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천하포무 (2)
난데없이 어소 안으로 뛰쳐들어간 저의 주군 임꺽정을 따라 겨우 뛰어들어가, 이미 근위하는 무사 여럿이 땅바닥에 쓰러진 것을 본 소 모리타네는, 지금껏 자유민주당 영수로서 갈고 닦은 모든 말재간을 발휘하여 겨우 사태를 무마했다.
그리고 그제야 주군의 뒤를 겨우 따라온 모리타네의 가병(家兵)들이, 쇼군에게 바칠 예물을 들고 나타났다.
“사카이 상인들이 제법 많이 도와주어, 수레를 빠르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도 오늘내일 중으로 도착할 것입니다.”
“늘 느끼는 거지만 히데요시 그놈이 제법 수완이 좋단 말이지. 혼자 내버려뒀어도 뭔가 큰일 했을 놈이라니까.”
임 당수의 막무가내 처신은, 막무가내 치고는 의외로 짜임새가 있었다. 어디까지가 즉흥이요 어디서부터가 처음부터 계획한 바인지, 소 모리타네조차 미리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껏 동서 막론하고 수많은 이들이 허를 찔린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린죠 히데요시 – 사카이에 남아 있었다 - 와 소 모리타네 두 사람과 군사 약간, 그리고 선물이라고 급히 마련한 것 조금. 고작 이만큼만 데리고 들이닥쳤으니, 오다 노부나가건 미요시 씨건 어찌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우에사마(上様, 쇼군에 대한 존칭), 실로 송구스러우나, 예물이 모두 이 교토 땅에서는 보기 드문 것인지라...”
틈입한 괴한을 상대로 검을 뽑자마자 거하게 얻어맞아 날아갔던 무사 하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직 얼굴 한쪽의 멍이 선하였다.
암만 보아도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보다는 무사시보 벤케이(武蔵坊弁慶, 장사로 유명한 겐페이 시대 무장)에 가까운 이 사내의 정체는 이제 어소의 무사 그 누구도 의심치 않았는데, 빨래에서 얼룩 지우듯 의심 자체를 두들겨 팸으로써 지워버린 덕이었다.
“저 예물들이 대체 무엇인지 알려달라, 그 얘기로구나. 좋다. 저기 저쪽, 마구간지기들을 괴롭히고 있는 놈이 한혈마라고, 제법 귀한 말이다. 알탄 칸 그놈이 사절 보내면서 선물이라고 준 것인데, 몽골 녀석들은 바다라면 질색한다니 왜 그놈을 네가 타고 있느냐며 너희 주군에게 책잡을 일은 없을 것이다.”
알탄 칸의 잘못이라면, 장차 요동에서 싸움 붙을 때 그에 호응하여 태원(太原)을 칠 궁리를 하고자 사람을 보내면서 하필 한혈마까지 같이 보낸 것뿐이었다. 벼락에 콩 볶아 먹듯 일본행 준비하던 꺽정이는 사절들의 사정도 듣지 않은 채, 마침 잘 되었다며 빼앗아 개중 한 마리를 이렇게 데려왔다.
차마 조선 쇼군에게 ‘아루탄칸’이 누구냐고 묻지 못하여 대신 소 모리타네에게 캐물은 무사는, 그러니까 원구(元寇, 몽골)의 우두머리에게 조공으로 받은 것이라는 답을 – 적어도 그의 식견으로는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그나마 사리에 맞았다 – 듣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저 작은 궤짝에 든 인삼을 비롯해서, 저기 저 큼직한 나무통에 담긴 것까지 모두 약이다. 인삼이니 녹용이니, 뭐, 우리 조선국에서 나오는 그런 것들 있지 않으냐.
그리고 오늘내일 중으로 마저 당도할 물건도 모두 약이니 그리 알면 된다. 정 궁금하면 살짝 뚜껑 열어보아도 괜찮은데, 단 헤집지는 말거라. 그러다가 약효 달아나면 죄다 네놈들 잘못이 될 테니.”
뭔가 더 깊게 물으면 좋은 소리 못 들을 것을 직감했는지, 군말 없이 고개 한 번 푹 숙이고 물러가는 무사였다.
그것을 한참 바라보던 모리타네가, 갑자기 파안대소하였다.
