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25화 (225/259)

68. 나니와의 영광 (1)

저도 모르는 사이 백성들이 불경의 다몬(大文)을 외치게 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혼간지 주지 겐뇨는 당황하고, 혼간지로 도망친 사카이 상인들을 이끄는 고니시 류사는 무언가 아는 미소를 감추는 사이, ‘염리예토 흔구정토’ 외침은 어느새 혼간지를 에워싼 동군 군영을 넘어, 요도가와 강물 거슬러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자 동군 본영에 있던 오다 노부나가는 휘하 무장들을 소집해, 사흘 뒤 출정할 것이니 대비하라는 말 한 마디 툭 던지곤 근시(近侍) 몇몇과 이에야스만 데리고서 동쪽으로 말 달려 사라졌다. 

그렇게 밤새도록 달려, 이튿날 닿은 곳은 오와리의 아츠타 신궁(熱田神宮).

안으로 들어가 한참 기원을 드리고 나온 노부나가는, 그 속내 감추기의 달인 이에야스조차 얼굴 한편에 궁금함을 머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오케하자마로 출정하기 전에도 이곳에서 기원을 올렸다.”

무엄하게도 배전(拜殿) 앞 돌계단에 털썩 주저앉은 노부나가가, 고개 까딱이며 이에야스에게도 함께 앉을 것을 권했다. 

“의외로군요.”

지나가는 신관과 무녀들은 노부나가의 성품을 익히 알았으므로, 떨떠름한 속내를 내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살핀 이에야스도 덩달아 앉았다.

“내가 신불의 가호를 믿는다는 게?”

“겉으로는 경박하고 매사에 즉흥으로 임하는 듯한 우대신이시지만, 실제로는 그 아래에서 셈을 다 마쳐놓고 싸움에 임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케하자마 싸움에서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요? 그러니 신불의 가호를 굳이 비는 이유가 쉬이 납득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야, 당연히 내가 이길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 기원드린 건 그 다음의 일을 위함이었다.”

“다음의 일이라 하시면...?”

“오케하자마에서 그 활쟁이 이마가와 놈을 무너뜨린 뒤로부터는, 내가 천하인을 자처할 수 있을 때까지 결코 쉴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내게 복속을 청하든, 싸움을 걸어오든 할 것이고, 일본 예순여섯 주가 모두 나 노부나가의 뜻을 따르게 되기 전까지는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 말이야.

그리고 이제 그 길의 끝이 보이고 있지. 지금껏 상대한 것 중 가장 험난한 장애물, 마지막 문턱만 남아 있을 뿐. 싸움이 어떻게 끝나든, 전장의 먼지가 가라앉은 뒤의 일본은 그 전의 일본과는 다른 나라가 되겠지. 그러니 어찌 기원을 드리지 않겠느냐. 때마침 싸우는 곳도 그 옛날 겐페이 합전 때의 그곳이니.”

아츠타 신궁에 봉안되어 있는 삼종신기 중 하나, 아마노무라쿠모의 검(天叢雲劍, 천총운검)은 겐페이 합전에서 수난을 당한 신물(神物). 당시 전쟁의 향방을 좌우한 이치노타니 싸움이 벌어졌던 곳에서 다시 한 번 일본과 온 세상을 건 쟁패를 벌이게 되었으니, 아츠타 신궁은 여러모로 기원하기 좋은 곳이었다.

무사의 나라 대 백성의 나라. 뛰어난 한 사람이 다스리는 나라 대 모두가 다스리는 나라. 

조선에서 시작한 바람이 신주 일본까지 휩쓰는 신풍(神風)이 될 것이냐, 아니면 그 옛날 원구(元寇, 여몽연합군) 때처럼 그들이 넘어온 해협 너머로 다시 밀려날 것이냐.

“왜 하필 타케치요 네 녀석을 데리고 여기까지 왔는지는 궁금하지 않으냐?”

“그저 은혜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쳇, 눈치는 좋다니까.”

어째서 ‘염리예토 흔구정토’인가. 노부나가가 부친 전서(戰書)에 어찌하여 무지렁이 백성들의 노래로써 대응하였는가.

