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임금의 존귀함 (4)
그렇게 한양이 이십 년 사이 세 번째로 당한 병란도 끝났다.
지휘부 전체가 먼지로 화하면서 에스파냐군은 그대로 붕괴했고, 운 좋게 일본 무사들 근처에 있던 이들이 겨우 몇몇 장교들의 지휘를 받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처음 마포에 닿았을 때보다 사람이 크게 줄어 있었기에, 경기와 충청 일대에서 급히 상경한 마병들이 마포를 덮치기 직전에 겨우 노부나가는 (그나마 추스를 수 있던) 군세를 모두 물릴 수 있었다.
“급보를 받자마자 바로 출진하여 하루 만에 도성에 닿았으니 그것만으로도 포상할 만한 일이지요. 한창 왜구가 들끓던 시절 우리 천주 주변을 지키던 관병들도 그만큼은 못 했을 겝니다.”
황태자를 비롯하여, 병해와 꺽정이 처갓집 사람들 등과 함께 피신을 갔다가 어제 저녁에 돌아온 이탁오가, 그새를 못참고 논공행상 이야기를 꺼냈다.
“애초에 그러라고 있는 게 관군이잖소? 전공으로 따지면 우리 흑의군이랑 도성 오군영만 할까. 그리고 그 다음으로 경기수영도 제법 큰 승전보를 가져왔고.
그나저나 이놈들은 왜 이리 묵묵부답인지. 거 한 번 독촉이나 더 해보쇼.”
두 사람이 이곳, 전화가 한바탕 휩쓸고 간 한양의 어느 골목길에서 한담을 나누고 있는 것은, 바로 급조한 방벽 너머로부터 답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꺽정이로부터 재촉하는 말을 들은 이탁오가 저의 그 엉터리지만 용케 소통은 되는 에스파냐어로 골목 향해 외쳤다.
“여봐라! 답은 아직 멀었느냐! 나야 상관은 없지만, 여기 코우지오니스 경께서는 아주 성질이 급하시단다! 네놈들 우두머리에게 한 것처럼 이 골목째로 날려버리려 하시는 것을 이 몸, 타고스 박사께서 애써 막고 있으니 알아서들 해라!”
제때 후퇴하지 못하고 한양에 버려진 에스파냐군 중 적잖은 수는 수십에서 수백쯤 되는 무리로 뭉쳐, 그들의 발목을 잡던 골목의 민병들을 내쫓고 저들이 그 방벽 안에 들어가 버티고 있었다. 그런 이들을 일일이 찾아가, 좋은 말로 할 때 투항하라고 권유하는 것이 지금 꺽정이와 이탁오가 하고 있는 일이었다.
일본에서의 싸움이 끝난 이후 그 땅에 머물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용병들이 죄다 마르틴 데 고이티에게 합류하는 바람에, 도성 안의 역관들 대부분은 그들과 도총부 사이의 연락을 맡느라 북변에 나가 있었다. 이렇게 이탁오가 손수 나선 것도 이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 너머에서 절절하게 호소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박사님, 박사님! 부디 코우지오니스 경을 말려 주십시오! 십오 분, 딱 십오 분만 더 주시면 아직도 이교도에게 항복은 불가하니 어쩌니 하는 저희 전우들을 모조리 설득하겠습니다! ”
“오 분 주겠다! 나도 그 이상은 막을 자신이 없다!”
벌써 꺽정이 이름으로 위협하여 투항시킨 이들의 수효가 꽤 많았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골목 곳곳을 돌며 항복을 권유하고 있는 예수회 사람들이 투항시킨 이들을 다 합쳐도 그에 미치지는 못할 터였다.
“흐흐, 확실히 당수 이름을 팔고 다니니 효험이 좋습니다그려.”
에스파냐 말을 들어도 알아듣지는 못하는 꺽정이는, 어지간히 잘 교섭을 했겠거려니 믿으며 이탁오 말에 그저 어깨 으쓱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아까 하던 이야기 마저 하자면, 경기수영이 승전을 했다는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식 못 들었소? 유극량 그이가 어떻게 아득바득 전선을 다시 모아서 어제 아침에 교동도를 들이쳤답디다.”
