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충격과 공포 (3)
임거정이 북경에 당도한 이상, 무지막지한 난행을 한바탕 벌이리라는 것은 분명하였다.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사신으로 온 임거정과 그 일당을 일망타진하고, 나아가 저들이 선보인 병기들을 확보한다는 것이 장거정이 그 아랫사람들과 논의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저들이 일을 벌인다면, 반드시 광녕문 문루에 황상께서 임하셨을 때 벌일 터. 그때 어떤 짓을 감행한다 한들 능히 막아낼 수 있도록 척계광과 오다 노부나가 두 사람은 사흘간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였다.
“그것이 이리 허사가 될 줄이야... 그대가 조선의 전법에 정, 기, 그리고 임(林)이 있다고 했을 때 더 귀담아 들었어야만 했소.”
척계광이 씁쓸하게 말했다.
지존이 광녕문에 이르기도 전, 북경 성내에서 그런 흉참한 일을 벌일 수 있을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하였던 것이다.
“허나 때늦은 한탄이지. 그나마 공의 조언 덕에 산해관 쪽을 미리 막아두었으니 천만다행이외다.”
장거정은 급히 환궁한 천자 앞에서 석고대죄를 하고 있고, 풍보는 온 북경을 뒤져 임거정과 내통한 자를 색출하려 하고 있었으며, 척계광은 이렇게 한탄하면서도 내릴 지시는 모두 내려두었다.
만에 하나 임거정과 그 일당이 광녕문 앞의 포위진을 뚫고 달아날 경우까지 대비하여, 산해관으로 향하는 길목 곳곳도 이미 막아둔 터였다.
그 덕인지, 정통 연간의 변(토목의 변)과 지난 경술년의 변을 합한 것보다도 더 큰 굴욕을 대명에 안기고 달아나는 중인 임거정 일당도 산해관 쪽으로는 차마 향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산해관 있는 정동쪽 대신 동남쪽, 즉 천진 방향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천진에는 적잖은 명의 관군뿐 아니라, 에스파냐 갈레온을 타고 넘어온 옛 일본 동군 무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에스파냐 측에서 임시로 마련한 수영(水營) 또한 있었다. 수영에 딸린 에스파냐군만 해도 그 수효가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척계광은 황태자를 데리고 달아나는 적당의 뒤를 곧장 치기보다는, 천진 앞에서 포위한다는 계획을 즉석에서 세웠다. 천진뿐 아니라 개평진(開平鎭, 現 탕샨 일부)과 창주(滄州, 現 창저우), 보정(保定, 現 바오딩)로도 급히 파발을 띄워, 멀리서부터 다시 포위망을 만들고 에워싸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들이 군기를 불태우려던 것도 잽싸게 움직여 막았으니, 이 또한 다행이랄까...”
임거정이 달아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방관할 수밖에 없던 이유 중 하나는, 광녕문 앞을 에워싸고 있던 금군이, 느닷없이 날아든 불화살에 군기가 불타버리는 것을 막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미 금군은 저들 처소를 첩첩이 에워싸고 있었으므로, 다른 곳의 경계가 허술해진 만큼 광녕문 앞은 철통같이 통제하고 있었다. 불길이 화약에 옮겨붙기 전에 진화할 수 있던 것은 그 덕이었다. 지금도 저쪽 천막 사이에서는 금군 군사들이, 저들 오랑캐들이 내버리고 간 신묘한 병기를 찾아 곳곳을 뒤적이고 있었다.
신기총통이며 무적귀차며, 불과 수 년 사이 조선이 만들어냈다면 대명인들 못할 것은 없었다. 그 무시무시한 군기들이 전장에 갑자기 나타나 대명의 천병을 도륙하는 것을 막았고, 이제 그것을 파훼할 방도를 마련하고 나아가 복제하는 일만 남았다.
