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49화 (248/259)

75. 망진자호 (1)

진시황이 천하를 순수하매 비로소 상군(上郡)에 닿았다. 이때 일찍이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고자 바다로 떠났던 연나라 사람 노생(盧生)이 돌아와 참서(讖書, 예언서)를 바쳤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호(胡, 오랑캐)라 (亡秦者胡也).’

하였으니, 진시황이 이를 듣고 장군 몽염으로 하여금 삼십만 대군으로 흉노를 치게 하였다.

후에 한나라 사람 정현(鄭玄)이 탄식하기를,

‘호(胡)란 곧 호해(胡亥)이니 2세 황제의 이름이라. 진시황은 참서를 읽었음에도 그것이 인명임을 알지 못하고 엉뚱한 북쪽 오랑캐에 대비하였을 뿐이었다.’

하였으니, 후대의 정설이 이러하였다.

장거정의 생각은 이러하였다. 진시황은 이미 상군에 닿았을 무렵 흉노를 칠 뜻을 품고 있었다. 노생은 그저 진시황에게 그 명분을 주기 위하여, 황제의 연장으로서 부림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 참서라는 것도 무슨 신령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남의 눈을 피해 옛 글자로 대충 위조한 것에 불과했으리라.

그렇다면 지금 저 임거정과 그 무리가 꾀하는 망진자호의 계책이란 대체 무엇인가?

『사기색은(史記索隱)』과 『사기정의(史記正義)』를 펼쳐두고 한참 고민하는 장거정이었다.

“아직도 사서에 몰두하고 계시는지요.”

뒤에서 문득 목소리가 나 돌아보니, 사람 좋은 미소 짓고 있는 풍보가 손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 올려진 쟁반을 들고 있었다.

“드시지요. 이것이 중원의 차와는 그 효능이 천양지차라는 유구의 분화차랍니다.”

“잠상(潛商)이 국법을 어기고 들여온 하찮은 물건에 쓸 겨를은 없소.”

“이미 압수한 것을 그대로 버리기도 아깝지 않습니까.”

조선 수사를 능히 압도할 수 있을 만큼 전선(戰船)을 확보하기 위해 나라 안의 모든 배를 끌어모으고 전국의 선소를 독촉하고 또 독촉하고 있었으므로, 잠상을 단속하는 일은 그 중함이 한참 뒤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나 워낙 저들 앞마당처럼 – 실제로 자유민주당의 잠상 태반은 바닷가가 고향인 중화 사람들이었으니 그 앞마당이 맞기도 했다 – 강남 해안을 들락날락하다 보니, 개중 일백에 하나쯤만 순시하는 대명 수군에게 붙들려도 그 수효가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압수한 물건들 중 상등품에 해당하는 것은 이렇게 북경으로 진상되곤 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피로하였던 장거정은 풍보의 논리에 넘어가, 끝내 요새는 ‘동이차(東夷茶)’-이주(夷州, 대만의 별칭 중 하나)에서 나기 때문이었다-라고도 하는 그 검은 찻물을 한 모금 마셨다.

과연 조금은 활기가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환관의 비루한 식견이지만, 감히 생각건대 지금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이 썩 들어맞지는 않을 듯합니다.”

“이 사람도 정말로 사서 속에 답이 있으리라 여기는 것은 아니오. 그저 생각하는 데 좋은 귀감이 되어주리라 여길 뿐. 더구나 이것 외에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잖소.”

장거정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이미 해는 바뀌어 경오년(1570). 척계광과 오다 노부나가 두 사람은 온 머리와 힘을 다 쥐어짜 동이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적의 소위 삼국도총부에도 권율이니 이순신이니, 린죠 히데요시니 하는 군략 뛰어난 장수가 많다 보니, 항상 싸움은 아슬아슬하였다.

계획한 것보다는 많은 인명을 잃고, 더 많은 전비를 흩뿌렸으며, 또 더 많은 강역을 잃어 이미 적은 요하 너머까지 발을 디뎠다. 그러나 아직은 감당 가능한 정도였다.

