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천하가 어지러운 까닭 (1)
북녘 요동에서 가짜 백련교도를 만들어 관헌에 넘기고, 진짜 백련교도는 때를 기다리며 세를 불리도록 잘 단속한 뒤 꺽정이는 남쪽으로 내려왔다. 해가 바뀔 무렵 황주에 닿아, 며칠 구월산에 들어가서 딴짓 좀 하다가 올라가겠노라는 기별 하나만 미리 보내고 봉산 대신 은율 쪽으로 빠졌다.
올 겨울에는 아직 눈이 그닥 오지 않았고, 날은 요 며칠 따뜻하여, 정월임에도 구월산은 그 이름처럼 구월 가을철 풍경을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나무가 조금 더 앙상한 정도일 텐데, 그 덕에 산기슭부터 산마루까지 곳곳에 튀어나오고 들어간 기암괴석 모습도 고대로 드러났다.
전생의 이맘때쯤, 청석골에서 밀려난 꺽정이는 저의 마지막 남은 수하들과 함께 이곳 구월산으로 들어왔다. 봉우리를 성벽으로 삼고 골짜기를 해자로 삼아 버티고 버티다가, 끝내 모두 몰살을 당하고 꺽정이 저는 날아드는 화살비에 고슴도치 신세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 염라대왕 그놈이 나더러 별것 없다 한 것도 딱히 틀리진 않았단 말이지. 지금이야 땅바닥 두드리며 후회하고 있겠지만.”
재령 쪽이 훤히 보이는 산등성이에서 꺽정이가 혼잣말 툭 던졌다.
대략 저기 저 소나무 옆에서 서림이 홀로 달아나는 꺽정이 저를 알아보았고, 거기서 몇백 보쯤 떨어진 저 바위 근방에서 쓰러졌던가.
다른 사람이 꺽정이 처지였더라면 이곳에 다시 돌아와 섰다는 점만으로도 만감이 교차하겠지만, 여기서 있는 꺽정이는 그러한 감상(感傷)에 있어서는 예민하기로 목석과 자웅을 견줘야 할 만한 작자였다.
“애초에 도둑놈을 믿고 내기에 응하는 놈이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노름판에 뛰어들면서 그만한 채신머리도 없다면 패가망신이 오히려 마땅할 것이다.”
산에 올라 공연히 하는 혼잣말을 굳이 받아주는 것은, 골짜기 메아리가 아니라 어느새 꺽정이 옆에 나타난 이지함이었다.
“내 여기 있는 줄은 어찌 알고 오셨소?”
“네 녀석이 전생에 요맘때쯤 죽어서, 저승 갔다가 돌아왔다고 스스로 밝히지 않았더냐. 느닷없이 구월산 들어갔다 온다 하였으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무슨 연고인지 능히 짐작이 되더라. 하여, 적당히 핑계 만들어 나도 재령으로 왔다.”
“핑계라니?”
“삼락서원 훈장을 잠시 내가 맡게 되지 않았더냐. 원생들 데리고 재령 철장(鐵場, 제철소) 구경을 왔다.”
재작년 주세붕이 졸한 뒤 곧장 한양에서 병란이 일어났으므로, 그해 여름 한 철은 서원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둘 수는 없었으므로, 관계된 모든 이들이 모여 한참 고민한 끝에, 학문이 고매하면서도 시류(時流)와는 거리를 두었던 명유(名儒)로 호남 유림의 좌장인 김인후에게 제안을 보내게 되었다.
허나 김인후는 이미 인종대왕 훙서 이래로 세상 일에 절반쯤 마음을 끊었고, 담양 소쇄원(瀟灑園) 옆에 삼락서원의 제도를 본따 저만의 서원을 세웠던지라, 정중히 그 제안 거절하고는 대신 저의 제자 기대승을 추천하였다.
다행히 기대승은 기꺼이 응낙하였으나, 호남 일대에서 제법 크게 사업을 벌이고 있었기에,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남에게 맡길 것은 맡길 수 있도록 일 년만 기한을 달라 하였다.
