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41화 (240/259)

73. 만병지왕 (1)

한양의 맹이 거병을 약조한 무진년(1568)의 전과는 심대하였으나, 그렇다고 마냥 만족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전란이 닥칠 것이라 경고하고 들이친, 지극히 정정당당한 – 물론 동방 삼국만의 주장이었다 – 천진 급습은 소기의 성과를 이룬 듯하였고, 그와 더불어 전혀 계획치 못했던 소득, 즉 성은 주씨요 명은 익균인 어린아이 하나까지 한양으로 데려오게 되었다.

그렇지만 요동을 치는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첫술을 뜨자마자 바로 산해관 앞까지 밀고 들어갈 것이라고는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요양, 잘하면 그보다 서쪽인 광녕까지는 닿을 수 있으리라 다들 내심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요동경략으로 임명받아 천자로부터 상방검(尙方劍)까지 하사받은 척계광은 범상한 장수가 아니어서, 북경과 천진이 발칵 뒤집힌 와중에도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이십만 대군을 빠르게 요양으로 진군시켰다. 

척계광은 저들 ‘동이군(東夷軍)’이, 대명 군세가 십여 년 사이에 제대로 된 정병으로 거듭났음을 알지 못하고 요양의 들판으로 걸어들어오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삼국 군대의 군사(軍師)들은 그중 가장 싸움을 덜 겪어본 자가 이순신일 만큼 노련하였다.

그리하여 삼국 군대는 섣불리 요하 일대의 평야로 향하는 대신, 옛 고구려 오골성인 봉황성(鳳凰城)에 자리를 잡고 산악의 험준함에 의지하여 겨울을 날 채비를 하였다. 추위를 못 이긴 일본 신정부군은 후방으로 물러났는데, 개중 몇몇은 온돌이라는 개명된 문물을 접한바 꿋꿋하게 전선에 남기도 했다.

전세가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도리어 명 쪽이 급하게 되었다. 싸움 한 번 못 치르고 요동을 잃는 참화는 면하였으나, 거꾸로 말하면 이십만 대군을 움직였음에도 싸움 한 번 못 치른 셈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척계광은 꿋꿋하게 이렇게 글을 올렸다.

“옛 고려(고구려)의 무리는 곧 옛 조선과 말갈 부류가 합하여 이루어졌는데, 연개소문이 험준한 산세에 의지하여 굳게 지키니 당태종조차 이겨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동이군의 형세가 그와 같습니다. 저들이 봉황성을 점거하고 그 일대의 산세와 겨울의 혹한에 의지하여 버티고 있으니, 지금 그들을 치는 것은 단언컨대 하책 중의 하책으로 청사에 남을 것입니다.

이듬해 기사년(1569)의 계책과 맞물릴 수 있도록, 봄을 기하여 저들을 치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신은 감히 아룁니다...”

북경과 천진에서 당한 굴욕에 앙갚음을 하기 위한 그 ‘계책’을 위하여, 이미 마닐라의 마지막 갈레온 한 척까지 긁어모아 슬슬 조선 서쪽의 크고 작은 섬 근처를 건드리고 있던 터였다. 

그러므로 ‘기사년의 계책’ 운운한 척계광의 글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그렇다고 마냥 겨울이 지나기를 기다리지만은 않았다. 동창과 협력해 요동을 장악하다시피 한 백련교를 제압하는 데 힘을 쓰는가 하면 – 모두 잡기는 요원하였으나, 적어도 지난날 천진에서처럼 쉽게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 겨우내 날이 풀릴 때마다 틈틈이 마병 약간을 내어 동이 군세를 찔러보곤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이 되었소. 제장(諸將)에게 그간 계책이 있노라 언질만 주었을 뿐, 세세히 밝히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기밀을 지키기 위함이었소이다. 이제 계절도 훈풍 불 때가 되었으니, 어찌 황상의 뜻을 받들지 않겠소?”

요양과 그 주변, 그리고 봉황성 쪽에서 넘어오는 산길과 개주(蓋州) 방면을 지키던 모든 장수를 불러모은 척계광이 운을 떼었다.

“먼저 그간 본관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여 동이의 허실을 살핀 이 총병을 치하하는 바요.”

