정작 이승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 들고 일어나려 할 작시면, ‘때려부수자!’ 외에 더 내세울 말이 없었다.
그 옛날 원나라 몰아낼 때도, 고작해야 만인을 평등하게 하고 사치를 금지한다는 것이 전부였거니와, 그마저도 대개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본디 조전은, 알탄 칸을 부추겨 새로 중원에 나라를 세우고, 그곳에서 백련교의 교세를 펼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였다. 알탄 칸은 어째 마뜩잖게 여기는 듯하였으나, 언제고 그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고 조전은 믿었다.
그런데 조선과 그 너머로 나아간 밀정들이 전하기를, 새로운 길이 있다고 하였다.
나라를 세우는 것은 백성이 언제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요, 경세제민의 법도란 고민할 것도 없이 그대로 풀어놓으면 그만이라.
그리하면 백성이 알아서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니, 무슨 관(官)이고 리(吏)고 하등 필요치 않았다.
혹리(酷吏)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백련교 교인들만 모아 나라를 세우되, 임금도 따로 세우지 않고 조정도 꾸리지 않는다. 그렇게만 하더라도 족히 스스로 서서 오래 이어질 수 있음을 ‘임 선생’은 입증한 것이다.
아개국을 자처하는 야인 나라도 본디 그렇다고 하였고 – 그러고 보니 그 땅에 백련교와 비슷한 이상한 믿음이 퍼지고 있었는데, 이 또한 더 살필 대목이었다 – 무엇보다 이번 구주 격물에서 여실히 이 ‘진리’가 입증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백련교인들 생각에 그럴 뿐이었고, 듣는 민주당 사람들은 저들이 지금껏 해온 것을 저렇게 오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기가 막혔다.
“아니, 그보다도 나라를 세우기를 맘대로 하겠다니, 저 막북(漠北) 어디에 나라 세울 만한 터전이 있기는 한 것이오? 온통 사막과 수해(樹海) 뿐이라 알고 있는데.”
“막북은 엄답 한(알탄 칸)의 것입니다. 저희가 그분의 은혜를 입었는데 어떻게 그 땅에 나라를 또 세우겠습니까? 그리고 풍주 일대는 비옥하기는 하나, 조금만 그곳을 벗어나면 초원뿐이라 밭을 일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미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임 선생의 가르침을 간곡히 구하고 있는 땅이 바로 동남쪽, 요동에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희가 이렇게 가르침과 도움을 청하러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에게 세세히 캐묻는 것은, 그만큼 저들 백련교가 내세운 바를 기껍게 여기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제멋대로 단정한 조룡은, 답변하면서도 만면에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잠깐, 그러니까... 지금 요동을 빼앗아 그곳에 그 백련교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이오?”
“빼앗는다는 것은 조금 과하고... 해방이라 일컬음이 어떠하실지요? 임 선생께서 교시하셨듯 천하의 모든 것이 백성의 것이니, 그저 가짜 주인에게 빼앗아 진짜 주인에게 돌려줄 뿐입니다. 그, 있지 않습니까,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배...’ 그런 노래였던가요.”
“아니, 애시당초 우리 당은 그런 주장까지는 한 적이 없다니까...”
사람이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思而不學則殆)는 성현 말씀을 통감하는 이이가 억울하여 한 마디 하였다가, 이탁오에게 제지를 당했다.
“그, 흠흠. 마저 들으십시다. 그래서, 우리더러 그것을 도와달라는 것이오?”
“아, 물론 아닙니다. 지금껏 저희가 임 선생께 가르침을 받고, 또 풍주와 길림 오가는 교역으로 심심치 않은 이익까지 얻었는데, 어찌 그런 어려운 일에까지 신세를 지겠습니까?
다만 저희가 곧 요동 땅에 나라를 세우고 조정과 교섭할 수 있도록, 중재에 있어 조금 도와주십사 할 뿐입니다.”
그러고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덧붙이는 조룡이었다.
“아마 지금쯤 요양성은 저희 교인들이 모두 구해냈을 것입니다.”
“뭐라고요?”
“지금쯤이면 개주(蓋州)까지 닿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웃는 낯에 침 뱉을 수 없어, 우선 조룡과 그 일행을 내보내자마자 좀 더 이야기 들어보자 했던 이탁오부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별 미친 놈들도 다 꼬이는구려.”
