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천하포무 (4)
다다미 위에 놓인 미요시 삼인중의 마지막 하나, 미요시 나가야스의 목.
그것을 아주 좋은 선물이라며 내려놓고는 당당히 방 가운데께에 앉은 오다 노부나가.
한껏 긴장한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서국 무장들.
언제 시시덕대었냐는 듯 한껏 진중해진 린죠 히데요시와 이 모든 것이 참 재밌다는 듯 팔짱 낀 조선 천하인 임꺽정.
한순간에 살풍경하게 변한 다다미 열두 칸 방 구석에서, 고니시 류사와 사카이 상인들은 숨이 막혀 저도 모르게 연신 옷깃을 매만졌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우선은 임 당수께 감사하다 말씀을 드려야겠소.”
‘하야시 쇼군’ 대신 ‘임 당수’라 똑바로 부르며 노부나가가 운을 떼었다.
“무슨 소리냐.”
“작게는 살아서 교토를 빠져나가면서 여기 쿠보(쇼군) 나리까지 구명해준 것이 고맙고, 크게는 임 당수로부터 받은 가르침 하나하나가 다 감사하지. 당장 엊그제 우리 군세가 당당하게 기나이로 진공하여 미요시 놈들을 박살낸 것도 당수에게서 배운 것과 다름없다오.”
조선의 흑염룡에게서 배운 술수 하나. 적의 생각 자체를 앞질러 움직여버리면, 적대할 뜻조차 품기 전에 상대를 해치워버릴 수 있다는 것.
기요스 성에 모인 동국 무장들은, 오직 회의만을 위해 온 것이기에 대동한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거침없이 그 얼마 안 되는 병력에 자신이 즉시 일으킬 수 있는 군세를 합하여, 오천이 채 되지 않는 군사로 바로 기나이로 진공하였다.
병력은 턱없이 부족하였으나, 대열의 맨 앞에서 달리는 기수들이 자랑스레 내보이는 우마지루시(馬印)의 기세는 하늘에 닿았다. 중간의 아자이(淺井)도, 롯가쿠(六角)도 막지 못하고, 오히려 부리나케 달려나와 동국의 효웅들을 맞이하며 평소 그들의 무위(武威)를 선망해 왔노라 마음에도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멍청한 미요시 놈들이 일단은 무가의 수장인 쇼군을 명분 없이 친 것도 모자라 아예 놓치기까지 했으니, 기나이 일대에서 눈치 보던 놈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오.”
물론 아자이든 롯가쿠든, 미요시 가의 야심 숨긴 가신들이든, 한데 모여 세력을 꾸린다면 여전히 무시 못할 규모이기는 했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그럴 겨를을 주지 않았으므로, 머리 맞대고 공동으로 대처할 엄두도 못 낸 채 각자 두 손 들고 동군의 말석에라도 들기를 청하게 되었다.
서군이 일본 천하의 주인이 된다면 기나이의 무사들은 사카이 상인들의 아랫사람으로 떨어질 것이 명백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교토에 난 불길을 잡느라 – 아직도 곳곳에 잔불이 꽤 남아 있다고 합디다 – 바빴던 미요시 놈들은 내가 교토 지척에 닿을 때까지 제대로 대응도 못 하였지. 여기 미요시 나가야스 이놈은 멋모르고 우리에 저항하다가 이 꼴이 되었고.”
연소하고 경솔할지언정 사세 판단은 빨랐던 미요시 가의 당주 요시츠구는, 나가야스의 목과 복속의 약조로 오다 노부나가의 창끝을 피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저 미요시인지 미역인지 하는 놈들이 느닷없이 우리를 노리고 달려든 것도 네놈이 수작을 부린 일이었느냐?”
여전히 이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들 중 가장 – 심지어 노부나가보다도 – 태연한 기색인 꺽정이가 마치 엊그제 저녁밥 밥값 이야기하듯 물었다.
“나는 그저 미요시 머저리들에게, 당수든 쇼군이든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톡톡히 경고했을 뿐이오. 어차피 당수가 쇼군을 빼돌리게 된다면, 그와 척진 미요시 놈들은 알아서 우리에게 귀부할 수밖에 없었거든.
