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52화 (251/259)

75. 망진자호 (4)

“늦는구만.” 

남경 기린문(麒麟門)에 오른 꺽정이가 주변을 둘러보곤 한 마디 툭 던졌다.

“대국이 괜히 대국입니까. 이제 막 소주나 항주처럼 조금 소식 빠른 곳에나 소문이 퍼졌을 테니, 앞으로 한 두어 달은 더 기다려야 할 겝니다.”

이탁오가 옆에서, 어째 변명하는 말투로 토를 달았다.

남경 성벽 바깥을 둘러싼 관군 진영은 어제와 변함이 없었고, 성벽에서 내다보이는 진영 뒤편 논밭에는 가끔 농민들만 오갈 뿐이었다.

장거정의 지시에 따라 응천순무 경정향은 성문 몇 곳과 옛 황궁, 그리고 효릉(孝陵, 주원장과 황후 마씨의 능묘)에만 관군을 남겨 지키게끔 하고 그 외의 모든 군사로는 남경을 에워쌌다.

“저들이 언제까지 저렇게 성 주변을 에워싸고만 있을 것 같소?”

“그야 대불복에 참여한 백성들이 여기에 질려서든 배가 주려서든 도로 일터로 돌아올 때까지 저렇게 지키고 있겠지요.”

온 강남이 이토록 반란 아닌 반란을 일으켰건만, 반역의 역(逆) 자는 말할 것도 없고 주씨의 주(朱) 자와 발음 비슷한 돼지 저(猪) 자도 쓰지 못하게 했던 명 조정이 지금껏 저렇게 도시 에워싸고 지키기만 하고 있는 까닭은, 바로 강남 전체가 이번 일에 동참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조금이라도 그 드러누운 대오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겉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결말만이 남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때도 얘기했지만, 제법 괜찮은 계책입니다. 성 안에는 벌써부터 앞날 걱정하는 사람들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있더군요.”

당장 남경 관아를 차지하고 앉아, 강남 사민들의 뜻으로 새로 남경 조정을 꾸릴 궁리를 미리 조금씩 해나가고 있는 오승은만 해도, 이 걱정에 요새 밤잠을 설치곤 했다.

꺽정이와 이탁오는 물론이요 남경의 백성들을 맞이할 때도 눈에 선 핏발을 애써 감추면서 아무 걱정 없는 시늉을 하곤 했지만, 이탁오의 눈썰미를 피할 수는 없었다.

“뭐, 놈들이 급습해오지만 않는다면 별 탈은 없을 게요.”

한말(漢末)에 조맹덕(조조)이 적벽에서 당한 험한 꼴을 면하기 위해, 쌀을 모두 처분한 이순신과 히데요시의 수군은 석 달 뒤를 기약하며 물러났다. 

만에 하나 그 전에 남경이 무너진다 한들, 꺽정이는 이미 남경 저자 곳곳을 도적의 눈썰미로 눈여겨보았으므로, 그사이 이탁오와 오승은, 해서 등을 데리고 야무지게 숨어다닐 자신이 있었다.

물론 꺽정이가 믿는 바는 따로 있었다.

“내 그때 왕직 그놈의 신상과 사당을 보여주며 말하지 않았소? 이 나라 백성을 믿는다고.”

그러나 꺽정이가 아무리 성문 위에서 단언한들 여전히 포위망 바깥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리고 내일도, 또 그 다음 날도 별반 달라질 바는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두 달이 흘러갔다.

삼대(三代)는 물론이요 당요(唐堯, 요임금)의 대까지 상고해본들 지금과 같은 때가 또 언제 있었을까.

그 근원을 묻는다면, 누군가는 장태악(장거정)의 변법을 논하고, 또 누군가는 조선국 임거정을 말하겠지만, 절동(浙東) 곳곳을 유랑하며 관의 눈길을 피해 다니던 학자 하심은(何心隱)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지금부터 두어 세대 전인 정덕(正德) 연간, 왕양명(왕수인王守仁) 선생이 올바른 도를 깨우쳐, 널리 배움을 펼치고 또 실천하였다. 강서성 길안(吉安)에서 일어난 이 새 학풍은 곧 온 강남을 휩쓸게 되었다.