중과부적으로 경기수영의 전선 대부분을 잃고 후퇴한 경기수사 유극량은, 급히 충청수영과 황해도 곳곳의 수군진에 연락을 넣어 작고 날랜 배들을 끌어모았다.
그러고는 다음날 아침해가 밝자마자 교동도 앞을 지키던 에스파냐 갈레온 함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방의 해군 상대로는 나름대로 전적이 좋았던 에스파냐 함대는, 곧 한양에서 빠져나올 시나(중국) 수송함대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적을 미리 치운다는 그럴듯한 명분도 있겠다, 기고만장하여 저 작은 배들을 으깨주려 나섰다.
동창에서 붙여준 길잡이들은 그들을 만류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들 편이 되어줄 노부나가는 한양에 있었다.
그리하여 기세 좋게 갈레온이 나타나자마자 조선 수군은 또 한 번 나 살려라 도망쳤다. 도저히 유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만큼 절박한 그 모양새에, 에스파냐 함대는 재차 추격을 시작했다.
“노부나가 놈이 어제 대낮께 물러나지 않았소? 그때가 썰물 때라 그리 정했던 게지. 헌데 썰물이라는 게 강에서 바다로 빠져나갈 때는 좋아도 바닷가에서 큰 배 몰고 싸움박질하기에는 영 무엇한 때 아니겠소? 그걸 노린 게지.”
“아, 인천 앞바다뿐 아니라 그쪽 바다도 어지간히 뻘밭이지요, 아닌 게 아니라.”
마치 남에게 승리를 쥐여주기 위해 태어난 듯한 뛰어난 소질의 원균을 선봉장으로 내세워 감쪽같은 유인을 성공시킨 유극량의 수군은, 그렇게 뻘밭에 좌초한 갈레온을 좌우에서 두들기며 전날의 설욕을 해냈다.
그러고서는 조강(祖江, 한강과 임진강이 합쳐진 강) 쪽에서 우르르 빠져나오는 배들이 보이자마자 옹진 쪽으로 물러났으니, 자신이 잠시 한양을 다녀온 사이 절반으로 줄어든 갈레온을 보게 된 노부나가야 속이 터지든 말든 알 바가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만한 승전이면 족히 과(過)를 덮고도 남을 큰 공이라 할 만하군요.
아, 맞다. 공이 과를 덮는다고 하니까 떠오르는 건데, 당수야말로 그새 허물될 법한 일을 아주 거하게 벌이지 않았습니까? 그거 수습은 어떻게 할 심산이십니까?”
“그게 무슨 소리요?”
“벌써 저자에서는 소문이 뜨르르합디다. 코쟁이 오랑캐들이 종묘를 범하니 선대왕의 영령이 노하여 불벼락을 내렸다고.”
하다못해 동리 초입의 장승을 건드려도 동티를 입기 마련인데, 지엄한 종사(宗社)를 건드린다면 어떤 살을 맞아도 이상치 않았다.
암만 요즘 사람들이 허황된 것은 잘 믿지 않고, 특히 그 옛날 광통교 위로 병해대사가 날아다니던 것을 보았던 한양 토박이들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종묘쯤 되면 뭔가 신령스러움이 있으리라 여기곤 했다.
더구나 임금이 권신인지 총신인지 애매한 임거정과 작당하여 종묘를 통채 날려먹었다는 것보다는, 무도한 적도들이 획죄어천(獲罪於天)하여 천벌을 받았다는 쪽이 듣기에도, 설명하기에도 더 편했으므로, 그날의 진상을 아는 사람들조차 밖에서는 그냥 그렇게들 말하곤 했다.
임금께서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 그 임금된 도리를 다하시는 모습에 선비라면 감명을 아니 받을 수 없었다. 허나 그 백성을 위하는 뜻으로 종묘를 날려버렸으니, 그 잘잘못을 따지는 것 자체가 실로 심력(心力)을 갉아먹는 짓. 가뜩이나 적이 벌인 난행과 방화의 뒷수습으로도 바쁜 판이었다.
