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53화 (252/259)

75. 망진자호 (5)

강남 각지에서 모여든 백성의 물결 앞에 남경을 에워싼 관군이 그대로 무너지고, 그 백성의 이름을 받든 국민당 사람들이 새로 조정을 칭하며 북경에 글을 전한 지도 한 달이 지났다.

동방 삼국이 일찍이 전한 바 있던 광복삼장을 지금이라도 받아들일 것을 강권하는 글이 끝없이 남경에서 올라왔다. 대불복은 끝났으나, 일터로 돌아간 강남 사람들의 소출은 쌀 한 톨, 은 한 냥조차 회수(淮水) 이북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끊어지지 않을 줄만 알았던 대운하의 수운이, 실어나를 물건이 없는 고로 마침내 끊어지고, 지금까지는 조정의 숨막히는 위엄에 억눌려 있던 북경은 이제는 언제고 들이닥칠지 모르는 오랑캐 군세와 그보다도 더 무서운 기근의 위협에 떨게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거느린 일본 무사들과 에스파냐군, 줄어들고 줄어들었으나 아직 삼만을 조금 넘는 정예한 군사들이 하루하루 급박해지는 산해관 방면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두 해 전, 임꺽정과 그 무리들이 사절단을 칭하며 머물던 성문 밖 벌판에 진을 치고, 노부나가는 장거정을 만나러 홀로 성 안에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 있다가, 가을 해 뉘엿뉘엿 저물고 개밥바라기 뜰 무렵에야 군영으로 돌아오니, 여기저기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고 그것을 부러워하는 인근 민가의 개들은 주린 배 참으며 힘껏 울었다.

한양의 절반을 불태우고, 요동과 요서에서는 전선이 무너지는 곳마다 나타나 신정부군이든, 여진 마병이든, 가장 무서운 조선군이든 틀어막는 공을 세웠던 노부나가의 군대는, 이제 처음의 모습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부러진 칼은 현지에서 새로 구하고, 망가진 갑옷은 대충 땜질하였다. 전투와 질병으로 생긴 전열 가운데의 빈틈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에서 병력과 함선을 쥐어짜내 겨우 보낸 원군과 말라카에서 탈출한 병사들로 채우기도 하고, 동방 군대에게 짓이겨진 명군 부대의 생존자로 채우기도 했다. 그렇게 에스파냐와 일본, 명의 구분은 나날이 희미해져만 갔다.

그 살갗의 색과 혀에 익은 말과는 무관하게, 노부나가 지나는 곳마다 병사들은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그렇게 천막 사이를 헤치고 한참 걸은 끝에, 마침내 자신의 군막에 닿았다.

딱히 부르지도 않았건만 일본 장수들과 에스파냐 장교들은 노부나가의 군막 앞에 모여들어 있었다.

안으로 들라 명하자마자, 저의 등 뒤를 따라 모두가 우르르 들어왔다.

“주군, 어찌 되었습니까?”

노부나가군 장수 중 최선임인 니와 나가히데가 일동을 대표하여 물었다. 내각수보 장거정을 만나고 온 일을 묻는 것임은 일본말이 짧은 에스파냐 장교들조차 짐작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그토록 중화, 중화 외치던 입장에서, 같은 명나라 사람을 쳐죽이기는 무엇하니 우리 ‘오랑캐’들이 선봉에 서서 남경 조정을 제압하기를 바라더라.”

다들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란이 일어났다면 군대로 제압함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소위 남경 조정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관군을 무너뜨린 뒤 딱히 스스로 지키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경정향이 가용한 군량으로 유지할 수 있는 만큼의 군사만을 겨우 추슬러 장강 북안(北岸)을 지키고 있었으니, 대운하를 따라 그대로 남하하면 남경을 금방 탈환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성 하나를 함락시키고,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도륙하고 난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는, 장거정이나 노부나가쯤 되는 이들의 몫이지 노부나가 휘하의 장수가 고민할 바는 아니었던 것이다.

“다들 알겠지만, 지금 전황은 죽었다 깨어나도 좋다고는 못 할 지경이다.”

여기에도 이의를 품는 자는 없었다. 요하를 넘으면서 이미 그리 여유롭지는 못했던 보급이 더욱 어려워진 한양의 맹 삼국군 역시 힘이 슬슬 부치게 되었기에 척계광이 지키는 영원성은 산해관 동쪽 최후의 보루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보급이 어렵다 한들, 이전만큼 마음대로 화포를 난사할 수 없을 뿐 군량은 제때 들어오는 동방 군대와, 도저히 그 덩치를 감당할 수 없어 있는 군사도 줄일 수밖에 없는 명 측 중 어느 쪽이 더 불리한지는 명백하였다.

그나마 조선에서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 바다를 건너 충청도를 치고 삼남에서 올라오는 곡식을 막을 계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이는 지난날 한양 습격으로 노획한 문서를 통해 조선국 방비의 허실(虛實)을 샅샅이 알게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아직은 계획에 불과하고, 군사와 배는 아직 천진과 내주(萊州)에 머물고 있었다.

“애시당초 우리가 이곳 중원까지 와서 이토록 싸워온 까닭이 무엇이었느냐. 무사로서 남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내각수보 장 공에게 절실한 무력을 빌려주고, 장 공은 이 광활한 중원의 힘으로써 우리가 못 다 이룬 바람을 이룰 수 있도록 해주기로 하였지.

그리고 이제 그 약조는 파해지기 직전까지 왔다.”

그제야 주군의 뜻을 조금은 헤아린 니와 나가히데가 맞장구를 쳤다.

“무사가 주군을 바꾸는 데 그만하면 족하고도 남지 않겠습니까.”

일본 무사들이 나가히데의 말에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나라에 딱히 큰 애착은 없던 에스파냐군 장교들도 반발하는 대신 이어질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다. 고작 쿠니 하나를 다스리는 무장과 그 가신 사이의 법도도 그리할진대, 하물며 대명의 내각수보가 먼저 저의 나라조차 간수하지 못하는 못난 꼴을 보였으니, 어찌 그자와 함께 무너지는 것을 택하겠느냐?”

노부나가의 말투가 아마가사키에서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쾌활함을 조금씩 되찾아갔다. 그 속 어딘가 씁쓸함이 함께 배어있다는 것은, 그와 대등하게 이야기 주고받을 수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린죠 히데요시도 이 자리에 없었기에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성 안에 들었을 때, 동창제독 풍보를 따로 만났다. 그 역시 이번 거사에 함께하기로 하였다.”

“하면 성내의 방비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겠군요.”

“아쉽지만 그렇지는 않다. 장거정이 결코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다들 알지 않더냐. 환관인 풍보보다도 더 궐 안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으니, 북경성 성문이야 어떻게 잘 열어젖힌다 치더라도 자금성부터는 오직 힘으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다.

대신 풍 공은 황제의 그 귀하신 몸을 빼돌려 천진으로 향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황제를 내세워, 조선을 치기 위해 그곳에 머물고 있는 군사를 끌어들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곳 직례 전체에 장거정이 끌어들일 수 있는 군사는 전혀 남지 않는 셈이니까.”

그렇게 거사를 성공시킨 뒤의 계획에 대해서도 누구 하나 묻지 않았다. 그 뒤의 일을 생각할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노부나가를 그만큼 믿었기 때문이었다.

“거사는 언제 결행하실 것인지요?”