누군가는 백성들 사이를 돌며 쉬운 말로 왕학의 이치를 설파하고, 누군가는 강회(講會, 학회)를 열어 후학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나날이 변해가는 이 세상에 학문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이 되는 현실을 타파하고, 대명(大明)이라는 국호가 부끄럽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끝내 배우기만 하고 행하지 못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 왕학의 논변이 불가의 선문답만큼 허황되다는 정주(程朱)의 후학들(성리학자) 말이 꼭 틀렸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심은은 저의 보잘것없는 초막에 모인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스승님께서 행하지 못하신 것이 아니라, 조정의 간사한 무리가 막은 것이요, 또 천시(天時)를 만나지 못하신 것 뿐입니다.”

“흥, 그야말로 어리석은 소리다. 두려워서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못할 뿐이지. 그 용렬함이 어디 세상을 백날 탓한다고 사라질 성싶으냐.”

지금껏 하심은 그를 관으로부터, 또 홍병위들로부터 감추어준 제자들을 불러놓고 이토록 면박을 주는 까닭은 무엇인가?

바로 그 옛날 왕양명 선생이 주창하였으나 엉뚱하게도 조선의 도적과 선비들이 완성한 도리를 이룰 방도가 마침내 이 땅에 나타났건만, 마지막 한 걸음을 앞두고 모두가 주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직례 일대의 관군이 모두 남경으로 모여 성벽 주변을 에워쌌다는 소문은, 곧 이 포위망을 뚫고 남경 안쪽의 역도와 연락을 주고받으려 하는 자는 곧 같은 역도로 다루겠다는 공고와 함께 이곳 길안부에도 닿았다.

“국민당 당안(黨案, 당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것은 너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나 보구나! 우리 당이 이번 거사를 준비한 것이 몇 년인데, 이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가게 생겼어!”

국민당이 동창의 눈을 피해 강남의 사대부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던 비결 중 하나는, 그만큼 당 안에서 공모한 ‘거사’라는 게 실로 소략하였기 때문이었다.

첫째, 대일통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서책이 나도는 것을 신호로 삼아, 그대로 드러누워 강남 전역을 반란 아닌 반란으로 이끈다. 

둘째, 이로 말미암아 온 강남이 멈추게 되면, 때를 보아 남경으로 모여 새 조정을 선포하고 장거정의 내각을 무너뜨린다. 

이처럼 계책은 소략하고 동참할 때 넘어야 할 문턱은 낮았으므로, 계책의 첫째 단락은 별반 어려움 없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당장 이곳 길안부에 속한 위병과 홍병위 모두 다른 강남의 주군현과 마찬가지로 그저 관아에 묶여 전전긍긍하고 있을 뿐 감히 손찌검 한 번 못 하고 있었다.

“그, 그렇지만, 스승님. 저희는 그저 유생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작금 조정이 큰 잘못을 많이 저질렀다지만...”

지금 하심은이 은거하고 있는 이곳 길안부에서 남경까지는 일천하고도 일백 리(약 630km). 중원의 기준으로는 그리 멀다고는 못할 거리였다. 

그런데 남경의 관군이 갑자기 허둥대기를 멈추고, 딱 남경 하나만 에워싼 뒤 각지에 경고하는 글을 돌리면서 일이 크게 틀어져버렸다.

누구든 남경의 오승은과 임거정을 만나고자 다가간다면, 곧장 관군에게 붙잡혀 이름이 드러날 것이요, 어쩌면 이 일이 끝난 뒤 일벌백계의 대상이 되어 구족이 멸함을 당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반면 그저 한때의 즐거움으로 이번 대불복을 넘기고, 초야에 고개 묻은 채 가만히 있는다면, 어떤 대풍(大風)이 불더라도 그들을 휩쓸고 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저 일을 손에서 내려놓은 자들까지 일일이 벌한다면 강남에 백성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

“멍청한 놈들! 장거정 그자가 바로 그것을 노리고 있는 게다! 언제까지 나라 바깥의 사람들이 우리보다 앞서나간다고, 우리가 꿈으로만 두고 있는 것을 실제로 이룬다고 부러워만 하고 앉아있으려 하느냐? 지금 이때가 아니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하심은이 호통을 치려던 차, 밖에서 망을 보던 제자 하나가 뛰쳐들어왔다.

“스승님, 큰일입니다! 홍병위, 홍병위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얼른 몸을 피하십시오!”

