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09화 (209/259)

63. 도광양회 (2)

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땅에는 소주(蘇州)와 항주(杭州)가 있다는 유명한 속담처럼, 항주에는 유서깊은 명승고적이 여느 성(省) 하나를 합친 것만큼 많았다.

백거이(白居易)와 소동파가 가꾸고 또 노닐었으며, ‘백만의 사나이’ 마르코 폴로 또한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던 서호(西湖). 중원의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 앞에서 눈물 흘리는 악왕묘(卾王墓, 악비岳飛의 묘).

볼거리만 있느냐 하면 그 또한 아니어서, 그 향이 천하의 제일이라 자부하는 용정차(龍井茶)가 있고, 또 고려 성덕태자(聖德太子)가 남악존자(南嶽尊者) 혜사(慧思) 대사를 스승으로 모실 때 빚었다는 태자주(太子酒)가 또한 일품이었다.

강남과 해동 사람들이 황해 바다를 마음껏 오갈 수 있게 된 뒤로, 수많은 조선 선비들이 꿈으로만 그리던 이곳 항주에 찾아와, 명불허전이라 찬탄하고 간 바 있었다. 조선 선비들이 하도 많이 찾아왔기에, 이 무렵 항주의 어지간한 명승에는 어설픈 조선말로 조잡한 물건을 파는 행상들도 종종 생겨났고, 서호의 경치 감상하며 한시를 짓는 조선 선비들을 다시 구경하러 항주 주변의 향신들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항주에 얼마 전 찾아온 조선인 패거리에게는, 서호는 그냥 큰 물웅덩이요, 용정차는 쓰디쓴 물이며, 태자주는 그저 술이었다.

“다들 좀이 쑤시는 듯하더군. 기껏 신나게 분탕질하러 왔는데 잠자코 기다리고만 있으니, 있던 흥도 죄다 달아날 지경이오.”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당수. 장담컨대 제 말대로 하는 것이 더 효험 좋을 것입니다. 이왕 벌이는 분탕질, 하늘과 땅이 다시 닫힐 때까지 인구에 회자되도록 하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상 투메 호 대신 훨씬 덜 알려진 다른 배편으로 – 선장인 똑같이 핀투였지만 – 항주로 찾아온 꺽정이와 흑의군들은, 그저 도시 외곽의 어느 곳간에서 며칠째 허송세월만 하고 있었다.

함께 데려온 서해 아래의 뱃놈들은 이미 채비를 마쳤는데, 정작 이 계책을 처음 입안한 이탁오가 그새 더 떠올린 꾀가 있다며 그것 준비할 시일을 더 달라 하였던 것이다.

“일을 벌인 뒤에는 사리 썰물을 타고 잽싸게 빠져나가야 한다던데. 이대로 기다리다 보면 금방 조금이 되겠소.”

“조금이 아니라 숫제 밀물때 바다로 도망친다 한들, 소생 계책대로라면 그 누구도 바다에 눈길 돌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항주 전역의 곤극(崑劇) 광대들을 포섭하는 게 어디 하루이틀 사이 될 일입니까.”

그런데 때아닌 한숨이 옆에서 나왔다. 엉겁결에 이탁오 따라다니게 된 오승은이었다.

“어르신은 또 왜 그리 바닥을 꺼뜨리고 계시오?”

남경 오가던 소싯적부터 오어(吳語, 장강 하류 방언) 섞인 관화를 능히 구사할 수 있던 이탁오가 알아서 꺽정이 말을 옮겨주었다.

“그 계책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한숨부터 나오지 않는다면 그자야말로 광인(狂人) 아니겠습니까?”

“도적놈이 도적질하는 계책을 가지고 미친놈이라 한다면, 나중에는 농군이 농사짓고 장사치가 장사하는 것도 미쳤다고 부르겠군.”

이탁오와 임꺽정이 노리는 것은, 바로 항주 포구에 머물고 있는 배 여러 척, 보다 정확하게는 그 배에 실린 차와 도자기였다.

