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망진자호 (2)
해서의 후임으로 응천순무 직을 맡게 된 경정향(耿定向)은 왕학(王學, 양명학)과 처신에 공히 밝은 인물로, 장거정의 논설에 완전히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예 그릇되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아무리 재상 한 사람의 학문이 잘못되었다 한들 장거정은 조정을 이끄는 내각수보였으며, 조정의 신법이 암만 정도(正道)를 잃었다 한들 아예 무법(無法)한 것보다는 훨씬 나았던 것이다.
“금번 수세(收稅)가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그대들은 모두 알 것이라 믿네.”
응천순무의 이름으로 남경 및 주변 남직례 일대의 관원들 중 세금 걷는 일을 총괄하는 자들을 한데 불러모은 경정향이 운을 떼었다.
“그대들이 목민(牧民)하는 수령을 충실히 도우며 민생을 돌봤다면, 작금 민심이 결코 평온치 않음을 익히 알고도 남을 터. 그러나 오랑캐를 정벌하는 일 또한 경각을 다투는 때에 이르렀으니, 경조(京兆)에서 하달한 만큼의 액수보다 모자라게 걷어서는 안 되네.”
분명 천조 대명의 군사는 요동에서 승승장구하여 곧 의주 넘어 한양까지 정벌할 터인데, 전황이 심각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 직급이 낮아 진상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일시 갸우뚱하였다.
그때 좌중에서 말단 관리 하나가 조심스레 나와 읍을 올리곤 입을 열었다.
“소흥(紹興)에서 올라온 세관(稅官) 아무개가 순무 대인께 조심스레 건의드립니다. 소관은 본디 나라의 한량없는 은혜를 입기 전만 해도 시정잡배로 허송세월하였으니, 내각수보 장태악 공께서 재상의 자리에 오르신 이래 국운이 얼마나 창성케 되었는지를 두 눈과 귀로 곧추 접했습니다.
저 백성들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감히 조정의 수세가 도를 넘었다는둥 무엄한 말을 하고 있고, 소위 향신이라는 자들은 이를 바로잡기는커녕 도리어 부추기고 있습니다. 저들이 나라의 교화를 교화로 알지 못하니, 회초리로 가르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순무 대인의 허락을 구합니다.”
무뢰배 출신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걸걸하고 거친 말투. 그러나 그 뜻만은 다른 관리들도 공감하는 바였다.
장거정이 대일통의 기치를 세우고 온 나라를 뜯어고친 이래, 그 거대한 세 글자는 인의와 예절을 모두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간 나라의 곳간 좀먹는 것을 포장하여 일컫는 관례라는 말도 예외는 아니었다.
상관의 부패를 고발하고 그 자리를 꿰어차는 일이 지난 수년간 툭하면 벌어졌고, 그렇게 중원의 모든 관부에는 그 바깥 저자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질서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분명 옛날보다는 나아졌으나, 차갑고 숨막히는 그런 질서가.
이에 따라, 향신이 겸병하던 농지와 탐오한 관리들과 결탁한 상행 등이 모두 공사로 재편된 이래 그 소출이 크게 늘어나지는 않았으나 대신 중도에 새어나가는 것은 크게 줄었고, 그만큼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늘어났다.
그러던 중 병비로 말미암아 세금이 다시 올랐을 뿐이었다. 툭하면 가운데서 탐학한 관리들이 농간을 부리던 때와 달리, 지금은 적어도 드러내놓고는 그런 짓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불만을 품는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러므로 백성을 원망하는 이야기에 찬동하며 고개 끄덕이는 관리들이 제법 많았다.
허나 경정향은 단호하게 그 청을 거절했다.
“지금의 민심은 말 그대로 여리박빙(如履薄氷)일세. 만일 저 하심은(何心隱)이나 간사한 서생 이지 같은 자가 백성 가운데 있어, 민심을 어지럽히고 역심을 부추긴다면 마땅히 단죄하여야 할 것이나, 그러기 전까지는 결단코 관이 먼저 병장기를 잡는 일은 없어야 하네.