이 총병이란, 바로 동창의 일에는 소질이 없으나 그 군재는 뛰어나다 하여 다시 군문으로 돌아온 이성량을 말했다. 대동 일대를 지키며 달단 추장 엄답(알탄 칸)의 손자 파한나길(바간나기)를 대파한 공으로 마침내 벼슬이 산해총병에 이르고, 사실상 척계광의 부장으로서 요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가 척계광과 장거정 양쪽의 눈에 든 것을 모두가 알았으므로, 다른 장수들은 그를 질투할지언정 그 눈빛을 감히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경략 대인의 명을 받든다 하면서도 이렇다 할 공을 세우지는 못하였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적을 상대로 단 한 번도 대패하지 않은 것이 큰 공이오.”

요동의 험준한 산 곳곳에는 옛 고려(고구려)의 성이 제법 남아 있었는데, 개중 입지가 좋은 곳은 여진 야인들도 능히 지킬 만하다 여겨 꾸준히 보수하여 저들 성으로 삼곤 했다.

이성량은 그간 그런 성들 사이를 몇백쯤 되는 군세로 꾸준히 정탐하듯 찔러보며 그 강약을 헤아리곤 했는데, 동이 쪽과 달리 상대 진영 안에 심어둔 이목이 모조리 뽑힌 지 오래인 명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조선의 조총수들은 그러잖아도 그 솜씨가 심상치 않다는 말이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 기기가 더욱 정교해져 이제는 화승 없이도 능히 쏠 수 있는 총을 다루게 되었다. 그러한 총을 든 자들이 산등성이에 숨어 있다가, 벼락처럼 몇 발씩 쏟아붓고는 사라지는 전법을 구사하였으므로, 이성량의 군사는 재수가 없으면 한 번 출병에 일이백 씩은 줄어든 채로 돌아오곤 했다.

(그 보고를 받아든 척계광은, 북경 앞에서는 온갖 거짓 병기를 선보이더니 정작 그런 매서운 조총은 숨겨두었다는 사실에 ‘역시 상종치 못할 도적놈들’이라며 치를 떨었다.)

“자, 치사(致謝)는 여기서 마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이제 해가 바뀌고 봄이 다가오고 있은즉, 동이 또한 움직일 것이오. 장담컨대 며칠 내로 적은 이곳 요양에서 이백여 리(약 110km) 떨어진 무순(撫順)을 칠 것이외다.”

척계광의 장담에, 장수들 중 제법 군략에 견식 있다 자부하는 이들이 웅성거렸다.

“저들로서는 천병(天兵)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것이 더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산을 넘어 이곳 요양을 치는 대신, 멀리 동쪽의 무순을 칠 것이라 장담하시는지요?”

대개는 요동의 군직을 대대로 물려받는, 실력보다는 자긍(自矜)하는 마음이 더 큰 자들이었다.

그러나 척계광은 이를 예상하였기에 딱히 노여워하지도, 귀찮게 여기지도 않았다. 아무리 판단이 떨어지고 사리분별이 어둡다 한들,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들 하나하나가 금번 출병 뒤의 군략을 세세히 알 필요가 있던 것이다.

“참람되게도 천병국(天兵國)이라 자처하는 아개위 여진 무리들의 추장 니탕개가 천진에서 크게 다쳐 마침내 숨을 거두었소. 이로 말미암아 여진 야인들은 지금 크게 내분을 겪고 있을 터. 그러므로 우리 군으로서는 바로 무순관 너머 이곳, 야인들이 혁도아랍(허투알라)이라 부르는 곳을 치는 것이 상책이 되었소.”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또 한 번 시끄럽게 떠들었다. 척계광의 눈짓에 이번에는 이성량이 대신 좌중을 설득시키려 나섰다. 척계광과 달리 그는 이곳 요동의 군관 집안 출신이었던 것이다.

“지금 아개위의 통령이라는 애신각라(아이신교로)의 가장(家莊, 집안의 영지)이 바로 혁도아랍입니다. 그곳을 잃게 된다면, 가뜩이나 흔들리는 아개위는 사분오열하기에 이를 것이요, 우리는 그 틈을 타서 길림오랍(기린울라)을 치고, 거기서 다시 압록강을 넘거나, 아니면 봉황성의 적군을 삼면에서 에워싸며 의주까지 밀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총병이 잘 말해주었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미리 무순을 공략하려 할 터. 그로써 조금이라도 혁도아랍을 노리는 창끝을 무디게 하려 할 것이외다. 우리는 바로 그 점을 역으로 노릴 것이오.”