이는 손수 군사를 이끌고 북변 전체를 뒤흔드는 엄답(알탄 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진보 한둘, 거점 한둘씩은 잃어도, 뼈아픈 패배는 한 번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사이 마닐라를 통해 들어오는 에우로파 쪽의 전황에 비하면 훨씬 잘 되어가고 있다 할 만하였다. 

비엔나가 함락당하고, 그간 에우로파 동서 양측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비를 감당하던 금융가들의 금고는 텅 비고, 베네치아와 오스만 해군의 협공에 저들이 ‘지중해’라 부르는 바다의 서쪽, 에스파냐 바로 코앞까지 속절없이 밀려나고 있다던가.

그나마 선전하던 저지대에서도 군비가 부족해지며 합스부르크 측은 두드러지게 고전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 국왕이 용렬하여 도저히 전쟁을 이어갈 형편이 되지 않았던 스웨덴이 국왕을 쫓아낸 뒤 굴욕에 가까운 조건으로 덴마크와 화의를 맺고 이탈하자, 야심 넘치는 덴마크의 프레데리크는 아직껏 리보니아를 굳게 지키고 있던 리투아니아의 후방을 위협하게 되었고,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역시 군사를 뒤로 물려야만 했다.

한편,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장거정과 풍보 두 사람은 동창의 모든 이목을 풀어 소위 ‘망진자호’ 계책을 미리 막아내고자 힘썼다. 허나 암만 노력해도, 막아내야 할 흉계가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대체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살피고자 장거정이 며칠째 고심하고 있던 까닭이었다.

“저들이 계책이 들통난 것을 깨닫고, 일찌감치 포기하고서 다른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요, 우리 대명에 닥친 이 국난이 끝나간다는 뜻이 되겠지. 허나 이 사람이 아는 임거정은 결코 그렇게 쉽사리 포기할 자가 아니오.”

“그러나 아직껏 드러난 기미가 없으니, 설령 저들이 은밀하게 어떤 흉계를 꾸미고 있다 한들 그저 몇몇 사람을 모아 모의하는 데 그치고 있을 것입니다.”

풍보는 환관으로서는 드물게 문장에 밝은 자였다. 고금을 막론하고, 반란이라는 것이 언뜻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제법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는 점은 잘 알고 있었다.

“망진자호라 하지만, 실제로 진을 무너뜨린 것은 진승과 오광이 봉기한 데서 말미암았지요. 그들은 비록 보잘것없는 백성이었으나, 처음부터 군사 구백 명을 거느리고 있었고, 또한 부소(扶蘇)와 항연(項燕)을 사칭하며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하였습니다. 

그러한 징후가 전국 어디에도 없지 않았습니까.”

풍보의 말대로였다. 전비의 명목으로 다시금 세금이 과중해지면서, 가뜩이나 불만 많던 향신들, 막연히 좋은 세상 오리라 믿었던 백성들, 심지어 정말로 대일통이 만인에게 이로우리라 믿고 따랐던 향병위 몇몇 사이에서도 조심스레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올해 봄까지 온 나라를 뒤진 동창이 찾아낸 전부였다. 불평 가득한 향신들은 모든 주ㆍ군ㆍ현에 가득하였으나 그들을 하나로 뭉칠 만한 자는 없었고, 몇 년 전보다 훨씬 공정하고 투명하게 매겨지는 세금에도 반발하는 백성들이었으나 병기를 집에 숨겨두고 있는 자는 없었다.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흉계는 그 어떤 천라지망을 펼쳐도 미리 알 수도, 벌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어떤 흉계도 사람 머릿속에 머물기만 해서는 이루어질 방도가 없지요.”

풍보가 막연히 ‘다 잘 될 것이다’ 넘겨짚는 것이 아니요, 나름의 논리와 그간 동창이 모아들인 각지 사정에 입각하여 말하니, 장거정도 끝내 마음이 흔들렸다.

벌써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민심을 다독이는 것부터 시작해, 이 망진자호 네 글자에 집착하는 것보다 훨씬 중대한 국사가 허다하였던 것이다.

“풍 태감 그대의 말에 일리가 있소. 이 사람의 심력(心力)은 이 사람만의 것이 아니요 온 조정과 종사를 위한 것이니, 고작 한 가지 일에만 매달려서는 안 되는 것이겠지.”

“현명한 말씀이십니다.”