노부나가나 이에야스쯤 되는 장수는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저들의 명분을 재차 밝히며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동시에 이미 물밑에서 시작된 지략의 싸움을 저들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수단이었다.

속내를 도통 보이지 않아, 노부나가와 달리 다른 동군 무장들로부터 딱히 큰 신뢰를 받지는 못하는 이에야스다. 하필 그의 우마지루시에 쓰인 여덟 글자를 읊음으로써, 동군 안에서 이에야스의 배신을 의심하게 할 심산일 터.

“네놈이 헤아리고 있는 대로다. 나는 네게 혼간지 포위를 맡길 생각이거든. 이렇게 내가 타케치요 너를 믿고 있음을 보여야, 저 멍청한 나머지 무장들도 그제야 의심을 조금 내려놓지 않겠느냐.”

노부나가는 자신이 임꺽정에게 보낸 서신에 밝힌 데서 일말의 어긋남 없이 군을 움직일 심산이었다.

혼간지에 들어가 있는, 족히 이삼만은 될 서군 승병과 사이카슈 등을 상대할 도쿠가와 군. 저들이 단바(丹波) 산길로 우회하여 허수아비 조정이 있는 교토를 급습할 경우에 대비하여, 가메야마(龜山, 現 교토 부 가메오카 시) 길목을 지킬, 아사쿠라 등 기나이 무장들의 군대.

그리고 해안의 잘 닦인 길을 따라 히메지로 진격할 오다와 우에스기, 호조의 본대.

그의 예상대로 이미 서군 무장들이 동요하고 있다면, 굳이 더 함정을 파기보다는 마치 승리를 예고하고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쪽이 더욱 이로울 것이라는 판단 하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우대신께서는 의심하지 않으십니까?”

“네놈이 배신할 수도 있다는 것 말이냐? 그건 의심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지.”

간만에 노부나가가 오와리 악동 시절의 그 짓궂은 웃음을 되찾았다.

“네놈은 때만 잘 맞고 좋은 값만 받을 수 있다면 언제든 나를 팔아치울 것 아니냐? 내가 너와 자리가 바뀌었더라도 그러했을 터.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너를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계획대로 서군을 때려잡는다면 네놈은 계속 내 아래서 때를 기다릴 것이고, 만일 내가 패전하게 된다면 그때는 네놈이라도 살아남는 게 낫지.”

그러고는, 앞서 털썩 주저앉았던 것처럼 제멋대로 저 혼자 벌떡 일어났다.

“좋아. 이제 신불 앞에서든 네놈 앞에서든 털어놓을 것은 다 털어놓았다.

남은 것은, 내가 옳았음을 일본에 보이고, 또 세상에 보이고, 또 너구리 같은 네놈에게도 보여주는 일뿐일 터. 자, 가자꾸나.”

한결 홀가분해진 노부나가는, 눈앞에 있는 것이 파멸이든 영광이든 걱정하지 않고 마주할 각오를 다진 채 도리이를 지났다.

그로부터 이틀 뒤, 동군 본진은 요도가와를 건너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한편, 히메지 성에서도 신정부의 (자칭) 태정대신 아시카가 요시테루 이하 온갖 거물들이 모여 군의(軍議)를 열려는 참이었다.

지도에 깃발 등등. 치밀한 운주(運籌, 작전계획)에 있어서는 동방 제일이라 할 만한 사업당의 최신 문물로 도식된 방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찬탄하였다.

그것을 바라보던 이순신이 문득 웃음을 흘렸다.

“히데요시 형은 도술을 믿으십니까?”

“도술이라면, 세간에서 수산 선생님 같은 분이 부린다고들 떠드는 그런 것 말이냐?”

“예, 하늘을 날아다닌다든가, 천릿길을 단숨에 주파한다든가 하는 것 말입니다. 저는 옛날에, 그러니까 아직 물정 모르는 꼬마였을 때 그런 걸 제법 진지하게 믿었거든요. 머리가 굵은 뒤에는 그저 엄청난 단련으로 갈고 닦은 완력을 사람들이 멋대로 부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요.”