지금 무순을 지키는 것은, 역시 요동 군관 집안의 자제로 좌도독 조인(祖仁)의 아들인 조승훈(祖承訓)이었다.

요동 안에서의 평판은 어떨지 몰라도, 척계광의 눈에는 영 모자란 자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무순 쪽 산길을 넘어 조선과 여진 군세가 넘어온다면, 필시 조승훈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성 안에 갇힐 것이다. 적 역시 그 기세를 몰아 그대로 성을 포위하고, 요양에서 구원이 오기 전 함락시키려 할 것이다.

“그러나 무순에서 요양 사이는 제장들이 더 잘 알겠지만 평탄한 벌판에, 숲이 간간이 있을 뿐이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주변에 군세를 매복시키고, 저들이 무순을 포위하면 그때 그 뒤를 칠 것이오. 그리고 저들이 패주하면, 비로소 그 기세를 타고 그대로 혁도아랍을 칠 것이외다.”

무순의 성벽은 지은 지 오래되었고, 더구나 요동이 황폐해지기 한참 전부터 이미 군기(軍紀)는 해이해졌으니, 그 성벽은 그리 미덥지는 못할 것이었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조승훈이 조괄(趙括, 전국시대의 대표적 졸장)만한 자는 아니었고, 더구나 그 아래의 병력도 적지는 않았으므로, 족히 며칠은 버틸 수 있을 터.

조금씩 척계광과 이성량의 설명을 이해하는 장수들이 늘어났고, 의심하는 기색은 그에 따라 저 산 위의 눈이 봄 만나 녹아내리는 것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무순 앞에 동이가 나타났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심지어 그 군세를 이끄는 것은, 바로 천자 융경제가 직접 조서로써 황명(皇明)의 원수이자 천하의 악적이라 선포한 임거정이었다.

“조금 아쉬운데요.”

봄의 내음이 물씬 느껴진다지만, 아직 제대로 훈풍이라 불러주기는 조금 무엇한 북변의 바람을 맞으며 명희가 말했다.

“무엇이 말이오?”

“부군의 이름이 천하에 떨치는 것이야 아내로서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이렇게 떨치는 것은 원치 않았는데요.”

성문을 꽁꽁 닫고 무순 안에 틀어박힌 조승훈은, 그래도 나름 샅바싸움을 해보겠다며 문루 위에 올라 조선말로 – 요동에는 발에 치이는 것이 조선말 아는 사람이었다 – 꺽정이를 꾸짖으러 나섰다.

황제가 저를 천하의 악적으로 선포하였다는, 따끈따끈한 소식도 그렇게 접할 수 있었다. 조승훈으로서는 나름 저쪽 기를 죽여보겠다고 외친 말에, 오히려 ‘암, 우리 당수라면 그럴 만도 하지’라는 반응이 돌아올 뿐이었으므로 맥 빠지는 일이었다.

물론 그가 입 다물고 도로 성 안에 틀어박히게끔 만든 것은, 주변의 재미없는 반응 때문이 아니라 바로 명희 덕분이었지만.

“지금 황제네 애비도 변변찮은 놈이었는데, 그 아들이라고 사리가 밝으면 얼마나 밝을까. 이번 전쟁에서 이기게 되면 꼭 그놈더러 함부로 남의 험담을 하지 않겠노라고 맹세케 하겠소.”

도둑놈 우두머리 황제에게 도적 소리를 들었으니, 새삼스레 뿌듯한 꺽정이였다.

“에이, 황태자 전하는 그래도 영명하다고들 하던데요.”

“그러면 황제 그 작자가 안사람을 잘 들인 덕이겠지. 물론 거기에 있어서도 나만 하겠냐만.”

살풍경한 전장에서 주고받는 말이라는 점만 제하면 꽤 곰살맞은 말이었다.