허나 하심은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 바깥에서 우렁차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 하 선생! 저 홍병위 파총(把摠) 왕삼덕(王三德)입니다! 해치려 하는 것이 아니니 부디 모습을 숨기지 말아 주십시오!”

왕삼덕은 길안부 일대의 홍병위 중에서도 유별나게 악명이 높았다. 

홍병위가 점차 자리를 잡으면서 나름대로 기율이 생기고, 그 기율을 어기는 자를 밀고하면 어긴 자의 직위를 주는 제도까지 시행하게 되면서, 차마 멀쩡한 백성을 (과하게는) 괴롭히지 못하고 그들이 비화인(非華人)이라 지목한 자들을 가혹하게 때려잡는 자들이 꽤 많았는데, 왕삼덕은 그 안에 들었다.

그럼에도 딴에는 원칙을 지킨다고, 비화인 하나만 두들겨패고 재산을 빼앗을 뿐 그 친척까지 해한다던가 집안의 여인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악명이 자자한 까닭은, 그저 물정 모르고 무뢰한 노릇을 계속 이어가던 저의 상관 여럿을 제끼고 그 자리에 오른 사람답게 비화인 하나에 대해서는 실로 악독하게 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심은은 홍병위라는 작자들이 생기기도 전에 이미 장거정의 원한을 단단히 산 몸. 그러므로 제자들은 모두 왕삼덕 이름 석 자에 경악하였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도망치기도 늦었다. 하심은은 제자들을 시켜 문을 활짝 열고 객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곧 방 안에 든 왕삼덕은, 그 부리부리한 눈빛을 감추지도, 겉치레 인사를 꺼내지도 않고 대뜸 말했다. 

“꿈에 휘왕을 뵈었습니다.”

휘왕이 누구인가? 혹자는 휘왕이 본디 왕직이라는 왜구 수장으로, 간악한 도적이 그저 왕위를 참칭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하심은을 비롯해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진실임을 알았다. 허나 휘왕사가 전국 곳곳에 세워진 지금, 어지간한 백성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휘왕은 휘주 출신의 염상(鹽商)으로, 생전 부러움 없을 부귀영화를 누린 뒤 죽기 전 북경의 황궁에 들어가 황상께 바른 행실을 권하였다고 했다. 이것이 상인들 사이에 도는 소문이었는데, 실제로 휘왕사가 널리 세워질 무렵 해금령이 풀리고 상인들의 이윤이 크게 늘어났으므로 제법 정설처럼 여겨지곤 했다.

또한 농민들 사이에서는, 휘왕은 일개 농군의 아들이었으나, 바다 한가운데 봉래산에서 신선의 술법을 배웠다고도 하였다. 그 재주로 어느 작은 섬에서 임금 노릇을 하다가, 마침내 중원으로 돌아와 간신배 엄숭을 몰아내고는 우화등선을 하였다는 것이 그들 사이에 도는 이야기였다.

휘왕사에 찾아와 지전(紙錢) 불사르는 사람이 누구든, 휘왕은 곧 그와 같은 집안의 사람이요, 그와 같이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는 신세에서 입신하여 – 그게 무엇인지는 의견이 다들 갈렸으나 – 무언가 엄청난 위업을 이루어낸 사람이었다.

그리고 휘왕사에 찾아가는 사람은, 곧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자. 우화등선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그저 이 땅의 어떤 가난하고 박복한 집에서 태어났든 간에 떠날 때에는 태어날 때보다 조금 더 나은 집안을 만들고 가기를, 이듬해 여름이면 새로 파여 사라질 논두렁 같은 삶이 아니라 영영 잊히지 않는 저 휘왕 같은 삶을 살기를 바랐다.

“그저 ‘네가 하고픈 것을 하라’라고만 하셨지요.”

그 말을 의심하고 있음을 눈썹으로 보이는 하심은에게 왕삼덕이 부연하였다.

“선생, 저는 소싯적부터 게으르고 품행이 엉망이라 무뢰배 노릇이 천성에 맞았습니다. 그렇게 그냥 천성대로 살다가 길바닥에 널부러져 죽을 줄 알았는데, 홍병위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저 평소랑 별반 다를 것 없이 살아도, 관의 위세를 업고 거들먹거릴 수 있다 하니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휘왕이라는 것은 고작해야 도적 왕직이니, 그 신령함이란 결국 사람이 스스로 자기 마음 속에서 지어내어 가져다 붙인 것에 불과할 테다. 