“아, 그래서 남명이랑 퇴계 두 분 어르신이랑 사형이 번갈아 훈장을 맡는다 하였지. 이번이 사형 순번인가 보오?”
“그리 되었다. 성리(性理)의 논변은 내가 두 분 선생을 따를 수 없고, 다만 형이하(形而下)의 여러 일을 가르칠 뿐이다. 하여 잠시 짬을 내어, 원생들에게 이러한 세상도 있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이리 왔다.”
아닌 게 아니라 재령 철장쯤 되면 조선 산하에 보기 드문 구경거리가 됨직하였다. 겨울이야 오건 말건, 또 구월산 도적놈이야 보건 말건, 재령 곳곳에 세워진 철장(鐵場, 제철소)에서는 오늘도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요새는 살만해진 백성들이 족족 저의 집에 구들장을 까는 바람에 섶이며 장작이며 죄다 값이 올라서, 이대로 몇 년만 지나면 평양 문수산에서 석탄을 쓰는 게 수지타산이 맞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때가 되면 지금 여기서 먼발치로 보이는 재령 철장 풍경은 더욱 부산하고 더욱 지저분해질 터였다.
한전법이 시행된 이래 유지할 여력이 되지 않아 모시던 집에서 내쫓기듯 면천된 노비들. 농계(農契)에 저들 전답을 넘겼다가 그 밑천 홀랑 잃어버린 뜨내기들. 나날이 덩치 불리는 철장에 새로 들어올 일손은 이 나라 조선에 차고 넘쳤다. 이미 그런 이들이 열심히 서흥과 재령, 안악 등지에서 철광석을 옮겨오고 있는데, 평양 탄전(炭田)의 석탄이야 못 옮겨오겠는가.
그렇게 재령과 서흥 곳곳의 철광에서 나오는 광석은 재령의 강엿쇠둑(精鍊爐)과 판장쇠둑(鍛造爐)을 거쳐 시우쇠(熟鐵)로 화하였다. 시우쇠는 다시 잘 다져져 참쇠(正鐵)가 되고, 잘 제련된 참쇠는 그대로 동래로 향하였다. 동래 인근의 다른 철장만으로는 영남 고을 대장장이들의 수요를 감당하기만으로도 벅찼던 것이다.
동래에 닿은 참쇠는 다시 화포장들의 손을 거쳐 총통과 조총이 되고, 개중 상당수는 일본으로 넘어갈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인가 하는 놈팽이가 주변 다른 왜인들이 열심히 일구어놓은 조총 공방을 꿀꺽 집어삼킨 이래 더는 부산포 조총을 사들이려 하지 않는다지만, 그만큼 상락을 준비하는 모리와 오토모, 그리고 한몫 끼려는 상인과 농부들까지 하여 새 손님들로부터 주문이 늘어났다.
“그런데 원생은 어디 가고 사형만 여기 있소?”
“철장의 온갖 일을 소개하는 것은 서 별감과 이 야감(冶監) 두 사람에게 맡겨두었다. 우리 서원 원생쯤 되면 어디서든 배움을 구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 야감이란 곧 배천 살던 대장장이 이춘동(李春同)이었다. 꺽정이 전생에는 봉산으로 부임하는 이흠례를 족치고자 함께 공모하였던 짝패였는데, 이번 생에도 어쩌다 보니 그들 패거리에 엮였다. 지금은 서림의 ‘별감’ 자리를 어설프게 따라하여 스스로 ‘야감’이라는 직함을 만들어 붙였는데, 재령군수조차 반공대는 해야 할 만큼 위세가 등등하였다.
“그리고 찾아오는 김에 네게 전해줄 소식도 제법 있었고. 네가 한창 요동 들쑤시는 사이에 백련교 교인들이 제법 부지런히 움직여서, 벌써 그간 우리가 차마 살필 엄두도 못 내고 있던 명국 안쪽 사정을 제법 전해받았다.”