“빠를수록 좋지 않겠느냐. 지금부터 한 시(2시간) 뒤까지 준비를 마쳐라. 광녕문을 지키는 장수 곽 아무개는 풍 공이 이미 포섭해두었으니, 우리가 무슨 요란을 떨든 자금성 안쪽으로는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요동과 요서에서 전선 곳곳을 누비며 싸웠던 노부나가군에게 한 시진이라면 저녁을 두둑하게 먹고 무장을 갖춘 뒤 잠시 눈까지 붙일 수 있을 만큼 넉넉하였다. 

군막 안의 제장(諸將)과 눈을 한 번씩 마주친 노부나가는, 더 군말을 붙이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우르르 뒤따라 몰려나온 장수들과 함께 군영 한가운데로 향한 노부나가는 병사들의 이목을 한데 모은 뒤 외쳤다.

“전군 들어라! 적은 자금성에 있다!”

황상 앞에 엎드려 담담히 그간 자신이 지은 신하로서의 죄를 읊은 장거정은, 퇴궐하지 않고 그대로 궐내의 문연각에 남아 『자치통감』을 읽고 있었다.

그 아비가 스스로 죽어가는 길을 택하도록 가뜩이나 흐려져 있던 눈을 속인 것이 누구였는지 고하고, 지금껏 자신이 이런 일을 해왔던 까닭이 무엇인지도 남김없이 고하였다.

황제의 공포에 질린 눈을 마주 보고 나오는 길은 유난히 홀가분하였다.

아마 지금쯤이면, 용상을 떠날 생각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황제 곁에 풍보가 나타나 자금성을 탈출할 ‘계책’을 진언하고 있을 것이다.

흔들리는 등불에 어슴푸레 보이는 시계의 바늘은 벌써 술시(戌時, 19~21시) 초입을 가리키고 있었다.

책을 내려놓고 잠시 일어나 걸으니, 서녘에 남은 박명(薄明)보다 동쪽 하늘이 더 밝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수보 대인! 큰일입니다!”

‘큰일’이라는 말에 임거정이 얽히지 않은 것이 대체 얼마만의 일이던가. 어떤 답이 돌아올 줄 알면서도 태연하게 금의위 위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왜장(倭將) 직전(오다 노부나가)이 저의 군세를 이끌고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미 광녕문이 무너졌고, 적은 동화문(東華門, 자금성 동문) 방면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경황이 원체 없었던지라, 금의위 위사는 물론이요 황망히 주변을 뛰어다니는 환관과 궁인들 중 그 누구도 장거정의 차분한 지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도지휘사에게 전하여라. 모든 군사를 모아, 죽음으로 동화문을 지켜라. 동창제독(풍보)이 황상을 모시고 피할 겨를을 벌어야 한다.”

그러고는 바깥을 향해 목청 높여 외쳤다.

“너희 궁인과 환관은 들어라! 이곳 문연각의 모든 장서를 챙겨 신무문(神武門) 쪽으로 몸을 피해라! 싸우고자 하는 자는 서책을 옮긴 뒤 돌아와도 좋다!”

물론 돌아오는 자는 백에 하나도 되지 않을 것이요, 문연각에서 빼낸 서책은 신무문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궁 안 어딘가 으슥한 곳에 버려지기 십상일 테다. 그러나 문연각과 함께 불타 사라지는 명운을 피할 수만 있다면 괜찮았다.

그렇게 내려야 할 지시를 모두 내린 장거정은 한바탕 돌개바람 휩쓸고 지나간 듯한 문연각 안으로 돌아가, 저들 궁인의 손을 피한 자치통감 – 통감이야 그리 구하기 어려운 책은 아니니, 불타 사라진들 아쉬움은 없을 테다 – 을 마저 집어들었다.

이 어려운 와중에도 누군가 저의 소임을 다한 자는 있었는지, 금의위는 어설프게 북경 시내에서 적을 막으려 애쓰는 대신 통자하(筒子河, 자금성 주변의 해자)와 성벽에 의지하여 적을 막고자 하는 듯하였다.

동화문에서 이곳 문연각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싸움에 대비하는 소리, 겁먹은 만큼이나 요란하게 외치는 함성, 그리고 멀찍이서 다가오는 쇳소리까지 가감 없이 전해져왔다. 처음에는 아스라이,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렷하게. 

조선의 군기를 모방하여 전장 어디든 끌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불랑기포가, 저를 만들 예산을 내어준 쪽을 향해 불을 뿜었다. 정예하기로는 조선의 악명 높은 조총수들에 비견할 만한 노부나가군 철포대가 사정없이 성벽 위를 휩쓸었다.

풍보는 이미 한참 전, 그러니까 노부나가가 거병하기도 전에 황상을 모시고 피신하였을 테니, 지금쯤이면 벌써 북경 성내를 벗어났을 테다.

그러니 무슨 용기에서인지 책을 옮긴 다음 돌아왔다가, 막상 전장의 무시무시한 소리를 듣자 발이 그대로 땅에 달라붙어 있는, 마당 건너편 저쪽 환관을 시켜 금의위로 하여금 물러나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거정은 끝내 입을 떼지 않았고, 내서당(內書堂, 환관의 교육기관)을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젊은 환관은 결국 동화문 반대편, 서쪽으로 부리나케 도망쳤다.

“수보 대인! 피하셔야 합니다! 이미 동화문의 성문이 부서졌습니다!”

금의위 교위 하나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달려왔다.

“이 사람은 무한한 황은을 입어 이 문연각 문턱을 넘었네. 재주가 부족하고 품성이 용렬하여 그 황은을 털끝만큼도 갚지 못하였는데, 어찌 이때를 만나 문연각을 버리고 달아나겠는가?

잊지 말게. 그대들이 동화문을 일각이라도 더 오래 붙들고 있을수록, 황상께서는 더욱 안온히 이어(移御)하실 수 있네.”

내각수보쯤 되는 사람이 이리 말했으니, 금의위 또한 아무런 의미 없는 저항을 그들의 목숨으로써 조금은 더 이어갈 수밖에 없을 테다. 죽음의 공포가 그들의 그럴듯한 체통과 명예를 압도하기 전까지는.

얼마나 지났을까. 앞서 보았던 그 교위와는 다른 자가 피칠갑을 한 채로 달려왔다.

“수보 대인! 즉시 피하십시오! 성벽을 더는 지킬 수 없습니다!”

장거정은 재차 시계를 보았다. 바늘 움직인 것을 보니, 일 각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껏 전장에서 단련된 중원 제일의 정병(精兵) 상대로 이만큼이나 버텼으면 다행이랄까. 금의위라는 자들은 저들의 권세를 믿고 힘없는 자들을 억누르는 데 능할 뿐이었으니.

“이미 말하였지 않은가? 이 사람은 피하지 않을 것이라고.”

재고를 청할 겨를도 없는지, 금의위 교위는 그저 대충 예를 갖추고서 어딘가로 후다닥 달려갔다. 장담컨대 동화문 쪽으로 향하는 것은 아닐 테다.

그렇게 다시 얼마나 지났을까. 

동화문 안쪽에서 총성이 몇 번 울리더니, 그대로 잦아들었다. 비명소리는 점차 멀어져가고, 쇠붙이끼리 부딪히는 소리는 아예 끊겼다.

포석을 밟으며 우르르 몰려오는 발소리. 그리고 알아듣지 못할 왜어(倭語) 호령. 

그러고 들려오는 것은, 뚜벅뚜벅, 한 사람의 인기척뿐이었다.

“늦었군.”