장거정의 눈빛만으로 그 뜻을 알아챈 풍보가 잽싸게 손짓하니, 동창의 환관 여럿이 어느새 바닥 드러낸 찻잔을 챙겨 나갔다. 그와 더불어, 장거정의 아직은 예리한 안목과 명민한 판단을 요하는 온갖 국사의 실무가 종이의 형태를 빌려 그 앞에 쌓였다.

그 서류의 산 속에서, 장거정은 복주(福州)의 한 노인이 올린 건의를 눈여겨보았다. 어지러워지는 민심을 달래기 위한 훌륭한 방도. 거절하기는커녕 격려해야 할 일이었으므로, 곧장 가(可) 한 글자를 적어 유사(有司)로 전하였다.

이 무렵 중원 천하의 도서는 모두 강남에서 찍혀 나와, 바닷길과 운하를 통해 나머지 중원으로 퍼지곤 하였다. 특히 (어느새 강남의 번듯한 사대부들도 심심찮게 쓰게 된 용어를 빌리자면) 은이 유입되고 자본이 늘어나면서 서방(書坊, 출판소)들의 사업이 한층 더 성대해지게 되었다.

시일이 흐르면서 강남의 서방도 여럿으로 갈래가 나뉘었다. 예컨대 남경에서는 가장 고급스러운 종이로 오직 고상하고도 부유한 신사들을 위한 서책을 찍어내고, 반대로 복주에서는 오직 저렴함만을 추구하며 도시마다 넘쳐나는 소민(小民)들을 위한 싸구려 서책을 주로 만들어내는 식이었다.

내각수보 장거정이 나라 안의 모든 사업을 대일통의 이름으로 공사(公司)로 재편하게 된 이후로도 이러한 구분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들 서방이니 서국이니 하는 곳도 모두 (적어도 겉으로는) 백성의 것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없던 화공이 생기고 갑자기 싸구려 종이가 상등품으로 바뀌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복주 서방 사이에서 큰손으로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스스로 밝히기로는 이름을 손인심(孫因心)이라 하는 이 노인은 말재주와 글재주가 제법 뛰어났다. 몇 년 전 어디선가 나타나서는, 복주의 지부(知府)와 홍병위 우두머리들 사이를 두루 돌며 유세하기를,

‘온 천하에서 이곳 복주만큼 값싸게 글을 찍어낼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조정에서 널리 알리고자 하는 바를 글로 펴내는 일을 복주에서 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미 조선의 공보를 따라하여 무슨 신보니 신문이니 하는 것을 찍어내던 자들은 모두 그 업을 공사에 빼앗겨, 나라 안 어디서든 『대명통보(大明通報)』 하나는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지 오래였다.

허나 손인심이 말하는 것은 그 이상이었다.

‘내각수보 장 대인의 대일통론은 그 이치가 참으로 심오하면서도 장쾌하니, 어리석은 자는 듣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없으나 한 번 깨우치면 그 사무치는 올바름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이를 해설하고 가르치는 책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 계책을 위에 진언하면 반드시 받아들여질 것이요, 어쩌면 은상(恩賞)이 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 대인들께서는 그저 소생에게 이름만 빌려주시고 그 포상을 받으시면 됩니다.’

‘허나 선생 또한 무언가 바라시는 바가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늙은이가 이제 와서 무슨 광영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저 대일통의 대업에 티끌만한 도움이라도 되었음을 평생의 보람으로 알 뿐이지요. 복주의 번듯한 서방공사(書坊公司)를 모아 소생에게 맡겨주신다면 여생을 이 일로 보내며 본래의 뜻에 미치지 못하거나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되었다. 장거정에게 아첨하려는 자들과, 대일통이 그들에게 바라마지 않던 위세와 영예를 주었기에 그 뜻에 진심으로 감복한 자들 사이에서 손인심의 평은 올라만 갔고, 마침내 지난 무진년(1568)에는 복주의 모든 서방공사를 감독하는 서방총감(書坊總監)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보게들, 서두르지 못하겠는가! 한 각 한 각이 급하단 말이야! ”

그러므로 손인심이 이렇게 직접 부둣가까지 나와 지팡이 휘두르며 재촉하자 모두가 벌벌 떨며 시늉으로나마 그 발걸음을 빨리하게 되었다.