어차피 사관은 창덕궁 후원에서 보고 들은 바를 다 적었으니, 후대에 실록을 편찬할 사람들이나 골머리 앓으면 될 일이었다.
“개중에 좀 눈물 많은 사람들은, 상감께옵서 백성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숭례문의 그 일’을 통해 하늘에 사무치니 열성조 선대왕들도 감응하신 것 아니겠느냐며 눈시울 붉히곤 하던데, 소생은 딱 듣자마자 알아차렸지요. 보나마나 또 동방의 우환 코우지오니스 선생이 한탕 하신 것이라고.”
“우리 임금님 말씀하시기를, 임금이라는 자리는 책임을 진다고 하였소. 그러니까 종묘 날려먹은 것 두고 누굴 탓하고 싶으면 우리 임금님한테 가서 탓할 일이오.”
“예, 예, 그렇겠지요.”
꺽정이는 여러모로 억울하였으나, 지금껏 행실이 행실이다 보니 어찌 변명할 도리를 찾지 못하였다. 설령 그 입 안에 소진(蘇秦)의 세 치 혀가 들어있다 한들 별반 다를 바는 없을 것이었다.
마침 그때, 저쪽 골목에서 우당탕 하며 방벽을 넘는 소리가 나더니, 곧 일단의 에스파냐 사람들이 백기 흔들며 나왔다.
그들의 무기를 모조리 회수하고, 그 우두머리를 불러다 아랫사람들 명단 작성케 하고, 개중 꺽정이 저를 고깝게 쳐다보는 놈은 뒤통수도 살포시 한 대 갈겨주고, 정말 숨 넘어갈 것 같은 놈들은 이따 예수회 신부 올 때 그 무슨 성사인지 볼 수 있도록 편하게 마저 누워들 있으라 하고, 그렇게 멀쩡한 놈과 아니 멀쩡한 놈을 합하여 한 이백 명쯤 되는 제법 큰 무리를 모두 거두었다.
극히 피로해 보이는 예수회의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신부가 나타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아, 마침 잘 찾아오셨습니다. 한양 서부에서는 이곳이 끝이라고 하더군요”
발리냐노와 달리 여전히 쌩쌩한 이탁오가 – 임꺽정이 뒤치닥거리 한 것이 어디 하루이틀 일이던가 – 반갑게 맞이하였다.
“어디 보자... 그러면 여기가 정말 끝이로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예, 수고하십시오.”
덕담 주고받으며 뒤처리를 은근슬쩍 떠넘기고 꺽정이와 함께 자리를 뜨는 이탁오였다.
“이제 어디로 갈깝쇼?”
“사업당 터로 가서 서림이나 놀리고 올까.”
사업당이 홀라당 불타버렸으니, 그 안에서 미처 빼내지 못한 서류는 모조리 잿더미가 되었든, 적의 손에 넘어가든 했을 터였다. 물론 이 무렵이면 종잇값도 싸졌겠다, 중요한 문서는 죄다 사본을 만들어 청석골의 텅 빈 산채 자리에 보관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동안 사업당 사람들은 서림을 포함해 하루 12시를 24시처럼 써야 할 것이었다.
“지금 갔다가는 서 별감이 정말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지도 모릅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내가 흘리는 눈물 구경을 정 하고 싶으시다면야.”
“그건 또 그렇네. 하면 나는 집에나 가서 낮술이나 하려오. 안사람이랑 아이들은 장모님이랑 같이 돌아오기로 했으니, 한동안 우리 집은 빈집이걸랑.”
“그럼 소생도 함께 가겠습니다. 한양 머물 때 유숙하던 집이 불타버리기도 했거니와, 이 시국에 독기 오른 사람한테 언제 붙잡혀서 일을 떠맡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요,”
헌데 그 누가 알았으랴. 그 독기 오른 서림이 꺽정이네 옆집에 있을 줄을.
서림과 오랫동안 함께 일하며 – 즉 갈구면서 – 그 사정을 잘 알던 신씨 부인이, 자신은 기왕 피난 간 길에 한양이 정리되는 동안 개성에 머물다 올 터이니 자기네 집을 임시로 쓰라고 흔쾌히 제의하였던 것이다.