“하기야, 잘 모르고 보면 정말 그리 보일 만도 하지. 탁오 선생이 엘리자베스 누님에게 들었다는데, 우리네 흑의군이 파리 가는 길에 재주넘기한 것도 지금은 동방의 신비한 마법이었다고들 떠든다더라.”

양쪽 모두 소싯적 과오가 없지 않아, 어른답게 진지한 얘기를 하면서 각각 이지함에게 도술 가르쳐달라며 졸졸 따라다닌 것과, 저도 흑의군 사이에 끼어 재주 부리면서 좋다고 까불거렸던 것은 태연하게 누락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일도 남이 보기에는 정말 도술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더군요.”

“이번 계획이 말이냐? 하긴, 그렇게 보일 수도.”

민병과 의병의 속사정을 모두 알고 보면, 그저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일로써 저들이 막을 수 없는 수단을 동원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미리 이겨놓고 시작하는 일은, 계획 짜는 사람 머릿속에서야 자명할지 몰라도 밖에서 보면 그저 신묘한 계책으로만 보일 터.

이번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을 이 계책 또한 마찬가지일 테다.

“생각해보면 일본의 무사들로서는 정말 신불의 조화라고들 떠들지 않을 수 없겠구나. 그들로서는 이런 일을 상상한다는 상상조차 엄두를 못 냈을 테니, 흐흐.”

“자, 저기 우리 편 일본 무사들이 들어옵니다. 슬슬 준비하시지요.”

명목상 서군 총대장이자, 싸움이 끝나면 진짜로 신정부를 이끌게 될 아시카가 요시테루 이하, 서군 무장 집안을 대표하여 굵직한 이들이 우르르 들어와 앉았다.

“태정대신 아시카가 공께서 승낙해 주신다면, 오늘의 군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리하시오.”

타고난 재주에 좋은 스승까지 두어, 남들의 시선 끄는 법 하나는 기가 막히게 터득한 히데요시가 먼저 운을 떼었다.

“혼간지로부터의 급보입니다. 적이 요도가와를 건너고 있고, 그 선두는 벌써 아마가사키(尼崎)에 닿았다고 합니다. 이제 이번 덴쇼의 역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다가오는 대합전에서, 우리는 동군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것입니다.”

의심하는 눈초리가 잇따랐으나, 그뿐이었다. 이순신과 히데요시 두 사람의 계책은 이미 두 차례나 큰 전공을 내었고, 더구나 두 사람 모두 뒤에 – 말 그대로 – 임꺽정을 두고 있었으므로 이 자리에서 함부로 언성을 높였다가는 좋은 꼴은 못 볼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무장들 중 안목이 있는 자는 저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면 일본 내에서 지략으로 당해낼 사람이 없을 것임을 – 차마 자존심 탓에 인정은 못 해도 – 알고 있었으므로, 히데요시의 설명을 잠자코 기다릴 뿐이었다.

“동군 주력은 저들이 통보한 대로, 히메지 성을 향해 가장 편한 길로 진격할 것입니다. 우리 군으로서도, 이곳 히메지 성에서 처음부터 농성할 심산이 아닌 이상에야 어차피 효고츠(고베) 쪽에서 저들을 막는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단바 쪽으로 빠지는 산길도 있지 않은가?”

요시테루가 가장 먼저 질문하니, 뒤이어 다른 이들도 하나둘씩 의심가는 바를 입 밖으로 낼 채비를 하였다.

“그렇습니다. 그쪽으로 민병 오만을 모두 보낼 것입니다. 신정부의 수반 되시는 쿠보(쇼군), 아니, 아시카가 공께서 선두를 맡아주신다면 영광이 되겠습니다.”

“민병으로 교토를 공략한다고? 이마가와와 다케다 씨를 단숨에 몰락시킨 우대신을 너무 쉽게 보는 것 아닌가?”

“우리는 이미 혼간지에 사람을 보내어, 장차 백성의 군대로 무사의 군대를 무찌를 것이라 공언했습니다. 그러니 그 공약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군 안에서도 여전히 민병에 대해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는 자들이 많았다. 

