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36화 (235/259)

71. 충격과 공포 (2)

광녕문 밖에 진을 친 동이(東夷) 무리가, 참으로 기이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온갖 병기를 선보이고 있다는 소문은 직례 전체에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이지함이 사흘 뒤부터 전화가 닥치치라 겁박한 것의 진의를 살피고자 한창 고심하던 장거정으로서는, 어리석은 백성이 무어라 떠들든 크게 관여할 여력도,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이지함을 돌려보낸 뒤 고작 두 시진만에 그것이 바뀌었다.

“수보 대인! 성 안 곳곳에 이런 벽서(壁書)가 붙었습니다!”

황급히 달려오는 동창 사람들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낚아챈 장거정은, 의외로 멀쩡한 그 내용에 놀랐다.

‘신 모(某)와 여러 뜻있는 백성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감히 진언하옵나이다, 황제 폐하께 파사현정(破邪顯正)의 큰 덕을 보이사 간사한 오랑캐의 술수를 깨뜨리고 중화의 위엄을 세워주시옵기를 간곡히 청하나이다...’

오랑캐가 고작 사소한 기물의 유리함을 얻었다고 경사(京師)를 능멸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으니, 광녕문으로 나아가 저들을 맞이하되 금군의 위세로써 제압하기를 청하는 글이었다.

‘무지한 저희 백성이 생각하기에도, 날카로운 병기는 병법의 말(末)이며, 병법의 본(本)은 오로지 사람을 얻고 잃는 데 있습니다. 

지금 우리 천조는 현량한 재상과 장군을 얻어, 지용(智勇)과 문무(文武)를 겸전하였으니, 이십만 천병이 마치 정교한 기계와 같이 움직이는 형상을 드러낸다면 오랑캐들도, 바야흐로 눈이 트여 저들의 보잘것없는 재주를 자랑하였던 것을 비로소 부끄럽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벽서를 다 읽은 장거정은, 종이를 갈무리하여 넘겨주었다.

“고작 벽서만을 들고 온 것은, 누가 이런 무엄한 글을 붙였는지는 아직 찾지 못했다는 뜻이겠군.”

“소, 송구스럽습니다, 대인.”

여러모로 수상쩍은 면이 많았다. ‘파사현정’이라는, 어지간한 유자(儒者)는 쓰지 않을 성어를 굳이 맨 앞에 놓은 것도 그렇고, 이러한 시국에 느닷없이 붙은 것도 그렇고...

그러나 지금의 북경은, 장거정이 처음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했을 때의 그 도성이 아니었다. 장거정이 마음 먹고 동창과 금의위를 움직인다면, 길어야 닷새 안으로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늘 저의 집에서 만나는 조정의 중진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나라의 대사를 논할 때 문연각(文淵閣)만큼이나 이곳을 자주 쓰다 보니, 요새는 내각에 빗대어 ‘외각(外閣)’이라는 별명으로 장거정의 집을 부르곤 한다던가.

“동이의 계략일 수도, 아니면 그저 의분이 넘친 백성이 성급하게 벌인 일일 수도 있겠군요.”

풍보가 수염 없는 턱을 만지며 말했다.

이 자리에 있는 조정길도 오랑캐가 하찮은 재주 뽐내는 것에 비분강개하였으니, 대일통의 논변에 감화된 백성이 정말로 저의 뜻에 따라 저러한 벽서를 붙였다는 것도 불가한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정말로 북경 안에 조선의 세작이 있다면, 고작 이런 벽서를 붙이는 일로 꼬리 잡힐 빌미를 만들지는 않을 듯하였다.

“저는 이것이 임꺽정의 계책이라고 봅니다. 이 나라의 지존으로 하여금 자금성 밖으로 나오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노부나가가 다소 불손한 말투로 말하였으나, 사안이 사안이요 또 말하는 사람이 사람인지라 나머지 중화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 또한 일리가 있습니다. 폐하께서 광녕문에 행차하실 때를 노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흉악한 짓을 벌이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척계광이 맞장구를 쳤다.

“그대들이 놓치고 있는 점이 하나 있소. 저런 벽서가 중인환시 하에 붙은 이상, 우리는 신하된 도리로 황상께 아뢰어 조처하는 수밖에 없소이다.”

조정길이 다른 점을 짚고 나오니, 이번에는 장거정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마따나, 저 벽서에서 황제에게 직접 광녕문으로 행차하여 위엄 보이기를 청하였으니, 황제가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황제 폐하께서 동이를 두려워한다는 둥 더욱 무엄한 뒷말이 암암리에 나돌게 될 터였다.

