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32화 (232/259)

70. 해서파관 (1)

압록강을 넘어 산길 따라 산해관으로, 천진에서 배 타고 바다 건너 인천으로. 

이전 몇 해보다도 부쩍, 정묘년(1567) 한 해 동안에는 조선과 명 사이에 서로 꾸짖는 글이 자주 오갔다.

아직은 서로 예의를 갖추어, 한쪽에서는 나름 상국 대접은 해주고, 또 다른 쪽에서는 그래도 성인 기자가 문명을 전해준 천조 제일의 번병이라고 불러는 주었으나, 더 이상 문장의 어디에서도 사대자소(事大字小)의 마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통첩이 오갈 뿐이었다. 동에서 서로 가는 것은, 조선 국인 모두의 뜻을 담은 국인선서에 정작 천조 대명이 반하고 있으니, 조선왕 환부터 여염의 어리석은 백성까지 상하가 공히 이를 우려한다는 글. 

서에서 동으로 돌아가는 답은, 동방의 예의지방 조선이 근래 오히려 의리를 크게 잃은바 황제가 이를 근심한 지 오래라는 글.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뜻대로 되도록 만들겠노라 하는 위협은 어조 뒤에 숨었다가, 행간 사이로 빼꼼 나오더니, 이제는 한 줄 건너 한 줄마다 나오고 있었다.

장거정도, 임꺽정도 조만간 문(文) 대신 무(武)로써 옳고 그름을 가릴 작정을 단단히 하였으니, 지금 북경의 광녕문(廣寧門) 문루에 오른 해서의 눈에 들어오는, 저 동녘을 메운 먹구름이 곧 전운(戰雲)이 아니라고 그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해서는 한탄하듯 읊었다.

“높은 누각에 한 번 오르니 근심은 만 리에 뻗치고, 갈대와 버들은 무성하니 모래톱을 이룬 듯하구나 (一上高樓萬里愁 蒹葭楊柳似汀洲).”

눈앞에 무성한 것은 갈대가 아니라 창대요, 버들이 아니라 훈련하는 병사들이었다.

일본 장수 직전신장(오다 노부나가)과 대명의 천장(天將) 척계광이 합을 맞추고, 노련한 일본 무사와 군사들이 총창진을 이루니 상대하는 천병(天兵)도 그 진법을 함께 따른다. 

반대편에 있는 것은 새로이 조련을 받고 있는 군세. 수는 훨씬 많으나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적을 모의하고 있는 이쪽 군세에 비해 누가 보아도 솜씨가 어설펐다.

곧 탄환 없는 공포(空砲)가 여럿 울렸다. 일본 땅에서 조선인들이 가르친 민병에게 참패한 이래, 대책을 절치부심하며 마련하였다던가. 천조의 무한에 가까운 재보로써 새로이 무장한 그들은 아낌없이 조총을 쏘아대었고, 그 양옆에는 일본에는 없던 새로운 군세, 기병이 달리고 있었다.

아마가사키 때보다 훨씬 늘어난 철포수 비중을 자랑하는 오다 군의 진형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척계광이 고안하고 노부나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발전시킨 거(車, 포병 및 이동식 바리케이드), 기(騎, 기병), 보(步, 보병)의 삼재진(三才陣). 

“계곡 따라 구름 일어나니 해는 저물어 누각에 드리우고, 산에서는 비가 내리기를 바라므로 바람이 누각을 채우누나 (溪雲初起日沈閣 山雨欲來風滿樓).”

대구하듯 이어서 읊어주는 소리가 나기에 해서가 등을 돌려보니, 언제 왔는지 모를 장거정이었다.

“저 훌륭한 광경을 보시며 어찌 쓸쓸하게 ‘함양성동루(咸陽城東樓)’를 운운하시오?”

만당(晩唐, 당나라 말엽)의 기우는 국운을 슬퍼하며 그 옛날 허혼(許渾)이 읊었던 시. 하필 그들이 올라 있는 광녕문도 도성의 동쪽에 있었으므로 실로 공교로웠다.

“나라가 나날이 변해가는 것을 보고, 한 시대가 끝나가는 것을 체감하였을 뿐이오.”

과연 그 변해가는 방향은 올바르다 할 수 있는가.

아직까지는 분명 과(過)보다는 공(功)이 많았다. 그러나 그 격차는 나날이 줄어들고 있었다.