“이 사람은 임꺽정이 아니라서.”

문 열고 들이닥친 오다 노부나가가 대꾸했다.

“결국 망진자호라는 것은 나, 노부나가가 이루게 되었구려. 그렇지 않소?”

“호해조차 아방궁은 불태우지 못했고, 하다못해 임꺽정도 저의 임금 조상들 모신 종묘를 폭파할지언정 경복궁은 불사르지 않았지. 자네는 서초패왕이 겨우 해낸 일을 고작 하룻저녁에 이뤄낸 셈이야.”

노부나가가 의자를 끌고 와서 털썩 앉았다.

“자, 우선은 이 다음의 이야기를 마저 전해줘야지.”

“다음의 이야기라.”

“그래. 포악무도한 난신(亂臣) 장거정을 제압하고 사직을 구한 일본의 의로운 무장 직전신장 공이 황제 폐하의 재가를 받아 조정을 재건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간의 일을 덮어씌울 사람이 생겼으니 조선과도, 또 남경의 난신적자들과도 비로소 교섭을 할 수 있을 테고.

전세가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광복삼장은 받아들여야만 할 걸세. 그러나 저들 또한 강남 백성들의 힘을 빌렸으니 중원 전체를 적으로 돌릴 만한 가혹한 짓은 못할 것이야. 천진과 내주에 있는 군사들, 그리고 척계광 그이의 군사들까지 그대로 남아 있으니, 저들이 북경까지 밀고 들어오는 것에 비하면 훨씬 유리한 처지에서 교섭을 할 수도 있겠지.”

“정말로 내가 이 나라에 막부를 세우고 쇼군 노릇을 하는 게 가하겠소?”

“그래야만 할 걸세. 나 장거정을 천하의 악적으로, 왕망과 동탁과 어깨 나란히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할 테니, 그런 자를 제압한 사람은 속내가 어찌 되었든 떠받들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그 사람 손에 황제 폐하와 수십만 대군이 들려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지.”

노부나가의 삼만오천 군사에 아직 남아 있는 수십만 대군을 합류시키는 것은, 풍보가 이 장거정의 마지막 계책에서 맡은 역할이었다.

“앞서 만났을 때 모두 설명하지 않았는가? 자네는 그렇게 자네 뜻 펼쳐 보일 나라 하나를 얻는 셈이고, 나는 내 목숨과 명예를 바쳐 대일통론 하나를 후대에 길이 남기는 것일세.”

“그래, 후회는 없소? 부하들이 곧 여기도 불을 지를 것이오. 금의위라는 작자들은 동화문이 뚫리자마자 사방팔방으로 도망쳤고, 그나마 싸워보려 했던 자들은 수보 그대와 합의했던 것처럼 모두 탄환으로써 입막음을 하였소.”

“후회할 거리야 많지. 허나 적어도 오늘의 이 일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네.” 

처음 조선에서 민주당이라는 자들을 만났을 때부터, 강남 전체가 들고 일어나 남경 조정을 세웠을 때까지.

장거정은 항상 중화를 위해, 중화를 중화답게 만들기 위해 최선의 길을 택했노라 자부해 왔다.

그리고 그 자부심이 마침내 부정당할 위기에 처한 지금, 그는 최선의 해결책을 마련하였을 뿐이었다.

그때까지 얼마나 고뇌하였던가. 초라한 자택에서 잠 못 이루며 며칠 밤을 홀로 지냈던가.

그래, 살길이 없지는 않았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도 있었다. 남경 조정을 적당히 짓밟은 뒤, 민심을 듣겠다며 홍병위를 해체하고, 전국 각지의 공사들을 다시 해체하여 원 주인들에게 돌려주고, 조선처럼 공회를 만들어 민심을 듣는 시늉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장거정은, 그렇게 추한 길을 택하면서 권신으로 남느니, 스스로 대일통이 틀렸음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죽음으로써 자신이 옳았음을 보이고자 마음을 먹었다.

천추(千秋) 같은 매일을 고심으로 흘려보내도 그 외의 다른 길은 없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죽음을 뜻할지라도, 언젠가 『명사』가 쓰일 때 자신의 이름이 반역열전에 오르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으므로.

“죽는 것이야 당연히 두렵고, 나보다 못한 자들에게 이름 더럽혀질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노엽지.

그러나 이렇게 되어야만 하네.”

“모르는 사이 저 조선국 이지함처럼 도술이라도 익히셨소? 앞날을 미리 보고 오신 모양이오.”

“배움이 깊으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지.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도 한 일 아닌가.”

오랑캐 오다 노부나가가 자금성을 습격하여 장거정은 그곳에서 명을 다하고, 조정의 대권은 오다의 손에 넘어간다. 

그리고 무너지는 나라를 돌이켜세우고 자신의 집권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오다 노부나가는 광복삼장을 모두 받아들이고 동방 삼국과 화평하며, 남경 조정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 땅에도 그 ‘개명된 법도’를 세우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노부나가는 직례 일대에 대한 권세를 인정받을 것이다. 남경 조정을 이끄는 해서도, 오승은도 어리석은 자들은 아니므로, 도읍을 남경으로 다시 옮겨오고 – 요동을 상실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 다시 변방으로 떨어진 북경 순천부와 그 일대는 군권을 쥐고 있는 옛 조정의 유신(遺臣)들에게 남겨줄 터.

“그러나 나는 확신하네. 결국 임거정이 만든 개명된 법도도, 내가 세운 대일통론처럼 스스로 세워질 수 없는 것을 인위(人爲)로 겨우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지.

강남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수록, 개명된 법도는 이 땅에서 설 자리를 잃어갈 것이야. 그리고 다시 이 거대한 땅에 혼란이 찾아오고, 동방 삼국이 그 민주당을 앞에 세워 나날이 번영해나가면서, 중화라는 말은 천박한 농담으로밖에 남지 않게 되면, 그때 비로소 사람들은 장거정이라는 자가 있었음을 떠올리겠지.”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길을 거꾸로 걷고 일은 거슬러 행한 (日暮途遠 倒行逆施) 사내가 있었음을. 그 뜻을 알지 못한 어리석은 오랑캐의 손에 결국 불운한 끝을 맞이하고야 말았으나, 만약 그가 살아남아 자신이 시작한 일을 끝까지 밀어붙였더라면 분명 중화의 앞날은 달라졌을 것임을.

그렇게, 장거정 자신이 정답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대일통론은 그대로 면면히 이어지며 소위 개명된 법도에 실망한 자들을 끝없이 끌어들일 것이다.

“냄새 느껴지시오? 그대가 미리 말한 대로 부하들에게도 지시해 두었소. 비 내리는 철은 끝난지 오래니, 아주 잘 타오르겠지.”

그 말대로, 바깥은 어느새 제법 환해져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으니, 단도직입으로 묻지. 나는 그대처럼 실패하기를 바라지 않소. 그대의 실수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시오?”

“그야, 상대가 임거정이었다는 점 하나 아니겠는가. 그자가 끌어모은 힘과 계교가 우리 쪽보다 더 뛰어났을 뿐.” 

계교에 있어서는 화이(華夷)의 분별이 없음을 장거정은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 일을 조금 성급히 처리해도, 약간의 허점을 드러내도, 저들이 이를 노릴 재간이 없으리라고 단정하였다.

