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04화 (204/259)

61. 작성작광 (2)

양조는 단순한 마음가짐 지녔음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위에는 황상이 계시며 아래에는 백성이 있고, 바깥에는 오랑캐가 있으니, 섬기고 다스리며 지키는 데 무엇을 더 의심스럽게 여기겠는가?

그러므로 요 며칠 사이 벌어진 일은, 양조에게는 너무나 가혹하였다.

사교(邪敎) 무리가 총병인 저도 모르는 사이 요양까지 들어와, 성을 안쪽에서부터 함락시킨 것이 하나.

그 무리가 요양은 물론이요 요동 전역이 이미 저들 것이 된 양 날뛰고, 그사이 저는 허무하게 붙잡혀 포승줄 묶인 신세가 된 것이 둘.

간악한 무리가 선생이라 추앙하며 기다리던 이가 다름아닌 조선국 임거정이요, 그렇게 백련교 교인들의 환호받으며 입성한 임거정이 느닷없이 사교의 수괴 조전을 때려눕힌 것이 셋.

그러므로 양조는 얼마 후 임거정이 홀로 관부에 돌아오자 그를 붙잡고서, 제발 무슨 일인지 해명해 달라고 사정하기에 이르렀다.

“별 일 아니니 괘념치 마시오.”

그사이 임거정 옆에 따라붙은 여진 야인이 한어(漢語)로 옮겨주었다. 누구냐 물었더니 명 조정에서는 일개 위(衛) 정도로 대우하나 저들끼리는 엄연한 나라라 자처하는 아개국(압카이 아파시 구룬) 통령 니탕카이라 하였다.

대체 왜 여진 무리까지 이곳 요양성에 들어와 있는지까지 생각하면 머리가 터져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라, 자꾸 그쪽으로 향하는 궁금함을 애써 돌리며 양조는 다시 물었다.

“도대체 이 무슨 일입니까? 이 양 모, 황은 입어 무관이 된 이래로 이처럼 해괴망측한 사안은 처음입니다.”

대국의 관원으로 어찌 소국의 사람에게 공대하겠는가, 하는 그런 생각은 하등 들지 않았다. 아마 중원에서 가장 허리 뻣뻣한 사람을 찾아온다 할지라도, 저 임거정과 독대케 한다면 쉽사리 하대하진 못할 테다.

“원래 내 주변에는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난다오.”

“임 당수 주변이라 하시면...”

“온 세상 들쑤시고 다니는 몸이니, 한양에서 요양 정도면 주변도 그냥 주변이 아니라 담장 하나 두고 마주보는 사이라 할 수 있지 않겠소? 자, 내 설명을 해 줄 터이니 귀 활짝 열고 들으시오.”

임거정 이르기를, 저 간악한 백련교가 요동을 저들 것으로 날름 삼키고서, 이 모든 일 뒤에 조선국 민주당이 있었다고 덮어씌울 심산이었다 하였다.

대명 천자의 뜻을 조선이 받들지 않아, 슬그머니 자금성 한편에서부터 정벌 운운하는 말이 나온다는 것을 어디선가 주워듣고, 천조와 번국을 이간질하여 저들의 설 자리를 얻겠다는 발상 내지는 망상.

“허나... 그 옛날 고려(고구려) 때부터, 아니, 위씨(위만조선)의 때부터, 조선이 병화(兵禍)에 휘말리기에 앞서 요동이 먼저 화를 당하였지 그 반대의 일은 없었습니다. 아, 그, 제가 조선이 병화를 당하길 바란다는 게 아니라...”

“이 백련교란 놈들은 그대 나라에서도 미친놈 대접이라면서? 미친놈 마음속을 멀쩡한 놈이 알려고 하면, 그놈도 미친놈 되는 것이오. 너무 깊게 생각하진 마시오. 중한 것은, 이 짓거리를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해 사람 좋은 우리 이웃들이 도우러 왔다, 그게 중하지.”

‘오랑캐 두령’ 니탕개가 말을 받았다. 임거정과 마찬가지 원리로, 어디 감히 오랑캐 두령이 상국의 총병에게 제대로 공대조차 아니 하느냐 따질 엄두는 나지 않았다.