광녕문 밖 동이들의 기물 자랑은 그 기묘함이 계속 더해져, 이제는 소위 ‘천리비차(千里飛車)’까지 나왔다고 하였다.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는 그 원리는 풍등(風燈)과 다를 바 없으나 분명 무거운 수레를, 그 위에 사람까지 태워 하늘 높이 올렸다 하였다.

이처럼 동이가 중화를 능멸하는 것이 층층이 쌓이는데, 지금까지 장거정이 중화의 위엄이니 대일통이니 떠드는 동안 그에게 위엄을 빌려준 황제가 자금성 안을 지킨다면 어찌 되겠는가. 특히나 전란을 앞둔 지금, 명분과 위엄의 무게는 평소보다도 곱절로 무거워져 있었다.

“그러나 앞서 직전(오다) 공이 짚은 것처럼, 이 모든 일이 악적 임거정의 모략일 수도 있소. 이 사람은 문관으로 병법에는 어두우나, 상대의 모략이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장계취계(將計就計, 적의 계책을 역이용함)를 도모함이 마땅함은 알고 있소이다.”

조정길이 말을 이으니, 이번에는 노부나가와 척계광 두 사람이 장고에 들어갔다.

물론 두 사람에게나 장고지, 지켜보는 다른 이들에게는 순식간이었다.

“조 상서 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번 일을 기회삼아 저들의 군기를 빼앗고 만일 가하다면 임거정과 그 일당까지 일망타진하는 계책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곧 여러 사람 사이에 여러 이야기가 오가고, 장계취계의 계책은 윤곽을 갖추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지함이 공언한 사흘 뒤 정오. 바로 그때 천자가 태자 - 이번 사절단이 내세운 명분이 천추절을 기리기 위함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 와 함께 광녕문으로 나아와 문루에서 사절단을 맞이할 것이라는 통보가 문밖의 진주사 사신들에게 전해졌다.

또한 동방 번병들이 놀라운 재주를 보였으니 천조 또한 위엄을 보일 것이라며, 금군의 훈련하는 모습을 뽐냄으로써 그간 이쪽에서 선보인 군기의 매서움에 답할 것이라 하였다.

“이거, 아무래도 작정하고 우리를 노리는 것 같은데요.”

일본국 정사라는 지체 높은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옆머리 벅벅 긁으며 히데요시가 말했다.

“저쪽에서 우리를 건드리려 하면 우리도 저쪽에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갚아주기로 했지만... 그냥 이쯤에서 내빼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만.”

“그것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지 않으냐. ” 

백련교 교인들을 시켜 벽서를 붙이게 한 것은, 히데요시 말마따나 ‘얼른 내빼기’ 위한 것이었다. 

이곳에서 선보인 군기에 명나라 고관대작들의 눈이 돌아가 있는 동안, ‘어쨌든 우리는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었다’ 하는 명분만 챙기고 도망치는 것. 

장거정이 끝까지 물러나지 않았다는 것이 산해관 너머로 전해지게 되면, 사흘 뒤 정오 무렵에 큰일이 나게 될 터인데, 그전까지는 북경을 벗어나야 했던 것이다. 

“당수 말씀대로입니다. 저들이 무엇을 꾀하고 있든, 거하게 작정하고 군사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당장 지금 이곳을 버리고 빠져나가려 한들 산해관에 닿기 전 막힐 텐데요.”

쉴 새 없이 직례 일대의 교인들이 전해오는 소식을 취합하고 있던 조전이 거들었다.

수없이 많은 관군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북경 주변을 에워싸고 십면매복(十面埋伏)의 형세를 갖추는데, 개중 적어도 일만은 산해관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군기로 눈길을 끈다는 게 너무 잘 들어먹힌 모양입니다. 이제 어쩌지요?”

“생각건대, 저들의 꾀하는 바는 이러한 듯하오...”

가만 듣고 있던 이지함이 입을 열었다.

장거정과 그 일당은 벽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저들 민주당이 사흘 뒤에 뭔가 일을 꾸미려 한다는 것을 추론하였을 테다.

그렇다면 장계취계를 하여, 사흘 뒤 정오에 그들이 무언가 일을 벌일 수밖에 없도록 손을 쓴다. 

그리고 이를 빌미삼아 – 설령 아무 일도 없다 하더라도 억지 빌미를 만들어 - 훈련을 명목으로 모여든 금군이 사신들을 덮친다. 군기의 기밀을 불태워 없앨 겨를도 없이 모조리 붙잡히고, 천하에 용력으로 이름난 임거정조차 중과부적으로 당하고야 만다.