모두 오승은을 좌장으로 삼고 있는 불만 많은 신상(紳商)들이 해서에게 빼앗긴 물건으로 – 해서 본인이야, 그릇된 이득을 압수하고 올바른 재물은 공사의 벼슬로 값을 치루었다고 당당히 말하겠지만 – 레가스피와 해서의 교섭이 마무리되는 대로 주산 일대의 섬 중 한 곳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곳에 당도한 차와 도자기는, 미리 태평양 건너와 정박하고 있는 갈레온에 가득 실린 포토시 은괴와 교환될 예정이었다. 그렇게, 비록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어쨌든 향신들의 재산과 지재로 구한 귀한 물건들은, 두 대양을 건너 에우로파로 향하게 될 운명에 처했다.

“임 당수의 명성은 저 오 아무개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허나 항해의 사정은 뱃사람이 더 잘 알고, 특히 근해(近海)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대체 일을 벌린 뒤 어떻게 달아나실 심산이십니까?”

“그것은 어르신께서 걱정하실 일이 아니오. 다 대비하고 있는 바가 있다오.”

항주 앞을 흐르는 전당강은, 항주의 포구를 벗어나 소흥(紹興)에 이르게 되면 급격하게 넓어져 바다와 구분이 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민물과 짠물이 뒤섞인 채 바다로 흘러가, 남경과 소주를 지나 흘러나온 장강의 물과 합류하였다.

바로 그런 곳에 주산의 여러 섬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실로 바다의 요해(要害)라, 주변 강과 바다, 그리고 주산의 지리까지 모두 통달하지 않고서는 쉽게 뚫을 수 없을 터.

“달아나는 것이야 워낙 당수께서 가져오신 배가 훌륭하니 별 탈 없이 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그 뒤는 또 어찌하시렵니까? 설령 추격하는 수군을 따돌린다 할지라도, 그 이목까지 완전히 벗어나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우리 신사들은 귀국 조선의 헌법을 입에 담았다가 큰 화를 당한 처지입니다. 황상과 내각수보 장 대인이 공히 미워하는 당수와 우리들이 엮였다는 것이 들통이라도 나면...”

“우리가 알 바요? 뒷수습이야 어르신이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는 그냥 장작에 불 붙이고 떠날 것이오. 그 불 위에 생선을 굽든 고기를 굽든, 아니면 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든 그건 어르신네들의 몫이란 말이오.”

꺽정이가 사납게 오승은을 몰아붙였다. 아니, 몰아붙이는 시늉만 하였다. 당하는 오승은이라면 모를까, 곁에서 말 옮겨주며 지켜보는 이탁오 눈으로는 능히 분별할 수 있었다.

“사냥개조차 산짐승 다하면 그대로 솥에 들어가기 마련이오. 언제까지 나라에서 기르는 짐승으로 남을 것이오? 누가 나타나 팔자에도 없는 주인 시늉하며 먹이를 내민다면, 좋다고 받아먹을 게 아니라 먹이 주는 그 손을 물어뜯어야지.”

“허나...”

“그래, 어르신이 무슨 말씀 하시려는 줄은 내 알겠소. 저 바깥을 보아라. 저 바깥 저자 오가는 모든 백성 위에 드리운, 묵직한 먹구름을 보아라. 저것을 어찌 사람의 재주로 헤쳐낼 수 있겠느냐. 왜 나더러 그런 불가한 일을 맡으라 하느냐.”

정말 그 말을 하려고 했는지, 오승은의 반박하는 말이 뚝 끊겼다.

이탁오가 이미 글로 써서 전해주었듯, 이 나라의 향신들은 조정을 말 그대로 경원(敬遠)하였다. 그러므로 나라의 권세가 느닷없이 온 나라에, 은을 거간꾼으로 삼아 바짝 다가오니, 마치 뱀 앞의 개구리처럼 바짝 얼어붙을 수밖에.

그러나 조선국 임꺽정이는 이미 조선 안에서 그러한 일을 벌여 종국에는 나라 하나를 훔쳐낸 사내요, 장차 온 세상을 훔쳐내려 기꺼이 전란을 일으킬 사내. 그러한 사정은 이해해줄 마음이 없었다.

“애초에 나라가 무엇이기에 그대들이 이토록 두려워하는 것이오? 나라라는 물건은 대체 어디에 있소? 도대체 어떻게 생긴 물건이오?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고 사람이 있다고 믿으니 비로소 있게 된 것이지.

그러니 나는 그 허깨비를 무너뜨리려 하오. 그대들 중원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허깨비에 두려워하며 고개나 숙이고 있으니, 이제 그 목덜미 붙잡아서라도 머리를 들어올려 그것을 보게 할 것이오?”