강남 바닷가야, 서슬 퍼런 해금령이 떡하니 버티고 있던 시절부터 이름만 왜구인 한인들이 예로부터 저의 집처럼 드나들곤 하였으니 – 실제로 그들의 고향이 대개 그쪽이기도 했지만 – 그 왜구들을 모조리 수하에 거둔 작금의 민주당은 굳이 첩자를 보낼 것도 없이 손바닥 들여다보듯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 남경 응천부만 되어도 슬슬 동창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장강 이북으로 올라가면 고작해야 지난날 『의산문답』 퍼뜨릴 때처럼 글 몇 통을 몰래 집어넣는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이제는 제대로 장거정의 눈길을 끌었으니, 이제는 정말 필요할 때를 위하여 아껴두어야 할 방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동창이 생기기도 전에 이미 온 중원을 누비며, 어디에도 없는 것 같으면서도 어디서든 나타나는 백련교 교인들을 끌어들이게 된 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고작해야 일 년에 한 번 오가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듣는 것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소식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전 그놈이 머릿속에 온통 꽃밭을 차려두고 사는 줄로만 알았는데, 나름 아래에 야무진 놈들도 두고 있던 모양이구려.”
“그쯤이나 되니까 사교(邪敎) 소리 들으면서도 명맥을 이어오지 않았겠느냐. 지금까지는 기껏 그렇게 맥을 이어도 이 땅 위에서 무언가 일을 벌일 재간이 없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제는 마치 연장이 손에 들린 것과 같이 되었으니.
여하간 마저 들어보거라. 황상이 요새 부쩍 미령(靡寧)하다는 소문이 북경 저자에 돈다더라. 고려 인삼이 그나마 병세에 효험 있는 약재라 하여, 북경 안의 인삼 시세가 널뛰기를 하고, 그나마 쟁여둔 이들은 혹여 빼앗길까 두려워 급히 천진의 창고로 인삼을 빼돌린다더라.”
고려가 조선으로 바뀐지 오래였지만, 여전히 명국 사람들에게 인삼이라 하면 곧 고려 인삼이었다.
그 효능이야 잘 알려져 있었고, 심지어 요새 이지함의 조카 이산해까지 합류하여 점점 ‘표가(表價, 주가)’가 올라가는 기학재에서도 슬슬 인삼의 효능을 숫자로 나타낼 방도를 찾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간 골골대면서도 명을 부지해 왔던 황제가 느닷없이 인삼을 필요로 한다는 말은 아무리 그래도 영 미심쩍었다.
“우리 장꺽정(장거정) 형이 뭔가 농간을 부리고 있나 보군.”
“역시 그렇지.”
『의산문답』으로 인해, 차마 말 못할 망신을 당한 명 조정은 더 이상 사신을 통해 조선을 꾸짖지 않았다. 조서도, 칙서도 더는 내려오지 않았고, 다만 겉치레로 전하는 글만 북경과 한양을 오갔다.
그러나 어느 한쪽도, 상대가 굴복하였거나 개심하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우리 조정을 시험한다 하기에도 부족하다. 이미 강남에 내다팔기 위해 온갖 삼을 다 재배하고 있으니, 조공할 인삼 마련하는 것쯤이야 여반장일 테니.”
“황제 그 변변찮은 늙은이가 죽어 나자빠지면, 그게 다 우리 탓이라고 몰아가려는 것 아니겠소? 인삼을 하품(下品)으로만 보냈다느니, 양이 터무니없이 적었다느니, 보낸 것 중에 인삼 비슷하게 생겨먹은 독초가 섞여 있었다느니 온갖 트집 잡으면서 말이오.”
저기 저 푸른 소나무처럼 변함없는 꺽정이의 무엄함에 이지함은 잠시 폭소하였다.
“그런 하책을 스스로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추정할 여지를 남긴다는 것만으로도 족히 우리를압박할 근거가 될 테니.”
