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염리예토 (3)
“하, 제대로 한 방 먹었구나. 아니, 두세 방쯤 먹었군.”
해변에서 일어난 일대 폭발을 멀리서 지켜본 오다 노부나가가 씁쓸하게 말했다.
벼슬과 명예를 미끼로 저들이 동군 안쪽을 정탐하는 것을 수수방관하였고, 결국 저들에게 거하게 망신만 당한 채 놓치고야 말았다. 대응할 겨를도 주지 않고 동군 무장들의 속마음을 헤집어놓은 이탁오가 대단한 것이었지만, 적이 강하다는 핑계로 만족할 수 있는 오다 노부나가가 아니었다.
“주군,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우대신께서는 설마 이번 일을 가만 내버려두지는 않으시겠지요?”
“감히 흠차대신을 참칭하며 황명(皇明)을 모독한 무리입니다. 벌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아케치 미츠히데와 우에스기 겐신, 척계광 등, 정신 차린 이들이 하나둘씩 거들었다.
“아직 늦지는 않았습니다, 우대신.”
그리고 그 속내 모를 면상으로 뭔가를 한참 고민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입을 열자, 다들 그쪽을 바라보았다.
“저 배는 보나마나 서쪽으로 향하겠지요. 남만의 큰 배는 대양이라면 모를까, 잔잔한 내해(內海)에서는 힘을 쓰기 어렵지 않습니까?
더구나 설령 임 당수 그이가 처음부터 우대신에게 망신을 주고 우리 군의 사정을 살피고자 이렇게 잠입하였다 하더라도, 분명 방금 전처럼 갑작스레 발각될 것은 예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대비를 해두었더라도 당초 계획대로 빠져나가는 것에 비하면 허점이 많을 수밖에 없지요. 노리려면 지금이 적기 아니겠습니까?”
“그래, 네 말이 옳다. 미츠히데, 구키(九鬼) 놈에게 즉시 연락을 취하여라.”
한 번 마음을 먹자 ‘귤대가리’ 소리도 하지 않고 진지하게, 그리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명령을 내리는 오다 노부나가였다.
“수전이라면 구키 놈이 잘 알아서 하겠지. 그러나 저들이 이토록 우리를 농락하고 빠르게 도망친 것을 보면, 척 공에게 발각되기 전부터 이렇게 내뺄 작정을 하고 온 것일 터. 당연히 구마노 수군의 추격을 당하는 것도 예상하였을 것이다.”
‘축(丑)’ 자 형상으로 사카이에서 서쪽에 펼쳐져 있는 셋츠 앞바다는, 다시 남북으로 길게 시코쿠와 혼슈 사이를 틀어막고 있는 아와지(淡路) 섬으로 틀어막혀 있었다.
그러므로 임꺽정이 히메지나 조슈로 달아나려면, 아와지 섬을 북쪽이나 남쪽 어느 한쪽으로 빙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쪽으로 향할 공산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였다. 와카야마(和歌山) 쪽 바다는 구마노 수군의 앞마당과 다름없고, 더구나 그곳에서 다시 내해 쪽으로 들어가려면 험한 물결로 악명 높은 나루토(嗚門)를 지나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천하의 임꺽정이라 한들, 배를 아와지 섬의 산길로 끌고 올라갈 심산이 아닌 이상에야 북쪽 길, 효고츠(兵庫津, 現 고베) 바닷가를 따라 서쪽으로 직진하는 경로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노부나가가 그런 생각을 하리라는 것을, 저쪽에서 모를 리 없었다. 지난날 코우즈키 성 앞에서의 전투에서도, 오합지졸 민병을 이끌던 조선 장수가 제법 군략에 밝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와지 섬을 지나 바다가 다시 넓어지는 곳에서 무라카미 수군으로 급습하는 정도의 계책쯤이야 당연히 생각했을 터였다.
“비록 지난번 해전에서 이겨서 이곳 셋츠(攝津) 앞바다(現 오사카 만)가 우리 수군의 것과 다름없게 되었다지만, 아직 내해의 나머지 부분은 모리의 무라카미 수군이 주인 노릇하고 있다. 놈들이 뭔가 수작을 부렸을 수도 있으니 주의하라고 당부하도록.”
“예, 주군.”
“따라붙고 있습니다!”
