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06화 (206/259)

62. 천하가 어지러운 까닭 (2)

험악한 소리만 듣고 의외로 별 탈 없이 풀려난 정여립은, 그대로 한양에 돌아와 주공동(周公洞)으로 향하였다.

주공동이란 무엇인가? 도성 사대문안의 집값이 오르면서 고초 겪게 된 남산골 딸깍발이 선비들이 모여 살게 된 동리를 놀리듯 이르는 말이었다.

이들이 곤궁한 지경에 처한 것을 안 탕평당 선비들은 공회에서 발의하기를, 청운의 꿈 품고 상경한 서생들은 주머니 사정이 야박하니, 한성부와 호조 재정으로 아예 성 밖에 조촐할지언정 누추하지는 않은 동리를 새로 조성하여 남산골 사는 서생들이 그쪽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하자 하였다.

그리하여 목멱산(남산) 북쪽 기슭에 있던 남산골이 그대로 산 반대편, 남쪽 기슭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런 선비들을 은근히 질시하고 미워하면서 풍월로 배운 학식도 있던 성내 중인들은, 그 일대에는 밤마다 주공(周公)의 꿈 꾸는 도학군자들만 모였다고 비꼬았다. (마을을 새로 조성할 때 들어가는 세금을 저들이 낸다 생각하면, 그 심사 아니 꼬이기가 더 어려울 터였다.)

“허나 선비가 꿈을 꾸는데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는가?”

그 이력을 떠올린 정여립이 혼잣말로 피식 웃었다.

삼락서원에 모인 영재들의 총명함에 비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총명하다 여기는 그 믿음이었다. 다만 성품에 따라, 저의 믿음을 입 밖으로 내냐, 아니면 조용한 미소로 갈음하느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딱히 저의 잘남을 형언치 않더라도 그 언행만으로 주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끔 만드는 이이도 있었으나, 그는 원생이 아니라 오히려 훈도(訓導)에 가까웠다.)

용흥지지(龍興之地)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꼭 오얏(李) 용만 나라는 법은 없지 않느냐 생각하며 상경한 정여립은, 곧 현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산해, 류성룡만큼은 지재가 뛰어나지 못했고, 성혼처럼 인품이 좋지도 못하였다.

나이 스물도 되기 전 이미 어지간한 무관보다도 억세고 헌헌한 장부로 자라났으나, 그 용력과 무재는 임거정과도 능히 대적할 수 있다는 (과장이 아주 많은) 소문이 도는 수산 선생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였고, 그 군재는 주세붕 생전에 몰래 가르침 받으러 서원 드나들던 꼬맹이 이 아무개보다도 못하였다.

그렇다면 저의 잘남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꿈꾸는 데 있었다. 장차 이 나라가, 또 온 천하가 나아갈 길 무엇인지, 그 길이 어디를 거쳐 또 어디까지 향할 것인지. 정여립의 등에 돋은 상상의 나래는 서원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웅대하여, 능히 그 어떤 제약도 없이 이를 꿈꿀 수 있었다.

그러나 꿈이란 무릇 눈을 감아야만 꿀 수 있는 것이라. 어떤 길이 올바른지는 알아도 그 길이 어디서 출발하는지, 길이 흙길인지 포석 깐 길인지, 오솔길인지 대로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를 대신하여 앞길을 살필, 그 대신 눈과 손발이 될 자들을 구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이전에 들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소생은 얼마 전 서원 사람들과 함께 재령의 철장을 다녀왔습니다.”

남루한 집의 좁디좁은 마루에 모인 서생들이 귀를 기울였다. 마루가 좁아 몇몇은 마당에 – 역시 썩 넓지는 않았다 – 멍석을 깔고 앉았다.

“그곳에서 하필 임 당수를 만나, 한 소리 듣기도 했지요.”

정여립이 가볍게 입에 올린 임 당수 이름에 남루한 선비들 모두 잠시나마 몸이 얼어붙었다.

“그, 괜찮으시겠소?”

“하하, 소생 정 아무개, 포기를 모르는 사내입니다. 그 자리에서 소생이 조곤조곤 뜻을 밝히니, 끝내 임 당수도 저를 어찌하지 못하고 보내주셨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임거정과 그의 당여를 곱게 보지 않았다. 애초에 그 마음에 품은 불만이 소소했더라면, 이렇게 한양까지 올라와 한참 어린 정여립을 그들 당의 모사로 모시려고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만큼의 두려움도 마음 속에 담겨 있었다. 임꺽정 석 자는, 두리손의 수만 대군도 단번에 짓이기는 도원수요, 저의 뜻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 가로막는 것을 단숨에 짓이겨버릴 주먹이요, 몇 년 전만 해도 겨울마다 벌어지던 향전 때 그들 향해 날아오던 돌멩이와 몽둥이였다.