대일통의 대의가 옳음을 보이기 위해, 스스로 몇 년 안으로 성과를 드러내야만 하는 처지로 장거정은 걸어들어갔다. 장거정 본인이 그것을 원했는지, 아니면 장거정으로 하여금 제 발로 그리하도록 누군가 은밀히 이끈 것인지, 해서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라의 병폐가 사라지는 만큼, 새롭게 병폐가 자라나고 있었고, 이대로라면 새 병폐가 옛 병폐보다도 더욱 무겁게 온 나라를 옥죄게 될 것이었다.

나라를 좀먹던 부정과 사대부와 신상(紳商)들이 결탁하여 일으키던 부패는 사라져 갔다. 그 자리에는 공사(公司)라는 또 다른, 그 자체로는 병폐가 아닐지 몰라도 벌써 곪아가고 있는 무언가가 들어섰다.

중원은 너무나 넓었고, 백성 중 열에 아홉은 공사가 무엇이고 대일통은 또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바깥 세상에 어두웠으며, 나머지 하나는 향신들의 빈자리를 잽싸게 차지하여 나머지 아홉을 아래에 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광풍(狂風)은 벽촌(僻村)의 논두렁을 넘어, 온 중원을 휩쓸기 시작했다.

“어찌하여 이 사람이 주어진 임지를 떠나 이곳으로 왔는지, 수보 대인께서는 당연히 알고 계시리라 믿소이다.”

응천순무 벼슬 위에 이런저런 관직이 더 붙기는 했지만, 어쨌든 해서의 임지는 여전히 남직례와 여타 강남 일대였다.

나라의 재정을 감당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그곳에서 경장의 실무를 맡는 것이 바로 이 장거정 내각에서 해서가 맡은 소임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그 벼슬을 내려놓지도 못했는데 경사(京師) 안에 들 수는 없다며, 성벽 위인 이곳 누각에서 장거정을 만나게 되었다.

“존재(存齋, 서계) 선생의 일 때문이겠지.”

저의 스승이자, 장거정이 이 자리에 설 수 있게끔 이끌어준, 그리고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는 발판이 되어준 서계의 별호를 입에 올리는 장거정의 표정은, 속내 한 점 드러내지 않는 덤덤함을 유지하였다.

아니, 저 무덤덤함이야말로 속내일 테다. 권세를 사랑하고, 권세를 휘두룰 수 있는 가장 고상한 방식 – 바로 한 사람의 뜻대로 천하를 움직이는 것 그 자체 –을 깨우친 장거정이었으므로.

“사제(師弟)의 의리조차 국정의 중임을 맡는 자에게는 사치일 뿐이오.”

“정녕 괜찮으시겠소?”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조차 사직하기는커녕 고작 사흘간 북경 자택에서 간략히 상만 마치고 돌아왔던 장거정이었다. 황제는 장거정에게 탈정(奪情, 상을 당한 이에게 관직을 제수하거나 복직을 명하는 것)을 허여하였는데, 그것이 눈과 귀가 막혀 자신이 죄수 신세인지도 알지 못하는 자금성의 수인(囚人) 주재기의 뜻이 아니라 장거정의 뜻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런 탈정의 예를 두고 장거정을 비판하는 이도 없었으니, 해서나 조정길 같은 이는 장거정이 지금 탄핵이라도 당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을 알았고, 감히 장거정을 탄핵할 만한 오기와 용기 있는 자들은 애초에 북경에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성왕(成王)이 오동잎으로써 장난삼아 아우를 제후에 봉했을 때도, 주공(周公)은 그것이 천자의 명이었기에 그대로 제후로 봉하도록 하였지. 지금 우리가 이루어내고 있는 이 대업 또한 황명에 따르는 것이요, 무겁기는 그보다도 더 무겁소.

국법의 지엄함은 지켜져야 하오. 여느 법도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이자 우리가 떠난 뒤에도 남을 중화를 위하는 법이니, 설령 참과 거짓을 잠시 흩트리고 사람의 도리를 일시 끊을지라도, 지금과 같은 시국에서는 지켜져야 한다는 말이외다.”

나라가 중화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깔려, 모두의 숨을 옥죄이는 지금. 드러내지 못한 성과만큼 강압과 억지가 횡행하는 지금.