이 전란은 앞으로 길어야 이삼 년이면 끝날 것이야. 그때까지만 각별히 유의하여 민심을 위무(慰撫)하면 될 일일세.”
허나 농리공사에서 애써 거둔 소출이나 상행공사에서 역시 고되게 일하여 벌어들인 금은을 한 뭉텅이 떼어가는 처지에, 대체 무슨 수로 위무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눈빛을 읽은 경정향이 저의 곁에 놓여 있던 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복주에서 서방총감을 맡고 있는 손인심이라는 자가 내각수보 장 공의 검토와 승인을 거쳐 내었다는 『장태악대일통론도설(張太岳大一統論圖說)』일세. 이것은 내 미리 받아본 것이고, 각지에 배부할 분량은 그저께 이곳 남경에 당도하였다네. 지금쯤이면 계획된 대로 본관이 관할하는 모든 주군현으로 옮겨지고 있을 것이야.”
경정향이 표지를 펼쳐 안쪽을 모두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복건성에서 나오는 책들은 대개 품질이 조악하고 그림은 어설프며, 그저 값이 헐하기만 할 뿐이었다.
허나 경정향의 손에 들린 그 책은, 그림 대신 도표 – 조선 공보와 정론보를 본 중원의 서방 몇 곳을 필두로 그 도표 따라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모두들 익숙했다 – 로 된 말끔한 편집이 돋보였다.
“한 쪽 한 쪽마다, 어찌하여 장 대인께서 대일통을 말씀하시게 되었는지, 그리고 신법을 베푼 이래 나라의 살림과 민생이 얼마나 부흥케 되었는지 등등이 쉬운 글로 상세히 적혀 있다네.”
경정향이 책장을 넘기며 설명을 이어갔다. 중원의 인구가 성세(盛世)를 맞이하여 빠르게 늘어나니, 이들 모두를 풍족히 먹여살릴 방책은 오로지 더 넓은 천하로 뻗어나가는 것뿐임을 논증하는 대목이었다.
거기서 또 몇 쪽을 넘기니, 이번에는 나라 안에 공사라는 것이 생겨난 이래 나라 안의 소출이 얼마나 늘어났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드러났다.
대략 이러한 내용, 뜬구름잡는 천도(天道)와 인의가 아닌, 확고하게 눈에 들어오는 내용만 엄선하여 적었으므로, 북경의 장거정 또한 흔쾌히 이 책 찍어내어 널리 퍼뜨리는 것을 재가하였던 것이다.
“서원부터 작은 서당까지, 남직례와 그 너머 고을 곳곳에 이 책이 배부될 예정일세. 그리고 이곳 남경이나 소주, 항주처럼 번화한 도회에는 고용된 사람이 많은 공사에도 따로 책을 부치는 중이고. 그곳의 공사들은 향신 출신들이 관리하는 곳이 많으니, 그들로 하여금 책의 내용을 강설(講說)토록 해두었다네.”
그러면서 곁에 손짓하니, 곧 관부의 하리(下吏) 하나가 갓 찍혀 나온 티가 역력한 서책을 좌중에 한 권씩 나눠주었다.
“자, 다들 일별(一瞥)해보게나. 복주에서 남경으로 오는 도중에 책이 통째로 뒤바뀌지 않은 이상에야, 본관이 받아본 이 초판본과 똑같은 글일 테니, 혹 보고 아직 의심이 남는다면 언제든 본관에게 물어보아도 좋네.”
그런데 이게 웬걸. 받아본 책을 열어본 관리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순무 대인... 송구하오나, 이 책이 정말로 지금 각지에 전해지고 있는 그 서책이 맞는지요?”
방금 전 경정향 향해 건의하였던 세관이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물었다.
“그렇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정말로 도중에 책이 뒤바뀐 듯합니다. 한 번 보시지요.”
“무어라?”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경정향이, 급히 세관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펼쳐보았다.
해가 거듭할수록 풍족해지는 대명의 국고와 백성의 살림살이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이와 같은 이치로, 만민이 비로소 대일통을 위하여 멸사봉공(滅私奉公)으로 임하게 되면 반드시 소강(小康)이 이루어지고 이어서 대동(大同)이 이루어지니, 크게는 중화가 중화답게 되고, 작게는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급히 자신이 받아본 초판본을 펼쳐보니, 여기까지는 내용이 같았다.