“도원수 대감, 마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마저도 겨우 훈훈해지려던 차 군관 하나가 눈치 없이 끼어들어 끊기고야 말았다.

옛 조선이 서쪽 큰 나라에 사신을 보낸 이래 가장 망측한 짓을 벌이고 돌아온 꺽정이가 ‘네 놈 벌인 일은 네가 수습하거라’ 하는 임금의 소화(笑話)에 가까운 덕담 들으며 도원수 직을 제수받았기에, 꺽정이는 도로 ‘도원수 대감’이 되었다. 니탕카이의 상을 치르고 막 봉황성으로 향하려던 때의 일이었다.

헌데 꺽정이가 기꺼이 그 벼슬 받으면서 또한 임금에게 답사 아닌 답사 보내기를, 마침 저의 부인도 함께 있으니 부인에게도 벼슬 하나 실직(實職)으로 달라 하였다. 이번 전란이 끝나면 또 한바탕 공신 책록을 할 터인데, 그때는 정말로 저의 안사람도 공 세워 그 이름을 빛내게끔 하고 싶다는 솔직한 언문 서한이 올라갔다.

오늘날 조선의 군제에 따르면, 군관이라 하여 반드시 장수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아전과 같이 세세한 실무를 맡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그간 알음알음 조금씩 바뀌다가 두리손이 크게 한탕 벌인 이래로 자리잡은 것이었는데, 다른 ‘조선인민군’의 법도와 마찬가지로 그 유래가 떳떳지 못한 것은 다들 쉬쉬하면서 여전히 따르고 있었다.

특히나 임거정의 부인 이명희로 말할 것 같으면, 이 나라에서 가장 먼저 조총을 다루고 또 그 진법(陣法)을 고안한 사람이니, 다른 부인이라면 몰라도 검손당 이씨는 그만한 직을 맡을 만하다고 삼사의 언관들은 입을 모았다.

(물론 남녀의 분별을 흩뜨리는 그러한 일을 어찌 가만 넘기겠느냐고 볼멘소리하는 자들도 없지는 않았는데, ‘자네 때문에 검손당께서 벼슬 못 받고 그대로 한양에 돌아오면, 그때는 정말로 밤길이 위태로워질 것이야’ 하는 소리를 듣고 다들 단념하였다.)

명희 또한 그런 남편 마음에 뭉클해지기도 하고, 또 남편과 함께 생사를 같이하고픈 마음도 있거니와 꺽정이의 그 공신 책록 운운하는 말에 넘어가기도 했기에 이렇게 남편 따라 종군, 아니, 남편 곁에서 지휘를 하게 되었다.

당연히 조승훈은 그것을 보자마자 ‘아녀자가 어찌 감히’ 같은 케케묵은 소리를 하였는데, 무릇 사내든 여인이든 허튼소리 가로막는 데는 조총만한 기물이 없는 것이라, 명희가 일부러 조승훈 옆의 기둥을 노리고 자생화총을 한 발 갈기니 그대로 효험이 드러났다.

“자, 그러면 다시 한 번 저쪽 조씨 나리를 놀라게 해볼까요.”

“흐흐, 이것 참. 간만에 또 재밌겠는걸.”

웬일로 두 사람 말에 동조하는 군관들이 많았다. 그들 둘러보며 꺽정이가 한 마디 하였다.

“이왕이면 이번 싸움 준비하는 데 가장 공 많은 이가 첫 번째 호령을 하는 게 좋지 않겠소? 다들, 그렇지 않으냐?”

“예, 대감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꼭 명희네 부군이 하는 말이 아니었더라도 다들 고개 끄덕였을 터였다. 이 자리에 있는 군관들은, 이번 출정을 위해 이씨 부인이 봉황성과 의주 오가며 얼마나 고생하였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더 큰 고생은 남쪽 동래의 장인들과 그들 관리하는 한양 사업당 아전들, 그리고 그 총책 서림이 하였겠지만, 군관들로서는 알 바가 아니었다.

“도원수 대감의 명을 받듭니다.”

명희가 사뭇 진지하게 군례 올리고는, 곧 새되면서도 날선 목소리로 외쳤다.

“방포하라!”

“방포!”