“갑자기 허파에 바람이 들었나. 왜 그러느냐?”
“아, 그것이... 일이 너무 우습게 되어서 말입니다.”
상락의 기준은 무엇인가? 단순히 쇼군이 머무는 교토에 당도하는 것만이 상락은 아니요, 반드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막부를 손에 넣고, 무가의 수장 쇼군의 뜻을 저의 멋대로 다룰 수 있게 되어야만 상락이라 할 수 있을 테다.
그 논리에 따르면, 사실상 단기필마로 뛰쳐들어온 것과 다름없는 임꺽정 일행이야말로, 쇼군을 쩔쩔매게 한다는 점에서 상락을 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일본의 모든 다이묘들이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상락을 이토록 쉽게 해버렸다는 것이 어찌 우습지 않겠는가.
“실없는 놈. 그 상락인지 뭣인지는 네놈이나 실컷 해라. 내가 어딜 봐서 일본 사람으로 보이느냐?”
“잠깐, 그렇다면...”
잠시 멈칫하던 모리타네가 더욱 박장대소를 하였다.
상락을 일본 사람만 할 수 있다면, 결국 ‘하야시 쇼군’을 따라온 모리타네 자신이야말로 상락을 한 셈이었다. 일본 66주에 포함되지도 않는 츠시마노쿠니(대마도) 소 씨가 상락을 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정말이지 주군께서는 대단하십니다. 온 세상을 돌아다니시며 가로막는 것은 죄다 부숴버리시니, 잠자코 그 뒤만 따라다녀도 이런 날이 오는군요.”
“말 잘 했다. 이 막부라는 것도 부숴버릴 참이니.”
주군의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는, 사카이에서 만나 전해들은 바 있었다.
명국 내각수보 장거정의 의도에 따라, 막대한 은의 힘을 바탕으로 벌써 결집해 일본의 대권을 장악하려 하는 동군(東軍). 이에 비하여 서군 측은 아직 준비가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전란이라는 것은 양쪽이 모두 편할 때를 가려 벌어지지 않는 법. 짧은 시일 안에 서군의 힘을 북돋을 수 있는 수는 모조리 강구해야 했다. ‘검호(劍豪) 쇼군’ 요시테루를 노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주군 또는 저 모리타네가 마지막으로 상락을 한 이로 이름을 남기겠군요! 그 뜻대로 된다면 말이지요.”
말하자마자 모리타네는 저의 실언을 깨닫고 바짝 엎드렸다.
“이놈아, 그게 네 주군 앞에서 할 소리냐.”
“졸자(拙者)가 일시 흥에 취해 말실수를 하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다만 쇼군이 만만한 인물이 아님을 말씀드리고자 했을 뿐입니다. 사카이에서 린죠 영수가 말씀 올렸던 것처럼, 쇼군 주변, 특히 미요시 씨의 동향도 심상치 않고요.”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뭐, 그런 말은 많이 들었다. 허나 걱정 말거라. 네 말마따나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말썽이란 말썽은 다 부리고 다니는 이 몸 아니냐? 미요시인지 미우새인지 하는 놈들이야, 날뛰어주면 오히려 내가 고맙고.”
그러고는, 역시 온 몸의 멍이 확연한 다른 무사 하나를 소리쳐 부르는 꺽정이였다.
“어이, 네놈도 보아하니 제법 벼슬이 높은 녀석 같은데, 가서 너희 재상인지 대장군인지 하는 나리께 말씀 좀 전해다오. 조선국 임꺽정이가 이름 높은 칼잡이와 솜씨 좀 겨뤄보고자 한다고 말이다.”
올해로 나이가 스물아홉인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열두 살 나이일 때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의 직을 받았다. 쇼군의 가신인 호소카와 씨가 쇼군을 치고, 호소카와 씨의 가신인 미요시 씨가 다시 호소카와 씨의 후계자 다툼에 끼어들어 배후의 실세 노릇을 하고, 명분상으로는 그들 모두의 주군인 쇼군은 교토에서 쫓겨나 저의 명분상 가신들의 영지를 전전하던 때였다.