“히데요시 자네 말마따나, 군기를 뽐내는 것이 저들을 과하게 격동시킨 게지.”

“그런데 사형 말씀대로라면, 장꺽정이와 그 아랫것들이 중화다 대일통이다 하면서 그리도 받들어모시는 황제랑 그 아들내미가 위태로워지는 것 아니오?”

“내가 만나보니, 장거정 그이는 비록 하는 짓은 영락없는 권신이지만, 스스로 충신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자이기도 했다. 확고하게 믿는 바가 없다면 중화의 북신(北辰, 북극성)이자 지존인 천자를 그러한 위태로운 지경에 밀어넣지는 않을 것이야.”

오다 노부나가의 지략이야 다들 잘 아는 바였고, 척계광 또한 들려오기로는 비범한 장재(將材)라 하였다. 필시 광녕문 아래서 뭔가 수작을 부린들 그것을 막아낼 방도를 강구할 것이다.

“그러면 결국 산해관으로 도망치는 길은 막혔다 치고, 다른 길을 뚫어야 할 텐데.”

“직례 일대의 관군 중 마병, 그중에서도 마궁수(馬弓手, 궁기병)만 모아도 도망치는 우리 머리 위로 화살비를 끼얹을 수 있을 겝니다. 차라리 저희 교인들 사이로 숨어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크게 한탕 해보려다 졸지에 저의 새 상전과 함께 잡혀 죽게 생긴 조전이 궁리 끝에 제의했다.

“주변에 산이 있소, 굴이 있소? 사방이 관군이고 동창인데, 퍽도 잘 숨을 수 있겠군.”

“그, 산은 없지만 굴은 있습니다. 저희 교인들이 몰래 북경 드나들 때 쓰는 땅굴이 몇 곳 있는데...”

“땅굴이라. 그거 괜찮은데?”

꺽정이가 뭔가 좋은 생각 – 도적에게 좋은 생각이라면, 당연히 다른 이들에게는 나쁜 것을 넘어 소름끼치는 생각일 테다 – 날 때 짓는 그 험상궂은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된 이상, 처음 벌이려던 것보다도 더 판을 키워야겠소. 뺨 한 대 갈기는 것으로 끝낼 게 아니라, 아예 다리몽둥이 한 쪽을 부러뜨리고 가야지. 마침 우리가 챙겨온 것 중에 ‘그것’도 있지 않았소? 이런 데서 쓸모를 찾게 되는구만.”

“돌아가면 병해 사형께 감사드릴 일이 하나 더 늘겠구나.”

그 거친 말만으로도 꺽정이 생각이 무엇인지 얼추 짐작한 이지함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조금 뒤에 눈치 챈 히데요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이어지는 설명을 듣고서야 니탕카이와 조전은 겨우 알아들었다.

“훗, 이래야 우리 암바 버일러답지. 이 니탕카이, 맡은바 최선을 다하겠소.”

“아니, 잠깐, 잠깐, 당수!”

“후회한들 이미 늦었소. 우리 당수 뵙고 아래에 들어오기로 했을 때부터 이리 될 줄 알았어야지.”

할 말은 많으나 차마 하지는 못한 조전은, 그저 조용히 무생노모께 기원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다시 해가 뜨고 지기를 반복하여, 이지함이 공언한 전화 닥칠 때로부터 불과 몇 시진 남기지 않게 된 야밤.

동이의 처소를 멀찌감치 떨어져 감시하던 동창 사람들이 하나둘씩 절명하고, 저들 나름대로 충군보국을 하던 이들의 피가 직례의 땅을 적셨다.

세작의 눈빛을 알아챈다 한들, 그들을 죄다 죽여 눈과 입 막는 것은 고작해야 하루이틀이면 발각될 하책 중의 하책.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소의 이야기요, 꺽정이의 막무가내 범행이 그 결실을 맺는다면 고작 사람 대여섯 죽은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만큼 중원 전체가 발칵 뒤집히게 될 것이었으니 지금은 별반 중요치 않은 이야기였다.

그렇게 동창의 이목을 피해 한참 성벽을 우회한 끝에, 꺽정이와 히데요시, 조전, 흑의군 몇몇과 미리 기다리고 있던 백련교 교인 몇몇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무리는 성문 밖 허름한 민가 몇 채 사이로 숨어들었다.