그러니 왕삼덕 꿈 속의 휘왕이 무어라 말했든, 실제로는 그저 자신이 평소 생각하고 몰두하던 바가 남의 모습을 빌려 나타난 것 아니겠는가.

그런 속셈을 감추며 하심은이 은근히 물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양지(良知)가 있는 법이지. 그 생각 무엇인지, 이 노인네에게도 한 번 들려줄 수 있겠는가.”

“애초에 그러려고 선생을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홍병위 권세를 믿고 날뛰던 윗사람 여럿의 품행을 고변하여 파총의 직까지 오른 왕삼덕이었다.

“... 그렇게 지내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 같은 놈도 나라의 사직에 보탬 될 길이 있다는 걸요. 살면서 그런 보람을 느껴볼 일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그런 보람을, 멀쩡한 사람을 흠씬 두들겨패고 그 집을 불태울 때 느꼈다는 점이 문제였으나, 하심은은 그런 점에는 구애받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금번 이 반역, 아차, 불복을 두고, 대체 뻔뻔한 비화인들이 무어라 떠드는지 듣고자 몇 사람 붙잡고 상냥히 물어봤더니,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이 일하여 얻은 몫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때 의문이 맺혔습니다. 농사꾼들이야, 저들이 땀 흘려 곡식을 거두니 그 곡식이 저의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사직을 위해 일한 우리들은, 아무리 천하고 배운 게 없다 한들 그 사직의 일에 대해 한두 토막쯤은 우리 목소리를 낼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멀리 남경의 이탁오가 경정향에게 했던 말, 장거정의 변법은 오로지 그런 힘을 저들이 쥐고 있는 줄도 몰랐던 백성을 움직여 이루었다는 말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음은 꿈에도 알 리 없는 왕삼덕은, 그저 하심은에게 물을 뿐이었다.

“그러니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심은의 숙고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함께 남경으로 가세나.”

“예?”

“우리 국민당 – 자네도 지금쯤이면 한두 번쯤은 들어봤겠지 – 이, 자네가 말하는 그 반역을 하러 남경으로 모일 생각이라네. 그러나 가장 먼저 고개 내미는 놈이 가장 호되게 얻어맞을 수밖에 없는 법인지라, 다들 우물쭈물하며 거북이 시늉을 하고 있지.

자네만큼 표한(驃悍)한 사람이라면 그만큼 의협심도 있을 터.”

“그렇지만 저는 홍병위입니다. 그런 일에 함께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겐가? 자네가 말한 것처럼, 사직을 위하는 길에 한몫 거들었다면 마땅히 사직의 앞날을 정하는 데도 응당의 몫을 맡을 수 있어야 하는 법. 내 제자들보다도 더 이 이치를 잘 깨우치지 않았는가?

자네가 싫다면야, 오늘 이 자리를 없던 것으로 할 수도 있네. 그러나 깊게 생각해보게. 그렇게 한 번 품은 의문이, 지금의 이 불복이 한바탕 소동으로, 쉬쉬하며 감추는 한 토막 기억으로 줄어든 뒤라고 사라지겠는가? 아니면 평생 ‘그때 그랬더라면’하는 후회로 남겠는가?”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고 또 저의 편으로 끌어들였던 하심은의 언변에 왕삼덕 마음은 금방 동하고야 말았다. 물론 하심은으로서는, 남을 속이거나 꼬드기는 게 아니라 이미 있던 불꽃 – 장거정이 저도 모르게 피워올린 불씨 – 에 부채질만 하였을 뿐이라 하겠지만.

그렇게 하심은과 왕삼덕, 그리고 저 홍병위 파총 왕 아무개도 가는데 저들이라고 못 갈 게 무어냐며 자격지심에 이끌린 몇몇 제자들은 남경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먼길 갈 채비를 하고자 길안부 저자를 먼저 들렸는데, 마침내 저자를 떠날 무렵에는 행렬이 제법 늘어났다.

길안 경계를 벗어날 무렵에는, 행상 노릇을 하던 아무개가 저의 봇짐에 들어 있던 옷감을 조금 꺼내, ‘강소성 길안부’ 여섯 글자를 쓰고는 나무 장대에 묶어 깃발을 만들었다.

