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충격과 공포 (4)
북경에서 천진까지, 족히 삼백 리(약 120km)는 될 먼 길.
용케도 그 길을 고작 반나절만에 주파한 ‘사절단’은 이제 막 무정하(無定河, 現 융딩 강)가 발해로 흘러드는 강어귀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당도한 차였다.
“그래도 달려온 보람이 있소.”
“그러게 말이다. 우리가 당하는 쪽이 아니니 할 수 있는 얘기지만, 불타는 기세를 보니 마치 적벽의 싸움을 보는 듯하구나.”
꺽정이와 이지함이 숨 돌리며, 불타는 천진 포구를 바라보았다. 처음 약조한 시각에 때맞추어 조선과 일본의 전선이 당도한 것을 본 이지함은, 이 계책을 처음부터 입안한 사람 중 하나로서 더욱 감회가 깊을 수밖에 없었다.
서른 척은 족히 넘을 듯한 갈레온. 누에바에스파냐와 고아 부왕령, 말라카 총독부의 모든 힘을 합하고, 심지어 에스파냐 본토에서 막 진수된 새 배마저 희망봉 너머로 보내 모았던 거대한 함대가 불꽃과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살풍경하다고까지 할 만한 모습. 그러나 이미 북경에서 더한 위기를 뚫고 나온 이들로서는, 마침내 저들 편이 나타나 한바탕 난장판을 벌이고 있는 이 모습을 보고 잠시나마 오금의 힘이 풀리지 않을 수 없었다.
“헌데 원래 배라는 것이 저리도 잘 타는 것이었소? 어째 연기 기둥이 좀 큰 듯한데.”
“불길이 심상치 않은 것이, 화공을 감행하면서 불씨가 부둣가로 튄 듯하구나.”
부둣가 창고가 먼저 불타고, 이웃한 민가도 그 뒤를 슬슬 잇고 있었다. 천진 백성들이 변괴를 깨닫고 도망칠 겨를은 충분했을 테다.
“그, 아시겠지만 이번 일에 저희 공이 컸습니다.”
북경 지붕 위에서야 결의에 가득 차 있었지만, 이제 긴장이 슬슬 풀리다 보니 본전 생각을 할 여유도 되찾은 조전이 그때를 못 참고 끼어들었다.
“속고만 살았나. 값을 어련히 쳐주겠느냐?”
“그것이... 그러니까...”
이번 거사가 성사될 수 있던 것은 무엇보다도 북경과 직례 일대 백련교 교인들의 도움을 아낌없이 받은 덕이었다. 그간 모았던 힘이 다하였으니, 이제는 눈이 뒤집힌 동창을 피하여 달아나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이었다.
대명 군세를 위한 거대한 덫을 준비하던 요동의 교인들 역시, 요동의 해안 곳곳의 진보 주변을 틀어막고 고기잡는 백성들 입막음하느라 그 힘의 절반 이상을 쓰고야 말았다.
조전이 이번에야말로 그간 모으고 숨겨둔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는 각오로 교인들을 설득하고 교두(敎頭)니 두목이니 하는 현지 교인들의 우두머리들을 끌어들이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말이 지칠 때마다 ‘운 좋게 인심 좋은 말 장수를 만나며’ 고작 반나절 만에 삼백리 길을 달려온 것도, 아니, 애초에 황태자를 납치한다는 경천동지할 일을 터뜨리는 것도 꿈 속의 꿈이었을 테다.
그러니 이백 년 전, 붉은 두건 둘러매고 일어났던 교인들이 결국 잘 삶은 사냥개 신세가 되었던 것을 희미한 옛이야기로나마 들었던 조전으로서는, 뒤늦은 걱정을 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백련교가 아무리 응달에서 세를 불렸다 한들, 이번과 같은 거사를 거듭 치를 만한 힘은 없으니, 확실히 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겠지. 허나 당수도, 또 이 사람도 그대들의 공을 잊지 않을 것이니 걱정 마시오.”
이지함이 재차 조전에게 확언하였다.
“그리고 요동의 장래가 어찌 되든, 그 땅에 정착한 백련교 교인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믿는 바를 믿을 자유를 얻을 것이오. 이는 나 니탕카이 요한과 수러 버일러 교창아가 우리 주션 사람들을 대표하여 성경에 맹세한 바요.”
좀처럼 이런 일에서는 입을 열지 않는 니탕카이까지 합류하니, 잠시나마 흔들리던 조전의 마음도 도로 부동(不動)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조전을 따라왔던 백련교 교인 몇몇이, 함께 조선으로 가는 대신 이곳 직례에서 어떻게 잘 숨어보겠노라고 하직 인사를 올리러 왔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이지함은 어린 황태자 – 의외로 영특하여 벌써 그럭저럭 필담이 되었다 – 달래기도 할 겸, 이대로 풀어주기는 황태자 앞날 생각해서도, 또 조선 입장에서도 조금 아까웠기에 조선으로 함께 가자고 꼬드기기도 할 겸 황태자 있는 쪽으로 갔다.
이지함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울고불고하는 황태자 달래느라 어렸을 때도 떨지 않은 재롱을 떨었던 히데요시는 녹초가 되어 멍하니 불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그토록 몸과 언변을 다 바쳐 어르고 달랬음에도 고작해야 ‘웃기게 생긴 대머리 아저씨’라는, 오로지 저의 겉만을 바라본 진솔한 평이 돌아온 것이 치명타였다.)
그렇게 꺽정이와 니탕카이만 남았다.
“이제 슬슬 끝나갑니다그려.”
“이놈아, 그런 말 하면 부정 탄다.”
“우리네 교인들은 그런 것 아니 믿잖습니까. 다 미신입니다, 미신.”
처음 의주에서 압록강 건널 때부터, 만에 하나 산해관 대신 천진 쪽으로 도망쳐야 할 경우를 염두에 두고 대비한 바 있었다. 퍽 야무진 이순신이 아녔더라면 그 이지함조차 놓쳤을 법한 일이었는데, 이렇게 그 덕을 보게 되었다.
미리 약조하기를, 이쪽 천진으로 도망치게 된다면 조선 전선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연기를 피워올려 군호(軍號) 보내기로 하였다.
멀찌감치 양벽과 흑의군들이 열심히 섶을 모은 뒤 셋으로 나누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가지런히 피어오르는 세 줄기 연기 정도라면, 이 불바다 가운데서도 눈에 띌 수밖에 없을 터.
“돌이켜보면, 그새 참 멀리 왔습니다.”
“아주 오늘은 저답지 않은 말만 골라서 하는구나.”
“일가붙이 다 잃고 육진 언저리에서 오도리 사람들에게 의탁하는 떠돌이로 살던 것이 엊그제같은데, 그사이 올바른 길을 찾고, 아예 나라 하나도 세우고, 그 나라 이끌면서 온갖 진기한 일도 많이 겪고,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조선과 일본 두 나라와 나란히 서서 저 강성한 명나라와 맞서게 되지 않았습니까.