대명 천자가 헌법을 무엄한 처사요 천하를 어지럽히는 발단이라 꾸짖은 조서가 내려온 지도 벌써 시일이 제법 흘렀다. 그간 대명이 종계변무 등에서 조선에 보인 ‘호의’를 근거로 이 꾸짖음은 그저 사소한 오해로 말미암은 것이요 수 년만 기다리면 알아서 해소되리라 믿었던 이들은 조금씩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내일모레 천병(天兵)이 산해관 넘어 의주를 들이칠 것이라 여기는 이들은 없었으나, 은근히 불안해하는 이들은 조금씩 늘어났다.
지금껏 온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자랑스레 여기든, 마땅치는 않지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라 여기든, 저들이 동의한 저들 나라의 제도로 여기게 된 헌법과 그 이하의 여러 제도들.
요새 유행하는 말로 개명(開明)된 이 조선국 법도를 자랑스레 여기며, 감히 삼대(三代)의 정사에 비하는 자들도 제법 생겼다.
그러나 그처럼 개명된 법도를 지키기 위해 저들의 목숨, 또는 그에 준하는 금은보화를 바칠 수 있느냐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은 답하는 것 자체를 어렵게 여기며 피할 것이다.
“장거정이가 천자를 조만간 갈아치우긴 할 것이라고 보시는구려.”
“이미 북경 저자에서는 유왕이 건저(建儲, 태자 책봉)만 못 받았을 뿐이라고들 떠든다 하였다. 동창이나 금의위에서 소문을 잡지 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잡지 않는다고 보는 쪽이 더 옳겠지.
요동총병 나문치를 체임하고 그 자리에 양조를 세운 것도 유왕 전하의 꾀요, 요동 전역의 민생을 돌볼 훌륭한 수를 마련하여 양조로 하여금 시행케 한 것도 유왕 전하라고 하더구나.”
실효가 드러나기도 전에 벌써 소문이 돌고 있었으니, 이 또한 장거정의 손이 닿은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 유왕인지 하는 이의 이름으로 대일통 어쩌고 하는 글도 내지 않았소? 그것 반박한다고 우리가 일 년 동안 규슈에서 격물도 하지 않았소.”
“그쪽에 대해서는 무슨 일인지 언급이 없더구나. 치세의 방도에 대해 논변으로 다투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본 것일지도.”
이제는 ‘이정 그이의 셋째아들’이나 ‘순신이’ 대신 ‘여해(汝諧)’라고 제대로 불러주는 것이 마땅할 나이가 된 이순신이 사업당에서 그 기묘한 전쟁 놀음을 하면서 한 말이 있었다.
‘율곡 선생과 탁오 선생의 말을 들어보니, 전쟁이란 나라의 대사요 생사를 결판짓는 것이다(兵者, 國之大事 死生之地)하는 병법 구절이 유독 다음 전란에서는 들어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병(兵)이 정(政)의 짝이 되어, 서로 나뉠 수도 없고 홀로 설 수도 없을 것이라 함이 더 맞겠지요.”
즉 정(政)과 병(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끝나는 곳에서 다른 하나가 시작한다는 말이었는데, 이지함 생각하기에도 그 말이 참으로 옳았다.
어쩌면 이삼년 안으로, 어쩌면 십수 년은 흐른 뒤에야 닥칠 크나큰 전란.
그러나 그 전란은 지금껏 동방 땅에서 보아왔던 것과는 다른, 아주 기묘한 다툼이 될 것이다.
이 전쟁은 무엇이 옳으냐, 과연 어떤 세상이 올바른 것이냐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이었으므로, 한편에서는 군과 군이 부딪히고, 수사(水師)와 수사가 부딪힐 것이요, 다른 한편에서는 말과 말이 엎치락뒤치락 싸우며 두 갈래로 나뉜 민심을 두고 드잡이질을 벌일 것이었다.