“허나 중한 것은 임 당수가 아니라, 그 재령 철장에서 제가 또 한 가지 이치를 깨우쳤다는 점입니다. 이 대동론이야말로 지난 십여 년 사이 우리 조선에서 나온 모든 경세의 의론을 합치고도 한 발 더 나아간 것임을 말입니다.”

정여립의 머릿속에서는 자명하지만, 아직 이를 바깥에 드러내어 모든 까닭을 밝히기에는 그의 생각이 다 여물지 못했다. 어쩌면 그가 온 천하의 모든 배움을 섭렵할지라도, 도저히 저의 머릿속 생각을 언설로서 드러내지 못할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것이 문제되는 일은 없었다. 이곳에 모인 향반의 자제들은, 이대로라면 다음 권점에서도, 또 그 다음 권점에서도 옛 노론의 뜻이 관철되는 일은 없을 것이요, 그렇게 현달한 몇몇 예외를 제하고 모든 양반이 ‘잔반(殘班)’이라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말을 듣게 되리라는 두려움으로 뭉쳤으므로.

“결국 세상의 재화란, 상학의 말을 빌리면 자본을 밑천삼고 사람의 역역(力役, 노동)을 들여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 밑천이 토지라면 농군의 힘으로 미곡을 만드는 것이요, 그 밑천이 공장이라면 역군의 힘으로 기물을 만드는 것이며, 그 밑천이 주즙(舟楫, 선박)이라면 뱃사람의 힘으로 이윤을 만드는 것이지요.

제도가 미비하던 시절에는 이 이치를 알지 못하였고, 설령 알더라도 저의 재산과 역역으로 화식(貨殖)에 힘쓰기보다는 권세나 속임수로 빼앗는 것이 더욱 이로웠습니다. 그리하여 멀리는 왕개(王愷)•석숭(石崇)과 같은 무리가 나왔고, 가깝게는 김안로•윤원형의 무리가 나왔지요.”

이제 막 소년 티를 벗은 앳된 사람의 목소리가 좁은 마당을 메웠다. 고담준론이 갖춰야 할 고아함도, 세련됨도 없었으나, 정여립의 말에는 사람을 잡아끄는, 목마른 이에게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우물물보다 더 시원하고 그 목을 잘 축여줄 것이라 설득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를 참지 못하고 떨쳐 일어난 것이 바로 임 당수와 민주당입니다. 예, 예, 압니다. 알아요. 여러분 모두 민주당이라 하면 하실 말씀이 많으시겠지요. 누군가는 그 옛날 향전 한창일 때 하민(下民) 무리로 인해 체통을 잃으셨을 것이요, 또 누군가는 한전법으로 말미암아 문중의 농장을 헐값에 내어놓을 수밖에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그 이후로 몇 년이 지나, 아직도 종종 흉년이 찾아오고 천재지변이 잇따르건만 나라의 살림은 몇 곱절이나 윤택해졌습니다.

자본을 능히 댈 수 있는 자들이, 이제는 남의 것을 빼앗기보다는 스스로 가산을 불리는 데 치중하며 온 꾀를 모으니, 숨겨져 있던 재보는 세상의 빛을 보고, 온갖 물산과 기물이 진흥케 됩니다. 이 이치는 얼마 전 퇴계 선생께서도 밝히셨고, 또 그 전에 일본국 구주에서의 격물로도 드러났지요.”

“당장 이 주변만 둘러보아도 그 말에 그릇된 바가 있음을 알 수 있지 않소이까? 아무리 나라의 온갖 물산이 흥성케 된다 한들, 도의와 예악(禮樂)이 폐해지고 온 나라가 금수와 같이 된다면 무슨 소용이오?”

좌중의 누군가 목소리를 내었다. 정여립은 반박하는 대신, 마치 그 말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양 자연스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렇습니다. 나라 전체로 보았을 때 몇 곱절이라는 것이지, 사람 하나하나로 보게 되면 누군가는 가산이 수십 곱절 늘어나고, 누군가는 갑절로 늘어나며, 누군가는 제자리요, 누군가는 심지어 반토막이 나겠지요.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과 같은 법도 아래에서라면요. 말하자면 인의(仁義) 대신 오직 자본이 나라의 주의(主義)가 되는 셈인데, 인의를 말하면서 실제로 행하지는 않았던 옛날보다는 훨씬 낫지만, 그렇다고 가장 나은 제도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대동을 논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어떤 짜임새 있는 고민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일순 번뜩인 통찰의 결과였다.

