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천하포무 (3)
쇼군이 거하는 니죠 어소를 습격한 미요시 군을 이끄는 것은, 미요시 삼인중의 일원 이와나리 토모미치(岩成友通)였다.
야트막한 담장을 넘어, 한줌밖에 되지 않는 쇼군의 무사를 제압한 그의 수하들이 문을 활짝 열자, 토모미치는 의기양양하게 문턱을 넘어와 피로 물든 마당을 둘러보았다.
아직 남은 친위 무사 몇몇이 여기저기 도망쳐 다니며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을 뿐이었으나, 그들을 다 합쳐본들, 이미 여러 겹으로 포위된 쇼군 한 사람보다 더 큰 위협이 되지는 못할 테다.
“두 쇼군의 행방은 찾았느냐?”
“예, 깊숙한 곳 복도에서 우리 무사들과 대적하는 중이라 합니다. 자유민주당의 소 공도 함께라더군요.”
“좋다. 두세 명이 버티는 것도 필시 한계가 있을 터. 검호니 흑염룡이니 하는 명성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그들을 꺾었을 때 얻을 명성을 탐내라고 전하여라.”
뭔가 위엄 있는 말을 덧붙이려던 차, 멀리 창고 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토모미치의 말을 끊었다.
“화약이다! 도망쳐라!”
“기다려! 당황하지 마라!”
“흑염룡의 함정이다!”
소문난 조선 천하인이 대체 어떤 귀물을 들고 왔을지, 궁금함과 욕심이 반반 섞인 채 창고를 뒤지던 그의 수하 하나가 궤짝에 가득 담긴 수상한 가루를 발견한 것이다.
“놀랄 것 없다! 흑염룡이 괜히 흑염룡이라 불리겠느냐? 자신에게 귀한 물건을 남에게 선물한 것일 테다. 멀리 천축 어딘가에는 화약이 절로 나는 산이 있다는데, 아마 거기서 캐 온 것이겠지.”
한동안 날이 가물기는 했지만, 불만 나지 않으면 그만이다.
아직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즉 복도나 방 안을 밝히기 위한 등불도 드물게만 밝혀져 있고, 부엌의 가마 역시 무장들의 이른 저녁을 준비하는 경우를 제하면 아직 데워지지 않고 있을 때였다.
“창고 주변에서 군사를 물리고, 오직 두 쇼군을 붙잡는 데만 주력해라! 실화(失火)에만 조심하면 괜찮을 것이다!”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불화살 서너 대가 그들 모두를 비웃듯 머리 위를 스치며, 휘익 소리와 함께 창고 지붕으로 날아간 것은 그때였다.
“불이야!”
“큰일이다!”
“물러나야 합니다!”
그 창고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익히 알게 된 무사와 병사들이 더불어 소리를 질렀다.
“바보 같은 놈들! 불은 끄면 그만이다! 도망치는 놈은 목을 베겠다! 고작 불화살 몇 대에 후퇴할 것이냐?”
다 잡은 두 쇼군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리 여기며 허둥대는 주변을 단속하는 토모미치였다.
그때, 허둥대는 주변을 어떻게 뚫고 피칠갑한 무사가 달려왔다.
“병력이 더 필요합니다! 하야시 쇼군이 달아나고 있습니다. 쿠보사마(쇼군)도 함께입니다!”
“붙잡지 않고 무얼 하는 게냐!”
“이미 그 악귀 같은 놈에게 모조리 도륙당해 걷지 못하는 몸이 되었단 말입니다! 이미 마굿간을 지키는 놈들이 당했습니다! 속히 물러나 인근의 대로를 막아야 합니다!”
허나 토모미치가 다시 지시를 내리려던 차, 또 다시 불화살 여러 대가 동시에 날아와, 이번에도 그대로 창고 주변에 꽂혔다.
“저쪽, 저쪽 민가 지붕입니다! 저 위에 궁수가!”
“불을 꺼라!”
“아니, 틀렸어! 도망쳐라!”
나라에 전란이 연이은 지 백 년. 설령 나무로 지었다 한들 어지간한 무장의 거처는 불화살 정도로 쉽게 불타지 않는다.