“보시다시피 사람의 이목을 피하는 것만 염두에 두고서 판 땅굴이기에, 몰래 드나드는 데는 좋지만 급히 달아나는 데는 불편함이 많습니다.”

개중 다 쓰러져가는 집의 바닥에 깔린 널찍한 돗자리를 치우며 조전이 말했다. 곧 밖에서는 백 번 보아도 있는 줄 모를 구멍이 드러나고, 사다리가 놓였다.

“걱정 말거라. 어차피 이번 일이 끝나면 북경 안의 교인들도 살 길은 찾아야 할 것 아니냐? 우리가 거사 치른 뒤 도망할 때 이쪽 토굴을 쓴다면 그만큼 이목이 쏠릴 테니 교인들이 멀쩡히 달아나기가 난망해지겠지.”

임 당수가 본디 도적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대충 홍건적이나 황건적 같이 나라 삼키는 도적을 일컫는 말이지 정말로 재물 훔치던 양상군자 도둑놈은 아닐 것이라 단정하였던 조전은, 제법 치밀한 궁리가 섞인 말을 듣고서 저의 은인(이자 빠르게 ‘원수 같은 놈’이 되어가고 있는) 꺽정이를 새삼스레 놀란 눈으로 고쳐보았다.

“하면 당수께서는 어찌...”

“다 방도가 있다. 방도가. 아, 네놈은 어차피 우리와 함께 도망해야 할 테니 미리 일러주어야겠지.”

히데요시가 눈치껏 조전의 귀에 속닥이니, 또 한 번 두 눈에 놀랄 노 자가 아로새겨졌다.

“성 안쪽의 대비는 모두 마쳐두었으리라 믿는다.”

“물론이지요. 허나 이번 ‘거사’라는 것이 대비를 암만 한다 한들 안심할 수는 없는 것이라...”

“안 되면 뭐, 그냥 북경 저자에 고꾸라져 죽는 것이지. 그 꼴 나는 걸 원치 않는다면 네놈과 네놈 동도(同道)들이 이제라도 더 열심히 뭔가를 해두어야 할 것이고.”

꺽정이의 태연한 대꾸를 들으면 들을수록 안심은커녕 불안만 도졌다. 

허나 이미 엎지른 물이니 어찌 주워담으랴. 그렇게 북경 성내의 (역시 허름한) 집 바닥을 열어젖히고 땅 위로 올라와, 곧장 지붕 위로 향했다.

“해가 뜨고 신호가 닿으면, 바로 결행하는 것이다.” 

평온한 동시에 떠들썩한 밤거리 – 색주가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았다 - 를 보며, 조금은 안정을 되찾는 조전이었다.

옛날 같았더라면, 이렇게 오밤중에 지붕 타고 다니다가 같은 도적을 만나는 일도 종종 있었겠지만, 지금의 북경에서는 그런 일이 쉬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근래 갑작스레 무거워진 세금도, 온갖 잡세와 뇌물에 시달리던 시절에 비하면 (아직까지는) 견딜만한 정도. 지난 몇 해 사이 번영하던 기세도 아직 꽤 남아있었으므로, 꺽정이가 처음 왕직과 함께 북경의 밤거리를 쏘다니던 시절보다도 더욱 흥성해진 북경 밤거리였다.

변경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고작해야 한양이나 요양을 대읍(大邑)으로 알던 조전이 크게 놀라, 촌놈다운 눈으로 그 밤거리를 두리번두리번 바라보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금씩, 이 거대한 도시 어딘가에 저들의 도, 백련교가 번듯하게 설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는 생각이, 저 흥청망청 떠드는 백성들 마음속 그림자처럼 드리운 듯한 무언가를 걷어내는 데 일조하여, 저 여진 사람들 사이에서 천주교가 대접받는 것처럼 대접받고 싶다는 생각이 차올랐다.

“예, 해 보십시다, 당수.”

“그래, 바로 그것이다.” 

황제가 올해로 나이 여섯인 황태자 익균을 대동하고 광녕문으로 행차하기로 한 날이 밝았다. 도성 곳곳에서 잡인의 통행과 훤화를 금하는 금의위와 여타 관병들의 외침소리가 울려퍼졌다.

허나 금군 태반은 막중한 임무를 맡고, 광녕문 바깥 오랑캐 사신들의 처소와 그들이 광녕문 앞에서 황상 뵙기로 한 공터 주변을 에워싸는 데 바빴으므로, 외침소리 요란한 것에 비해 실제로 저자 곳곳을 바삐 달리는 금군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눈여겨보는 이지함이었다. 천생 백면서생인 듯한 이지함이 그런 것을 알아채는 눈썰미를 가지고 있음을, 그가 한때 도적떼 사이에 몸 담고 지금까지도 모주 노릇하고 있음을 모르는 다른 이들은 쉽사리 꿰뚫어보지 못하리라.