만인이 각자 저의 재산 늘릴 방도를 고민하며, 남의 것을 빼앗지도, 남에게 빼앗기지도 않으며 각자 힘쓴다면, 비록 사람 사이의 차이는 늘어날지언정 나라의 부는 크게 늘어난다.

그러나 사람의 기질은 차이가 있다. 모든 사람이 수산 선생 이지함처럼 지재가 뛰어날 수도 없고, 또 백의호판 서림처럼 치부에 재주를 보일 수도 없다.

그러므로, 만인이 각자 노력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책은, 만인이 하나로 뭉쳐 함께 그 부를 늘리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미 삼남 각지에 있는 농계(農契, 농업조합), 재령의 철장부터 동래의 화포 공방까지 모두 나라의 것으로 삼으며, 나라의 뛰어난 이들은 저의 집 한 곳뿐 아니라 온 나라를 위하여 계책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농지부터 공방까지, 재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수단과 자본을 나라의 것으로 삼고, 그곳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나라에 고루 나누어준다. 사인(私人)의 한정된 자본과 한정된 꾀, 한정된 견식으로 운영하는 사업보다, 나라의 힘을 하나로 모아 운영하는 사업이 더욱 소출이 클 수밖에 없을 터.

“여러분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사업당 서 별감과 같은 이가 만약 나라의 모든 계사(회사)를 저의 것처럼 부릴 수 있다면, 그 수익이 얼마나 늘어나겠습니까? 나라의 모든 백성에게 고루 나누어줄 만큼 소출이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이로써 인의와 이익을 모두 얻을 수 있으니, 바로 대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어떻습니까?”

남루한 집에 모인 서생들 모두가 넋을 놓고 정여립의 말을 숙고하였다.

그 논변 속의 비범한 통찰까지 꿰뚫어보지는 못하였으나, 인의와 이익을 모두 취한다는 것, 사유(私有)를 폐하다시피 하고 모두에게 고루 나누어준다는 것은 그 귀에 들어왔다.

그럴싸하다. 그런 생각이 처음에는 들고, 이어서 참으로 온당하다는 생각이 찾아오며, 그 위를 다시, 저것만이 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덮었다.

그렇게 모두가 몰입하던 차,

“터무니없는 소리로군. 조(粗)도 아니요 불(不, 최하등급)일세.”

흥을 깨뜨리는 천연덕스러운 목소리 있으니, 바로 정여립과 그렇게 터울 크지 않으나 그 명성은 비할 바 아닌 율곡 선생 이이였다.

나라의 영재라면 무릇 저를 따라오는 시늉쯤은 해야 한다고 여기는 이이는 좋은 훈장감은 못 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작 서원에서 가끔 월고(月考, 퀴즈)나 연고(年考, 기말고사)를 보게 될 때는 어지간하면 대통(大通, A+학점에 해당)이나 통(通, A학점에 해당)을 주곤 하였다. 딱히 원생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이가 정색하며 칼 자르듯 냉담하게 평하는 것은 약간은 의외였다.

“인백(仁伯, 정여립의 字) 자네의 흠결이 여실히 드러나는 논변이었네. 마음가짐이 마치 그물과 같아서, 큰 것을 잡는 데는 실로 명민함이 두드러지지만 정작 작은 것은 잡지 못하지.”

만약 이이가 정여립에게 유학 – 다른 이들은 몰라도, 이이는 이제 ‘정학(正學)’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 만을 가르쳤다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흠결이었다.

형이상(形而上)을 논할 때에는, 실로 이이 그도 가끔 찬탄할 만큼 과격하면서도 멀리 나가는 이야기를 내놓곤 하였다.

“발상 자체는 귀기울여 들을 만하고, 어쩌면 이 사람이 생각해낼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심원(深遠)하다 해야 할지도 모르네. 허나 그뿐일세. 듣기에 거창하고 좋기는 하지만, 막상 경세제민의 법도로 삼기에는 성긴 체보다도 더 빈틈이 많으니, 오히려 사민(士民)을 그럴듯한 말로 속이는 폐단이 더 클 것이야.”

“여기는 어찌 찾아오셨습니까?”