“총감 대인, 그, 감독하시는 중에 송구하오나...”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초조해 보이는 손인심 앞에서, 평소처럼 빙빙 돌려 말하던 그의 아랫사람 하나는 끝내 버럭 호통을 듣고야 말았다.

“어물거리지 말고 얼른 말하게!”

“죄, 죄송합니다! 실은, 금번 금릉(남경)행에 우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복주에서 당장 빌릴 수 있는 배를 거의 모두 빌리다시피 하였는데, 정작 이들을 호위할 배는 없지 않습니까?”

중원 바닷가라면 어디든 들끓던 해적은 이 무렵에는 자유민주당의 ‘민’ 자 깃발 – 그 상전인 조선의 민주당에게서 빌려오되 흑백만 뒤집어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하였다 – 하나 아래 모두 뭉쳤다. 

작은 배 한두 척으로 고작 해산물 따위를 옮기는 상인들에게는, 그러므로 지금만큼 안전할 때가 없었다. 허나 반대로 조정의 이름을 걸고 큰 배로 물자를 옮기는 이들에게는, 어찌어찌 뇌물로 길을 틀 수 있던 그 옛날 왜구 시절보다도 지금이 더 험난하였다.

“어리석기는! 호위로 붙일 배가 있다면 거기에까지 마저 책을 실을 일일세! 금번에 나온 저 서책이 어떤 책인지 모르는가? 내각수보 대인께서 친히 지시하시어 즉시 강남 전역에 흩뿌리라 하셨네! 조금이라도 시일이 늦어지거나 수량이 부족하게 되면 그 책임을 자네가 질 것인가?”

“소,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그런 헛소리 할 겨를이 있으면 얼른 가서 일꾼들 독촉이나 하게. 잊지 말게! 늦어도 내일 아침에는 남경으로 떠나야 하네!”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또 지팡이 짚은 채 여기저기 지적과 독촉을 하러 부둣가를 돌아다니는 손인심이었다. 암만 권세를 얻은 뒤로 – 저에게 그런 권세를 준 장거정 대인을 틈만 나면 찬양하는 것과 더불어 –자만함에 가득 차 남을 함부로 대하는 버릇이 생겼다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다.

그렇게 한참 거닐던 노인의 모습을, 부두 근처 다점의 2층에서 눈여겨보던 이가 있었다. 행색은 범상한 노서생이되, 그 눈빛만은 백 번 고쳐보아도 범인의 그것이 아니라.

또 한 번 요동에서 크나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산동성의 어느 광점공사(<石+廣>店公司)에서는 목표로 하달된 것의 갑절이 넘는 양을 채굴하여 중화의 창창한 앞날을 위해 이바지하였다는 케케묵은 소식으로 가득한 대명통보를 접어 상 위에 고이 올려놓은 서생은, 조용히 찻값을 치른 뒤 거리로 나섰다.

그러고는 여전히 지팡이로 여기저기 짚으며 온갖 짜증을 다 부리던 손인심 앞에 나타나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그대는 누구기에 이 사람의 앞을 막는 것이오? 그저 서방 몇 곳의 일이 아니라, 나라의 아주 중한 일을 맡아 행하고 있거늘!”

“이 사람은 해서라는 사람이외다.”

노서생이 저의 정체를 담담하게 밝히니, 손인심보다는 그 주변 사람들이 더 크게 놀랐다.

대일통이 대명의 국시로 자리잡고, 그 실체가 온갖 공사로, 그리고 만인의 일상을 침탈해 들어오는 거대한 관(官)의 존재로 나타난 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관은 신사들의 생업을 몰수하는 대신 그들에게 사대부로 행세할 수 있는 만큼의 권세를 보장해주었고, 백성들이 살아가고 일하는 방식을 일일이 통제하는 대신 그들이 장차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뚫어주었다.

홍병위의 무뢰배들과 어울리거나, 누가 보아도 대단하다 할 만큼 자신이 새로 속하게 된 공사에서 일머리를 보여주거나, 아니면 공사에 속하지 못한 독서인(讀書人)들이 관의 지시로 인해 세우게 된 학교에 들어가 글을 배우거나. 

