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빛은 동방에서 (1)
한양에 있는 사업당 본당의 뒤편에는 공들여 꾸민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사임당 신씨와 검손당 이씨, 그리고 온 세상의 정원을 다 보고 왔다 자부하는 이탁오까지 온갖 뱃사공이 다 달려들었기에 들어간 공만큼 보기에 좋지는 않고 오히려 난삽하였다.
허나 그 한가운데 있는 정자에서 종이 깔고 놀이하는 데 바쁜 사내 둘과 아이 하나는, 도끼자루 썩는 것도 모를 만큼 놀이에 몰입하고 있었기에 그런 정원의 멋(또는 멋의 부재)에 대해서는 별반 감상이 없었다.
윤목(輪木, 윷과 비슷하게 생긴 주사위의 일종) 굴리는 소리가 한바탕 나더니, 희비가 교차했다.
이름만 영호관(嶺湖關)일 뿐 누가 보아도 산해관인 관문 – 명나라인듯 명나라 아닌 백군(白軍)의 본진이었다 – 바로 앞까지 진격하던 청군(靑軍) 군세가, 관문 코앞의 조그만 성 하나를 끝내 넘지 못하고 윤목의 무정한 심판을 받아 전멸하게 되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요? 순전히 운으로만 돌아가니 못해먹을 놀음입니다.”
다 이긴 줄 알았는데 단숨에 뒤집혀 버렸으니, 할아버지 교창아 따라 솔호 왕깅(한양) 구경 왔다가 이 놀음에 끼게 된 어린 아이신교로 누르하치는 분통이 터지다 못해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일곱살 먹은 여진족 어린아이의 조선말이 제법 훌륭하기도 하거니와, 부루퉁하니 툭 튀어나온 입매가 자못 귀엽기도 하여, 누르하치 뒤에서 놀음 법도 알려주고 훈수도 간간이 하던 권율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왜 어린아이를 울리고 그러는가. 여해(汝諧) 자네도 관례 치르고 장가까지 갔으면 이제 어른답게 굴 때도 되었는데.”
“하하, 저도 모르게 그만.”
이제는 상투도 제법 어울리는 이순신이 머쓱하게 웃더니 누르하치를 슬슬 달랬다.
“자, 자. 아저씨가 잘못했다. 내 과자를 사줄 터이니 뚝 그치거라. 너희 할아버지께서 보시면 얼마나 부끄럽게 생각하시겠니?”
“흥, 기린울라로 돌아갈 때 저 놀음판을 들고 갈 거에요. 우리 숙수후 부의 이름을 걸고 다음에는 꼭 이길 테니 각오하셔요.”
“그래, 그래. 과자 사러 가는 길에 놀음판도 함께 사 주마. 그러면 되겠지?”
그렇게 이순신은 여진족 꼬맹이 누르하치를 데리고 뒷문으로 나가, 임천당으로 향하였다.
이 무렵 사내아이를 순산하고 사업에 복귀한 계월당 상씨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임천당을 아예 오라버니의 진량사에 버금가는 거대한 계사(회사)로 만들어내겠다는 야심을 품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지금의 임천당은 유구 특산 사타안다기만 팔던 시절과는 격세지감이 느껴질 만큼, 동서방의 어지간한 주전부리는 고루 만들어 팔게 되었다. 인천에 정착한 에우로파 장인들의 안사람들이 기꺼이 일손으로 들어오고, 린죠 히데요시가 아직 도키치로였을 때 카트린 드 메디치에게 받아온 프랑스 왕실의 군것질거리 조제법도 얼마 전부터 조선과 중원 사람들의 입을 즐겁게 하는데 쓰이게 되었다.
헌데 그것도 모자라다는 듯 임천당은 온갖 놀음의 기물 파는 쪽으로도 사업을 확장하게 되었는데, 그 연유는 실로 복잡다단하였다.
권점이 끝나고 공회에 대동당 사람이 몇몇이나마 들게 되니, 그것을 축하하자며 한양 토박이 최영경은 시골뜨기 샌님 정여립과 저의 당우들을 데리고 인천 만재루로 향했던 것이다.
그리고 주머니가 홀가분해진 채로 돌아온 정여립은 이튿날부터 도박의 폐단에 대해 성토하기 시작하였다.
헌데 의외로 근래 역병처럼 번지는 투전놀음의 유해함에 대한 이 주장이 공감을 얻어, 공회의 안건으로까지 올라올 기미까지 보였다.