꺽정이가 한 마디 툭 던졌는데, 다들 그 말에 반박하기보다는 이탁오 따라 한숨 쉴 따름이었다.
요동을 거치는 교역이 거의 끊어진 이래, 그 땅의 민생이 절로 곤두박질친 것은 주지의 사실. 이 나라 조선에서 먹고살기 어려워 압록강 건너갔던 조선인들도 지난 십 년 사이에 남김없이 다시 강을 넘어왔다.
그런 땅에서 무언가 일어난다 한들 딱히 이상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뭔가 일어나는 쪽이 민주당에게는 이로웠다. 장차 나라의 법도를 둘러싼 조선과 명의 대립이 한판 싸움으로 귀결된다면, 조선 땅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요동에서 맞서든, 아니면 요동을 비워두어 저쪽이 제 풀에 지치게 하든, 요동이 민주당 손에 들어와 있는 것이 이로울 터였다.
그러나 이토록 사세가 갑작스레 흘러갈 줄이야 뉘 알았겠는가.
“요동이 아무리 허술하다 한들, 엄연히 명국 조정에서 매년 막대한 재정을 들여 지키고 있는 나라의 간성(干城)이다. 단번에 무너질 리는 없지.”
이지함이 다들 아는 이야기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짚어주었다. 꺽정이가 나머지 좌중을 둘러보니, 다들 비슷한 심정인 듯하였다.
“더구나 그들 눈앞에서 요동을 채 간다면, 아무리 나라의 군병이 준비되지 않았다 한들 내각의 장 수보도 가만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즉시 대군을 움직여 요동을 들이치려 하겠지요.”
명보다는 사정이 낫다지만, 이쪽도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였다. 더구나 명분으로 따져도 아직 명과 조선이 – 임꺽정과 장거정 생각과는 별개로 – 굳이 피 흘려 다툴 이유도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꺽정이를 믿고 따르는 니탕카이와 다른 여진 사람들까지 휘말릴 수도 있는 일. 지금 이곳에서 제멋대로 결정하자니 얽힌 이들이 너무 많고, 모두 뜻 모아 숙의를 거치자니 시일이 촉박하였다.
그러므로 섣불리 요동의 백련교 편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민주당 하는 것이 참으로 합당하다며, 청하지도 않았는데 제 발로 찾아와 따르겠노라 한 이들을 마냥 내칠 수도 없었다.
“계륵도 여간한 계륵이 아니군요.”
“듣고 보니 참 못된 놈들이오. 명나라에서 괜히 때려잡으려고 혈안 된 게 아니었구만그래.”
가만 듣던 꺽정이가 저의 묵직한 생각을 덧붙였다.
“그러면 우선 내가 가서 괘씸한 놈들 모조리 때려잡고 오겠소.”
“나쁘지 않은 생각입니다.”
당연히 누군가 만류하고 나서리라 내심 짐작한 꺽정이는, 이이가 의외의 말을 꺼내니 오히려 당황하였다.
“확 달려가서는 그 조전인지 조진인지 하는 놈을 조지고... 엥? 뭐라고 했소?”
“제법 훌륭한 발상이라 하였습니다. 들어보시지요...”
두 해 전, 조선 사신들이 북경으로 돌아가던 중, 광녕 북진성에서 도적의 습격을 당한 일이 있었다. 다행히 다친 이만 조금 있고, 천자의 조서에까지 해가 미치는 끔찍한 일은 없었지만, 어쨌든 천조 대명의 위명에 먹칠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요동총병 나문치(羅文豸)가 체직되고, 그 자리에 양조(楊照)가 들어앉았다.
나문치는 사람됨이 탐학스러워, 정도껏 여기저기 기름칠을 하고 뇌물을 주고받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그리고 요동이 쫄딱 망하여, 백성을 수탈하려 해도 뜯어먹을 것이 없게 되자, 그때부터는 대놓고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알탄 칸의 보호를 받는 백련교 상행이나 수러 버일러 니탕카이의 십자(十字) 상행이 몽골과 여진 땅을 오갈 때 요동 경내 지나는 것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은자 얼마. 어느새 그 아개국(압카이 아파시 구룬) 아래로 다 들어가 버린 건주위의 심마니나 사냥꾼들이 요동 곳곳을 오가도록 허용하는 대가로 또 얼마.