허나 그 아래, 초판본에는 없는 평점(評點, 코멘트)이 작지만 또렷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참으로 우활하구나! 사사로움이란 사람의 마음이요 본성이니, 어찌 사(私)를 멸한 뒤에 공(公)을 논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사로움이 없다면 마음이 동하지 않고,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행(行) 또한 있을 수 없다. 밭일하는 사람이 사사로이 거두는 바가 없다면 어찌하여 밭을 갈겠는가? 장사하는 사람이 사사로이 벌어들이는 바가 없다면 어찌하여 창고에 물건을 채우겠는가? 배우는 사람이 사사로이 이루는 바가 없다면 어찌하여 학업에 힘쓰겠는가?’
그리고 그 뒤도 비슷하였다.
“순무 대인?”
경정향은 일순 아찔함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제야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미리 이렇게 초판본까지 보내주면서, 삼가 협조를 구한다고 공손히 청하였던 자가 누구였던가?
장거정의 이름을 거론하며, 남직례와 그 주변 모든 고을에 이 책이 전하는 바가 잘 통할 수 있도록 해 달라 했던 자가, 아주 세세한 방책까지 글로 써서 전하였던 자가 누구였던가?
식은땀이 주르륵 등골을 따라 흐르는 듯하였으나, 경정항은 애써 정신을 추스르곤 좌우에 물었다.
“복주에서 이 서책을 가지고 온 자들. 그들은 아직 이곳 남경에 남아있는가?”
주변의 관리들 중 이곳 남경에서 일하는 자들이 조심스레 눈빛을 주고받더니, 개중 하나가 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대인.”
“즉시 관부 안의 모든 병사를 모으게. 복주에서 온 손인심, 그자를 추포해야 하네. 본관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갈 터인즉, 어떤 일이 있어도 한 각 내로 준비를 마치게.”
“예, 예, 알겠습니다!”
“다들 들었지? 움직여라, 움직여!”
“즉시 명을 전해라! 성문을 닫아!”
“부두! 부둣가로도 전해! 조각배든 일천 료(料) 대선이든, 그 어떤 배도 순무 대인이 허락하기 전까지는 떠날 수 없다!”
손인심과 그가 거느리고 온 복주 사람들이 머무는 곳은 금방 드러났다. 겁도 없이, (아마 중간에 바꿔치기하였을) 그 서책을 보관하던 창고 바로 옆의 객잔을 통째로 빌렸다던가.
곧 관부의 문을 박차고 경정향과 급히 모은 이백여 군사가 대로로 뛰쳐나갔다.
“급한 공무(公務)다! 모두 비켜라!”
“순무 대인의 명이다! 모두 비켜라!”
경정향은 가마를 탈 여유도 없이, 어설픈 승마 솜씨로나마 애써 말 타고 나아갔다. 앞장서서 길을 뚫는 마병들과 달리, 그저 조금 빠르게 걷는 것만으로도 좌우 균형 잡기가 아찔하였다.
그로 인해, 벌써 주변 저자의 모습이 그가 알던 남경응천부와는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응천순무라는 직함을 대면서 길을 여는 병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다.
여전히 거리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홍병위들을 바라보는 눈빛 또한 변하였다.
부산해야 할 일터는 텅 비어 있었고, 그 구석에 모여 숙덕대는 자들이 바깥을 힐끔거릴 뿐이었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아니, 고작 그 서책 한 권 때문에 이런 파란이 일어나려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리고 대체 무엇을 믿고 저렇게 여기저기 모여서 흉흉한 작당을 한다는 말인가? ‘망진자호’ 계책을 조사하기 위해 수없이 남경을 오가는 동창 사람들을 도우며 경정향도 주워들은 바가 있었다.
그 어떤 역모의 낌새도 없었다. 병장기도, 장사도 모이지 않았다. 고작해야 향신들이 이곳저곳에서 소심하게 서신을 주고받고 강회(講會, 학회)를 빙자한 모임을 여는 것이 전부였다.