지난해 작고한 아비를 대신해 인천 만재루를 운영하던 한온으로서는 발등에 불똥 떨어진 격이라, 서림에게 달려와 구명의 계책을 간절히 청하였다.
서림 왈,
‘이럴 때는 물타기가 상책일세. 투전 놀음의 잘못이 아니라, 놀거리가 투전뿐인 이 나라 문물의 빈한함이 문제라고 우기면서, 새로운 놀잇거리를 만들어 팔아야지.’
그리하여, 자신이 평양 아전 노릇할 때 즐겼던 승경도를 슬쩍 바꾸어 승람도(勝覽圖)라 이름 붙이고, 전국의 땅을 사들이고 그 위에 농장이나 공방을 차려 치부(致富)하는 놀이를 고안하였다.
그리고 늙은 이원수의 주책없는 참견과 검손이네 새끼 여러 마리의 난동, 꺽정이 아들 철수의 장난질 등 여러 해괴망측한 사정이 겹치고 겹쳐, 그 승람도를 만들어 파는 일은 임천당의 계월당 상씨에게 떨어지게 되었다.
“헌데 막상 가서 보니 승람도만 있는 게 아니라 온갖 놀잇거리를 같이 팔고 있더군요. 투전 패도 그냥 글자랑 숫자 덩그러니 쓰여 있던 것 말고 그림까지 정성들여 그려넣은 것을 만들어서 팔고... 역시 상씨도 그 오라버니 닮은 것이지요.”
한 시진쯤 뒤에 돌아온 이순신이 말했다.
상씨가 닮은 오라버니란, 유구국왕의 자리를 버리고 진량사 우두머리가 된 상환(쇼 칸)을 이르는 것이었다. 진량사는 사탕(설탕)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에도 상씨네 오라버니 이름은 잘 알려져 있었다.
“병법 궁구하는 일에만 밝은 줄 알았더니 언제 완물(玩物)에도 도통하였는가?”
“모악(暮嶽, 권율) 형만 하겠습니까.”
“예끼, 이 사람.”
권율과 어울리다가 지난 병란에서 한양 도성 지키는 일에 자원하고 나선 한량들은, 요새는 다들 한 자리씩 관직 얻어 군관의 길로 나아갔다. 허나 권율 하나만은 모든 포상을 사양하고 도로 한량으로 돌아와 소일하고 있었다. (그 아비 권철로서는 실로 탄식만 나오는 일이었다.)
“보아하니 그 아이가 사달라는 것은 다 사주고 왔겠군.”
“놀잇감 사주겠노라 하였으니 식언(食言)은 못할 일이지요.”
“혹시 거기까지 셈하고서 괜히 우는 시늉을 한 것은 아닐까? 갑자기 그런 의심이 드는데.”
“여간 영악스러운 아이가 아니었으니, 형의 말씀대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 그 아이 상대할 때 진심으로 임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여전히 그들 앉은 정자에 너저분하니 놓여 있는 기물들을 정리하며 이순신이 말을 이었다.
이 운주희(運籌戱) 놀이는 그들이 사업당 깊숙한 곳에서 조선과 명국의 싸움을 두고 모계(謀計)할 적에 쓰던 것을 가져와 간략하게 바꾼 것이었는데, 그 간략하다는 것조차 어지간한 샌님은커녕 현직에 있는 군관조차 쉽게 다루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야, 그것을 어린아이가 금방 이해하는 것을 기특히 여기고 자네가 그리 거칠게 대하는 줄 알았지.”
“아이의 집안은 장차 그 나라의 명문 벌열이 될 것이요, 이대로라면 필시 천하의 대사에까지 관여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아이가 병법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게 된다면 어느 쪽으로든 재화(災禍)의 원인이 되겠지요.”
“허, 과연 아우는 아우로군.”
영특한 아이에게 따끔한 가르침을 주었다는 말이었다. 그 아버지를 닮아 일견 경망스러우면서도, 머리 굵어지면서는 그 속에 굳건한 뜻을 세우게 된 이순신의 속마음을 잘 아는 권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고작해야 탁상과 돗자리 위에서 장수의 시늉을 낼 뿐인 걸요.”
“그 시늉조차 못 내는 놈들이 몇 년 전까지도 이 나라에 한가득이었네.
그나저나 천하의 대사라 하면, 당장 우리 눈앞에 다가오는 것이 하나 있지 않은가? 아이의 조부 되는 교창아 대감이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일 터.”