물론 얼마 전에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연대장이라는 과분한 직책을 맡은 이즈모 국의 시골 젊은이에게 섣불리 대련을 신청한 모리 가의 가신 하나가 단 세 합만에 패배를 인정하는 등 여러 일이 있었으므로, 무장들 또한 민병들이 결코 첫 싸움 당시의 오합지졸과 같지 않음은 순순히 인정하고 있었다.

허나 어디까지나 ‘한 네다섯쯤 모이면 무사 하나 몫은 하겠거려니’ 정도의 인정이었다. 

“이미 적이 아마가사키에 닿았다고 하지 않았소? 이곳 히메지에서 단바 산길을 거쳐 교토로 향한다면, 교토의 경계를 밟기도 전에 효고에서의 싸움은 끝나 있을 터.” 

모리 모토나리가 요시테루 뒤를 이어 물었다.

“또한 우대신이 임 당수에게 서신 보내 밝히기로도, 단바 쪽 가메야마에도 제법 많은 군세를 둘 것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곳을 지키는 기나이 무장들은 비록 동군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민병이 교토로 향하고 있다 하면 저들의 명예를 걸고서 끝까지 싸우려 할 것이외다. 더구나 그들 곁에 의병을 함부로 붙일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소?”

일본의 무장이라면, 누구든 천황과 조정을 공경하기 마련이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저의 주군이나 가신과 달리 천황은 아무런 실권이 없어, 듣기 좋은 이름의 관직을 내려줄 뿐 어떤 해악도, 배신도 행할 수 없기 때문이었지만. 

여하간 명분은 명분이었으므로, 교토에 함부로 국외인으로 이루어진 군사를 이끌고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오합지졸을 겨우 면한 민병에게서 그나마 그 창끝이라 할 만한 의병까지 배제한다면 이 또한 곤란한 일.

“적은 군사를 셋으로 나누었고, 우리는 아직 이곳 히메지에 하나로 뭉쳐 있소. 차라리 이대로 함께 진격해 우세한 수를 바탕으로 동군을 압박하는 게 어떻겠소?”

“그랬다가는 반대로 교토를 지키는 기나이의 군이 그대로 산길로 진격하여 우리의 후방을 노릴 수도 있습니다.”

겐페이 합전의 승패를 결정지은 이치노타니 전투와 비슷한 형세. 그리고 그 싸움이 어떻게 헤이케(平家, 다이라 씨)의 대패로 끝났는지는 어지간한 무장은 다 알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지키려는 좁다란 길목을, 다이라 군도 점거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전투는 미나모토 군이 북쪽으로 우회하여 동서 양측에서 다이라 군을 포위하고, 화룡점정으로 북쪽 산의 가파른 절벽을 타고 내려온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그 허리마저 찌르면서, 미나모토 군은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미 ‘염리예토 흔구정토’ 여덟 자로 저들의 군심(軍心)을 뒤흔들며, 장차 민병으로 무사를 짓밟을 것이라 외치고 다녔습니다. 그런 민병 오만이 움직인다고 하면, 동군 또한 대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즉 함께 좁은 길목을 지키느니, 차라리 그렇게 시선을 끌며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동군을 전장에서 이탈시키는 것이 이득이라는 말이었다.

‘저 린죠 히데요시가 모으고, 또 조선과 에스파냐의 정예한 군사들이 훈련시킨 민병입니다. 평민들은 평민들 나름의 강한 점이 있으니, 믿고 맡겨주시지요.’

이런 속마음이 나올 줄 알았는데, 바로 그 히데요시 본인이 순순히 민병은 눈길을 끌기 위한 군세일 뿐이라 수긍하고 나서니, 서군 무장들 사이에서도 고개 끄덕이는 이들이 꽤 나왔다.

그 뒤로는, 효고 북쪽의 산과 남쪽 바다 사이 좁다란 길목에서 어떻게 군사를 배치할지, 민병이 아닌 이쪽, 서군 본진과 함께 움직이기로 한 의병 – 특히 그 힘을 입증한 조선 포병과 여진 마병 –을 어떻게 배치할지 등등, 지루한 논의가 이어졌다.