정여립이 당황한 저의 마음 가다듬을 겸 물었다. 헌데 답변은 엉뚱한 쪽, 그러니까 이이가 들어온 대문 옆 담장 쪽에서 나왔다.

“그렇게나 궁금하면야 알려주는 게 인지상정이렷다. 정말로 내가 네놈을 순순히 보내주리라 여겼더냐? 당연히 뒤에 사람을 붙여놓았지.”

담장 너머에서 불쑥 고개 내미는 것은 바로 임꺽정이었다. 훌쩍 담장을 넘으려 했는데, 뉘 잘못인지 담장이 영 부실하여 – 물론 담장 짓는 쪽에서는 임 당수 잘못이라 하겠지만 – 꺽정이 무게를 감당치 못했다.

“그, 집주인 여기 있으면 나중에 사업당으로 돈 받으러 오쇼. 혹시 모를까 싶어서 하는 말인데, 내가 바로 임꺽정이외다.”

민망하여 머리 북북 긁는 꺽정이 옆에 서 있다가, 담장이 무너지며 엉겁결에 그 모습 드러나버린 이탁오도 한 마디 했다.

“나는 탁오라는 사람인데, 그냥 심심해서 따라왔으니 다들 괘념치 마시오.”

그런 두 사람 보며 사색이 된 낯빛으로 황망히 좌고우면하는 서생들을 내버려두고 이이는 저의 할 말을 이어나갔다.

“언젠가는 인백 자네의 논변이 그나마 이 땅 위에 이룩할 수 있는 법도 안에 들지도 모르네. 자네가 철장에서 보았다는 개명된 역역(노동)의 모습이 오히려 한없이 조야한 것으로 보일 만큼, 만물을 다루는 술기가 발달한다면 말일세. 그러나 지금은 아니야.”

“어찌 그리 단언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야 자네가 삼락서원에서 참고하였던 그 많은 서책, 그 많은 도표와 총산(통계)이 모두 내 손과 내 머리를 거친 것이기 때문이지. 무엇보다도 지난 십여 년간 우리 조선국이 크게 흥성케 된 것은, 제도를 제대로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란 말일세.

물론 훌륭한 이들이 있어 시류를 훌륭하게 따르는 것도 맞지만, 결코 그것으로 인하여 만백성이 그나마 풍족케 된 것은 아니야. 그저 지난 수십 년간 무너지고 흐트러진 것이 빠르게 제자리를 찾았고, 또 이를 가능케 할 만큼 바깥 세상에서 금은보화가 들어왔기에, 마치 사람의 지혜로 나라와 백성을 융성케 한 것처럼 보일 뿐이지.”

정여립의 주장처럼, 사람의 지재와 노력만으로 나라의 물산을 진흥하고 만민을 배불리 살게끔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이 나라의 그 어떤 관아보다도 더 나라의 재정 – 조정 하나의 재정이 아닌, 나라 전체를 드나들고 머무는 금은의 추이 – 에 대해 많은 자료를 지니게 된 사업당의 장부에 따르면, 진상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허, 허나 일본국 구주 땅에서의 격물은...”

“그것도 마찬가지일세. 조세를 갑자기 줄이고 늘상 벌어지던 싸움을 그치니, 실제로 벌어져야 했을 것보다 빠르게 소출이 늘어나고 상인들이 더 많이 오가게 되었을 뿐.

자네가 자본을 주의로 하는 법도라 하였던가? 그 말은 취할 만하군. 이 ‘자본주의’ 법도가 이제 막 갖추어졌을 뿐이니, 말하자면 이제 막 새옷을 차려입어 장차 기워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겨우 추측만 할 뿐이라네. 그런데 어떻게 벌써부터 다시 새 옷을 사들일 궁리를 하겠는가?”

처음부터 정여립에게 불리하던 논쟁의 형국은, 어느새 삼락서원에서 강론할 때와 같이 변하여 정여립은 듣고 이이는 떠들게 되었다.

“더구나 아무리 나라의 상공(商工)이 예전에 비하기 민망할 만큼 그 규모와 정교함이 높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백성의 생업이라 하면 열에 아홉은 농(農)일세. 자네가 농사를 지어 보았는가? 농사짓는 백성들이 순순히 겨우 얻은 저들의 전답을 다시 관에 맡기려 할까? 관에서 농사를 어찌 지으라 명하든, 그러한 명은 그들의 귓바퀴에도 들지 못할 것일세.”

“율곡 네 녀석도 딱히 손에 흙은 안 묻히고 살지 않았더냐?”