주션 사람으로 태어나 일생이 이렇게 요란하게 흘러가는 것도 아마 보기 드문 일일 겝니다. 이게 모두 혼례 한 번 잘 구경 갔다가 벌어진 일이라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일본에서 간만에 싸움을 겪은 니탕카이는, 말 달리고 칼 휘두르며 살 좀 빼겠다는 당초 생각과 달리 그놈의 새우튀김 – 근래 규슈 명물로 떠오르고 있었다 – 탓에 더욱 후덕해졌다. 꺽정이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것은 덤이었다.
허나 그런 얼굴로 아련하게 회상을 하고 있으니, 곁에 있는 꺽정이도 덩달아 옛 생각에 아니 빠질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강 건너 불구경하면서 장사 둘이 그렇게 이 생각 저 이야기 하던 차.
“당수, 이제 불만 피우면 됩니다!”
섶 모으는 무리를 이끌던 흑의군 양벽이 외쳤다.
“오냐, 알았다!”
감상에 빠져 해야 할 일을 미룰 꺽정이는 아니었다.
“사형, 그 황태자인지 명태인지와는 얘기가 잘 되었소?”
“그래, 다행히 뜻이 통하였다.”
꺽정이가 일어나 살피니, 과연 토실토실한 것과는 별개로 꽤 영민한 눈빛을 지닌 황태자가, 말투만으로 오가는 문답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를 납치한 벌은, 받더라도 우리가 받을 것이요, 그간 글공부다 뭐다 하며 황태자를 괴롭혔던 자들과 떨어져 있으면 태자께도 이득이라고 하였더니 수긍하시더라.”
물론 그렇다고 장차 일국의 황제가 될 아이를 붙잡아놓고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는다면 그야말로 못할 짓이라, 이지함은 조선에 닿자마자 서계와 이이 두 사람에게 황태자를 맡겨둘 심산이었다.
“... 자질이 영특하니 가르치면 그 선대를 뛰어넘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을 테다. 더구나 율곡 녀석이라면 여러모로 죽이 잘 맞지 않을까 싶더구나.”
슬하에 아들이 벌써 둘인 이이는 – 이원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면서도 증손주까지 볼 것이라며 벌써 보약을 여기저기서 구해다 먹고 있었다 – 졸지에 저의 스승으로부터, 딱 눈높이가 어린아이 같다는 험담을 들은 셈이었다.
“잘 되었소. 그러면 불 피우라 하겠소.”
“알았다. 다만 천진 포구 쪽의 동향이 심상치 않으니 대비는 해야겠다.”
“아니, 당연히 온 고을이 불바다가 되었으니 동향이 심상치 않지.”
“그래야 할 텐데, 저들은 허둥지둥 날뛰는 듯하면서도 마지막 한 줌 정연함을 잃지 않고 있다. 필시 적진에 재주 있는 장수가 있음이야. 세 줄기 연기는 누가 보아도 실화(失火)가 아니라 작정하고 피운 불이니, 이 와중에도 무언가 이상함을 깨닫고 군사를 보낼 수도 있다.”
꺽정이 일행은 이곳 천진까지 도망쳐 오는 동안 딱히 추격해오는 군세는 앞에서든 뒤에서든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먼발치서 먼지 일으키며 오가는 파발은 종종 보였다.
태자의 신변에 위해가 갈까 두려워 선뜻 다가오지 못할 뿐, 여기저기 바삐 연통을 주고받으며 그들을 포위할 작정을 하고 있는 것이었을 테다. 도망치는 사신들이 이리도 빨리 천진에 닿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하였겠지만.
그러니 그런 파발 중 하나쯤은 저들과 비슷하게 천진에 닿았을 수도 있었다. 사형 말에 일리 있음을 이해한 꺽정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러면 내가 니탕카이랑 같이 흑의군 데리고 강가를 지키겠소. 사형은 봉화 옆에 계시다가 배 닿으면 먼저 오르시오. 히데요시 네놈은 너희 일본 사람들과 같이 사형을 지켜라.”
애초에 금번 사행(使行)은 조공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거의 대부분이 흑의군인 조선 쪽 사신단을 비롯하여 일본과 여진 모두 능히 싸움판에서 몇 사람 몫은 할 만한 자들만 있었다. 몸 하나만 빼돌려 도망쳐오는 길이라, 화포는 없고 궁시 든 사람 몇몇이 전부였다.
그나마 중간중간에 말 장수로 위장한 백련교 교인들이 마련해준 말이 있었기에 망정이었다.
“수산 선생님 말씀대로 될까요?”
히데요시와 이지함 두 사람이 꺽정이 말대로 준비하고, 약조한 세 줄기 연기가 모락모락 오를 무렵, 방금 전 옛이야기 하던 그 자리로 돌아와 천진 쪽을 살피던 니탕카이가 물었다.
“사형 말씀 들어서 손해 볼 것은 없지 않더냐.”
그 무렵, 빠져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정걸에게 고하던 조선 수군의 조방장 유극량의 백리안에도 세 줄기 연기가 보인 듯하였다.
갈레온과 조선 카락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포 쏘랴, 화공을 가하랴, 화공선에 타고 있다가 물에 뛰어들어 막 자맥질하는 저들 동무들을 구하느라 바쁜 무라카미와 마츠라 수군 대신, 카락선 옆구리에서 거룻배 여러 척이 물에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제법 떨어진 배 위에서도 볼 수 있는 연기라면, 천진 쪽에서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손해고 이문이고, 당장 구명을 고심해야 하겠는데.”
천진 저자로 번져나가는 연기를 뚫고 나오는 병사들이 눈에 들어오자, 꺽정이의 태연자약하던 얼굴도 점차 굳어졌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형세. 그저 저기 저 연기 심상찮다며 뛰쳐나온 오합지졸이 아니라, 이 와중에도 그 대오가 모두 흐트러지지 않은 정병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이미 북경에서 농락당한 바 있던 명나라 관병이 아닌, 어딘가 익숙한 모습의 일본 무사들. 그들 가운데 따로 대열 이룬 에스파냐 군사들의 갑주는 재투성이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번뜩이는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당수, 저놈들 저거...”
“그래, 아무래도 들통난 모양이다.”
어째 그 적의가 강 건너편까지 전해지는 듯하였다. 반드시 이 자리에서 임꺽정이를 붙잡고야 말겠다는, 이미 한두 번 또는 그 이상 꺽정이 저에게 당해본 자들만이 내보일 수 있는 독기가 진하게 섞여 있었다.
연기 그득한 대로를 뚫고 무정하 건너편에 나타난 이들의 수만 따져도 족히 오백. 그리고 적장에게 머리가 있다면 저 뒤로도 더 많은 수를 보낼 것이었다.
잠깐 생각하던 꺽정이는 금방 답을 내렸다.
“히데요시 녀석을 믿어보자. 니탕카이 네놈은 히데요시 녀석에게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어떻게든 저쪽 우리 배에 소식을 전하도록 만들거라. 거룻배 서너 척 대신에 아예 군사 수백을 보내도록 말이다.”
“하면 당수께서는...”
“하늘이 너댓 번쯤 뒤집혀도 우리 쪽 배가 닿기 전에 먼저 저놈들이 강을 건너올 게다. 어차피 저놈들 중에 중국 사람은 없으니, 황태자야 납치를 당했건 말건 죄다 나 임꺽정이를 잡으러 오지 않겠느냐?