허나 그리 생각하는 이와나리를 비웃듯, 잘 마른 나무에 꽂히자마자 불화살 주변에는 불길이 화락 일어나고 있었다. 마치 미리 수작을 부려놓은 것처럼...
“젠장, 처음부터 화공(火攻)을 노렸는가!”
“부디 명령을!”
“퇴각한다! 즉시 물러난다!”
미요시 씨의 눈치를 보며 지은 어소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허술한 면이 있었다. 그리고 그 허술함은 어소 주인이 불청객과 검을 겨루느라 바쁘던 중에 은근슬쩍 사람의 손질을 당하여 더 심해졌다.
그러므로, 무예만큼 머리가 뛰어나진 못했던 이와나리 토모미치가 달아나는 이들을 추격하는 것과 이곳을 벗어나는 것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그 잠깐의 겨를은, 기둥과 지붕을 타고 번진 불길이 수상쩍은 궤짝 – 그것도 병사들이 창고를 뒤지던 중 친절하게 뚜껑을 열어놓은 – 에 닿기에는 충분하였다.
화약단지가 일으킨 혼란을 갑옷으로 삼고, 아직 살아 숨쉬는 적의 몸뚱이를 방패로 삼아 마굿간까지 뚫고 나온 임꺽정과 소 모리타네, 그리고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곧 한혈마를 타고 급히 교토의 대로로 달려나갔다.
“어째 조용한데.”
한참 달려 주변에 미요시 군사는 없고 – 기실 몇몇 있기는 했는데, 촌음 사이에 어디 가서 떠들지 못하는 몸으로 화하였다 – 그저 인근 민가에 숨어 바깥 훔쳐보는 눈빛만 간간이 있는 곳에 닿자 꺽정이가 문득 말을 멈추었다.
“저기 연기 나는 것 보십시오. 소 씨의 가병들이 비록 무예로는 본토의 무사들에 못 비기지만, 이런 데서 실수를 할 만한 이들은 아닙니다.”
여전히 경황없는 요시테루와 달리, 저도 모르는 사이 상전에게 약간은 물들어버린 모리타네는 태연자약하게 답하였다.
그리고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땅이 울리고, 이윽고 하늘이 큰 소리로 화답하였다.
어소가 있던 곳에서 거대한 구름이 터져나오니, 요시테루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은 후일 그 구름의 형상이 마치 대요괴 슈텐도지(酒呑童子)의 얼굴과 같았다고 기억하게 되었다.
“하하하! 야, 아주 잘 터졌구나! 자, 얼른 마저 도망치자꾸나! 거기 임자도 얼른 정신 차리시고.”
소리만 요란할 뿐 니죠 어소를 다 날려버렸다기에는 어폐가 있는 작은 폭발 – 물론 바로 옆에서 휩쓸린 이와나리 토모미치를 포함해 미요시 군 상당수에게는 결코 ‘작은 폭발’이 아니었지만 – 이었다.
허나 갑작스러운 싸움 소리에 인근의 백성은 열에 여덟쯤은 도망치고 한둘만 집에 남아 있었으므로, 곧 ‘불이야!’하는 다급한 외침이 잇따르고 연기 기둥이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아...”
검호 쇼군이자 미요시 가의 허수아비 신세를 면해보고자 스스로 전장에 나서기도 한 무장이었던 요시테루도 쉽사리 넋을 되찾지 못하였으니,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아, 나름 이 나라 칼잡이들의 우두머리라고 저 불화살 쏜 녀석들 걱정을 해주는 것이오? 염려 마쇼. 그치들도 다 알아서 빠져나올 궁리를 해 두고서 활 들고 지붕에 올라갔을 테니.”
그 오죽한 사람이 바로 옆에 있었다.
“대, 대체 저 짓을 언제부터 꾸민 것이오? 설마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서...”
“그럴 리가 있겠소?”
“그렇다면 어째서 화약을 그렇게 많이 준비한 것이오?”
“그야, 임자가 우리 뜻을 안 따르겠노라 배짱을 부릴 때 써먹으려고 했지. 헌데 인생사가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라, 이렇게 유용하게 쓰이게 되었으니 잘 풀린 셈이오.”