요시테루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아, 오미(近江)의 롯카쿠(六角) 씨에 의탁하고, 그 뒤로는 미요시 씨와 협상하여 저의 실권 대부분을 미요시 가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쇼군의 실권을 빼앗겨도, 어쨌든 무가(武家)의 으뜸이라는 그 권위는 그대로 남았다. 그리고 요시테루는 이를 이용하여 저의 입지를 다질 만큼의 의욕과 재간을 지닌 쇼군이었다.
그렇게 은인자중하며 세를 기르던 중, 마침내 풍운(風雲)이 또 한 번 들이닥쳤다. 영영 철석같을 것만 같던 미요시 씨에 신불(神佛)의 재앙이라도 내렸는지, 당주 나가요시의 후계자 요시오키가 스물둘 나이에 요절하고, 이어서 나가요시 또한 급히 후계를 정하고서는 덜컥 죽어버렸다.
“헌데 이제 보니 풍운이 아니라 돌개바람, 아니, 어쩌면 온 일본을 가라앉힐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노와키(野分, 태풍)였나 보오.”
어소 안에 마련된, 모래 곱게 깔린 마당에 칼 들고 나온 요시테루가 ‘하야시 쇼군’에게 말했다.
도저히 무언가 해볼 여력이 없었을 뿐, 요시테루 또한 기나이 바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신주 일본을 천하로 알던 이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엄두도 낼 수 없는 거대한 변화. 처음에는 서풍인 줄 알았던 그 바람은, 어느새 동쪽에서도 불어오고 있었다.
“조선에도 노와키가 부는지는 모르겠소. 늙은이들의 말에 따르면, 정말로 강한 노와키의 한가운데에는 사방의 바람이 딱 맞게 휘말려들어와 오히려 맑게 개는 곳이 있다더군. 이곳 교토가 바로 그런 모양새라오. 그대가 찾아온 것도 이 때문이겠지. 그렇지 않소이까?”
린죠 히데요시라는 이름의 서풍은, 공무(公武) 모두 제쳐두고 오로지 백성을 위한 나라를 만들겠노라 하였다. 무가의 세상이 펼쳐진 이래 일본국에 좋은 일이 무엇이 있었느냐는, 날선 고발과 함께하는 바람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라는 이름의 동풍은, 바로 그 서풍에 맞서 함께 일어나자는 무장들의 외침이었다. 애초에 칼과 창, 그리고 철포가 모두 무사의 것일진대, 무사의 이름을 달고서 백성의 외침 한 번에 순순히 무너져서야 되겠느냐 하는 외침.
그 바람 중 무엇이 교토를 먼저 휩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디서 부는 바람이건, 나풀대는 천막 수준으로 영락해 막부(幕府)라는 본디 이름에 오히려 어울리게 된 지금의 막부를 날려버리기에는 충분할 터였다.
그러한 고민을 삭혀가며 눈앞의 조선 쇼군을 떠보는 요시테루였는데, 돌아오는 대꾸는 시큰둥하였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 보군. 그 노와키인가 무엇인가가 구풍(태풍) 이르는 말이라면, 여기 서 있는 내가 바로 구풍이라오.”
확신에 가득한 눈빛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던 요시테루가 껄껄 웃었다. 어딘가 허탈함이 묻어나왔다.
“그렇지! 그랬어. 이 사람이 잘못 생각했구려. 그대는 일본 하나쯤은 뒤엎을 수 있는 큰 바람을 일으키는, 천하에서 가장 큰 부채를 들고 있는 사람이니.
하면 여쭙겠소. 그 부채로 이 허수아비를 어디로 날려버리려 하시오? 지푸라기는 모조리 썩었고 속은 텅텅 비어, 바람 한 번이면 어디로든 훌훌 날아갈 지경이라오.”
어디겠는가. 당연히 자신과 연 닿은 서쪽으로 보내려 하겠지. 그러나 그런 답을 알면서도 요시테루는 떠보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아시카가 씨를 재흥(再興)케 할 마음으로 가득하였으므로, 허울뿐인 쇼군일지언정 그 허울의 값을 가지고 힘 닿는 데까지 흥정할 심산이었다.
“검으로 겨루겠다고 했으니, 검으로 답을 보아야지. 그렇지 않소? 내기를 합시다. 우리가 검으로 겨루어 내가 이기게 되면, 그때는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어야겠지. 막부인지 거적떼기인지 하는 이 놀음을 집어치우고 나랑 같이 규슈로 가십시다.”
