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10화 (210/259)

63. 도광양회 (3)

중원과 해외(海外) 오랑캐를 잇는 이 동쪽 바다 위에서는 예로부터 해적선과 상선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아, 그 배에 실린 물건이 처음부터 저의 것이었다면 상인이요, 도중에 주인 바뀌었다면 해적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왕직의 아래에 있다가 서해의 아래로 들어온 옛 왜구 역시, 잔뼈 굵은 해적인 동시에 중원 앞바다의 사정에 누구보다 밝은 뱃사람이었다.

약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점잖게 잠상(밀무역) 노릇도 하고, 또 여차하면 둘 사이에서 오락가락 역할을 바꾸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핀투 선장이 직접 상 투메 호를 몰고 서해 아래의 해적들을 이곳 주산 앞바다까지 데려온 것도 이를 위함이었다. 장차 뭍과 바다 양측에서 닥쳐올 저쪽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잘 아는 해로일지라도 한 번쯤 형세를 미리 살펴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 찾아볼 해로는 다 찾아보았고, 실제로 에스파냐와 명의 전선들을 따돌림으로써 아직 그들이 해안의 수로에 익숙함을 입증하였으며, 항주를 발칵 뒤집어놓는 일도 끝났다.

그러니 지금은 후일을 논의할 때였다.

“천조 대명의 백만 정병은 모두 뭍에만 있으니, 바다 위는 무주공산입니다.”

포토시 은괴 담긴 궤짝이, 원래 그것이 가야 했을 관부(官府) 창고 대신 부둣가 으슥한 쪽의 허름한 곳간으로 옮겨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오승은에게 이탁오가 말했다.

“다만 걱정되는 바는 에스파냐, 그리고 잠시나마 저쪽에 넘어간 말라카 통해 들어올 포르투갈 양측의 수군입니다. 들리는 말로는 양측 모두 국운을 걸다시피 하며 배를 쏟아붓고 있다더군요.”

지중해와 인도양을 바쁘게 오가는 ‘리즈’로부터 닿은 소식에 따르면,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조카이자 한때 제위를 위협하였던 펠리페에게 기꺼이 제국 내에서 전비를 조달하는 것을 허용해주었다 하였다.

푸거(Fugger) 가를 필두로 하는 알레마니아(독일)의 은행가들은, 이미 한 번 에스파냐의 빚잔치에 호되게 당하여 그간 사들인 채권을 헐값에 이탈리아에 넘겨야 했다. 그러나 이대로 이탈리아가 오스만 투르크의 손을 잡고 승승장구하게 될 경우 그들은 영영 이탈리아를 제칠 수 없음을 짐작하였기에, 황제의 부추김에 기꺼이 응하여 마지막 남은 금은을 박박 긁어모으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도 부족한 부분은, 아마 지금쯤 압스부르고 왕실의 것이 되었을 리스본의 금고와, 펠리페의 으뜸가는 장군 알바 공작이 손수 총독으로 부임해 쥐어짜고 있는 저지대, 두 군데에서 벌충할 수 있을 테다.

그렇게 뜯어낸 금은이 조선소로 흘러가면 갈레온이 되고, 철공소로 흘러가면 대포가 되며, 에기토(이집트)로 흘러가면 맘루크 반란군이 될 것이었다.

오승은은 낡은 궤짝 위에 걸터앉아 이탁오의 말을 가만 듣고 있었는데, 가뜩이나 늙은 몸으로 어젯밤의 흥분을 감당하느라 기진맥진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온 몸의 기력을 모아 경청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에스파냐가 어쩌고, 포르투갈이 저쩌고 하는 말이 머릿속에 오래 머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이 늙은이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요?”

이번에는 꺽정이가 마치 동네 마실 다녀오자고 말하는 것처럼 범상한 말투로 답했다.

“별 건 아니고, 그냥 어르신과 어제 함께 노닐었던 항주 백성들처럼 관이 저들 머리 위에 서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꼬락서니에 신물이 난 이들을 한데 모으면 되오.”