“곧 우리 구룬의 전사들이 백련교 도당을 일망타진하여 요양에 넘겨줄 것이오. 총병 그대는 그간 있던 일을 알아서 조정에 전하시오. 우리가 굳이 공을 탐내고 온 것도 아니요, 요동의 빈궁한 재정으로 무슨 포상을 해줄 수도 없을 테니, 총병 그대가 마음대로 꾸며서 위에 고하여도 우리는 아무 트집 잡지 않겠소.”

그렇게 단언하고서, 두 사람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요양성을 단번에 함락시킨 수백 교인들도 종적을 감추고, 남은 것은 이 무슨 일인지 여전히 얼떨떨한 총병 양조와, 백련교고 무엇이고 당장 저들 목이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요양성 병사들뿐이었다.

제법 세력이 있어 스스로 능히 살아갈 수 있는 해서여진 4부, 뼈로 만든 화살과 물고기 비늘 옷을 입으며 살아가기에 굳이 문명한 세상에서 살아가지 않아도 무방한 동북쪽 야인여진. 이렇게를 제하면, 스스로 주션(여진)이라 자처하는 모든 이들은 이제 압카이 아파시 구룬에 묶였다.

이 척박한 땅에서 스스로 농사만 지어서는 도저히 살 수 없으니 교역을 해야 하는데, 그 교역을 꽉 잡고 있는 것이 암바 버일러 임꺽정과 그의 가신이자 친우라는 수러 버일러 니탕카이 요한뿐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요한은 그 구룬에 합세한 부족들에게 저를 수러 버일러로 섬길 것을 요구하면서도, 다음 구룬아찬(國會)에서 저들의 뜻을 보이는 것도, 원한다면 아예 수러 버일러 자리 노리고 나서는 것도 가하다는 점을 함께 알려주었다.

이미 하비에르 없이도 스스로 퍼지게 될 만큼 주션 사람들의 ‘원래 믿음’도 널리 퍼져 있었으니, 교인들이 알아서 부족 사람들을 설득해 기린울라로 귀부해 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사이 네놈 아래의 군세도 꽤 정예하게 되었구나.”

“기린울라에 머물고 있는 ‘백정여진’ 장사들은 더 정예합니다.”

요동을 홀랑 집어먹으려 후흐호트에서 남하한 백련교 교인들을 요동총병 대신 때려잡아 주겠다면서, 정작 이들이 들이닥친 곳은 의무려산 기슭의 산적 패거리 산채였다.

암만 위세 사납다 한들 암바 버일러 지시 따라 달려나온 사나운 여진 군세에 비할 바가 못 되었고, 더구나 이미 꺽정이가 조서 훔칠 때 혼쭐 났던 놈들은 꺽정이 함성을 듣자마자 도적의 의리를 지켜, 강한 쪽에 바로 붙었다.

그리하여 관병이 나섰더라면 한 사나흘쯤 걸렸을 공략이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고, 굳게 닫혀야 할 목책의 문이 홀라당 열리는 것을 본 도적들은 그대로 내빼버렸다.

그렇게 붙잡힐 놈은 붙잡히고 도망칠 놈은 도망친 산채에 올라, 임꺽정과 니탕카이 요한은 ‘살려만 주십쇼’ 하며 손 싹싹 비는 이들. 정신 못 차리고 저항하다가 시체 된 자들 사이에서 나누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태평한 문답을 나누었다.

“한 번쯤 찾아가서 노닐기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네놈들 새 도읍을 그럴듯하게 지었다며?”

“인천이나 동래에 비하겠습니까.”

“하비에르 그 어르신께서 여진과 조선 석수들을 모아서 아담하지만 꽤 멋들어진 교당(敎堂)도 지으셨다던데. 거기 구경도 언제고 해야지.”

“하비에르 신부님께서는 일본에 가 계시지 않습니까.”

“아, 그랬지.”