눈을 크게 뜨고 귀를 널리 열며, 소년이나 소녀 시절 마음속에 꽁꽁 억눌러둔 욕심을 밖으로 꺼내고 그만큼 노력만 하면 되었다. 

이처럼 가장 어리석은 부두의 막일꾼조차 세상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게 되었으므로, 응천순무 해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사람됨은 어떠하였으며 한때 조정에서 어떤 지위에 있었는지 모르는 이가 주변에 드물었던 것이다.

“해서(海瑞)든 호서(湖瑞)든, 벼슬이 응천순무였든 승천순무였든 내 알 바 아니오.”

그러나 손인심은 그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이 또한 주변으로 하여금 탄식 또는 경탄케 하는 대꾸였다.

“그저 한 가지 청하고자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소. 본디 금릉으로 향하고자 배편을 마련하였는데, 그 배를 총감 그대의 서방에서 빌려가버렸소이다. 이는 인의를 논할 것도 없이, 상도에 어긋나는 일 아니오?”

“나랏일보다 앞서는 상도가 있을 수 있소? 이 사람은 그저 관에서 부여받은 직과 그에 상응하는 권한으로써 배를 끌어다 쓸 뿐이오. 무려 내각수보 장 대인께서 손수 내리신 지시란 말이오.”

‘내가 이리도 중한 사람이다’라고 뽐내는 기색이 역력하여 먼발치서도 능히 알아볼 수 있었다. 손인심과 마찬가지로, 시세에 영합하여 얻은 권세가 본디 저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좋다고 환호했다.

“허나 비단 이 사람뿐 아니라 다른 많은 객들이 그로 말미암아 졸지에 이곳 복주를 떠나지 못하고 속절없이 며칠을 허비하게 되었소. 이는 어찌할 것이오? 이 사람의 이름을 보아서라도, 부디 재고해주기를 청하는 바요.”

“며칠만 더 기다리면 상행 떠난 다른 배가 한 척 쯤은 돌아올 것 아니오? 이제는 벼슬도 없는 사인(私人)으로서, 남들보다 무엇이 더 잘났다고 유별난 대접을 바라는 것이오?”

응천순무 해서는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였고, 그러다가 느닷없이 조정의 행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직을 내던졌다. 

그가 홍병위를 구타하고 능멸한 비화인(非華人)의 편을 든다 여기는 자들은 목청 높여 손인심에게 호응하고, 반면 해서에게 잘못이 없다 여기는 자들은 그를 동정하며 조심스레 수근거렸다.

“좋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정 그리도 금릉에 하루라도 빨리 닿고 싶다면야, 그대에게는 자리 하나쯤 내어줄 수 있소이다. 물론 서책으로 가득 찬 궤짝 사이에 끼어서 가야 하겠지만, 그쯤은 마땅히 감수해야 하겠지. 그렇지 않소?”

한때 장거정과 나란히 문연각의 문턱을 넘나들던 이에게 가해지는 명백한 수모. 모두가 해서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라도 해 주신다면 이 해 아무개는 족히 받아들이겠소.”

그리고 생각보다도 훨씬 순한 답이 돌아오자, 실망하는 자들, 역시 세상은 저들의 편이라며 기뻐하는 자들, 이 나라의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며 속으로 한탄 삼키는 자들이 각각 나뉘어 흩어졌다.

다음날 해가 밝자마자, 총감 손인심이 이끄는 선단은 당당하게 돛을 펴고 남경으로 향했다. 어제 부두에서 중인환시 하에 굴욕을 당한 해서를 마치 번거로운 짐처럼 선창에 실은 채였다.

그리고 남경은커녕 온주(溫州) 앞바다를 지나기도 전. 복잡하게 이어지는 섬과 곶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수상한 배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민주구(民主寇)다!”

때는 어느새 해질녘. 동쪽으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 사이에 숨어 있던 배들이 선단을 덮쳐왔다.

바로 복주 선공들이 만든 복선(福船)을 보고 배웠으나 어느새 청출어람이라는 말조차 엄두를 못 내게 발전한 동래 내선(萊船)들. 

양쪽이 모두 싸움배라 하더라도 이기기가 어려울 텐데, 심지어 이쪽은 호위하는 배는커녕 군졸도 몇 태우지 않고 있었다.