“이 사람이 조선국 진주사 부사로서 내각수보 대인께 고하였던 그날이 밝았소. 금일 정오를 기하여 전화가 닥치리라 한 것은 허언(虛言)이 아니었소이다.”

다음날 아침이 밝자마자 장거정 만나기를 청한 이지함이, 장거정이 권하는 차조차 사양하며 말했다.

“그리고 이 사람 또한, 그저 오랑캐라 하여 깔보는 마음으로 그대와 그대 세 나라의 소위 광복삼장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소. 오히려 한편으로는 감사할 따름이오.”

“감사한다니, 무슨 말씀이시오?”

“이 장 아무개에게, 중화라는 이름이 그저 허명, 넓은 듯 좁은 이 중원에 스스로 문 걸어잠그고 틀어박힌 이들의 몽상임을 알려준 것은 바로 임거정과 그대 수산, 그리고 그대의 당여 율곡이었지.

이 광복삼장의 절목을 보게 되면, 비로소 온 중화가 깨닫게 될 것이오. 이번 전란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 중화가 아직 허명에 불과하다는 이 사람의 말이 얼마나 옳았는지를 말이오.”

사실상 동방 삼국의 마지막 통첩을 묵살하겠다는 뜻. 그러나 한쪽은 놀라는 기미가 없고 다른 한쪽은 고민한 흔적이 없었다.

“그 말씀대로라면, 반대로 부끄럽게 여기고 뉘우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간 천조, 중화대국 대명이 얼마나 그 이름에 맞지 않는 모습만을 보였는지를 깨달을지도요.”

“그럴 수도 있겠지. 결국 그대가 말하는 전화, 그 전란에서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그 점 하나에 있어서는 이 사람도 동의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움직이기를 청하겠소.”

“움직인다니요?”

“금일 정오를 기하여 천조 대명과 동방의 세 번병 사이에 전화가 있게 된다 하지 않았소? 그에 따라 정오를 기하여 우리 대명은 그대와 나머지 사신들을 적장으로 대할 것이오. 아마 이쯤이면 그대 또한 짐작했을 터.”

“황제 폐하께서 알현을 허하셨다는 것은 거짓이요, 그저 정사 임거정과 소관, 그리고 다른 사신들을 잡아 가둘 빌미였던 것이군요.”

“아니, 알현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지금껏 그대들이 범하였던 무례를 성토하고, 비뚤어진 것을 올바르게 고칠 것이외다. 그때까지 그대는 우리 금의위의 위사들이 모실 것이오.”

이 자리에서 사실상 추포하겠다는 뜻. 장거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쪽에서 우르르 일단의 군사들이 몰려나왔다.

“수보 대인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면 소관 이지함, 이 자리에서 하직을 고하겠습니다. 다음에 북경에서 뵐 때는, 지금보다는 더 이치가 잘 통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이지함이 순순히 의자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다음에 만날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겠으나...”

“아, 그날은 대인의 생각보다는 일찍 찾아올 것입니다. 염려 마시지요.”

“그게 무슨 말씀...?”

장거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 눈앞에서 이지함의 모습이 사라졌다.

“으억!”

신음소리가 난 뒤에야 장거정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지함이 귀신과 같은 몸놀림으로, 금의위 위사 하나의 가슴팍에 주먹을 내지르고는, 그 손에 들려 있던 창을 빼앗았다.

“수보 대인을 지켜라!”

“수보 대인, 피하십시오!”

“하하! 걱정들 마시오! 수보 대인을 해치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 이 조선국의 괴짜 서생은 아닐 터인즉!”

그러고는 장거정 반대편으로, 널찍한 마당을 향해 달려나가는 이지함이었다.

“잡아라! 잡아!”

“대인의 명을 받들어라! 추포하라!”

“거리로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황상께서 행차하실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단 말이다!”

대체 저 창 한 자루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이 와중에도 장거정의 명민한 머리 한 구석에서는 그런 의문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곧 그 답이 풀렸다.

서생답잖게 날쌘 움직임 보이며 마당을 한껏 달리던 이지함은, 갑자기 그 창날로 바닥을 찍는 것이었다.

그리고 창대를 마치 장대처럼 놀려, 그 힘에 의지하여 담장을 넘었다.

