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만병지왕 (4)
무순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진서로는 길림애(吉林崖), 여진 말로는 기린하다라 일컫는 산등성이.
그 산등성이 따라 굽이굽이 사람의 줄이 생겨 있었는데, 바로 산길 달려오다시피 하여 겨우 이곳에 닿자마자 곧장 삽을 잡은 조선과 일본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낮에는 여름처럼, 따사롭다 못해 따가운 볕이 내리쬐고, 밤에는 겨울처럼 냉기 한가득 품은 산바람과 골바람이 번갈아 부는 때. 대저 북변의 봄이란 이러한 계절이었다.
그러니 십중팔구는 농민의 자식으로 본디 저의 태어난 쿠니를 벗어날 일 없는 팔자였던 일본 신정부군은 물론이요, 그나마 기후 온화한 삼남에서 북쪽으로 온 조선군 병사들도 종종 고뿔(감기)이든 무엇이든 앓곤 했다. 함경도나 강원도 출신들이나 그나마 조금 낫다 할까.
사정 여차하였으므로, 한창 삽질 끝에 겨우 두 각(30분) 휴식이라는 군령이 내려오자 바로 삽 내팽개치고는 허리 펴며 잡담하는 병사들 사이에서도 연신 기침소리가 나왔다.
“콜록, 콜록. 그 뭣이냐, 담박고(淡泊膏)인가 서령초(西靈草)인가 하는 것이 그리도 용하다는데.”
“공보에서 한두 번 보기는 한 것 같은데, 그거 무슨 약초 아니었습니까?”
“약초는 약초인데, 그 이파리를 따다가 잘 말려서 폐병 들거나 가래 끓을 때 불태워서 그 연기를 맡으면 그만한 게 없다더군.”
하나가 잡담의 서두를 떼니, 나머지도 삼삼오오 몰려들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에이, 이 사람. 공보는 믿어도 광고는 믿으면 안 되는 것 모르나.”
“아니, 그거 진짜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 그걸 구해서 피워봤는데, 정말로 단번에 기침이고 가래고 끊어졌다던데요.”
그 약초는 임 당수가 서방 여러 나라를 주유하고 돌아오던 때 함께 들어왔는데, 금방 그 효용을 깨우쳐 지금은 전국 곳곳에 빠르게 퍼지고 있는 난저(감자)와 달리 딱히 쓸모를 찾지 못하여 기학재 구석에서 그냥 기르고만 있었더랬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물론이요 동창보다도 돈 되는 소식에는 밝은 것이 바로 민주당이라. 프랑스의 어린 국왕이 지독한 독감에 걸렸을 때 이를 쾌유케 한 것이 바로 이 영험한 풀잎이라는 소식이 동인도회사를 통해 들어오자 곧장 민주당에서도 팔 걷어붙이고 장사에 나섰다.
다만 사탕도(대만)에서 열심히 자라고 있는 분화(커피) 나무와 달리 조선 풍토에 맞게 재배하는 법까지 함께 들여오지는 못했기에 이제야 조금씩 퍼지고 있었다. 사업당 별감 서림의 발상으로, 이름도 ‘서쪽의 영험한 풀(서령초)’라고 그럴듯하게 지어 붙였으나, 값이 아직은 높고도 높은 문턱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들 헛소리 관두게. 서령초가 영험하든 아니든, 조선의 고향에서도 큰맘먹지 않고서는 마련을 못할 터인데, 이곳 북변에서는 오죽하겠는가? 하등 쓸모없는 생각이야.”
처음 보는 군관 하나와 함께 지나가던 대정(隊正, 대략 소대장에 해당)이 병졸들 이야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우리들이 지금은 그냥 별 볼 일 없는 백성 무리지만, 또 전란 끝나고 돌아가서는 무엇을 하여 대성(大成)할지 어찌 알겠습니까?”
“돌아가서 확 서령초 농사나 지을까보다. 대정 나리네 집안에는 갑절로 값을 붙여서 팔고.”
“암, 암. 요즘 세상이 어디 옛날이랑 같은가. 사람 팔자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지.”
다들 우하하 하고 좋다고 떠드니, 대정 곁에 있던 생면부지 군관도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듣자하니 다들 서령초 이야기를 하는 듯하던데, 참으로 때가 공교롭게 되었습니다.”