그리고 저들은 그러지 않았다. 항상 저들보다 강한 자들을 상대했으므로, 마치 도적이 아무리 하찮아도 능히 대가(大家)의 곳간에서 재보를 훔쳐낼 수 있는 것처럼, 조선의 조정을 도둑질하고 천조 대명을 농락했으며, 온 세상의 강대하다는 자들에 맞서 저들의 뜻을 관철할 수 있었다.

“나로서는, 한 사람의 뛰어남으로 온 세상을 다스림이 최선이라 여기는 이 사람으로서는 그 외의 다른 답은 인정할 수 없네.”

어느새 불타는 나무의 냄새와, 타닥타닥 타오르는 소리, 그리고 스스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자금성 전각의 비명이 부쩍 가까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을 음악 삼아 얼마나 사색에 잠겼을까. 삼추(三秋)와도 같은 촌음 뒤에 노부나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임꺽정을 당해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오.”

“무어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소. 이 천하를 지배하려 하는 자는 거꾸로 천하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오. 나도 그렇고, 그대도 그렇고. 우리처럼 잘 난 자가 이 천하를 다스릴 때 비로소 천하의 온갖 잘못된 것과 빈궁한 것을 쓸어 없앨 수 있으리라 여겼지. 

임꺽정은 그렇지 않소. 그저 내 갈 길을 갈 테니 네놈들이 원한다면 따라오라, 그렇게 하면서 좌충우돌하며 길을 틀 뿐. 그러니 천하를 뒤흔들면서도 저는 그저 당수라는 호칭만 그럴듯한, 도적떼 우두머리로 남아있는 것이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천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오.”

무어라 반박하려던 장거정은, 곧 자신의 노력이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논쟁을 하기에는 우리에게 남은 때가 그리 길지 않은 것 같군. 오직 후대의 사람들만이 답을 논할 수 있을 터.”

“나 또한 그대에 비하면 후대 사람에 들지.”

“그렇다면 그대에게 주어진 것으로써 마저 고민토록 하시오. 나는 여기까지니.”

노부나가는 뒤를 돌아보았다. 불길이 제법 가까이 다가왔는지, 한참 전에 문연각 안에 들어간 주군을 걱정하는 가신들의 그림자가 문 너머로 어른거렸다.

“사세구(辭世句, 일본식 유언)는 따로 없소? 우리 사이가 아무리 우정 두텁지는 않았다지만, 그래도 받은 게 있으니 가이샤쿠(介錯, 할복하는 사람의 고통을 줄여주고자 목을 치는 조수)쯤은 해줄 수 있소.”

노부나가가 칼을 뽑았다. 본디 파래야 할 칼날의 서늘한 빛은 불길을 받아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 무슨 말을 남긴들, 내 뜻이 이루어진다면 후대에 알아서들 만들어줄 것일세. 무언(無言)으로써 유언을 갈음하도록 하겠네.”

그것으로 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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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장거정은 권세의 절정에 올라 있던 1582년 늦여름에 사망합니다. 이때 나이가 고작 58세였기에, 사인은 과로로 추정되지만, 이미 당시 그의 독재에 질려 있던 여론은 고약한 풍문을 뒤에 붙이곤 했지요. 그 사후에 드러난 그의 사치와 불법적인 치부행각은, 오늘날에는 만력제와 反 장거정 세력의 합작으로 부풀려진 것이라 인식되곤 합니다. 그러나 엄숭처럼 진짜로 부패하려 작정한 권신이 어디까지 나갈 수 있는지를 뻔히 알던 당대인들이 장거정에게 그런 치욕스러운 이미지를 억지로 가져다 붙였다는 점은, 당시 그가 얼마나 사대부들의 원한을 샀는지를 방증한다고 하겠습니다.

작중에서 언급된 것처럼, 역대 중국 통일왕조 중 군사력은 강성한 편이었으나 강역이 그렇게까지 넓지는 않았던 명 입장에서 북경은 썩 좋은 입지는 아니었습니다. 내몽골 일대는 고사하고 요동조차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북경은 최전선과 너무나 가까웠던 것이지요. 그러나 정난의 변으로 집권한 영락제 주체의 권력 기반이 바로 북경 일대였기 때문에 천도는 강행되었고, 명의 탄탄한 군사력과 대운하를 통한 물류의 힘으로 명의 멸망까지 북경은 수도로서 기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청이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점령했을 때는 이미 몽골까지 복속시킨 뒤였기에 이런 문제에서는 자유로웠지요.

내각대학사의 ‘각(閣)’에 해당하는 자금성 문연각은 작중 넌지시 언급되는 것처럼 자금성 동남쪽, 문화전(文華殿)의 남쪽에 있었습니다.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할 때 남경에 있던 황실도서관 서적들을 이곳 문연각으로 옮겨왔는데 – 애초에 남경에 가 있던 서적 대부분은 원대에 북경에 있던 것을 주원장이 옮겨놓은 것이었으므로, 따지고 보면 제자리에 돌아온 셈입니다 –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에 입성할 때 주변이 모두 불타버려 청군이 입성할 때는 남아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엉뚱하게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건륭제에 의해 정부 기관이 아닌 순수한 도서관으로서 1776년 재건되는데, 그 장서들은 지금은 모두 대만 고궁박물관에 옮겨져 있습니다.

外. 신농유업

셰자데 바예지트가 칼리푸르니야에 막 닿았을 때의 일이었다.

그 무렵 지독한 배앓이로 인사불성이던 바예지트는, 어느 날 아침 갑판으로 나왔다가 동녘 하늘이 밝아오며 천사 지브릴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곧 밝혀진바 이는 지브릴도, 가브리엘도, 천사(天師) 장도릉(張道陵, 오두미도 창시자)도 아니요 그저 물새였는데, 어쨌든 육지가 가깝다는 징후이기는 하였으니 길조가 맞았다.

다음날 정신을 차린 바예지트는 결정하기를, 이 일을 기념하여 자신이 새로 세울 칼리푸르니야 술탄국의 첫 번째 도시의 이름을 라술(Rasul), 즉 기쁜 소식을 들고 온 ‘전령’이라 짓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이언적의 해괴한 서찰을 받아본 누에바에스파냐 측에서 사람을 보냈을 때, 하필이면 에스파냐어를 아는 통역사들이 모두 물갈이로 앓아누운지라 어설프게 서방의 말을 아는 유난(그리스) 사람이 통역을 맡게 되면서 이 이름은 한바탕 와전되었다.

어차피 서방인들의 언어는 죄다 저들의 로마어(Rhomaiike, 중세 그리스어)에서 따온 어휘 투성이라 여긴 반편이 역관은 ‘전령(angelos)’이라 하면 대충 서방 사람들도 알아들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칼리푸르니야 술탄국의 첫 번째 도시는 에스파냐어로는 로스 앙헬레스(Los Angeles)라 불리게 되었고, 또 조선인들은 ‘라술’을 제멋대로 뜯어고쳐 ‘나성(羅城)’이라는 이름을 따로 붙였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술탄국의 물주인 조선의 뜻이었으므로, 나머지 사람들이야 무어라 부르건 사실 딱히 상관은 없었다.

그로부터 다시 여러 해가 지났다. 동쪽 대양과 서쪽 대양 너머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마닐라 갈레온이 태평양을 횡단할 때에 맞추어 류큐와 나성을 오가던 민주당 배편은 그로 말미암아 끊겨버렸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성은 빠르게 커나가고 있었으니, 이언적의 공로라면 공로였다.