기린울라에 도읍한 압카이 아파시 구룬은 형님의 나라 조선 – 니탕카이 요한이 임꺽정을 무리의 우두머리로 섬기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 관제를 모방하여 수러 버일러 아래에 여섯 야문(yamun, 아문衙門)을 두었다. 허나 그 숫자만 같았을 뿐, 각 야문의 기능과 구성은 모두 주션 사람들의 필요에 맞추었다.
그중 하나인 호론이 야문(위엄의 아문)은 조선의 관제로 치면 얼추 병조와 비슷하였는데, 그러므로 그 수장인 알리하 암반을 맡고 있는 아이신교로 교창아는 조선 기준으로는 대략 판서대감 소리 들을 만한 자리에 오른 셈이었다.
무릇 스스로 업신여김 당하기를 원치 않는 나라는 다른 나라도 업신여기면 안 되는 법. 그러므로 조선국에서도 교창아를 대감이라 칭해주는 예를 갖추기로 하였으나, 이는 관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아직도 북변 오랑캐를 낯설고 두렵게 여기는 만큼 겉으로 깔보는 자들이 많았으므로, 권율과 이순신처럼 사석에서도 교창아를 낮춰 부르지 않는 이들이 오히려 드물었다.
“고민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올바르다 여기는 대로 행하면 그만이지요.”
생각해보면 이순신은 『화담자의』가 나오기 전의 조선을 기억하지 못하는 첫 세대에 속하였다. 저의 형들이 수군대며 그 책의 이름을 입에 담던 것에 몰래 귀 기울인 기억 선명한 권율은 문득 저의 나이를 느꼈다.
“그것이 그리 쉽지 않으니 다들 골머리를 앓는 것 아니겠소이까.”
늦깎이로 배운 억양 강한 조선말이 들려왔다. 누르하치의 조부 되는 교창아였다. 두 젊은이가 일어나 인사 올리니 교창아도 그리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였다.
“대감께서 이 자리에는 무슨 일이신지요.”
“이 사람이 사업당 안에 든 동안 손주를 잘 돌봐주시고, 나아가 값진 선물까지 주셨다 들었소이다.”
“값지다니요. 고작해야 놀잇감이었습니다.”
아이 달래는 데 결코 적지 않은 동전을 써야 했지만 – 계월당 상씨는 묘하게 서림을 닮아, 사실상 같은 당 사람인 이순신에게도 결코 값을 헐하게 받지 않았다 – 이순신은 아까워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과는 비할 바 되지 않는 귀한 가르침을 주시지 않았소이까? 철부지 손주 녀석은 아직 잘 모르는 듯하지만, 필시 훗날 감사할 때가 올 것이외다. 여간 영특한 녀석이 아니니, 언제고 혼자서 옛일 되새기다 보면 깨닫게 되겠지.”
그러면서 주섬주섬 저의 호주머니를 뒤지는 교창아였다. (저의 다른 겨레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교창아도 더는 저의 ‘오랑캐’ 복식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만일 여기서 아니 받으려 한다면, 그때는 동전을 붙인 화살을 공의 집에 몰래 쏘아넣고 달아날 것이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받지 않는다면 이 또한 지구의 화평을 해치는 일. 결국 이순신이 한 발 물러나, 두 손 벌려 동전 몇 닢을 받았다.
“저기 저놈은 동전이 아니라 그쪽 나라의 절반을 떼어줘도 아니 팔 것이니 매수할 생각일랑 하지 마시오. 우리 사업당 안에서 군병의 일을 논할 때면 율곡 녀석보다도 번뜩이는 게 저 녀석 머리통이란 말이오.”
교창아 꼬리를 밟아 권율과 이순신 있는 정자까지 따라온 이가 그 화기애애함을 거침없이 깨뜨렸다. 이제 막 기우는 해로 인하여 꺽정이의 그러잖아도 큰 덩치가 더욱 큰 그림자를 드리웠다.
“저는 어떻습니까, 당수?”
“아, 말 잘 했네. 여기 이 사람 데려가면 되겠소. 여기는 나라 절반 정도로 팔 테니까, 니탕카이 녀석이랑 잘 협상해서 값을 들고 오시오.”
권율이 너스레를 떠니 꺽정이가 너스레로 받았고, 그에 짐짓 깊은 상처 받은 시늉을 하는 권율이었다.