전장에서의 다툼 또한, 그저 수백만 대군을 몰고 요하를 넘던 수양제 시절과는 다를 것이다. 그저 천조국이므로 오랑캐를 정벌한다. 그러한 명분이 먹히기에 이미 조선과 중국은 너무나 가까워졌고, 서로 잘 알게 되어버렸다.
더구나 전쟁의 법도 또한 바뀌었으니, 숙련된 군사를 세우는 것도 금은으로 할 일이요, 그들에게 두터운 철갑을 입히고 – 에스파냐 용병들이 꾸준히 들어오면서 이제는 인천에 갑주 공방도 새로 생기고 있었다 – 정교한 화포와 총통을 그 손에 들려주는 것도 금은으로 할 일.
그러므로 백성들에게 창칼을 들려주고 나가 싸우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하는 시절은 끝났다. 대신 그들을 설득하여 평소보다 늘어난 세금을 기꺼이 바치도록 하고, 전쟁이 끝나면 그대의 세금 덕에 이처럼 이겼노라 재차 설득해야 할 것이었다.
“사형 말씀마따나 우리가 논변으로 이미 저쪽을 억누른 것이라면 참 좋겠소. 어째 장거정 그 형이 그리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지만서도.”
“그건 그렇지. 아마 향신들 마음 속의 불만이 조금 식는 대로 다시 새로운 수를 부릴 것이다. 아니면 우리 쪽을 뒤흔들려 할지도. 아직 우리 쪽도 당장 내일모레 대국과 전쟁을 벌인다 하면 우리 군세에 금은 의연(義捐)하여 보태줄 이들보다 가산 처분하고 피난길 오를 이들이 더 많지 않으냐.”
씨름판에서 승패 기록하듯 헤아린다면, 장거정은 민주당 상대로 한 번 이기고 세 번 진 셈이었다. 제꾀에 제가 넘어가 천안문의 변이 일어났을 때 향신들의 마음을 한 번 잃었고, 뒤이어 천자의 조서로 조선을 뒤흔들려다 『의산문답』으로 또 한 번 거하게 당했다.
유왕의 이름으로 대일통론을 설파하여 민심을 조금 수습하였으나, 이어서 자유민주당 분표를 팔며 거하게 알린 규슈 격물의 성공으로 강남 향신(鄕紳)들의 마음을 또 한 번 잃었다.
그러나 작게는 동방, 크게는 천하를 두고 벌어질 이 싸움은 이제 겨우 막이 올랐을 뿐이었다.
“실은 내가 이곳에 학도들을 이끌고 오면서, 조용히 뒤로 물러나 여기서 너와 이야기나 나누고 있는 데도 그런 사정이 있다.”
“그렇소?”
“아직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당과 탕평당 여러 선비들까지 함께 세운 이 나라의 새 법도가 모든 국인(國人)의 마음 속에 완전히 자리잡지는 못하였다. 씨앗을 뿌리고 그 위에 여러 번 물과 거름을 주어, 이제 새싹이 돋아나고 뿌리를 막 내린 정도랄까.
명년 권점으로 공회의 사람들이 일시에 모두 갈리고, 비로소 온 나라 사람들이 저의 뜻이 모여 곧 국론(國論)이 됨을 완연히 이해하게 될 때. 그때에 이르러서야 모든 이들이 소위 경장과 그 이후에 세워진 법도가 그저 권병(權柄) 쥔 이들의 한두 번 변덕이 아니라 완전히 자리잡힌 국법이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결국 두리손은 처음 꺽정이와 이지함이 원했던 대로, 이 나라를 바꿔나가는 것을 위한 발판이 되어 준 셈이었다. 그를 따르던 노론은, 이제 이듬해 권점을 기다리고, 그들끼리 모여 탕평당과 민주당 두 당에 비길 새 당을 만들고자 궁리하는 데 바빴고, 군부니 외척이니, 온갖 좌도방문으로써 경장을 뒤엎으려는 자는 씨가 말랐으니.