“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이제 보니 군관은 위아래가 모두 검은색 갑주. 말로만 듣던 흑의군이었다. 흑의군이라면 다들 우락부락한 천하장사일 줄 알았는데, 서른 남짓한 얼굴의 이 사람은 - 팔뚝은 남의 허벅지만 하였으나 - 생김새는 제법 말쑥하였다.
“다들 얘기한 것처럼 서령초에 참으로 폐병이나 고뿔 따위를 고치는 효험이 있으니, 지금의 우리 군에 가장 쓸모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여 사업당 서 별감께서 지난해 각지 농장에서 걷은 서령초를 통 크게 희사하여, 못된 날씨에 시달리는 북변의 장졸들로 하여금 모두 그 내음이나마 맡아볼 수 있도록 하였답니다.”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 하는 서림이었다. 품계가 있는 군관들 앞으로 전해지는, 자못 정성들여 포장한 상자에는 아예 전국 곳곳의 서령초 파는 가게 찾아오는 법을 써두었고, 나누고 나누어 한 모금 피우면 그만일 병사들을 위해서는 짐꾼들을 시켜 서령초 효험을 떠벌거리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런 사정까지는 모르고, 서림이 흑의군 위해 따로 부친 서령초를 받아들며 짐꾼들 떠드는 이야기를 들은 임밤이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주워섬길 따름이었다.
“오오...”
“거 보십쇼, 대정 나리. 다 이렇게 방도가 생기지 않습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이들 병사들에게까지 돌아갈 양은 얼마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제야 떠올린 밤이는, 이럴 바에 차라리 자신 몫까지 함께 피울 심산으로 주섬주섬 쌈지를 뒤졌다.
“이왕 이리 된 것, 함께 향이나 맡으십시다. 어차피 이 사람은 임 당수 따라 여기저기 누비고 다니는 몸이라, 이럴 때가 아니면 또 언제 유유자적 연기를 피울 수 있을지 장담을 못 하니까.”
“이야, 역시 대단하십니다!”
“하하! 임 당수 따라다니시는 호걸께서는 마음 씀씀이부터 다르시군요!”
밤이가 아직은 어색한 손놀림으로, 대롱을 꺼내 이파리 밀어넣고 불을 붙였다. 자생화총이 고작 일이 년 사이에 널리 만들어지면서, 일본 부싯돌도 조선에서 널리 쓰이게 된 덕에 불씨 구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켁, 켁! 어우, 매워라!”
“그, 아닌 게 아니라 조금 몸이 가뿐해지는 것도 같습니다?”
한둘이 먼저 좋다고 떠드니, 다른 이들도 뭔가 저들 몸에 좋은 기운이 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미 서령초가 영험하다는 말을 듣고서 하는 끽연이기에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런 좋은 것을...”
“별 말씀을 다 하시오. 고생스러운 일을 하는 이들에게 이렇게라도 도움을 줄 수 있으니 외려 보람차고말고.”
“저희가 무슨 고생입니까. 임 당수, 아니, 도원수 대감 모시는 분이야말로 훌륭한 일 하시는 게지요.”
딴에는 입에 발린 소리라고 하는 것이었으나, 그 뒤에 의외로 진심도 담겨 있었다.
어찌하여 그들이 몇 달 동안 압록강 이북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지, 무엇을 위하여 이런 고생스러움을 감수하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간혹 모르는 이가 있다면 깨우쳐줄 수 있는 학당도, 공보도 있었다. 워낙 이것저것 많이 바뀌다 보니, 요새는 그저 ‘개명된 법도’라고 통칭하는 조선국의 수많은 새 법제들로 큰 이득과 그보다도 큰 희망을 얻은 사람들이 여느 마을, 여느 저자에나 널려 있었다.
그러므로 나라를 지키고, 더 중하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법도를 지키기 위해 모두가 총을 들고 창을 들었으며, 또 삽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다른 이들도 똑같은 믿음과 생각을 지녔음을 알았기에, 옆에 있는 자가 백정의 아들이건, 아전의 아들이건, 여진 사람이건, 일본 사람이건 개의치 않고 그저 함께 싸우는 이로 여겼다.
물론 그들 자신은 저들이 이리 생각하는 것이 무슨 까닭인지 모르고, 그저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거려니 여기고 있었다. 새삼스레 자기 머릿속을 깊게 들여다보는 것은 선비라면 모를까 이들에게는 군문 안에서든 밖에서는 낯설기만 한 일이었다.