그럼에도 아직 그 재산이나 토지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미 자신이나 그 바로 윗대에 벼슬을 한 사대부들도 그중 하나였다. 장거정 또한 사대부의 하나였으므로, 다만 그 위세로써 부정하게 취한 이득이 있다면 그것을 돌려놓도록 하였을 뿐 그 이상으로는 나가지 않았다. 

장거정 본인도 마찬가지였고, 태감 풍보 또한 숱한 설득과 설득을 빙자한 겁박 끝에 저의 재산 중 삼분지이 넘게를 국고에 바쳤다.

서계 또한 한창 선황 가정제를 ‘모시고’ 경장을 추진하던 시절, 고향에 남아 있던 못난 아들과 친척들이 그의 이름을 내세워 백성의 논밭을 빼앗은 일이 있었다. 응천순무 해서는 그 토지를 모조리 환수하였다.

그때만 해도 법을 사사롭게 굽히지 않으니 참으로 훌륭한 ‘해청천’이시라는 말이 나왔고, 그렇게 끝나는 줄로 알았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송강부(松江府, 現 상해 송강구 일대)의 홍병위 우두머리 왕 아무개가 서계 본인을 고변하였다.

서계가 부정하게 끌어모은 토지를 모두 반납한 것이 아닌즉, 그가 지닌 모든 땅을 환수하고 저의 땅을 공사에 바친 다른 향신과 마찬가지로 공사에서 적당한 벼슬을 받아 중화와 나라에 도움 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거정은 서계가 그럴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그러나 세상도 그렇게 여길 것인가? 지금과 같은 민감한 때에, 농리공사를 만들고 운영하는 데 있어, 그리고 대일통의 큰 뜻을 세우고 지키는 데 있어 실수와 반박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쉬이 인정할 수는 없었다. 

“... 알겠소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직접 장거정의 말을 듣고 그 안색을 살피고자 북경까지 온 해서는, 이미 그 마음이 단호한 것을 깨닫고 더 토를 달지 않았다.

그 대신, 이번 일로 인하여 어떤 어지러움이 더 벌어질지, 그것을 고심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해서의 예감이 틀리지 않아, 서계의 두 번째 퇴전(退田, 토지 회수)이 빚어낸 논란은 고스란히 백련교 교인들을 통해 조선으로도 전해지게 되었다.

천하의 앞날을 두고 벌이는 대전쟁. 절반쯤은 임꺽정의 뜻에 따라, 나머지 절반은 임꺽정이 일으킨 난리로 인하여 뒤틀리고 뒤틀린 세상 정세로 말미암아 벌어지게 된 이 크나큰 싸움도 벌써 삼년차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튜더와 얼마 전 아버지의 자리에 오르게 된 셀림으로부터의 소식에 따르면, 에우로파 땅의 싸움은 앞날을 알 수 없을 만큼 팽팽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저지대에서의 싸움은 신성로마제국의 후원과 알바 공 본인의 뛰어난 군재에 힘입어 에스파냐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에스파냐와 한때 자웅을 겨루던 프랑스는, 나폴리에 상륙한 에스파냐군으로부터 이탈리아 연맹을 지키는 데 병력이 분산되어 그 위명에 맞는 활약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덴마크는 스웨덴을 물리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애초에 신성로마제국이나 리투아니아까지 적대할 생각은 없었고, 얼마 전 느닷없이 일대 개혁을 선포한 루스 차르국은 리투아니아에게 얻어맞는 것 외에 별 전공을 못 세우고 있었다.

루멜리아(오스만령 발칸)에서 벌어진 싸움에서는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직접 이끄는 투르크 군세가 신성로마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의 공세를 근근이 막아내고 있었다. 

단 하나 꺽정이네 연합군 – 이렇게 부르면 참 없어보이는 이름이었다 – 이 압도하고 있는 곳은 지중해였는데, 베네치아와 에스파냐가 힘을 합쳐도 겨우 오스만 해군을 막아낼 판에, 그 베네치아와 오스만 투르크가 힘을 합쳐 에스파냐를 치는 형국이었기 때문이었다.

맘루크의 반란이야 이어지고 있었지만, 이미 이스칸다리야와 술레이마니야 등 전세에 영향을 줄 법한 거점은 모조리 이쪽 해군과 베네치아군이 탈환한 지 오래였다.

결국, 이곳 동방에서 명을 꺾음으로써 에스파냐가 전쟁을 계속하려는 뜻을 함께 꺾지 않는 한 에우로파 땅의 전세가 급작스레 어느 한쪽으로 기울 공산은 희박하였다.