또 어디서 들은 풍월은 있던 자는 그 옆에 ‘인민의 조정을 세우고자 남경으로 가노라’ 일곱 글자를 써서 붙이고, 그 뒤를 따라 ‘우리의 몫을 되찾자’, ‘조세는 오로지 공론에 따라’ 등등, 깃발이 주변에 하나둘씩 늘어났다.

민심이 심상찮음을 알고 좌불안석으로 지내던 홍병위 무 아무개는, 왕삼덕을 알아보고 은근슬쩍 대열에 합류하였다.

무가 녀석과 평생 형동생처럼 지내던 군졸 염가는, 피만 안 나눈 저의 아우가 홀로 반역도당으로 몰리는 꼴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고로, 알량한 의협심으로 따라붙었다.

일평생 굽신거리며 살다가 처음으로 관에 저항하고서, 좌불안석으로 후회하고 있던 농민 장가는, 이렇게 살 바에야 아예 끝장을 보자는 심정으로 논두렁에서 물 질질 흘리며 길로 올라와 맨몸으로 합류했다.

솔직히 말하면 공사에 압류당한 저의 상행을 되찾을 욕심 하나만 있던 상인 경씨는, 소문을 듣자마자 같은 공사의 사람들 – 한때는 저의 아랫사람들이었던 - 을 모조리 끌고 나와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훗날, 도통 말을 듣지 않고 품삯이나 올려달라 하는 일꾼들로 고생하게 되었으나, 이때는 그리 될 줄 꿈에도 몰랐다.)

대체 어디를 가느냐, 그러다가 다 같이 반역의 도당으로 몰려 개죽음을 당하면 어찌하려 하느냐 만류하던 역졸 이씨 노인은, 노인을 잘 모시라는 주변 사람들 말에 건장한 젊은이 여럿이 그를 부축하고 나서는 바람에 졸지에 대열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렇게 한 줌 서생으로 시작한 대열은 남창(南昌) 지날 무렵에는 벌써 수천, 아니, 수만 가까이 불어나게 되었다. 

서생 몇몇이 장강을 지나는 배를 빌려 하심은 선생을 편히 모시려 하였으나, 하심은이 자신이 배를 탈 것 같으면 다른 이들도 모두 타야만 한다고 고집하였고, 이 무렵에는 장강의 모든 배를 끌어모아도 도저히 남경으로 향하는 모든 이들을 실을 수 없었으므로 끝내 서생들은 뜻을 접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파양호 변두리를 빙 돌아, 온갖 물줄기가 장강 하나로 합류하는 구강에 닿을 무렵, 하심은은 이러한 무리가 길안 한 곳뿐 아니라 나머지 모든 곳에서도 기나긴 줄기를 이루어 남경으로 향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대통(大通)하였구나! 막혔던 것이 드디어 크게 뚫렸어!”

하심은이 어린아이처럼 기쁘게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처음 용기를 낸 몇몇이 작은 샘을 이루고, 그것이 흘러내려가며 도랑이 되고, 개울이 되고, 마침내 대강(大江)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남경을 에워싸고 있던 관군의 장벽 주변에, 각지에서 몰려든 백성으로 해자가 한 겹, 두 겹, 세 겹... 계속 둘러졌다.

처음에는 강소성 일대에서만 모이던 사람들은, 어느새 강서, 절강, 안휘 등에서 모여들었다, 이제 조금 그치려나 싶으면 저 멀리서 또 끝이 보이지 않는 대열이 나아오는 것이 보였다. 

조정의 명에 불복하겠다며 꽁꽁 걸어잠갔던 곳간에서는 이들을 먹이기 위한 – 대개는 팔아서 소소한 이득을 얻기 위한 – 곡식이 끝없이 나와 장강을 타고 오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오는 길에 여기저기서 만들어 들고 온 깃발은, 따뜻한 여름 날씨에 노숙하는 사람들 사이 곳곳에 세워져 언뜻 보면 무슨 군영과도 같은 느낌을 물씬 풍겼다.

“깃발을 보아하니, 올 사람들은 다 온 것 같군요. 걸어서 남경까지 올 작정을 쉬이 할 수 있는 고을에서는 모두 모였습니다.”