“흐흐, 때마침 잘 오셨습니다, 탁오 선생.”
반쯤 죽은 눈으로 마루 곳곳에 임시변통으로 만든 서안 갖다 놓고 주판 만지작대는 사업당 사람들 사이에서 벌떡 일어나며 서림이 그들을 맞이했다.
“소생은 그 말에 반대하오. 잘못 온 것 같소.”
“아니,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정리해야 할 문서가 산더미인데요? 선생께서 맡으신 일과 연관된 만큼은 선생 손으로 처리하는 것이 서로 편하지 않겠습니까.”
서림이 ‘선생께서 맡으신 일’을 들먹이니, 이탁오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갑작스레 닥친 태산만한 일더미에 넋이 나간 듯하던 서림도, 제법 멀쩡하게 표정을 고치며 말을 이었다.
“모주님께서 오늘 아침 직접 찾아오셔서 청하신 일입니다.
난리통에 우리 쪽 사람들이 무사히 챙겨 나온 문서를 제외한 모든 것은 다 적의 손에 들어갔다고 가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문서가 저쪽에 넘어갔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대계에 얼마나 지장이 올 수 있을지를 헤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
꺽정이가 헤벌쭉 웃으며 – 당수라는 자리가 이 얼마나 좋은가 체감하면서 – 그 등을 떠밀었다.
“암, 사형께서 시키신 일이라면 마땅히 온 힘을 다해서 해야지. 자, 얼른 가서 일하시오. 원래 낮술 술안주로는 남이 일하는 것 구경을 제일로 치는 법이니까.”
어디 멀리 가기라도 하면 그나마 덜 밉기라도 하지, 바로 옆집 살면서 저런 소리를 하니 이탁오로서는 여간 얄미운 것이 아니었다.
허나 이 복잡기괴한 세상에도 아직 의로움이 남아있던 것일까? 이탁오 버려두고 혼자 낮술 마시려던 꺽정이는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지함과 이이 두 사람이 느닷없이 꺽정이네 사랑방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네 처갓집은 지금 불우한 사업당 사람들이 마루 한 뼘 남기지 않고 일터로 쓰고 있으니, 우리네 모임은 터가 남아도는 여기서 하는 게 마땅하지 않겠느냐.”
“꽤 중대한 일입니다. 곧 서 별감과 탁오 선생도 올 테니, 그 술상은 치우시는 게 좋겠습니다.”
“에라이.”
만약 이 자리에 이이 대신 셀림이 있었더라면 ‘보기 걸리적거리는 술을 먹어서 치워버리자’라는 현명한 발상을 꺼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꺽정이 혼자다 보니 고장난명이라, 투덜거리면서 건넌방에 술상을 치워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뭣이 그리 중하오?”
어째 꺽정이 저를 노려보는 이탁오와 그냥 만사가 피곤해 보이는 서림이 들어오자마자 꺽정이가 대뜸 물었다.
“온갖 문서와 서책이 불타고 도둑맞은 것은 우리 사업당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수. 어제 늦은 밤에야 알게 된 바이지만, 육조 궐외각사와 여타 관아들 태반이 당했습니다.”
사업당을 뒤진 뒤 모두 불태우라는 명을 받고 한양 저자를 뒤지던 니와 나가히데의 군사들이, 공훈에 눈이 멀어 언뜻 사업당과 비슷하게 보이는 육조 관아까지 같은 꼴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나마 서림의 지휘 하에 챙길 수 있는 문서는 챙기고 못 챙길 것은 힘닿는 데까지 불사르고 도망친 사업당에 비해, 육조 관아는 그 우두머리들이 죄다 창덕궁 편전에 모여 있었기에 더욱 사정이 좋지 못했다.
“헌데 그놈들이 암만 사납고 날래다지만, 그래본들 대개는 까막눈이나 겨우 면한 신세 아니겠소? 종이쪽 백날 훔쳐가봤자 로마의 교종 큰스님(교황) 앞에 불경 가져다드리는 격이지.”