바티칸에서 동방에 교구를 (재)설치하는 데 대해 미리 그 땅에 가 있던 예수회 사람들의 의중을 묻는 서한이 당도한바, 간만에 같은 예수회 사람들 얼굴도 볼 겸, 린죠 히데요시의 등장 이후 성황을 누리고 있는 일본 선교 현장을 확인도 할 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히라도로 가 있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함께 말 달리고 싸움터를 누비니, 옛날 생각도 나고 좋습니다. 하다의 왕주 와일란을 토벌한 것이 벌써 몇 년 전이던가요.”

“뭐, 다 늙은 사람처럼 얘기를 하느냐.”

그 옛날 퉁두란티무르(이지란)가 이 울루스부카(이자춘)의 둘째아들과 형제의 연을 맺은 이래 주션 사람과 솔호(조선) 사람이 사귀는 법도란 대개 사냥이었다.

그 사냥이 사람 사냥이든, 짐승 사냥이든, 어쨌든 함께 말 달리며 화살도 쏘고, 사람 머리통도 여럿 깨고 – 아마 아직도 그 이름이 주션 늙은이들 사이에 회자되는 ‘이성계 어르신’은 그렇게까진 안 했을 테지만 – 하다 보면, 낯선 사람은 친해지고 낯익은 사람은 더욱 사이 돈독해지는 이치였다.

“암바 버일러께서도 이제 나이 제법 드시지 않았습니까. 저보다 조금 손위 아니셨던지요?”

“어쭈, 이제는 나라 하나 이끈다고 기어오르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도 엄연히 사람들 동의 구하여 수러 버일러 자리에 올랐는데, 옛날처럼 딱딱하게만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내가 알던 니탕카이는 어디 가고, 교창아 그 뺀질이가 대신 앉아 있군그래.”

보통 한 부를 저의 이름으로 거느리는 주션의 세력가쯤 되면, 암바 푸진(大福晉, 정실 부인 중의 으뜸)을 필두로 여러 처첩을 거느리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믿음 독실한 니탕카이 요한은 그 옛날 육진의 지탕카이에게 의탁할 때 얻은 아내 한 사람이 끝이었다.

예로부터 수많은 부족을 하나로 묶을 때 종종 쓰던 그 수법이 막혀버렸고, 또 모든 족장들이 그와 신앙을 함께하는 것도 아닌지라, 남은 수단은 결국 사냥과 음주가무 뿐이었다. 그 덕에, 니탕카이가 제법 일국의 우두머리다운 풍채를 띄게 될수록, 그에 상응하여 술배가 나왔다.

“듣는 뺀질이 서럽게 왜 그러십니까.”

어느새 돌아온 아이신교로 교창아가 짐짓 투덜대는 시늉을 했다.

“두 분 버일러께 보고드립니다. 방금 전 도망친 무리를 이렇게 다 잡아왔습니다. 수러 버일러 말씀대로, 북쪽 골짜기로 도망치더군요.”

“잘 하였소.”

“수고했다.”

교창아가 니탕카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연줄 잘 얻어 벼락출세한 자에 대한 질투에서, 정정당당하게 세력을 모아 경쟁해야 할 상대로, 또 어떤 면에서는 배울 바도 있는 이에 대한 존중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갈대밭과 큼직한 비석(광개토대왕릉비) 외에는 아무것도 없던 기린울라에, 암바 아이신 구룬(금나라)이 무너진 이래 가장 그럴듯한 주션 사람들의 도시를 세운 수완. 그럼에도 자만하지 않고, 더 넓은 세상 속에서 주션 사람들이 당당히 설 자리를 얻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그 자세.

교창아 그가 나름대로 노력하였음에도, 니탕카이에게 수러 버일러 자리를 또 한 번 양보할 수밖에 없던 데는 그런 사정이 있었다.

물론 니탕카이가 그 스스로 뛰어난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저 조선의 거인을 따라다니며 주션 사람들 중 가장 먼저 그 눈을 뜨고 멀리 본 것이 더 클 테다. 허나 그 또한 운이요 실력이었다.

“자, 반갑다. 내가 바로 조선국 임꺽정이다.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이요, 나 또한 조선에서 제법 여러 관직 전전한 몸이니, 예를 갖추어 대해주마.”