“허나 저 먼 북쪽의 백련교인들조차 우리의 하는 일을 곁가지로 듣고 엉뚱한 짓을 벌였는데, 이 땅에서는 오죽하겠느냐. 처음에는 그럴 일 없으리라 여겼는데, 탁오와 율곡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나니 의심되는 바가 조금 생겼다.”
“사형 표정을 보니 말씀하지 않아도 답을 알겠소. 서원 다니는 도령들 중 엉뚱한 작당에 어울린 놈이 필시 있었던 게로군.”
“아직은 모르는 일이다. 대뜸 의심부터 하고 볼 수는 없지 않겠느냐?
하여, 이곳 철장에 데려와 식견을 넓히면서, 동시에 내 귀 닿지 않는 곳에서 그들끼리 이야기 나누고 품은바 생각은 더욱 깊게 하도록 하였다. 찬동하는 자를 얻거나, 철장의 모습을 보고 새로이 터득하는 바가 있다면, 한양으로 돌아가자마자 함께하는 무리들을 찾아가지 않겠느냐?”
선비가 화를 당하지 않게 되는 세상을 만들겠노라 공언한 이지함이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자칫 국론을 나누는 것을 넘어 아예 분탕질을 칠 법한 논설이 나올 기미를 보인다면, 눈 질끈 감고 막아야 할 수도 있었다.
미리 알아채고, 조곤조곤 타이르며, 아직은 때가 아니니 부디 몇 년만 기다리고 학식을 더 쌓은 다음 그 논변을 펼쳐달라 하는 것 정도라면 괜찮지 않겠는가.
북경의 모든 일이 동창의 눈을 피할 수 없듯, 한양의 모든 일은 서림의 이목을 피하기 어려웠다. 사업당에서 직접 일을 하든, 아니면 사업당과 연 닿은 다른 무언가를 하든, 어떤 식으로든 서 별감님 말씀이라면 벌벌 떨며 받들 수밖에 없는 이들이, 조금 과장하면 한양 사람 열 명 중 하나는 되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저 철장을 오가는 원생들이 한양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들 뒤에는 그림자가 붙게 되어 있었다.
그 생각을 하며, 비장한 각오 다지는 이지함이었는데, 꺽정이 녀석은 공감해주기는커녕 오히려 피식 웃었다.
“사형도 이럴 때 보면 천생 샌님이시오.”
“그게 무슨 말이냐?”
“무엇하러 저 애송이 도령들 뒤에 굳이 사람까지 붙이신다는 말이오? 그냥 가서 물어보면 될 것을. 사형이야 사제(師弟)의 정이 있으니 차마 못할 일이지만, 나야 뭐, 우악스러운 도적놈이니까.”
“애초에 수상쩍은 모임에 관여하는 이가 있다면, 묻는다고 곧장 답할 리 있겠느냐?”
“율곡 도령이 뽑은 원생들 아니오? 딱 저 같은 놈들만 모아놓았겠지. 그리고 그런 녀석들이라면 대개는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발상을 하였는가 어디 가서 떠들지 못해 늘 입이 간지럽기 마련이라오.”
이지함이 무어라 반박하려다가, 의외로 이치에 닿는 구석 있음을 깨닫고 벌어진 입을 도로 다물었다.
“그, ‘율곡 같은 놈’이라는 말은 잘못이다.”
“그 부분만 짚어서 반박하시는 것을 보니, 나머지에는 찬동하시는 모양이시구려.”
“... 때리지는 말거라.”
보람찬 하루를 마치고 재령 읍내로 돌아온 삼락서원 원생들 앞에 시커먼 도적놈이 나타난 것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꺽정이 말대로, 굳이 으름장 놓을 것도 없이 올해 나이 스물도 채 안 된 정여립이 떡하니 한 손 들고 자복(자수)하였으니, 이지함은 자기 제자와 자신의 인물 보는 눈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재조론의 영수는 명목상으로는 이언적이요, 실지로는 두리손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는 그저 삼남 각지의 노론 향반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두 영수 중 하나는 죽어 묻히고 다른 하나는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에 ‘잘 지내보십시다’ 하는 장문의 서한을 보내 – 친절함이 지나쳐, 라틴어뿐 아니라 진서와 국문, 대식국(아랍) 글까지 병기해주었다 – 시우다드 데 메히코(멕시코 시티)를 발칵 뒤집어 놓고 있는 지금, 노론을 하나로 묶을 사람은 딱히 없었다.