자신이 응천순무로서, 나라의 녹을 받는 관료로서 어쩔 수 없이 저들을 진압해야 한다면,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야 할지 저들은 알고 있을까? 이 모든 일을 획책한 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위태로운 짓을 벌인 것일까?
그렇게 호사난상(胡思亂想) 이어지는 사이 어느새 행렬은 손인심이 머물고 있다는 창고 옆 객잔에 닿았다.
객잔에 뛰쳐들어간 군사들이 곧 객잔 주인을 끌고 나와, 손인심은 어디 있느냐 다그치며 물었다.
이 날벼락에 기겁한 주인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옆의 창고를 연신 손가락질로 가리킬 뿐.
“놔주어라. 저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예, 대인.”
“즉시 창고 주변을 에워싸라. 저들이 궁지에 몰린 것을 알게 되면 어떤 흉포한 짓을 할지 모르니, 본관과 함께 들어갈 자들은 반드시 경계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남경응천부와 그 일대 전역에 흩뿌릴 만큼 책을 많이 찍어냈으니, 그 책을 잠시나마 보관할 창고 또한 널찍할 수밖에 없었다.
곧 병사 한 무리가 창고 뒷골목으로 향해 달려가고, 또 다른 한 무리는 반대편 길목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남은 백여 명은 경정향의 지시에 따라, 창고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복주 사람 손인심은 즉시 나와 응천순무 경 대인을 맞이하라!”
허나 손인심인 듯한 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텅 빈 창고만이 그들을 맞이했다. 이미 물이 다 쏟아지고 남은 동이를 바라보는 안타까움이 이러할까. 그저 구석에 궤짝 몇 개가 남아 있고, 일꾼인 듯한 자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너희에게 묻겠다! 손인심 그자는 어디에 있느냐?”
그때, 등 뒤에서 느닷없이 소란이 일어났다.
“웬놈이냐? 우리는 순무 대인의 명을 받들어 공무를...”
“으억!”
“적이다! 등 뒤에 적이...!”
“매복이다! 순무 대인을 지켜라!”
창고 주변 골목이란 골목마다, 아니, 심지어 지붕 위에서도 괴한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고작 책 찍어내고 옮기는 일꾼으로 보이지는 않는 흉흉함.
“쳐라!”
“치랍신다!”
돌아오는 호령은 한어(漢語)가 아니었다.
“잊지 마십시오, 당수. 응천순무 저자를 죽이면 안 됩니다.”
“걱정 마시오, 탁오 선생. 다들 오해를 하는데, 나도 작정하면 부드럽게 굴 수 있는 사람이오. 그냥 뼈 몇 개만 부러뜨리고 그치겠소.”
괴한들을 이끄는 범상치 않은 덩치와 기세의 거인과 그 옆에 선 서생. 그제야 경정향도 깨달았다.
“임거정! 임거정과 이탁오다! 여기서 잡아야 한다!”
그러나 경정향이 깨닫는 사이, 이미 골목에서 뛰쳐나오고 지붕에서 뛰어내린 무리는 경정향이 거느리고 온 위병들과 부딪히고 있었다.
그리고 돌에 맞은 유리처럼, 대열은 산산이 깨어졌다.
“조금만 버텨라! 이만한 소란이 일어났으니 반드시 원군이 올 것이다!”
“순무 대인을 창고 안쪽으로 모셔라! 문을 걸어잠... 으억!”
고작해야 노인 하나와 일꾼 수십을 붙잡을 생각으로 급히 끌어모은 병사들은 나름대로 분투하였으나, 상대는 임거정과 흑의군이었다. 그 악명을 익히 아는 경정향은 끝내 외치고야 말았다.
“그만! 병사들은 해치지 마시오!”
“안 해쳤소. 뭐, 재수 없는 놈은 팔다리 한둘쯤 부러졌겠지만, 아마 절명한 놈은 없을 게요. 자, 순무 나리, 얼른 임자 병사들더러 순순히 저 창고 안으로 모이라 명하시오.”
잽싸게 튀어나온 이탁오가 임거정의 말을 옮겨주었다.