화담 선생의 초당에서 빗질하다가 갑자기 뛰쳐들어온 임꺽정을 만난 이래, 일개 종복에서 ‘나리’ 소리 듣는 자리까지 올라온 임밤도 임꺽정을 흠모하고 (저의 당수 탓에 고생하게 될 때를 제외하면) 또 조선국이 지난 이십여 년 사이 아주 좋은 나라로 일변하였노라 여기고 있었을 뿐, 거기서 더 깊게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서로 주고받는 입바른 소리는 입바른 소리로 끝나고, 신변잡기로 향하다가 거기서 그치고야 말았다.
“자, 그러면 이만 가보겠소. 당수께서 시키신 일이 있는지라.”
“아이고, 물론입죠. 조심히 가십쇼.”
“서령초 맛 잘 보았습니다, 나리!”
그렇게 임밤이 떠나자마자, 이번에는, 군령으로 밝혔던 두 각의 휴식이 끝났음을 알리는 호령이 울렸다.
“뭐야, 벌써?”
“두 각 지난 것 맞아? 너무 금방 지나가는데?”
“요즘 높으신 나리들은 다들 그 자명종인지 시계인지 하나씩 들고 다니신답니다. 아마 맞겠죠.”
“이놈아, 눈치 챙겨라.”
“에라이, 자명종인지 뭣인지, 그것 처음 만든 놈은 반드시 대가 끊길 것이야.”
먼 훗날, 아침마다 자명종 소리 들으며 깨어나 출근 준비를 할 불우한 후손들이 수없이 되뇔 공허한 원망을 털어놓으며, 하나둘씩 몸 일으켜 삽을 잡았다.
“그나마 서령초 덕분인지 몸에 원기가 도는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돌아가면 꼭 돈 많이 벌어야겠습니다그려.”
“서령초를 많이들 심게 되면 값은 떨어지기 마련이라던데요. 그게 상학(商學) 이치랍디다.”
그렇게 또 욕과 서령초 칭찬을 번갈아 하면서, 삽 들고 참호를 팠다.
그들 자신이 들어갈 열, 물러나고 나아갈 때 사람 오가는 용도로 쓸 열.
거기서 나온 흙으로는 곳곳에 토루를 쌓아올리고, 총통을 올렸다.
총통과 조총 쏘기에 걸리적거리는 나무는 베어내고, 삽 대신 톱과 도끼 든 이들이 그 나무를 엮어 목책을 만들었다.
그렇게 고생스러운 하루가 슬슬 지나가려나 보다- 다들 그리 여기면서 슬슬 저녁밥 생각을 떠올릴 무렵.
멀리 서쪽부터 요란한 징소리와 효시 소리가 들려오고, 멀리 도총부 군막 위에는 도원수 임거정 대신 지휘의 실무를 맡고 있는 중군장(中軍將) 권율이 아래의 장수들을 급히 불러모으는 깃발이 세워졌다.
“뭐지?”
“‘뭐지’는 뭔 ‘뭐지’야. 적이겠지.”
방금 전까지 삽질하던 이들 중, 가장 노련한 축에 드는 – 실제로 경술년 병란에도 한몫 거들었다고 했는데, 쉬쉬하며 떠들기로는 인민군 소속이었다고들 했다 – 평소엔 얌전하던 이가 말했다.
“그저 척후 몇몇이 와서 껄떡대는 정도로는 저 난리를 안 칠 게요. 다들 채비들 하는 게 좋겠소.”
병귀신속(兵貴神速)의 이치를 아는 것은 동방 삼국뿐이 아니었다.
조선 군사들이 대체 어떻게 벌써 일대의 산길을 다 틀어막고 있는지 척계광이 경악할 무렵, 조선 쪽에서도 매한가지로 그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그토록 빠르게 대군을 통솔해 무순까지 당도한 척계광에게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었다. 어느 쪽도 서로 물러날 수 없었고, 그중 조금 더 급한 것은 동쪽 허투알라에 갇힌 이들을 구원해야 하는 명 측이었다.
그런 사정까지는 모르는 말단 군졸들도, 눈앞에 싸움이 닥쳤다는 것을 곧 받아들이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에라이, 그래. 애초에 언제고 한두 번은 대판 싸울 줄 알고서 북변으로 왔으니.”