“아니, 저 군기는 가짜일 것이오. 처음부터 미끼로 쓰고자 가져온 것일 테니, 개중 진짜는 없겠지.”
그러나 노부나가는 단호하게 척계광의 말을 끊었다.
“어찌 그리 단언하시오?”
척계광이 반문하는 사이, 노부나가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군기는 미끼였다. 그렇다면 무엇을 낚기 위한 미끼인가?
황태자를 납치하기 위한 미끼? 아니, 전쟁이 임박한 지금, 굳이 황태자를 납치하는 것은 조선 쪽에든 민주당 쪽에든 당장의 이익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저들은 북경 안팎을 쉽사리 드나드는 수가 있다는 것까지도 이번 일을 통해 스스로 드러내고야 말았다.
따라서 황태자를 납치한다는 것은, 이미 산해관으로 가는 길이 막히고, 직례 일대의 명군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어떻게든 눈치채고 난 뒤 임기응변으로 세운 계책일 테다.
(대명의 황태자를 고작해야 도망치는 길의 용한 방패로 쓴다는 발상은, 아마 임꺽정 같은 작자가 아니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본래의 노림수는 무엇이었는가?’
그저 단순히 명을 겁박하기 위한 용도였다고 보기에는 영 허술하였다.
처음부터 군기를 버리고 달아날 심산이었다 한들, 그것만으로는 저들이 산해관까지 달아나는 동안 명의 시선을 잡아끌기는 부족했을 것이다.
‘무언가 다른 큰일이 벌어져 우리의 주의를 끌었을 때, 그때 이 군기를 미끼로 버리고 달아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큰일이 황태자를 납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겠는가?
‘장거정은, 조선의 이지함 공이 사흘 뒤 정오에 전화가 닥칠 것이라 말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제 정오가 얼마 남지 않았지. 그렇다면...’
조선에 들어온 잉글랜드와 저지대 장인들이 제법 정교한 시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은 노부나가도 들어 알고 있었다. 사카이를 점령하면서 개중 몇몇을 손에 넣었던 적도 있었다.
정오라는 기한을 굳이 정한 것에 따로 의미가 있었다면? 그것이 그저 겁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방 삼국의 군대와 미리 정한 기한이었다면?
노부나가의 머릿속에, 가장 터무니없는 것부터 그나마 덜 터무니없는 것까지 수많은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
그사이 척계광 아래의 군관 하나가 급히 올라와, 정말로 동이의 소위 군기라는 것은 모두 눈속임이었음을 비통한 말투로 고하는 것은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위 신기총통이란, 아래에 구덩이를 파 놓고 그 아래에서 탄환과 화약을 재어둔 틀을 갈아 끼워주는 것에 불과했으며, 이른바 무적귀차는 검게 옻칠한 나무판으로 둘러싸고, 눈속임으로 연기를 피우는 동안 안에서 사람이 미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하늘 높이 올리는 비차는 무엇이었는가?”
“그것 역시 크기만 키운 풍등(風燈)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인 줄 알았던 것은 정교하게 만든 허수아비였습니다.”
“아아, 그 많은 병기 중 참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인가! 실로 도적과 사기꾼 무리로구나! 그런 자들에게 우리 대명이 이토록 농락당하다니!”
눈속임 도술로 숱한 사람을 속여왔던 전우치가 저와 비슷한 처지의 후학들을 모아 만들어낸, 일생일대의 속임수는 이렇게 때늦게 발각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탄식과 원망을 한 귀로 흘리며 계산과 궁리에 열중하던 노부나가에게는 그리 중한 것이 아니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커, 한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척계광에게 노부나가가 불쑥 청하였다.
“빠른 말을 준비해 주시오. 천진 쪽으로 가야겠소이다.”
“천진이라 하셨소?”
“그렇소. 임꺽정 그자가 천진으로 도망치는 것은, 필시 믿는 바가 있기 때문일 터. 지금이라도 천진으로 향하여 대비하지 않는다면 또 한 번 크게 당하게 될 것이오.”