“놈들이야 그렇겠지. 허나 그들 위에 있는 장거정은 다르지 않으냐. 아마 며칠 안으로, 꾸밈 없는 나라의 속사정이 고스란히 문연각 학사들 앞에 펼쳐져 드러날 것이다.”
“아이고야.”
명나라 강남 해안을 오가는 잠상들을 통해 강남 향신들과 연통 주고받는 일을 이번 전란 내내 맡고 있던 이탁오도 한 마디 하였다..
“그사이 대충 흩어본 바로는, 우리 쪽의 대계는 다행히 그렇게 많이 노출되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그렇지만 장거정 같은 이가 작정하고 파헤치려 한다면, 타다 남은 종이와 낙서투성이 초본(草本)만으로도 우리 대계의 얼개쯤은 파악할 수 있겠던데요.”
“조선국 속사정이 훤히 까발려지고 우리네 계책 알아차릴 단서까지 넘어갔다면... 이거 골치깨나 아프겠는데.”
그때, 가만 듣고 있던 이지함 머릿속을 뭔가가 스쳤다.
“잠깐, 생각해보니 우리 조선국 사정만 드러난 것 아니더냐?”
“뭐, 그야 그렇지. 불탄 건 우리 한양이지 저기 일본국 도성이 아니잖소. 애초에 그 나라 허수아비 조정은 우리네 벼슬아치들처럼 상시 뭔가 깨작깨작하는 그런 버릇도 없고.”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꺽정이와 달리, 이이는 이지함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아, 그렇지요! 스승님 말씀이 맞습니다. 지금껏 무엇이 드러났을지를 추정하는 데만 골몰하여 이 제자도 대국(大局)을 잠시 잊었습니다.”
이탁오도 한 발 늦게 손뼉을 쳤다.
“흐흐, 그렇지요. 역시 당수보다 한 수 더 뜨는 우리 모주님답습니다. 때로는 아예 모르는 것보다 애매하게 절반만 아는 것이 더욱 해로울 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아니, 잠깐. 이 사람이 당수보다 한 수 더 뜬다니...”
사형 말을 끊고 꺽정이가 먼저 물었다.
“임자들만 아는 소리는 그만 하고, 좀 알아듣게 설명들 해 보쇼. 그러니까 우리에게 유리하게 되었다는 게요, 아니면 불리하게 되었다는 게요?”
“굳이 따진다면 둘 다입니다. 이번 전란을 우리의 승리로 이끌 계책, 그것을 실행하는 데는 더 유리해졌지만, 대신 시일이 조금 더 촉박해졌다고 하는 게 맞겠지요...”
니와 나가히데의 무사들이 사업당과 육조 일대를 뒤져가며 챙겨낸 문서들은, 민주당 중진들이 예상한 것과 달리 대개는 별 내용 없는 자질구레한 것들이었다.
허나 장거정이 즉시 육부 아문에서 실무 맡는 자들을 모두 천진으로 보내, 그 사이에서 나라의 기무(機務)와 연관된 문건을 골라내게 한 뒤 자신이 직접 선별된 문건들을 살폈으므로, 민주당 중진들이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늘이 아직 우리 대명을 버리지 않은 것이오. 어찌 천우신조가 아니라 할까.”
조선에서 노략질한 문서를 샅샅이 흩느라 숙식조차 잊었던 탓에 퀭한 눈을 한 장거정은, 저의 여전히 황량한 북경 저택에 사람들이 모이자마자 이렇게 운을 떼었다.
“수보 대인의 밝은 뜻을 듣고자 합니다.”
한양이 불탔다는 비보를 받고 급히 철군하는 조선군의 뒤를 치고자 하였다가, 도리어 그 계획이 어째서인지 누설되어 또 한 번 크게 패배한 척계광이 물었다.
밖으로야 이번 한양 급습을 일대의 대첩으로, 또 그 싸움 이끈 일본 장수 직전신장을 신산(神算)의 명장으로 포장하여 알리고 있었으나,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그 실상을 알고 있었다.