이렇게나마 요동 안에 은이 돌았으므로,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요동의 백성들은 겨우 조세를 바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나문치가 갑자기 개심한 것은 아니요, 딱 사람이 굶어죽기 직전까지만 수탈할 뿐이었다. 허나 이제 와서 보니, 굶어죽기 전까지 수탈당하는 것이 그냥 굶어죽는 것보다는 조금 나았다.
요동총병 양조는 대대로 군문에 들어 나라의 은혜를 입은 집안 출신으로, 그 아비 역시 요동지휘사를 역임하였다.
대개 누대에 걸쳐 나라의 은덕 입은 집안은, 하해와 같은 은총 내리신 황상께서 신하의 집안사정을 걱정하시는 것을 미연에 막기 위하여, 알아서 저의 권세로 치부하고 눈치껏 이것저것 챙기곤 하였다.
그러나 양조는 본디 사람됨이 강직한 무관인지라 그러한 좌도(左道)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참으로 보기 드문 자질이나, 그렇게라도 경영치 아니하면 도저히 버티지 못할 요동의 총병으로 있기에는 영 접합치 못하였다.
“어찌 나라의 녹을 받는 이로서 황상의 뜻을 저버리고 조정의 시책을 벗어나겠느냐?”
요동의 백성이 도망을 치든, 도적이 되든, 아니면 그냥 굶어죽든, 양조는 조정에서 정한 대로의 조세를 걷곤 했다. 그 이상으로 거두지는 않으니 평소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문제는 그놈의 일조편법이었다.
“아이고, 총병 노야. 하면 소적(小的, 소인네)들이 요동 어디서 은을 구하겠습니까.”
“칙서를 받은 야인 추장들과 교역하는 법도가 이미 있지 않더냐? 근래 천하에 은자가 마치 저 요하 강물처럼 그치지 않고 흐른다 하는데, 이곳 요동만 예외겠느냐?”
“근래 야인들은 아개국을 거치거나 몽고 아니면 조선과 직접 교역할 뿐입니다. 차라리 잠상이라도 허하여 주신다면...”
“국법은 국법이다! 두 번 다시는 본관 앞에서 이를 재론치 말라!”
그리하여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나고, 이대로라면 삼 년 안으로 요동의 가뜩이나 반토막난 인구가 또 반토막나게 생겼다는 둥, 이제라도 짐 싸서 산해관 서쪽으로 돌아가든, 아니면 그렇게나 살기 좋다는 달단 땅 풍주로 가든 하자는 말이 나돌 무렵.
느닷없이 요양성의 주인이 바뀌었다.
“이놈들! 너희가 정녕 천조를 거역하려느냐!”
꽁꽁 묶인 양조가 분통을 터뜨렸으나, 그를 묶은 포승줄은 팽팽하게 당겨질지언정 끊어질 기미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렇게까지 된 과정은 너무나 허무하였다. 양조의 노호(怒號) 우렁찬 것은, 그렇게 쉽게 붙잡히고 성은 함락되었다는 사실이 억울하기 때문이리라.
백련교 교인들은, 그저 평소처럼 상행으로 위장하여 요동 변경을 넘어 들어왔을 뿐이었다. 총병의 방침에 따라 이를 막으려던 진보(鎭堡)는 평소의 다섯 배나 되는 뇌물 앞에서 쉽게 넘어가고야 말았다. (그 뇌물로 바친 은량의 모양이 기묘하여, 그들이 알지 못하는 문자가 적혀 있기는 하였으나, 은은 은이었다.)
창칼을 들고 말 탄 채 밀고 내려온 것도 아니요, 그들과 같은 말 쓰는 한인들이 좀 좋게 보아 달라며 청하니 끝내 그 누구도 가로막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행의 짐 대신 병장기 챙겨든 백련교도 수십이 요동 지경 안으로 들어오고, 잠시 허술해진 경계를 틈타고 다시 수백이 그 뒤를 따랐다.
“애초에 섬서 땅을 벗어나 칸의 장막에 들 때부터 조정에 거역한 몸이니 백 번 떠들어도 귀에 들리지는 않을 것이외다.
조정이 백성에게 거두는 것은 많으나 베푸는 것은 없으니, 그 죄가 크고도 크오. 허나 같은 말을 쓰고 같은 하늘을 인 백성들은 무슨 죄가 있겠소? 하여 우리가 이렇게 구하러 온 것이오.”