“... 이상이 리즈, 아차, 튜더 사장이 전해온 바입니다. 이어서 백련교 두목 조전이 요양에서 보내온 글을 살피자면...”

사업당에서 한 순(열흘)에 한 번꼴로 열리는 모임. 여러 나라의 말에 재주가 있는 고로 각국에서 전해오는 사정을 취합하여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것은 이탁오의 몫이 된 지 오래였다.

동창의 눈을 여반장으로 피하면서 명나라 안쪽 사정을 전해줄 뿐 아니라 강남의 여러 향신들에게 은밀히 자금과 그들에게 절실한 여러 적정(敵情)을 전해주는 일도 맡고 있는 백련교도들은, 난 곳은 섬서나 산서로 천주 사람 이탁오와는 한참 고향이 떨어져 있었지만 어쨌든 같은 중원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백련교도들과 주고받는 연통 역시 이탁오의 몫이었다.

“일전에 임 당수와도 연을 맺은 바 있다 들었던 서계 대인에게 좋지 못한 일이 생길 것 같다고 합니다. 억지 고변을 당해 문중의 전답을 송두리째 빼앗기게 되었는데, 그 제자였던 장거정 그치는 스승을 구제하기는커녕 그 무고를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해 순무에게 명하였다는 모양입니다.”

서계라면, 꺽정이가 그 옛날 누구도 손쓰지 못하는 엄숭을 상대할 적에 꽤 도움을 주고받았던 사이였다. 

“허, 우리 장꺽정 형이 원래 그런 작자였단 말인가.”

“보나마다 그 대일통 논변의 위엄에 흠집 한 점 낼 수 없다는 것이겠지. 욕심도 많구나, 그 자는.”

이지함이 한탄하였다.

명년도 출병을 위하여 동방 삼국의 온 힘을 끌어모으고 있건만, 그렇게 모으는 힘도 명나라 전체의 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하였다.

온갖 계책과 술수로 그 불리함을 뒤집고 또 뒤집으려 애썼건만, 장거정 본인의 유능함과 그 아래의 척계광이라는 이의 군재, 그리고 일본 땅에서의 경험을 고스란히 들고 건너간 오다 노부나가와 그 휘하 무사들까지, 모든 재주와 경력이 정예한 군병을 만드는 데 쓰이고 있었다.

물론 온 천하의 빼어남을 한데 모으고 거기에 몇 가지 덧붙이기까지 하고 있는 조선의 군병만은 못하겠지만, 저들에게는 그 정도 이점은 가볍게 넘길 만한 수효가 있었다.

동방 삼국이 ‘한양의 맹’에 따라 군을 모은다면, 대군 이십만이 의주와 요양 사이에 모일 수 있을 터였다. 조선과 일본, 북방을 지키기 위해 남기는 병력을 제하고, 그저 산해관 넘어 북경으로 쳐들어갈 병력만 해도 그만큼이었으니, 전조 말이나 국초에 요동 정벌을 논하였던 고려/조선 대신들이 듣는다면 군침이 싹 돈다는 선비답지 못한 말을 금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그들이 상대해야 할 명의 군세는 이백만이 넘었다.

그 이백만 중 정예한 이들만 추리면 동방 삼국과 비슷하거나 약간 많은 정도겠지만,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

사람은 언제든 정군으로 양성할 수 있으나, 이미 죽은 사람은 되살릴 수 없는 법. 삼국의 이십만은 상하고 다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대국의 이십만은 그들이 설령 사람 하나, 말 한 마리 못 남기고 전멸하더라도 그 뒤에 새로 사십만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이미 이곳 사업당 안에서도, 조정과 나머지 세 당의 안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 여태껏 없던 번국의 상국 정벌은 해야 할 싸움이요 또 할 값어치가 차고도 넘치는 싸움임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저들의 숨막히는 덩치를 어떻게든 이겨내고자 갖은 술수를 쓰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한 치의 흔들림조차 용인하지 않겠다고 저리도 모질게 구는 장거정을 보면 혀를 내두르게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 구해낼 수는 없겠소? 그때 그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서 대인을 말입니까?” 

“그렇소.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그건 서 대인도 알고 있겠지. 일국의 내각수보까지 했던 사람인데 설마 저를 구해주는 그 목숨값을 헐하게 쳐줄까.”