“자, 자. 임 당수. 진정하시지요. 제가 마저 설명을 하겠습니다.”

미리 공모한 것처럼 – 실제로 그러기도 했다 – 이탁오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만약 장 수보의 대일통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어차피 나라의 모든 향신들이 휩쓸릴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고 숨막히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여 누군가 떨쳐 일어나게 될 것이요, 무슨 대계도, 거창한 세력도 없이 마구잡이로 일어나는 반발은 그저 불꽃 하나로 그치고 허무하게 잦아들겠지요.

우리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 아마 나라의 향신들도 지금은 그런 질문 자체를 차마 떠올리지 못할 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우리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회를 틈타, 때가 되면 이 나라 조정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세를 모으고자 할 뿐입니다.

청하고자 하는 바는 단 하나입니다. 며칠 뒤 우리의 계책이 이루어질 때, 선생께서도, 또 선생을 좌장으로 모시는 신사분들께서도 합류해 주십시오. 그 뒤에 마음을 정하셔도 늦지 않을 것이요, 장담컨대 그 뒤로 닥쳐올 후환은 이대로라면 언제고 선생들께 닥쳐왔을 우환보다 가벼우면 가벼웠지 결코 더 무겁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그 언변과 못된 짓 꾸미는 솜씨, 그리고 뻔뻔함으로 온 세상을 누빈 두 사람 앞에서는, 닳고 닳은 강남의 향신들조차 오래 버티지 못하였다.

응천순무 해서와 필리피나스 도독 레가스피는 마침내 만족할 만한 합의에 이르러, 사소한 세부사항 몇 가지만 남겨놓게 되었다.

조만간 이 교섭에 따른 첫 거래로, 항주 부두에 쌓여 있는 중화의 물산은 곧 저들이 ‘신주(新洲. 신대륙)’라 부르는 곳으로부터 나오는 은괴로 바뀔 것이었다.

마침내 종묘사직에 보탬이 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며, 해서가 관부에 돌아와 막 잠을 청할 무렵.

난데없는 아우성이 들려와 그 눈을 번쩍 띄웠다.

“이 무슨 일이냐?”

“그, 그것이...”

저보다도 더 경황 없어 보이는 관원 하나를 붙잡고 물으니, 차마 설명을 못하고 손짓발짓까지 곁들이다, 끝내 언어도단의 지경에 이르렀다.

저의 눈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겠다 싶어, 급히 의관을 마저 정제하고 관부 구석의 누각 – 통상 객을 접대할 때 쓰는 곳이었다 – 에 올라 바깥을 살폈다.

그리고 해서의 눈에 들어온 것은, 과연 어지간한 문재(文才) 없이는 형언하기조차 어려울 괴상한 행렬이었다.

대낮같이 환하게 밝혀진 거리에, 항주에 있는 모든 곤극 반사(班社, 극단)를 모아놓은 것과 같은, 우스꽝스럽고도 해괴망측한 행렬이 어기적어기적 나아가고 있었다.

삶에 찌든 늙은이 주공노생(做工老生)들이 술 취한 듯, 또는 과로에 지친 듯 비틀비틀 걸어가며, 춤인지 주정인지 의심스러운 춤사위로 휘적휘적 나아간다.

그 옆에는 어쩌다 행렬에 휘말린 진짜 학사인지, 아니면 창공노생(唱工老生) 배우인지 아리송한 자가, 광대들에게 둘러싸여 곤경에 처해 있다. 이쪽에서 옆구리 찌르고 저쪽에서 머리 위 관을 슬쩍 때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창공노생과 주공노생은 별반 다를 바가 없어졌다.

그뿐인가? 우르르 몰려가는 궁생(窮生)들은 부귀의(富貴衣)라는 우스운 별명 붙은 거지의 옷을 입고, 아마 가짜일 술병을 한 손에 든 채, 저들 구경하는 이들을 오히려 저들이 구경하는 것처럼 손짓하고 발짓하며 깔깔 웃는다.

그 좌우에는 어릿광대 축(丑)들이 시위하듯 지나가는데, 누구는 춤 추고 누구는 물구나무 서서 걸으며, 누구는 제자리에서 재주를 넘어 구경꾼들을 끌어모았다. 늙은이 분장을 한 노축(老丑), 진부한 유생의 탈과 망건을 쓴 방건축(方巾丑), 공경대부 흉내내는 점잖은 시늉이 도리어 우스운 포대축(袍帶丑).