암만 생각해도 별것 맞은 듯한데 별것 아니라 우기니, 오승은은 또 한 번 머리가 핑 도는 듯했다.

“물론 여기 항주에서만 할 게 아니라, 강남 전역을 다 아울러야 할 것이오. 여차하면 저기 광동이나 멀리 호광(湖廣, 호남과 호북), 사천까지 하면 더 좋고.”

“그러니까 역당(逆黨)을 하나 꾸리라는 말이로군요. 예순 평생, 쓰임을 얻기를 바라며 살았건만 이렇게 될 줄은...”

“역당이라니? 그런 시시한 것은 꾸려서 무엇 하시려오? 뭐, 북경의 장 형이야 어르신이 꾸릴 무리를 일컬어 역당이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 이상이오.

중원 사천 년 역사에 세 척 검 들고 일어나 천하를 얻으려고 날뛴 놈팽이는 널리고 널리지 않았소? 이제는 누군가 새로운 방도를 보여줄 때도 되었다, 이 말이오.

다들 위에서 무어라 하면 죽어라 따르기만 하니까, 그냥 백성이건 가볍게 보는 것 아니겠소? 본때를 보여줘야지.”

그러면서 임거정과 이탁오 두 사람은 곧 닥쳐올 거대한 전란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대명과 한때 그 제일가는 번국이었던 조선이 부딪히고, 그 벌어진 틈 양쪽에 나머지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줄지어 다투는 전란.

처음 수 년, 어쩌면 수십 년은 조선이 이기고 또 이기겠지만, 종국에는 상처뿐인 승리일지언정 명이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

그러나 설령 명이 이긴다 할지라도, 그 승리는 황제와 조정의 것일 뿐, 명의 수많은 백성과 선비들의 것은 아닐 터였다.

“저희가 바라는 것은 무슨 병장기를 들고 궐기해 달라,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모으고 모아, 더 이상은 관의 횡포를 참지 못하겠다 싶을 때 함께 일어나 달라는 것입니다. 더는 참지 않을 것이니, 바라는 바가 있다면 먼저 우리가 바라는 바를 내놓으라 외치면서요.

서생 한둘이 모이면 고작해야 관부 앞에서 벌어진 한 토막 소란으로 그치겠지만, 서생 일이백이 모이면 부(府) 하나쯤은 흔들 수 있을 것입니다. 서생이 모자라다면 뜻있는 백성까지 모으십시오. 그리하여 일이만을 모으면 창 한 자루 들지 않아도 성 하나를 뒤집을 수 있고, 백만쯤 모으면 어디 천자의 나라라 한들 배기겠습니까?”

어젯밤 흥인지 광기인지 모를 그 기운에 가득 차 있던 때의 그에게 묻는다면, 저 말 옳다며 와하하 웃으면서, 곧장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답과 더불어 마음속 다른 구석에서 튀어나오는 의심이 한 발 앞서나왔다.

“내 비록 일평생 책상물림으로 살아온 백면서생이라지만, 관을 대하는 일이 그리 녹록치 않음은 알고 있소이다. 하물며 백만 인을 모으라니, 이 무슨...”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일을 꾸며주었지 않소? 벌통을 발로 뻥 차주었으니, 벌에 쏘이기 싫어서라도 알아서 달음박질 치게 되겠지.

간밤에 어르신께서 신나서 노래부르고 춤추는 것 다 보았소. 얼핏 보니, 함께 탈 쓰고 얼굴에 분칠한 다른 서생들도 마찬가지로 한껏 즐기더군. 결국 관의 면상에 침을 뱉은 것과 같이 되었으니, 관으로서는 가만 있을 수 없소. 해서 그자가 원하든 원치 않든, 팔뚝 걷어붙이고 애먼 사람 때려잡으러 몽둥이 들 수밖에.”