“두려워할 것 없다! 훈련받은 대로만 하면 능히 싸워 이길 수 있다!”
“저들이 이리도 빨리 왔으니, 그만큼 우리도 저들을 빨리 무찌르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자꾸나!”
어쩔 수 없이 먹게 되는 겁을, 짐짓 허세 담아 외침으로써 떨쳐내며 다들 아직도 흙내음 진동하는 참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비탈 아래쪽의 명 또한, 지금이 그나마 저 산등성이를 넘어 동쪽 산길로 가는 길을 뚫을 수 있는 적기임을 깨달았다. 군관들은 요양에서 달려오느라 지친 군사들의 등을 떠밀고, 악에 받힌 이들은 함성을 쥐어짜내며 비탈을 치달렸다.
어떻게든 우회하여 포병을 먼저 제압하려는 마병들이, 흙먼지 자욱이 일으키며 그나마 야트막한 쪽 찾아 좌우를 누비고, 이쪽의 여진 마병들도 질세라 괴성을 지르며 뛰쳐나갔다.
그리고 참호 속에서도 곧 느껴지는 땅의 진동. 사람의 발소리와 함성이 만들어내는 울림.
그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불 뿜으며 더 강한 진동을 일으키는 이쪽의 총통,
얼마 지나지 않아, 참호 안에서 고작 머리나 허리 내민 정도로도 비탈 아래쪽을 메우다시피 한 깃발의 숲을 볼 수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숲만 해도 그러할진대, 그 아래의 수풀, 즉 사람은 어떻겠는가.
그러나 동요할지언정 누구 하나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참호를 파고 그에 의지해 적을 상대한다는 도총부의 군략을 믿고, 그들을 이끄는 장수들을 믿으며, 어깨 나란히 하는 전우들을 믿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결코 되찾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그들 삶보다도 중한 것들을 잃게 된다는, 그들이 의주를 넘어올 무렵 한 권씩 받았던 얇은 책자『사병지남(士兵指南)』의 글귀를 믿었다.
그리고 마침내 군관들의 구령이 들려온 뒤로부터는, 확신 외에 다른 것이 머릿속에 들어올 겨를조차 없었다.
골백 번 반복한 동작으로, 조총에 탄과 화약을 재고, 화승에 불 붙은 것을 잘 확인한 뒤 화문을 열었다. ‘준적인 거발’ 구령에 맞추어, 점차 지쳐 느려지는 적진을 향해 벼락을 퍼부었다.
그들 뒤와 그 뒷열의 참호에서도 비슷하게 불벼락을 쏟아붓는 동안, 아직 한 번은 더 쏠 여력이 있다는 상관들의 판단에 따라 역시 기계와 같은 동작으로 급히 다시금 탄과 화약을 재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적이 그냥 ‘적’이 아니라 하나의 사람임을 알아볼 만한 거리까지 다가올 무렵 다시금 방아쇠를 당겼다. 일순 눈이 마주쳐, 그만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으나, 이미 지척까지 다가왔기에 탄이 빗나가는 일은 없었다.
“삽총도(揷銃刀, 총검 꽂아)!”
“삽총도!”
기어이 각오하였던, 그러나 들을 일 없기를 내심 바랐던 구령이 들려왔다.
“버티기만 하면 된다! 이미 놈들은 기세가 꺾였다!”
대정이 외치고,
“나는 살아서 돌아갈 거다!”
“좋은 세상 이제 막 열렸는데 이대로 죽을 줄 아느냐!”
병사들도 하나둘씩 악을 담아 외친다.
그리고 비탈과 참호, 곳곳의 목책을 넘으며,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나타난 명군의 가슴을 향해, 총도의 잘 벼려진 칼날을 몸의 무게 담아 내지른다.
“뚫리지 않는가...”
급히 목책을 세우고 흙을 쌓아올려 겨우 성의 꼴을 되찾은 무순에서, 척계광은 그 빈약한 목책을 다시 뒤흔들 기세로 한숨을 연신 내쉬었다.
저들 동이 군세가 그리도 빠르게 산길을 움직일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척계광은, 즉시 무순의 모든 군관을 불러모아 그간 저들에게 노획된 군량의 양을 헤아리도록 하였다.
그것을 역산하여, 얼추 얼마나 많은 적이 노획한 군량으로 치중을 갈음하며 이쪽 산길을 틀어막으러 왔을지를 셈하였다.