물론 이 또한 히데요시가 의도한 대로였다. 마구잡이로 통보만 할 것이라면 무엇하러 군의를 소집하였느냐 투덜댈 법한 무장들도, 마치 큰 틀만 세워두고 안쪽 세밀한 내용에서는 그들의 뜻을 세세히 들어주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쑥 나온 입을 도로 집어넣었다.

이러한 합전은 본디 무사들의 몫이기도 했거니와, 정말로 민병이 동군의 예봉을 조금이라도 무디게 한다면 꽤 승산이 있을 듯하였던 것이다.

허나 이는, 이미 서군과 민주당 쪽에 많은 것을 걸었던 모리와 시마즈, 오토모 등의 이야기였고, 저 자유민주당이 소위 백성의 뜻을 내세워 마츠라 씨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 류조지 타카노부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아무리 계획을 잘 짜도 효고에서의 승산은 잘 쳐봐야 박빙. 물론 그마저도 동군이 요도가와를 지키며 서군이 혼간지를 구원하러 달려오기만 기다렸을 때보다는 크게 오른 승산이었지만, 여전히 타카노부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대쪽으로 확신이 생겼다.

그러므로 딱히 반론 한 마디 하지 않고, 군의에서 오간 모든 말을 그저 머릿속에 담기만 한 류조지 타카노부는 저의 군막으로 돌아와, 그림자를 향해 ‘혼자 하는 넋두리’를 실컷 하였다.

사람의 그림자야 본디 사람의 형상을 하기 마련이지만, 류조지 타카노부가 말동무로 삼은 그림자는 귀와 입이 달려 있었고, 핫토리 한조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혼간지 안에 갇힌 삼만 서군을 틀어막고 후방을 지키기 위해 남은 삼만, 교토를 지키는 이만을 제한 나머지 팔만 동군이 진격하니, 그 위엄이 북쪽의 산과 남쪽의 바다에 모두 닿는 듯하였다.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와 함께 아츠타 신사에서 기원을 드리고 왔을 뿐, 그 외에 도쿠가와 군을 향한 의심을 완전히 풀어주기 위해 다른 수를 부리지는 않았다.

약간의 의심은 남아있는 쪽이 오히려 더 이롭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패배한다면 후방을 지키는 이에야스가 바로 배신할 것이라 여기는 무장들은, 그만큼 승리를 위하여 열렬히 나설 것이요 노부나가의 군령을 저의 본디 주군이 내리는 군령과 같이 받들 터였다.

“그리고 진짜 배신자는 서군에서 먼저 나왔군.”

노부나가의 부탁에 따라 본디 주군인 이에야스 대신 잠시 노부나가를 섬기게 된 죠닌(上忍) 핫토리 한조는, 대답하는 대신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아마가사키를 출발한 서군은 효고를 눈앞에 두고 진영을 꾸렸다. 팔만 대 칠만의 싸움이니, 하루아침에 끝날 리는 없었고 어쩌면 이 진영도 야습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라, 노부나가 주변에는 목책을 세우고 참호를 파는 군사와 그들을 감독하는 무사들의 호령 소리로 온통 부산하였다.

내일이면, 이제 이 진영을 나서서 진짜 싸움터로, 일본의 명운이 결정지어질 그곳으로 팔만 대군이 향하게 될 것이다.

“류조지 타카노부라면, 그 ‘히젠의 곰탱이’인가 하는 뚱보 아니냐? 들어본 것도 같은데.”

노부나가 곁을 지키는 아케치 미츠히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군. ‘히젠의 곰’이라고도 알려진 무장입니다. 규슈 안에서는 오토모 다음가는 세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오토모 다음가는 세라면, 그러니까 서군에 붙은 무장 중에서는 앞에서 네 번째다. 물론 모리와 시마즈의 세가 월등히 강하고, 그런 두 집안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민주당이 뒤에 있으니 딱히 의미가 있는 서열은 아니었지만.

“그런 놈이라면, 누가 보아도 ‘아, 이놈은 여차하면 반대편에 붙겠구나’ 하지 않겠냐?”