하필 풍향조차 돕지 않아, 요도 강 하구를 떠나 사오 래과(Legua, 약 20km 전후)도 채 가지 못하고 꺽정이와 이탁오가 탄 배는 뒤에 고리를 물게 되었다.
“하하, 걱정 마십쇼. 소인이 이래 봬도 저 왜인들의 수전(水戰)이라는 것이 영 형편없음은 겪어보아 알고 있습니다. 그 옛날 복선(福船)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큰 카락이라면 고작 저런 작은 배로 따라잡아 본들 무용지물입지요.”
적선 출현을 알리는 선원에게 호들갑 떨지 말라 호통을 치고는, 꺽정이 앞에서 아는 체하는 해적 출신 선장이었다. 그러고는, 한 발 늦게 자신이 여느 범상한 높은 분을 모시고 있는 게 아님을 깨닫고서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 옛날 왕직 두령 시절에 저희 머리통을 직접 쪼개러 오신 임 당수께서는 더 잘 아시겠지만 말입니다, 헤헤.”
“헌데 네놈이 겪어보아 아는 수전과 지금 수전이 다르지 않겠느냐?”
“그렇기는 합니다만, 왜선이라는 것은 대개 중원의 배보다 못하여, 화포를 얻어 싣는다 한들 쏘기가 어렵습니다. 서양 화포 중 불랑기포 같은 총통이라면야 저런 배에서도 쏠 수 있겠지만, 어디 총통이 땅 파면 나오는 물건입니까.”
그리고 그런 선장을 비웃듯, 뱃고물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놈들이 총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그게 여기까지 날아온단 말이냐?”
“아무래도 땅 파면 총통이 나오는 모양인데.”
지금이야 조선 동래 총통이 매섭다고들 떠들지만, 본래 이곳 동방에서 가장 먼저 서방의 총통을 접하고 베껴낸 것은 명나라였다.
그것이 가정 원년(1522)의 일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가 (예전보다도 더) 망가지면서 한동안 큰 빛을 보지 못하다가 엄숭이 실각한 뒤에야 비로소 널리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중 일부가 동척사에 대한 지원 명목으로 화약과 함께 바다를 넘어왔고, 마침내 구마노 수군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굳이 따지면 그 총통을 만드는 비용은 포토시에서 나오는 은으로 치러졌으니, 땅 파서 총통이 나온다는 말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선장이야말로 걱정 접어두쇼. 저놈들은 아마 우리를 생포하려 할 게요. 내가 노부나가 놈을 굳이 진천뢰로 죽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이치지.”
얼굴이 잠시 푸르죽죽해졌다가 방금 전보다 두 배쯤 높고 빠른 목소리로 여기저기 지시 내리는 선장에게 꺽정이가 말했다.
“아, ‘우리’에 선장은 포함 안 되겠군그래. 죽고 싶지 않거들랑 열심히 잘 몰아보시오, 껄껄.”
이미 그러려는 마음이 열심히 샘솟고 있었다.
그러나 저쪽 배들은 작정하고 달라붙어, 어느새 탄환이 물보라 일으키는 소리가 이쪽 갑판 위에까지 들릴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몇 번쯤은 나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철환이 선체에 적중하기도 했다.
꺽정이 당초 생각과 달리, 저쪽은 꺽정이를 꼭 생포해야만 한다는 각오는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렇게라도 해야 확실히 붙잡을 수 있으니 감수해야 할 위험이라고 적장이 노부나가 놈을 잘 설득하였거나.
“이제 얼마 안 남았지 않소?”
“다행히 물때가 돌아오긴 해서 겨우 나아가곤 있습니다만...”
문제는 저쪽도 그사이 바짝 노를 저어 따라붙었다는 점이었다.
필시 배에 올라 꺽정이 목을 노릴 심산일 것이다. 하기야, 항상 곁가지인 수군이 이런 큰 공을 세울 기회가 또 언제 오겠는가.
꺽정이가 잽싸게 머리 내밀어 살피니, 마치 배 뒤편의 바다가 적선으로 뒤덮인 듯하였다. 실제로는 그 정도까진 아니겠지만, 분명 이번 싸움에서 공을 세우기 위해 당장 투입할 수 있는 전력을 모조리 끌고 달려드는 것일 테다.