‘불이야’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하필 신불(神佛)도 무심하여 바람이 열심히 불씨를 나르고 있었기에 자잘한 연기 기둥은 곧 대성(大成)하고, 매캐한 냄새가 꺽정이 콧가에 닿았다.
“한혈마가 암만 명마라지만 넋을 놓고 다니는 주인놈을 순순히 태우고 다닐 만큼 순하지는 않소. 그리 꼬치꼬치 캐물을 여력 있으면 말 달리는 데 쓰시오. 자, 모리타네야! 가자!”
때마침 저 멀리서 미요시 군 한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검호 쇼군이 정신을 차리는 데는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에잇, 대체 저 말은 무엇이란 말이냐!”
겨우 따라잡은 줄 알았던 쇼군이 또 한 번 먼지 일으키며 멀리 달아나는 것을 본 미요시 소이(三好宗渭)가 분통을 터뜨리며 괜히 저의 말 옆구리를 걷어찼다.
교토를 한참 벗어난 뒤에도 추격하는 미요시 군과 몇 명 되지 않는 쇼군 무리 사이의 간격은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하야시 쇼군이 실로 비범한 인물임은 다들 알고 있었으나, 오늘 니죠 어소(또는 어소가 있던 구덩이)에서 벌어진 일은 미요시 삼인중 – 이제는 이인중(二人衆) – 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대략 대여섯 배쯤 뛰어넘은 것이었다.
그것만 해도 머릿속으로 감당하기 벅찬데, 이제 마치 날개라도 돋힌 양 쏜살같이 도망치는 자들을 눈앞에서 보게 되니, 평소 다도와 검술을 갈고 닦으며 성품을 단련한 소이조차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저들은 길잡이 하나 없이 달려가고 있으니, 필시 그 지남철인지 지남반(나침반)인지 하는 기물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못 잡느냐!”
쇼군 일행은 요도가와(淀川) 강변의 평탄한 길을 따라 서남쪽으로 달려가는 대신, 정남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야트막한 산과 언덕이 줄줄이 이어지는 곳으로, 저들 무리 중 기나이의 지리에 그나마 밝은 쇼군 요시테루조차 길잡이 없이는 쉽사리 빠른 길을 찾지 못할 터였다.
허나 저들은 마치 놀리는 것처럼, 잠시 길을 헤매다가도 미요시 군의 추격대가 등 뒤에 나타날 때면 용케 달아나버리곤 했다.
속히 기나이 전역의 미요시 군에게 이를 알리고, 저들이 도망칠 수 있는 두 방향, 즉 모리 씨가 있는 주고쿠로 가는 길과 상인들의 도시 사카이로 가는 길을 막도록 하였으나, 전령의 빠르기와 저들 쇼군 일행의 빠르기가 비슷하니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그로 인하여 길목을 미리 막고 있어야 할 이들은, 뒤늦게야 저들이 맡은바 임무에 실패하였음을 깨닫고 추격대에 합류하기만 할 뿐이었다.
“매복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멍청한 놈, 하야시 쇼군이 사카이에 닿자마자 곧장 교토로 달려왔다는 것을 잊었느냐? 그가 암만 온 천하를 누빈다지만 이곳 일본에서는 그 이름으로 병사 하나 거느리지 못한다! 매복을 걱정할 틈이 있으면 저들을 사로잡을 궁리부터 하란 말이다!”
때마침 척후 몇몇이 돌아와 보고했다. 추격하는 주제에 척후를 보내야 할 만큼, 미요시 군은 사람과 말이 모두 지쳐 있었다.
“보고드립니다! 쇼군 일행을 따라잡지는 못했지만, 대신 그들이 쿠니미야마(國見山)로 향하는 길을 물어보더니 곧장 그쪽으로 향했다는 농민들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농민들로서는 봉변을 당한 셈이었다. 말 타고 달려간 귀하신 분들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얼떨떨하게 서 있던 차, 뒤따라 나타난 무사님들이 호통치며 물으니 벌벌 떨며 그대로 고해바칠 뿐.