그리하여, 수효로써 압도한다면 그나마 해볼 만하리라는 판단 하에 지친 군사들을 비탈로 내몰았다.
“송구스럽습니다, 경략 대인.”
그 결과를 온 얼굴과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한 군관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이제는 그 누구도 동쪽 오랑캐를 깔보지 못하였다. 그들이 당한 수모를 갚아주어야 한다고 팔 걷어붙이며 나서는 자도 없었다.
여러 갈래 산길 중 그 어느 쪽에서도 명은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민병들이 몇 겹 되지 않는 띠 모양의 진을 치며 싸웠다고 하였다. 부족한 훈련을 총포의 화력으로써 메우고자 하는 것이 그 진형의 본의이니, 단련된 군사로써 우직하게 밀어붙이면 돌파를 허할 수밖에 없다 하였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나 지금이나, 척계광은 그에 동의하고 있었다. 저들의 진형과 저 원망스러운 참호를 파훼하려면, 돌진 외의 다른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조선의 군사들은 노부나가가 겪은 일본 민병과는 달랐다.
마치 저들이 원조임을 밝히려는 것처럼 훨씬 먼 거리에서 일제사를 퍼부었고, 그 다음 차례 방포할 때까지 틈이 그리 길지도 않았다. 그리고 시체를 쌓아가며 겨우 첫 열의 참호에 뛰어들었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총도라는, 단순하면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물.
여진 야인들이 저들의 집처럼 여기며 노니는 산 위에서 공방을 주고받아야 했던 마병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세 갈래 산길을 동시에 공략하며 적을 수로써 위압하려던 계책은 변방 산하의 고혼만을 수없이 남긴 채 끝났다.
“이미 유리한 산세에 의지하여 태세를 굳혔으니, 지금의 우리로서는 뚫을 수 없다. 설령 요양의 모든 화포를 긁어보아 온다 한들, 저 참호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것이다.”
허나 아무리 암울할지라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척계광이 올라 있는 요동경략이란 자리는, 자포자기를 허하지 않는 자리이기도 했으므로.
대신 이 가운데서도 어떻게든 빠져나갈 길, 그나마 최상의 방책을 찾으며, 그 선택이 가져올 목숨의 무게를 홀로 짊어질 뿐이었다.
“혁도아랍에서 물러날 것이오.”
이어지는 말에 한숨을 쉬는 이, 분개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 근심하며 얼굴 찌푸리는 이. 그들을 굳이 바라보는 대신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척계광은 말을 이었다.
“이곳 무순에서 철령을 지나 개원(開原)으로 향하는 곳, 그쪽 길목에 상간애(尙間崖, 샹얀하다)라는 길목이 있다고 들었소. 오늘 친 세 곳 산등성이가 모두 참호를 판 지 얼마 안 된 듯하였다 하였으니, 그쪽의 방비는 더욱 허술하겠지.
개원과 철령에 주둔한 군사들은 아직 싸움을 겪지 않았으니 원기가 남아 있을 것이오. 그들을 끌어모아 바로 상간애를 들이쳐야 하오. 저들은 병사 하나하나를 아끼니, 형세가 그와 같이 되면 결국 상간애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오.”
“하면, 금일 저희가 들이친 세 길목은...”
“혁도아랍의 아군이 물러날 때까지는 동이의 발목을 계속 잡고 있어야 하겠지.”
오늘과 마찬가지로, 끝없이 몰아치는 사람의 파도로써, 그리고 쌓이고 쌓이는 시체의 벽으로써.
“그리하여 상간애 쪽 산길을 통하여 빠져나올 수 있는 아군이 모두 빠져나오면, 그때는 더 이상 요새의 구실을 못 하게 된 이곳 무순에서 물러나 심양과 철령을 지킬 것이오.”
그래본들 좁디좁은 산길 하나를 겨우 뚫을 뿐이었다. 무심결에 ‘빠져나올 수 있는 아군’이라는 말을 쓴 척계광의 말에 그 누구도 이의도, 질문도 던지지 못하였다.
적이라고 가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지금껏 상대로 하여금 욕지거리 내뱉으며, 그 가계가 미천하여 차마 그 조상의 이름을 들먹이며 욕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게 만드는 수법으로써 그들을 괴롭히던 임거정이라면 가만 있는 것이야말로 더욱 수상할 것이다.