“아이고, 총감 대인! 소인이 뭐라 했습니까? 이제 어쩌실 겁니까? 예?”

어제 손인심에게 한 소리 들었던 그의 아랫사람 하나가 눈물 흘리며 따져물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어쩌기는. 이 사람 맞이하러 멀리서 온 손님들일세. 그러니 반갑게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

분명 그들 모두가 잘 알고 또 미워하던 심술쟁이 겸 아첨꾼 늙은이 손인심은 어디 가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멋들어진 노인 하나가 서 있었다. 사람은 같은 사람일진대, 이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예?”

“보아하니 이곳은 어선이나 다른 상선의 왕래가 간혹 있을 듯허이. 저쪽 배가 이쪽까지 오도록 기다릴 게 아니라, 우리가 먼저 저쪽 섬그늘로 향해 만나는 쪽이 좋겠군. 뱃사람들에게 얼른 그렇게 전하게나.”

“아, 예. 예.”

다들 넋이 나갔지만, 저들도 모르는 사이 노인의 말을 따르게 되었다. 

“자못 자연스레 명령을 내리시는구려. 그대에게 이런 재주가 있을 줄 뉘 알았겠소. 기실 이 사람조차 처음 영수(領袖)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심히 의심했소이다. 뒤늦게나마 사과하겠소.”

어느새 선창에서 나온 해서가 손인심, 아니, 항주에서 도망친 이래 잠시 이름을 바꾼 채 낮에는 서방총감, 밤에는 불평불만 품은 향신들을 규합하는 국민당(國民黨) 영수로 활약하는 오승은에게 말했다.

국민당이란 무엇인가. 허울뿐인 중화의 이름 대신 오직 그들이 살아가는 나라를 위하자는 뜻으로, 거짓 명분 대신 이 땅 위에 살아 숨쉬는 백성을 위하자는 뜻으로 정한 이름이었다.

“소생은 그저 때를 잘 만났는지 잘못 만났는지, 어쩌다 이런 중임을 맡게 된 늙고 쓸모없는 서생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늦깍이로 재주를 익히려 힘썼을 뿐이지요.”

오승은이 솔직하게 답하였다. 해서의 깐깐하디 깐깐한 표정은 그 겸양하는 말에 딱히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으나, 눈빛은 꽤 누그러져 있었다.

그사이 배는 어영부영 섬그늘 드리운 동쪽으로 향했다. 선두에 선 오승은의 배가 그러하였으므로, 다른 배들도 그 뒤를 따랐다. (이미 퇴로 쪽을 슬그머니 자유민주당 배 두어 척이 가로막고 있었으므로, 굳이 도망치다가 붙잡히느니 처음부터 순순히 따르는 쪽이 나았다.)

그리고 이쪽 뱃전과 저쪽 뱃전이 조금 가까워진다 싶었을 때, 무언가 시커멓고 큼직한 것이 휘리릭 날아들었다.

갑판이 비명을 지르건 말건, 변함없는 험상궂은 웃음으로 해서와 오승은 두 사람에게 인사하는 임꺽정이었다.

“거 두 분 어르신 모두 오랜만에 뵙소.”

그러나 정작 통변 노릇할 이탁오는 넘어오지 못한 고로, 서로 인삿말 알아듣지 못하고 지극히 어색하게 그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어야만 했다.

끝내 견디지 못한 꺽정이는 조금 더 뱃전 사이가 좁혀들기를 기다렸다가 껑충 뛰어 돌아갔다. 다시 돌아올 때는 등에 이탁오가 업혀 있었다.

꺽정이가 적당히 갑판에 등짐 내려놓으며 말했다.

“해서 어르신은 보나마나 이것부터 물어보실 듯해 미리 답변드리는데, 어르신네 황태자는 잘 지내고 있소. 서계 그 어르신이랑 우리 처갓집 율곡 둘이서 매일같이 가르치는데, 율곡은 황태자가 범재라고 하고, 서계 어르신은 실로 자질이 뛰어나다 하니 아마 자질은 그 중간 어디쯤 되는 모양이오.”