네놈이 거느린 여진 녀석들은 말타기 하나는 자신들 있으니, 내가 함께 데리고 저기 북쪽으로 멀리 한 바퀴 돌고 오겠다.”
즉 자기 자신을 미끼로 삼아 우군이 당도할 겨를을 벌겠다는 말이었다.
니탕카이 역시 촌음의 고민 끝에 마음을 정했다.
“그러면 말타기에는 덜 능숙한 당수의 흑의군들을 수산 선생께 보내시지요. 저는 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암바 버일러 곁에 남겠습니다.”
“그러던가. 후회는 마라.”
본인이 그러겠다는데 굳이 더 딴지 걸 꺽정이는 아니었다.
“후회는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황제 앞에서 죄를 청하느라 머리가 흐트러진 장거정은, 그것을 가다듬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척계광과 노부나가를 맞이하였다.
“황상 폐하께서는...”
척계광이 운을 떼자마자, 손 들어 입을 막는 장거정이었다.
“나 장 모는 목숨을 내놓기로 하였소.”
스스로 권신의 허물을 기꺼이 쓰면서도, 정작 자신이 충신임은 의심치 않는 장거정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북경 성내에서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이는 당연히 황태자를 잃은 황제요, 그 다음이 바로 자괴감에 몸부림치는 장거정일 테다.
“오직 중화를 중화답게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황상의 권세를 모두 빌려 대일통을 내세웠소. 허나 도리어 만고에 남을 수치를 남겼으니, 이 죄를 고작 필부 하나의 죽음으로 갚을 수는 없을 터. 동방 오랑캐를 제압하고 온 세상을 중화에 복속케 할 단초를 얻은 뒤에야, 그나마 죄를 털끝만큼이라도 갚았다 할 것이오.”
그들이 종종 만나던 ‘외각’, 즉 장거정의 사저는 고작 하루 사이에 주인보다도 더 거하게 망가져 있었다. 약탈이라도 당한 듯, 아름답던 정원 곳곳은 놀랍도록 황폐하게 변했다.
사실 약탈을 당했다는 것이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는데, 그간 장거정이 – 엄숭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는 말도 과할 정도였으나 – 모아둔 가산을 모조리 털어 국고에 보태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대들 모두의 도움이 필요하오. 그대들 무관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번 전란이 끝나기 전까지는 화가 닥치지 않을 것이니, 염려치 말고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털어놓으시오.”
노부나가가 그 말대로, 바로 한 발짝 걸어나와 할 말을 털어놓았다.
“천진은 불탔습니다.”
“이미 들은 이야기요. 오랑캐들이 감히 그 알량한 수사로 비겁한 기습을 하여...”
“기습은 비겁할 것이 없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당한 쪽의 잘못이지요.”
“그럴지도. 이미 동창제독이 간악한 사교(邪敎)가 농간을 부린 것을 뒤늦게나마 알아챘으니, 다시는 당하지 않을 것이오.”
이 자리에 풍보와 조정길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오랑캐 악적의 뻔뻔함과 대담함을 익히 알면서도 제대로 방비하지 못해 당한 참화. 그것을 미리 알 만큼의 재주는 없었으나, 어떻게든 그 뒷수습을 하고 두 번 다시는 당하지 않을 만한 재주는 다들 지니고 있었다.
“이미 이번 계책을 위하여 직례의 관병을 모두 움직였습니다. 요동에 미리 치중을 옮겨두었으니, 그 군사로 그대로 산해관을 넘으면 저들 동이가 움직이기 전 먼저 칠 수 있을 것입니다.”
척계광 또한 뼈아픈 실책은 우선 뒤로 밀어내고, 앞날을 말하였다.
“요동에도 사교 무리가 가득 차 있을 것이오.”
이는 조선 수사가 갑자기 천진 앞바다에 나타난 것을 생각하면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바였다. 지금쯤이면 사교의 악적 하나와 무고한 백성 아홉을 함께 잡아 죽일 기세로 요동총병이 요동의 바닷가를 헤집고 있을 것이었다.
“사교가 아니더라도, 요동에는 예로부터 조선과 교역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눈을 피하여, 평소에 요동총병에게 보내는 군량 사이에 틈틈이 동이를 정벌할 군세가 쓸 군량을 섞어 보내두었습니다.”
아무리 엉망진창인 요동이라지만, 군량을 빼내어 파는 이는 없었다. 조선이나 여진에게서 곡식을 사들이는 쪽이 훨씬 싸게 먹혔기 때문이었다.
허나 척계광이 그 군량으로 장차 무엇을 할지를 논하려던 차, 다시 노부나가가 치고 나왔다.
“사람이 말하는데 도중에 끊는 걸 보니, 그대들 중화 사람들도 이제 겉치레 예절을 폐하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군. 허나 내가 하려던 말은 아직 많이 남았소.”
“천진이 불탔다는 것 외에 더 거론할 바가 있소?”
장거정의 건조한 물음에도 기세 꺾이지 않고,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도 더 불손한 기색을 드러내며 답하는 노부나가였다. 아마가사키에서 꺾인 날개가 조금은 도로 붙은 것일까. 아니면 그 옛날 오와리의 얼간이 시절부터 위태로운 지경에 자처하여 들어갔다가 나오던 그 담력이, 곤경을 앞두고 돌아오기 시작한 것일까.
“그렇습니다. 천진은 불탔지만 다 불타지는 않았지요. 남만, 그러니까 에스파냐 배의 삼분지이 이상은 살아남았고.
더구나 다른 배들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가 확실히 격침된 것들을 제하면, 나머지는 땜질을 해서 딱 한 번 정도는 더 항해를 할 수 있을 정도라고들 하더군요. 거기에 더하여, 암만 빈약하다지만 어쨌든 물 위에 뜨기는 하는 이 나라 수군까지 합하면, 저들 콧대를 거하게 한 대 때려줄 수 있을 게요.
잘하면 때리는 김에 목까지 꺾는 것이고.”
“그건, 그나마 다행이로군. 허나...”
허나 황태자는 끝내 놓치지 않았느냐, 하는 원망 섞인 추궁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마저 들어보십시오, 장 대인. 임꺽정을 놓친 것은 내 실수이기도 하오. 존귀하신 분을 되찾지도 못했지. 그러나 에스파냐 배를 살려낸 것 외에도, 소소하게나마 공 하나를 세웠는데, 어쩌면 향후에 이것이 꽤 중하게 될 수도 있을 듯합디다.”
임꺽정을 추격하라고 보낸 니와 나가히데는, 이미 여진 마병들의 귀신 같은 승마 솜씨를 알았기에 무리해서 그들을 쫓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적당히 쫓는 시늉만 하다가, 마침내 저들의 배가 뭍에 닿아 사람이 우르르 오르고 내리는 그 틈을 노렸다.
“물론, 임꺽정은 임꺽정이었지. 류큐에서는 에스파냐 군 삼백이 달려들어서 겨우 제압하는 시늉이라도 했다던가. 내 부하 니와 녀석도 죽다 살았고, 우리 일본과 에스파냐 양측을 합해 꽤 많은 수가 죽고 다쳤습니다. 그러나...”