그러니 잘해본들 혁도아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군사의 수는, 그들의 퇴로를 지키기 위해 이곳 무순 일대에서 죽어나갈 수에 비하면 잘해본들 갑절이요 못하면 대동소이할 것이었다.
좌중 누구보다도 셈에 밝은 척계광은 이를 잘 알고 있었고, 다른 이들도 얼추 짐작은 하였다.
허나 혁도아랍에서 빠져나올 이들은, 이성량을 비롯한 장수들과 그들의 가병(家兵)이요,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들의 명운만을 탓해야 할 자들과 이곳에서 죽어나가야 할 자들은 그저 병졸들이었다.
척계광은 어떻게든 군을 재건하는 데 겨우 키워내고 찾아낸 인재 하나하나가 위함을 알고 있었고, 장수들이야, 그저 같은 무관 집안 사람의 목숨이 귀하다 여길 뿐이었다.
그러니 그 어떤 장수가 척계광의 궁여지책과 그 대가에 대해 감히 볼멘소리를 하리오? 침묵으로써 표하는 만장일치가 있을 뿐이었다.
하늘 아래 땅 위에 있는 모든 고생은 다 겪은 추레한 행색으로 혁도아랍을 빠져나온 이들이 겨우 요양에 돌아올 무렵.
그 요양 앞으로 백기 휘날리며 달려오는 자 여럿이 있었다.
백기 들고 달려오는 선봉 바로 뒤, 도원수의 군기 들고 오는 것은 도원수 임꺽정 본인이었다.
이 무렵 산을 두고 요양과 봉황성에서 각각 대치한 지 오래였던 양측 척후들은, 각각 수 명 정도씩은 상대의 본진 코앞까지 닿게끔 할 수 있는 길을 뚫어놓고 있었는데, 필시 저들 또한 그렇게 온 듯하였다.
“삼가 요동경략 척 대인을 뵙고자 청하오.”
이는 통변하는 자가 성 안으로 전하는 말이요, 조선말 아는 요양 군관들이 들은 임꺽정의 외침은,
“거 얼른 뛰쳐들어가서 네놈들 우두머리 척가 놈 나오라고 하여라.”
였다.
좌우지간 그렇게 척계광이 문루 위로 나오자마자 대뜸 외치기를,
“무릇 명산대천 유람을 할 때도 자신이 놀던 자리는 자신이 치우는 것이 도리이거늘, 우리가 허투알라를 깔끔히 치운 뒤 넘겨주었는데 너희는 어찌하여 사만 명이나 되는 사람을 버려두고 갔느냐?
그들은 모두 항병(降兵)이 되어, 곧 우리 조선과 여진 곳곳에 흩어져 전란이 끝날 때까지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그 명을 붙이게 될 것이다. 상세한 것은 내가 곧 던질 이 글을 참고하여라.
곧 정식으로 우리 영의정 대감이 다른 두 나라와 함께 더 상세하고 정중한 글을 보낼 것이니 그것도 받을 준비들 하고.”
그러면서 이쪽의 말은 듣지도 않고 대뜸 척계광을 향해 뭔가를 휙 던졌다. (더 놀랍게도, 그것이 정확히 척계광 바로 옆 기둥을 맞혔다.) 삼국도총부 명의로 된 서한이었다.
“자, 그러니까 네놈들 모두 잊지 마라! 여기서 암만 개 팔자가 상팔자라지만 그렇다고 개죽음까지 당해서야 쓰겠느냐? 보람찬 삶이 기다리는 조선으로 오거라!”
그제야 척계광 머릿속에, 요양의 사졸들은 고하 막론하고 조선말에 능통한 자가 많다는 것이 떠올랐다. 허둥지둥 대책을 마련하기도 전에, 임거정은 껄껄 웃으며,
“감격하는 게 지나쳐 대꾸할 말도 못 찾는 모양이로구나! 내 도원수씩이나 되어 이렇게 전령 노릇 하러 왔는데 영 대접이 초라하니 네놈들 인심을 족히 알겠다. 그러면 이만 물러갈 테니 알아서들 배웅하거라!”
그렇게 어디선가 나타나 쏜살같이 달려온 무리는 다시금 쏜살같이 사라졌다.