이언적은 한때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으니, 오스만의 기준으로는 숭고한 문 안쪽 내각회의(디반)에 들 만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바예지트는 이 ‘술탄국’의 술탄이기는 하지만, 사업당과 경제사 등등 바다 건너편 물주들의 자본을 받은 이상 조선의 눈치를 아니 볼 수 없었고, 바예지트를 따라온 성직자들 중에는 이언적만큼 벼슬살이를 오래 해본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언적은 졸지에 이 신생 ‘술탄국’의 재상 비슷한 무언가가 되었다.

‘우리 나성의 안위(安危)는 오로지 저 남쪽의 소위 부왕(副王)에게 달려 있습니다. 일찌감치 저들에게 사람을 보내 수교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엄연히 술탄 셀림의 아우인 바예지트가 있는 한 남쪽의 에스파냐인들이 함부로 이곳을 건드리지 못하리라는 판단 하에 이언적이 이렇게 건의하니, 바예지트 역시 그에 따랐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으로서도, 어차피 전쟁이 끝난 뒤 외교를 통해 조용히 병합하든 추방하든 하면 될 조그만 정착지를 굳이 공격해 정복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오히려 섣불리 움직였다가 귀중한 인질이 될 수도, 어마어마한 외교적 참사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바예지트의 신상에 위해라도 가해지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는 세속의 관점이고, 신앙의 측면에서 이 사태를 바라본 누에바에스파냐의 성직자들은 생각이 완전히 달랐다. 지금껏 기독교 세계가 맞서 싸워온 신앙의 적들이 이 신대륙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을 좌시할 수는 없던 것이다.

그리하여 부왕을 닦달하고 닦달한 끝에, 재정을 마련하고 이주민을 모은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 또한 로스 앙헬레스로 향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나성/라술/로스 앙헬레스였다. 투르크인과 유난(그리스)인, 페닌술라레스(이베리아 본토인)와 크리오요(Criollo, 아메리카 식민지 태생 유럽인 및 그 (혼혈) 후손), 사업당에서 보내거나 끌어들인 조선인 이주민들에 몇몇 원주민들까지 모두 섞인 고을.

이토록 다종다양한 이들이 모여, 인구 이천오백의 대읍(大邑)을 이루었으니 다툼이 벌어지지 않기가 더 어려웠다. 

“그래도 다들 스승님 말씀은 잘 들으니 다행이지요. 그렇지 않나요?”

억양만 빼면 그럭저럭 들어줄 만한 조선말로, 이언적이 이곳 나성에서 거둔 새 제자 토이푸리나(Toypurina)가 말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구나.”

이언적 나이도 올해로 여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머물고 괘씸하면서도 그리운 제자 이황이 가르쳐준 활인심방을 단련하여 아직도 정정하디 정정하였으나, 아무리 그래도 언제 숨을 거두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직도 이리 굳건히 땅 딛고 하늘 이고 사는 까닭은 바로 하나. 이곳 동쪽 오랑캐 땅으로 뗏목, 아니, 큰 배를 타고 넘어오게 된 각오 때문이었다.

조선 땅에서는 차마 이루지 못한, 올바른 도리를 바로 세우는 일을 해내고야 말겠다는 각오.

“늘그막의 어리석은 객기를 이제 와 후회한들 무엇하랴.”

이 땅에 문자는커녕 농사도 모르는 오랑캐들이 허다하다는 것은 인천을 떠나기 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이 부족하게나마 성인(聖人)의 일을 대신하여 그들을 교화하고 일깨우기만 하면 누구보다도 선량하고 어진 백성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에이, 그래도 저 하나는 건지셨잖아요, 헤헤.”

“아서라. 아녀자가 어찌 그리 헤프게 웃느냐.”

이곳 나성 앞바다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강을 따라 백여 리쯤 거슬러 올라가면 나오는 자치빗(Jachivit) 마을의 의녀(醫女, medicine woman) 토이푸리나는, 호기심에 이 기묘한 이방인들을 찾아온 일대의 젊은이들 중 유일하게 총명함과 끈질김을 겸비하였다. 

이언적도 아예 제자가 없는 것보다는 아녀자라도 있는 것이 낫다는 판단 하에 거의 증손녀뻘 되는 그를 문하에 거두었는데, 조선말은 배우면서도 경전의 구절 외우기는 소홀히 하고, 부녀의 품행에 대해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곤 하였다. 그나마 의관만은 정제하고 있으니 다행인데, 이마저도 어째 단정한 옷차림의 미덕을 알기보다는 그냥 보기 좋다 여겨서 입고 있는 듯하였다.

허나 토이푸리나 말마따나, 이만하면 그나마 낫다 할 만하였다. 그들이 이곳 나성에 발을 디딘지 어언 칠 년째. 나성과 그 주변에서는 크고작은 다툼이 끊어지지 않았다.

당장 지금도 저자 한복판에서 키지(Kizh, 통바Tongva 족) 사람들과 추마시(Chumash) 사람들, 그리고 그들 모두를 야만인으로 보는 투르크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싸움을 말리고 오는 길이었다.

“스승님 보시기에 우리가 답답해 보이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당장 저도 종종 고향 사람들 만나면 그럴 때가 있는걸요. 하지만 조금만 더 여유를 주세요.”

“여유라...”

나성과 그 일대는 사시사철 기후가 온난하고 먹거리가 풍족하였다. 여름에는 물고기를 잡고 가을에는 도토리와 온갖 열매만 거두어도 능히 굶주리지 않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에 따라 자연스레 욕심이 동하기 마련. 특히 작은 배로도 해안을 빠르게 누비는 재주를 지닌 나성 동쪽의 키지 마을들과 서쪽의 추마시 마을들은 종종 그보다 더 북쪽으로 가서, 그간 먹고 남은 도토리와 북녘의 진기한 먹거리를 교환해 오곤 했다.

이 모든 일이 나성이 세워지면서 뒤바뀌었다. 루멜리아(발칸) 출신의 이주민들은 저들 태어나 자란 땅과 놀랍도록 유사한 이곳 기후에 맞추어 곧장 농사를 지었고, 일년에 두어 번은 아카풀코(Acapulco)를 오가는 교역상들이 입항하곤 했다.

도저히 주변에 벼를 심을 만한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장사꾼이나 공장(工匠) 일만을 맡게 된 – 개중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논농사에 적합한 땅을 찾겠다며, 목숨을 걸고 북쪽이나 동쪽을 탐험하는 자들도 있었다 – 조선인들은 그렇게 들여오거나 저들이 만든 물건을 다시 키지와 추마시 부족민들과 교환하곤 했다.

부족 간에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을 정교한 의례처럼 발달시킨 추마시 부족 사이에서 먼저 분란이 일어났다. 언제부턴가 북방에서 들여온 귀한 물고기 ‘연어’는 더 이상 귀하지 않게 되었고, 오직 남쪽 사람들이 가져오는 물건만이 중하게 되었다.

먹거리를 팔아 귀한 물건을 마련하는 키지 부족 안에서도, 또 각 마을 사이에서도 싸움이 벌어졌다. 아무리 사철 먹거리가 풍족하다지만, 갑자기 늘어난 나성의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부족했고, 지금까지는 사소한 다툼 정도를 제하면 그럭저럭 다들 배불리 먹을 수 있던 물고기와 도토리가 언제부턴가 부족해졌다. 

특히 조선인들이 도토리묵이라는, 보존은 어렵지만 지금껏 그들이 먹던 것보다 훨씬 맛이 좋은 도토리 요리(정작 조선인들은 본토의 맛이 안 난다고 툴툴대며 먹기는 했지만)를 전수하면서 더욱 문제가 심각해졌다.