눈앞의 사내는, 요시테루의 흥정에 응해줄 생각도 없는 모양인지, 숫제 날로 먹으려는 듯했다.
“반면 임자가 이기면, 나 임꺽정이보다도 더 무예 뛰어난 사람이 있는데 그 자는 바로 교토 어드메 사는 아시카가 요시테루라고 온 세상에 떠들어 드리겠소. 그렇게 되면 설령 쫓겨나도 먹고살 곳은 생기지 않겠소? 하다못해 마츠라 타카노부 그 못난 놈도 남쪽 바다로 가서는 칼밥 먹고 잘 사는 세상인데.”
또 한 번 허탈한 폭소가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요시테루는 답하였다.
“막부라는 것은 이 나라를 다스리는 공가무가일동(公家武家一同)의 한 축이오. 그것을 함부로 폐할 수는 없소.”
허나 어찌해야 할 것인가. 검으로 겨루어보자는 말에 혹하여 이미 이렇게 독대를 하게 되었으니, 반드시 오늘의 일은 기나이의 주인 미요시 씨의 귀에 들어가고, 이어서 동과 서 양쪽으로도 전해질 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이대로 저자에게 끌려 다녀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이라도 얻어내야 한다.
“그리고 무사란 무(武)에 이름을 거는 자. 그러한 내기는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
그랬는데, 의외로 순순히 어깨 으쓱이는 것이었다.
“뭐, 그러시다면야. 좀 맞고 나면 정신을 차리겠지.”
“뭐라 하셨소?”
“들으신 대로요.”
검호 쇼군이 조선의 흑염룡을 검으로 꺾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어쨌든 마지막에 검으로 그 목을 노린 것은 요시테루였으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말 가까이서 그 모습 본 이가 있다면, ‘검으로만’ 하야시를 꺾었을 뿐임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싸움은 마치 곰이나 호랑이를 칼 한 자루로 상대하는 것과 같아, 칼날이 닿으면 닿을수록 지치고 다치는 것은 요시테루 쪽이었다.
요시테루가 거친 숨 몰아쉬며, 겨우 회심의 일격으로 칼날을 들이대면, 그제야 순순히 ‘임자가 이겼소’ 하고 넘어갈 뿐이었다. 만약 주먹질과 발길질까지 하며, 생사결단의 자세로 다투게 되었다면 누가 살아남았을 지는 뻔하였다.
헌데 더 의외인 것은 그 다음이었다.
조선의 천하인은 눈이 부셔서 그랬다느니, 물이 몸에 맞지 않아 그렇다느니 온갖 핑계를 대면서, 계속 다시 겨루기를 청한다 하였다.
“필시 쿠보사마(公方樣, 쇼군)와 독대를 이어가려는 명분일 것입니다.”
미요시 나가요시가 급사하기 전부터 이미 그의 가신 중에는 특히나 명망 높고 목소리 큰 자들이 셋 있었다. 이 세 사람을 흔히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 미요시 삼인방)라 부르곤 했다.
그 삼인중이, 바로 지금 미요시 가의 새 당주 시게마사(三好重存, 훗날의 미요시 요시츠구)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개중 목소리를 낸 것은, 삼인중 중에서도 우두머리로 꼽히는 미요시 나가야스였다.
“대체 두 쇼군이 독대를 하여 얻을 것이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아시카가 쇼군에게 있는 것은 그 검술 실력 외에는 쇼군이라는 이름 하나뿐인데.”
나이도 어리고 관록도 부족하며, 재주는 있으나 경솔하다는 평이 조심스레 도는 미요시 시게마사가 아직 수염이 다 올라오지 않은 턱을 어루만졌다. 그가 미요시 씨 이면에서 은근슬쩍 세를 키우고 있는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좋게 보지 않는다는 것은 삼인중은 물론이요 다른 가신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조선의 천하인이 장차 일본에서 무가를 폐하고자 하는 저 서군의 천한 무리를 지지하는 것은, 식견 있는 자들 사이에서는 암암리에 알려져 있는 바입니다. 쿠보사마를 어떻게든 움직여 서군을 편들게 하고, 모리 씨가 무리를 모아 상락할 때 그쪽에 가담토록 할 심산이겠지요.”