이미 얻어맞고 여기저기 찔리고 베인 주제에 무슨 예를 더 논하겠냐만, 그래도 저 험악한 면상에서 예를 운운하는 말이 나오니 붙잡혀온 도적들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면신례(免新禮)라는 것이지.”

진작에 조선에서는 저 때문에 사라진 면신례였으나, 꺽정이는 알지 못하였다.

무릇 면신례란 재물을 뜯어내고 억지로 잔칫상 차리게 하는 것부터, 아예 몸을 괴롭게 하는 것까지 아주 다양하였는데, 그 옛날 우림위 별장 시절에 꺽정이 또한 그런 면신례 있다는 것을 들어 알았다. (감히 금군 신참 임꺽정에게 면신례를 시키려는 사람은 없었고, 어디까지나 그가 원한다면 새로 들어오는 금군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름 성의 보인다고 친절히 알려준 것이었다.)

하여, 고작 한두 각만에 함락시킨 산적들의 산채에서 반나절 동안 면신례를 베푸니, 개중에는 긴 서까래를 여럿이 들고 양쪽 어깨로 번갈아 들도록 하는 경홀(<敬+手>忽), 땅에 거꾸로 엎드리는 복지(伏地) 등, 배운 사람들이 고안한 것 답게 사람 괴롭히는 법 또한 매우 세련되었다.

“예를 갖추면서 들어라. 너희는 간악한 사교(邪敎) 백련교의 교인들이다. 이곳 요동을 홀라당 잡아먹으려고 이 땅에 왔다. 알겠느냐?”

그사이 다른 구룬 전사들이 데려온 자잘한 도적들도 있어, 대들보 짊어지고 땅에 머리 박은 무리는 해 떨어질 무렵에는 제법 그 수가 불어났다.

“자, 이제 다시 말해보아라. 내가 무어라 하였지?”

“그, 그것이...”

“이야, 아직 살만한가보다. 목소리가 아주 기어들어가네. 아무래도 목소리 키우는 기물을 더 써먹어야겠다.”

목소리 키우는 기물이란, 곧 몽둥이를 이르는 말이었다.

“아이고! 답하겠습니다! 답하겠습니다! 저희는 사악한 백련교를 따르는 도당으로 요동을 침탈하려 넘어왔습니다!”

“그래, 이대로 끌려가서 심문을 당하면, 그때는 조선국 임꺽정이가 시켜서 거짓부렁 늘어놓았다, 그렇게 이실직고해도 된다. 어차피 동창 사람들이 곧이곧대로 믿어주지는 않을 테니.”

“알겠습니다... 아니, 동창이라니요?”

“너희가 그러면 명나라 사람이지 조선 사람이냐? 당연히 나 임꺽정이가 이 일에 손 대었다 하면 동창이 나서겠지.”

동창 소리에, 산적들은 한창 ‘면신례’ 당할 때보다도 더 사색이 되었으나, 꺽정이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렇게 붙잡은 ‘백련교 교인’들을 요양으로 먼저 보내고, 꺽정이는 산적들에게 단골로 털리던 산채 인근 조그만 마을로 향했다.

꺽정이와 니탕카이가 산채를 들이칠 무렵 이 마을에 도착한 백련교 교인들은, 벌써부터 목책을 보수하랴, 우물을 새로 파랴 바빴다. 한쪽에서는, 양조 본인도 모르는 사이 ‘요동총병 나리의 후원’을 받아 마련한 곡식을 나누어주고, 다른 한쪽에서는 겨우 그 나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촌로 여럿과 백련교 두목 조전이 무슨 이야기를 열심히 나누고 있었다.

“이야, 그 풍주(후흐호트) 고을을 네놈들 손으로 만들었다는 게 허언은 아니었구만그래.”

“그, 음. 감사합니다, 선생, 아차, 당수.”

목책 사이로 꺽정이가 들어오자마자 후다닥 달려온 백련교 두목 조전이, 여전히 부르튼 얼굴로 쭈뼛대며 답했다.

조전 그도 나름 풍주의 한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높은 사람이요, 심지어 후흐호트의 몽골 사람들조차 칸의 대리인인 조전의 명을 받들곤 하였다.