키지와 추마시의 현명한 주술사(샤먼)들이 분란의 기저에 있는 원인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얀 사람들과 우리와 닮은 듯 다른 사람들이 나타난 이후로, 그들은 우리 어머니와 같은 땅을 헤집고 그 땅에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온 세상에 평화가 사라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실제로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손 하나하나가 아쉬웠기에, 바예지트가 데려온 성직자든, 프란치스코회 신부든, 아니면 제비를 잘못 뽑아 생고생하는 사업당 아전이든, 손짓발짓을 해서라도 주변 마을의 젊은 사람들을 끌어와 농사꾼으로 부리고자 했다.

이 역시 키지 마을의 족장과 주술사들을 분노케 하는 처사였다.

“조선이든 에스파냐든, 외지인들을 미워하는 사람들도 스승님은... 그, 그, 뭐냐, 아, 경외하니까요. 우리 쪽 사람들이 먼저 난리를 일으키지는 않을 거에요. 

그리고 이대로 세월이 흐르면 다들 알게 되지 않겠어요? 우리 어머니 대지에 예를 갖추기만 하면 후토(后土, 토지신)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곡식을 베풀어주시고, 그 곡식으로는 지금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더 풍족하게 먹여살릴 수 있다는 걸요.”

조선 사람들과 키지 사람들 사이에는 제법 비슷한 점이 많았는데, 저 몰상식한 에스파냐인들과 달리 도토리를 돼지밥으로 쓰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요, 가을에 조상께 제사를 지낸다는 게 또 하나요 – 깊게 들어가면 아예 달랐으나, 양쪽 모두 제게 편한 대로 오해하고 있었다 – 극락과 지옥의 설에 영 시큰둥하다는 것과 노인을 깍듯이 모신다는 것이 또 닮았다.

더구나 종종 나성에 교역을 위해 찾아오는 이들이 보기에, 그 쓰는 말과 생김새와 무관하게 모든 사람들이 이언적의 말은 듣는 것 같았다. 그가 조선인들을 모아 향약을 꾸리고 종종 제사를 주관하는 것 역시 그가 바다 너머에서 온 위대한 주술사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였다. 

확실하지 않은 소문에 따르면, 그는 하늘과 땅이 한 번 생겼다가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았다고도 하였는데, 이는 환갑을 어설프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였다.

그런 뜬소문 하나하나가 이언적의 슬슬 어두워지는 두 귀에 들어올 때마다 그는 지금처럼 오금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교화의 길은 멀고도 험한데, 남은 시일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에게든, 저 순박하면서도 어리석은 야인들에게든.

“잠깐만 앉았다 가자꾸나.”

“예, 스승님.”

투르크인들은 본디 직분이 무엇이었든 대개 농사일을 맡게 되고, 조선인들은 반대로 나머지 모든 일들을 도맡게 되면서 나성 저자는 대부분 조선풍 귀틀집이나 초가삼간으로 채워졌다. 심지어 모스크도 별반 다를 바 없었으므로, 매일같이 첨탑 대신 지붕에 올라가야 하는 무에진(기도 시간을 알리는 사람)은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다.

그런 저자 한쪽으로 뻗어나가는 골목에, 어설픈 담장 바깥으로 삐져나온 주춧돌 하나가 있었다. 

그 자리에 앉아 한참 고심하던 이언적은, 눈앞의 말 안 듣는 제자에게 더 늦기 전 자신이 아는 앞날을 전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너는 여유를 말하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에이, 아직 정정하시잖아요.”

“그 얘기가 아니다. 바다 건너편의 전란이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다더구나. 남쪽에서 온 에스파냐인들이 애써 돌려 말하는데도 패색이 짙다는 것을 감추지 못했으니,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얻그제 ‘입궐’ - 나성 시내의 유일한 기와집이었다 – 하였을 때 들은 바예지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이 지금껏 저 야만인들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는 까닭은 단 하나. 

인천과 류큐를 오가는 배가 끊어졌기에 혹여라도 병장기로 다툴 일이 벌어지면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전란이 조선과 그 편에 선 나라들의 승리로 끝나고, 에스파냐가 칼리푸르니야 쪽에는 욕심조차 내지 못할 만큼 짓밟히게 되면, 그때는 키지와 추마시 족 모두 지금처럼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할 터였다. 

슬슬 흐려지는 눈에는 그 모습이 선하였다. 여진 야인과 달리 제대로 싸우는 법도 모르는 이곳 야인들이다. 창칼에 끌려와 생전 잡아본 적 없는 농기구를 잡고, ‘그들이 교화될 때까지’라는 기약 없는 단서 하나로 그들에게 차꼬를 채우게 될 것이다.

그것만 해도 저 에스파냐인들이 다른 원주민들에게 한 것보다는 훨씬 관대한 처사라고, 사업당이 이윤을 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주변의 일손을 쓸 수밖에 없다고 변명을 내세울 것이다.

“그때까지는 답을 내야 할 터인데, 길은 멀고 내 재주는 부치는구나. 어찌해야 하겠느냐, 어찌해야 하겠느냐.”

토이푸리나가 눈살 찌푸리며 머리를 쥐어짜던 차, 어떻게 알고 이 골목으로 달려오는 자가 있었다.

“선생! 큰일입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술탄의 ‘조정’에서 저의 아랫사람 노릇하는 투르크인 서리였다. 그럭저럭 들어줄 만한 조선말 – 에스파냐인들도, 투르크인들도 상대의 언어를 쓰기보다는 차라리 조선말 배우기를 바랐으므로 공용어가 그렇게 굳어져가고 있었다 – 로 헐떡대든 와중에도 용케 용건을 전하였다.

“나흘 전 부두에 닿은 아카풀코 배 선원 가운데서 두창(천연두) 걸린 자가 나왔습니다!”

두창이란 모든 역병 가운데서도 가장 무섭고 고약한 병이다. 그 병에 유난히 동쪽 땅 야인들이 약하여, 한 번 역질이 돌면 열에 아홉이 죽는다는 것을 바예지트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 두창을 치료할 방도를 마련하여 바다 건너갈 때 같이 채비해 간다면, 반드시 쓰임이 있을 테다. 

“저 야인들이 순순히 우리의 교화에 응하기는커녕, 되려 우리네 백성들이 애써 농사짓는 것을 두고 불손한 소리나 하고 있다 들었소.”

“그 말씀대로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아직 문명하지 못하여 오곡(五穀)의 효험을 알지 못하는 탓이나, 이 또한 교화가 부족한 탓입니다. 허나 이미 저들이 세상의 이치를 조금씩 터득하고 있고, 또 그들 가운데 유별나게 포악하거나 간사한 자도 없으니, 어찌 시일이 이를 해소하지 않겠습니까?”

늘 그렇듯 바예지트 앞에서 청산유수로 답하는 이언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조언을 늘 귀담아듣던 바예지트는,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대 또한 이미 짐작했겠지만, 전쟁은 거의 끝나가고 있소. 그때가 오면, 우리는 어떻게든 이곳 칼리푸르니야를 이름뿐인 나라에서 적어도 도시국가 하나 정도는 될 만큼으로 키워내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외적은커녕 기근 한 번만 닥쳐도 무너져버릴 수 있으니. 