“흑염룡을 잡아라!”
“조심해라! ‘배 부수는 흑염룡’은 쉬운 상대가 아니야!”
“언놈이냐!”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일본말 외침 가운데서, 그 듣기 싫은 소리를 알아들은 꺽정이가 도로 휙 고개 내밀고 인상을 확 찌푸렸다.
“앗, 흑염룡이다!”
“정말이로군! 반드시 오늘 공을 세운다!”
“여기서 하야시 쇼군을 잡으면 일본 천하가 동군의 것이 된다!”
이탁오도, 꺽정이도 그 말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순순히 잡혀줄 생각은 없었다.
“야스케야, 네가 살던 곳에서도 이렇게 싸움박질을 하곤 했느냐?”
“아니, 물 위에서는 안 했소. 뭍에서야 규모는 작아도 종종 부딪히곤 했지만. 나도 그러다가 머릿수에서 밀려서 붙잡혀서 여기까지 왔소만.”
“그러면 너희 동네에서도 돌 던지는 놀이가 있었느냐?”
“조선 사람들이 유별나게 돌 던져 사람 죽이는 것을 좋아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류큐에 돌긴 합디다.”
“석전이 얼마나 알차고 재밌는 놀이인데, 그걸 모르다니, 참. 좌우지간 함께 그것을 해보자꾸나.”
“돌이 어디 있소? 아! 진천뢰!”
과연 생긴 것과 달리 총명하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금방 꺽정이 말을 알아듣고는 선창으로 향하는 야스케였다.
동래에서 가짜 관복을 만들 옷감을 챙겨오면서, 화포장 신동으로 유명한 이장손이 잔뜩 만들어놓은 이 비격진천뢰도 한아름 챙겨왔던 것이다.
고작 그것을 두세 발 쏘고 말았으니, 아직도 매우 많이 남아 있었다.
야스케가 궤짝 여럿을 들고 올라올 무렵, 이탁오도 때맞추어 류큐 사람들과 함께 부싯돌 들고 나타났다.
“거기 두 사람은 불씨 들고 있고, 궤짝에서 진천뢰 하나씩 꺼내어 나랑 요놈에게 건네주시오들.”
“예, 당수.”
이탁오야 꺽정이와 함께 다니면서 종종 간을 배 밖에 두고 다녔던 사람이요, 나머지 사람들도 죽기 싫으니만큼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그리하여 금방 첫 번째 진천뢰에 불이 붙었고, 꺽정이는 고개를 쑥 내밀고 이제는 사다리 걸칠 준비를 하는 구마노 수군의 작은 배를 내려보았다.
“야, 아까 흑염룡 어쩌고 한 놈 손 들어봐라!”
조선말이 통할 리 없었으나, 꺽정이 또한 무고하다 하여 봐줄 생각 없었다. 대충 눈에 띈 배 하나를 향하여 기세 좋게 휙- 던졌다.
“으억! 무엇이냐!”
“배에 구멍이 났습니다!”
“배를 버려라!”
그랬더니, 아뿔싸. 던진다는 것이 정말 정월 대보름 석전에 재수 없는 놈 머리통 깰 때처럼 세게 던졌더니, 이쪽 카락과 저쪽 세키부네의 높이 차이까지 겹쳐 그대로 저쪽 배를 위에서 아래로 뚫어버린 것이었다.
“야스케야! 살살 던져야 되겠다!”
“알겠소!”
그 다음에 야스케가 정말 살살 힘을 조절해 던지니, 이번에는 콰광 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큼직하게 일었다. 재수없게 지나가던 월척 물고기 한 마리도 휘말려, 이쪽 갑판에 툭 떨어졌다.
“마침내! 풍향이 바뀌었습니다, 당수! 이대로 조금만 더!”
물고기를 머리에 인 선장이 악을 썼다.
“들었지? 자, 던져라!”
때마침 뒤에서 비스듬히 들이받으려는 배가 한 척 있어, 야스케가 솜씨 좋게 던져 맞추었다.
꺽정이도 질 수 없다는 듯, 열심히 다음 상대를 찾아 바다 위를 눈으로 흩었다.
그렇게 몇 번 펑 소리와 비명 소리가 이어지고 – 다행히 이번에는 애꿎은 수족(水族)은 상하지 않았다 – 궤짝에 들어 있던 진천뢰도 서너 알만 남기고 동이 났다.