꼭 해서만큼 지재 있는 이가 아니더라도, 천조의 지방관쯤 되는 이라면 능히 범인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은괴를 훔친 배는 주산을 거쳐 남쪽으로 달아나, 마침내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므로 범인은 항주에서 남쪽에 있는 절강성이나 복건성 일대 항구의 유력한 자들 – 대개는 해금령이 풀린 이래 재산과 명성을 불린 호상(豪商) 무리일 테다 – 과 결탁하였거나, 아니면 에스파냐 수사(水師)마저 능히 따돌릴 수 있을 만큼 주산 일대의 바닷길에 익숙한 자들일 것이다.

항주의 무엄한 무리가 공모하여, 저들의 재산을 빼앗은 관을 원망하는 마음에 이러한 일을 벌였을 공산이 하나요, 항주의 사람들이 먼저 의심받을 것을 예상하고 엉뚱한 자들이 도적질에 나섰을 공산이 또 하나였다.

설령 항주의 백성들이 무고하다 한들, 응천순무 해서는 가만 있을 수 없었다. 만에 하나 해서가 ‘해청천’이라는 별명이 어울리게 현명한 처분을 내린다 한들, 관이 겉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강남 전역으로 퍼진 소문은 어쩔 수 없을 것이요, 다른 성과 부군현의 지방관들 또한 소매를 걷어붙여야 할 것이다.

이미 한 번 터져나온 민심의 편린을 보았으므로, 무언가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면 내각수보 장거정이 유왕의 이름으로 내세우는 대일통의 대계를 이루는 데 발목을 잡힐 수밖에 없었다.

항주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일이 그들 고을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면, 어느 누가 기꺼이 그 공사에 저의 토지나 은자를 바치려 할 것이며, 또 어느 누가 자칫 관의 앞잡이로 몰려 몰매맞을 수 있는 홍병위를 하러 나서겠는가?

“기어이 누군가는, 조금이라도 불만 품었을 법한 자들을 숫제 먼저 때려잡으려 나설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그런 처분이 내려지면 다른 지방관들도 손속을 아끼지 못하겠지요.”

“어르신은 그들을 모으시기만 하면 되오. 이미 우리네 당에서 격물한 것을 두고 경세의 이치에 대해 볼멘소리하는 사대부들이 이곳 강남에도 많다 들었소. 관에게 잔뜩 당하여 봉두난발 패가망신 신세 된 이들을 모아들여, 때가 되면 일시에 우르르 들고 일어날 수 있도록 채비를 마쳐두시오.”

이탁오와 임거정이 번갈아가며, 수상쩍게도 유창하게 그들의 계책을 풀어놓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처음부터 저들이 항주의 사람들을 마음대로 이용하였노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옛날 헌법의 일로 북경에 상경했을 때부터 어젯밤에 이르기까지. 비록 남에게 놀아났다 한들 놀아나기를 선택한 것은 바로 오승은과 수많은 신사들의 마음, 숨 트이고 살기 좋은 세상을 바라는 마음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런데, 해 대인을 비롯하여 지방관들이 이번 일을 불문에 부친다든가, 아니면 민심을 직시하여 그간의 잘못된 정사를 바로잡겠노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하,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니 염려 마시오. 북경의 장 형은 앞으로 더 신사들을 쥐어짤 수밖에 없을 게요. 에스파냐 배들 통해 은이 들어와야 할 텐데, 그것을 누군가가 계속 얌체같이 중간에 끊어먹을 테니까.”

“그렇습니까? 하지만 방금 전 여기 탁오 선생이 말하기를...”

“에스파냐 놈들? 뭐, 바다 위에서든 땅 위에서든 제법 대단하긴 하지. 허나 숫자 앞에 장사 없지 않겠소? 중원 바닷가 어디든 우리 당을 따르는 해적 무리가 가득 차게 되면 암만 잘난 에스파냐 배라도 한 서너 척 중 한 척쯤은 털릴 수밖에 없을 것이오.”