“그것은 제가 감히 판단할 몫이 아닌...”

“야, 귤대가리야, 좀 네놈 목소리를 내란 말이다.”

어째 며칠 전 임꺽정에게 곤혹을 치른 이래로 조금은 날이 덜 세워진 핀잔을 하는 노부나가였다.

“그, 지금까지 서군과 그 뒤의 이들이 보인 행보, 그리고 그 지략을 볼 때, 반간(反間, 첩자를 역이용함)일 공산도 없지 않다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좀 해라. 네놈 생각에 옳다 싶은 게 있으면, 혼자 꽁하게 입 꾹 닫고 있지 말고 밖으로 좀 내라고. 그래야 내가 너를 중히 쓸 것 아니냐.”

그렇게 미츠히데를 타박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계산을 빠르게 마쳐나가는 노부나가였다.

지난날 혼간지 포위망에서 몇 번이나 서로 주고받은 수작질. 그 모든 일은 결국 노부나가를 서쪽으로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민병의 동향을 일부러 흘린 것도, 또 그러면서도 민병은 그저 눈길을 끌기 위한 것이라고 공언한 것도 마찬가지 뜻에서일 것이다.

“감히 추측해보자면, 민병은 실제로는 교토로 향하는 대신 도중에 산을 빠져나와, 우리의 후방, 그러니까 아마가사키 쪽을 노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유는?”

“그러니까, 음, 민병은 반드시 의병과 함께 움직일 것입니다. 민병은 그 자체로는 수만 채우는 무리고, 그들과 따라다니는 온갖 기묘한 군세가 진짜니까요. 헌데 아무리 그래도 민병 없이 의병만 나설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수가 부족하여 금방 적지에서 고립무원의 형세에 빠질 테니까요.”

“말이 길다. 거기까지는 나는 바로 짐작했단 말이야. 내가 하지 못하는 생각을 네가 할 수 있어야 네 쓰임이 있는 것이다.”

그저 변덕인지, 아니면 정말로 미츠히데를 중히 쓰려고 딴에는 가르친다는 뜻으로 채근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 그러나 미츠히데는 후자라고 단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므로 의병은 민병과 함께 움직여야만 하는데, 민병은 여진 마병과 달리 모두 보병이고, 그 기율도 무사들과 같지 않습니다. 단바 산길을 거쳐 교토까지 가려면 열흘에서 보름쯤은 걸리겠지요. 차라리 교토로 향하는 대신 도중에 아마가사키 쪽으로 빠져나와 우리의 후방을 노리는 게 나을 것입니다.”

“아직 많이 모자라다. 멍청한 녀석.”

“하면...”

“그것 또한 놈들이 노리는 것 아니겠냐? 우리가 민병을 의식하며 조금이라도 병력을 후방에 더 두고 오도록 유도하려는 것이겠지.”

그리고 노부나가는 핫토리 한조로부터 보고를 받기 전부터 이미 어느 정도 이를 예상하고 있었다.

백성의 군대로 무사의 군대를 깨부수겠다는 호언장담은, 말 그대로 호언장담일 터. 

아무리 전의가 높다 하더라도, 평생 전장을 누빈 이들을 상대로 농민들이 싸워 이기기는 어렵다. 

전장 바깥까지 논하게 되면 통념과 달리 더욱 격차가 벌어졌다. 그들 중 누가 보급을 알겠는가? 군영을 만들고 경계하는 법은 또 누가 알 것인가? 지금껏 일향종이 백성을 현혹해 몇 번이고 잇키를 일으키고, 심지어 무사들을 몇 번쯤 무찌르기도 하였건만, 결국에는 모조리 진압당한 것도 그 때문일 테다.

“내 장담컨대, 의병은, 그 여진 마병과 조선 포병 모두 서군 무장들과 함께 효고에 진을 치고 있을 것이다. 이 싸움의 향방을 결정할 바로 그때, 저기 저 북쪽 산속에서 나타나 우리를 들이치겠지.”

그러나 마치 노부나가가 그런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는 듯, 느닷없이 땅이 울렸다.