조선은 그들 생각보다 견고하였고, 이번에 올린 전공이란 조선 수군을 상대로 영 타산이 맞지 않는 싸움을 벌인 것, 그리고 한양의 절반 조금 안 되는 곳에 불을 지른 것 정도에 불과하였다.
“요동에서도 연달아 패배하며 요양을 겨우 지키고 있고, 조선 급습도 뜻대로 되지 않았으며, 에스파냐 군사는 수륙(水陸) 공히 그 수효가 절반 이하로 줄었습니다. 그것을 만회할 만한 수가 있는지요?”
노부나가 또한 날 것 그대로의 질문을 던졌다.
“물론이오. 그대의 군세가 확보한 문서들은 그간 스러진 모든 이들의 목숨값을 하고도 남는다 감히 말할 수 있겠소.
그대가 짚은 것처럼, 이제 수군이 다시 정비되거나 요동의 적세가 꺾이기 전까지는 우리가 승기를 잡기란 요원하게 되었소. 허나 요원하다는 것은, 곧 멀리 있다는 뜻이지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니오. 힘껏 달려 그 승기를 붙잡으면 그만이지.”
“말장난으로 끝내려는 것은 아니시리라 믿소.”
무엄한 말투에 뼛속까지 중화의 사람인 조정길과 풍보는 흠칫하였으나, 장거정은 개의치 않고 단호하게 답했다.
“이 사람의 계산에 따르면, 동이의 병비(兵備)는 삼 년 안으로 한계에 봉착할 것이오. 제대로 된 화포와 전선을 만드는 곳은 삼국 중 조선 하나뿐이요, 그 조선의 물력이 어디까지인지를 이번에 알게 된 덕에 이렇게 결론을 지을 수 있었소이다.
이 사람이 묻고자 하는 바는 이렇소. 척 공, 오다 공, 저 삼 년을 일 년 반으로 줄일 수 있겠소?”
불가하다는 말이 나오기도 전, 장거정이 단서를 붙였다.
“적이 요양 앞까지 당도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산해관 동쪽에 우리 대명의 장졸이 지키는 성이 칠십여 곳이요, 크고 작은 진보까지 모두 합하면 족히 백이십은 될 터.
우리 병사 하나가 죽을 때 저들도 하나가 죽고, 우리가 군량 한 말을 쓸 때 저들 또한 한 말을 쓰도록 만들 수만 있다면, 그 백이십 개 진보를 닷새에 하나 꼴로 넘겨주어도 무방하오. 그렇게 해도 저들이 산해관 앞까지 당도하려면 육백 일이 걸릴 테니.”
그 옛날 상앙이 말한 것처럼, 결국 전쟁이란 내 힘이 다하기 전 적이 먼저 다하도록 만들면 그만이었다.
척계광과 노부나가 두 사람 사이에 눈빛이 여러 차례 오가고, 약조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산해관 앞까지 물러나면 물러날수록, 적은 점점 지칠 수밖에 없을 것이오. 그리고 그사이 우리 수군은 완벽히 정비되어, 이번에 새로이 알게 된 조선의 허점 곳곳을 칠 수 있을 테고.”
조선 수군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 하지만, 금번 급습에서 드러난 것처럼 그들의 전선 또한 무적은 아니었고, 무한하지도 않았다. 동래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전선을 끊임없이 보내면, 결국 어떤 시점에는 저들의 서쪽 해안이 텅 비게 될 수밖에 없었다.
어디 그뿐이랴? 요동에서 수만 명군을 타지의 고혼으로 만들어버린 그 매서운 화포 또한, 결국에는 국용(國用, 국가재정)으로써 만들고 사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천조 대명의 정군을 압도하기 위한 수용(需用, 비용)이 가벼울 리 없었다..
그리하여 금방 산해관을 넘을 수 있을 줄 알았던 군대는 요서에서 발목이 잡히고, 금방 돌아올 줄 알았던 아들들은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그 아비와 형제까지 끌려가며, 금방 내려갈 줄 알았던 세금은 외려 천정부지로 치솟는다면, 소위 공론을 중시하며 이를 개명되었다 우기는 조선 또한 흔들릴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제 이처럼 확고한 증좌가 있으니, 당장 진보와 성채 몇 곳을 내주는 것이야말로 더 빠른 승전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황상께도 부끄럼 없이 아뢸 수 있게 되었소.”