그러나 그 알탄 칸조차, 눈앞의 임 당수에 비하면 고작해야 초원의 양치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정도의 식견은 있는 조전이었다. 그의 명 한 마디에 일본 규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그 한 사람을 적대하기 위해 내각수보 장거정이 북경에서 어떠한 일을 꾸미고 있던가.

그 모든 것을, 몇 년간 천하에 밀정을 풀어 사정 살핀 조전은 능히 알 수 있었다. 자본이니, 헌법이니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알탄 칸과 장거정 등 지금까지 조전과 백련교인들의 눈에는 거의 하계에서 가장 큰 권세 휘두르는 자들조차 우습게 여길 수 있는 힘이 저 임거정의 손에는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앎 위에 엉뚱한 콩깍지가 여려 겹 씌워져 있었을 뿐. 하도 얻어맞아 눈가의 형상이 밤톨과 유사해지면서 그 콩깍지가 모두 벗겨진 지금의 조전은 이를 자각할 수 있었다.

“내가 한 말은 대충 알아들었지?”

“그, 그렇습니다.”

“이곳 요동은 천조 대명의 넓디넓은 땅 중에서도 가장 잘 다스려지고, 실로 밝은 정사가 행해지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한다. 언제부터 그 시늉을 해야 할지는, 우리 당 사람이 알아서 잘 전해줄 것이다.”

그처럼 강대한 권세를 쥐락펴락하는 임거정에게서 나오는 계략이란 얼마나 심원(深遠)할 것인가?

온통 부르트고 욱신거리는 몸으로도 그런 기대를 품은 때가 조전에게도 한때 있었다.

그리고 막상 계책이라는 것을 들게 되자, 일견 그럴듯하다 찬동하면서도 어딘가 허탈함을 면할 수가 없었다.

백련교는 요동을 먹어치우고, 다만 요양이나 개주, 광녕 같은 몇몇 성과 진보들은 남겨두어 명 조정이 이를 당분간 알지 못하게 내버려 둔다.

요양을 지키는 그나마 정예한 관군이라면 모를까, 요동과 몽골 우량카이 부 사이를 지키는 진보의 관군은, 조전 본인이 아주 잘 아는 대동(大同)과 투메드 부 사이의 진보들처럼 엉망진창이었다.

뇌물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근처에 얼마 안 되는 마을을 털어 그 은으로 제발 다음 번 침공 때는 저들이 지키는 진보는 빼놓고 다른 곳으로 가 달라 애걸복걸하는 정도.

그런 허술한 경계를 뚫고 요동 안쪽까지 들어오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다만... 이렇게 몰래 하는 덕행(德行)도 물론 효험은 있겠지만, 중간에 발각되지 않도록 돕는 선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놈아, 하면 된다.”

조전이 처음 야심차게 풍주를 떠날 때만 해도, 정말로 백성들에게 씌워진 관의 굴레를 때려부수고, 진공가향을 하계에 이룩하려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이렇게 재물만 아니 훔칠 뿐 산적과 같은 모양새로, 마을과 마을 오가며 백련교를 퍼뜨리고 백성들 돕는 것은, 그 야심을 충족시키기에는 너무나 소박하였다.

임거정은, 이렇게 기반만 닦아놓고 한 오륙 년 기다리면 곧 천하가 한바탕 뒤집힐 것이니, 군말 말고 하라는 대로만 하라고 윽박질렀지만. (그리고 그 윽박지르는 것이 그나마 부드럽게 타이르는 축에 든다는 것을 알 만큼 조전은 요양성에서 제대로 멍석말이를 당하였다.)

“너무 걱정은 말거라. 우리에게 신령한 약초가 있으니. 난저(감자)라고 들어 보았느냐? 이것만 있으면 저 굶주린 백성들도 한 오륙 년은 견디고도 남을 게다.”

“신령한 약초라니요?”

“나야 농군이 아니니 잘 모르지만, 어떤 땅에 심어도 금방 자라는 데다가 소출도 많고, 이밥에는 못 미치지만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먹을 만은 하다더구나.