울림은 북쪽 산에서 발하고 있었다.

“붉은 마병이다!”

가장 산에 가깝게 붙어 있던 우에스기 군영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숨에 동군 전체를 이끄는 무장으로서 태세를 갖춘 노부나가가 명했다. 

“미츠히데! 즉시 우리 군을 이끌고 우에스기 군을 구원해라! 멍청한 놈들은 아직 마병을 제대로 상대하는 법을 모를 테니, 우리가 나서야 할 것이다!”

“예, 주군!”

뜻밖의 일이지만, 언제고 여진 마병이 불리한 전세를 뒤엎기 위해 장수들을 노리고 진에 난입할 경우에는 이미 대비가 되어 있었다.

미츠히데를 따라 전령들이 군영 곳곳을 헤집고 다니고, 마치 한 몸처럼, 오케하자마 때부터 수없이 많은 다이묘의 군세를 무너뜨렸던, 진짜 에스파냐군으로부터 훈련받은 오다 군이 빠르게 모여들었다.

“우에스기 군을 구원한다! 가자!”

군신(軍神)을 자처하는 우에스기 겐신의 군영은, 마치 귀곡성 같은 소리를 외치며 핏빛 십자 문양 깃발을 휘두르는 여진 마병들 앞에서도 그럭저럭 질서를 지키고 있었다.

노부나가 아래에서 동군이 그럭저럭 하나로 묶였다는 것을 방증하듯, 겐신도 자존심을 굽히고 기병을 상대하는 법을 꽤 받아들였다. 

그 덕에, 그저 안일하게 옛 다케다 씨의 기마 무사들을 떠올리고 있는 대신, 처음 군영 터를 잡을 때 가장 먼저 세웠던 목책 쪽으로 창병과 철포대를 보내 진을 쳤다.

“이거, 우리가 나설 필요가 없을지도... 아니, 이렇게 된 김에 공을 세운다! 저 마병들이 진을 뚫지 못하면, 반드시 옆으로 우회하여 빈틈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쪽을 우리가 지키고, 퇴로를 막는다!”

“존명!”

그러나 미츠히데의 계산은 허무하게도 빗나가고야 말았다.

잽싸게 움직인 덕에 우에스기 군 진영을 잘 볼 수 있는 위치까지 온 미츠히데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일순 의심하였다.

‘분명 아마고 잔당이 처음 저 마병에게 격파당했을 때만 해도, 저런 일은 없었다고 하였는데...’

마병들은 우직하게 창을 들고 들이받는 대신, 사선을 그리며 목책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북쪽 산에서 효시 하나가 울부짖으며 치솟자, 마병들은 그대로 빠져나갔다. 

기껏 하던 일을 내던지고 급히 진을 갖춘 우에스기 군으로서는 맥 빠지는 일. 그러나 이것도 어쨌든 쫓아낸 것은 쫓아낸 것이었으므로, 조심스럽게 환호하는 목소리도 나오는 듯하였다.

그때였다. 

“화포다!”

폭음과 더불어 치솟는 자욱한 연기. 화들짝 놀라 북쪽 산기슭을 살피니, 처음 보는 깃발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기껏 세워둔 목책은 부서지고, 박살나고, 무너졌으며, 허공에 비산하는 것 중에는 꼭 나무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압카이 어럼비!”

곧 수많은 이들에게 악몽을 선사할 그 외침과 함께, 비스듬히 빠져나가는 줄 알았던 마병들이 다시 반전하여 달려들었다.

“온다!”

“장창! 장창!”

“두려워할 것 없다! 새로 배운 병법대로 창병이 밀집하면 마병은 막을 수 있어!”

“철포대! 화승에 다시 불을 붙여라! 기억해라! 창병이 막는 동안 마병을 쏘아 맞추는 것이다!”

누더기가 된 목책 사이로, 아직 오다 군에 비하면 어설프지만, 그럭저럭 쓸만한 총창진이 갖추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러다가는 또 기껏 원군이라고 나섰다가 별 공도 못 세웠다는 핀잔이나 듣겠거려니- 그리 생각할 무렵.