“저는 얘기가 좀 다르지요. 다 아는 방편이 있습니다.”

천연덕스러움을 넘어, 마치 무슨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양 대꾸하니 딴지 거는 꺽정이가 도리어 민망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대동당을 지금 자네가 말한 당론에 입각하여 세우게 된다면, 다음 권점은 필패가 확정일 것이야.”

“어찌 그렇다고 단언하십니까?”

“노론 향반들이 그토록 재조론을 기껍게 받아들인 것은, 바로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이었지. 지금 자네가 내놓은 대동의 설도 과연 그렇게 받아들여지리라 믿는가?”

“예, 당연하지요.”

“그래, 자네 말대로 향반의 일부는 그러겠지. 가장 궁벽한 산골의 나무꾼도,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은 몇 년쯤 전에 진작 알아챘을 테니. 더구나 자네 말대로 화식의 기반을 모두 나라의 것으로 삼는다면, 그만큼 나라의 사족들이 나아갈 자리도, 휘두를 권병도 늘어난다는 뜻일 테니까.

허나 그 반대도 만만치 않을 것이야. 그렇게 되면, 다음 권점에서 이름을 무어라 붙이든 재조론을 지지하며 나선 당 하나에 뭉쳤을 삼남의 여론이 둘 또는 그 이상으로 쪼개지게 되겠지. 그리 되면 우리 민주당이든, 탕평당이든 손쉽게 낙승을 거두지 않겠는가?”

고양이가 쥐 걱정하느냐 비꼬기에는, ‘대동당’ 사람들 – 즉 이 자리에 모인 남루한 서생 몇몇 – 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지금껏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말은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권점이라는 말이 나온 뒤로는 금방 눈이 뜨인 것이다.

“제가 아는 선생이시라면, 아무리 어리석은 논변이라 할지라도 마냥 가로막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더 생각할 점을 짚어주시고, 또 더 열심히 궁구하라며 북돋아주시겠지요.”

결국 단념한 정여립이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지금 이 땅에는 적합치 않고 오히려 세론(世論)을 어지럽힐 논변이라 하지만, 그렇다 하여 아예 쓰임새가 없는 것은 아니라네. 들어보게나...”

기다렸다는 듯 이이가 말을 이어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론보에 글 하나가 실렸다.

삼락서원 원생 정여립이라는 이가, 경세제민의 새로운 법도를 고안하여 이를 세간에 널리 알리고자 하는데, 그 논변이 매우 길어 여러 편으로 나누어 싣겠노라는 공고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실린 글은, 딱 정여립이 주공동 구석에서 말하던 내용을 허리춤에서 끊어,

‘임 당수와 민주당이 새로 세운 법도는 참으로 좋으나 최선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밝히겠다.’

이렇게 마쳤다.

그리고 다음번 정론보에서는, 정여립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갓 시작한 연재를 중단하게 되었으며, 이는 정론보 측의 방침이 아닌즉 정 전말이 궁금하다면 한양 사는 임거정에게 물으라고 밝혔다.

(정론보 일을 맡는 조식은,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참견할 것이라면 숫제 경제사 은을 꺼내와서 저들 공론보를 인수해 버리라며 꺽정이 앞에서 한참을 투덜대었다. 결국 이지함이 저의 인맥을 동원하여 정론보에 좋은 글 여럿 실어드리겠노라 약조한 끝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잔뜩 궁금하게 해놓고 갑자기 ‘안 알려주겠다’ 하고 끊어버리는 격이었으나, 임거정 석 자가 나왔으므로 조선 안의 그 누구도 정여립이라는 처음 듣는 서생을 탓하지는 않았다. 보나마나 알면 다칠 법한 그런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들 여기고 넘어간 것이다.

반면 임거정 석 자로 인하여 오히려 더욱 궁금하여 견디지 못하게 되는 이들이 있었으니, 적어도 그 중 한 사람은 성이 장씨요, 명은 거정이었다.

“율곡 녀석이 간만에 한 건 했단 말이지. 그 정여립 놈은 암만 보아도 고집이 장난이 아닐 듯했는데, 그놈을 순순히 승복케 하였으니.”

양화진의 어느 평범한 주막에 걸터앉은 꺽정이가 말했다. 간만에 한가롭던 꺽정이는, 서림의 아랫사람 대신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탁오까지 데리고 이쪽으로 온 것이다.

“‘간만에 한 건’이라뇨? 모주 수산 선생 다음으로 온갖 책략을 다 내놓는 꾀주머니 아닙니까. 당장 규슈 격물부터 해서...”