잠시나마 임 당수가 정말 서계를 불쌍히 여겨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여, 이 무슨 해가 서쪽에서 뜨는 소리인가 싶었던 서림은, 금방 ‘그럼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백련교 교인들조차 마음 놓고는 돌아다니지 못할 만큼 숨막히는 곳이 중원이라 하셨잖습니까. 그곳에 어찌 들어가실 심산이십니까?”

오가는 말을 듣던 이탁오가 잠시 말수가 없어지더니, 한참 갑론을박 이어지는 좌중 향해 한 마디 툭 던졌다.

“무릇 사람이든 물고기든, 떡밥만 잘 던지면 낚아올리기는 쉽지 않겠소?”

먼 옛날 연나라 소왕(昭王)이 인재를 구하니, 재상 곽외(郭隗)가 진언하기를 우선 저부터 극진히 대접해달라 한 일이 있었다. 천리마를 구하기 위해 먼저 천리마의 뼈를 사들이듯, 자신처럼 변변치 못한 자도 후대받는 것을 보면 반드시 천하의 재주 있는 자들이 앞다투어 출사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허나 이 고사의 참된 교훈은, 인재를 얻는 왕도(王道)가 바로 재물을 흩뿌리는 데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돈을 많이 퍼붓다 보면 뛰어난 이들은 알아서 모이기 마련이었다.

이 이치에 따라 넓디 넓은 대명에서 출세 욕심과 재주를 겸비한 젊은이들은, 고작 무관이 되기 위해 취재(取才) 준비를 하고 뇌물을 흩뿌리거나, 거인(擧人)이 되려고 팔고문(八股文) 따위를 외우는 것보다 더 좋은 길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개중 편한 길은, 대일통의 논변을 달달 외운 다음 자신이야말로 장 내각수보의 원대한 뜻을 앞장서서 실천하는 사람이라면서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것이었다. 이곳저곳에 생겨난 홍병위들을 이끌며, 아직 공사(公司)로 묶이지 않은 상행이나 전지(田地)를 빼앗고 슬그머니 저의 것으로 삼는 것.

허나 그보다 더 편한 길이 있으니, 그렇게 홍병위며 장 수보 대인 권세며 믿고 날뛰면서 저의 욕심 부린 자들을 슥 고발하는 것이었다. 나라의 새 법도는, 그렇게 고변한 바가 참으로 밝혀졌을 경우 크나큰 포상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에 비하기가 민망할 만큼 어렵지만, 잘만 하면 등용문(登龍門)이라 부르기조차 미안할 만큼 벼락출세하는 길이 또한 있었으니, 바로 동창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직도 동창에 멀쩡한 사내가 들어가는 것은 영 어색한 일이었지만, 여하간 장 수보의 수족과 같은 것이 바로 동창 아니던가. 그곳에 들어가 중원과 온 천하를 누비면서 무언가 큰일을 해낸다면, 그때는 비로소 저의 이름이 경조(京兆, 수도) 문연각(文淵閣)에 오르내리게 될 터였다.

이것이 바로 청운의 꿈을 품은 광동 사람 진린(陳璘)이 동창에 들어가, 일본 동척사에서 일하는 화인(華人, 중국인)으로 위장하여 조선을 정탐할 기회를 엿보게 된 까닭이었다.

일본 신정부는 동군 무사들이 항복한 이상 별다른 – 적어도 겉으로는 – 제재를 가하지 않았으므로, 동척사 역시 명으로부터 은자는 제대로 받지 못할지언정 운영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몇 달을 지냈을까. 마침내 진린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그것도 꿈도 못 꾸었던 모습으로 나타났다.

‘조선국 동래에 이렇게 발을 들일 수 있게 되다니! 근래 우리 동창의 어떤 이들도 하지 못한 일 아닌가?’

그 두리손이라는 자가 무너진 이래로 조선 안에 있던 동창의 첩자들도 모두 쫓겨나든 떼몰살을 당하든 하였다. 그 이후로는 일본이나 여진 – 해서여진이 모두 그 ‘압개국’에 붙으면서 이마저도 어려워졌다 –을 통하여 멀리서 살필 뿐이었다.

그런데 동창에 몸 담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진린이, 그것도 어떤 흉악한 무기나 전선이 만들어지고 있을지 모르는 간악한 이적의 소굴 동래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공인가?