“물러납니다!”
“우리가 이겼다!”
어느새 바짝 눈앞까지 다가온, 좌우 폭이 10리도 채 되지 않는 좁다란 해협을 바라보며 선원들이 환호하였다. 그러나 선장은 팔딱팔딱 뛰는 물고기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며, 새삼 낯을 찌푸렸다.
“아직은 이르다! 아직은...!”
“그런 것 같구려. 이제부터가 고비다, 이놈들아!”
일본 수군이 가까이 달라붙어 배 위에서 다투는 것 하나로 먹고살던 시절은 진작에 끝났다. 그 재주 하나만 믿던 마츠라 수군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온 일본의 수군이 지금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든든한 뒷배를 얻어야만 비로소 앎을 실천할 수 있었는데, 꺽정이에게는 안타깝게도 저쪽 구마노 수군은 여기에 해당하였다.
멀찌감치 물러난 구마노 수군은, 이제 다시 화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방금 전과 다른 점이라면, 이제는 인정사정 보지 않고 난사한다는 것뿐.
곧 사방팔방으로 나무 파편이 튀고, 하나둘씩 파편이든 탄환이든 얻어맞고 쓰러지기 시작하였다.
“당수, 이쪽입니다!”
하릴없이 몸 숙이며 탄환 피하는 꺽정이와 야스케 향해 이탁오가 손을 흔들었다.
“이쪽이라고 했습니다, 당수! 소생이 제대로 셈을 했다면 이쪽은 안전할 것입니다!”
“확실하오?”
“당연히 확실하진 않지요. 재수 없이 탄환에 맞으면 한 방에 가는 것이야 다 똑같지 않습니까. 다만 이곳은 이물에서도 가장 앞쪽이고, 또 배의 구조를 생각하면 저쪽 배와의 사이에 나무 벽이 가장 많은 곳입니다. 그러니 가장 안전하다는 것이지요.”
이탁오가 두려움을 떨쳐내려는 양, 열심히 강론하듯 설명하였다.
그리고 정말로 이탁오 말이 맞았다. 고물 쪽에서 바짝 따라오며 화포를 갈기는 적이 있을 때, 이물의 이쪽은 배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꺽정이와 이탁오, 야스케 등이 고개 숙이고 있는 사이 배의 다른 중요한 부분은 모조리 포화를 얻어맞아 걸레짝으로 화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선장 이놈아! 아직 멀었느냐!”
“선장 죽었소! 부르지 마쇼!”
독이 바짝 오른 선장이 걸쭉한 욕설로 답했다.
“죽은 놈이 대답은 잘도 하는구나!”
“옘병할! 내 머리 간수하기도 힘드니까 말 걸지 말란 말이오! 거의 다 왔소!”
“선장! 더는 못 버팁니다!”
“거의 다 잡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노부나가라는 좋은 연줄과 본인의 출중한 능력 덕에 저의 집안뿐 아니라 구마노 수군 전체를 이끌게 된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가 외쳤다.
“이미 저 배는 끝났다! 여기서 몇 리 더 가고 가라앉느냐, 아니면 이곳에서 가라앉느냐, 그 차이만 남았을 뿐! 얼른 끝장을 내어야 한다!”
요시타카의 가신들도 주군의 재촉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저곳에서 조금씩 동군이 밀리는 가운데, 모리 씨의 무라카미 수군을 격파하여 혼간지로 들어가는 해로를 차단하는 큰 공을 세운 구마노 수군은 한껏 기세가 올라 있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 사카이 일대에 주둔하며, 언제든 내해 안쪽에서 적이 다시 나타나면 응전할 기세를 갖추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급히 동군 본영에서 전령이 달려와, 바로 그 조선의 흑염룡을 붙잡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런 절호의 기회를 순순히 허락할 하야시 쇼군이 아니므로, 매복이나 여타 술수에 마땅히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아, 이 얼마나 훌륭한 주군이신가! 그에게 날뛸 전장뿐 아니라, 집안 전체를 대여섯 번쯤 팔아넘겨도 겨우 장만할 만한 화포와 화약까지 마련해주었고, 이제는 이번 덴쇼의 역에서 가장 큰 무공을 세울 기회까지 내어 주셨으니!