그러나 소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저들의 행방을 겨우 파악했다는 안도감으로, 소이의 얼굴에 조금 화색이 돌아왔다.
“마침내!”
저들이라고 추격하는 미요시 군을 놀릴 심산으로 저렇게 따라잡혔다가 달아나기를 반복한 것은 아닐 테다. 급히 달려오다 보니 믿음직할 길잡이를 구할 겨를이 없었고, 그로 인하여 헤맬 수밖에 없었을 터.
그러니 이곳 산에서 어떻게든 추격대를 따돌리고자, 딴에는 꾀를 써서 산으로 들어간 것이리라.
“들어라! 저 산에서 따라잡는다! 암만 야트막한 산이라지만 지형이 복잡하니, 저들이 쉽게 길을 찾지는 못할 터!”
“하지만 아직 지친 이들이 많습니다. 말은 더 그렇고요.”
“상관없다! 저 산에서 놓치면 그 뒤로는 수습할 수가 없지 않으냐! 멀쩡한 말로 갈아탄 뒤 바로 쫓는다! 어차피 세 명이다. 백여 명 정도만 따라가도 붙잡을 수 있어!”
쿠니미야마는 그리 높지는 않지만, 멀리 야마시로(山城)에서부터 뻗어나온 산맥의 끄트머리에 해당하였다. 따라서 여기서 저들을 놓치게 되면, 저들이 산지를 통해 빙 우회하여 사카이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가 (지금보다도) 난망하였다.
곧 그대로 이루어졌다. 명을 받든 부하들이, 그나마 덜 지친 무사와 말을 골라내어, 서로 갈아타도록 하였다.
그리고 소이의 지시대로 백여 명으로 간추려진 추격대가 산기슭 향해 달려나갔다.
“저쪽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골짜기 사이에서 헤매던 세 사람을 발견한 이들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한혈마라고 했던가. 덩치 큰 준마 덕에 숲의 그림자 사이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던 것이다.
“길을 잃은 듯합니다! 근방의 골짜기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좋아! 밀고 들어간다!”
하필이면 제법 비탈지고 바위투성이인 골짜기로 들어간 듯했다. 필시 저들도 운이 다한 것이리라.
그리 깊은 골짜기는 아니니 말을 버린다면 이 골짜기에서는 도망칠 수는 있겠지만, 정작 그 뒤로는 마저 도망칠 수 없을 테니, 어떤 식으로든 소이는 두 쇼군을 붙잡을 수 있을 터였다.
좁아터진 어소에서 싸울 때와 달리, 지금은 활도 쏠 수 있다. 그 무사시보 벤케이조차 화살비 앞에서는 고슴도치 신세를 면치 못했으니, 어찌 그들이 제압하지 못하겠는가?
이만한 공이라면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벌써부터 이른 고민을 하던 차.
“저기 있습니다!”
과연 저 멀리 얄미운 세 사람과 준마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였다.
“적이다!”
골짜기 삼면에서 깃발이 솟아올랐다.
“복병이다!”
“야타가라스(八咫烏, 일본판 삼족오) 깃발! 사이카슈(雑賀衆)다!”
사이카슈라면 키이(紀伊)의 이름난 용병이다. 가마야마 포를 구하기 위해 사카이 상인들과 결탁한 이래 그들과 연이 깊다 하였으니, 필시 하야시 쇼군의 편일 터.
그러나 미요시 소이는 제법 전장을 겪은 무장이었다. 얄팍한 눈속임에 속아넘어가지는 않으리라 다짐하며, 우렁차게 외쳤다.
“멍청한 놈들! 잘 보아라! 깃발뿐이지 않으냐!”
당황함을 일시 제쳐두고, 그들을 이끄는 무장의 말에 따라 깃발 솟아오른 곳 주변을 살피니, 과연 이름난 사이카슈 철포대는 보이지 않고 그저 깃발 들고 있는 사람이 전부였다.
“쳐라!”
아직도 교토에 번지고 있는 불길처럼 빠르게 퍼지던 황망함은 금방 잦아들고, 잠시나마 저런 얕은 꾀에 넘어간 것이 억울하다는듯 무사들이 함성 지르며 뛰어나갔다.