“헌데 하나 묻겠습니다. 장 공 그대를 업신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장 공이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을 조선의 이지함이나 이순신 같은 자들이 떠올리지 못했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필시 뭔가 대책을 꾸며두었을 텐데.”
“그 말씀대로요. 안타깝게도 그 모략의 실체는 알 수 없으나... 저들의 소굴에서 가져온 문서에는 이를 ‘망진자호의 계(亡秦者胡之計)’라 부르더군. 이는 보나마나 우리 중원 안에서 역도들을 부추기려는 계책일 게요. 그 옛날 양현감(楊玄感)의 일을 저들이라고 모르지 않을 테니.”
장거정의 자신 넘치던 목소리가 이쯤에서 잠시 흔들렸다. 무언가 다 알아내지 못한 구석이 남아, 석연치 못한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허나 천생 무장인 척계광은 물론이요 훨씬 기민한 노부나가조차 낌새를 알아채기도 전 금방 목소리는 평정을 되찾았다.
“허나 이는 여기, 풍 태감과 이 사람이 족히 막아낼 수 있는 일이오. 동창의 손이 뻗치지 않는 곳은 중원 안에 없고, 충용스러운 백성들이 뭉친 홍병위 또한 나라의 부름을 백에 하나라도 거절하지 않으니.”
장거정이 황제에게 동이를 진압할 필승의 계책을 상주하여 윤허를 받고, 요동으로 돌아간 척계광은 어찌하면 자신에게 내려온 조정의 명을 이 땅 위에 구현할지 오직 그것에만 천착할 무렵.
막 한양으로 돌아온 황태자 주익균은 여전히 복구에 바쁜 한양 저자로 근시 몇몇만 데리고 빠져나와 임거정의 집으로 향했다.
당당히 문 열고 나타나 말하기를,
‘이 몸도 조선왕 전하가 행하였다는 그 도리를 배우기를 원한다. 그대가 서계와는 오래 알고 지낸 사이요, 이이에게는 인척이자 윗사람이 된다 들었으니, 그대가 두 사람에게 일러 전한다면 필시 그 뜻대로 이루어질 터.’
하였으니, 통통한 아이가 딴에는 무게 잡으며 엄숙히 – 꺽정이는 못 알아듣는 중국 말로 – 명하는 것이 퍽 귀여웠다.
그러나 황태자는 나름 진지하였다. 비록 조선말은 모른다지만, 이탁오를 따라다니며 이번 한양 싸움의 전말과 그 전까지 조선의 정세에 대해 많은 것을 듣고 또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어린 눈으로도, 아니, 어쩌면 어린 눈이기에 더욱 또렷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조선 사람들이 그들 임금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 눈빛이 어떠한지를. 그리고 지금껏 그가 북경에서 보았던 궁인과 환관들의 눈빛과 무엇이 다른지를.
배움이 짧아 그 차이를 능히 말로 풀어낼 수는 없었으나, 구차한 말에 구애받지 않았기에 둘 중 무엇을 더 원하는지를 두고 스스로 속일 필요도 없었다.
‘나 또한, 사람들이 나를 그런 눈으로 보아주기를 원한다. 존귀한 몸이라고 말로만 떠받든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냐.’
그리하여 글공부 아니 시키겠다는 약조를 배신했다고 노발대발 날뛰던 황태자가 순순히 이이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대명의 황태자가 주상께서 국난을 당하여 드러내신 고명한 도덕에 감명받아, 장차 조선의 개명된 법도를 배우고 이를 훗날 중원에 펼치고자 함을 밝히니, 이는 그 법도를 민주당의 막무가내 행보 탓에 울며 겨자먹기로 따르다가 어느새 저의 온 마음으로 지키게 된 사림 중신들에게도 실로 감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율곡이 태자를 가르치는 방도란, 대개 자신이 저의 스승 이지함과 청석골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것을 저보다 지재가 부족한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 – 본디 저의 아들을 위한 것이었다 - 변용한 것이었다.