여기저기 멍들고 부러진 병사들은 새끼줄에 묶인 채 창고 한가운데에서 보릿자루 시늉을 하고, 따로 곁으로 빠진 경정향은 임거정과 이탁오에 이어 – 이런 일에 엮이는 것이 썩 기껍지 않음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 해서와 손인심, 아니, 오승은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한동안 말을 잊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응천순무였다. 고개를 몇 번 좌우로 흔들어 정신 차리고서는 날을 세워 물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오? 밖에서의 그 소란은 반드시 본 사람이 있었을 것이며, 설령 주변의 이목을 요행히 피했다 한들 이 사람이 관부 나선 뒤 소식이 없는 것을 알게 되면 곧 이곳으로 원군이 올 것이오. 더구나 성문은 닫히고, 강가의 배도 모두 밧줄로 단단히 묶였소이다.
이제라도 사세 부득이함을 깨닫고 투항한다면, 다른 이들은 구명할 수 있도록 이 사람이 애써볼 터이나...”
그러나 꺽정이는 피식 코웃음으로 그 말을 끊었다.
“원군이라? 이보쇼, 순무 나리. 이곳 남경 지키는 병사가 얼마나 되오? 암만 많아봤자 백성 백에 하나쯤이나 될까? 장담컨대, 병사 하나가 열 명 몫을 한다 한들 지금 이 성 안의 그 누구도 잘나신 순무 대인의 뒤를 쫓아올 겨를은 없을 게요.”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것이오?”
이번에는 꺽정이 제쳐두고 이탁오가 홀로 말했다.
“꾸미고 있다뇨? 꾸미는 것은 끝났습니다. 이제는 그저 꾸민 대로 행하는 일만 남았지요.”
“끝내 이 남경, 아니, 강남의 순량한 백성들에게 화란을 몰고 오려는 것이오?”
“말씀이 잘못되었습니다. 화란을 몰고 온 것은 북경의 장 수보지, 우리가 아닙니다.”
“말장난은 집어치우시오.”
어째서인지 눈앞의 이탁오가 보자마자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경정항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러나 이탁오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만면에 웃음 가득한 채 뒷짐 지고 걸으면서 무슨 옛이야기 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장거정 그이는, 실로 이 땅에 조정이 있은 이래로 보기 드문 명재상이라 할 만하지요. 비단 우리 국조(國朝, 현재의 왕조)뿐 아니라 그전까지 모두 합해도 그렇지요. 참신한 새 법으로 온 나라의 짜임새를 뒤튼 것은 왕안석과 같고, 도성 한 구석에 앉아 혼란한 천하를 바로잡은 것은 소하와도 같습니다.
헌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지요. 우리의 장 대인은 고작 십여 년 사이에 온 중원의 법도를 바꾸었단 말이지요. 공사를 만들고, 무뢰배들을 모아 홍병위를 만들고, 도저히 바뀌지 않을 것만 같던 것을 모조리 바꾸었습니다. 왕안석과 소하에, 관중과 제갈무후까지 합세한다 한들 불가했을 일이지요.
그러면 대체 어떻게 장 수보는 그 대일통 한 마디를 밀어붙이고 밀어붙여 이토록 빠르게 온 강산을 뒤바꾼 것일까요?”
경정항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서생의 기질로 말미암아, 약간이나마 이탁오의 물음에 마음이 동하는 것은 금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의 답은 이렇습니다.
장거정 한 사람의 힘으로 나라를 바꾼 게 아닙니다. 그저 더 나은 삶을 바라는 백성의 마음을, 그 정직한 욕심을 일깨우고, 그 엄청난 힘을 빌렸을 뿐이지요.
처음에는 제법 그럴듯했습니다. 서계 그분이 수보로 계실 때만 해도, 나라의 기강이 바로잡히고, 경장은 오로지 불편한 것을 편하게 만드는 데만 힘쓰는 듯 해보였으니까요.
그리하여 사람들은 기꺼이, 그간 저들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힘을 조정의 경장에 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하나둘씩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 힘이 우리에게서 말미암았다면, 마땅히 우리 뜻대로 써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우리가 힘껏 나라를 위하는 만큼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장 먼저 깨달은 이들이 헌법을 제정하자 주장하며 북경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장거정 그이는 천안문의 변으로써 이에 답했지요.