이듬해 권점에서는 반드시 공회의 과반을 옛 노론 사람들로 채우고, 성상께옵서도 공인하신 법도를 따라 나라의 헌법을 정당하게 고치겠노라는 심산 품은 이들은 제법 많았는데, 강가의 모래알처럼 그 수가 많다 보니 단합하는 힘도 딱 모래알 정도가 되었다.
하여 물밑에서 이합집산은 끝없이 이어지고, 누구는 아예 단념하고 그냥 안빈낙도할 심산을 품고, 또 누군가는 인망 좋은 누군가를 내세워 물방울이 다른 물방울 집어삼키고 덩치 불리듯 할 심산을 품었다.
그 와중에는, 저들만의 당을 일으켜 세우는 데 가장 시급한 것이, 인망 높은 선비도, 그럴듯한 당명도 아니요, 바로 저 탕평당의 퇴계 선생이나 민주당의 수산 선생처럼 학문 높고 지모 빼어난 선비라고 여기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출사하지 않은 선비들 중 저 민주당이나 탕평당에 버금가는 당을 일으켜 세울 지모가 있는 자는, 진작에 시세를 읽고 돈벌이에 나섰으니 대개는 소론에 속하였다.
그렇게 두리번대는 이들이 어느새 도성에 이르렀을 무렵, 마침 이 세상에 대해 할 말 많던, 이제 갓 어린아이에서 젊은이로 변한 도령이 하나 있었으니, 그이가 바로 정여립이었다.
“당수께서 몸을 일으키신 이래 조선의 모든 문물과 법제가 천변만화(千變萬化)를 거쳤고, 그로 말미암아 국인(國人) 중 열에 예닐곱에게는 더 살기 좋은 나라가 열렸지요. 허나 손익을 가감하면 딱 옛날과 비슷한 처지인 자가 또 두셋이요, 심지어 옛날만 못한 삶을 사는 이들도 한둘쯤 됩니다.
당수가 일으킨 변화 위에 세월이 켜켜이 쌓일수록, 점점 가장 마지막에 드는 이들도 늘어나겠지요. 당장 사대문 밖에도, 도성 안에 살다 밀려난 이들이 가난하게 사는 동네가 제법 많지 않습니까.”
정월 겨울밤은 섣달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추웠고, 산바람과 강바람 고루 부는 재령 읍내는 특히 그러하였다. 허나 누가 젊은이들 아니랄까 봐, 잠자코 잠자리에 드는 대신 떠들고 놀기에 바쁜 서원 원생들 사이에서 끌려나오다시피 한 정여립의 눈빛은 변함없이 형형하였다.
“하여, 저보다도 연소하였던 때 율곡 선생께서 의권의 논변을 내놓은 것처럼 저 또한 비슷하게 경세제민의 법도를 구상하였습니다. 원래 소강(小康) 뒤에는 대동(大同)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발상의 이름은 대동이라 짓고, 나중에 당까지 하나 꾸리게 되면 대동계(大同契)나 대동당(大同黨) 정도로 하려 했지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삼락서원의 영재들 중에서 저들 동지가 될 만한 사람 찾던 노론 사람들을 모아, 아직은 당이라 칭하기 우스운 정도지만 몇 명 찬동하는 이들도 구했노라 이실직고하는 정여립이었다.
“당을 칭하려 했다면 당론도 있어야겠지.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렇게 작당을 하였느냐? 두리손이 그 녀석처럼 옛날로 돌아간 다음 그 옛날이 영영 계속되도록 나라 법제를 꽁꽁 동여매자. 그런 말 하려던 것이었느냐?”