그리고 화답하듯 울리는 소리.
“쏘아라!”
의병(疑兵)인 줄 알았던 사이카슈 기수들이 저들의 깃발을 흔들며 외쳤다.
그리고 분명 아무도 없던 산등성이에서 굉음과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기세 좋게 달려들던 추격대는 그대로 무너졌다.
“젠장! 물러나라! 뒤따라오는 놈들과 합세하여 다시 쫓는다! 놈들의 수는 얼마 되지 않으니 머릿수로 밀어붙이면 그만이야!”
그러나 그 말에 응답하는 이는, 어느새 말머리 돌려 바로 옆으로 달려온 낯익은 이. 미요시 가의 허수아비였어야 했을 검호 쇼군이었다.
고통은 짧았다. 요시테루와 함께 돌격한 조선 천하인이, 광포한 웃음소리와 함께 미요시 씨의 귀한 무사들을 유린하는 것을 보며 미요시 소이는 죽음을 맞았다.
“흐흐, 어땠습니까?”
저의 주군을 구한 린죠 히데요시가 연신 히죽대었다. 어제 사이카슈 사람들과 함께 판 참호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부터, 사카이에 무사히 들어와 시내에서 가장 화려한 – 상인 취향으로 화려한 것이라, 요시테루에게는 다소 볼썽사나웠다 – 여관의 가장 큰 방에 마주 앉은 지금까지 계속 이러하였다.
“이놈아, 그게 벌써 며칠 전 일 아니냐.”
“당수께서 서방 땅에서 이루어놓으신 공덕은 몇 년이 지나도록 사람 입에 오르내린다는데, 그런 당수님을 구해드린 저는 오죽하겠습니까?”
이미 조선 천하인과 검을 겨루느라 기력이 쇠하였고, 거기에 명재경각의 위기를 겪기까지 했던 요시테루는 근 며칠을 숙소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사이 미요시 쪽에서도 무언가 움직임이 있을 법하였으나, 아직껏 잠잠하였다. 삼인중 중의 두 사람이 비명횡사한 탓일 것이다. 기후(岐阜)에 모여 있다는 동군 다이묘들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하였는데, 어느 쪽이든 꺽정이네로서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래, 그래. 너 잘 했다, 이놈아. 내 몇 번이나 말했지 않으냐.”
꺽정이가 손을 휘휘 젓더니, 그 손으로 요시테루 옆구리를 찔렀다. 그사이 기운을 되찾아, 이제 놀란 마음은 다 가다듬고 그 자리에 후일에 대한 근심걱정을 채운 듯하였다.
“이놈이 보기와 다르게 아직 나이 서른도 되지 않은 어린놈이라, 어른의 칭찬 들으면 제법 좋아한다오. 나 혼자 칭찬해서는 저 입꼬리가 도통 내려오지 않을 것 같으니. 어쨌든 이놈 덕에 목숨 건진 것은 사실 아니오? 임자도 얼른 잘 했다고 칭찬을 해 주시오.”
“흠흠, 고맙소, 린죠 공.”
“아이고, 별 말씀을요, 헤헤.”
꺽정이와 소 모리타네가 교토로 달려가는 사이 사카이에 남은 히데요시는, 저의 할 일을 충실하게 완수하였다.
히데요시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번 일은 제법 뿌듯해할 만하였다. 배 타고 오는 길에 미리 서국의 주요한 집안마다 연통을 돌려, 곧 어떻게든 쇼군 요시테루를 빼돌릴 것이니 사카이에 사람을 보내어 맞이해달라 청한 것도, 지나치게 겸손하지도, 또 지나치게 무례하지도 않게 잘 하였다.
또한 막 미요시 군에게 쫓기고 있던 그의 상전과 그 곁의 쓸모 많은 명분 덩어리 – 이미 무사를 저의 윗사람으로 섬기지 않게 된 히데요시 눈에는 얼추 그렇게 보였다 – 가 미리 약조한 대로 쿠니미야마에 닿자, 깔끔한 복병의 계책으로 해결하기까지 하였다.