그 다음으로 불만 품은 향신들에게, 조정은 그들의 생업과 토지를 빼앗아 온갖 공사를 세운 뒤 그들이 바라마지않던 벼슬을 나눠주었습니다. 묵묵히 관노야들의 명을 따르던 백성들에게는, 땅과 일자리를,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약속했지요.
그리하여 농리공사니 상행공사니 하는, 가만 있어도 수십 년 안으로 무너질 어설픈 제도가 몇 년쯤은 그럭저럭 굴러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조정은 그들에게 더 줄 수 있는 것이 없고, 반면 그들을 억압하는 조정의 서슬은 퍼렇기만 합니다. 원래 사람은, 처음부터 없던 것에는 원한을 품지 않지만, 주어졌다가 빼앗기는 것에는 엄청난 원망을 품기 마련이지요.”
“허나 장 수보가 대일통을 내세운 이래로 나라의 기강은 바르게 되었고, 그대들이 일으킨 전란으로 인해 겨우 지난 몇 해 동안 민생이 어려워졌을 뿐이오. 설령 그릇된 생각과 그대들의 사이한 꼬드김으로 조정에 원한을 품는다 한들, 그들이 어찌 반역에 따라나서겠소?”
그러나 이탁오는 조금도 움찔하지 않고, 도리어 신나게 비웃을 뿐. 그러나 그 비웃음 이면에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있음을 느낀 경정향은 차마 귀를 닫을 수 없었다.
“하하, 틀렸습니다! 반역이라뇨?
반역을 저지르기 위해서라면야, 군사도 수십만쯤은 모아야 하고, 그들에게 쥐여줄 병장기와 그들을 먹일 군량도 수없이 필요하겠지요. 말씀하신 대로 반역은 참 준비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나라의 백성 중 절반 넘는 수가 장강 이남에 살고, 나라의 재보 또한 절반 족히 넘게 이곳 강남에서 나옵니다. 그러니 강남 사민(士民)이 한뜻으로 뭉쳐 조정에 반한다면, 이는 백성이 조정에 반역을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조정이 백성에 반역을 저지른 것이지요. 우리는 그저, 백성들에게 말해준 것뿐입니다. 이제는 조정에게 그 사실을 깨우쳐줄 때가 되었다고.”
그러면서, 그 원수와 같은 책을 소매에서 꺼내 펼쳐보이는 이탁오였다.
“이 모든 일을 이리도 공들여 설명하는 까닭은, 단 하나입니다. 응천순무 그대로 하여금, 이미 일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지요. 자, 보시지요.”
이탁오가 짚은 대목에는 이런 주해가 달려 있었다.
‘나라가 있기 전에 사람이 있었다. 공(公)이 생기기 전에 사(私)가 있었다.
사람이 나(己)만을 위하다가 도리어 나를 해치는 이치를 깨달았으므로, 비로소 공(公)을 깨닫고 예(禮)를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私)가 없는 공(公)은 참된 공이 아니며, 나 한 사람만이 옳다며 남으로 하여금 따르라 강요하는 것은 참된 예가 아니다.
예에 어긋나고 공을 사칭하는 것에 복종한다면 이 또한 예가 아니다. 나라의 처사가 바르지 않을 때, 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복종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예에 맞다.’
불복종. 아무리 요란하다 한들, 고작해야 세금을 내지 않겠노라며 드러눕는 것이요, 작게는 일터에 나가 일하는 대신 게으름으로 소일하는 것이다.
줄어들 줄만 알았던 세금이 도로 무거워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란을 일으킨다면, 이에 따르려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 테다. 하지만 다 함께 드러누움으로써, 마음대로 저들에게 목줄 채우려 하는 조정에게 본때를 보여주자고만 한다면, 그때는 솔깃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을 터.
“이 책이 퍼지는 것을 신호로 삼아, 곳곳에서 우리의 뜻에 동조하는 이들이 이른바 ‘불복종’을 함께 행하자며 모두를 설득하러 나설 것입니다.