그러므로 구키 요시타카는 즉시 대열의 선두에 서서 적함을 추격하였다.
“견시로부터 보고! 적 수군입니다!”
“수효는?”
“매복은 아닙니다! 그저 이곳 해협에서 경계하던 정도인 듯합니다! 이쪽으로 접근 중입니다!”
“잘 되었다! 잘 되었어! 그놈들도 마저 물리친다! 지금 우리의 전력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어!”
사카이가 함락당하면서 노부나가가 우연히 확보한 백리안(망원경) 중 하나는 구키의 구마노 수군에도 넘겨졌다.
이 천하의 보배 중 하나를 기꺼이 구마노 수군에게 하사하니, 이 또한 영광. 지금도 구키가 탄 배에 특별히 세운 망루 위에 올라간 견시가 이를 참으로 유용하게 쓰고 있었다.
만약 하야시 쇼군이 무언가 안배해둔 계책이 있다면, 해협을 지날 무렵이 고비일 터였다. 매복계를 쓰기에는 그만한 곳이 드물었다.
그러나 이미 해협은 지나쳤다. 앞서 그 기묘한, 호로쿠다마(焙烙玉) 비슷한 철환 때문에 고전하는 바람에 해협에 이르기 전 붙잡는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그 이후로도 적의 매복이나 증원은 없었다.
“적 수군이 더 나타났습니다!”
“엥이... 지금처럼 큰 공을 세우려는 차에, 무슨 날파리들이 이리도 꼬이는가! 내가 망루로 올라가 내 눈으로 살피겠다! 비켜라!”
그리고 곧 요시타카는, 직접 적세를 살피기로 한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분명 적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고, 비틀거리며 한 발짝이라도 더 서쪽으로 가겠다는 양 힘겹게 도망치고 있는 코앞의 대선을 구하겠다는 듯 달려들고는 있었지만, 지금 해협을 넘어온 구마노 수군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필시 저들 목숨을 걸고 서군 물주인 하야시 쇼군을 지키겠다는 각오일 테다. 저놈들도 딴에는 무사랍시고, 그런 긍지가 있구나! 저들이 싸움을 원한다면 싸우면 그만이다!”
견시에게 백리안을 넘겨주며 요시타카가 외치자, 그 패기에 망루 아래의 가신들도 함께 환호하였다.
그런데 하필 그떄, 요시타카의 시야 가장자리에 무언가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지금껏 전혀 의식도 하지 않고 있던, 북쪽 바닷가의 언덕에서 무언가 꼼지락대는 듯하였던 것이다.
“그 백리안을 다시 다오.”
건네받고서 북쪽을 다시 살피니, 일군의 사람들이 언덕에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곁에는 뭔가를 실은 수레가 있었고, 어디서 불을 피웠는지 간간이 연기도 보였다.
어리석은 농민들이 싸움을 구경하러 나온 것인가? 아니면 물에 빠져 죽은 병사를 건져내고 갑옷과 병기를 훔칠 심산일지도 몰랐다.
우마지루시도 없는 것을 보면, 군사일 리는 없었다... 그런데 왜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인가? 이제 보니 저것은 그냥 갑옷도 아니고, 조선 갑옷이었다.
그리고 그 갑옷 입은 무리 가운데에, 저와 같이 백리안 대롱을 들고 살피는 앳된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백리안과 백리안이 마주친 찰나.
허공을 가르는 쐐액 소리와 함께, 요시타카의 몸이 앞으로 기우뚱 흔들렸다.
“주, 주군!”
“무엇이냐!”
“나, 나무! 통나무입니다! 통나무가 날아왔습니다!”
급히 난간에 몸을 걸치고 살피니, 정말로 배의 옆구리에 검은 통나무 같은 것이 거하게 박혀 있었다.
“배가 가라앉는다!”
“주군! 피해야 합니다! 주군!”
이 사태를 이해하기도 전, 북쪽 언덕에서 연이어 포연(砲煙)이 일어났다.
“저것은 대체 무엇이냐...”
총통일 것이다. 아마도.
그런데 총통이 어떻게 저리도 정확하게, 저리도 멀리서 쏘아 맞힐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총통에서 쏘는 탄환은 다 같을 터인데, 어찌하여 거기 맞은 구마노 수군의 자랑스러운 전선들이, 마른 섶처럼 단숨에 불에 휩싸인다는 말인가.