경천동지라는 넉 자가 이만큼 전장에 어울릴 때도 지금껏 없지 않았겠는가. 멍멍해진 귀가 겨우 제 본분을 되찾을 무렵 연기가 걷히자, 그 모습을 바라본 군관들은 다들 그런 소회를 품게 되었다.

이탁오나 이이가 종종 인용하는 피렌체 사람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저의 병법서에서 논하기를, 그 어떤 성벽도 포화를 견딜 수는 없고, 그저 그 두께에 따라 며칠이나 견디냐가 달라질 뿐이라 하였다던가.

누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몰라도, 조선 군관들의 심금을 울리는 촌철살인의 한 마디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결과, 이른바 ‘개창(改創)’ 천자총통이 반지름이 몇 촌(寸)은 될 묵직한 쇳덩이를 쏘아대며, 정말로 벼락처럼 인명을 살상하고 성벽을 무너뜨리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까마득하게 느껴지지만 기실 그리 까마득하지는 않은 옛날, 의민당의 난을 겪으며 화포의 중요함을 깨달은 이준경이 새로이 화포의 제도를 갖추도록 지시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을 마치기도 전에 일본에서, 이어서 온 세상에서 경이로운 화포의 새 제도가 들어오다 보니 점차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리하여 처음 계획했던 개창 천자총통은 대신 현자총통이 되었고, 황자총통은 아예 설계가 바뀌어 불랑기포를 이름만 다르게 부르는 꼴이 되는 동안, 천자총통은 경신년의 포르투갈 포 콜루브리나(컬버린)를 ‘콜루브리나 따위’로 일축할 만한 거포로 화하고야 말았다.

그런 거포를 우마 여러 마리의 힘을 빌어 겨우 옮겨온 보람이 있을 만큼 – 산길에도 밝고 말 다루는 데도 밝은 여진 사람들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했을 일이었다 – 효험이 탁월하였다.

“크으으으...!”

“화약의 효험이 실로 미쳐 날뛰는 듯하구려!”

화약이 귀하다는 것도, 화포가 귀하다는 것도 이제 모두 옛말이었다. 염초는 저 멀리 천축에서부터 한량없이 넘어오고 있었고, 유황은 유구국에서 지천으로 났다. 질 좋은 구리 또한 일본에서 무한정 들어왔으며, 이제는 공방(工房)을 넘어 공창(工廠)이나 공장(工場)이라 불리는 동래의 일터에서는 그 모든 것을 합하여 화포로 곧장 찍어내었다.

너무나 과한 부담을 진 화포가 부서진다면, 새로 하나 더 만들면 그만이다. 화포에 화약이 너무 많이 쓰이는 것이 문제라면, 화약을 더 들여오면 그만이다.

사정이 이러한즉, 이제는 그 무엇도 조선 군관들을 막을 수 없었다. 

초장부터 썩 미덥지는 못하였으나 시석쯤은 능히 막아낼 수 있었을 무순 성벽은, 이제는 그저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돌무더기로 화하였다. 

심지어 개중에는 안에 흙을 제대로 쌓지 않았는지 그냥 와르르 무너진 곳도 있었는데, 무순 안쪽의 명나라 군사들에게나 황당하지 바깥쪽 조선과 여진 군사들에게는 마냥 즐거운 일이었다.

“저 효험은 신령스럽다 하여도 부족함이 없겠습니다! 하하하!”

개중 정신 차린 자들은 검손당 이씨를 칭송하고, 조금 더 정신 차린 자들은 그럼에도 아직 부족함을 깨닫고 저기서 더 좋게 만들 여지를 찾았다.

그런가 하면, 말석에 있다 보니 제대로 이번 무순 공략의 계책을 전해받지 못한 자도 한둘쯤은 있었다.

“그런데 이제 무엇을 합니까?”

“뭐라?”

“아니, 성벽이 저렇게 무너졌다고 해서 안의 인마가 상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대로 돌격하여 파진(破陣)하든 해야...”

화포의 위력이 지닌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를 규탄하는 군관들의 목소리가 일어났다.

“네 이놈! 우리 도원수와 검손당 마님의 뜻을 아직도 모르겠다는 말이더냐!”