원군이 탄 배가 뭍에 닿고, 또 추격하는 놈들의 시선을 끌겠노라며 멀찌감치 사라졌던 저들 당수도 멀쩡히 돌아왔기에, 이제 다 살았다고 방심하였던 삼국 사신들.
그들의 뒤에서, 오늘의 한을 풀고자 하는 에스파냐 검사들이 톨레도 강철 검을 휘두르며 나타나고, 그보다 더 묵은 아마가사키의 한을 풀고자 하는 일본 무사들이 양옆을 에워쌌다.
“절반 넘게 쓰러뜨렸지요. 살아서 빠져나간 이들 중에서도 다시 절반은 꽤 심한 부상을 입었지. 니와 녀석은 손수 활을 들어, 그 니탕카이라는 자에게 화살 다섯 대를 맞혔다 합디다.”
“사실이오?”
니탕카이가 단순한 여진 야인 추장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국초의 납합출(納哈出, 나하추)보다도 더 요동을 위태롭게 하는 사내임을 능히 꿰뚫어본 바 있는 척계광이 반문하였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며칠 뒤에 그 공보를 보면 알겠지. 허나 우리 일본 무사들은 공을 셀 때는 제법 엄격한지라 믿어도 좋을 게요.”
그러나 며칠 뒤 공보에는 니탕카이 요한의 부고는 실리지 않았다.
그 대신, 실로 대문짝만하게 천진이 불탄 사연을 적고, 그러고도 부족하다는 듯 뒷면에 더 많은 사정을 세세히 적었다. 글만 읽으면, 지구상의 에스파냐 함대가 모두 용궁으로 옮겨간 듯한 과장된 논조였다.
심지어 어디서 알파벳 금속활자까지 구했는지, 에스파냐 어로 ‘동방함대 전멸!’이라고까지 병서(竝書)하고는 중원 곳곳의 에스파냐인들 드나드는 항구와 그 너머 마닐라, 말라카 등지까지 흩뿌렸다던가.
사대부들의 언론과 달리, 거짓을 참이라 말하고 참을 조금 더 탐스럽게 부풀리는 정도는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것이 공보였다.
그리고 불리한 소식도, 안타까운 소식도 언제든 감출 수 있었다. 끝내 니탕카이 요한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북변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으며, 그 곁에는 임꺽정이 함께하고 있다는 소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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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조수(澡水)라는 독자적인 강이었던 융딩 강(융딩허)은 퇴적과 대운하 건설로 인해 유로가 여러 차례 바뀌었고, 이름도 그때그때 달라졌습니다. 후대의 노구교(盧溝橋, 루거우차오) 사건에 이름을 제공한 노구교의 ‘노구’도 융딩 강의 옛 이름 중 하나였지요. 강희 연간 치수 사업으로 유로가 지금처럼 굳어지기 전의 명대와 청대 초반에는 툭하면 강의 유로가 바뀐다 하여 ‘무정하(無定河, 정해진 것 없는 강)’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한참 전, 서림이 ‘자본’이라는 말을 창안하는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명태가 다시 언급되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명태는 조선 초까지는 잡히지 않다가 15세기 말~16세기 초 사이 함경도 해안에서부터 잡히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후 소빙기가 본격화되면서 강원도 해안까지 남하하게 되지요. 작중에서는 빠르게 발전한 조선의 조선 기술과 - 이사벨라 버드 비숍 등의 기록에도 남아 있는 - 조선인의 해산물 애호가 맞물려 더욱 빠르게 명태 어업이 성황을 맞이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함께 언급된 덴푸라는 예수회 선교사들과 포르투갈 선원들이 금식 기간(템포라Tempora -> 덴푸라天ぷら)에 먹던 채식 요리가 16세기 후반 나가사키에 유입되면서 와전된 것이 유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원형이 된 요리는 생선 모양을 흉내냈을 뿐 그저 콩과 달걀만을 쓰는 것이었지만, 형태만을 보고 생선튀김으로 오해한 일본인들이 그 안에 생선을 넣기 시작한 것이지요. 본디 이러한 발전은 17세기 초 에도 일대의 먹거리 좌판대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작중 일본에서는 서민 문화의 발달이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가속되면서 규슈에서 먼저 덴푸라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훗날 명나라 망국의 원흉으로 꼽히며, 강희제에게 제사도 지내야 하지 말아야 할 황제의 첫 주자로 손꼽히기까지 한 만력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처음에는 그럭저럭 명군의 자질이 보이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기미를 보이다가 어떤 계기가 발생하면 비뚤어지는 것은 주씨 황실에 내려오는 기묘한 전통이었고, 만력제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제위를 잇자마자 황태자로 낙점된 만력제는 그 무렵 정계 장악을 완료한 장거정이 교육을 일임받게 되면서 소싯적부터 아주 엄한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여색에 빠져 몸을 망친 아버지 융경제가 요절하고 불과 10세의 나이에 제위에 오른 뒤에도 이어졌습니다. 황제의 신분이었음에도 장거정과 그 심복 풍보에게 억눌려, 황제의 이름으로 쓴 반성문(죄기조罪己詔)이 여럿 전할 정도지요.
원 역사에서도 진시황을 옹호할 만큼 법가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황제의 전제통치에 집착한 장거정이, 정말로 철인군주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그런 교육을 강요했는지, 아니면 그만큼 권력욕이 강했기에 허수아비 황제를 만들고자 그런 짓을 벌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장거정 사후 만력제가 그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숙청한 것을 계기로 점차 정사에 대한 뜻을 잃어갔고, 말년 –이라고 해도 거의 이삼십 년에 달하는 기간 – 에는 완전히 국정을 폐하게 되었다는(萬曆怠政) 점입니다.
여담으로, 만력제의 아버지 융경제는 여색에 빠져 총 스물에 달하는 비빈을 두었음에도 정작 아들 복은 없었습니다. 작중 시점인 1568년 기준, 만력제의 손위인 두 형은 모두 죽은 지 오래이고, 아래에는 1568년 3월생인 아우 (훗날의 노왕 주익류)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外. 수염과 팔
소문은 다시금 서쪽으로 향했다.
에스파냐-포르투갈 함대가 힘을 잃을 때만을 기다려왔던 조호르의 술탄 겸 전직 말라카 시장 알라우딘 리아얏 샤는, 그간 숨기고 숨겨왔던 발톱을 마침내 드러내었다.
아체와 조호르, 그리고 일대의 다른 토호국 모두가 함락시키지 못하였던, 그러나 동방에서 온 기묘한 이방인들에게는 너무나 쉽게 문을 열어주었던 말라카.
한 번 눈앞에서 보고 배운 재주를 고작 노령 따위를 탓하며 잊어버리기에는, 알라우딘이 조상의 땅 말라카에 품은 갈망과 한이 너무나 깊었다.
그리하여 동방 상인들과 교역하며 그간 누리지 못하였던 부를 바야흐로 누리게 된 – 그리고 지난 이삼 년 사이 도로 그것을 빼앗긴 – 말라카 시민들의 집 지하실에서 조선제 조총이 튀어나오고, 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 밖에서는 함락된 적 없던 말라카 요새는 안에서 함락당하였다.