“이번 일도 그렇다고 하려고 했지? 아니오. 이래 봬도 이번 계책의 발상은 바로 내가 냈거든. 살점이야 늘 그렇듯 사형이랑 율곡 두 사람이 붙였지만.”

엄청난 일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냥 주막에 앉아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다. 꺽정이는 국밥 한 그릇 시켜 말아먹고, 이탁오는 그것이 영 입맛에 맞지 않아 곶감이나 두어 개 사서 오물오물 먹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오가는 말도 실없게 되었다.

“에이.”

“속고만 살았나. 진짜라니까?

사형이랑 율곡 그이가 입을 모아서 저 정여립이 대동론이 아주 허술하다고 하는 것을 듣자마자 떠올렸소. 기껏 애써서 정여립이가 고안한 경제의 제도가 무엇인지를 찾아내었는데 막상 들여다보니 허점 투성이라고 하면, 장거정 그 사람도 어지간히 열이 뻗치지 않겠소?

나는 장거정을 화나게 만들었다. 장거정이의 칠정(七情)을 내 멋대로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웃어제낄 심산이었지.”

“정말 그런 심산으로 내놓은 계책이라면, 제대로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장 수보는 분통 터뜨리기는커녕 잘 되었다며 이 대동론을 저의 것으로 온전히 삼으려 할 텐데요.”

“그야 두고 봐야지. 허나 그리 된다면 우리로서는 더 좋지 않겠소? 적어도 우리 사형은 그럴 것이라고 단언합디다.”

티 안 나게끔 모든 수작을 다 부리며 양화진으로 찾아오는 동창 끄나풀들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꺽정이는 국밥을 후루룩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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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는 당대에 이미 동인과 서인 양측의 정치적 동인(및 선조의 천부적인 이간질 솜씨)에 따라 이리저리 왜곡되고 과장된 바가 많아, 오늘날에는 그 진상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내용과 주변 정황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의 추정은 가능하지요.

전주의 명문 출신인 정여립은 이미 열다섯 나이에 익산군수였던 아버지를 대신해 공무를 맡아볼 만큼 그 재능이 탁월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이 문하에 들어가 그 뛰어난 재주로 스승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원 역사에서 자신의 얼마 안되는 친우였던 성혼에 대해서도 선조 앞에서 ‘사람은 좋은데 총명은 (나보다) 부족하다’는 평을 할 만큼 ‘눈새’였던 이이가, 정여립에 대해서는 그 성정의 과격함 외에 다른 흠결을 지적하지 않았던 것만 보아도 정여립의 지재를 알 만합니다.

그 이후 정여립은 스승인 이이와 성혼을 정면으로 비판하여 동인과 서인 양쪽에서 인망을 잃었고, 우여곡절 끝에 벼슬을 버리고 진안 죽도(竹島)로 낙향하여 대동계를 꾸리게 됩니다. 대동계의 실체 역시 정여립의 사상만큼이나 알기 어려운데, 한편으로는 도사 지함두, 승려 의연 등 체제에 불만을 품은 방외인(方外人)들을 끌어들이고, 전라도 해안을 습격한 왜구를 격퇴할 만한 무력을 보유한 듯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호남과 영남 일대 사림들의 인망을 폭넓게 모으기도 했기 때문이지요. (이는 기축옥사 당시 이들 지방 사림이 큰 타격을 입는 화근이 됩니다.) 즉 그가 정말로 체제를 무력으로 전복하려 한 혁명가라고까지 볼 수는 없지만, 동시에 아무런 야심도 없이 대동계를 꾸렸다고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공익을 위한 계획경제 운영은, 의외로 그렇게까지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국익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국민의 복지를 증진한다는 발상은, 17세기 말부터 유럽 본토, 특히 독일 지역에서 발달한 관방학(官房學, Kameralismus)에서부터 나타납니다. 계몽주의와 절대군주정, 그리고 근세 중상주의의 결합이라 할 수 있는 관방학은, 영미권의 자유주의적 경제학이 영국의 패권 장악과 함께 주류로 굳어지면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지만, 여러모로 뒤쳐진 국력을 빠르게 발전시킬 필요가 있던 독일 지역에서는 일세를 풍미하며 후대의 행정학과 정치학, 경제학 등에 영향을 남겼습니다. 이미 어느 정도의 경제학적 사유가 자리를 잡게 된 작중 조선에서, 아직 초보적인 형태기는 하지만 이단아 기질이 다분한 정여립을 통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견주어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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