‘심지어 풍문에 따르면, 이순신도 그곳에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순신이 누구인가? 저보다도 연소한 나이에 벌써 조선 의병을 이끌고 그 군재로써 온 일본을 진동케 하였던 사내다. 동창에 있으면서 바깥 세상 소식에 밝을 수밖에 없던 진린에게는 부러우면서도 질투를 품게 되는 사내가 아닐 수 없었다.

헌데 진린에게 닿은 천행(天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흠흠, 내가 바로 이 대인을 근시(近侍)하는 몸이라고 호언장담하지 않았소이까?”

“아아, 실로 그랬습니다. 이 진 아무개, 눈이 있으나 보지는 못하여 귀인을 알아뵙지 못하였습니다.”

어울리지도 않는 생쥐 수염을 늘어뜨린 사내 앞에서 진린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눈앞의 사람은 진린 그와 마찬가지로 대명의 백성인데, 일찍이 민주당에 붙어 지금은 한양과 인천, 동래를 오가며 이순신을 보좌한다 하였다.

“특히나 이 대인께서 직접 살피고 계시는 온갖 병기의 제조는, 나 심유경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소이다.”

정말로 눈앞의 ‘심유경’ - 어째 일본에서 들어본 것도 같은 이름이었다 – 말을 따랐더니, 오늘 먼발치서 이순신이 선소(조선소)를 둘러보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고 공방이나 선소 안쪽까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은자만 충분히 바친다면야...

그리고 다행히도, 지금 진린의 보따리에는 금은보화가 그득 들어 있었다.

“이 노야(老爺)께서 맡기신 일이라면 필시 장차 온 천하를 진동시킬 만한 무언가 아니겠습니까? 만에 하나 기연(奇緣)을 얻어, 그러한 큰일의 아주 사소한 실마리라도 미리 볼 수만 있다면, 저와 같이 보잘것없는 장사치도 어쩌면 이문을 꽤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슥 내미는 손길과 슥 받아가는 손길이 교차하였다.

“허, 이 사람...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구려!”

큰일이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큰돈이 또 한 번 오갔다.

“이처럼 진 아우가 성의를 보였는데, 모른체할 수도 없지. 좋소. 이 심 아무개, 비록 고향 가흥 떠난 지 삼십 년이 되었지만 같은 중원의 사람에게 지키는 의리는 잊지 않았소. 그믐이 나흘 뒤니, 그때 보십시다.”

그리고 아직도 진린 몫의 천운은 다하지 않았는지, 정말로 나흘 뒤에 심유경은 보따리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자, 잊지 마시오. 딱 한 번만 훑어보는 것이오. 중요하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소. 딱 한 번만. 그냥 보고 외우든 말든 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것을 훔치거나, 어디 다른 곳에 글로 베끼거나 해서는 아니 되오.”

“물론입지요. 이 진 모, 심 대형의 은혜를 백 번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이미 절반쯤은 자신이 여기서 세운 공에 대해 북경에서 직접 동창제독 풍보와 그 곁의 내각수보 대인 앞에서 줄줄이 읊는 모습을 눈앞에 그리고 있던 진린이 성의없는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곧 보따리가 열리고, 진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아, 이것들은! 이것들이 정녕 지금 여기 동래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어느 것 하나 만들어지지 않고 있는 게 없소. 조만간 완성되는 대로 한양과 그 너머 의주로 옮겨질 물건들이지.”

진린이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기묘한 병기들의 도안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화약을 넣어 쏘는 총통은 총통이되, 앞에서가 아닌 뒤에서, 마치 불랑기포처럼 재는 그런 총이 있었다.

그뿐이랴? 그러한 총 여럿을 하나로 묶어, 수레에 싣고 마치 수천 명의 조총수가 한 곳에 모인 것처럼 연달아 쏠 수 있는 무기의 그림도 그려져 있고, 큼직한 총포를 실은 전차에 철갑을 두르고, 움직이는 성채처럼 전장을 누빌 수 있게 하는 그림도 있었다.

개중에는 정말 얼마 전 조선에서 만들었다고 한 ‘자생화총’의 도안도 섞여 있었으므로, 진린은 이 그림들이 모두 진짜 도안이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개중 몇몇 도안에 작게 글씨가 쓰여 있었다.

‘서계 대인에게 전하여, 장차 강남 땅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 요긴하게 쓰도록 할 것 - 林.’