그렇게 우스갯소리 한 마당이 끝나고, 자연스레 묵직한 이야기가 나왔다.
“만약 우리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여기 두 사람도 그대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려 할 것이오. 그래야 직성이 풀릴 걸.”
“그 뜻이 무엇인지요?”
교창아를 향하는 꺽정이 말을 권율이 대신 받아 물었다.
“그야 일본국 돕는 일이지. 내가 요시테루 그놈에게 우리 조선은 공론을 귀하게 여기는 모든 나라의 군기고 될 것이라 단언하였으니.”
교토에서 도망친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기나이가 오다 노부나가의 손에 들어가자 그 지척인 사카이에서도 벗어나, 지금은 규슈와 주고쿠를 돌아다니며 서군에게 힘 실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부나가는 사카이에서 단언한 것처럼, 시코쿠 동쪽 아와(阿波)에 은거하고 있던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쇼군으로 옹립한 뒤 막부를 입맛대로 뜯어고치는 일에 착수하였다.
교토를 불태운 대화재의 연기는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전운(戰雲)으로 화하여, 교토를 노리는 서군의 비수 사카이 주변에 짙게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훗날 서군 무장들조차 시대가 바뀌었음을, 이제 무가가 다스리던 때는 지나고 공(公, 천황의 조정)과 무(武), 민(民)이 어깨 나란히 해야 할 때가 왔음을 의심하지 못하게 하려면, 그냥 동군과 싸워 이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였다.
“그래서 요시테루로 하여금 우리 조선국의 경장과 헌법 세운 것을 멀리서부터 흠모하였으며, 장차 그 뜻을 본받아 일본에서도 행하려 하니 삼가 도와달라, 대충 그런 국서를 일본 대군(大君, 쇼군) 명의로 써서 보내도록 하였지. 아마 거기까지는 다들 들어 알고 있을 게요.”
어느새 꺽정이 따라 이지함과 이이까지 정자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터벅터벅 올라온 이이가 마치 저의 할 말을 꺽정이가 대신 운 떼어주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레 그 말을 받았다.
“헌데 임 당수가 우리들과 일말의 상의도 없이 툭 던진 호언장담이, 졸지에 공언(空言)으로 화할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일본 예순여섯 주를 통일하고 백 년 난세를 끝내기 직전까지 다가온 오다 노부나가, 그리고 그의 손에 들어간 막부를 무너뜨리는 것만으로도 벅찰 터. 그런데 그 싸움에서 허울뿐인 쇼군 이름과 자유민주당이 그저 따라가는 것도 아니요 이치반노리(一番乗り, 가장 먼저 적의 진지나 성에 돌입하는 공)를 해야 하는 셈이었다.
이를 위해서 꺽정이네 민주당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야, 첫째가 인천과 동래 공방에서 나오는 화포를 지원해주는 일이요, 둘째가 흑의군과 에스파냐 용병들 – 같은 에스파냐 용병들과 직접 싸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민주당 편에 남았다 – 을 바다 건너로 보내 의욕만 높은 상인과 평민들을 매서운 군사로 조련하는 일이요, 셋째가 압카이 아파시 구룬의 투사들로 하여금 그들의 까마득한 조상을 본받아 일본 땅을 누비게 하는 일이었다.
기린울라 조정에서 교창아를 한양으로 보낸 것도, 교창아가 방금 전까지 사업당 깊숙한 곳에서 민주당 요인들과 이야기 나눈 것도 모두 이 일에 대비하여 민주당과 행보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엄연히 하나의 당이지, 조정이 아니니까요. 군병을 논함에 있어 가장 귀한 것은 인화(人和)지만, 오늘날의 싸움에서 그 다음으로 귀한 것은 천시(天時)도, 지리(地利)도 아니요 금은임을 모두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금은을 마련하는 일은, 바로 지금껏 임꺽정과 민주당이 이 나라를 송두리채 바꾸어오고 있었기에 외려 요원해지고야 말았다.
만약 여전히 이 나라를 군왕 한 사람의 뜻으로 다스리고 있었다면, 그저 지금 일본국의 서군에 도움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이익에 합치하는 것이라 상소하여 지존의 마음을 얻으면 그만이었을 테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저 흑의군 몇몇이 넘어가고, 뜻 있는 이들 몇몇이 함께하는 정도로도 일본 서군을 돕는 것은 가할 터. 어찌하여 수군의 대선을 동원하여 멀리 여진까지 끌어오고, 나라의 국경을 튼튼히 하는 데 쓸 수 있을 총통까지 왜인들에게 넘겨야 하는가?