그렇게 많은 해적을 어떻게 끌어모을 것이냐 하는 물음은 굳이 꺼내지 않는 오승은이었다.

그러므로 이 무렵 자유민주당 영수 서해가, 그의 상전 임 당수로부터 전해받은 신묘한 설득의 방법을 동원해 말라카에서 팽호(澎湖)까지 한인(漢人)의 피 섞인 도적들을 모조리 끌어모으고 있다는 것까지는 듣지 못했다.

그 신묘한 설득의 방법이란, 꺽정이가 그 옛날 황해도에서 의민당 모을 때 썼던 비법으로, 말 아니 듣는 도적들이 말 들을 때까지, 그 막힌 성정을 우직한 힘으로 두들겨 틔워주는 것이었다.

아무리 큰 이득을 약속해도 해적이란 족속은 배신을 밥 먹듯 하는 무리라 – 그 밥을 지을 때 어떤 쌀을 쓰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 – 쉽사리 따르지는 않을 터. 대신 칼밥깨나 먹은 시마즈 무사들을 고용한 뒤, 해적들 근거지에 찾아가 적당히 화포와 칼날로 어루만져주면 금방 고개를 숙이게끔 할 수 있었다.

대양을 누비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해군도 쉽사리 못할 일이요, 몇십 년 뒤라면 모를까 지금은 분명 명보다도 강성하다 단언할 수 있는 조선 수군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처음부터 해적이었던 서해의 무리들에게는 여느 해안의 진보(鎭堡)를 함락시키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 같은 해적 털어먹는 짓거리였다.

“그리고 그렇게 턴 은은 그대로 항주나 다른 강남의 바닷가 항구에 들어와, 어르신네 벗들 손에 넘겨질 것이오.”

“말하자면 도광양회(韜光養晦)랄까요. 우리는 번뜩번뜩 빛나는 은괴를 중간에 슬쩍해 그 빛을 감추고, 선생께서는 어둠 속에서 동지를 규합하는 셈이니까요.”

물론 레가스피도,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도 현지 물정을 모르지 않아, 마닐라 한 곳은 벌써부터 엄청난 예산을 들여 요새화를 하고 있었고, 그곳에 딸린 전함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고 결전을 벌여야 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함부로 해적 소탕에 나설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백성에게 은과 토지를 흩뿌려 민심을 얻으려는 장거정의 계책은, 당초 계획보다도 향신들에게서 더 많이 빼앗아야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교역을 통해 은을 불리는 길이 다는 아니어도 삼분지일 정도는 막힐 테니.

“자, 여기까지 입 아프게 설명해주었으니 이제는 마음을 확실히 정해주시오. 우리와 함께하시겠소?”

지금껏 손짓발짓 열심히 하며 이야기 늘어놓던 꺽정이가, 은괴 든 궤짝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그 덕에 오승은과 눈높이가 그나마 가까워져, 정신 없던 어젯밤 이후로 처음으로 서로 직시할 수 있었다.

어젯밤 일을 몇 번이고 되새기며 오승은이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눈앞의 장사가 자신이 지금껏 보았던 그 어떤 사람보다도 대단한 힘을 지녔다는 점이었다. 황제나 고관의 권세와는 다른, 비유하자면 마치 태풍이나 해일과 같은 그런 힘.

그러므로 오승은은 곧 나올 말에 공손히 귀를 기울였다. 이미 한 번 발을 담근 이상 빠져나올 수는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무치는 깨달음도 있었으니, 불타는 배 앞에서 항주의 사민(士民)과 함께 춤추던 어젯밤이,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짧지 않은 세월 중 참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던 유일한 밤이었던 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지 않습니까? 구태여 물으시는 것을 보니 임 당수도 참 뻔뻔하십니다그려.”

오승은 입가에 어린 미소의 뜻을 알아본 꺽정이가, 가볍게 대꾸했다.