척계광이 급히 주변에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며, 군심(軍心) 요동치지 않도록 잘 단속하라 하는 동안, 아직도 초췌함이 가시지 않은 몰골의 이성량은 그저 사라지는 임꺽정의 뒷모습을 노려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척계광 주변의 군관들이 각각 명 받들어 급히 문루를 내려가자마자, 분통을 터뜨렸다.
“어찌하여, 어찌하여 우리가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길림오랍(기린울라) 코앞까지 당도하였다가 그대로 혁도아랍으로 밀려들어오고, 거기서 다시 기나긴 패주의 길을 거쳐와야 했던 명군의 모습이, 아직도 이성량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자신이 저 찢어죽여도 여한이 남을 오랑캐들에게 붙잡혀 있는 사이, 지휘해야 할 장수가 사라져 우왕좌왕하던 끝에 겨우 목숨 건져 혁도아랍으로 쫓겨온 이들.
그들을 기다리는 더욱 암울한 소식. 그나마 불타지 않은 군량과 마초도 곧 바닥을 드러낼 것이요, 혁도아랍에서 무순까지 가는 길은 모두 막혔다는 것.
그리고 그 절망 속에서 어떻게든, 대명의 천병이 어찌 오랑캐에게 투항하겠느냐며 애써 장수들의 마음을 바로잡고, 구원군을 기다리며 버티고자 발버둥쳤던 자신.
끝내 상간애 길목을 뚫은 ‘구원군’이 전해온, 무소식보다는 나으나 그렇다고 차마 환호할 수도 없는 참담한 소식.
저와 함께 온 파주 군사들을 버려두고 가병만 거느리고 갈 수는 없다며, 어떤 일이 있어도 이적(夷狄)에게 투항하지 아니하는 것이 대명 천장(天將)의 도리라면 저는 대명 천장을 아니 하겠다고 대놓고 반기를 들던 양응룡.
그리고 그 모든 길에 항상 그들과 함께하였던, 지금도 많은 이들의 귓가를 점령하고 있는, 조선의 화포 소리. 아무리 깨부수고 노획하여도 다시 나타나, 모든 산과 풀숲에 숨어 있는 듯 느닷없는 불벼락을 퍼붓던 그 화포.
“화포,... 결국 화포가 부족하여 당한 수모입니다.
무순이 무너질 때부터, 살이호와 혁도아랍의 함정을 제대로 꿰뚫지 못하였을 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거기서 다시 지금까지. 모두 화포 때문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결국 오늘에 이르고야 만 것입니다!”
번듯한 싸움 한 번도 겪지 않은 그들이, 어찌하여 그토록 굴욕과 굴욕 속에서 패잔병 신세로 도망쳐야 했다는 말인가. 원통함에 어느새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찌하여 우리에게는 그런 화포가 없다는 말입니까?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병기 중의 으뜸인 것을...”
대명이라고 화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쪽은 사람이 더 많고, 저쪽은 화포보다 사람이 더 귀할 뿐.
“이보게. 이번의 패전이 비록 뼈아프기는 하지만, 결국 한 번의 패전일 뿐일세. 천진에서의 패배도 이미 더 큰 승리를 위한 기반으로 삼은 우리일세.
대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고 또 오랑캐의 포로 신세가 된 것은, 비단 이 사람이나 자네뿐 아니라 그 누구도 가슴이 찢어질 만한 일이지. 허나 엄밀히 따지면, 아직 우리 대명의 정병은 백구십만 넘게 남아 있네. 당장 지금도 직례에서는, 우리 뒤로 합세할 이십만 대군을 모으고 있지.
화포가 아무리 정예하다 한들, 결코 병기 중의 으뜸은 될 수 없네. 내각수보가 말하는 것처럼, 천하에서 가장 문물과 인구가 번성한 우리 중화 아닌가. 그것, 사람의 피, 그리고 금은과 바꾸어 얻는 철. 이 철혈(鐵血)이야말로 만병 가운데의 으뜸이 아니겠는가?”
흔들리는 이성량을 다독이며, 척계광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마음에 있는 소리는 무엇인가?
이번 패전의 원인을 이미 궁리하고 또 궁리하며, 자나깨나 고심하던 척계광이었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바탕으로, 가장 이치에 닿고 가장 상책이라 할 만한 계책만을 택하였다.’