“주군! 명령을!”
그제야 퍼뜩 넋이 돌아왔다.
“철수, 철수한다!”
“후퇴! 깃발 올려!”
이미 옆으로 기운 망루에서 내려가기 전, 요시타카는 뜻하지 않게 서쪽 바다를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구마노 수군을 상대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적 수군. 그들은 구키의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시체를 쪼아먹는 날짐승처럼, 저 화포에 전의 잃고 너덜너덜해진 저들을 섬멸하기 위해 모여드는 것이었다.
물살은 원망스럽게도, 서쪽으로 거세게 그들 배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놈 이름이 이순신이라고? 아니, 뭍에서 총통을 쏘아 물 위의 수군을 때려잡는다니, 뭐 싸움을 그딴 식으로 한단 말이냐.”
노부나가는 피식 코웃음과 함께 접의자에 주저앉는 것으로써 이 씁쓸한 보고에 답했다.
“그나마 우리가 우리 땅에서, 우리 수군끼리 싸우고 있으니 망정이지, 만약 온 일본의 국력을 쏟아붇는 그런 싸움의 수전에서 이 꼴이 나지 않은 게 다행이로군. 일본 무사들은 뭍에서나 칼 좀 휘두르지 물에서는 하등 쓸모가 없다는 소리나 들었을 것 아닌가.”
이어지는 넋두리에는 노부나가다운 매서움이 없었다. 이에야스 앞에서까지 ‘노부나가 화법’을 구사하기에는 너무나 기진맥진한 하루였다.
“여하간 대단한 놈이다. 구사일생한 구키 놈이 – 목숨 하나는 버렸을 테니 이제는 야키(八鬼)려나 – 화포 곁에서 수레를 보았다니, 필시 수레를 이용해서 옮긴 것이겠지. 어쩌면 그 수완 좋다는 린죠 녀석이 함께 붙어서 꾀를 낸 것일지도.”
“적은 그리도 잘 칭찬하시는 분이, 미츠히데 그이는 그리도 괴롭히십니까.”
“귤대가리 놈은 재주는 있는데 눈치가 놀랍도록 부족해서, 그렇게 쪼아주어야 사람 구실을 하니까 그렇지.”
노부나가 기운을 조금 북돋아주고자 이에야스가 살짝 농담을 던졌다. 다행히 노부나가는 이에야스 의도대로 조금 기력을 되찾은 듯했다.
“그래, 핫토리 한조인가, 네놈 섬기는 그 죠닌(닌자 조직의 수장) 녀석은 무어라 하더냐.”
“엊그제 걱정하였던 대로, 수근대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하더군요.”
“그렇구나. 결국 움직이는 수밖에 없는가.”
이곳 동군 본영의 속내가 얼마나 저들 눈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속속들이 모두 파헤쳐졌다고 보는 쪽이 맞았다.
어떤 무장이 무엇을 맡고 있는지, 그 허실은 어떠한지, 동군을 이루는 각 군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모두 밝혀져 있다고 가정한 뒤 군략을 새로 세워야만 하리라.
더구나 구마노 수군은 거의 절반이 무너졌다고 하였다. 모리 씨가 다시 수군을 모아 셋츠 앞바다로 나아온다면 그때는 두 눈 뜨고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척계광 그이는 우리에 대해 좋은 인상을 품고 돌아갔으니 다행이지. 우리 쪽에서는 일본이나 명에 비할 수 없는 남만(에스파냐-포르투갈) 함대가 수군을 맡아주고 있으니. 흠... 마닐라에 지원을 청하여 갈레온으로 셋츠 앞바다를 봉쇄해달라 한다면...”
“마닐라 말씀이십니까?”
“아니, 실없는 혼잣말이었다. 잊어라, 타케치요. 그쪽은 아직 멀었다. 그런 데 쓰려고 모아놓은 함대가 아니야.”
그렇게 일축하고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는 노부나가였다.
“이곳 혼간지만 에워싸고 있으면서 저쪽 서군이 먼저 오기만 기다릴 수는 없게 되었다. 요도가와를 건너 우리가 먼저 서쪽으로 향한다. 히메지 성을 거점으로 삼아 군세를 모으고 있다니, 우리가 나선다면 막아서는 수밖에 없을 터.”