애초에 동군의 벼락 같은 움직임을 경계하며 저의 상전 꺽정이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도 히데요시였으니 마땅히 최선을 다해야 할 일이었다. 허나 이만큼 깔끔하게 일처리를 하였다면 칭찬 정도야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저의 칭찬 욕심을 모두 채운 히데요시가, 옆에서 공손하니 무릎 꿇고 있던 사내를 소개하였다.
“여기 이 사람은 고니시 류사라고, 일전에 저와 사사롭게 연 맺은 것을 계기로 지금은 이곳 사카이에서 우리 자유민주당의 일을 도맡고 있는 상인입니다. 이곳 사카이 근방에 있던 사이카슈를 모두 불러모은 것도 여기 고니시 상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꺽정이가 또 옆구리를 찌르려 하자, 이미 한 번 시큰함을 겪었던 요시테루는 또 한 번 고맙다 하였다.
천한 상인에게 쿠보사마께옵서 감사를 표하시니, 류사 역시 당황하며 고개를 다다미에 붙였다. 조선의 격암(남사고) 선생으로부터 장차 큰 인물 될 것이라는 덕담 들은 아들 야쿠로(고니시 유키나가의 아명)에게 자랑할 생각이 든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자, 그러면 무사히 빠져나왔으니, 다음 행보를 논해 봅시다들.”
“예, 당수.”
그 말 나오기 무섭게, 헤벌쭉 웃던 히데요시의 낯빛이 극히 진중해졌다. 상인의 얼굴도, 무사의 얼굴도 아닌, 자유민주당 영수, 아니, 천하를 뒤엎는 자의 충실한 수족다운 얼굴이 드러나자, 요시테루와 류사 모두 긴장하였다.
“들어오시지요.”
바깥 복도에 히데요시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미닫이문이 열리고, 이윽고 초면의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와 예를 갖추었다.
류사와 마찬가지로 이곳 사카이의 상인인 듯한 자 하나를 제하면, 모두 무가(武家) 출신인 듯하였다. 하타라레(直乘, 센고쿠시대 무사의 예복 겉옷)에 그려진 가몬(家紋)을 알아본 요시테루의 눈이 커졌다.
모리 씨의 오른팔 코바야카와, 멀리 사츠마의 시마즈, 그 외에도 모두 서군에 속한 어지간한 집안에서 사람이 하나씩 찾아온 것이다.
“어째 불편해 보이는구려.”
“어찌 아니 그렇겠소.”
처음에는 놀라기만 하던 요시테루의 눈에 착잡함이 깃들었다. 히데요시가 꺽정이 대신 대꾸하였다.
“무가의 수장 세이이타이쇼군조차 함부로 모으지 못할 사람들을 불과 며칠 사이에 모은 것에 놀라워하면서도 답답함을 느끼시는 것이겠지요.”
마음을 그대로 꿰뚫어본 지적이었다. ‘조선의 흑염룡’이 처음 규슈의 바닷가에 나타나, 대뜸 다이묘 하나를 납치하였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부터 마음 속 한 구석에 있었던 바윗돌. 그것이 지금은 후지산보다 더 크게 부풀어올라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 계신 분들은 결코 우리 임 당수의 아랫사람도, 가신도 아닙니다. 저 하나 빼고요. 이분들은 모두 우리의 대의를 따르기에 제 무례한 청에도 개의치 않고 이곳까지 찾아와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그 대의에 동참해달라 청하려는 것이겠군.”
“조선국에는 이런 속담이 있소.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면 보따리라도 내놓으라 해야 한다고.”
꺽정이가 끼어들었다. 제멋대로 비틀어 말한 속담으로 인해 조선인에 대한 묘한 소문이 한동안 사카이에 돌게 될 터였으나, 꺽정이가 알 바는 아니었다.
“물론 처음에는 임자네 저택을 날려버리겠다고 겁박해서 끌고 올 생각이었지만, 어쨌든 결국에는 임자 목숨을 우리네가 구해준 셈이 되지 않았소? 그러니 값을 내시오. 그때 했던 내기대로 임자가 검술만 따지면 천하제일이라고 떠들어드릴 테니, 임자도 그 막부니 뭐니 하는 우스운 놀음을 집어치우란 말이오.”