이이가 견주는 대상은 이지함과 자기 자신이요, 서계가 황태자와 견주는 이는 황태자의 아비와 조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금성에 계속 계시면서 장거정 그이의 손을 타느니, 이쪽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두 분 모두 장거정 그자보다는 훨씬 훌륭한 스승이니까요.”

통변하는 이탁오도 제멋대로 사설을 붙였다.

북경에서 임꺽정과 이지함 두 사람이 벌인 난장판에 대해서는 한때 대명의 국록을 받던 이로서 할 말 많은 해서였는데, 지금 무엇이 중한지를 아주 잘 알던 오승은이 자연스레 그 말문을 막으며 대신 물었다.

“자, 소생은 이렇게 미리 약조한 기일에 맞춰 해서 대인까지 모시고 왔습니다. 복주에서는 해 대인을 모욕하는 시늉까지 했으니, 누구도 우리가 공모했으리라 의심치는 못하겠지요. 

그리고 그 대일통을 일개 촌부들조차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쉽게 풀어쓴 서책. 중간에 고역스러운 일이 많았지만 어찌 잘 마련하여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그러니 이제 슬슬 여쭤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장차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항주의 그 봉기라고 하기도 무엇하고 난동이라 하기도 조금 뭣한 일 이후로 의기투합한 항주 신사들을 시작으로, 어느새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국민당은, 그러나 아직은 딱 그 정도, 그러니까 거미줄 정도에 불과했다.

거미줄이 그 가는 것에 비하면 제법 질기고 끈끈하다지만, 딱 그뿐이었다. 거미줄로는 고작해야 날벌레 따위나 조금 잡을 수 있을 뿐 아니겠는가.

앞으로 거사를 벌일 이야기가 나오니, 해서도 황태자 전하의 일을 더 캐묻는 것을 일시 단념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사람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 바다 위에서 그대 당의 사람을 만나 이 대계에 동참하기로 한 것은, 중원을 참혹한 전란에 빠뜨리지 않고도 능히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는 방도가 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기 때문이었소.

그때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어떻게든 나라를 바르게 해야 한다 믿었기에 순순히 따랐소. 허나 이제는 이 사람 역시 들어야만 하겠소.”

병장기를 모으는 기색도, 몰래 장사를 초모하는 움직임도 전혀 없었다.

동창의 눈을 피해 꽁꽁 숨은 백련교 교인들 역시, 멀리 떨어진 주군현 사이를 오가며 소식을 전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그 이상을 해내기는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저 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이 그 이름만 그럴듯한 대일통에 있지 않다 여기는 이들, 그리고 설령 태악(장거정) 그이가 옳았다 한들 이를 이룩하는 방도는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이들. 이러한 서생들을 여기저기 끌어모았을 뿐이라 들었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지만, 말에 오르지 않고 천하를 얻을 수도 없는 법이오. 그렇지 않소?”

그러나 이탁오는 제법 날선 물음에도 스스럼없이 답했다.

“천하를 굳이 한 사람 손에 쥐고자 할 때나 들어맞는 말이지요. 우리가 노리는 바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그사이 이쪽과 저쪽 배 사이는 더욱 좁혀져, 완전히 뱃전끼리 맞대게 되었다. 곧 시끄럽게 떠들며 그들 우두머리만큼이나 거칠고 험상궂은 무리들이 건너와, 제멋대로 선창을 열고 서책이 가득 담긴 궤짝을 밖으로 꺼냈다. 

“그러고 보니, 나무한테는 미안한 일이 되겠군요.”

한창 몸 놀려 일하는 부하들을 돌아본 이탁오가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덧붙였다.

그 말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곳곳에서 궤짝을 물에 빠뜨리는 소리가 첨벙첨벙 울렸다.

한편 자유민주당 배에서도 한창 분주하게들 뱃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곧 방금 전 빠뜨린 것과 얼추 비슷하게 생긴 궤짝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복주 배들로 옮겨졌다.

“아, 그러면 설마...”

여전히 아리송한 해서와 달리, 뭔가 떠오른 오승은이었다.