그것을 여기저기 심어 곡식 대신 먹으라 하고, 남는 곡식을 은으로 바꾸어 세금으로 바치면, 위에서 보기에는 백련교고 뭣이고 다 지나간 일이요, 지금의 요동은 아주 잘 다스려지고 있다, 그렇게 단정하지 않겠느냐?”

여기서 더 딴죽을 걸 만큼 어리석은 조전은 아니었다. 이렇게 맺은 인연도 어쨌든 인연이니, 앞으로 이웃사촌처럼 잘 지내자며, 종종 한양에 사람 보내어 연통 주고받자 하였으니, 만약 정말로 더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때 다시 구하면 될 것이다.

“아, 그리고 얼추 다 알아먹은 것 같으니 하는 말인데, 네놈만 멍석말이하고 네놈 교인들은 봐준 것으로 빚 하나 지운 셈 치고 부탁 하나만 더 하자꾸나...”

맹자가 성선(性善)을 논하며 이르기를,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아이를 보면 누구든 측은히 여기며 구하려 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그 이치대로라면,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면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 또한 사람 마음이므로, 모든 사람은 다 어느 정도까지는 도둑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백련교 교인 조룡이 한양에 찾아와 임 선생 타령하던 때, 대응할 계책을 마련하면서 이지함은 잠시 그런 생각을 품었는데, 다행히도 그 도둑놈 심보에 백련교 쪽이 순순히 응해주었다.

“애초에 그놈들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벌여 우리가 곤경에 처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도둑놈 심보가 아니라 정정당당한 거래입니다.”

민주당 선비들 중 가장 도둑에 가까울 이탁오가 피식 웃었다.

민주당을 위해 첩자 노릇 해주는 대신 백련교 쪽은 훗날 중원의 법이 한바탕 바뀔 때, 이역만리 서쪽에서 임 당수가 열심히 설파하고 다녔다는 그 ‘신앙의 자유’라는 것의 덕을 좀 보기로 하였으니, 이탁오의 말에도 아예 일리가 없지는 않았다.

“당장 이렇게, 바로 연통을 전해오지 않았습니까.”

그 손에 들린 것은, 백화문(白話文, 중국어 구어를 글로 옮긴 것)으로 쓰인 평범한 편지였다.

동창과 금의위가 무시무시하고도 치밀하여, 마치 천라지망을 펼친 것처럼 그 무엇도 빠져나갈 수 없다지만, 백련교는 이미 원대부터 그런 그물 따위 우습게 여기며 중원 곳곳을 오갔다.

그러므로 지금 이탁오의 손에, 그 서슬 퍼런 동창의 눈을 피해 북경에 들어간 백련교 교인이 부친 편지가 들려있는 것은 결코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어찌 되었다는가?”

“시종일관 우리 뜻대로 된 모양입니다.”

장거정이 임꺽정의 얕은 수작을 꿰뚫어보지 못할 리 없었다. 진짜 백련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순 가짜 백련교인들만 붙잡아 보낸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 갑자기 일대의 도적이 사라지고, 호시탐탐 요동을 노리는 달단을 제하면 요동 전역이 평온해진 것도 그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 없었다.

“유왕 전하를 부추겨, 요동 땅을 안정케 할 시무책(時務策)을 황상에게 올리도록 하였다더군요. 말이 상소지, 실제로는 온 중원 앞에 포고한 것입니다.”

그리고 내각수보 장거정 이하 모든 학사들이 이에 동의하고, 곧 유왕의 기지에 의해 고작 몇 달 사이에 그 영락제조차 이루지 못한 요동의 완전한 경략에 한 발짝 나아갔음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아직까지 한사코 태자를 정하지 않고 있는 황제에게, 다시 한 번 유왕의 태자 책봉을 진언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는 셈이다.

아니면, 황제가 갑자기 붕어하였을 때 유왕이 그 뒤를 이을 수 있는, 그저 살아남은 두 황자 중 손윗사람이라는 것 외의 강력한 근거가 될 수도 있으리라.