그리고 나는 순순히 이 땅을 버릴 생각이 없소. 이 땅에서 그 시조인 개척자 바예지트를 기리는 것까지 볼 욕심은 없지만, 적어도 언제고 그런 날이 오리라는 증거만은 두 눈에 담고자 하오.”

바예지트는 단단히 작정을 한 듯, 신중히 준비한 말을 하나하나 풀어냈다. (코스탄티니예에서 쫓겨난 이후 새로 들인 버릇 중 하나였다.)

“이대로 가면 어차피 저 야인들에게 모조리 족쇄를 채우든, 모두 이 땅에서 몰아내든 해야 할 테요. 그러느니 차라리 이번 역병을, 어른이 말 안 듣는 어린아이 겁줄 때처럼 써보는 게 어떻겠소?”

“어린아이를 겁준다 하시면...”

“우리가 동쪽으로 오면서 챙겨온 의서(醫書)만 한가득이고, 풍토병 막을 심산으로 데려온 의생도 많소. 저 말 많고 탈 많은 서방인들도 역병 앞에서라면 우리 말을 꼬박꼬박 들을 게요.

그러니 저들, 저 키시니 추마시니 하는 놈들에게 단단히 전하는 것이오. 보아라, 다른 땅에서 너희 얼굴 빨간 족속들을 절멸시킨 무시무시한 역병이 이제 이곳에 왔다. 너희가 우리에게 순순히 복속한다면 살길을 마련해 줄 것이로되, 계속 그렇게 제멋대로 군다면 너희 삶은 너희가 알아서 구명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이오.”

실로 무시무시한, 유자로서 다른 생각을 품을 겨를도 없이 우선 반대부터 하고 보아야 할 말이었다. 그러나 이언적이 무어라 가로막기도 전, 바예지트가 아직 말 안 끝났다며 손을 들어 그 입을 막았다.

“그대가 이곳에 무슨 생각으로 왔는지 나 또한 잘 알고 있소. 그대가 바라는 이상, 모두가 농사지으며 평등하고 안온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이 땅에 펼쳐보겠다고 왔다 들었소.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위협하는 짓이 치졸하기는 하지. 그러나 창칼로 저들을 노예로 만들거나 모조리 내쫓는 것보다는 낫지 않소? 저들이 어린아이와 같아 저들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 알지 못하니, 때로는 이렇게라도 훈육해야 하는 법이오.”

이 땅은 마치 처음부터 (안타깝게도 벼 하나를 제하고) 곡식을 기르도록 알맞게 안배한 것과 같았다. 여름이 가무는 점 딱 하나가 아쉬울 뿐, 기후는 연중 온난하고 땅은 기름졌다.

그 땅 위에, 농사짓는 법은커녕 나라를 이루는 법조차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무리가 살았다.

화공(畫工) 앞의 백지와 같은 야인들. 이언적이 그리도 바랐던, 그러나 사람을 잘못 믿은 탓에 이룰 방도가 사라져버린 이상을 그려낼 도화지.

나라는 거대한 창고와 같이, 농사짓는 백성에게 곡물의 종자를 빌려주고 가을에 돌려받는다. 그들을 가르쳐 사람의 도리를 능히 알고 행할 수 있도록 하고, 그들 중 뛰어난 자들을 모아 풍속을 바로잡게 한다. 

그리하여 백성의 먹고 살고 입는 일 모두가 완비되며, 모두가 사람답게, 안락하게, 내일을 걱정하는 일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그리고 이곳에 당도한 이후 몇 년이 지나도록, 그대와 같은 소위 유자들이 어떤 무리인지는 질리도록 알게 되었소. 할 말이 많겠지.

허나 옳고 그름을 마냥 논할 겨를이 없소. 두창이 퍼지기까지는 앞으로 그리 오래 남지 않았소. 얼른 이곳 실정에 맞는 처방을 찾아 의서를 뒤지고, 의원들을 모으고, 할 일이 한둘이 아니오. 아무리 늦어도 오늘 중으로는 그대의 답을 듣고 싶구려.”

잠시의 불인(不仁)과 불의(不義)로 그의 고국에서 이루지 못한 아름다운 정사를 이룩할 수 있다면, 잠깐은 눈을 감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마음 한구석에 아직 불타던 잉걸불이, 바예지트의 말에 호응하여 화르륵 들고 일어났다. 

그가 경주에서 은거하던 초막에 비하면 딱히 초라하진 않은 거처로 돌아온 이언적의 눈에, 마당에 떨어진 책 몇 권이 들어왔다.

그리고 어찌 된 영문인지 궁리를 마치기도 전 또 한 권이 마루 밖으로 털썩 던져졌다.

대체 어떤 못된 자가 서책을 저리 다루는가, 호통을 칠까 생각도 해보았으나, 지금 나성에서 능히 서책을 뒤져볼 재간이 되는 자는 몇 되지 않았고, 그중 지금 스승의 방 안에 들어가 의서를 뒤져보고 있을 사람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찾았다! 찾았다!” 

이언적은 알지 못하는 키지 말로 기쁜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뛰쳐나온 토이푸리나는, 이언적이 있음을 알아차리자마자 하등 부끄럼도, 뉘우침도 없이 신나게 떠들었다.

“스승님! 보세요! 스승님 오신 서쪽 땅에서 나는 약재 없이도 이 무서운 두창을 막을 처방을 이 제자가 찾았습니다!

두창이 일어나는 것은 몸 안에 다들 지니고 있는 태독(胎毒)이 바깥의 사기(邪氣)를 만나 날뛰기 때문인데, 다른 병자에게서 얻은 고름이나 딱지 따위를 이용하면 병이 도지기 전 미리 몸 안의 태독을 끌어낼 수 있대요!”

그 기묘한 술법은 중원 땅에서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중원과 조선에는 워낙 온갖 약재가 많다 보니 아직 조선은 물론이요 중원 안에서도 그런 기방(奇方)에 의존하느니 그냥 약을 써서 원기를 북돋고 병세가 심해지는 것을 막겠다는 의원이 훨씬 많았다.

허나 사람과 물이 다른 이곳 만리타향에서 같은 효능을 지닌 약재를 찾을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저 인두법인지 뭔지 하는 처방을 찾아낸 제자의 눈썰미는 제법 대단하다 할 만하였다.

“그... 서책 던진 건 잘못했습니다?”

좋다고 뛰쳐나온 제자가 그제야 스승의 눈빛 기묘함을 깨달았다.

“그것 때문이 아니군요.”

“내 네가 남녀와 사제 간의 도리를 자주 잊음에도 문하에서 떠나보내지 않는 까닭이 여기 있느니.”

힘없이 이언적이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곧 토이풀리나 머릿속에서도 얼추 이번 일의 전말이 짜맞추어졌다. 두창이라는 역병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다른 키지 사람들과 달리 토이풀리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서쪽에서 온 사람들은, 처음부터 저 많은 의서를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그 뜻은...

“스승님, 설마...?”

“네가 걱정하는 그대로다.”

토이풀리나의 오금에 힘이 풀렸는지, 스승보다 더 요란하게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처방으로 우리 사람들을 길들이려는 것이군요.”

“길들인다... 그리 말하니 더욱 부끄럽구나. 허나 틀리지 않았다.”

“다른 길은 없나요?”

간곡하게 스승의 다 늙은, 그러나 어떻게 그사이 더 늙어질 길을 찾은 듯한 얼굴을 쳐다보며 토이풀리나가 물었다.