이미 함대뿐 아니라 상선들까지도 적잖이 그들의 새 주군 펠리페의 명에 따라 마닐라로 보내야 했던 고아 부왕령은, 어느새 저 북쪽에서 다른 토후들까지 규합하여 밀고 내려온 젊은 악바르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급급하였다. 디우(Diu)에서 전해오는 절망적인 구원 요청에는 답장해줄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나 지중해 세계와 그 이북에서는 아직도 전황이 팽팽하다 못해 합스부르크 측에 더 유리하였다.
루스 차르국은 어떤 일에서인지, 기껏 창설한 친위대를 차르 본인의 – 바깥에 알려지기로는 그러했다 - 의사로 해체하는 등, 알아서 내홍(內訌)에 빠졌다. 저대로 조금 시일이 흐른다면, 어쩌면 더 강력하고도 단합된 나라로 재편된 루스 차르국이 리투아니아를 사정없이 헤집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가 지금은 아니었다.
전선 하나가 줄어들게 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그 여유 병력을 신성로마제국과 오스만 투르크가 대치하고 있는 발칸, 투르크 이름으로는 루멜리아라 불리는 그 땅으로 보냈다.
베네치아 해군에게 서전에서 완패하고 그 뒤로는 술탄 셀림이 친정(親征)하였음에도, 좀처럼 맘루크의 반란은 진압되지 않았다.
전시에나 평시에나 유능하기 그지없다는 명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이끄는 투르크군 역시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초장에 자그라브(현 자그레브)를 무리해가며 점령한 데서 투르크의 공세는 끝났고, 그 뒤로는 후퇴와 후퇴의 연속이었다.
쉴레이만의 대에 정복한 부다(Buda, 현 부다페스트 일부)는 그 아들의 대가 되자마자 함락당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은 그 기세를 몰아 베오그라드 코앞까지 밀고 들어갔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지요. 혹시 눈치 채셨나요?”
이 모든 일에 각각 절반씩은 발 걸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동인도회사. 이번 전쟁에서 프랑스를 경유해 지중해 곳곳에 팔아넘기는 영국제 대포를 비롯해 여러 ‘효자 상품’ - 타고스 박사의 표현이었다 – 덕으로 엄청난 부를 쌓아올린 그 회사의 사장 엘리자베스 튜더가 물었다.
“그렇게 말해서 내가 눈치를 챌 사람이 아니라는 건 십 년쯤 전에 아셨어야 하는 것 아니오?”
“하하, 어쩜 ‘그 사람’과 함께 다니던 시절처럼 이리도 한결같으신지.”
“그때 워낙 세게 인상이 남은 것이겠지. 원래 진흙도 눌린 채로 구우면 그 문양대로 벽돌에 남지 않소.”
아버지 대에 확보한 영토 중 상당 부분이 ‘그리 잘 보호받지는 못하는’ 신세가 되었음에도, 술탄 셀림은 꽤 태평하였다.
“이번 전쟁 말이에요. 원래 이만한 전쟁이 아니더라도, 여러 나라가 하나로 뭉치다 보면 그럴듯한 조약이나 동맹을 내세우기 마련이잖아요.”
“여전히 잘 모르겠소. 우리 숭고한 나라가 주로 그런 ‘신성 동맹’이니 하는 류의 무리에게 종종 당하긴 했지만.”
“그런데 이번 전쟁은, 여태껏 이만한 규모의 전쟁은 없었을 텐데도 어느 한 쪽에서도 그런 동맹을 자처하지 않더군요. 저기 동방에서 맺었다는 ‘하니양 동맹’이나 이탈리아 연맹 정도가 예외일까요.”
그 말 마치기 무섭게, 매서운 동풍이 불어와 셀림의 코끝을 스치고 갔다. 코가 얼얼해진 것을 보니, 술기운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미스르(이집트)에 이런 바람이 불었다면, 이 모든 것이 탐욕스러운 맘루크들 때문이라고 몰아붙일 수 있었을 텐데. 실없는 생각조차 제법 술탄답게 하게 된 셀림이었다.
허나 이곳은 미스르가 아니었다.
술레이마니야와 이스칸다리야(알렉산드리아)에서 패배한 맘루크군은 강 중류로 올라가 항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버티다 보면 그들의 (차마 말 못하는) 우군 겸 물주 에스파냐가 결국 승리하리라 여겼던 것이다.
... 라는 것이 바야돌리드와 리스본, 바르샤바, 그리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이 사령부를 차린 부다에 알려진 바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5만을 훌쩍 넘는 투르크군이 지중해 건너편에 머물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직 나일 강어귀에 있어야 할 5만 군사가, 오스만 해군뿐 아니라 동인도회사, 그리고 베네치아 해군의 지원을 받아 아드리아 해로 진입하여 빠르게 북상하는 동안, 막시밀리안 2세는 물론이요 그의 장군들 중 누구도 베오그라드를 곧 함락시키고 나머지 헝가리와 그 너머까지 모두 탈환한다는 환상을 버릴 이유를 찾지 못하였다.
그리고 급보가 닿았을 무렵에는 이미 이탈리아 연맹군까지 합류한 그 군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가 너무나 명백해졌다. 그들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현재로서는 딱히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명백했다.
이것이 바로, 이 엄동설한 속에서 제2차 비엔나 포위가 진행 중인 까닭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얼른 저 도시의 성문이 열리고, 다들 평화를 약속한 다음 집에 돌아가 아내와 술의 안식을 즐기게 되었으면 좋겠소.”
“모든 사람이 술탄 폐하만큼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요. 술도 마찬가지고요.”
셀림이 존경하는 아버지 쉴레이만 – 신께서 그분께 안식을 주시기를! - 조차 저 도시 비야나(비엔나) 성벽만은 넘지 못하였다. 그 성벽을 자신이, 그것도 제위를 물려받은 후 첫 번째 전쟁에서 무너뜨린다면, 이는 엄청난 치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셀림의 마음 한 구석, 여전히 숭고한 문을 아우 바예지트와 함께 넘으며 앞날을 두려워하던 시절의 흔적에나 남아 있는 생각이었다.
지금은, 글쎄. 자신이 오랜 벗 엘리자베스 – 그 옛날 함께 세상을 누비던 이들 중 그나마 가까이 있는 것이 이 붉은 머리의 사내 같은 여인 하나뿐이었으니 – 앞에서 밝힌 것이 오히려 더 진심에 가까웠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이 전쟁이 끝난 뒤에는 더욱 빠르게 변해갈 터였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그 세상 속에서 자랑스러운 나라와 그의 집안이 뒤처지지 않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버겁고 또 족히 보람찬 일이었다.
“하여간 늘 입은 살았다니까. 이만큼 농담 따먹기를 했으니 이제 알려주시오. 그래서, 다들 무슨 그럴듯한 동맹이니 뭐니 내세우지 않는 까닭이 무엇이라 보시오?”
“전쟁이 바뀌었기 때문이겠지요.”
저쪽 비엔나 성벽 위에 휘날리는 십자가만큼이나, 이쪽 진영에서 초승달과 줄피카르(Zulfiqar) 깃발 곁에서 휘날리는 십자가도 똑같이 거룩하였다.