물론 미요시 놈들이 저들 주제를 모르고 날뛸 공산이 없지 않다는 것도 짐작은 했소. 허나 그 정도도 못 이겨낼 임 당수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
“결국 우리는 네놈 좋은 일만 해준 꼴이로구나.”
“대신 당수는 쇼군을 손에 넣으셨잖소. 이만하면 서로 이득을 남겼다 할 만하지 않소?”
저와는 어린아이와 어른만큼 덩치가 차이나는 임 당수 향하여 한치도 물러나지 않고 말대꾸하는 오다 노부나가였다.
패기와 만용 사이 어딘가에 있는 그 모습에 무장 모두의 이목이 여전히 쏠려 있음을 확인한 노부나가가, 느닷없이 손뼉 한 번 치고는 화제를 돌렸다.
“자, 잡담은 거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그러고는 요시테루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시카가 공, 함께 교토로 돌아가십시다. 막부의 수장 노릇은 해야 하지 않겠소?”
“방금 전에는 내가 여기 이 작자를 손에 넣었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그건 그때고, 이건 지금이오.”
끼어드는 임꺽정에게 뻔뻔한 대답이 돌아갔다.
(이 자리에서 노부나가에게 주눅들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던 히데요시가, 꺽정이에게 슬쩍 ‘정말로 당수에게 많이 배운 듯한데요.’하고 귓속말을 하였다.)
“그런 소리를 하기에 앞서 네놈 명줄부터 걱정해야 하지 않느냐? 아직 이 나라 대권을 두고 진짜 싸움이 벌어지지는 않았다지만, 어쨌든 네놈은 여기 있는 놈들의 적을 자처하고 있잖으냐.”
“당수께서는 사지(死地)로 들어가는 것을 밥 먹듯 하시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동아줄 하나를 허리에 매고 들어가는 것을 잊지 않으셨소. 내가 당수로부터 배운 것 중 하나기도 하오.”
그러면서 장난스레, 저의 허리춤에 마치 동아줄이 매여 있는 양 손장난을 해보이는 노부나가였다.
“내가 여기서 절명하면 오히려 우리 동군에게는 더 이득이요, 당수를 따르는 서군에게는 손해가 막심할 것이외다.
물론 내가 동국 무장들 중에서는 가장 잘난 놈이긴 하오. 그렇지만 내 빈자리를 메울 방도가 없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거든. 대충 이에야스 놈과 우에스기 겐신 둘이 힘을 합하고 호조 녀석이 뒷받침을 하면 될 것이오.
반면 이 자리에서 내 목을 베면 어찌 될까. 교토의 절반을 불태우면서 쇼군을 빼돌린 것은 오로지 명분을 위함이었지. 헌데 나를 죽이면 그 명분 싸움에서 완전히 승기를 놓치게 될 것이오. 세상의 모든 명분 중에 가장 강한 것이 목숨 걱정 아니겠소?”
보아라, 저 조선 민주당과 그 끄나풀 자유민주당은 무사의 목숨을 저리 가볍게 다루는구나. 너희가 우리 동군에 가담하지 않으면 너희 또한 반드시 저리 될 것이다.
동군의 무장과 그 아래 가신들이 그렇게 떠들고 다니는 모습이 서군 사람들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내 본론으로 들어가겠노라 해놓고 또 잡설로 빠졌군. 이의 없으시다면 나는 이제 우리의 쿠보사마께 유세를 조금 해 보이겠소. 아무래도 이런 일은 말만 번지르르한 중놈이나 공경(公卿)을 통하는 것보다는 본인이 직접 출두하는 쪽이 낫단 말이지.
잘 들으시오. 이 노부나가라는 놈이 이렇게 뭔가 진지한 이야기를, 그것도 길게 늘어뜨려 떠드는 것은 흔치 않는 일이니.”
다시 쇼군을 직시하며 노부나가는 말을 이었다.
“여기 임 당수는 속내를 감추지 않는 성품이시니, 아마 쇼군 그대도 들었을 것이오. 보나마나 장차 막부를 폐하겠노라, 허수아비 쇼군 노릇을 계속 하는 것보다 허울을 걷어치우고 실권을 노리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그렇게 회유하려 했겠지.
반면 그대가 나와 함께 떠나겠다는 의사를 보인다면, 여기 모인 이들도 쇼군 그대를 막지는 못할 게요. 이미 마음 떠난 이를 굳이 붙잡아본들 별 쓸모 없음을 알기 때문이지.”