“허나 기나이가, 나아가 그 잘난 막부가 모두 우리 미요시 당의 것 아닌가? 대체 왜 우리 대신 쇼군 그자에게 간 것이지?”
“말씀하신 대로, 지금 쿠보사마께는 무가의 수장이라는 그 번듯한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서군의 편을 들어도 잃을 게 없다는 뜻이지요.”
“반면 우리는 잃을 게 많고.”
“그렇습니다.”
턱을 어루만지는 것은 질렸는지, 옆의 다다미를 툭-툭 두드리던 시게마사가 서간 한 장을 곁에서 들어올렸다.
“기요스 성으로부터 이런 연락이 닿았다. 하야시 쇼군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말라더군. 고작해야 바깥에서 구한 자금으로 벼락출세한 주제에, 참 괘씸한 자가 아닌가.”
그 자금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이제 알 만한 자들은 다 알게 되었다. 멀리 남쪽 루손에 둥지를 틀고, 당나라(명) 바닷가와 오와리 사이를 오가는 남만(南蠻,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통칭)의 대선.
어찌하여 서군은 조선이, 동군은 명국이 지원하는지 그 까닭까지 이해하는 자는 다이묘 중에도 드물었으나, 애초에 무사가 칼 찬 이상 싸우는 데 별다른 이유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하여, 내게 좋은 생각이 났다. 두 쇼군을 함께 치는 것이다. 바로 지척, 니죠에 그들이 머물고 있는 지금만한 호기가 또 언제 오겠느냐?”
“허나, 분명 오와리노카미(오다 노부나가)께서는...”
“그게 다 어째서겠느냐? 그자가 원치 않는 섣부른 움직임으로 자칫 대국(大局)이 흔들릴까,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겠지. 허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들어보아라...”
기나이와 그 주변 집안들이 아직껏 동서 중에서 편을 정하지 못한 이유는 이러하였다.
그들이 무장인 이상, 서군의 편은 들 수 없었다. 그리고 당장 규슈 코앞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논밭 사이를 지나다 비명횡사할 것을 두려워하게 된 가신들의 충동질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서군 편이 된 시고쿠의 무장들과 달리, 기나이는 아직 서군이 몰고 다니는 몹쓸 풍조에 덜 물들어 있었다.
반면 그들이 동군 쪽에 들게 된다면, 이는 곧 오와리의 얼간이에게 굽히고 들어가는 것을 뜻하였다. 쇼군의 가신이든, 또는 그런 가신의 가신이든, 저들이 공무(公武) 양쪽에서 제법 높은 지위에 있음을 자랑스레 여기는 콧대 높은 집안으로서 이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오다 노부나가조차 부정할 수 없는 큰 공을 세운 뒤 그 아래로 들어가자. 허수아비 쇼군을 더 허수아비 같은 쇼군으로 갈아치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동군에서 제일은 아니더라도 위에서 두 번째, 세 번째쯤 되는 자리만은 보장받자.
오다 노부나가 같은 근본 없는 자가 오래 가지는 못할 테니, 그때까지만 은인자중하였다가 다시 두각을 드러낸다면, 그때는 정말로 미요시 가가 천하제일의 자리에 오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에게 은자가 있느냐? 남만의 큰 배와 ‘테루쇼(테르시오)’ 철갑병(鐵甲兵)이 있느냐? 아니면 명국 재상과의 연줄이 있느냐? 우리로서는, 이렇게 대국을 흔들어 조금이라도 입지를 높인 뒤에 동군의 기치에 합류해야 비로소 훗날을 도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의외로 논리정연한 젊은 주군의 말에, 삼인중 또한 눈빛을 주고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주의 말씀에 한 점 잘못이 없습니다. 저희 모두 비장한 각오로써 따르겠습니다.”
“그래, 때마침 니죠 어소는 요새 개축(改築)을 한답시고 허술하거니와, 갑작스레 귀빈을 맞이하여 더욱 부산하다고 들었다. 어찌나 어수선한지, 심지어 하야시 쇼군이 들고 온 예물조차 제대로 검수를 안 했다더군.
이처럼 무방비한 적을 상대로는, 오로지 신속함만이 중할 뿐이다. 군사를 모을 것도 없이, 당장 있는 무사들만 데리고 얘기가 새어나가기 전 니죠를 급습한다.”