거기에 필요한 금은은 또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왜 그것을 국고에서 내어야 하는가? 더 좋은 곳에 쓸 수도 있을 터인데?
그들을 설득하는 것을 번거롭게 여길지언정, 스스로 일으키고 세운 법도를 민주당 스스로 버릴 수는 없었다.
“허나 암바 버일러께서 허투루 그러한 약조를 하지는 않으셨을 터. 필시 심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거 없소. 아직은.”
“예?”
“계책을 짜는 것은 여기 똑똑한 사람들 몫이고, 내 몫은 이 사람들에게 계책 내놓으라 재촉한 다음,여기저기 다니면서 일을 손수 해결하는 것이라오. 늘 그랬지.”
“그러면서 더 큰일을 일으키는 것도 당수 몫이지요. 겸양할 것 무에 있겠습니까.”
이이가 끼어들어 당수 흉을 보았다.
“뭐, 여하간 그렇소. 이게 다 분역(分役, 분업)이라고, 요새 우리 공방의 소출을 늘리는 이치이기도 하오. 아주 효험 좋은 방도지.”
그 옛날 임꺽정과 니탕카이의 당당한 기세에 탄복하여 그 뒤를 따르기로 한 바 있던 교창아로서는, 지난 십여 년간 그의 삶에 막대한 변화를 일으킨 이 거인의 허심탄회한 말에 만감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무릇 천하의 대사가 제갈무후 같은 이의 신산귀모(神算鬼謀)에 의해 척척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지요.”
이지함이 고개 끄덕이며 덧붙였다.
교창아가 주변을 둘러보니 황당해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늘은 푸르고 땅은 누렇다는 말 들은 것마냥 담담한 얼굴뿐이라 – 심지어 가장 연소한 이순신마저도 – 교창아는 더 깊게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결국 민의를 모으는 것이 가장 중합니다.”
이이가 곁가지로 빠지던 논의를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민심은 물과 같아, 툭하면 넘치고 새어나가며, 흐르기도, 홀연히 사라지기도 하지요. 허나 이를 모은다면 그 어떤 금점(금광)보다도 더 큰 재보를 기꺼이 내어줄 것이요, 그 어떤 병비보다도 더욱 든든한 간성(干城)이 될 것입니다. 태공망의 군략조차 여기서 벗어나지 않지요.”
“오, 뭔가 떠오른 모양이로군. 자, 얼른 마저 떠들어 보거라.”
꺽정이가 맞장구를 쳤다.
“우리 조선국은, 하늘의 보살핌과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써 비로소 천하에서 가장 개명된 나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허나 정작 조선의 대소인민(大小人民) 중 이를 아는 이도, 마땅히 자랑스레 여기는 이도 많지 않지요. 그들이 어리석기 때문이 아닙니다. 무릇 바깥에서 보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 일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율곡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얼추 알 것도 같습니다.”
이지함이 제자의 말을 거들며 끼어들었다.
“사람들이, 또 그들의 뜻을 모으는 공회 안의 네 정당이 모두 한입으로 이번 싸움은 올바른 것이요,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이요, 나아가 온 천하를 바르게 하는 것이라 외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청하고 부탁하되, 저들이 오로지 그 스스로 품은 뜻으로써 우리에게 찬동할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겠지요.
그 옛날 당수께서 헌법의 발상을 내었을 때처럼 말입니다.”
좌중을 둘러보며 이지함이 제자가 꺼낸 말을 대신 마쳐주었다. 이이 또한 역시 스승님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두 사람이 연달아 계책을 논하니, 저 빼놓고 중한 이야기 떠든다는 것을 깨닫고서 후다닥 달려온 서림과 명희는 나중에 이지함이 요약한 것을 듣는 쪽이 훨씬 편하리라는 점을 깨우치고서 조용히 뒤로 빠졌다.
“... 그러므로 우리는, 온 나라 사람들이 잠시 멈추고 스스로 나아온 길을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꺽정이가 멍하니 앉아 있는 교창아를 바라보며 웃었다. ‘내 뭐라 했느냐’ 하는 흡족한 미소였다.
“보시오. 이렇게 분역이 좋다니까? 낯가죽 두꺼운 놈이 하나쯤 있으니 얼마나 일이 수월하게 풀리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장 저 계책의 첫 단추만 따져도, 굉장히 민망할 듯한데요.”