“그래본들 미요시 일족의 자리에 그대가 그대로 들어올 것 아닌가? 그러한 막부의 쇼군이라면 하지 않으니만 못하다.”
이제는 딱히 공손한 시늉조차 하지 않는 노부나가의 말에, 의심하는 요시테루의 물음이 이어졌다. 그리고 돌아오는 것은 뜻밖의 대답이었다.
“아니, 나는 막부에 실권을 돌려줄 것이오.”
“무어라?”
“막부를 무너뜨리려는 자들에 맞서는 것이니, 우리 동군은 좌막(佐幕)하는 군대라고 내세우면 되겠군.
무가가 이 나라 일본을 다스려야, 비로소 내가 천하포무(天下布武)의 뜻을 펼칠 수 있을 테니. 단, 막부의 실권이 쇼군 그대의 것이 될지, 아니면 다른 이의 것이 될지는 쇼군 그대가 하기 나름이라오.”
정신없이 말을 옮기는 소 모리타네의 통변을 듣자, 꺽정이는 노부나가를 막기는커녕 웃으며 채근하였다.
“재밌는 말을 하는구나. 어디, 더 떠들어보아라.”
“쿠보뿐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잘 알 것이오. 임 당수의 가신들은 사민(四民)이 다 같은 사람이니 그 누리는 권세와 복락도 같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소. 어떻게 이를 이룰지는, 아마 나보다 다른 이들이 더 잘 알 것이니 따로 말하지 않겠소.”
린죠 히데요시와 자유민주당이 상락 후의 일본을 어찌 꾸려나가려 하는지는, 서군 내에서 알려질 만큼은 알려져 있었다.
일공구민의 법도가 시행된 이래, 때로는 울며 겨자먹기로, 때로는 이웃 영지가 더 큰 타격 입으리라 여기며 고소한 마음으로 민심을 듣는 제도를 여러 쿠니에서 세운 바 있었다. 각 쿠니에서도 영주가 영민의 뜻을 듣고 따라야 한다면, 그런 영주들 위에서 공무(公武)의 권세를 행사하는 이들 또한 같은 원리에 따라야 할 것이었다.
무사와 공경, 승려들이 손에 흙 묻히지 않고 살 수 있게끔 하는 이들. 지금껏 높은 이들이 스스로 위해준다 말은 하였으나 실제로 위해주지는 않은 이들의 뜻을 듣고, 그들의 이익에 따르며, 나아가 그들과 더불어 나랏일을 논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법도가 천하 어디에 있느냐 따져묻는 이에게는, 그저 바다 건너 조선을 보여주면 그만이었다.
“나는 이렇게 묻겠소. 백성의 뜻을 듣고 그 뜻을 따른다면, 천하가 과연 태평해지겠소? 아니,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보오. 사람의 천성과 타고난 재주는 차이가 있으나, 욕심은 똑같소.
그러므로 모든 이들이 국정을 논하게 된다면, 결국 어떤 덕도, 고상한 재주도 드러나지 않고, 다 같은 욕심으로 벌어지는 아귀다툼만 남겠지. 고매한 자는 어리석은 자에게 발목을 잡히고, 가장 뛰어난 영웅도 주변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지닌바 재간의 십분지일도 드러내지 못할 것이오. 그 십분지일마저도 천하를 태평하게 하기보다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데 쓰일 것이고.
이것이 지난 백 년의 난세 아니었소?”
“그래서 그대는 이 난세를 어찌 헤쳐나갈 수 있다고 보는가? 적어도 규슈의 서군은 새로운 방도를 내세우고 있지 않은가.”
“내가 밝힌 것처럼, 막부를 되살리는 것이오. 그곳에 나라의 가장 뛰어난 이들이 모여, 그 재주를 나라 태평케 하는 데만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 쇼군이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자라면, 곧 막부를 저의 것으로 삼을 것이며,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대신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 정사를 위임할 것이오.
그리하여 가장 뛰어난 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영예와 부귀를 누릴 수 있도록 하여준다면, 그는 채워지지 않는 마지막 욕심, 이 세상에 저의 살다 간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그 욕심만을 위하여 봉사하게 될 것이오. 나라의 법제를 가다듬고, 모두를 이롭게 하는 새 제도를 세우며, 다른 나라의 뛰어난 문물을 본받아 옮겨오겠지.”