보다 올바르게 말한다면, 이제는 다 똑같이 훨씬 덜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이 올바를 테다.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하다못해 그 옛날 유대인들이든, 전쟁은 항상 신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거룩한 은총에 힘입어 승리를 거두는 것이라고들 말했죠. 그리고 전쟁에 앞서 동맹을 맺을 때도, 그에 맞추어 맹세하곤 했고요.”
크게는 몇 번이고 맺어진 신성동맹부터, 작게는 불과 십수 년 전 황제 카를 5세를 무릎 꿇린 루터교 제후들의 슈말칼덴 동맹까지.
“아, 그렇지. 이제는 그렇게 못 하지.”
당장 저지대에서 잉글랜드, 프랑스와 함께 에스파냐의 명장 알바 공작을 상대하는 저지대 독립군만 해도 프로테스탄트 일색이었고, 차르 이반도 원래는 카톨릭으로든 프로테스탄트로든 개종하려는 소문만 나도 이를 탄압과 숙청의 명분으로 삼곤 했다.
그리고 에우로파에서의 전쟁에서 양측이 모두 다 중히 바라보고 있는 동방의 경우에는, 시나든 디오시온이든 독실한 신앙의 나라와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 이 동맹의 이름을 ‘신성동맹’이라고 부르려면 당장 무엇이 그리도 신성하냐는 트집이 들어올 것이다.
“제 생각에는, 그게 아직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하지 않은가 싶네요.”
어차피 그들이 속한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는, 서로 뭉친 채 이 전쟁에서 끝까지 한 편으로 남아야 했다.
신앙보다는 국익. 십자가보다는 황금.
당장 그 교황 바오로 4세조차, 이교도와 협력하여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를 파자는 발상에 넘어가 종교의 자유를 외치지 않았던가. (실제로는 그 사이에 뭔가 다른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편의상 모두가 잊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이번 전쟁이 끝나면, 다들 현실을 마주해야 할 거에요. 신앙이 오로지 한 사람의 영혼과 양심에 대해서만 최선이자 최상의 무언가로 남을 때, 나라 사이의 관계는 무엇으로서 정의하고 관리해야 할까요? 신앙 바깥에 어떤 규범이 있어야 비로소 평화와 번영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만, 그만. 알겠소, 알겠어. 고민해보겠소.”
이런 대화는 종종 두 사람이 마주칠 때부터 이어지곤 했다. 엘리자베스 딴에는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숭고한 문의 주인들에게 보답하는 방식이었고, 잉글랜드 공주가 그저 아는체하기 위함이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게끔 종종 눈치를 주기 위하여 이렇게 잡설 늘어놓듯 떠든다는 것을 알기에 셀림도 이렇게 휘휘 손짓을 하면서도 아예 귀를 닫지는 않고 있었다.
때로는 서한으로도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가끔 엘리자베스와의 관계에 대해 사랑하는 아내 누르바누 술탄이 의심할 때면 그 서한이 관계의 성격을 증명하는 좋은 증거가 되어주곤 했다.
“‘그만’한다고 끝날 것 같나요? 아직도 할 이야기는 많은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셀림이 이런 이야기를 즐기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애초에 여기는 왜 따라온 것이오?”
“그야 운하 준공 이후의 일을 두고 폐하의 재상과 논의할 것이 꽤 많기 때문이지요. 전쟁 과정에서 저희 회사가 받은 것과 받아야 할 것에 대해서도 꽤 얘깃거리가 많고요.”
“그러면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와 얘기할 것이지 왜...”
“지금 무슨 중대한 사안이 있는지, 다른 지휘관들과 회의를 하고 있더군요.”
아직 셀림 본인이 임석해야 하는 정식 회의 소식은 없는 것을 보면, 그리 중한 일은 아닌 듯하였다.
그 옛날 코스탄티니예에서 불청객 림 파샤와 지아웃딘 알 시니 – 그리고 요새 그렇게 잘 나간다는, 그들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원숭이 닮은 사내 –를 함께 상대하던 시절 이후로 셀림 본인은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를 신임하였고, 메흐메트 역시 그런 신임에 대한 책무를 다하는 사내로서 스스로 가치를 증명하였다.
그러니 자신의 재가나 동의가 필요한 중대한 일이라면, 저들끼리 수군대다가 결정을 내리는 대신, 직접 찾아와 고할 것이었다.
“폐하, 중대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 바로 지금처럼.
쉴레이만이 처음으로 도시를 포위했을 때와 달리, 지금의 비엔나는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물론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중심 도시로서, 꼭 필요한 대비는 항상 해두고 있었지만, 딱 그 정도가 끝이었다.
자그라브가 전쟁 초에 함락당했다고는 하지만 그뿐이었고, 그쪽으로 우회하는 움직임은 그 이후 딱히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베네치아와 오스만 투르크가 손을 잡는다는 경우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으니, 누구를 탓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따지고 보면 동쪽의 로마제국도 여러 번 골탕먹인 베네치아가, 서쪽의 신성로마제국이라고 골탕을 먹이지 않으리라는 발상 자체가 다소 안이한 것이었지만.)
반면 1차 포위 때와는 달리, 투르크 측은 후방에 베네치아가 있어 보급도 상당히 안정된 (평소의 에우로파였다면 아주 지독한 반어법이었을 테지만) 편이었고, 비단 용병대 중심의 보병대뿐 아니라 포병 전력 역시 지원받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였으므로, 이 겨울은 포위군보다도 그 포위망 안쪽의 비엔나 수비대에게 더욱 가혹하였다.
이 사실을 잘 알던 신성로마제국은 폴란드에 요청하여, 그들이 자랑하는 후사르(Hussar) 기병을 원군으로 불러오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적 증원군이 이미 포위망 동쪽에 육박해오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포조니(현 브라티슬라바) 쪽 길목을 막고 있던 예니체리 부대는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습니다.”
메흐메트 파샤가 담담히 상황을 설명했다.
“물론 저들이 이동한 속도를 바탕으로 추정컨대, 적 지원군 역시 급히 달려왔고, 그 선봉에 그 악명 높은 기병대가 있었을 뿐이겠지요. 아직 베오그라드 쪽에서 적이 완전히 철수했다는 보고는 없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오스만 투르크와는 달랐다. 군대를 이루는 이들은 장교부터 말단 병사까지 하나하나가 정예병이지만, 대신 그 수효는 동방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랐다. 똑같이 수만 대군을 일으켜도, 오스만 투르크는 또 다른 곳에서 그만한 군대를 일으킬 수 있는 반면, 서방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유난(그리스) 인들의 오래된 이야기처럼 용의 이빨로 군대를 만들지 않는 이상, 저들의 수효가 그리 많지 않다는 메흐메트 파샤의 추론에는 일리가 있었다.
상대가 예니체리나 시파히로는 상대하기가 영 여의치 않은 후사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어찌하면 좋겠소?”
어쨌든 이 회의의 좌장인 셀림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베네치아군 총사령관인 지롤라모 자네가 셀림에게서 애써 고개를 돌리며 – 한때 셀림 및 꺽정이 일행과 더불어 현악기의 음률을 감상하는 즐거운 시간을 보낸 바 있는 사이였다 – 입을 열었다.