교창아 물음에 뭐 그런 것을 묻냐는 듯한 대꾸가 돌아왔다.
“민망한 것은 민망한 것이고. 우물은 아쉬운 놈이 파야지. 여기서부터는 내가 해야 할 일이니 무슨 거리낄 게 있겠소?”
이것이 바로 편지 한 통이면 조선이 저를 도울 것이라는 임꺽정 말만 믿고 있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히라도로 찾아온 임꺽정에게 또 다시 납치당해 동래로 끌려가게 된 사연이었다.
아시카가 요시테루로서는 그 옛날 오닌의 난과 얼마 전 미요시 당의 어소 급습, 그리고 지금 자신이 처한 곤경 중 무엇이 막부의 권위를 가장 실추시켰을지 잠시 고민하게 되는 일이었다. 물론 그 직후, 바로 자신이 그 막부를 저의 손으로 무너뜨리고자 하고 있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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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표적 보드게임 승경도놀이는 조선 초기에 등장하여, 조선 중기에는 충무공 이순신도 부하들과 자주 즐겼을 만큼 대중적인 놀이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기본적인 틀은 오각형 윤목(TRPG 용어를 빌리면 1d5)을 굴리는 ‘뱀과 사다리’와 비슷하나, 그에 더불어 여러 자잘한 규칙(캐릭터의 출신이나 과거 성적, 각각의 관직에 따르는 특수 규칙 등)이 있는 형태지요. 승경도놀이가 인기를 끌면서 조선 중기 이후에는 여러 파생형 게임도 등장하게 되는데, 여성판 승경도인 여행도(女行圖), 전국 유람을 주제로 하는 승람도(勝覽圖, 혹은 승경도勝景圖), 서산대사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불교판 성불도(成佛圖) 등이 지금까지 알려져 있습니다.
이 중 승람도는 상술한 것처럼 시인, 한량, 미인 등 다양한 캐릭터로 전국을 유람하며 먼저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쪽이 이기는 놀이였는데, 작중에서는 모노폴리와 비슷한 형태로 개량되게 되었습니다. 원 역사의 모노폴리(그리고 이를 다시 모방한 한국의 ‘푸른 구슬’) 역시 본래는 토지 독과점의 폐단을 고발하고 조지즘(Georgism) 원칙을 홍보하기 위한 보드게임 ‘지주 놀이The Landlord’s Game’에서 발원했음을 고려하면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발전 방향이라 하겠습니다.
후금을 세우고 훗날 청태조 천명제로 추숭되는 아이신교로 누르하치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원 역사에서 그는 1583년 조부 교창아와 아버지 탁시가 명군의 실수로 오인사살당한 뒤 숙수후 부를 이끌게 되었고, 조부가 다져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빠르게 건주여진을 장악한 뒤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을 격파, 만주 통일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러나 명의 마지막 명장 원숭환의 활약으로 끝내 산해관을 넘지 못하였고(영원성 전투), 낙담한 누르하치는 끝내 사망하게 됩니다. 물론 작중 시점에서는 아직 할아버지 출장길에 따라온 어린아이지만요.
작중의 압카이 아파시 구룬과 비슷하게, 원 역사에서 후금의 관제는 명의 관제를 답습하면서도 완전히 모방하지는 않는 면모를 보였습니다. 1636년 홍타이지가 명의 방식대로 6부를 세운 뒤에도 기존의 비트허이 야문(직역하면 ‘글의 관청’)을 내삼원(內三院, 비트허이 일란 야문)으로 개편하여 유지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청의 중원 지배가 확립된 이후로 점차 이러한 면모는 사라지고, 중원 왕조로서의 청은 명의 정부제도를 거의 그대로 따르게 됩니다. (물론 몽골과 만주, 티베트를 지배하는 유목민 왕조로서의 청은 또 다른 이야기지만요.)
작중 등장한, 여진족이 ‘까마득한 조상을 본받는’다는 대목은, 곧 11세기 초 발생한 도이의 입구(刀伊の入寇)를 말합니다. 당시 동해안을 누비던 여진 해적들이 대마도와 이키 섬, 그리고 규슈 북부를 노략질한 사건이지요. 당시 일본은 이 느닷없는 외침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고, 연해주까지 끌려간 일본인 몇몇이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일본으로 귀환한 뒤에야 이들이 고려에서 ‘도이(되)’라 불리는 오랑캐임을 알게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