“그런 소리 많이 듣소.”

항주에서 배를 불태우고 은괴까지 훔쳐 달아난 흉적(凶賊)은 분명 동쪽도, 북쪽도 아닌 남쪽으로 도망쳤다 했다. 급히 그 뒤를 쫓아 항주 남쪽, 절강과 복건의 바다를 뒤졌으나 이미 배는 –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그 위에 실린 은괴도 함께 – 종적을 감춘 뒤였다.

허나 아직은 수습할 수 있다. 장거정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해서 또한 항주 전역에 피바람을 몰기보다는,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레가스피와의 협상을 마무리 짓고 대신 암암리에 사람을 풀어 그 한없이 무엄한 난행(亂行)의 배후와 진상을 밝히고자 하였다.

물론, 그 결론이 어찌 나올지는 장거정도, 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필시 어떤 식으로든 임거정 그자가 관여했을 것이다. 설령 관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항주로부터 이 소식을 듣는다면 어떻게든 제게 유리하게 써먹을 방도를 모색할 것이므로, 관여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셈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금상 천자로부터 입궐을 명 받아, 자금성의 휑한 옥돌 바닥을 밟고 나아가는 장거정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이었다.

“한 번 좌도(左道)에 빠지게 되니, 고작 한 걸음만 내딛어도 한 장(丈) 깊이 수렁에 빠진 것과 같이 되는구려.”

그 생각의 일부가 조금 부풀어올라, 농담 내지는 한탄 비슷한 단상(斷想)으로 빚어져 장거정 곁에서 함께 걷던 풍보에게 향했다.

수습할 방도야 뻔하였다. 임거정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헤아리고, 그가 가장 원하는 일의 반대로만 행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지금의 장거정과 그의 당여들이 감당할 수 있는 대안인가?

대일통을 외치면서, 이것이 중화의 위명뿐 아니라 그 중화를 이루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모두 이롭다는 것을 설득시키는 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하물며 임거정과 그의 흉당이, 장거정의 하는 일 하나하나마다 딴지를 걸어, 그가 내놓는 문장 한 마디에 의심하는 자 수백이 붙게 만들었으니, 이제는 사대부들을 억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정의(情誼)는 상할 대로 상하였다. 항주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해서가 담담하게 올린 보고대로라면 – 장거정은 그것이 참에서 털끝 한 올만큼도 벗어나지 않았으리라 굳게 믿었다 – 비단 신사들뿐 아니라 오직 코앞만 보고 사는 어리석은 백성들조차 조정이 저들을 억누른다 여기는 듯하였다.

“어찌 그것을 좌도라 하십니까. 지금의 시국을 보면, 오직 우리가 나아가는 길만이 정도(正道) 아니겠습니까. 만약 저희 환관들이 감히 군상(君上)의 뜻 외에 사사로운 생각을 품는 것을 허여받는다면, 아마 소관뿐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여기며 수보 대인에게 찬동할 것입니다.”

그 말대로였다. 명과 조선을 가르는 선, 이 천하를 어찌 다스리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물과 기름처럼 반대되는 두 논변.

황제라는 지엄한 두 글자에 기대어 삶의 의미를 얻고 권세를 얻으며, 어쩌면 삶 그 자체를 얻는다 해도 무방할 환관들에게 있어 조선의 민주당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렇지. 정도라... 덕분에 생각이 조금 정리되는구려.”

홍병위. 그 옛날 몽고 오랑캐를 몰아낸 홍건(紅巾)의 당을 떠올리게 하는 붉은 완장. 그들이 답이었다.

관의 힘으로 불평하는 어리석은 선비들을 모두 억누를 수 없다면, 백성을 끌어들이면 그만이었다. 재물이나 관직으로 달래야 하는 향신들과는 달리, 백성들은 알량한 권세 조금, 재물이라 하기도 민망한 곡식 약간으로도 끌어들일 수 있었다.