“메흐메트 공께서도 인정하시겠지만, 투르크군은 후사르 기병대를 상대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양적 우위로 밀어붙이거나, 아니면 절묘한 작전으로 그들의 힘을 봉쇄하거나 해야 할 텐데, 지금 상황에는 모두 어렵지요.”
메흐메트 파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반대로 생각하면, 성 안의 수비대도 똑같이 여기고 있을 것입니다.”
“흠, 성공만 시킬 수 있다면 훌륭한 발상이 되겠소.”
보나마나 저들은, 비엔나 구원을 위해 전력으로 달려왔을 것이다. 아마 지금도 약간의 휴식만 취한 채, 다시금 포위망을 향해 달려오고 있을 터.
그렇다면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 눈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보았을 때, 비엔나를 방위하는 군대와 민병들은 어떤 심정이 될 것인가?
그 마음 속 계산을 한 발 늦게 따라잡은 셀림이 물었다.
“허나 선황께서도 그 기병대는 쉽게 상대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소. 그대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 포위망을 유지할 수밖에 없고, 무언가 정교한 작전을 고안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군.”
“그렇지만 이번에는 우리 이탈리아 군대가 있지 않습니까.”
이탈리아군의 용맹은 지중해 전체에 잘 알려진 바 있었다. 대략 일천사백여 년 전의 이야기가 끝이었으니 문제일 뿐.
“그러나 폐하의 군대에는 중보병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그러는 이탈리아군도 마찬가지 아니오?”
말이 이탈리아군이지, 사실상 이탈리아 연맹의 각 도시에서 알아서 용병을 모집한 다음 막대한 현금 보상을 조건으로 겨우 지휘체계를 하나로 통합한 것에 가까웠다.
이대로 연맹이 이어진다면, 피렌체 사람 마키아벨리가 그토록 역설했던 것처럼 시민군이 언젠가는 창설될지도 모르지만, 우선 전쟁을 끝내고 생각할 일이었다.
“우선 믿어만 주십시오. 만약 패배한다면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리고 승리한다면 지분을 요구하겠지. 셀림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말마따나, 어차피 앞으로의 세상에서 외교란 곧 이익이고, 이익이란 곧 황금이며, 황금은 다시 군대가 되고 군대는 다시 외교로 이어질 것이었다.
잠시 숙고하던 셀림의 눈에, 메흐메트 파샤의 눈이 닿았다. 긍정을 뜻하는 눈짓으로 셀림은 답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래도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전장을 바라보는 비엔나 쪽에서 먼저 환호성이 울렸다. 그 유명한 깃털 날개가 보이기 시작한 듯하였다.
“이제는 슬슬 밝혀주어도 될 듯하구려. 중보병을 어디서 만들 생각이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올라 전장을 바라보던 셀림이 지롤라모 자네에게 물었다.
“저희 이탈리아군에는 지금까지 늘 중보병이 있었습니다. 다만 수당을 아끼기 위해서 이번 원정을 시작한 이래 아직 선보이지 않았을 뿐이지요. 이번 전쟁에 워낙 들어가는 예산이 많다 보니, 갑옷을 입는 시간만큼 추가로 수당을 주기로 합의했거든요.”
지금까지는 한 번도 온 이탈리아 – 정확히는 교황청과 그 이북만이었지만 –에서 군대를 모은 적이 없다 보니 나온 궁여지책이었다.
“사실, 저는 그리 뛰어난 장군감은 못 됩니다. 정치라는 게 늘 정치스럽다 보니, 같은 베네치아 사람 앞에서는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요.”
지롤라모 자네가 저 혼자만 재밌는 농담을 던졌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전쟁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 자체로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돈, 돈, 그리고 더 많은 돈이라는 것 말이지요.”
그리고 베네치아는, 예나 지금이나 돈이 아주 많았다.
“그 말씀이 대개 옳다는 것은 수긍할 수밖에 없겠소. 실제로 이탈리아 쪽에서 지원한 화포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만으로는 여기까지 저들 기독교... 아차, 오스트리아인들을 몰아붙일 수도 없었을 것이니.”
“그리고 이제 또 한 번 그 증명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신이시여...”
“저희 베네치아 혼자서도, 완전히 파산할 각오를 한다면 저 정도 군대는 한 삼십 년 쯤은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야, 수지타산이 안 맞았을 뿐이지요.”
지금까지는 그저 투르크 군에게 포위의 어려운 일을 맡기고, 머릿수만 채우는 줄 알았던 이탈리아군이, 어느새 중보병 부대로 바뀐 채 포위망의 취약한 등과 허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비엔나 성벽 위에서 재차 요란하게 환호성 울리는 것을 신호 삼아 전투가 시작되었다.
“돌격!”
“국왕 폐하 만세!”
눈이 녹아 다소 진흙탕이 되었건만, 그럼에도 후사르 기병의 돌격을 감당하는 땅은 여실히 울리고 있었다.
“이탈리아를 위해!”
“눈치 좀 챙겨라, 이놈아!”
“물러나는 자는 고소, 남아서 이기는 자는 승리수당!”
“그래, 그게 좀 더 낫네.”
반면 상대하는 아군은, 다 좋은데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모은 용병이라는 점 하나로 말미암아 영 믿음이 가지 않는 자들.
“자, 훈련받은 대로만 해라! 네놈들 받아처먹는 급료만큼은 해야 할 것 아니냐!”
“예, 예, 합니다. 한다고요.”
“우리는 뭐, 이탈리아에 가족 없는 줄 아쇼? 말은 이렇게 해도 지킬 건 지킨단 말요.”
그런 자들 입에서도 ‘이탈리아’가 조금씩 나오고 있었는데 – 귀족들부터 그 ‘자유석공단’까지, 모두가 이탈리아 연맹이니, 클리스마 운하니, 지중해의 새로운 번영이니 떠들어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이는 누구의 귀에도 딱히 의미 있는 말로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다.
그리고 더 고민하거나 떠들 겨를도 주지 않고, 날개를 흩날리며 후사르 기병의 창대가 보병 대열을 향했다.
“죽어라!”
“아이고, 죽는다!”
부족한 전투 경험은 돈으로 샀다. 병사의 부족한 질은 비싼 장비로 메웠다.
그리고 그 결과가 드러나고 있었다.
“엥? 진짜 안 뚫리네?”
“일어나라! 일어나! 네놈들 죽으면 네놈 몫까지 내가 챙길 거다!”
기세 좋게 달려든 후사르의 창대는, 튼튼한 판금 갑옷 앞에서 허무하게 부러지고 있었다.
달려들어 충격을 가하면, 그 자리에서 나동그라지고는 금방 진흙 털고 일어나는 이탈리아군.
무적 후사르의 위명이 저 얼음 녹은 진흙 속에 버려진 군기처럼 더럽혀지는 데는 한 시간이면 충분하였다.
“선황조차도 이루어내지 못하신 업적을 이루어내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술탄이시여.”
그날 밤. 마침내 비엔나에서 몰래 나온 시민과 수비대 대표 몇몇이 항복을 청하였다.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그대도 고생이 많았소.”
“감사합니다.”