“명을 받듭니다!”
삼인중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하, 하하하! 이렇게 끝나는가! 좋다! 어차피 무사의 시대가 끝나간다면, 나는 무사로서 죽겠다!”
패기 있는 외침과 함께, 요시테루는 황망스레 달려온 몇 안 되는 신하와 근시 무사들에게 외쳤다.
“내가 모은 검을 모두 모아서 저 복도에 꽂아두거라. 저기서 적을 맞이하겠다. 네놈들은 막을 수 있는 데까지만 막고, 알아서 도망을 치든, 할복을 하든 하거라. 너무 열심히 놈들을 막다가 이 니죠 어소에 불이라도 나면, 가뜩이나 엉망진창인 세이이타이쇼군의 위엄이 더 떨어지지 않겠느냐?”
대답하는 목소리는 작았다. 몇 안 되는 군사와 이 자리에 없는 무사 몇몇이 애써 문을 틀어막고는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미요시 군은, 군(軍)이라기보다는 급히 모은 무사 패거리에 가까운 모습으로 이곳 어소를 들이쳤다. 기나이의 주인이자 전대 당주 나가요시의 대에 그 위엄이 천하에 떨쳤던 미요시 당의 모습이라기에는 영 부족했으나, 그만큼 급히 무사를 모았기에 이쪽은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조차 제대로 모으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 케이쥬인(慶壽院)이 시녀들과 함께 나타나, 도망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요시테루는, 어머니를 수행하는 시녀의 옷소매에 사세구(辭世句, 죽기 전 남기는 문구) 한 줄을 적고 그들 모두를 암문(暗門)으로 내보냈다.
그 전에 요시테루는 시녀 하나를 붙잡아, 얼른 조선의 쇼군에게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암문 있는 쪽으로 안내해줄 것을 명하였다. 저들이 만약 하야시 그자를 노리고 달려드는 것이라면, 보기 좋게 실패할 것이다.
니죠 어소는 제대로 지은 성과는 거리가 멀어, 그럴듯한 대문과 그 주변을 두른 야트막한 담장 하나가 방비의 전부였다. 애초에 미요시 씨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으니 해자 하나 함부로 팔 수 없었다.
안쪽은 그래도 명색이 쇼군의 거소라, 궁궐이라 부를 수도 있을 만큼 널찍하고 전각은 웅대하였으나 그뿐이었다.
“담장을 넘어온다!”
“물러나! 안쪽으로 물러나라! 담장을 모두 막기에는 병력이 부족하다!”
과연 오래 막지는 못하였으나, 어느새 그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게 된 아시카가 가문의 몇 안 되는 가신과 군졸은 끝까지 발목을 잡는 듯하였다.
그렇다 한들, 이 어소 하나 제대로 막지 못할 테니, 빈틈을 노린 미요시 군이 이곳까지 당도하는 것 말 그대로 촌각 안에 벌어질 일이었다.
“검을 꽂아라.”
“예, 주군.”
곧 그가 하나씩 모아온, 그 하나마다 다 이름이 있는 명검이 복도에 수북하게 쌓였다. 퍼런 칼날이 마지막으로 칼집을 떠나, 나무 바닥을 뚫고 박혔다.
“이제 너희도 떠나라. 내 말했듯, 할복을 하든, 나를 위해 싸우든, 아니면 이대로 도망치든. 어느 쪽이든 훗날 저승에서 만날 때 원망하지 않으마.”
모두가 눈물을 삼키며 주변을 떠났다. 어디로 가든, 이제 요시테루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러고 나니, 정말로 내릴 지시는 다 내린 모양인지 마음이 어째 홀가분해졌다.
“자, 어디 한 판 붙어볼까. 검호 쇼군의 최후다.”
곧 우당탕 소리와 함께, 복도 한쪽으로 달려가던 그의 시종 몇몇이 피 흩뿌리며 쓰러졌다.
“왔느냐.”
“쿠보사마.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무슨 무례를 말할 것이 있느냐? 무사로서 맞이할 테니, 무사로서 오거라.”
곧 미요시 가의 무사 여럿이 인사 올리고는, 진짜 무사, 그러니까 전장에서 싸우는 무사답게 여럿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하기야, 검호로서 자신이 일찍이 명성을 떨친 바 있으니 혼자 달려들 리 있겠는가.