장거정이 자신이 걷는 권신과 간신 사이의 얇디얇은 칼날 위에서 수많은 밤 새워가며 스스로 주고받은 문답, 한때 황제였던 압스부르고의 카를로스가 바야돌리드의 궁전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느끼며 천착한 고민.
그 답을 북경에서 온 편지를 통해 받아보고, 자기 나름의 색깔을 덧입혀 저만의 생각, 저의 대의로 품은 노부나가였다.
“가장 뛰어난 자라.”
“그렇소. 그리고 이 나라의 무사들은 이미 백 년의 난세를 거쳐 그나마 뛰어난 자들만 남았지. 지닌것은 집안의 위명뿐이면서 무가랍시고 거들먹거리던 얼간이들은 이미 대가 끊어졌고, 품은 재주 외에는 아무것도 없던 이들은 난세를 이겨내고 우뚝 섰소.
내 장인어른 도산(斎藤道三, 사이토 도산) 공은 미노(美濃)의 기름장수였소. 내 으뜸가는 벗이자 내가 아는 자들 중 가장 의뭉스러운 녀석인 타케치요, 아니, 미카와노카미(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상은 떠돌이 중놈이었고.
이런 자들이 난세 백 년을 거치며 비로소 바닥에서 올라와 나라의 대사를 논할 수 있게 되었소. 재주 있는 자들이 비로소 못난 놈들에게 얽매이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오. 마침내 이렇게 옥석(玉石)이 가려졌는데, 이를 다시 헝클어버린다면 아깝지 않겠소?”
재치있게 툭툭 던지는 말과 전장에서의 명령은 몰라도, 이렇게 유세하며 길게 떠드는 것은 노부나가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 굳게 믿는 말을 털어놓았기에 도리어 마음이 한껏 호쾌할 뿐이었다.
다만 목이 마른 것은 어쩔 수 없어, 마치 저의 거성 안에 혼자 있는 것처럼 편하게 허리춤의 조롱박을 풀어 목을 축였다.
지금껏 제육천마왕이니, 오와리 얼간이니 하는 별명 뒤에 가려져 있던 이의 면모를 이 자리에서 새로 보게 된 이들은 그런 노부나가를 가만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보기에 쇼군 그대는 선대와는 달리 제법 훌륭한 인재요. 내가 품은 구상에 따라 막부를 이끌든, 더 재주 있는 이에게 맡기든, 어느 쪽이든 제대로 할 수 있는 자란 말이지.”
“그리 말하는 것을 보니, 그대가 말하는 천하포무란 이 나라 일본 예순여섯 주에 머물지 않는 듯하군.”
요시테루 물음에, 또 한 번 거침없는 답이 쏟아져나왔다.
“잘 보시었소.
이 나라 일본은 류큐에 비하면야 크지만, 드넓은 천하에 비하면 작디작을 뿐이오. 나도 깨달은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머지 무장이란 놈들은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런 일본이 천하의 대세에서 가장 값지게 한몫 할 기회가 찾아오고 있소이다. 남은 질문은, 그렇다면 일본이 어느 쪽의 편을 들 것이냐, 이것이오.
일본은 조선과 명, 아니, 임꺽정과 장거정 양측에 모두 입맛 다실 만한 패요. 석고(石高, 미곡 생산량)로 치면 조선과 비등하거나 더 높을 것이요, 무엇보다 백 년 전란으로 다져진 정예한 군사가 다 합치면 수십만에 달하지.
명국의 장거정은 수세에 몰렸소. 뭔가 해보기도 전에 곳곳에서 찔리고 가로막혀, 몇 년 안으로 결판을 보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였지. 우리 동군은 그 덕에 이렇게 세력을 모았고.
나는 장차 이 나라의 군세를 이끌고 닥쳐올 전란에서 자칭 천조의 편에 서고자 하오. 이 나라 일본의 값을 가장 후하게 받을 수 있을 때, 나라를 판돈삼아 거대한 노름판에 뛰어들고자 하오.”