‘경서의 내용은 일 년 뒤든 십 년 뒤든 변하지 않으나 어린아이의 기질만은 쉽사리 변하므로,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보다 호학(好學)하는 기질 자체를 일깨우는 것이 가장 중하다.’
하였으니, 경서의 장구를 가르치고 또 외우도록 하는 것과는 억만 리쯤 동떨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곧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튀고야 말았는데, 세자시강원 사람들이 율곡의 별난 교수법을 두고 떠드는 것을 곁다리로 들은 세자가, 왜 대국의 황태자는 저리 가르침을 받는데 저는 그저 경서를 외우고 또 외울 뿐이냐고 따져묻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세자시강원 신료들의 차자(箚子, 약식 상소)를 가장한 하소연을 접한 임금은,
‘임금의 경연부터 촌부(村夫)의 독학까지, 학문을 익히는 도리가 어찌 둘일 수 있겠느냐.’
하였다. 세자에게 준엄한 가르침을 내리는 뜻인가, 일순 기대하던 세자시강원의 신료들은, 저 하교의 진의가 바로 자신의 경연마저 편하게 뜯어고치려는 데 있음을 깨닫고 더 큰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나마 변함없이 이어져오던 몇 안 되는 궁중의 법도 중 하나였던 경연이 혁파되기에 이르렀다.
신료들은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그릇되었던 것인지,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하여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수산과 율곡이라는 기묘한 사제(師弟)가 이 땅에 나타나게 된 까닭은 죄다 소윤의 위군자(僞君子)들이 선비를 헐뜯고 모함한 데 있지 않겠느냐 하면서 죽은 지 오래인 윤원형을 탓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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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가 정확히 어떤 계기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항복의 상징으로 통용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적어도 동양에서는 한대, 서양에서는 로마 공화정 시기부터 백기가 쓰였고, 그것이 그대로 관습이자 후대의 전시국제법으로 굳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장거정이 언급하는 양현감은 수나라 건국공신 양소의 아들로, 아버지가 수양제의 시기와 박대를 받던 끝에 병사하자 원한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후 수양제가 살수대첩의 대패를 겪은 뒤에도 또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치려 하자 낙양에서 반란을 일으키지요. 양현감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수양제의 폭정에 질린 민심의 호응을 받아 상당한 세력을 이끌게 되었지만, 상대를 잘못 만나 고전했을 뿐 결코 약군은 아니었던 수의 군사력은 만만치 않았고, 요동성을 함락 직전까지 몰아넣은 수양제가 빠르게 철군을 결정하기까지 하면서 결국 양현감의 반란은 2개월만에 진압됩니다. 예부상서씩이나 되는 고관이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은 수 조정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수양제의 첫 번째 침공에 버금가는 위기를 맞이했던 고구려만 이득을 보았지요,
기록의 나라 조선답게, 왕세자의 교육에 대해서도 세밀한 기록이 여럿 남아 있습니다. 특히 세자시강원의 교육일지인 『동궁일기』는 동궁, 즉 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기록하고 있지요 (심지어 세자의 배움이 얕고 노력이 부족하다고 질타하는 내용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세자의 교육을 재구성해 보면, 의외로 당시의 일반적인 양반가에서 하던 주입식 교육과 크게 다르지 않은 면이 보입니다. 즉 하루에 대략 5백~1천 자 정도쯤 되는 양의 경전 구절을 학습하고, 이를 암송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서 읽고 쓰는 형식이 주를 이루었지요. 양란 이후에는 국가제도를 재정비하면서 산림의 거두들이 시강원에 등용되어 세자에 대한 성리학 및 제왕학 교육을 담당하게 되는 변화가 나타나는데, 작중 시점에서는 그런 변화가 중종 시기 잠시 시도된 것을 제외하면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경전 내용을 그대로 외우게 하는 데 집중하는 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김은정, 2012. “서연을 통해 본 왕세자 교육의 보편성과 특수성: 17세기 『동궁일기』를 중심으로”, <어문연구> 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