실없는 잡생각은 그것이 끝이었다.
칼날을 저의 팔뚝으로 삼아 휘두르고, 휘두른다.
다섯은 셋이 되고, 둘이 되고,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 하나 뒤에 일곱이 더 들어왔다.
“과연 검호라는 이명이 어울리십니다.”
새로 들어온 무사들이 인사를 올렸다.
“칼날이 칼집을 떠난 뒤의 칭찬은 사치일 뿐. 오거라.”
“바라시는 대로.”
일곱이 다시 셋이 되고, 아무도 남지 않아, 이제는 시체가 걸리적거린다. 여섯 번째 놈을 벨 때 칼끝이 허벅지에 닿아, 뜨거운 고통은 허리를 타고 올라오고, 따뜻한 무언가는 왼발을 향해 흘러내려갔다.
마찬가지로 허파 또한 불 붙은 듯, 뜨거운 김을 쉴 새 없이 풀무질하였다.
그러나 일말의 쉴 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복도 양 옆에서 각각 다섯이 나타났다.
“쇼군이 저쪽에 있다!”
“모두 들이쳐라! 복도를 에워싸!”
“하야시! 하야시 쇼군은 어디에 있느냐!”
대항하는 이들은 어소의 구석으로 몰렸는지, 아직 싸우는 소리는 들려왔으나 그뿐. 요시테루의 지척에서는 오로지 적의 외침만 들렸다... 라고 생각할 무렵.
“예 계신다. 이놈들이 정말, 손님 대접도 퍽 후하게 하는구만.”
묵직한 조선말과 함께 묵직한 소리가 함께 났다. 반대편 복도에서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하야시 쇼군이었다.
그리고 그 손에 들린 것은, 아직 살아 있는 무언가. 그것을 저쪽, 미요시 무사들 사이에 던지니, 두려움이 빠르게 번지며 비로소 요시테루도 숨 가다듬을 틈을 얻었다.
그리고 저쪽이 무어라 외치기도 전, 복도에는 살벌한 기운만 가득 들어찼다.
“야, 모리타네야, 알아서 싸우면서 말 옮겨주어라.”
“예, 주군.”
“자, 보시오. 싸움이라는 것은 기세요, 기세. 깔끔하게 죽이면 안 된다니까?”
재수 없이 가장 가까이 있던 무사가 ‘으아악!’ 소리와 함께 달려들었다가, 그 자리에서 두 다리가 부러졌다. 발길질로 두 팔을 마저 짓밟으니, 비명이 복도를 메웠다.
“이보쇼, 살고 싶으쇼?”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은 무리가 복도를 가득 메우며 달려오니, 아직까지 숨 붙어 있는 발 밑의 녀석을 그대로 들어 놈들 향해 던졌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모두가 나동그라졌으나,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빠르기로 꺽정이가 달려들어 칼침을 놓은 뒤에는 결코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살고 싶으냐고 물었소.”
너무나 태연자약한 말투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무사요. 도망칠 길이 아직 남아 있다 한들, 싸움에서 등을 돌릴 수는 없소! 살기를 바랐다면 진작에 도망쳤겠지.”
남은 것은 쇼군의 허명뿐. 여기서 깨끗하게 죽을지언정, 이름 더럽힌 채 도망쳐서 꼭두각시가 될 수는 없었다.
“헌데 이를 어쩌나. 임자는 지금 고를 처지가 아니라오.”
“그 무슨 말씀이시오?”
언제부터인가 적이 더 달려들지 않았다. 싸우는 소리 사이로, 이상한 비명이 함께 났다. ‘불이야!’ 소리. ‘큰일이다! 후퇴하라!’ 소리.
그러나 원래 이런 싸움에서 불이 나지 않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대체 왜 불이 난다 하여 물러난다는 말인가?
“어떻게 죽었는지 보아줄 사람이 있어야 이름이라도 남지, 다 같이 죽으면 무슨 소용이오? 여기 이대로 남아 있는다면 아마 산산조각이 날 게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냔 말이오!”
“무슨 말이기는. 내가 임자한테 가져다 준 예물 있지 않소. 그게 다 약이거든. 이제 보니, 물욕 넘치는 저쪽 졸개들이 그새를 못참고 창고를 뒤지기 시작한 모양이군그래.”