그리하여 천하의 중심이 되고자 몸을 일으키는 나라, 온 천하를 아우르게 될 나라의 우두머리 중 하나로 오르고자 하는 것이 노부나가의 욕심이었다. 천하포무라면 그쯤은 노려야 장부의 목표라 할 만하지 않겠는가.
지금껏 그의 또 다른 스승이자 최대의 물주였던 장거정이, 또는 그가 새로 세운 황제가 자신을 능히 거둘 만한 이라면 기꺼이 그들의 오른팔이 될 것이요, 만약 노부나가 그만 못하다면 역시 흔쾌히 천조대국의 막후 실세가 될 것이다.
“할 말은 다 하였느냐?”
무거운 정적을 가장 먼저 깨뜨린 것은 역시나 임 당수였다.
“그렇소. 내가 그렇게 온 천하에 이름 떨치게 되면 천하의 변방에서 스스로 천하라 속이며 살아온 일본에게도 제법 이로울 것이다, 그런 이야기까지는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으리라 믿소.”
“그렇다면 내가 네놈이 지금껏 떠든 것을 논박해도 되겠느냐?”
“물론. 유세를 하고자 이렇게 적진에 단신으로 뛰쳐들어왔으니, 당연히 감수해야지.”
“알겠다. 그렇다면 내 격물의 방도로써 네놈을 일깨워주겠다.”
요시테루를 필두로, 이 자리에 모인 무장들은 모두 검에는 일가견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휘두르는 그 어떤 검과도 비견될 만한 빠르기로, 무언가가 휘릭 하고 지나가더니 방금 전까지 방 한가운데 앉아 있던 노부나가가 사라진 것은 그들 중 누구도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잠시 뒤 우당탕 소리가 들리고, 구겨지듯 부서진 미닫이문에까지 눈에 닿은 뒤에야, 하야시 쇼군이 번개처럼 오다 노부나가에게 달려들어 방 밖으로 메다꽂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어나라, 이놈아. 네놈을 죽이려고 했으면 진작에 네놈 명치에 주먹을 박아넣었을 것이다.”
안뜰까지 나가떨어진 노부나가가 움찔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디 긁혔는지 피는 조금 났지만,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꺽정이 말마따나 그뿐이었다.
“논박이라기에 무언가 그럴듯한 말을 기대하였는데, 참 임 당수답구려.”
자빠질 때 어디 코를 들이박았는지 슬그머니 흘러나오는 코피 한 줄을 닦아내며 노부나가가 실소하였다.
“격물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대체 무얼 입증하신 것이오?”
“네놈 말이 죄다 헛소리라는 것을 입증하였지.”
자존심 강한 두 사람의 숨막히는 논리 대결에 좌중 모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잘난 놈과 모자란 놈이 죄다 섞여서 공론을 운운하는 것보다, 가장 잘난 놈이 맨 위에 올라앉아 국사를 다루는 것이 더 낫다, 네놈 하는 말이 바로 그 소리 아니었느냐?
그런데 보아라. 네놈이 그리도 잘났다면, 어째서 이렇게 형편없이 손 한 번 못 써보고 나가떨어졌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가 너보다 잘난 것이냐?”
“그야 당연하지 않소?”
조선의 흑염룡에 대하여 알 만한 것은 다 안다고 자부하는 노부나가였다. 일본의 히닌(非人, 천민)처럼 비천한 출신으로 몸을 일으켜, 고작 오 년 사이에 조선을 저의 것과 다름없게 만든 사내.
일본 천하가 아닌 참된 천하를 두고 말한다면, 지금의 천하에서 천하포무 넉 자에 가장 어울리는 사내는 저 임꺽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임꺽정은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헛소리 집어치워라. 나는 그냥 도적놈이다. 용력이야 꽤 뛰어나고 무예도 출중하고, 그리고 이왕 도적질하는 김에 천하에서 가장 이름난 도적이 되려고 하고는 있지만, 그래보아야 일개 도적놈이란 말이다.
장사하는 재주로 보나, 사람 모으고 다루는 재주로 보나, 나라 다스리는 재주로 보나, 배 몰고 천하 대양 누비는 재주로 보나, 나보다 잘난 놈은 쌔고 쌨다. 그런 이들이 어쩌다 보니 내 곁에 모여들어, 나와 함께 힘을 합쳐 세상을 뒤엎으려 할 뿐이다.