‘백두산을 오르라’는 군호(軍號)가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대명이 교섭에 응하지 않아, ‘한양의 맹’에서 세워진 대계대로 전란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북경 성 안에서 터져나온 연기를 신호 삼아 동쪽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군호는, 산해관과 북경 가운데쯤에 있는 개평진 인근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전해지게 되었다.
한 갈래는 요양으로, 또 그 너머 기린울라와 의주로 향했으며, 다른 한 갈래는 엉뚱하게도 바다가 있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하여 미리 기다리고 있던 쪽배 한 척이 정남쪽으로 향하여 – 생김새로는 그저 고깃배인 이 쪽배 위에 어떻게 조선에서 갓 나온 지남반(나침반)과 시계가 실려 있는지, 동창에서는 영영 알지 못할 터였다 - 막 요동 바닷가에 숨어 있다가 서쪽 천진을 향해 발해 바다 가르며 나아가는 대선단과 맞닥뜨렸다.
미리 약조해둔 신호가 오가고, 마침내 ‘백두산을 오르라’ 군호는 그 선단 한가운데의 대장선으로 전해졌다.
“이 사람이 처음 훈련원봉사로 녹봉을 받게 되었을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오리라곤 짐작조차 못하였네.”
잔잔한 발해 바다의 물결에 조용히 흔들리는 전선 위에서, 오직 이번 전란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서삼도수군통제사(西三道水軍統制使) 직을 맡게 된 정걸(丁傑)이 말했다.
“대국을 상대로 화포의 위용을 드러내게 되는 것을 이르시는지요?”
그 곁에서 함께 바다를 바라보던 조방장 유극량이 물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그들이 몸을 실은 이 거대한 전선. 전선에 실린 정교한 화포. 이번 출병에 함께하게 된, 생각도 못한 우군.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몸과 마음을 바친다는 것보다도 더욱 자랑스럽고 뿌듯한, 그들 모두의 등 뒤에 있는 대의(大義). 그들 자신이 원하여 세운 법도와 그 법도에 따라 새로이 세워진 나라를 지킨다는 그 마음.
그러나 정걸은 어디까지나 무인이요, 이 모든 것을 형용하기에는 말재주도, 학식도 부족하였으므로, 더 설명하는 대신 그저 명을 내렸다.
“군호가 전해졌으니,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유극량이 말없이 군례 올리며 물러나서는, 크게 외쳤다.
“군기를 올려라! 회항은 없다! 이대로 서쪽으로 향한다!”
의주에서 바닷길로 한참 서쪽, 요동의 백련교 교인들의 도움 받아 해랑도(海浪島) 곳곳에 숨어 있었던 전선들은, 약조한 기한을 준수하기 위하여 이제 한 곳에 모여 발해 바다를 동에서 서로 횡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회군을 뜻하는 군호 대신, 이대로 계속 나아갈 것을 지시하는 군호를 받았으니, 이제 거리낄 것 없이 끝까지 나아갈 뿐.
발해의 반대편 끝에는, 천진이 있었다.
“늦지 않게 잘 당도한 듯합니다.”
“일대가 평지뿐이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발각되었을 것일세.”
정걸의 신중한 말에 유극량이 고개를 잠시 갸우뚱하였다.
천진 앞바다까지 조선의 전선이, 도중에 들키지도 않은 채 곧장 들이닥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터였다.
원래대로라면 느닷없이 나타난 큰 배에 깜짝 놀랐을 어민들조차, 이미 에스파냐 갈레온들이 여러 척씩 떼지어 오가는 것을 많이 보았기에 그러려니 하는 듯하였다.
물론 개중에 백리안이라도 들고 있는 어부가 하나쯤 있었더라면, 평소 천진 드나들던 선단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이쪽의 규모가 크다는 것을 깨닫고, 대경실색하여 즉시 인근의 관헌에게 알렸을 테지만.