수전 패배로 인해 혼간지 포위가 당분간 무의미해진 군세의 형국으로 보나, 이미 허실이 노출되어버린 동군 내부 사정으로 보나, 오다 노부나가 본인의 무너진 체통으로 보나, 동군으로서는 이제 움직이는 수밖에 남지 않았다.
군막 바깥을 슬쩍 들춰보고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노부나가가 도로 의자에 걸터앉았다.
“타케치요, 네 녀석이 내게 귀부하기 전 어떤 절간에서 그 ‘염리예토 흔구정토’ 여덟 글자를 들었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만.”
“우리는 지금 정토(淨土)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흔들리는 불꽃으로 인해, 노부나가의 자신만만하던 표정에 새겨진 한 줄기 금이 더욱 깊어보였다.
“우대신답지 않은 물음이로군요.”
“그래, 그렇지...”
자신과 같은 천재가 이 땅에 태어났으니, 비로소 백 년 전란을 끝내고 일본을, 나아가 더 넓은 천하를 주무를 수 있게 되리라 믿었다.
그리고 자신은 천재이기 때문에, 이 나라 일본의 기나긴 전란 끝에 마침내 나타난 기린아이기 때문에, 스스로 능히 그리할 수 있는 의권 – 이미 저도 모르는 사이 이 말을 머릿속으로 쓰고 있었다 -을 얻었다고 여겼다.
장거정 또한 그렇게 말하였다. 저 멀리 서방의 카를로스라는 임금도, 결국 역사는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모두를 위하여 대신 다스리는 형태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던가.
그런데, 전란을 끝내고 무사들이 다시금 창칼 거둔 채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겠다는 말로는, 그리고 그간 일본이 백 년간 피 흘려가며 익힌 재주로써 장차 열릴 대일통의 세상에서 우물 안 개구리 벗어나 큰 이익을 취할 수 있게끔 하겠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쉽게 흔들릴 수 있는가.
“그저, 쓸데없는 물음 하나가 생겼는데 그게 손톱 아래 박힌 가시처럼 도통 빠지고 있지 않을 뿐이다.”
사카이에서 임꺽정이 말했던 것처럼, 자신이 처음부터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 일도 아니니, 내가 방금 한 한탄도 잊으려무나.”
그러나 이미 너무 멀리 왔다.
우선은 이기고 볼 일. 이제 와서 반성하면서, 자신이 남긴 삶의 길조차 지워지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틀렸던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보다도 끔찍하였다.
어쩌면, 언젠가 이 모든 일을 마치고 저 장거정과 같이 설 수 있게 되었을 때가 되면, 그때는 답을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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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에서도 오다 노부나가는 이시야마 혼간지 포위전에서 모리 수군에게 쓴맛을 보았습니다. 제1차 키즈가와구(木津川口) 해전에서, 모리 휘하의 무라카미 수군을 중심으로 모인 함대는 구마노 수군을 중심으로 한 오다측 수군과 맞붙어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때 사용된 무기 중 하나가, 작중에서도 언급되는 호로쿠다마였지요. 이는 비격진천뢰와 달리 질그릇으로 만들어, 인명 살상과 화재 유발을 주 목적으로 사용하는 무기였습니다.
여기서 참패한 노부나가는 화포(오오즈츠 등) 전력을 보강하고 유명한 텟코센(鐵甲船)을 건조하는 등 절치부심하며 설욕을 노렸고, 결국 1578년 제2차 키즈가와구 해전에서 구키 요시타카가 이끄는 오다 측 수군은 모리 수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합니다.
한편, 조선 수군에서도 비격진천뢰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완구(碗口)와 같은 전용 화포를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꺽정이나 야스케 급의 완력이 아닌 이상에야 비격진천뢰를 작중에서처럼 던져서 적선을 맞추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비효율적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용도로 실제로 쓰인 것은, 나무로 된 화통 속에 인화성 물질이나 인명살상용 마름쇠를 넣어 던지는 질려포통이었습니다. 실제로 1557년 전라도 서해안에 출몰한 왜적을 상대로 질려포가 사용되어 큰 전과를 올렸다는 기록이 전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