해서가 내려가 있는 응천부와 강소성 일대를 시작으로, 농리공사와 상행공사가 널리 퍼지게 되면, 그만큼 거기 몸담으며 더욱 풍족한 삶을 누리는 백성들도 늘어날 것이다. 향신들의 마음이 대명 조정 대신 다른 쪽을 향한다 한들, 그렇게 새로운 체제 아래서 더 나은 삶을 노리는 자들이 새로운 간성(干城)이 될 것이다.

그러한 공사들이 뜻한 만큼 실적을 내지 못하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그 전에 민주당을 무너뜨리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늦어도 수 년 내로 결착을 본다면, 그때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통해 들어올 부(富) 역시 오롯이 대명의 것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요, 온 인민에게 고루 나누어줄 만큼의 풍족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태감에게는 항상 고마울 따름이오. 큰 신세를 졌소.”

“이미 같은 배를 타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도 아니요, 다 같은 대명의 신하일진대, 항상 마음을 같이 해야겠지요. 이 천한 사람이, 일인지하 수보 대인을 위하여 하찮은 거울 노릇이라도 해드릴 수 있었다면 이 또한 광영이 아니겠습니까.”

풍보가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황상께서 기다리시는 어전에는, 장거정 홀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내각수보 장거정 입시이옵나이다!”

풍보의 눈빛 받은 내관이 목청을 높였다.

‘들라 하라’라는 옥음이, 작지만 또렷하게 들렸다. 평소라면 웅얼거리는 정도로 그쳤을 터.

그러나 장거정은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전각 안에 들었다.

“짐이 어찌하여 너를 불렀는지, 거정 너는 알 것이다.”

단 한 번도 더듬지 않고, 질타하는 말씀이 이어졌다.

“네가 내각수보의 중임을 맡은 이래로, 짐의 위엄은 나날이 떨어졌으며, 짐의 뜻은 천안문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반역의 마음을 품은 번국 하나 다스리지 못하였으며, 이제는 짐의 백성들마저 감히 천조의 지엄한 행사를 가로막게 되었다. 거정 너는 할 말이 있느냐?”

공손히 부복하며 고개를 조아린 장거정이, 그 말에 고개를 살짝 들며 우렁차게 답했다.

“죽어주시옵소서, 폐하.”

“네 죄를 네가... 아니, 무어라 하였느냐?”

“신은 잘못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황상께서 들으신 바 그대로 답하였나이다.”

죽여달라 하였다. 아니, 죽여달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에서인지 오늘따라 청명하니 잘 들리는 귀는, 황제 주후총이 들은 바가 거짓 아님을 여실히 알려주었다.

그 옛날, 저를 베개로 누르며 침상에서 죽이려 하였던 천한 궁녀들조차 저토록 무엄하지는 못하였으리라.

“네가 정녕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게로구나! 그렇다면 짐이 두렵게 만들어주겠다.”

“황상께서는 어찌 그리 말씀하시는지요? 신은 황상의 분부를 모두 받들었나이다.”

이제 장거정은 고개를 완전히 들었고, 부복하였던 몸은 슬금슬금 올라와, 마치 황제를 무릎 꿇은 채 직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신의 대계가 완수되면, 이 나라 대명은 물론이요 이 지구 위의 그 누구도 황제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말 한 마디로 천하를 뒤흔드는 그 위엄에 뭇 생령이 두려워할 것이요, 그 굳건한 예지(叡智)는 삼재(三才)를 능히 꿰뚫을 것입니다.

또한 신은 황상의 다른 명 또한 추호의 거리낌 없이 받들었나이다.”

엄숭이 죽자마자 장거정의 스승 서계는 황제 주변의 도사들을 모두 죽이거나 쫓아냈다. 그러나 장거정은 다시 황제의 곁에 도사를 들였다.

“황상께옵서는, 그간 거짓된 도사들의 좌도방문 술책으로 말미암아 옥체가 상하였으니, 속히 이를 고칠 방도를 마련하라 명하셨나이다. 그리하여 신은 그 명을 따랐습니다.”