이탁오가 이순신과 히데요시 왔을 때 슬쩍하였던 백리안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 그렇기는 한데, 막상 남경까지 오니까 다들 또 멈칫하는구려. 포위망을 역으로 포위하는 형세가 되었는데 누구도 선뜻 뚫고 나오려 하지는 않는 걸 보니.”

“그야, 암만 머릿수가 많다 한들 맨손으로 병장기 든 군사들 앞에 나아오기가 여간 쉬운 게 아니니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겠군. 다들 여기까지 와 주는 성의를 보였으니, 맞이하는 쪽에서 나름대로 답례를 해야 하지 않겠소?”

이탁오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소문이 퍼졌는지, 이제 다시 슬슬 불안함이 퍼져나가던 남경 저자도 빠르게 소식이 돌고, 곧 외성 성벽 위로 사람들이 가득 찼다.

그들의 뜨거우면서도 조용한 눈빛을 받으며, 꺽정이와 이탁오, 오승은과 해서 네 사람은 외성 남서쪽의 대안덕문(大安德門)을 나섰다.

“민망한 일이오.”

평소처럼 깐깐하기만 한 표정의 해서가 곁에서 한 마디 던졌다. 그 무덤덤함 이면에 은근하면서도 사무치는 감동이 서려 있음을, 해서 본인을 제한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것이 중화 사람들의 민심임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더 나은 길을 미리 택할 수 있었을 텐데. 끝내 이를 알지 못하였을 뿐더러, 심지어 임 당수 그대가 우리 백성을 믿을 때조차 이 사람은 은연중에 의심하였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소.”

해서처럼, 늘상 짓는 장난꾸러기 얼굴 이면에 감동을 숨긴 이탁오가 저의 평을 대답으로 삼아 내놓았다.

“아니, 그것은 잘못된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 중화 사람들의 민심인 것은 맞지만, 장거정 그이가 먼저 중화를 내세우며 그간의 썩어 문드러지고 낡아빠진 것을 모조리 치우고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사람들의 생각이 빠르게 바뀔 리도 없었겠지요.

물론, 장 수보가 없었더라도 이웃나라 조선에서 솔솔 다른 바람이 꾸준히 불어왔을 테니, 감히 단정하건대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기는 했겠지만요.”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 주변을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지나친 네 사람은, 어느덧 남경과 저 바깥의 강남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관군 군영의 영문(營門)에 닿았다.

지난 며칠간 밤잠 설친 듯한 – 앞뒤로 저들의 몇 배를 가뿐히 넘길 만한 수의 백성이 버티고 있으니 어찌 편히 잠을 이루겠는가 – 응천순무 경정향이 문 밖으로 나와 그들 앞을 막았다.

“조정의 명은 변함없소. 천조 대명에 충성하는 자로서, 우리는 이곳을 지킬 것이오. 성에서 누구도 나갈 수 없으며, 누구도 들어갈 수 없소!” 

기세 쥐어짜 외치는 경정향이었다. 

꺽정이가 무어라 신랄한 대꾸 하기도 전, 가만 있던 오승은이 먼저 나섰다. 

“응천순무 경 대인, 그대가 정녕 대명 사직에 충성한다면, 사람과 창칼로 세운 이 장벽을 즉시 허무시오!”

오승은 본인이 항주에서 제천대성의 탈을 썼을 때 (또는 오승은의 탈을 벗었을 때) 내었던 카랑카랑하고도 우렁찬 목소리.

성벽 위에서 호응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벽을 허물어라!”

“대명과 종묘사직의 이름으로, 우리를 밟고 지나가기 전에는 이 포위를 풀 수 없소!”

비틀거리던 경정향이 온몸의 힘을 쥐어짜며 답했다.

이번에는 오승은보다도 성벽 위의 남경 사민(士民)들이 더 빨랐다.

“우리가 곧 사직이다!” 

그리고 군영 반대편, 남경을 에워싼 백성들에게까지 족히 들릴 만한 외침이었다.

“우리가 곧 사직이다! 벽을 허물어라!”

“우리가 곧 사직이다! 벽을 허물어라!”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좌고우면하는 경정향의 뒤로, 그보다도 더 황망해 보이는 군교 여럿이 달려왔다.

“순무 대인! 남서쪽의 난민(亂民)들이 군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창파문(滄波門) 쪽에서의 급보입니다! 이쪽 성문의 소식을 들은 그쪽의 난민들이 군영 앞으로 나아와 겁박하고 있다고...”