“예로부터 화포야말로 만병(萬兵)의 으뜸이었거늘! 자고로 화포에 대한 믿음을 잃는 것은 패전을 의미하는 법이며...”

말실수한 군관을 숫제 그 자리에서 불태우기라도 할 것처럼 여기저기서 책망이 잇따랐다.

“그리들 떠들 겨를이 있다면 얼른 이어서 방포할 준비를 마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러나 명희의 한 마디에 다들 진압되고야 말았다.

“아차차,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리하여 무순의 성벽에 의지하여 동이를 막아보려던 조승훈의 고난은 이후에도 몇 차례나 이어지게 되었다.

“조선의 화포가 실로 정예하다는 것은 일본에서 이미 드러난 바 있다 들었습니다. 우리가 저들의 뒤를 치기 전에 무순이 함락당하는 것은 아닐지요?”

급히 행군하는 명군 대열 사이에서, 척계광 곁을 지키던 이성량이 문득 물었다.

“공성을 예로부터 병법에서 하책으로 치던 데는 마땅한 연유가 있네. 그저 성을 떨어뜨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성 안에 들어가 물자를 빼앗든, 민가를 노략질하든, 하다못해 죽고 다친 이들을 묻고 옮기든, 모두 공성 그 자체만큼이나 번거로운 일이지.

그러니 저들이 성을 함락하여 그 안에 들어갔다면, 그대로 무순을 에워싸면 그만일세. 우리에게는 이십만 대군이 있으니, 그렇게 무순을 거대한 감옥으로 삼고 그대로 나머지 군세는 혁도아랍으로 진격하면 되는 것이지.”

조승훈 한 사람은 그리 아깝게 여기지 않던 척계광이 단언하였다.

그때 무순 쪽에서 급히 전령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도저히 이치에 닿지 않는 보고를 받은 척계광이 물었다.

“적을 물리쳤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물론 저들이 의외로 형편없는 오합지졸이었거나, 조승훈에게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하던 군재가 있었을 수도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보기에는, 정정당당하게든 기상천외한 계책을 써서든 승첩을 거두었다고 보기에는, 달려온 저 전령의 모습부터가 기묘하였다. 귀는 절반쯤 나간 듯하고, 눈은 어딘가 비뚤어져 허공을 멍하니 보고 있을 뿐. 

심지어 적을 물리쳤다 알리는 조승훈의 필체마저도, 마치 막 글을 배운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삐뚤빼뚤하기 그지없었다.

“그, 그러니까 경략 대인께 고한 대로입니다... 적이 무순을 잠시 들이치려 하더니... 그대로 물러갔습니다.”

도저히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었다. 

“대인, 어찌하시겠습니까?”

“안 되겠네. 직접 가서 두 눈으로 보는 수밖에.”

마음 같아서는 가병(家兵)만을 거느리고 빠르게 달려나가고 싶었으나, 이 수상쩍은 정황을 보았을 때 적의 매복이 있을 수도 있었기에 단념하였다.

그리하여 힘껏 사방을 경계하며 무순에 닿았을 때, 척계광 이하 모든 장수들은 떡 벌어진 입을 도저히 다물지 못하였다.

“허, 실로 고려의 후예렷다!”

어찌하여 당태종은 그토록 고려 앞에서 고전하였는가? 산세가 험준하기도 했거니와, 연개소문이 견벽청야(堅壁淸野)의 전법을 베풀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저들, 무순을 들이쳤다는 동이 군세는, 마치 그 견벽청야에 대하여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도 한 듯하였다.

무순 안의 민가와 사람은 그대로 남아 있으되, 무순 성은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거치적거리는 성벽조차 없이 들판을 말끔하게 치웠으니, 저것이 어찌 청야(淸野)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물론 송두리째 성벽을 무너뜨렸다는 것은 과장이고, 여전히 멀쩡히 서 있는 성벽의 구간도 제법 있었지만, 무순 성이 방어의 거점으로서 지녔던 가치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고작 목책 따위로 보수한다고 될 정도가 아니었다.

저의 상식이 무너지는 이 아찔함을 이겨내지 못한 척계광이, 저와 마찬가지로 혼백이 빠져나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듯하던 이성량을 불렀다.

“내 뺨을 한 대 세게 때려주게나.”