“여기서까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심산이시오? 내 그대의 덕으로 목숨을 건진 것은 맞소. 여기에 대해서는 이 요시테루,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뿐이오. 허나 내 조상께서 세우시고 지금껏 이 나라를 지켜온 막부를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 없소.”
“어허, 마저 들어보시오. 어차피 임자가 우리 쪽으로 왔으니, 그 동군의 오다 노부나가라는 놈은 빈집이 된 여기 일본국 서울로 올라와서 또 꼭두각시를 세워야 할 것이오. 듣자하니 그게 일본국 법도라는데, 좀 이상하기는 해도 나는 워낙 마음도, 견식도 넓은 사람이라 다 이해한다오.
헌데 나야 그렇다 쳐도, 이 나라 전체로 보면 조금 창피한 일 아니오?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눈 가리고 아웅하는 놀음을 할 것이오? 나라를 다스린다 하려면 정말로 백성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할 것이요, 그것이 여의치 못하면 적어도 백성들 뜻을 들어주는 시늉쯤은 해야지. 대체 그 무가인지 막부인지 하는 것은 언제 백성의 동의를 받아 세워졌소?
그러니 막부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새로 뭔가를 세울 것이오. 그 이름은... 글쎄...”
정작 중요한 대목에서 막힌 꺽정이를 갈음하여, 히데요시가 나섰다.
“정부(政府) 어떻겠습니까? 대정(大政)의 권세를 대신 행사하는 것이니까요. 공가와 무가, 그리고 우리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 위해주는, 또 모두 함께할 수 있는 그런 제도를 세우는 것입니다.
쿠보사마께서는 이미 잃을 게 없으시지 않습니까? 차라리 지니신 허명(虛名)을 모두 걷어치우고, 우리와 손잡고 더 나은 천하를 위해 나서는 것이 어떨지요?”
그 ‘더 나은’ 천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떤 무장들에게는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을 약속하는 듯하였다. 무엇을 어떻게 약조하였는지는 몰라도, 이 방을 메우고 있는 무가의 사내들 중 가장 기세가 높아 보이는 이들이 쇼군 앞에서 무엄하다고 언성을 높이거나 분개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을 보면 명백하였다.
“조슈(長州)의 모든 힘과 재물이 이 대의를 위하여 쓰일 것입니다.”
“삼가 말씀 올리건대, 저희 사츠마의 사내들 또한 저 뜻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모리 씨를 대표하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와 시마즈 씨를 대표하는 시마즈 토시히사가 각각 한 마디씩 보태어 찬동하는 뜻을 드러냈다.
쇼군 본인이 직접, 막부의 효용은 다하였으니 이제 새로운 무언가를 세울 때가 되었노라고 나선다면 그만한 명분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여러 준걸들이 토막(討幕)의 기치를 내걸고자 하고 있습니다. 쿠보사마께서 함께하신다면, 가고시마부터 에조치(홋카이도)까지 그 누구도 우리의 명분을 의심하지 못할 것입니다.”
히데요시가 공손하나 아첨하지 않는 말투로 정리하였다.
저들이 처음부터 노린 것도 이 점이리라. 동군의 세가 강성할 뿐더러, 서군을 추월할 기세로 더욱 드세지고 있으니, 이를 막아내기 위해 명분의 힘을 빌리려는 것일 터.
그러나 정녕 요시테루는 이를 원하는가? 애초에 저들이 말하는 ‘정부’가 과연 올바른 길이기는 한가? 지금껏 난세에서 생존하며 막부의 위엄을 되찾는 것만을 고민하던 요시테루의 머릿속이, 뒤늦게 혼란으로 가득 찼다.
때마침 문밖에서 조심스러운 인기척이 있기에, 마음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자신이 이 자리에서 가장 천하다 여기는 고니시 류사가 저도 모르게 일어나 문을 슬쩍 열었다.