요시테루가 넋이 나가 있는 사이에,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양 꺽정이가 그 목덜미를 붙잡고는 슬슬 끌어당겼다.
“흐흐, 헌데 따지고 보면 화약도 약이란 말이지. 그리고 지금 저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걸 보니, 딱 맞추어서 바깥에서 불화살이 날아온 모양이구려. 자, 가십시다!
이곳 저택 짓는 데 너무 공을 들이지는 않았기를 바랄 뿐이오. 내가 괜히 한혈마를 선물이랍시고 가져다 준 게 아니거든. 얼른 타고 달아납시다.”
이것이 훗날 ‘에이로쿠 연간의 재앙’이라고 불릴, 교토 대화재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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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는 교토 안 무로마치(室町)에 근거지를 둔 것에서도 볼 수 있듯, 천황의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독특한 정치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즉 ‘공가(公家, 조정)’는 종교의례를 비롯해 국가통치의 당위성과 정통성을 관리하고, 무가(武家, 즉 막부)는 군사력을 담당하며, 이처럼 공존 및 상호의존을 통해 일본 전역을 통치한다는 것이지요. 일본 조정이 마지막으로 실질적 권력을 휘두르며 무가와 대립하던 시기를 거쳐 마침내 안정적인 정권을 수립한 무로마치 막부로서는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박수철, 2017. “‘공무체제’의 정치구조와 기도: 무로마치 시대 새로운 정치체제상 시론.” <동양사학연구> 140).
그러나 오닌의 난 이후로 쇼군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막부의 물적•군사적 기반에 의존해야 했던 조정도 함께 몰락하게 됩니다. 전국시대가 지속되면서, 쇼군을 무너뜨리고 허울뿐인 조정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운 뒤 천하인으로 군림하겠다는 야망을 품는 다이묘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지요. 에이로쿠의 변을 일으킨 미요시 요시츠구에게서 그러한 조짐이 나타났고, 이어서 오다 노부나가는 보다 노골적으로 이러한 의도를 드러내어 자신이 직접 조정의 최고 대리인으로서 전 일본을 거느리겠다는 의도를 드러냅니다. 그가 무로마치 막부를 무너뜨린 근거 또한 여기에 있었지요 (박수철, 2019. “오다 노부나가의 쇼군 추방 논리와 천황.” <동양사학연구> 147). 결국 이러한 새로운 체제, 즉 천황의 조정은 통치의 상징 정도로 격하되고 실질적인 통치 전반을 막부가 맡는 체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완성됩니다.
‘검호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희망과 같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이 무렵 막부의 실권은, 아시카가씨의 가신(간레이) 호사카와 씨의 가신 미요시 씨가 전횡하고 있었는데, 쇼군 요시테루는 미요시 가의 당주 나가요시를 상대로 분전한 끝에 그와 화친하고, 쇼군의 실권 대부분을 미요시 측에 넘기게 됩니다. 그러나 요시테루는 그러면서도 쇼군의 권위만을 가지고 최대한의 정치적 이익을 얻어내는 능수능란함을 보여, 각지 다이묘들의 분쟁을 조정(때로는 조장)하면서 자신만의 입지를 굳혀나갑니다. 그는 또한 검술의 달인으로도 유명했는데, 에이로쿠의 변 당시 자신이 모아둔 명검을 복도의 다다미에 꽂아두고, 칼날이 무뎌지면 다른 검을 뽑아드는 식으로 수십 명의 적을 상대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중과부적으로 살해당했다는 설도, 자살하였다는 설도 있지요.
원 역사의 에이로쿠의 변은 이미 반송장 상태였던 무로마치 막부의 관에 못을 박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나이 미요시 씨의 최전성기를 일구었던 미요시 나가요시가 후계자로 삼고 있던 요시오키가 요절하고 나가요시 본인도 덩달아 급사하면서 그 뒤를 이어받게 된 미요시 요시츠구는, 쇼군 요시테루의 움직임, 나아가 막부 자체에 반발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에 미요시 씨의 실권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삼인중과 연합해 쇼군 요시테루를 급습하여 그를 살해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런 성공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고, 요시츠구와 산닌슈는 곧 저들끼리 내분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 앞에서 허무하게 기나이를 내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