“예, 저희도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습니다. 미리 보내주신 그 원고를 저희 쪽에서도 다 찍어내어 들고 왔지요. 물론 겉만 비슷하고 속은 완전히 다르지만요. 그리고 저 책이, 바로 어르신께서 열심히 모아주신 국민당 사람들에게 보내는 신호이자, 지금껏 불만은 품었으나 아직 그것을 형용할 말을 못 찾고 있던 이들을 위한 신호가 될 것입니다.”

“허나 그것만으로 족할 리가 있겠소?”

끝내 의심하는 해서에게 이탁오가 자신 가득 담아 답했다.

“북으로는 회수 강가부터 남으로는 광주(廣州)까지, 항주에서 벌어진 일을 통쾌하게 여기는 이들을 끌어모아 꾸린 국민당입니다. 이들의 힘을 한데 모을 장수도, 재주 있는 모사도, 장사들에게 들려줄 병장기도 없지요.

허나 꼭 그런 게 있어야만 나라를 뒤엎는 건 아닙니다. 해 대인. 정여립이라는, 조선의 재기 넘치는 젊은이 하나가 언제고 그런 말을 하더군요. 양이 곧 질이라고요.”

그리고 더 이상 대명을 상국이라 모시지 않는 나라들도, 그 광활한 중원을 오직 하나의 조정 아래 묶어두고 있는 이 나라를 일컬어 대국이라 부르곤 하였다.

--- *** ---

‘망진자호’에 얽힌 이야기는 어째 『초한지』 같은 소설에 나올 듯한 야사의 느낌을 풀풀 풍기지만, 놀랍게도 『사기』 진시황본기에 언급되는 태사공 사마천피셜 정사입니다. 진시황이 사실 여불위의 아들이었다는 설이나 이사와 조고가 진시황의 유서를 조작해 호해를 이세황제로 옹립했다는 설 등은 모두 열전으로 밀어넣었던 사마천이 이 ‘망진자호’ 일화는 본기에 수록했다는 것은, 작중 장거정이 짐작하는 것처럼 이 모든 일이 진시황의 의도 하에 기획된 정치적 쇼였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물론 아무리 사실이 그랬다 하더라도, 정현 – 삼국지에 등장하는 대학자 정현 맞습니다 – 이 지적하는 역사의 아이러니, 즉 흉노가 아닌 이세황제 호해가 영원토록 이어질 줄 알았던 진나라를 무너뜨렸다는 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1560년대 후반 발발한 대전쟁에서 스웨덴은 운이 나쁜 축에 든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당시 국왕이었던 에리크 14세는 에스토니아를 두고 덴마크와 벌인 전쟁에서 그럭저럭 선전하는 등, 나름대로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재위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며 주변의 귀족들을 의심하고 처형하게 됩니다.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민과 결혼하는 일까지 겹치면서, 원 역사에서는 1568년 귀족들과 두 이복동생 요한(요한 3세)과 칼(칼 9세)이 합세하여 에리크 14세를 폐위하게 되지요. 그 이후로도 요한과 칼 두 사람이 다시 대립하면서 한동안 스웨덴은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게 됩니다.

작중 언급되는 명말 강남 일대의 출판업 발달 양상은 원 역사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가정 연간을 거치며 강남 전역에서 영세한 농가들이 몰락하여 도시로 유입되고, 신사 계층 사이에서도 점차 몰락한 이들이 나타나면서, 이미 약화되고 있던 기존의 신분질서가 경제적인 계층질서로 대체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향촌보다 훨씬 높은 문화적 환경 속에서, 신생 소시민 계층의 지식 수준은 점차 상향평준화되지요. 강남의 출판 문화는 이렇게 문화적 수요가 폭증하는 상황 속에서 빠르게 발전합니다. 작중 언급된 것처럼 복주에서는 주로 서민층을 위한 염가 대량출판에, 남경 일대에서는 보다 고급 서적 위주의 출판에 각각 특화하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지요 (문성재, 2004. “明末 희곡의 출판과 유통 - 江南지역의 독서시장을 중심으로”, <중국문학> 41). 여담으로, 이때 흥성한 출판문화의 유산 하나는 지금도 우리 일상에 남아있는데, 흔히 쓰이는 폰트 중 하나인 명조체의 ‘명조(明朝)’가 바로 이때 보급형 서적에 널리 쓰인 서체였습니다. 명나라판 타임즈 뉴 로만(Times New Roman)이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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