조전이 직접 이끄는 백련교도들이 요양성 안에 들어와, 열흘 전 오밤중에 성을 떨어뜨리니, 적의 규모를 알지 못하는 성내의 관군은 고작 수백 교인들에게 사로잡히고야 말았다.
뒤늦게 이를 알아챈 양조는, 적어도 싸움 없이 적에게 붙들리지는 않겠다며 가병(家兵) 이끌고 나섰다가, 사면초가 형국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관부(官府)로 쫓겨 들어왔다.
그리고 백련교 쪽에서도 굳이 저들 인명 상해가며 성급히 진압할 것은 없었으므로, 며칠간 야트막한 관부 담장을 두고 우스운 공성전이 벌어졌다.
한쪽에서는 꼭 지키겠다며 문을 걸어잠그고, 다른 한쪽에서는 알아서 하라며, 창고를 열고 요양 백성들에게 곡식과 은자 나누어주고, 백련교 입교하라며 부추기고, 마치 저들이 이미 성의 주인 된 것처럼 떠드는 형국.
그러나 그것도 오늘이 끝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구원의 소식은 없고 – 애초에 요양성 바깥으로 나가는 소식이 차단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 저쪽에서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이는 것 같지도 않았으므로, 끝내 가병 몇몇이 저쪽에서 금은보화 약속하는 말에 혹해 몰래 빗장을 열어버린 것이다.
“요동 백성들이 모두 사교(邪敎)와 연루되어 어육(魚肉) 신세를 면치 못하게 할 셈이냐? 네놈들이 정녕 백성을 위한다면, 즉시 본관을 풀어주고 너희 죄를 뉘우쳐야 할 것이다! 너희가 지금이라도 투항하면 우두머리만 죽이고 나머지는 유배로 끝날 것이나...”
“어육 신세라니, 천만의 말씀이시오! 우리는 바로 그 조정과 교섭하여 이 땅에 나라를 세울 심산이외다.”
“네놈들이 오랑캐와 붙어먹는다는 말은 들었으나, 그사이 이리도 미쳐버렸을 줄은 몰랐구나! 감히 황명(皇明)의 강역을 탐내는 것도 모자라, 아예 나라를 세우겠다니, 분수를 모르기가 이보다 심할 수 있느냐?”
“다 계획이 있소. 그대와 같이 어리석은 이와는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심원한 계책이...”
한껏 고양된 조전이, 조선의 임 선생을 끌어들인다는 저의 허황된 계획을 입 밖에 내놓으려던 차, 바깥에서 또 일대 함성이 울렸다.
“오오, 오셨다!”
“임 진인(眞人)께서 오셨다!”
“진인께서 우리를 보아주셨다! 진공가향으로 우리를 이끄시리라!”
그래, 그분께서는 오실 줄 알았다.
조선의 일개 도적으로 시작하여, 마침내 그 나라를 손에 넣고 오직 백성을 위한 나라를 만들어 나가는 사내.
억눌린 자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핍박받는 이에게는 항거할 힘을 주고, 가난한 이에게는 살 방도를 마련해주는 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저 주명(朱明)을 멸하기보다는 그저 그 자리에 만족하며, 침략보다는 교역을 말하게 된 알탄 칸. 그가 올바른 길을 찾게 해 주십사, 그렇지 않으면 조전 그에게라도 새로운 길이 보이게 해 주십사, 기도로 새운 밤만 며칠이던가.
그 영광된 길을 조전에게 보여준 참된 스승이, 조선 한양을 떠나 고작 며칠만에 이곳 요양에 당도하였다.
이제 무언가 이루어낸 사람으로서, 임 선생을 마주하고, 어깨 나란히 한 채 앞날을 논할 일만 남았다.
“두목, 임 선생께서 이곳 관부로 달려오고 계십니다!”
“그래, 다들 맞이하자꾸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양성 관부에 당도한 임 선생은, 조전을 험상궂으면서도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네가 조전이렷다?”
“예! 그렇습니다!”
“아주 열렬하게 우리네를 맞이하더구나.”
그 뒤를 따라 들어온 이들은, 바로 그 위명이 여진 땅을 거쳐 막북까지 닿은 흑의군일 테다. 그들 여럿이 열심히 짐꾸러미를 풀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어째 멍석을 닮았는데, 고작 멍석 따위를 가져다 주러 온 것은 아닐 테니 필시 무슨 비상한 다른 뜻이 있는 것일 터...