“가자꾸나! 가자꾸나! 우리 것을 찾으러 가자꾸나!”

“가자꾸나! 가자꾸나! 옳게 되도록 만들러 가자꾸나!”

하나같이 짙은 분장을 하거나 우스꽝스러운 검보(臉譜) 탈을 뒤집어 써,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워낙 많은 이들이 동시에 외치다 보니, 말은 얼추 알아들을 수 있어도 그 말투가 남쪽 억양 섞인 관화인지, 강소성에서 쓰는 오어인지, 그것도 아니면 애초에 중원의 말 모르는 자가 어설프게 외워 떠드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광대들의 솜씨는 일견 낯설면서도 또 훌륭하니, 무슨 무대의 기교도, 교묘한 눈속임도 없이 오로지 몸의 완력만으로 행하는 재주넘기가 모두의 눈요기가 되었다. 저것이 바로 알프스를 넘어 파리로 향하는 길, 프로방스부터 일 드 프랑스까지 모든 농촌을 달구었던 흑의군 솜씨임을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그저 춤사위와 묘기에 눈이 팔리고, 또 거금을 약조받고 몰려든 항주와 그 주변 곤극 악단들의 시끄러운 연주 소리에 귀가 홀려, 어느새 어깨 들썩이고 입으로는 들려오는 노랫말 따라 부르며 우르르 몰려다닐 뿐.

어찌 좋지 않은가? 글을 아는 자들은 흥에 취하였다.

한없이 공명정대한 응천순무 대인이 한없이 지엄한 황명을 받들어, 한없이 지엄한 정령의 행사로서 그들의 지닌바 재산을 빼앗고 외려 감사하라 하는데, 그 답답함을 오늘밤만은 집어던지리라.

어찌 즐겁지 않은가? 글을 모르는 자들 또한 흥에 취하였다.

지금껏 그들을 괴롭히기만 하던 나라가 이제는 그들에게 베풀어주는데, 그 베풀어주는 것 또한 제멋대로라. 한편으로는 토지를 받고 은자를 받아 기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의 변덕으로 말미암아 얻은 재물 남의 변덕으로 말미암아 빼앗길 수 있음을 알기에 불안하였다. 그 불안을 오늘밤만은 떨쳐버리리라.

“이놈들, 이 무슨 짓이냐, 멈추어라!”

그 와중에도 녹봉을 허투루 받지 않는 관병들이 있어, 어디선가 홍병위 몇몇까지 대동하고 나타나 이들을 막으려 하였다.

허나 그 앞에 우르르 몰려나오는 일군의 광대가 또 있으니, 새의 꽁지깃털 두 가닥 세운 관을 쓴 치미생(雉尾生), 등 뒤에 대군을 나타내는 깃발 꽂은 장고무생(長靠武生), 흰 반점 검보 탈을 쓴 무술 하는 광대 무축(武丑, 무술 시늉을 하는 광대)들이었다.

“에잇, 안 되겠다! 우선 막아라! 피가 흘러야 비로소 관의 위엄을 알 것이다! 찌르되 죽이지는 말고, 이왕이면 때려눕히고 사로잡아라!”

심상찮은 기세에 한쪽이 먼저 칼 빼들고 창을 겨누니, 다른 한쪽에서도 똑같이 병장기 차가운 날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미, 항주 저자 전체를 무대로 삼아 펼쳐지는 이 즉흥 곤극에 매료된 백성들은 밤잠을 잊고 뛰쳐나와 함께 노닐고 있었으므로, 경악하는 소리보다는 좋은 구경 났다며 몰려오는 이들의 발소리가 더 우렁찼다.

거나하게 이 곤극에 취한 항주 사람들 눈에는, 섬뜩한 달빛에 번뜩이는 창칼마저도 극의 일부처럼 보일 뿐이었다.

“으라차!”

“하하, 한참 멀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마치 어린아이 장난하듯, 칼질 몇 번에 내지른 창대가 날아가고, 칼은 바닥에 박혔으며, 관군은 그대로 이 광대 행렬 속에 빠져들어, 마치 공깃돌 던지듯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 다니다가 길가에 그대로 떨어졌다.