“지금 시각이 어찌 되는가?”
“이제 막 정오를 지났습니다.”
“잘 되었군. 이제 하등 부끄러움은 없을 터. 영하기(令下旗)를 올리게.”
대장선이 영하기를 올리니, 조선 수군에 속한 전선들은 하나둘씩 기를 올려 명령에 응하겠노라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지난 몇 달간 함께 조련하며, 조선 수군의 군기가 어찌 운용되는지를 잘 알게 된 일본 수군도 함께 응하였다.
전쟁이라는 큰일에 있어서는, 인의조차 급이 나뉘는 법. 지금은 송나라 양공의 인(仁) 대신 진나라 문공의 의(義)로써 임해야 할 때였다.
수산 선생 이지함은, 분명 금일 정오를 기하여 전화가 닥칠 것이라 명의 조정에 경고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정오가 지난 지금, 닥쳐야 할 전화를 천진의 에스파냐 수사에 그대로 가져다주는 일이 어찌 도의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물론 당하는 쪽이야 할 말이 많겠지만, 이 배 위에 에스파냐어를 아는 이는 없었다.)
곧 멀찍이 천진 포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높디높은 에스파냐 갈레온의 선체와 돗대 사이로, 포구의 민가와 관아, 창고 등등이 보였다.
가을철 맞이하여 낮게 깔렸을 안개도 사라진 대낮. 마침내 저쪽 돛대 위에서도 이쪽 선단을 보았는지, 소란스러운 소리가 전해졌다.
“허둥대는 기세를 보니, 저들 중 누구도 미리 경계하지는 못한 듯하네. 천운이 따르는군.”
그러나 임꺽정이라는 이를 정걸보다 훨씬 더 잘 아는 유극량은, 그것이 천운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임꺽정이라는 사내의 뒤에 천운, 또는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거대한 흐름이 따르는 것일지도.
이들이 지금 감행하고 있는 기습은, 여태껏 하늘 아래에 없던 종류의 새로운 것이었고, 그런 새로움을 가능케 한 것은 결국 임꺽정과 그의 무리 덕택이었다.
경계를 아무리 내려놓고 있었다 한들, 온 지구의 바다를 저들 것으로 여기던 에스파냐 수사의 위명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 잠깐 사이에 벌써 부두를 떠나, 어떻게든 저들을 막아보겠다는 투지 불태우며 움직이는 갈레온들을 보며 유극량은 잡상을 내려놓았다.
“햣하! 가자꾸나!”
조선 수사의 카락선 사이에서, 오늘을 위하여 먼 일본에서부터 몰고 온 일본의 소선(小船)들이 튀어나왔다.
“마츠라 수군이 이 전쟁의 첫 공을 세울 것이다!”
“헛소리 말아라! 우리 무라카미(村上) 수군이야말로 일본 제일이다!”
“흥, 그 일본 제일이라는 말이 무슨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우리 마츠라 당의 상전 되시는 하야시 쇼군의 화포가 없었더라면 구마노 수군에게도 참패하였을 놈들이...”
티격태격 저들끼리 다투면서도, 그간 조련한 대로 흐트러짐 없이 잽싸게 나아가는 고바야(小早).
북경에서 급히 말 달려 막 천진에 당도한 오다 노부나가로 하여금 눈을 의심케 하는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임꺽정과 엮이면서 혼백이 빠져나갈 듯한 일을 겪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오다 노부나가는, 한 각도 되지 않아 상황을 파악하였다.
그 한 각 동안 전세는 빠르게 기울고 있었다. 물론 승패는 이미 저 조선과 일본의 선단이 천진 앞바다에 나타났을 때 결정된 것과 다름없었으니, 노부나가가 조금 더 일찍 나타났거나 약간이라도 이르게 정신을 차렸다 한들 크게 달라질 바는 없었을 터였다.
기습도 기습이거니와, 하필이면 물때는 밀물.