‘임’이란 곧 임 당수를 말하는 것이요, 서계 대인이라면 보나마나 내각수보이시자 중화의 위인인 장거정 대인의 스승, 바로 그 서계 대인일 테다.

소름이 돋으며, 자신이 생각보다도 큰일을 맞닥뜨리게 되었다는 두려움과, 그만큼 더 큰 공을 세울 수 있으리라는 공명심이 함께 샘솟았다.

“그, 이것은... 그러니까 이 대인이 아니라 임 당수께서 직접 보신 게로군요?”

“무엇 말이오? 아, 이것. 나야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닷새쯤 전에 이 대인께서 한양을 다녀오신 뒤에 다시 보니 적혀 있었소. 임 당수께서 급히 배를 마련하신다고, 여기 동래가 시끌시끌 했던 것도 그쯤이었네, 그러고 보니. 흠...”

머릿속에서 온 그림이 탁탁 들어맞았다.

임거정과 서계 사이에 모종의 연통이 오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강남에서 작란하는 것. 

그리고 닷새 전에 이미 배를 띄웠다면... 이 사실을 자신이 동척사로 돌아가 북경에 고한다면 이미 늦어 있을 터. 차라리 이곳 동래에서 배를 구해 자신이 바로 서계가 있는 남직례로 향하는 쪽이 그나마 성공의 공산이 있을 테다.

막 동창에 들어간 진린이, 임거정과 서계 사이에 오가는 연통을 중간에 가로채고 진실을 밝힌다? 한 번 머릿속에 박힌 이래 도통 떠나지 않는, 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이었다.

결국 깊게 결심한 진린은 저의 정체를 밝히기로 하였다.

같은 중화 사람의 의리를 내세우고, 이미 저의 뇌물을 받았으니 심유경도 돌이킬 수 없는 처지임을 함께 말하였다.

그렇게 동트기 전까지 갖은 힘으로 유세를 다하였더니, 결국 심유경은 진린의 편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그 심유경 뒤에는, 그가 잘 알고 지낸다는 장사 하나와 몇몇 의형제들이 붙어 있었는데, 그들 모두 그 다음날 몰래 동래를 떠나 남경 응천부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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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의 왜구부터 북쪽의 몽골까지, 다양한 적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병법을 모색하였던 척계광이 주목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전차였습니다. 화포를 탑재한 중차(重車)와 기병의 접근을 막기 위해 창을 박아넣은 경차(輕車)로 구성되는 전차의 운용법은, 주로 몽골 기병을 상대할 때를 상정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전법이 효험을 드러냈어야 할 명-후금 전쟁 시기에는 이미 명군의 인적 자원의 양과 질이 모두 떨어지고, 더구나 전술 차원의 뛰어남을 상쇄하고도 한참 남을 만큼 전략과 작전술 차원에서 무능함을 드러내고 있었지요.

다른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하나둘씩 쇠퇴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그 세력을 유지하였던 베네치아는, 결국 17세기 오스만과 지중해 패권을 두고 벌인 결전에 자국의 모든 힘을 쏟아부으며 몰락하게 됩니다. 하나씩 동지중해의 무역 거점을 상실한 베네치아는, 마지막 거점이자 최대의 거점이었던 크레타 섬을 두고 무려 25년간 오스만 투르크와 거의 홀로 싸웠고, 국고를 완전히 탕진하다시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국력의 한계로 패배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베네치아는 나폴레옹에게 멸망할 때까지 이탈리아 동북부의 쇠락하는 – 그러나 다른 도시 국가들과 달리 여전히 주권은 유지하는 – 세력으로 남게 되었지요. 그러나 작중의 베네치아는 그러한 쇠퇴를 겪기 전 수에즈 운하로 재기의 기회를 얻었고, 이를 지키기 위한 의지와 역량을 모두 갖춘 상태입니다. 

과거 왕직 에피소드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가정왜구가 준동하던 시기를 전후하여 일본에는 적지 않은 수의 중국인들이 유입되었습니다. 이들은 일본에 없는 기술을 가지고 있거나, 중국 본토와의 연줄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의 밀무역에 관심이 많던 다이묘들의 후대를 받는 경우가 많았지요. 한 예로, 17세기 반청복명 운동을 이끌고 대만에 정씨 왕국을 세운 정성공은 중국인 아버지(대해적 겸 거상 정지룡)와 히라도 번의 고위 무사 집안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작중 진린이 동척사에서 일하는 중국인으로 위장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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