네놈이 호언장담한 것의 절반만큼이라도 재주가 있다면, 아마 네가 나보다 뛰어난 점이 꽤 많을 게다. 허나 당장 이 자리에서 내가 네놈을 맨손으로 죽이려고 할 것 같으면 네가 날고 기어도 막을 수는 없겠지.
사람 재주라는 것이 대개 이러할진대, ‘가장 잘난 놈’이라는 것이 세상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느냐?”
검술에는 조예 있으나 그것을 제하면 세이이타이쇼군 관직뿐인 사람, 서국 제일을 자처하지만 말 그대로 여러 세력 중 그나마 두드러진 하나일 뿐인 모리 집안의 사람, 시마즈 이름을 걸고 부끄럽지 않게 산다고 자부하지만 결국 시골 무사일 뿐인 시마즈 가의 사람, 장사에는 통달하였으나 그뿐인 사카이 상인들까지.
모두 그 말에 뜨끔해하면서도 공감하였다.
“그러니 재주 있는 자들을 암만 모아서 남의 머리 위에 세운다 한들, 결국에는 영 모자라고 같잖은 놈들이 상전이랍시고 거들먹댈 뿐일 테다. 욕심쟁이, 머저리, 온갖 잡것들과 어중이떠중이들을 데려다 놓고서 공론을 모으라고 하는 게 최선은 아닐지 몰라도, 머저리 한둘보다는 머저리 백 명이 모여서 내는 꾀가 낫지 않겠느냐?”
시종일관 그 오만한 미소를 짓던 오다 노부나가 입가에, 고소(苦笑)가 감돌았다.
그래도 명색이 다이묘, 그것도 일본에서 가장 유력한 영주를 마냥 홀대할 수는 없는지라, 노부나가는 그날 밤 쇼군 요시테루가 거하는 그 화려한 여관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노부나가가 몰래 사카이로 찾아와, 어떤 영문인지는 몰라도 된통 얻어맞고 피멍 든 채로 떠났다는 소문이 돌면 그 역시 곤란한 일이었으므로, 히데요시는 사람을 보내 여인들 바르는 분이며, 피멍 가라앉히는 약이며 – 약재상 고니시 류사의 도움이 제법 컸다 – 이것저것을 구해왔다.
“그래도 완전히 빈손으로 돌아가지는 않게 되었군. 당수와도 덕분에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고, 또 이쪽 서군의 동향도 얼추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오.”
여전히 저의 옛 영주에 대하여 만감 교차하는 히데요시는 그 말에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우리의 쇼군, 그러니까 진짜 쇼군 말이오, 그이는 별 말 없었소?”
“궁금하면 가서 직접 물어보지 그러시오?”
“하, 되었소. 그만한 눈치는 있으니. 보나마나 임 당수 말에 흔들린 마음이 그대로 기울었겠지. 의도야 어찌되었든, 저의 목숨 구해준 그 은혜도 있으니 말이오.”
히데요시는 더 대꾸하지 않고, 대충 목만 까딱하고는 방을 나갔다. 그러든 말든 노부나가로서는 제법 흡족하였으므로, 나가는 사람 등에 대고 아쉬운 말 하는 대신 그냥 발라당 드러누웠다.
비록 쇼군이, 그리고 강력한 명분이 서군 쪽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저쪽 무장들 사이에 은근한 회의를 심어주었을 테니 그것으로 족하였다.
노부나가가 어느새 코를 드르렁 골게 된 방의 건너편, 저의 방에서 임꺽정을 만난 요시테루 역시 비슷한 고민을 품고 있었다.
“아마 하야시 쇼군 그대가 아니었다면, 그대도 잘 알고 있다시피 나는 저 미요시 놈들조차 당해내지 못하고 어소에서 꼼짝없이 죽음을 맞았을 게요. 검술에 조예가 있었고 나름 의욕도 있었으나 천운이 따르지 못한 쇼군, 그렇게만 알려지고 끝났겠지.”
그리고 그를 그러한 궁지로 몰아넣은 미요시 일족을 애들 장난하듯 무너뜨려버린 이들이, 요시테루 그를, 나아가 막부와 일본 전체의 운명을 두고 대립하고 있었다.