모르는 이가 보면 한바탕 춤사위, 그러니까 고상한 춤이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광대 춤의 한 단락이라 볼 만한 구경거리였다.

“대인, 저들이 강가, 포구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막아야 한다! 군관들은 즉시, 모을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모아 저쪽으로 모여라! 저들이 무엇을 위하여 모였든, 조정의 뜻에 반하고자 하는 것은 확실하니 마땅히 대비하여야 한다!”

정신이 번뜩 든 해서가 군관들에게 명을 내렸다. 그러나 아무리 그 명이 명확하고 이치에 닿는다 한들, 정작 전령이 닿지 못하니, 북적이는 인파에 휩쓸려 사람이 도통 오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여기저기서 병력을 모아, 광대들의 흥겨운 곤극 행렬을 막아보려 해도, 결국 또 무축(武丑) 놀음 한 마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게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싸우며, 기묘한 행렬은 어느새 막 썰물로 바뀌어 전당강 강물이 바다로 밀려나가고 있는 부둣가에 당도하였다. 창고와 배, 부두 사이 공터에 행렬이 멈췄다.

차마 말로 드러내지 못할 방식으로 그들을 억누르는 듯하던 하늘이 오늘밤은 유독 가벼워 보였기에, 술 한 병 들이킨 것처럼 어깨 들썩이며 좌충우돌 따라오던 항주의 사민(士民)들도 그대로 섰고, 끝끝내 이 행렬 막아보려던 관군은 저들의 창칼 찾으려다 몰려드는 백성의 발에 손을 짓밟히기도, 떠밀려 강물에 빠지기도 하였다.

구경하는 이들이라고, 저 관군 때려잡는 광대놀음이 광대놀음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까?

항주에 터 잡고 살던 이들이, 이 행렬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면서도 따라왔을까?

누군가는 행렬에 휘말려 체통을 잃고, 누군가는 체통을 버리고 얼굴에 검댕 묻힌 뒤 행렬에 스스로 들어갔으며, 누군가는 이 모든 것에 취하여 술병을 들고 나와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모든 것이 뒤집혀, 어리석은 것이 현명함 위에 서고, 진지한 것은 경솔함 아래로 내려오며, 우스꽝스러움이 예절을 짓밟았다.

그간 눌려 있던 것이 사라졌다. 얼굴과 이름은 감추어졌다. 지켜야 할 법도가 오늘밤은 구름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으니, 무엇을 행하든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일 테다.

그렇다면, 이 광기어린 논리에 따르자면 평소에 관(官)이 민(民) 위에 서던 것도 뒤집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행렬은 항구에 닿아, 더는 나아가지 못한다. 멈출 수 없게 된 흐름이 이제는 한 곳에 고였으니, 쌓이고 쌓인 물이 강둑을 무너뜨리는 일만 남았다.

그러한 기대가 말없이 차오르므로, 심심하고 별 볼 일 없는 예순 평생, 무대 바깥에서 바라만 보며 살았던 늙은 선비는 검보 탈 뒤에 숨어 마침내 무대에 올랐다. 검보로 덮힌 그의 얼굴 알아보는 이 하나도 없지만, 그럼에도 관중은 환호로 맞이한다.

그가 수상쩍게도 친절한, 무축 분장한 젊은이들 부축 받아 오른 곳은 향신들이 빼앗긴 찻잎과 도자기로 가득한 여러 배 중 한 척의 갑판 위일 뿐, 번듯한 무대 축에 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뒤집혔고 또 뒤집힐 오늘 밤, 무대의 훌륭하고 형편없음 또한 뒤바뀌지 않겠는가?

눈앞에 펼쳐진 항주 사람들, 또는 한껏 밤에 취한 항주 그 자체의 모습. 밀물이 썰물로 바뀌어 물살 잦아드는 전당강에 좌우 뒤집힌 채 비치는 달빛.

그렇게 만사가 오늘 밤 비웃음 당하다 못해 반대로 뒤집힌다면, 어찌 보잘것없는 늙은 서생이라고 취하지 않을 수 있을쏘냐.

어찌하여 자신이 저의 붓 위에서 살아난 손행자와 같이 되지 못함을 한탄했다는 말인가. 어찌하여 저는 당나라 스님 삼장법사는커녕 사오정도 되지 못한다고 자조했다는 말인가. 이렇게 자신은 살아 있거늘.