“소생이 겪어본 바로, 장 수보 그이는 천리 앞의 이익을 뻔히 보면서도 백리 앞에 다른 이익이 있으면 서슴지 않고 그것을 택할 사람입니다. 당연히 임 당수 하는 일을 미심쩍게 여기면서도 이 미끼를 기꺼이 물겠지요.”

그렇게 되면, 요동 땅은 적어도 수 년 동안은 평온해야 한다. 설령 백련교 교인들이 아직 남아, 혹세무민이나 약탈을 하는 대신 마을의 낡은 집과 우물을 고치고 굶주린 백성에게 곡식을 나누어준다 할지라도, 그 ‘사교 무리’에 대한 언급은 북경의 여러 아문(衙門) 거치다가 어딘가에서 사라지고 모든 것이 잘 되어간다는 보고만 내각에 올라갈 것이다.

“정말 의심치 않을까요? 제가 만나본 장 대인은 그래도 꽤 총명하고 지재가 날카로운 축에 드는데.”

“백련교 잔당이 남아있다 한들, 무슨 대단한 일을 꾸미겠느냐. 그렇게 단정하고 넘어가겠지요.”

이이 물음에 이탁오가 나름 자신 담아 답했다.

“물론 장 수보도, 언제고 조선을 정벌하러 요동을 거치는데 그 요동이 온통 적지(敵地)로 화하게 될 공산이 아예 없다고 단정하지는 않겠지요.

허나 백련교는 그저 진공가향 무생노모 타령만 하는 사교이니, 결국 무슨 수를 꾸미든 멀리 가지 못하리라. 그렇게 여기고 넘어갔을 것입니다. 결국 남이 보기에는 광인(狂人) 무리일 뿐이니까요.”

“성인도 올바른 마음을 잃으면 광인이 되고, 광인도 옳은 생각을 품으면 성인이 된다 (維聖罔念作狂 維狂克念作聖)... ”

“그 『서경』 말씀이 감히 틀렸다고 누가 말하겠습니까? 어쨌든 중원의 사람들 중 우리 당이 내세운 것에 가장 먼저 호응한 것은, 저 잘난 강남의 향신도, 화북의 고루한 선비들도 아니요, 모두에게 미치광이 사교 소리나 듣던 백련교였으니까요.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지만, 아직껏 목소리가 없던 자들. 목소리는 있어도 말을 모르던 자들. 이들 모두를 위하여 우리가 온 세상에 이단 소리 듣기 딱 좋은 논변을 펼치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국 구주(규슈)에서의 격물 이래로, 저들 있는 이 성에서도 조금은 조세의 제도를 바꿔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말이 강남과 화북 각지 향신들 사이에서 은밀히 오가고 있음을 알았더라면 이탁오의 말도 조금은 다르게 나왔을 것이었다.

“글쎄요. 하지만 저들이 우리의 논변을 엉뚱하게 받아들여, 자칫 우리는 물론이요 온 요동 백성들이 때이른 화란을 당할 뻔하지 않았던가요?”

“그것은 감수해야 할 위태로움이지요.”