모든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에스파냐 함대는 최선을 다해 분투하였다.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히 울리고, 갑판 위에서든 천진 부둣가에서든 휴식을 취하고 있던 선원들은 한 치의 지체도 없이 저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급작스러운 사태에 대비하여 항상 출항 태세를 유지하고 있던 갈레온 두 척이 가장 먼저 포구를 떠나, 동쪽으로부터 다가오는 적을 향해 두려움 없이 나아갔다.
조선이 비록 말라카를 통해 카락을 건조하는 기술을 들여왔다고는 하지만, 그 기술의 원조인 에스파냐에서 건조한 갈레온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어떻게든 우세한 체급과 뛰어난 경험으로 버티면서, 다른 갈레온들이 잽싸게 뒤를 따를 수 있도록 시간을 벌려는 것일 테다.
그러나 비장한 각오와 투지가 무색하게도, 포격을 퍼붓기 위해 뱃머리를 살짝 틀던 갈레온 한 척이 굉음과 함께 그대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어찌 된 영문인가?
이윽고 두 번째 갈레온에서 포성이 울렸다. 조선의 카락 한 척이 제대로 얻어맞는 것이 노부나가가 든 백리안에도 고스란히 보였다.
그러나 그 결의가 무색하게도, 곧 먼저 간 전우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하, 과연.”
대체 무슨 조화인가? 오래잖아 깨우친 노부나가는 실소를 흘렸다.
좌우로 기울며 가라앉는 갈레온 사이로 뛰쳐나오는 고바야들의 이물 쪽에서, 모락모락 포연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일본의 수군 사이에서도 작은 축에 드는 전선이 바로 고바야다. 어지간한 세키부네에도 화포를 그리 많이 싣지 못하니, 고바야에는 이물 쪽에 한두 문을 싣는 것이 최대일 것이다.
그러나 그 한두 문도 쓰기 나름. 조선의 카락은 물론이요 그 전에 쓰던 다른 전선들보다도 한참 높이가 낮은 고바야다. 조선의 큰 전선이 저들의 포격을 맞아주는 동안, 작고 재빠른 고바야가 갈레온의 흘수선 아래를 노린 것이었다.
조선과 일본이라는 이웃이면서도 너무나 다른 두 나라. 양측이 힘을 합하였으니, 저런 전법도 구사할 수 있는 것일 테다.
그리고 곧, 노부나가의 실소를 싹 지워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아직 포구에서 연기가 나지 않은 고바야들은, 그대로 포구를 향해 직행하고 있었다.
“화공선이로군. 실로 지독한 놈들 아닌가.”
노부나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고바야 위에서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불길이 치솟았다. 처음부터 작정하였다는 것처럼 일말의 당황한 기색도 없이, 훈도시 차림으로 바다로 뛰어드는 선원들.
가라앉는 갈레온 사이를 제멋대로 누비고 다니는 고바야들이 같은 편 선원들을 구하는 동안, 저항이 사라진 틈을 타 조선 카락들이 연안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노부나가가 마침내 명령을 내렸다.
“즉시 군사를 풀어라. 천진을 불태운다.”
“주군, 천진을 불태우라 하심은...”
노부나가를 따라 서쪽으로 온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가 물었다.
“저 화공선을 보아라. 기습의 솜씨는 훌륭하지만, 그뿐이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면, 갈레온의 절반, 아니, 그 이상도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황없는 와중에도 노련하게 움직이는 에스파냐 뱃사람들을 보며, 노부나가는 그리 확신하였다.
“이미 저들은 기습을 멋지게 성공시켰어. 이제 와서 반격한들 쓸모가 없단 말이다. 그렇다면 남은 수는 단 하나, 우리가 아주 뼈아프게 참패를 당했다고 놈들을 속이고, 우리의 전력을 감추는 일뿐이다. 알겠느냐?”
“아! 역시 주군이십니다!”