제천대성 손오공의 꿈을 꾸는 늙은 서생이, 늙은 서생의 꿈을 꾸는 제천대성이 될 수 있으리라.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는구나 (日出而作 日入而息)!”

어디선가 들은 이황(二黃)의 곡조에 따라, 취한 마음 그대로 노래하니 나오는 것은 격양가(擊壤歌)라.

그러나 두드리며 노래할 땅도 없고, 위로 섬길 임금 도당씨(陶唐氏, 요임금)도 없으니, 노랫말의 뜻을 고루하게 – 또는 올바르게 – 해석하는 이는 없었다.

“중한 것은 재물도, 황제도 아니니, 오직 말 한 마디라! 황제의 힘이 대체 내게 무엇이란 말이냐 (帝力于我何有哉)!”

그 말 기다렸다는 듯, 마른 찻잎 가득 채운 배는 단숨에 장작으로 화하고, 불길과 밤의 어둠이 자아내는 음양의 조화에 매료된 이들이 부나방 되어, 광대와 별반 다를 것 없어진 채 광대와 함께 섞여 덩실덩실 춤춘다.

응천순무가 다 무엇이냐, 내각수보와 황제가 다 무엇이냐. 그 위에 어떤 신도, 주인도 없이 그저 불길 앞에서 춤추는 그들 자신뿐.

누군가는 휘왕께서 임하셨다며 좋아라 떠들고, 누군가는 저 배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저와 달리 배 곯지 않고 살았을 테니 꼴 좋다며 깔깔 웃고, 또 몇몇은 저 배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기에 오히려 더욱 기뻐하였다. 간혹 께름칙하게 여기는 이들 또한,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즐기고 보자며 함께 춤추었다.

이어서 연달아 장작으로 화하는 배가 여러 척. 불길 치솟을수록 관중은 환호하고, 더욱 기뻐 날뛰니 어느새 관중도, 광대도 사라지고 제멋에 겨워 춤추는 사람 하나하나만 남았다.

부두로 행렬과 관중이 몰려간 뒤 거리가 겨우 한산해져, 응천순무의 해서의 명도 그제야 겨우 그 목표했던 곳에 닿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나마 정신이나 몸이 멀쩡한 항주부 안의 관병을 소집해 해서가 부두로 달려가니, 저 바다 향해 빠져나가는 썰물처럼 다시 정신이 돌아온 신사와 백성들은, 저들 아는 이와 맞닥뜨리지 않기만을 바라며 얼굴 가리고 우르르 빠져나갔다.

이때는 이미 동이 터, 멀리 바다를 뚫고 햇빛이 슬그머니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 좋은 찻잎을 차라리 물에 빠뜨렸다면 모를까, 모조리 불살라 버렸으니 동해 용왕이 아쉬워하겠구나.”

이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가 불러온 허탈함으로, 심지어 어울리지 않는 농지거리까지 스스로 던지는 해서였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수면 위로 떠오르는 해가 그 얼굴에 볕을 비추자, 해서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대인! 큰일입니다! 난민(亂民)을 이끈 광대 몇몇을 붙잡았는데, 그들 중의 우두머리와 같은 자들은 저자로 도망치는 대신 이 부두에서 배를 훔쳐 달아났다고 하였습니다.”

“몇 척이나 훔쳤는지 찾아내고, 소흥과 가흥(嘉興)의 바닷가 마을로 사람을 보내 새벽에 고깃배 띄운 이들이 있는지 확인하여라. 그들이 배를 타고 달아나는 것을 눈으로 본 이들이 있을 터.”

두 가지 지시 중 전자의 답은 금방 얻을 수 있었다.

“그 짧은 겨를 사이에 배를 내어 바다로 나갔으니, 반드시 노련한 선인(船人) 여럿을 거느렸을 것입니다. 어쩌면 왜구의 잔당일지도 모릅니다.”

“그런가... 아니, 잠깐. 도둑맞은 배가 몇 척이라 하였는가?”

해서가 잠시 계산해보니, 무언가 이상하였다. 불타 가라앉은 배와 도둑맞은 배의 수가 같았다.

“즉시 주산으로 배를 띄워라! 도독 여씨(레가스피)에게 경고해야 한다!”

“어떤 경고 말씀이십니까?”