조선을 넘어 북경에까지 떠도는 이야기. 

조선 악적 임거정과 그 군사 이지함은 소싯적에 화담이라는 선인(仙人) 아래서 서른여섯 가지 술법을 배웠으니, 그중 제일이 바로...

“맙소사...”

“능공허도(凌空虛道)가 참으로 있는 술법이었는가!”

탄식하는 금의위 위사들을 뒤로하고, 어느새 이지함은 담장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아니, 넘는 줄 알았건만 거기서 또 한 번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올라갔다.

“위, 위를 보아라!”

그리고 그런 이지함 곁에서는, 낯선 인영 여럿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웬 놈들이 지붕 위에!”

그러나 놀랄 일은 이제 막 시작한 셈이었다. 몸을 날린 이지함이, 창대를 휙 버리면서 대명과 조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의 이름을 외쳤다.

“히데요시야!” 

화답하듯 어디선가 들리는 낯선 조선말.

“예, 모주 어른!”

“백두산을 오르거라!”

“백두산을 올라라! 알겠습니다!”

그와 함께 울리는 거대한 폭음.

“적인가!”

“아닙니다! 그저 폭죽인 듯합니다!”

아직 새해가 되려면 한참 남았건만, 어디선가 폭죽을 터뜨린 듯하였다. 얼마나 잔뜩 모아놓았는지, 폭발에 휘말린 폭죽 몇 개비는 그대로 하늘 높이 날아올라 공중에서 형형색색 불꽃을 피웠다.

일찌감치 광녕문으로 나와 있던 척계광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성 안에서 변고가 생긴 것인가!”

“허를 찔렸군. 얼른 움직여야 하오. 필시 임꺽정이 수를 쓴 것이겠지.”

척계광도 군말 없이, 노부나가 말대로 지시를 내렸다.

오랑캐들의 처소에는 아직도 화약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들이 군기를 저들 손으로 불태우는 일을 막고, 동시에 임거정까지 붙잡기 위해 이미 금군은 모든 태세를 갖춘 뒤였다.

저들이 밤사이 낌새를 알아채고 도망쳤을 경우까지 대비하여, 몰래 주변을 흩으며 오랑캐 사절단의 사람이 빠져나오지는 않았는가 일일이 살피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를 보아도 그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필시 황상의 명에 따라 저쪽의 장막 쳐진 곳, 사신들의 처소를 급습하면 모조리 일망타진이 가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북경 성내의 경계가 다소 허술해지는 것을 감수하면서 새벽부터 천라지망을 펼쳤다.

헌데 이렇게 허를 찔렸으니, 당황할 겨를도 없었다.

“즉시 성 안의 사정을 살펴라! 그리고 본관이 명하면, 즉시 사신들을 추포하고, 군기를 확보하라!”

“명을 받듭니다!”

그러나 저 폭죽은 대체 무엇의 신호였다는 말인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 눈앞에서 답을 얻게 되었다.

“앗! 큰일입니다!”

광녕문과 사신들의 임시 처소 사이 민가 곳곳에서, 갑자기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처소를 포위한 금군을 향하는 화살이 아니라, 처소의 천막을 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분명, 미리 요동총병 통해 받아본 예물단자에 따르면 적지 않은 화약이 남아 있을 터.

“대체 무엇을 꾀하고 있느냐... 아니, 우선은 군기를 확보해야 한다! 불을 꺼라!”

“불을 꺼라! 그리고 너, 너, 그리고 너는 속히 저 화살 쏜 놈들을 잡고!”

노부나가와 척계광이 한 몸처럼 지시를 척척 내렸다.

그러나 미리 기름이라도 먹인 듯 잘만 타오르던 처소의 천막 안 그 어디에도 사람은 남아있지 않았다.

한편, 막 천안문을 나서 광녕문으로 행차하던 황제의 어가에서도 폭죽은 잘만 보였다.

“저것이 어디서 일어난 것이냐?”

자신이 거하는 도성임에도 지리에는 어둡던 황제가, 저를 지키는 풍보에게 물었다.

종종 바깥 세상을 궁금해하며, 북경의 지리를 몰래 문루 위에 올라가 살피곤 하던 황태자가 한 발 앞서 답했다.

“아버지 폐하, 내각수보의 사저(私邸) 쪽인 듯하옵나이다.”

풍보 또한 당황한 기색 숨기며, ‘그렇사옵나이다’ 맞장구를 쳤다.