“그, 송구스럽습니다만, 오와리 국의 상인 차야 시로타로라는 이가 찾아와, 오와리 사람들을 대표하여 이 모임에 끼고 싶다고 하였답니다. 아주 귀한 예물을 들고 왔다는데, 어찌해야 할지요?”
대체 어떻게 이 모임에 대해 알았다는 말인가? 그런 의아함이 가장 먼저 류사의 머리를 스쳤다.
급히 히데요시에게 눈길을 주었는데, 그쪽도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거 들여보내 주시오. 공가부터 백성까지 모두를 위하려 한다면서, 왜 나 하나는 막으려 드는 것이오?”
“그, 허리춤에 칼도 차고 계시거니와, 뒤에 경호하는 이들도 있지 않습니까? 승낙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안 됩니다.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그리고 열린 문틈으로 바깥에서 고래고래 외치는 소리까지 들려왔으므로, 결국 방 안의 모두가 바깥의 소란을 알게 되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들어서 나쁠 것까지 있을까. 금방 다녀오겠소. 설마 저놈도 조선의 귀한 약이라며 화약을 들고 오진 않았겠지.”
꺽정이가 가장 먼저 일어나서는 성큼성큼 나갔다. 그러다가 자신이 일본 말을 모른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고는 히데요시를 붙잡아 끌고 나갔다.
그러고는 껄껄 웃으며 들어왔다. 반면 히데요시는 한껏 심각한 얼굴이었다.
“야, 이놈 참 담이 크긴 하구나!”
“딱히 과찬은 아니구려. 내 많이 듣는 말이라서.”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온 이는, 다름아닌 오다 노부나가였다.
“쇼군의 앞날을 두고 일약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들었소. 미요시 삼인중 중 엊그제 죽지 않은 마지막 하나의 목을 들고 왔으니, 이것을 예물이라 치고 나도 이 자리에 끼워주실 수 있으시겠소, 아시카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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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에서 에이로쿠의 변을 일으켜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살해한 미요시 세력은, 막부 없이 직접 일본을 통치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곧 엄청난 내분에 휘말리게 됩니다. 이를 틈타 상락에 성공한 오다 노부나가는, 미요시 씨의 집안싸움 과정에서 옹립된 1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義榮)를 몰아내고 요시테루의 동생인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새로운 쇼군으로 추대합니다.
그러나 작중에서와 달리 이 시점에서 노부나가의 동맹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하나가 전부였고, 노부나가의 거침없는 행보와 성장세는 삼면에서 경계를 사고 있었습니다. 형 요시테루처럼 다른 다이묘의 꼭두각시 신세를 벗어나려 하였던 요시아키는 이를 이용하여, 노부나가를 경계하는 모든 주변 세력에게 노부나가를 포위할 명분을 줌으로써 反 노부나가 연합을 결성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미카다가하라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에게 패하는 등, 노부나가 세력은 한때 위기를 맞이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노부나가가 주변의 유력한 적들을 붕괴시키고 천하인으로 성큼 올라서는 계기가 되지요. 기나이를 완전히 평정한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씨의 무로마치 막부를 무너뜨렸고, 서쪽으로 도망쳐 모리 가문에 의탁한 요시아키가 노부나가 사후인 1588년 히데요시에게 사실상 끌려와 쇼군직을 반납하면서 명목상으로나마 존재하던 막부는 완전히 붕괴하게 됩니다.
지난화에도 언급된 무사시보 벤케이는 일본 내에서 흔히 천하장사의 대표격으로 자주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헤이안 시대 말(12세기 말), 겐지와 헤이지 두 무가 일족이 일본의 패권을 두고 겨루던 겐페이 시대의 가장 유명한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가신들 중 충직함과 용력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지요. 겐페이 시대가 미나모토 가의 승리로 끝나고, 요시츠네가 그의 형인 요리토모에게 토사구팽을 당할 때에도 끝까지 주군의 곁을 지켰고, 결국 쫓기는 몸이 된 요시츠네를 지키기 위해 홀로 대군에 맞서다가 온 몸에 화살을 맞고 선 채로 죽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일본 창작물에서 흔히 오마주되는 일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