조정이 창칼로 진압하기를 바란다면야, 그리 하라 하지요. 한두 고을이라면, 개중 우두머리를 색출하고 본보기로 잔인하게 죽이는 정도로도 진압할 수 있을 겁니다.
허나 온 강남이 드러눕는데, 대체 이들 모두를 진압할 창칼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탁오가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이미 이 거대한 불복종, 또는 파업의 물결은 장강을 따라 퍼져나가고 있었다.
--- *** ---
작중 인용된 이탁오의 언설은, 원 역사에서 이탁오가 남긴 『분서(불태워야 할 책)』와 『장서(감춰둬야 할 책)』 등에서 착안하여 이런저런 다른 내용을 덧붙인 것입니다.
원 역사의 경정향은 이탁오의 가까운 지인인 동시에 학문적인 적대자였습니다. 이탁오가 막 관직생활을 하던 무렵 그 아우 경정리와 가까워진 것을 계기로 서로 면식을 트게 된 두 사람은, 이후 이탁오가 본격적으로 방랑하는 학자(겸 당대의 스타)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자 격렬한 논쟁을 주고받게 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러면서도 교우를 이어갔고, 경정향과 이탁오의 지인과 제자들 역시 양다리를 걸쳐, 한쪽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계속 교류를 이어가곤 했지요. (이는 당시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학문적으로 크게 대립하고 있던 양명학자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말년의 경정향은 지인들의 중재로 이탁오와 끝내 화해하게 되었으나, 그가 일으킨 반(反) 이탁오 여론은 경정향 사후에 더욱 부풀려져 끝내 이탁오가 옥중에서 자살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평점, 즉 이미 있는 텍스트에 주석이나 코멘트를 달고 이를 그대로 출판하는 것은 명말 대중문학 시장에서 유행하는 마케팅 기법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이런 문학의 주 소비층이었던 도시 소시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양명학 좌파 학자(대표적으로 이탁오)들의 평점을 받은 대중소설이나 희곡들은 불티나게 팔렸고, 나중에는 학자들이 아직 읽어보지도 못한 책에 그 학자의 이름을 가탁한 평점이 찍혀 팔리는 일도 있었지요.
명말, 특히 기존의 농촌질서가 점차 해체 일변도를 걸어가던 가정 연간 이후로 도시에 유입된 하층민들과 점차 몰락한 사인 계층이 뒤섞여 새로운 소시민 집단이 출현하는 기미가 나타나게 되었음은 이전 화에 언급한 바 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작중 시점보다 한 세대 뒤인 만력 연간에 이른바 민변(民變)이 빈발하여, 이러한 소시민과 도시 노동자들이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할 가능성을 보인 바 있습니다.
장거정이 사망하고 만력제의 태업과 사치, 만력삼대정 등으로 인해 장거정이 겨우 호전시켜놓은 재정이 붕괴 직전까지 몰리면서, 황실은 점차 환관들을 지방에 내려보내 특별 징세를 하는 방식으로 황실 재정을 충당하게 됩니다. 특히 농촌에 비해 ‘뜯어먹을’ 게 많은 도시 지역은 이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었고, 이들은 지역의 무뢰배를 동원해 온갖 행패를 부리게 됩니다. 이에 항의하는 도시민들은, 몰락한 지식인과 피해를 입은 특정 직업의 노동자(예컨대 소주에서는 환관에게 ‘찍혀’ 과중한 세금으로 고통받던 방직업계 종사자들 수천 명이 민변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를 중심으로 뭉쳐 수천~수만 단위로 거대한 항의 시위를 벌이곤 했습니다.
그러나 장거정 일파가 실각한 이후 다시 환관들이 발호하기 시작한 명 조정은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가혹한 진압으로 일관하곤 했습니다. 한 예로, 악명 높은 광세태감 진봉은, 1601년 무창에서 민변이 일어나자 오히려 연회를 열고는, 시위대에게 불화살을 쏘아 태워 죽이도록 지시하고는 그 모습을 구경하며 즐거워했다고 전해집니다. 명말의 모습이 대체로 이러하였으니, 농민의 손으로 세워진 명이 농민의 손에 멸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