“무어라? 내각수보의 사저라니! 큰일이 아닌가! 즉시 사람을 보내 구하여라! 폭죽뿐 아니라 큰불이 났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내각수보 장거정은 자신이 공언한 대로, 황제의 위엄을 드높이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기에, 민생을 직접 살피지 않고 들어오는 세금의 총액과 군사의 수효만을 접하는 황제는 장거정을 더욱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금상 천자의 지엄한 명이 떨어졌으니, 어찌 급히 봉칙(奉勅)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가는 그대로 멈추고, 대략 절반쯤 되는 금의위와 동창 사람들이 급히 폭죽 터진 쪽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촌음의 겨를이 흐를 무렵, 이 모든 일이 신선하고 즐거워 연신 두리번거리던 철부지 태자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엇, 저쪽 지붕 위를 보십시오. 사람이 있는 듯한데... 태감, 저것이 사람 맞는가?”

“어떤 것을 이르시옵나이까... 앗, 그렇습니다. 사람이, 그것도 무리인데... 금의위! 동창!”

풍보가 사람 좋은 미소를 바로 지우고, 산하가 벌벌 떠는 동창제독으로 돌아와 명을 내렸다.

“어가를 지켜라!”

그러나 허망하게도, 저쪽, 그러니까 막 폭죽이 터진 그쪽에서 달려오던 인영은, 그들이 향하는 광녕문 쪽 대신 남쪽 대문인 영정문(永定門) 방향으로 사라졌다. 

어가가 멈춰있는 곳은 대로 한복판이지, 어디 높은 문루나 탑 위가 아니었으므로, 수상한 인영이 대로변 관아와 민가의 지붕을 벗어나 정남향으로 향하자 금방 놓쳐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틈, 풍보와 동창, 금의위의 모든 눈이 남쪽을 향하고 있는 그 틈을 놓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좋아, 지금이다!”

대로 반대편 지붕, 용마루 맞은편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괴한들이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어이구, 보기보다 황제가 풍채가 좋은데? 저건 못 들겠다. 아들 녀석은 그나마 가벼워 보이는군.”

알아듣지 못할 조선말이 황제의 귓가에 닿았을 때는 이미 한참 늦어 있었다.

“웬 놈이... 으억!”

달려오는 풍보를 그대로 멱살 잡아 멀리 던져버린 거한이, 돌개바람 같은 몸놀림으로 얼떨떨해하고 있는 황태자를 그대로 업어들었다.

“야, 조전아, 이 말만 옮겨주어라.”

“예?”

“아비와 아들이 각각 다른 쪽에 있어야, 불의의 일이 터져도 어느 한쪽은 명을 붙일 것 아니냐. 이게 다 주씨 집안 대를 이어주려고 이 몸이 상냥함을 베풀어주는 것이라 생각해라.”

막상 대명의 황제를 만나니 얼어붙은 조전이 어물어물 말을 옮기고, 그것을 기다릴 겨를도 없다는 듯 거한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제야 정신 차린 태자가 거한의 어깨 위에서 비명을 질렀다.

“으, 으으. 폐하, 괜찮으십니까?”

“지금 짐이 급한 게 아니다! 저, 저놈이 태자를, 태자를 납치해 갔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애써 이겨내며, 정신 부여잡은 풍보가 거한의 정체를 재빨리 추론해내고는 외쳤다.

“동창! 동창 전원! 들어라! 임거정이 여기 있다!”

“임거정이 저기 있다! 잡아라!”

혼백이 절반쯤 빠져나간 금의위 교위 하나가 외치는 것을 풍보가 가로막았다.

“아니, 쫓아가지 마라! 우선은 성벽과 성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막아야 한다!”

그리고 앞서 지붕 위를 달리던 수상한 인영이 동쪽 광녕문 대신 남쪽 영정문 쪽으로 사라지던 것을 떠올렸다.

“남쪽! 놈들은 남쪽으로 가고 있다! 영정문에 급히 전하여, 누구도 오가지 못하게 막도록 하여라!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화살이나 포를 쏘아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예, 제독 대인!”

“그러면 가라! 한시가 급하다! 너희 둘은 즉시 내각수보 대인께, 거기 둘은 광녕문 바깥의 척 장군과 직전 공에게 전하도록!”

그러나 풍보가 이 경황 없는 상황을 재주 닿는 한 능수능란하게 수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작정하고 못된 짓을 하는 간악한 도적을 가로막기에는 그 재간이 한 치 모자랐다.