“그러기에는 이미 이 땅에 금은이 너무 많이 들어왔고, 또 너무 많이 흐르고 있지요. 이제 와서 이를 되돌리겠다 하면 그것이야말로 나무둥치 지키며 토끼 오기를 기다리는 격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굳이 버리는 것은 민생을 돌보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지요.
오늘 철장을 둘러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을 깊게 품었습니다. 이미 금은이 이 땅에 들어왔고 물산은 훨씬 풍부해졌으며, 온갖 기물을 만드는 공장(工匠) 또한 흥성하여 모두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게 최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네놈 생각하는 최선은 무엇이냐?”
“나라의 정사를 모두 공론에 따르도록 하는데, 어찌 나라의 물산 또한 사(私)보다 공(公)을 앞세움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나라의 모든 복락이 공(公)에서 나올 수 있도록, 전답과 공방, 시장과 계사(회사). 모두 나라의 것으로 삼고 나라의 모든 재화와 물산 또한 나라에서 관리하며 오직 대동(大同)에 따라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모두가 이익을 두고 다툴 것 없이 화목하게 일하며 풍족하게 재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요, 나아가 사사로운 궁리에 힘쓰는 대신 오직 국부(國富) 늘리는 데만 치중하니 종국에는 모두에게 더 이로워지지 않겠습니까?”
처음 이이를 만났을 때 그 총명함에 놀랐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그 과격함에 놀라 할 말을 잃어버린 이지함이었다. 그 대신 꺽정이가 껄껄 웃었다.
“이야, 몇 년 전만 했어도 어디 가서 돌만 맞으면 다행이요, 잘하면 목까지 날아갔을 이야기로구나.”
“그런 부담은 모두 임 당수께서 없애주셨으니 안심할 일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러니까 나라의 모든 것을 나라의 것으로 삼는다는 말 아니냐? 딱 우리 장 형이 할 만한 발상이구만그래.”
“장 형이라면 누구를 이르시는지요?”
“어, 저기 북경에 장꺽정이라고 형 하나 있다.”
그 장거정과 임꺽정 사이가 어떠한지를 대충은 아는 정여립은, 그제야 무서움을 알고 웃음을 그쳤다.
--- *** ---
석탄을 난방용으로 사용한 흔적은 놀랍게도 이미 고려시대부터 나타나며, 노천에서 석탄을 채굴할 수 있던 평양 인근에서는 이미 16세기부터 석탄이 제한적으로 난방에 쓰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무연탄과 석탄이라는 용어도 이때부터 그 용례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일찍이 산림자원이 고갈되어 석탄을 주력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던 영국과 달리, 조선은 비교적 석탄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목재로도 19세기까지는 난방 수요를 해결할 수 있었고, 굳이 난방 외에 다른 용도로 석탄을 사용할 이유도 적었지요.
조선의 제철기술은 동시대 중국과는 독립적으로 발달하였으나, 화약무기를 비롯해 보다 높은 수준의 야금술에 대한 수요가 발생하면서 16세기 무렵부터 한계에 봉착하게 됩니다. 이에 조선 정부는 다양한 방식으로 외부에서 제철 기술을 들여오려 노력했고,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에도 명군이 필요로 하는 화포를 조선 현지에서 제작하는 대가로 제철 기술을 이전받으려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실제로 조선 후기에는 그 이전과는 구별되는 제철 수준의 향상 추세가 나타나며, 이는 민간 영역에서의 상업 발달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됩니다. 즉 높은 품질의 강철이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민간 차원에서 기술을 발전시킬 유인이 발생했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19세기 중엽 산림자원 고갈로 한계에 봉착하기 직전, 제철 분야에서 수공업을 넘어선 초기 자본주의적 형태가 나타났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정해득, 2020. “조선시대 철장의 운영과 제철 기술에 대한 문헌적 검토.” <한국중세고고학>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