니탕개가 죽은 이상, 여진 야인들은 사분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도원수 임거정이 패전과 패전을 거듭하며, 수없이 많은 총통뿐 아니라 대읍 혁도아랍까지 내주었으니, 설령 임거정 대신 곽자의나 서달(徐達)이었다 한들 그런 패전을 적을 속이기 위한 고육지책이라 하였다면 즉시 파면을 당하였을 것이었다.
승리를 확신하며 달려왔으나, 막 전장에 닿자마자 수없이 많은 천병을 맞닥뜨렸으니, 이미 지친 조선군은 전의를 잃고 달아나야 했을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뒤집고, 번번이 우리의 뒤통수를 친 것은 무엇인가?’
척계광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믿음. 그것이야말로 만병지왕. 모든 병기 중의 으뜸이다.’
나라에 대한 믿음. 그것이 있으므로 비로소 나라에서 뽑은 장수를 믿는다. 나라에서 뽑은 장수를 믿으므로 비로소 그 군령을 믿고 따른다.
그 믿음은 어찌 얻은 것인가? 저들이 그리도 자랑하는 ‘개명된 법도’로써. 저들의 손으로 임금 한 사람을 제한 모든 것을 스스로 뽑고 정한다는 그 헛된 – 정말 헛된 것이기는 한가? - 생각을 기틀삼아.
그렇다면 대체 그 믿음은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는가? 척계광이 아는 그 어떤 병서(兵書)에도 나와있지 않았다.
물론 세상의 그 어떤 병기도 그 자체로 무적일 수는 없다. 척계광이 알기로는 그러하였다.
저 믿음이라는 것도, 그러므로 반드시 파훼할 방도가 있을 것이다. 이미 척계광의 머릿속 한편은 그것을 찾기 위한 궁리로 분주하였다.
허나 궁리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어떤 방도를 찾던 그 대가는 헐하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직감 또한 더욱 긴 그림자가 되어 그의 머릿속에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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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꺽정이가 유대인 상인 하비비의 창고를 털 때 뜯어왔던 담배가 다시 등장했습니다. 작중 언급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2세 이야기는 원 역사에서도 실제로 1559년 있었던 일화입니다. 당시 담배를 구해 프랑스로 보낸 주포르투갈 대사의 이름은 장 니코(Jean Nicot)였는데, 여기서 담배의 학명 Nicotiana tabacum 및 화학물질 니코틴의 이름이 유래하게 되지요. 이 사건 이후 한동안 프랑스 일대에서 담배가 ‘왕비의 약초’라 불릴 만큼 이 담배 진상은 서유럽에 담배가 널리 퍼지는 데 큰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6세기 말이 되면 코담배(snuff)와 더불어 파이프 담배가 널리 퍼지게 되지요.
1차대전 당시 참호전의 비극이 너무나 강렬하여, 참호라고 하면 언뜻 근대의 산물이라 여기기 쉽지만, 사실 참호는 이미 고대부터 종종 유용하게 쓰였던 야전축성의 일종이었습니다. 적의 기동을 제한하고 아군 방어자에게 이점을 주는 데 있어 가성비가 좋았기 때문이지요. 이후 화기가 발달하고 총병이 사실상 보병과 거의 동의어 수준까지 올라오면서, 18세기 초엽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무렵에는 조금 더 익숙한 형태의 참호선이 등장하게 됩니다 (바이센부르크 선Lines of Weissenburg, ‘더는 못 나아간다’ 선Lines of Ne Plus Ultra – 실제로는 잘만 뚫렸습니다- 등등).
한편, 원 역사의 사르후 전투에도 명은 참호를 통해 후금의 기동력을 봉쇄하는 전술을 선보인 바 있습니다. 전역 전 과정에 걸쳐 처참한 역량을 보인 명 장수들 중 그나마 한 사람 몫을 한 개원총병 마림(馬林)은, 작중 등장한 기린하다보다 조금 북쪽에 있는 샹얀하다(상간애尙間崖) 능선을 점령하고 조총수 1열, 기병들이 오갈 수 있는 교통호 2열, 포병 3열로 이루어진 견고한 참호선을 구축했지요. 정면공격으로는 도저히 이를 뚫을 수 없음을 깨달은 누르하치는 참호선을 우회해 더 높은 능선에서 내리치는 작전을 채택했고, 이를 예견한 마림은 미리 군사를 보내 주변 고지를 점령하려 노력했으나 다른 명군 장수들의 처절한 ‘트롤링’으로 말미암아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