아마가사키에서 임꺽정의 손에 명을 달리한 시바타 카츠이에에 비해 용맹은 부족하지만, 지략은 뛰어나다는 평을 받던 니와 나가히데였다.
“즉시 사람을 풀어, 민가의 백성을 대피시키고 우선 창고부터 불태우겠습니다. 연기가 많이 날수록 더 좋겠지요?”
“그래, 바로 그것이다.”
니와 나가히데가 막 주군의 명을 이행하려 나가려던 차.
“잠깐, 멈춰라.”
“예, 주군.”
“포구를 불태우는 것은 다른 놈에게 맡기고, 힘 닿는 한 빠르게, 날랜 무사들을 모아라. 에스파냐 놈들 중 쓸만한 녀석이 있다면 그놈들도 모으고.”
“남만인들까지 모으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놈들 중에 이교도의 지휘를 받지 않겠다는 둥 같잖은 소리 하는 놈이 있다면, 이렇게 전해주어라.”
천진까지 말 달려 오는 중 노부나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 하나. 천진에 들이닥친 조선과 일본 수군을 보면서, 자신이 떠올린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우리는 임꺽정, 그놈들 말로 돈 림, 코우지오니스를 치러 갈 것이다.”
저들의 본래 의도는, 천진이 급습당하여 북경마저 혼란에 빠졌을 때, 군기를 미끼로 던지고 산해관 쪽으로 도망치는 것이었을 테다.
그리고 산해관이 뚫릴 가망이 없어진 지금, 궁여지책으로 이쪽 천진으로 도망쳐, 저들 조선 수군이 제때 당도하기만을 기다렸다가 그들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계라는 기물 덕에 ‘언제’는 미리 말을 맞출 수 있다지만, ‘어디서’까지 미리 정해두는 것은 불가한 일.
결국 저들 여기 있노라며 연기를 피우든, 고래고래 외치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저쪽 배 위에서도 볼 수 있는 신호라면, 이쪽에서 보지 못할 것은 또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한 방 된통 당했다. 콧대 높던 대명은 아주 거하게 얻어맞아 콧잔등이 그대로 주저앉았고, 에스파냐의 잘난 수사도 암만 우리가 계책을 쓴다 한들 제법 많이 상할 것이다.”
일본을 버리고 명국으로 들어온 이래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노부나가의 악동 같은 웃음이 돌아왔다.
“이 모든 일에 대해서, 그만한 배상은 받아내야 하지 않겠느냐. 그것이 상도(常道)에 맞는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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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것처럼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이 조선 측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은, 하필 상대가 이순신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기체계 자체의 한계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즉 배의 체급 자체가 판옥선보다 한 단계 아래였고, 이를 상쇄할 수 있는 요소, 즉 화포 기술이나 지리적 이점 등도 부재했던 것이지요.
반대로 몇 번이나 유럽 해군을 위협했던 동남아시아의 토착 세력 해군이나 네덜란드 독립전쟁 중의 ‘바다의 거지들(Watergeuzen)’처럼 소형선을 이용해 대형선을 효과적으로 괴롭힌 사례도 있었습니다. 작중 언급된 것처럼, 화포를 좌우현 대신 이물 쪽에 배치하여 소형선의 체급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낮은 선고를 이용해 상대의 흘수선 아래쪽을 노리는 방식이었지요. 작중에서는 ‘바다거지단’이 등장하기도 전, 원 역사에서는 충무공의 조선 수군 앞에서 쓸려나갔던 무라카미 수군 등 일본의 수군 세력이 그런 전술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516년생인 정걸은 임진왜란 시기까지 현역으로 복무하며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당시 조선 수군 최고참(이순신보다 무려 31세 연상)이었음에도, 전라좌수영 조방장으로서 이순신을 보좌하며 많은 공을 세웠고, 이후 충청수사로 재직하면서 행주대첩에서 권율이 승기를 잡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