메흐메트 파샤는 정말로 고생이 많았다.
이제 내일이면 저 성벽에 휘날리는 십자가 옆에, 그들 투르크의 깃발도 나란히 흩날리게 될 것이요, 십자가 역시 이탈리아 연맹의 것으로 바뀔 터였다 (엄연히 연맹에 교황령이 함께하고 있었기에 십자가 대신 다른 문양은 생각할 엄두도 못 내었던 것이다.).
비엔나 대표들은, 도시에 대한 약탈만은 금해줄 것을 조건으로 내밀었고, 잠시 계산을 하던 지롤라모 자네는 나중에 합스부르크 쪽에 배상금을 더 청구하면 된다고 답했다.
선의에서 나온 생각이라기보다는, 저들의 훨씬 강력한 이웃에게 쓸데없는 원한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던 – 배상금으로 받는 황금보다, 약탈한 피묻은 황금의 값이 훨씬 비싸다는 것은 자명하였다 – 지롤라모 자네였다.
“헌데 그건 그치들 사정이고, 우리는 아니지 않소? 어차피 루멜리아와 그 너머 패권을 두고 계속 으르렁대야 할 텐데. 내가 그것을 바란다는 뜻은 아니지만 말이오.”
방금 전, 투르크 군 지휘관들은 메흐메트 파샤로부터 약탈 금지 명령을 받아들고, 이를 어떻게 부하들에게 전해야 맞아죽지 않ㅇ르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물론 베네치아의 예를 따라, 투르크 군사들 역시 시파히와 예니체리, 그리고 말단 졸병까지 모두가 국고에서 포상금을 받을 예정이었다.
“장차 기독교인들과 공존해야 한다면, 우리 홀로 기독교인 도시를 약탈하였다는 소문을 낼 수는 없으니까요.”
“공존이라. 하긴, 이 모든 일의 시작이 거기에 있었지.”
“림 파샤가 딱히 평화와 공존공영을 외치지는 않았던 듯한데요.”
“그놈이야 원래 별 생각 없이 여기저기 치고받았으니까. 하지만 녀석이 뚫고 나간 벽 뒤에는 그런 길이 생겼으니 어쩌겠는가.”
포도주를 따르던 셀림이, 잠시 손을 멈췄다.
“아, 맞다. 앞서 그대를 기다리던 엘리자베스 그이가 묘한 이야기를 했다네.”
“그분이 묘한 이야기를 하신다면, 귀 기울여 들을 가치가 있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곧 셀림의 입에서 전해진 이야기를 들은 메흐메트 파샤는, 여러모로 휘몰아치는 감정에 직면하게 되었다.
신앙보다는 이익. 기실 첫 번째 투르크인들이 초원과 사막, 산맥을 넘어 무슬림으로 개종했을 때부터 그 통치자들이 따라왔던 기조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조심스레 무슨 철리(哲理)인 것처럼 전해지는 것과, 온 세상의 소위 식자들이 밝은 하늘 아래서 떠들고 다니게 되는 것은 결코 같지 않았다.
그런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들이 만들어왔고, 성공한다면 아예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게 될 세상은.
메흐메트의 명석한 두뇌는, 오늘 하루 내내 과로한 탓에 생각과 생각 끝에 잡음을 내며 멈춰섰다.
“내게도 고민해 보라고만 하고, 저는 딱히 뭔가 뼈 있는 얘기는 안 하더군. 적어도 내가 듣기엔 그랬소. 그만큼 단번에 떠올리기 어려운 것이겠지. 그대도 너무 무리하진 마시오.”
그러고는, 술을 마저 따르는 셀림이었다. 요새는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주정뱅이’라는 소문 – 딱히 숭고한 문에서 손을 쓴 것은 아니요, 그저 언제부턴가 코스탄티니예의 거리에서 일어나게 된 변화였다 –이지만 그 실체는 그대로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능숙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술탄의 수염 무성한 입가로 갈 줄 알았던 술잔은, 메흐메트 앞으로 전해졌다.
“그 옛날 로마 사람들이 말했다지 않소. ‘포도주 속에 진리가 있노라 (In vino veritas).’”
셀림의 말에서 오랜만에 재치를 느낀 덕인지, 아니면 이 모든 일이 한없이 혼란스럽고 두렵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을 자아내고, 어떤 면에서는 유쾌하게까지 느껴지기에 그러는 것인지는 몰라도,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의 입가에도 미소가 서렸다.
그리하여 손이 자연스레 앞으로 뻗어나가고, 셀림의 술잔을 메흐메트가 받았다.
술잔에서는, 메흐메트가 아직 소콜 마을의 기독교인 소년 바지차(Bajica)였던 시절, 함께 양 치던 동네 친구 하나와 숨어서 마시던 그 포도주의 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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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16세기 초, 쉴레이만 치하의 오스만 투르크가 발칸 방면으로 공격적인 확장을 시작하면서, 19세기까지 오스만 투르크와 기독교 세력들은 발칸의 종주권을 두고 기나긴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16세기가 끝나갈 무렵까지도 주도권은 거의 항상 오스만 투르크에 있었지요.
그러나 신성로마제국도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고, 두 번이나 빈을 포위하며 유럽 세계를 정복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던 오스만 투르크는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16세기 말부터 찾아오기 시작한 체제의 위기, 즉 과도한 전비지출로 인한 통화가치 하락과 조금씩 벌어지는 유럽과의 군사기술 격차, 그리고 한때는 혁신적인 군사집단이었던 예니체리(예니세리) 조직의 한계 노정으로 인하여 서서히, 그러나 확고하게 쇠퇴의 길로 접어들지요.
특히 신성로마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모두 혼란에 빠졌던 시기를 노려, 그간의 쇠퇴 기조를 역전시키고자 오스만 투르크가 야심차게 시도한 2차 빈 포위(1683)의 실패는 오스만 투르크와 유럽 사이의 역학이 변화하는 분수령으로 많이 언급됩니다. 막대한 동원력을 발휘하여 15만 이상의 대군을 이끌고 빈을 포위한 오스만 투르크는, 끝내 성벽을 완전히 넘지 못하고 후방을 공격한 후사르 기병대에게 무너지고야 말았지요. (그리고 합스부르크는 100여 년 뒤 이 은혜를 러시아, 프로이센과 함께 폴란드를 3분할함으로써 갚게 됩니다.)
그러나 이처럼 동유럽에서는 무적으로 군림한 후사르였지만, 그 한계는 명확하였습니다. 기병이 활약하기 좋고, 서유럽과 달리 중보병의 비중이 낮았던 동유럽과 對투르크 전선에서 후사르는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중보병을 상대로는 여러모로 부적합한 면을 보였지요. 애초에 중보병을 상대하기보다는, 경무장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 창대의 길이를 극단적으로 늘리고 그 대신 창대를 최대한 가볍게 만든 후사르였기에, 적이 판금 갑옷처럼 제대로 된 갑주를 차려입을 경우 위력이 반감되는 문제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나머지 동유럽에서 보인 압도적인 전과, 그리고 특유의 깃털 날개 갑옷 등 여러모로 인상적이기 때문에, 후사르 기병은 지금도 폴란드에서는 중요한 역사적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