“그래도 우리 조선은 내 스승 화담 선생의 저작을 필두로, 이미 여러 해에 걸쳐 새로운 생각이 퍼졌으니 저렇게 엉뚱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당분간 아니 나올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같은 한양 구석의 어느 남루한 집에서, 삼락서원 원생 정여립이 꾀죄죄한 옛 노론 사람들 여럿과 모여 쑥덕대고 있는 것을 알았더라면, 이지함도 아마 말을 아꼈을 터였다. 허나 세간의 말과 달리 진짜 도술은 모르는 것을 어찌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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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요동 지배는 대부분의 시기에 걸쳐 대체로 불안정했고, 조정과 여진 양측을 잘 다룰 수 있는 정치력, 요동 일대의 세습 무관 집안들을 통솔하는 카리스마, 수시로 침입하는 몽골과 툭하면 반기를 드는 여진 세력을 억누를 수 있는 무력을 모두 갖춘 인물이 있을 때만 겨우 안정을 되찾곤 했습니다. 이성량과 같이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인물이 요동을 관할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었고, 이것이 바로 『명사』에서 이성량에 대해 ‘변경의 장수가 이처럼 성대한 무공을 세운 것은 이백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 평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원 역사에서도 누르하치라는 걸출한 인물의 출현으로 명의 요동지배가 총체적 붕괴를 앞두게 되자, 여진족뿐 아니라 요동의 한인 이주민들도 바로 반란을 일으킵니다. 1621년 누르하치가 요양성을 함락시키자마자 개주에서도 오조(吳祖)라는 자가 황제(!)를 자처하며 잔존 명 세력을 연달아 패퇴시킨 것이 그 예가 되겠습니다. (그 직후 오조에 대한 기록이 끊기는 것을 보면, 아마 명이 산해관 일대에 새로 방어선을 구축할 무렵 후금에 흡수되거나 격파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요동총병 양조는 실존인물로, 요동 일대에서 대대로 무관직을 세습해온 집안 출신입니다. 당시 요동의 무신 집안들은, 장성하면 다른 전선 – 주로 對몽골 전선 – 에서 공을 세우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직위를 세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양조는 운이 좋은지 나쁜지, 경술의 변으로 한창 기세가 오른 몽골 세력이 요동을 수시로 노렸기에 고향에서 무공을 세울 수 있었지요. 1557년 전임자 나문치가 탄핵당하자 그 뒤를 이어 총병직에 올랐고, 발해만 해안까지 몽골의 습격이 벌어져 끌려간 정착민만 육천여 명으로 추산되는 상황에서 끝까지 싸워 요동을 지켜냈습니다. 그러나 무재만큼의 정치력은 없어 다른 장수들에게 임무를 맡기기보다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일선에서 싸우는 것을 선호했고, 결국 1563년 몽골과의 전투 중 화살에 맞아 전사합니다. 이후 무신으로는 상당한 선시(善諡)인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받지요.

작중 꺽정이가 요동 도적들에게 ‘세뇌’를 가할 때 시킨 면신례는 모두 성종 시기 성현이 저술한 『용재총화』에 그 이름이 언급됩니다. 특히 무관들의 면신례는 문관들보다 더 육체적인 가학(苛虐)이 심하였고, 반대로 문관들의 경우 마구잡이로 때리는 것보다는 모멸감을 주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용재총화는 (당연히) 삽화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현대의 ‘유격체조’나 얼차려에 빗대어 묘사한 작중 내용은 모두 글쓴이의 창작이 되겠습니다.

작중 조전의 시점에서 언급된 것처럼 명의 국경 방어태세는 16세기 중반 무렵에는 거의 유명무실해져, 최전방에 해당하는 진보에서 돈을 각출해 반대편 ‘오랑캐’들에게 보호비로 바치거나, 아예 몽골이나 다른 이민족의 손을 잡고 밀무역에 종사하는 등 여러 폐단이 나타났습니다. 조전과 같은 백련교도들이 쉽게 국경을 넘나들며 반체제 활동을 할 수 있던 것도 이 때문이었지요. 명 조정은 여기에 대해 엄벌주의로 일관했으나, 이는 한 번 부정부패가 발각된 하급 군인들이 거리낌 없이 월경하여 몽골이나 (후에는) 만주의 편을 들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백화(白話)란 중국어 입말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20세기에 이르러 북경 방언을 바탕으로 한 관화(官話)를 그대로 백화문으로 옮긴 것이 우리가 아는 현대 중국어 보통화가 되겠습니다. 이미 송대 이전부터 발생한 입말 백화와 문어 한문(문언문文言文) 사이의 차이는 점점 벌어졌고, 조선에서도 이문(吏文)이라 하여 역관들이 북경어 회화뿐 아니라 백화문까지 익히도록 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백화문은 어디까지나 – 조선시대의 한글과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 ‘진짜’ 한문보다 저속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대중적인 『서유기』 등의 백화소설(白話小說)도 순수한 백화문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문어적 요소를 갖춘 문체로 쓰였습니다. 루쉰의 『광인일기』(1918)가 중국 최초의 근대소설인 동시에 최초의 현대 백화문 소설로 불리는 것은, 그러한 요소까지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백화문으로만 글을 썼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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