고민할 여력도 없던 이성량이 곧장 저의 상관 뺨을 휘갈겼다.

“하, 고맙네.”

그리고는 장수들을 불러 말했다.

“저들은 필시 무순을 이 꼴로 만든 뒤 그대로 무순관을 지나 동쪽 산길, 혁도아랍 쪽으로 물러났을 것이오. 우리로 하여금 저들 뒤를 쫓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위함이겠지.

그러므로 우리는 저들의 뜻에 따르는 시늉을 할 것이오. 즉시 날랜 군사를 추려 저들 뒤를 쫓고, 나머지는 뒤에서 따라오도록 하시오. 마치 아무런 방비 없이 눈 뒤집혀 추격하는 것처럼 형세를 꾸며야 하오.”

이미 다들 넋이 나가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아무도 군말하지 않고 명 받들겠노라 군례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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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날씨가 한반도보다 대체로 온난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서,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겨울 추위에 크게 고생하였습니다. 특히 그나마 다양한 지형과 기후를 경험해 본 무사들과 달리, 그저 끌려왔을 뿐인 일본인 잡부들은 규슈 출신이 많았기에 더욱 고통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일례로 규슈 출신 종군승려로 울산성 전투 등 정유재란의 굵직한 사건을 참관하며 『조선일일기(朝鮮日々記)』를 남긴 케이넨(慶念) 화상은, 울산의 믿을 수 없는 추위와 그에 고통받는 일본인 잡역부들, 그리고 ‘고드름’이라는 신기한 자연현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승훈은 원 역사에서 임진왜란 당시 명의 제1차 파병을 이끌었던 장수로, 본인의 판단착오와 조선의 첩보 실패 등이 맞물려 평양에서 대패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전에 종종 언급된 다른 요동 출신 무관들과 마찬가지로, 대대로 요동의 군직을 맡은 집안 출신인데, 조승훈 본인뿐 아니라 그 후손들도 군에 복무하였으나 영 이상한 쪽으로만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 아들 조대수는 여러 차례 청에 항복했다가 도로 배신하고, 또 그러면서도 결국 청에 받아들여져 한인팔기를 이끄는 놀라운 줄타기 실력을 보였고, 그 외손자 오삼계는 굳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랴오닝 성 푸슌 시인 무순은, 남만주의 산악 지대가 끝나고 랴오허 강 일대의 평야가 시작되는 지점에 있습니다. 이에 따라 명나라 초에 요동을 점령하면서 바로 성을 쌓았고, 이후에도 주요 거점으로 나름 방비가 이루어졌지요. 원 역사에서 후금의 부상에 결정적 계기가 된 사르후 전투도, 바로 이곳 무순을 누르하치가 급습하여 함락시킨 데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도 지나가듯 몇 번 언급되었던 인도산 염초(질산포타슘, saltpeter)는 19세기 칠레산 초석이 널리 개발되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전략물자 중 하나로서 세계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흑색화약의 주 성분인 염초는, 흙이나 재, 질산염이 축적된 동물(바다새나 박쥐 등)의 분변 등을 긁어모아야 겨우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화약무기의 사용에 있어 가장 긴요한 자원이었지요. 따라서 그런 고생 없이 바로 채굴하여 사용할 수 있는 인도산 염초가 가지는 중요성은 매우 컸습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네덜란드동인도회사(VOC)가 아시아에서 운송한 전체 화물의 16%가 인도산 염초였다고 할 정도입니다 (Frey, 2009. “The Indian Saltpeter Trade, the Military Revolution, and the Rise of Britain as a Global Superpower.” The Historian 71(3)). 강력한 해군력과 경제력, 그리고 기민한 – 당하는 쪽이 보기에는 아주 고약한 – 외교술로 인도와의 교역을 장악한 영국은 막대한 염초 공급을 바탕으로 화약을 마음껏 쓸 수 있었고, 심지어 당시 다른 유럽 국가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던, 실탄을 사용한 군사훈련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압도적인 연사력과 숙련도를 바탕으로 전세계를 누볐던 영국 육군 ‘레드 코트’의 성공 비결 중 하나였지요. 그러나 작중에서는 그 염초가, 영국보다도 더 화약을 사랑하였던 조선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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