“남쪽과 동남쪽에서도 난민들이 움직입니다! 벌써 군영에 닿았습니다!”

“... 길을 터주어라.”

모든 기력이 다한 채 툭 던진 그 말이 어찌 이리도 잘 들린다는 말인가. 우레와 같은 환호성 속에서 넋을 잃기 전 경정향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미리 정해둔 우두머리는 없었으나, 각지 주군현에서 몰려든 무리는 대개 각각의 무리를 이끄는 사람이 한둘씩은 있었다. 많은 경우는 국민당에 속하였던 서생들이었지만, 간혹 그 곁에 엉뚱한 동행을 데리고 있는 경우도, 아예 국민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온 경우도 없지 않았다.

임거정과 오승은, 이탁오, 해서 등을 만나러 성 안에 들어갔던 이들은, 곧 돌아와 저들의 동행들을 한데 모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번 일을 맞이하여 잠시나마 나머지 모두를 대변하여 결정하는 것을 허락해달라 하였으니, 그 함의를 아는 자들은 환호하고 모르는 자들도 덩달아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이렇게 자칭 남경 조정이 수립되고, 천하의 악독한 도적 임꺽정이는 대명 한가운데에서 승리를 훔치게 되었다. 

적어도 후대에 끝까지 임꺽정을 원망하며 장거정은 잘못이 없었다 주장하는 자들은 그렇게들 떠들곤 했다.

예로부터 당당하게 천명을 얻는 자들은, 말 위에 올라 중원을 휩쓸기도, 황성을 장악하여 선양을 쥐어짜내기도 하였다. 임꺽정은 그중 무엇도 하지 않고, 그저 요동과 황해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사이 대명의 후방인 강남을 찌르고 들어와 한바탕 해괴한 난리를 일으켰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딴 식으로 천명을 쟁취했다고 주장한 자들이야말로 임 당수 생전 말씀마따나 큰 도적에 불과하다고 반박하는 자들도 많았다.

물론 무슨 헛된 논쟁을 그리도 길게 끄느냐, 그때 임 당수가 남경에 들어오고 오승은과 해서 두 사람이 남경 조정을 선포하지 않았더라면 애시당초 네놈들에게 이런 논쟁을 벌일 자유가 있었을 것 같으냐 하는 자들은 훨씬 더 많았으므로, 이러한 논쟁은 대개 역사를 저들 머릿속의 놀잇감으로 즐기는 사람들의 유흥으로 끝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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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에서도 양명학자들, 특히 그중에서도 후대에 양명학 좌파로 흔히 통칭되는 보다 급진적인 학자들은 장거정의 독선적인 국정운영에 저항하여 탄압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들은 서민층을 상대로 한 대중 강연활동에 주력하였고, 인간의 이기심을 긍정하는 등 양명학 내에서도 급진적 면모를 보였습니다. 그중 하심은(본명은 양여원)은 이탁오보다 조금 앞서 두각을 드러낸 인물로, 만력 연간 초에 그가 서원을 운영하던 길안 근처에서 조세저항 운동이 벌어지자 이를 선동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게 됩니다. 그 이후 20여 년간 관의 눈을 피해 다니면서 강학 활동을 이어갔는데, 그를 찬양한 이탁오뿐 아니라 그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당대와 후대의 학자들도 하심은이 어디를 가든 엄청난 추종자들을 끌고 다녔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대중적 인기를 끌던 하심은은, 결국 장거정에게 아첨하고자 하였던 호북순무 왕지환의 지시로 투옥당해 1579년 옥사하게 됩니다. (반면 하심은과 함께 등장하는 왕삼덕은 가공의 인물입니다.)

작중 묘사되는 휘왕 왕직의 영웅화 내지는 숭배 현상은, 명말의 반란군 지도자 이자성의 사례에서 착안하였습니다. 혼란한 명말, 몰락한 말단 공무원(세관) 집안 출신으로 대제국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은, 북경을 함락시킨 후 청에 항복한 명군의 손에 허무하게 몰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억은 계속 부풀려졌고, 그는 일종의 민중영웅으로서 온갖 설화의 주인공이 되기에 이릅니다. ‘휘왕’ 왕직과 마찬가지로 설화 속의 이자성 역시 틈왕(闖王)이나 이틈(李闖) 등으로 불리곤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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