“놈들이 우리 관원으로 위장하여 은을 훔칠 수 있으니 대비하라고 전해야 한다. 이 일대의 물길에 가장 밝은 이를 찾아, 가장 빠른 배편으로 주산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이 일대의 물길에 가장 밝은 이는, 바로 주산 군도와 그 근방에서 해적 노릇을 했던 서해의 아랫사람들이었다.

해서가 급히 보낸 경고는, 항주에서 온 배가, 미리 차와 도자기를 실어주기 위해 왔으니 은을 전해달라며 바짝 접현하고는, 우르르 배에 올라타 안에 실린 은괴를 모조리 빼앗았다는 침통한 비보로 돌아왔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조선의 민주당이 개입하였을 공산이 아직은 낮다는 점이랄까. 은을 마구 실어 무거워진 배들이 동쪽이나 북쪽 대신 남쪽 바닷가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고 주산에서 급히 찾아온 레가스피의 수하는 밝혔다.

“사라진 배는 오랑캐 대선에 비하면 작고 가벼우니, 무거운 짐을 싣고 빠르게 움직이지는 못할 터. 이제라도 배를 내어 그 뒤를 쫓으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영파(寧波)와 태주(台州), 온주(溫州)에도 급히 사람을 보내라! 절강순무에게는 내가 직접 글을 보내겠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은을 훔쳐 달아난 문제의 배들은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기껏 아카풀코에서 대양을 건너 이곳까지 도착한 은괴 역시 찾아낼 수 없었다.

배들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남쪽으로 향하던 배들이 오직 일대의 해로를 몸으로 꿰고 있어야만 가능한 항해술로 주산 앞바다의 섬그늘에 슥 숨어들었기 때문이요, 곧 다른 섬의 그늘진 곳에 숨어 있던 다른 배와 만났기 때문이었다.

사라진 은괴를 찾을 수 없던 것은, 그렇게 은괴를 넘겨받은 자유민주당 소속 내선들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주산 군도를 빙 돌아 항주로 입항하였고, 사업당과 자유민주당 분주(分主, 주주)들에게 지급할 수익이라면서 은괴 담긴 궤짝을 부둣가에 내려놓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어수선하냐고 태연히 묻는 것은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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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와 항주 두 도시는 예로부터 중국 강남 사대부 문화의 모든 것이 집약된 것으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사유 세계 속에서 하나의 도원향을 이루었습니다. 작중 언급된 항주의 명승과 음식들은 명대는 물론이요 민국 초까지도 항주의 대표적 볼거리와 먹거리로서 관광객들을 끌어모았지요 (최해연, 2016. “20세기 초 조선인의 중국 여행기록을 통해 본 근대적 명승(名勝)의 변용- 소주․항주를 중심으로”, <동북아문화연구> 48). 여담으로, 항주 태자주 전설에 등장하는 ‘고려 성덕태자’는 실제로는 일본의 쇼토쿠 태자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본 내에서 중국 문물 수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든, 아니면 당시 막 율령국가로 발돋움하던 야마토 정권에 ‘외국인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서든, 당시에 쇼토쿠 태자가 천태종의 2대 조사인 혜사 대사의 속가 제자 또는 환생이라는 전설이 중국과 일본 양측에 널리 퍼진 바 있었지요. 헌데 정작 그로부터 일천여 년이 지난 뒤에는 ‘고려 성덕태자’로 전해지게 되었으니, 일본 쪽에서는 억울한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곤극은 원대 잡극(雜劇)의 뒤를 이어 중국 강남, 특히 강소성 일대에서 등장한 공연예술 양식입니다. 청대에는 이 곤극을 대중화한 경극(京劇)이 북경 일대에서 등장하여 전국적인 인기를 끌게 되지요. 경극이 크게 흥행한 이후에도 곤극을 비롯해 사천, 광동 등 각지에서 발전한 공연예술은 그 명맥을 이어갔지만,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그나마 일부분이라도 살아남은 경극과는 비교를 불허할 만큼의 타격을 입게 됩니다.

우리가 ‘경극’이라고 하면 쉽게 떠올리는, 각 인물의 성격에 맞추어 정형화된 분장은 이미 송대부터 출현하여, 명~청대를 거치면서 더욱 정교해졌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러한 분장은 인물의 성격과 역할을 명시하여, 보는 이들이 줄거리와 각 인물의 역할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 기능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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