저의 지닌바 재주가 얼마나 되는지는, 그것을 제대로 드러낼 겨를이 없어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눈앞의 조선인 거한에 대한 사감을 내려놓고 생각해도, 동군보다는 서군 사이에서 자신이 운신할 여지가 더 클 것도 같았다.
“그렇지만 오와리노카미가 외친 것도 아예 틀리지는 않소. 우리 무사들은 분명, 말로는 백성을 위한다고 해도 그들과 동석하라 하면 질색할 수밖에 없지. 분명 함께 오다 그자의 말을 들은 다른 무장들도 비슷한 생각을 품었을 게요. 마음을 단번에 고쳐먹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의심의 씨앗은 심어졌다고 해야 할까.”
“이제는 우리 쪽 걱정도 해 주시는구려.”
“거처가 급습당하여 비명횡사의 위기를 겪는 것은 살면서 한 번이면 족하지 않겠소.”
요시테루가 웃음기 한 점 없이 말했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설령 동군을 한두 번 싸움으로 꺾는다 하여도 내분이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게요.”
의심이라는 것은 대개 그러하였다.
그들이 상락하여 세울 정부에 상인과 농민의 자리를 마련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왜 싸우는 것은 무사들인가?
저들은 여전히 무사를 공경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난세가 끝나고 무사의 쓰임새가 다한 뒤에도 상인과 농민들이 고분고분하게 길에서 고개를 숙일 것인가?
토막과 좌막이라는 좋은 명분이 양쪽에 생겨버린 이상, 동군과 서군의 격돌이 임박하였다는 것은 이전보다도 더욱 선명해지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무장들의 비중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서군 안에서도 의심의 싹이 틀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고민을 듣자, 꺽정이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렇다면 놈들에게 명분의 효용을 보여주면 그만이지.”
“무슨 말씀이시오?”
“한양에 서간 한 통만 쓰면 된다오. 전국의 공론이 요동쳐서, 조선의 제도를 본받아 일대 경장을 이루려는 일본국 대군을 도와야 한다는 말이 팔도 곳곳에서 나오도록.”
“정말 그것 하나로 족하겠소?”
요시테루의 의심 가득한 물음에, 꺽정이가 자신 있게 단언하였다.
“물론이지. 공론을 주의로 삼으려 하는 나라에게 우리 조선만한 군기고(軍器庫)는 없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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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오다 노부나가가 언급하는, 새로운 막부의 형태는 어느 정도는 에도 막부에 의해 실현됩니다. 철저한 신분제 – 사회 전체에 대해서도, 다이묘 내에 있어서도 – 질서를 세우고 강력한 중앙권력으로 이를 유지하며, 다만 쇼군 한 사람이 이를 모두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봉행(奉行, 부교)의 관료들과 원로 가신 집단인 로주(老中) – 에도 막부 중기부터는 로주 중에서 추대되는 다이로(大老) - 의 보좌를 받는 형태였지요. 비록 이러한 체제는 오다 노부나가가 말하는, ‘재주 있는 자들의 막부’와는 거리가 있었고, 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 집안에서만 인재를 등용하는 등 한계가 있었지만, 에도 막부가 그 이전까지 천황의 조정과 두 막부에서 고질적으로 발생했던 흑막 실세와 명분상 주군 사이의 갈등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로 안정적인 중앙집권을 유지한 것은 사실입니다.
지나가듯 언급되는 오다 노부나가의 장인 사이토 도산은 시바 료타로의 대하소설로도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가 기름 장수 출신이었다는 것은 야사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그가 본디 무사 출신이 아니라 한미한 서민 집안 태생이라는 것은 분명하지요. 여하튼 그는 미노 국의 영주 도키 집안을 섬기다가 하극상을 일으켜 미노의 영주가 되었고, 이웃 오와리를 차지한 오다 집안의 ‘얼간이’ 노부나가에게 딸을 시집보냈습니다. 그 덕에 후일 후대인들에게도 관심을 받게 되고, 여러모로 그 행적이 과대평가 내지는 미화되기도 했으니 사위 덕을 본 셈입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해진 전국시대 후기로 접어들게 되면 이렇게 평민 출신으로 기존 무가 집안의 가신으로 들어간 뒤 스스로 영주로 도약하는 사례가 종종 나타나게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