달려드는 여진 마병들에게 들린 창이 어째 짧다는 것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깨달음은 한 발 늦어, 말발굽 따라 이는 흙먼지 사이로 새로운 연기가 자욱하니 피어올랐다.

“하하! 빠져나간다!”

“크하하! 꼴 좋다!”

짧게 만든 조총을 자랑스레 뒤흔들며, 여진 마병은 북쪽 산속으로 사라져갔다.

다시 살펴보니, 우에스기 군에서 죽은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 화포 쏠 때 그 호로쿠다마 비슷한 철환(진천뢰)에 맞은 이들은 아주 참혹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고, 땅 위에 서서 쏘는 조총도 사거리를 벗어나면 그 정밀함이 크게 떨어지는 판국에 달리는 말 위에서 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방금 전 펼쳐진 참상에서 무력함을 느낀 이들도 많다는 뜻.

그래도, 이번 일에서는 저의 잘못이 없었으니 또 그놈의 귤대가리 소리 듣는 일은 없지 않을까 생각하며, 멀어져가는 여진 마병들을 한참 지켜본 미츠히데는 철군 지시를 내렸다.

“면목 없습...”

돌아오자마자 대뜸 사죄하려던 차, 노부나가가 한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 말을 가로막았다.

“미츠히데, 즉시 일만 병력을 이끌고 교토로 향해야겠다.”

“예?”

“그사이 교토로부터 급보가 들어왔다.”

이 시국에 교토로부터 들어올 급보가 무엇인지, 미츠히데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민병. 그놈들이 무슨 수를 썼는지, 벌써 단바 산길을 거쳐 가메야마에 닿았다는군.”

훗날 기나이 대진군(大進軍)이라 알려지게 될, 히데요시와 이순신이 합작한 계책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 ---

산악이 많고 길쭉한 형상을 하고 있는 혼슈의 지형적 특성상, 일본의 패권을 두고 벌이는 전투는 사실상 혼슈 남쪽을 따라 죽 이어지는 교통로 상의 몇몇 지점에서 계속 반복되곤 했습니다. 작중 등장하는 고베 일대(효고)~오사카 사이 구간도 그런 곳 중의 하나로, 12세기 겐페이 합전에서도, 또 남북조시대 당시에도(미나토가와 전투)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는 전투가 벌어지곤 했지요.

작중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겐페이 합전이란, 12세기 일본을 둘로 나누었던 겐지(源氏, 미나모토 씨)와 헤이지(平氏, 다이라 씨) 두 집단의 내전을 말합니다. 지금의 효고 지역에서 벌어졌던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한때 일본을 장악하였던 헤이케 세력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이후 규슈로 도주하여 벌인 최후의 항전 단노우라 전투에서 전멸하게 됩니다. 이때 일설에 따르면 천황가에 내려오는 삼종신기 원본도 바닷속으로 함께 사라졌다고 전해지는데, 공식적 입장은 어디까지나 진품이 아닌 사본(위조품은 아니고, 공식적으로 ‘원본 대접을 받는 사본’이었습니다)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원 역사에서도, 오케하자마 전투를 앞두고 저의 거점 오와리에 있는 아츠타 신궁에서 승리를 기원했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작중에서와 달리 원 역사의 노부나가는 오케하자마 전투에 임하기 전 훨씬 절박한 상태였지요. 

작중 여진 마병들이 사용하는 카라콜 전술은 원 역사에서는 기병과 화기를 동시에 운용하는 어지간한 문화권에서는 다 한두 번씩은 사용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보병을 상대로, 그것도 몇몇 특수한 경우에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전술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승총이 플린트락(수석총)으로 교체되면서 보병 화력이 상승하기 전까지는 일종의 변칙 전술로서 계속 쓰였지요. 머스킷이 등장하기 전부터 기병이 종종 화기를 다루곤 하던 조선도 마찬가지로, 이미 16세기부터 삼안총을 시초로 다양한 기병총이 개발되었고, 유럽과 마찬가지로 그 위력과 유용성을 두고 지속적인 논쟁이 벌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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