“내 말하지 않았더냐.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어떻게든 너희 사람들을 교화하여, 우리가 이 땅에 펼치고자 하는 바에 따르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권도(權道)가 이토록 가까이 있구나.”

“왜 다른 길이 없나요?” 

어느새 눈물이 핑 돌았다.

“그저 그들에게 찾아가 이 처방을 알려주세요. 이 처방도 완전하지는 않을 테고, 서책 가운데서 꺼내 우리 사람들에게 펼치려면 실수도, 중간에 죽는 사람도 많겠지만,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는 두창이 정말 그만큼 끔찍하다면 다들 두려운 마음에서라도 따를 거에요.”

그러니 그들에게 스승님의 지혜와 인품을 보여주세요. 서쪽 땅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남쪽에서 온 사람들보다 더 지혜로움을, 그리고 그들의 말을 따라 지금껏 지켜온 삶의 방식을 바꾼다면 키지와 추마시, 아니, 그 너머 모든 사람들이 스승님의 겨레처럼 지혜로워질 수 있음을 보여주세요.”

그들에게 선택지가 주어진다 한들, 과연 올바른 길을 택한다는 보장이 있는가? 이미 흔들린 이언적의 마음속에서 저도 모르게 솟구친 반문이었다.

그 마음의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새 흐르는 눈물을 훔치지도 않으며 토이풀리나가 호소했다.

“스승님께서 저희 사람들을 어리석고 답답하게 여기는 것은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하지만 저희에게도 기회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가 어떤 갈림길에 놓여 있는지를 알고, 오로지 우리의 뜻대로 선택할 의권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를 짓밟고 세우는 나라와 제도가 과연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요? 백 년, 이백 년이 지나도록 후손들에게 선조들은 떳떳했노라 말할 수 있을까요?”

그제야 정수리에 찬물이 부어지는 듯했다.

하다못해 임꺽정과 그 무리조차, 그 무도함을 백성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교묘한 술수와 눈앞의 이익으로 그들을 꼬여냈을 뿐.

그리고 그는, 아니, 그들 모두는 나아져야 했다. 지금껏 겪었던 아픔과 고뇌가 헛된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머나먼 땅까지 나아와 새로운 시작을 한 것을 헛되게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내가 너에게 신세를 졌구나. 네 말이 옳다.”

아직 성인(聖人)이 나지 않은 이 땅. 언젠가 틀 그 싹을 어찌 미리 꺾어버릴 수 있겠는가.

이마에 잡힌 주름만큼이나 숱하게 꺾이고 꺾였던 늙은 선비는, 자신이 스스로 꺽이지 않도록 막아준 제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조금이라도 더 편하고 저렴하게 하지(성지순례)를 떠날 수 있는 길을 찾던 투르크인들과, 벼농사를 지을 만한 땅을 찾고자 온 땅을 뒤지던 조선인들 – 이 무렵에는 서로 섞여 분간하기가 조금씩 어려워지고 있었다 – 이 마침내 동쪽 바다로 향하는 길을 찾았을 때의 일이었다.

그들의 눈에 뜨인 것은, 서쪽으로, 그들이 막 지나쳐 온 곳을 향해 나아가는 원주민 행렬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더 나은 삶을, 굶주리지도, 병들지도 않는 삶을 줄 수 있는 위대한 주술사가 서쪽에 있다고 들었소.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굶주린 자에게는 땅에서 솟구치는 곡식을 주고, 병든 자에게는 절로 나아지는 기운을 불어넣는다고 하더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리 말하곤 했다.

스승을 기리며 아직도 나성의 서원을 지키고 있는 큰 선비 퇴씨, 즉 토이푸리나 할멈을 잘 아는 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주술사는 죽은 지 오래지만 그가 남긴 것은 아직도 잘 남아 있으니, 조심히 남은 길 마저 가라 전해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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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는 고대든 현대든 똑같이 ‘천사’의 번역어로 ‘전령άγγελος’을 사용하였고, 이것이 그대로 나머지 유럽으로 전해져 ‘angel’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로스앤젤레스는 원 역사와 똑같은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원 역사에서 에스파냐 개척자들은 북미 서해안으로의 확장에 소극적이었습니다. 해류로 인해 서해안을 북상하는 것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발달한(즉 노략질을 할 만한) 원주민 문명 또한 없었기 때문이지요. 로스앤젤레스 일대가 유럽인들에 의해 개척된 것은 1771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선교촌을 세우면서부터였습니다. 이때 ‘천사들의 여왕이신 성모의 마을(El Pueblo de Nuestra Señora la Reina de los Ángeles)’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이 중 ‘성모’ 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천사들’만 남은 것이 지금의 로스앤젤레스 지명의 유래가 되겠습니다. 이후 중국 노동자들이 유입되면서 여기서 다시 ‘로스’ 부분만 음차하여 나성(羅城)이라 부르게 되지요. 작중에서는 ‘전령’ 또는 천사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는 아랍어 ‘라술’의 음차로 ‘나성’이 쓰이게 되었습니다.

1771년 시점에서 로스앤젤레스 일대를 점유하고 있던 가장 유력한 부족은, 일대의 풍족한 먹거리 덕에 수렵채집만으로도 일만 가까운 인구를 자랑하던 키지 족이었습니다. 에스파냐인들과 미국인들에 의해 각각 가브리엘리뇨 족과 통바 족이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대략 수백 단위로 나뉘어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곤 했지요. 강력한 권위를 지닌 족장들은 의례화된 선물 교환 의식을 통해 사치품을 주고받곤 했고, 16세기 중엽 처음 에스파냐 탐험대가 당도하였을 때에도 성대한 환영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프란치스코회 신부들이 선교촌을 세우면서, 통바 족은 반노예 상태로 전락해 농업에 종사하게 됩니다. 점차 누적되어가던 불만은, 전통적으로 가을에 그해 죽은 망자들의 혼을 떠나보내는 의식(작중 조선인들이 제사로 오해하는)이 금지당하면서 폭발하게 됩니다. 족장과 의주술사/의녀(Medicine man/woman)을 역임하던 집안 출신의 토이푸리나(작중 토이푸리나는 여기서 이름을 따왔습니다)는 일대의 키지 유력자들을 규합해 1785년 (키지 기준으로)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지만 금방 진압당하였습니다.

종두법 보급 이전까지 천연두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책이었던 인두법은 대략 16세기경 중국에서 처음 기록이 나타납니다. 그 이전에도 비슷한 요법이 등장했다는 정황증거가 여럿 있고, 인도에서도 비슷한 시기 독자적으로 인두법이 개발되어 중동과 중앙아시아로 퍼진 바 있으나, 명말청초 중국만큼 활발하게 인두법 접종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요. 초보적 면역이론의 일종인 태독(胎毒) 이론에 입각한 명의 인두법은 명이 멸망할 무렵에는 이미 강남 전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천연두 면역이 부족하던 청 황실이 입관 이후 천연두에 큰 타격을 입으면서 황실 후원을 받아 더 널리 퍼지게 됩니다. 이 무렵에는 치명률을 낮추기 위해 천연두 환자의 고름이나 딱지를 흡입하는 양을 정교하게 통제하는 기법이 발달했고, 당시 북경에 머물던 서양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몇몇 인두법 전문의들은 0.3% 미만의 접종사망률을 자랑했다고 합니다 (Leung, 2011. “‘Variolation’ and Vaccination in Late Imperial China, ca 1570-1911.” in Stanly A. Plotkin (ed.), History of Vaccine Development. New York, NY: Springer. pp.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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