도사들은 황제의 명을 충실히 따랐다. 의심이 들 때는 장거정과 풍보의 명을 다시 받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황제에게 약을 지어 바쳤다. 말더듬은 사라지고 대신 며칠간 이어지는 광증이 찾아왔다. 그러나 적어도 닷새에 하루쯤은 정신이 아주 명료하였다.

“... 그리고 그 닷새는 다시 열흘이 되고, 보름이 되고, 한 달이 되었나이다. 항주 고을에서 응천순무의 치주(馳奏)가 당도한 것은 한 달 보름 전이었나이다.”

이제 그 누구도 황제가 언제 광증에 시달리고 언제 그 정신이 명료한지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황제가 어떤 명을 내리든, 한 번쯤 의심하고, 그 뒤에는 풍보 – 그리고 그 뒤의 장거정 -에게 어찌해야 할지 묻곤 했다.

“그리고 광증과 더불어 옥체는 나날이 쇠하였나이다.”

그 몸은 벌벌 떨지는 않지만, 애초에 벌벌 떨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제야 황제는, 저의 주변에서 마지막으로 거울을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못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여, 다시 한 번 청하겠나이다. 폐하, 죽어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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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수군은 이론상으로는 당대 최대의 규모로, 홍무 연간의 편제에 따르면 총 56개 위(衛)에 병선 2천8백 척, 수군 28만 명 규모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그 직후 해금령이 내려지면서 해군력 역시 등한시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정화의 대항해에서 드러나듯, 원양항해가 가능한 대형 정크선의 건조는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정작 해군력 자체는 답보 또는 퇴보를 거치게 된 것이지요. 그 결과 중 하나가 이전에 종종 다루었던 가정왜구의 창궐이었습니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종종 동남아 지역에 대한 군사개입까지 할 수 있었던 명의 수군은 이 무렵에는 허울만 남았고, 소형선 중심이었던 당대 일본과 대략 비슷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융경~만력 연간에 들어와 명의 군사력이 일신되면서, 명 수군 역시 빠르게 옛 위상을 회복합니다. 그간의 쇠퇴는 부패와 예산 부족으로 인한 것이었지, 결코 조선 전통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17세기에 들어서면 기존의 정크선의 개량과 화약무기의 보다 적극적인 도입 등이 이루어지면서, 당시 남중국해와 대만까지 진출했던 VOC와도 자웅을 겨룰 만한 수준까지 올라옵니다. 이렇게 양성된 수군은 훗날 정성공이 대만을 점령하고 수십 년 동안 청을 괴롭힐 수 있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었지요.

멕시코와 에스파냐 현지에서는 주로 ‘중국 배’라고 불렸던 마닐라 갈레온은, 필리핀 도독령의 핵심 거점 마닐라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의 아카풀코를 잇는 왕복 항로를 오간 무역선을 말합니다. 무역풍을 타고 멕시코에서 마닐라로 온 뒤, 편서풍을 타고 다시 멕시코로 귀환하는 이 항로는 (당시 기준으로) 매우 빠르고 비교적 안전하게 대규모 교역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지요.

이전 화에서 종종 언급되었듯 명은 만성적인 은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포토시 은광의 은을 그대로 명까지 옮겨오기만 해도 두 배 남짓한 차익을 얻을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에스파냐는 주로 복건 일대의 상인들과 교역하며, 차와 도자기 등을 싣고 멕시코로 돌아갔고, 이러한 귀중품은 다시 대서양을 거쳐 유럽으로 넘어가곤 했습니다. 중국산 물품의 값어치가 떨어질 것을 염려한 에스파냐 상인들의 청원으로 인해, 마닐라 갈레온의 항해는 1년에 두 번으로 제한되었고, 이후 멕시코가 독립하고 영국이 해양패권을 장악할 때까지 에스파냐 경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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