그 생각을, 투박한 조선말이 툭 끊었다.
“일단 좀 맞자꾸나. 얘들아, 멍석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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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초반에 서술된 것처럼, 백련교는 홍건적의 난이 발생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백련교의 미륵 신앙은 원의 가혹한 통치와 경제난, 한인 차별 등으로 끓어오른 민심을 효과적으로 동원하는 수단이 되었지요. 그러나 백련교는 당시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으나 조직화된 교단과는 거리가 멀었고, 백련교를 신봉하거나 이용하는 반군 세력들 사이에서도 그 교의를 받아들인 정도는 달랐습니다. 결국 개중에도 그 색채가 옅었던 주원장은 중원을 통일한 뒤 쉽게 백련교를 버리고 (일단은) 유교적 전제군주를 칭할 수 있었지요.
이후 백련교는 원대와 마찬가지로 큰 탄압을 받았고, 그러던 중 대략 16세기 초엽에는 미륵하생 신앙 위에 무생노모(無生老母) 신앙이 덧붙여지게 됩니다. 즉 한 번도 윤회를 경험한 적 없는 초월적 존재 무생노모가 그 대리자로 미륵을 내려보내고, 미륵의 인도로 신도들은 일종의 사후 이상세계인 진공가향에 귀의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그 유명한 팔자진언八字眞言, ‘진공가향 무생노모’가 나오게 됩니다.). 이러한 무생노모 신앙은 분명 기독교와 닮은 점이 있었고, 실제로 가정 연간 백련교가 북경 인근까지 진출하였기에 그 존재를 알던 조선 선비들은, 18세기 북경에서 만난 서양 선교사들에게 천주교가 백련교의 일종이냐고 질문하여 ‘갑분싸’ 사태를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송요후, 2010. “중국 민간종교 연구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 <명청사연구> 34; 이원석, 2017. “천주교에 대한 연행사들의 도교적 이해 양상 연구.” <철학사상문화> 23).
조전은 실존인물로, 다른 백련교 교인들과 함께 알탄 칸에게 귀부한 후 활발한 반명(反明) 활동을 펼쳐 그 이름이 역사에 남게 됩니다. 그를 중심으로 한 백련교 세력은 직접 산서성 변경지대를 드나들며 과도한 부역과 군역에 시달리던 한인들의 집단 투항을 유도했고, 알탄 칸을 도와 후흐호트(당시 한인들이 스스로 지은 이름으로는 대 바이신大板升 또는 풍주豊州) 건설에 힘썼습니다. 더구나 이들 백련교인들은 다른 월경 한인들보다 상대적으로 지적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알탄 칸의 몽골군이 더 효과적으로 명의 변경을 공격하고 또 더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게끔 돕기도 했지요.
그런데 다른 교인들이 후흐호트에서의 삶에 대체로 만족하고, 심지어 몽골식으로 개명까지 한 반면, 조전은 한인 이름을 유지하고, 오히려 알탄 칸의 힘을 빌려 반체제 활동에 힘썼습니다. 1561년경부터 그는 알탄 칸에게 태원(太原) 일대를 완전히 정복하여 강역으로 삼을 것을 권유하는 한편, 옛 원나라처럼 몽골의 칸인 동시에 중원의 황제를 칭할 것을 청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알탄 칸은 조전의 생각과는 달리, 몽골의 힘과 그 한계를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1571년 알탄칸은 명 조정과 정식으로 교역 관계를 복원하는 화약을 맺었고, 조전과 그 주변의 백련교 수령들을 명에 팔아넘겼지요. (이는 ‘삼낭자三娘子’ 중긴 하툰을 두고 자신과 치정싸움(!)을 벌인 끝에 명으로 도주한 자신의 손자 바한나기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이루어진 교환이었습니다.) 그 이후 후흐호트 일대의 한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조전이 처형될 무렵 후흐호트 일대에는 몽골식 이름을 쓰는 한인 2세대들과 유목 대신 정착을 택한 몽골인들이 섞여 살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몽골에 동화된 듯합니다 (민경준, 2009. “16세기 명몽明蒙 변경의 몽골 한인.” <역사와 세계>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