어가를 급히 자금성으로 환궁시키고, 본인이 직접 말 타고 영정문 쪽으로 달려가던 풍보는, 상상을 뛰어넘는 광경을 목도하였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영정문에 당도하여 그 문루 위에 올라 괴한들이 어디 있는지를 살피는데, 멀찍이서 저를 구해달라 외치는 태자 전하의 외침이 들려와 고개를 돌려본즉 이쪽 문 대신 엉뚱한 성벽, 그것도 이삼백 보는 떨어진 성벽 위에 저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서, 설마 뛰어내리려는 것인가!”

“너희에게는 당황할 여유가 없다! 모두 정신 바짝 차려라! 저쪽에 신호를 보내! 양옆에서 에워싸면 추포할 수 있다! 

천하의 임거정이라도 여기서 떨어지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터! 내 앞서 살피니 저놈의 동행 중 우리 말과 조선말을 모두 아는 자가 있었다. 우선 에워싸고 말로써 설득하면 된다!”

그런 말이 무색하게, 이번에는 성벽 바깥에서 흙먼지가 일어났다. 용정문 밖에, 말을 탄 일군의 괴한들이 모여 있었다. 수상쩍게도 그 수효가 앞서 신문과 단자를 통해 전해진 사절단의 규모와 비슷하였다.

개중 몇몇은 등짐 치곤 큰 무언가를 짊어지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들이 말에서 내리더니 그것을 즉석에서 짜맞추기 시작했다.

“하하! 멋지게 해내셨소, 당수! 자, 쏘아라!”

“쏘랍신다!”

그리고 사신단이 가져온 온갖 신무기 중 유일하게 가짜가 아니었던 것 – 그리고 얄궂게도, 남의 눈 앞에서는 아직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것 – 이 모습을 드러냈다.

‘팡’ 하는 소리와 함께, 작살 비슷한 무언가가 성가퀴를 스쳐 지나가더니 턱 하고 걸렸다. 큼직한 갈고리 같은 것이, 그 무게로써 성가퀴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자, 가자!”

그리고, 풍보가 어떻게 수를 쓸 겨를도 주지 않은 채, 그 갈고리에 달린 동아줄을 붙잡고 성벽 위의 무리들은 일제히 성 바깥으로 내려갔다.

“하하하! 충격을 받은 만큼 두려워하거라! 우리네가 이렇게 수완이 좋으니 네놈 거지 발싸개같은 것들이 어디 얼마나 배겨내겠느냐!”

알아듣지 못할 조선말로 비아냥대는 임꺽정은, 그렇게 빠르게 사라져갔다. 명군으로 틀어막힌 산해관 쪽 대신, 역시 명군과 에스파냐 함대로 가득 찬 천진을 향해. 

그 무렵, 북경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서 이 모든 일을 백리안으로 바라보던 이들도 있었다. 동창의 그 누구도, 이런 곳에 백련교 교인이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할 만한 그런 곳이었다.

“하하, 이제 시작인가. 자, 불을 피워라! 그리고 너희는 약조한 대로 달려가며 외치고!”

“예! 어르신!”

거기서 다시 이십 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연기가 오르고, 그 연기는 또 한 번 이십 리 떨어진 곳에서 올랐다. 거기서 다시 이십 리 떨어진 곳에서는 재수없게도 관군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연기를 올리지 못했으나, 사람은 말 타고 달려나가 계속 동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연기와 외침이 이어졌다.

“백두산을 올라라!”

“백두산을 올라라!”

때는 점차, 정오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 ---

초반에 언급되는, 삿된 것을 논파하고 올바름을 드러낸다는 뜻의 파사현정은 본디 대승불교의 용어입니다. 물론 사대부들도 어느 정도의 불교 관련 지식은 교양으로 갖추곤 했고, 명의 경우에는 그런 경향이 더욱 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에게 올리는 글 서두부터 이를 인용하는 것은 선비답지 못한 것이라는 인식 정도는 있었을 것입니다.

백련교가 처음 등장했을 때 지나가듯 언급한 것처럼, 원 역사에도 백련교는 엄청난 생명력과 침투력을 보이며 19세기 초까지 (어쩌면 지금도) 반정부 세력으로서 유지되었습니다. 특히 18세기 말~19세기 초 불타오른 백련교의 난은 그때까지도 명맥이 이어지던 반청복명 비밀결사의 힘까지 빌어 엄청난 폭발력을 보였고, 그중 한 분파는 심지어 한낮에 자금성까지 침투, 당시 황태자였던 도광제가 직접 권총을 들고 진압하는 일도 있었지요. 작중의 땅굴과 사보타주 행위는 여기서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