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백년하청 (1)
꺽정이 전생에 그와 그의 청석골 패당은 명화적(明火賊) 소리를 종종 들었는데, 이는 관을 티끌만큼도 두려워하지 않고 밤중에 한낮처럼 밝게 횃불 들고 몰려들어 관아를 불태우고 곳간을 터는 짓을 종종 했기 때문이었다.
“헌데 사람 팔자라는 게 바꾸려 해도 도저히 못 바꾸는 게 있는 모양입디다. 이렇게 명나라(明)를 활활 불태우는(火) 도적놈이 되었으니 그 또한 명화적 아니겠소.”
스물 하고도 여러 해 전 꺽정이에게 전생 이야기를 들은 바 있던 이지함만 알아들을 수 있는 우스갯소리였다.
이지함이 피식 웃으며 뭐라 맞장구를 치려던 차, 시끄러운 소란이 간만에 상봉한 동문 간의 소화(笑話)를 끊었다.
“하하! 대명의 때는 이제 지났다! 지금부터 이곳은 우리 백련교가 다스린다!”
“잘나신 관노야(官老爺)도, 으스대는 홍병위도 더는 없다! 흐흐흐, 이 땅에 진공가향(眞空家鄕)을 이룩하고 자유로운 권점과 백성의 의권을 보장해줄 테다!”
이지함과 함께 바다 건너 이곳 산동으로 온 조전을 향해 꺽정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이, 조가 놈아, 아랫것들 단속 안 하냐.”
“죄, 죄송합니다, 당수.”
탄압과 배신만 당하며 숨죽이고 살다가 마침내 저들 세상 열렸으니, 그 기뻐 날뛰고픈 마음을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알아줄 법도 하건만, 임 당수가 어지간한 사람이 아님을 뻔히 아는 조전은 후다닥 달려가 저의 동도(同道)들을 애써 추스렸다.
환호하는 것은 지금 막 열린 제남((齊南, 現 산둥성 지난) 성문 안쪽, 임 당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해도 늦지 않았으므로.
북경의 자금성이 불타고 장거정은 그와 함께 명이 끊어지니, 그 스승 서계를 배신하고 온 중원을 대일통의 이름으로 통제하던 내각은 그날부로 무너지게 되었다.
동창제독 풍보에게 이끌려 천진으로 이어한 황제는 장거정 내각의 일원이자 살아남은 문관 중에서 가장 품계가 높은 조정길을 수보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문연각이 송두리째 불탄 지금, 내각수보라는 자리가 무엇이 중하겠는가.
신임 예부상서 겸 병부상서 직전신장의 이름으로 – 상서는 정2품이니, 유사 이래 그 어떤 일본인보다도 더 높은 품계를 받은 셈이었다 – 전국에 글을 보내 사태의 전말을 밝히기를, 간악한 권신 장거정은 구국의 결의 품은 용사들에 의해 처단당하였고, 역신(逆臣)의 발악으로 말미암아 궁궐 일부가 소실되기는 하였으나 그뿐이니 경거망동하지 말라 하였다.
이는 곧 경거망동하라는 뜻과 다름이 없었다.
오랑캐가 궁궐을 불태우고 내각수보를 살해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명의 천명이 다하였음을 보이는 징표 아니겠는가?
홍병위가 그대로 도적이 되기도 하고, 그 홍병위를 때려잡으며 인망을 얻은 자들이 도적이 되기도 하였으며, 개중 조금 세가 크다 싶은 자들은 다들 자신이 금세에 재림한 주원장쯤 된다고 착각들을 하게 되었다.
허나 가정 연간이었다면 모를까, 좋든 싫든 장거정이 정비해둔 나라의 기틀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므로, 곧 이러한 난리는 하나둘씩 제압되기 시작했다.
고스란히 남경 조정에게 흡수된 응천순무 경정향의 강남 군사는 호광(湖廣)과 안휘(安徽) 일대를 제압하고 있었고, 영원성을 내주고 산해관까지 후퇴한 척계광은 그나마 남은 군사 절반을 쪼개 산서(山西)로 보냈다.
그와 더불어 북경 조정은 산해관 동쪽으로 밀서를 보내, 남경 조정이 요구하는 대로 광복삼장을 받아들이고 이 전쟁을 마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그래...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맞다. 명나라 불타는 얘기였지.”
“나도 얼추 다 들었다. 사천(四川)과 섬서(陝西), 감숙(甘肅) 일대는 어디까지 반기를 들었는지 파악조차 안 되고, 양광(兩廣)과 운남(雲南) 또한 도적이 들끓는다고 하더구나. 그나마 산동 일대는 조금 상황이 좋은 듯하지만.”
북경 조정이 화평에 뜻이 있다 밝히면서 제의하기를, 산동 내주(萊州)에 있는 관군의 군권을 남경 조정에게 넘길 테니 운하와 그 주변을 다스리는 일을 맡아달라 하였다.
이에 응하기도 할 겸, 꺽정이는 국민당 수뇌들과 함께 남경에서 북쪽으로 올라왔고, 조선에 머물던 서계는 남경 조정의 병부상서직을 임시로 맡아 조선에서 서쪽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이지함과 조전은, 적어도 겉으로 내세우기로는 서계의 참장(參將) 노릇을 잠시 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른 곳도 그리 오래 가진 않을 게요. 도적질이든 역적질이든 해버릇해야 솜씨가 생기는 법인데, 작고한 장가 그 작자가 다른 건 몰라도 나라 꼴은 제대로 정비하고 갔잖소.
당장 나도 해씨랑 오씨 두 분 어르신 모시고 북상하는 길에 도적질하는 무리를 여럿 만났는데, 점잖게 타이르니 다들 뉘우치며 병장기 내려놓습디다.”
이지함과 만나기로 한 이곳 제남까지 오는 길에 꺽정이는 저의 눈에 띄는 도적 무리와 마주칠 때마다 손수 점잖게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그 우두머리는 머리통도 어루만져주었다. 올바른 이치를 온몸으로 체득하도록 도와주었으니, 병장기를 다시 잡고 싶어도 잡기는 어려울 터였다.
“서 대인도, 다른 곳은 몰라도 산동 일대는 금방 제압할 수 있으리라 하더구나. 천하의 어지러움이 이렇게 끝나니 어찌 천행(天幸)이 아니겠느냐.”
엄밀히 따지면 남경에서부터 먼 길을 북상한 국민당 군세는 반란군이요, 이지함과 임꺽정은 중화를 침탈하는 오랑캐였다. (그나마 국민당은 변명의 여지가 있었지만, 꺽정이 일당은 그렇지 않았다.)
허나 그렇게 반역도당과 오랑캐에게 성문을 열었음에도,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고, 기어코 성 안에 들자마자 또 그놈의 ‘햣하!’ 소리를 내는 백련교인들의 환호만 아스라이 들려왔다.
그 옛날 목야의 싸움에서 이긴 주나라 군사가, 주왕이 자결하며 불태운 궁궐 연기 맡으며 조가성(朝歌城, 상나라의 마지막 수도) 안에 들 때조차 이런 기묘한 태평함은 겪지 못했을 터였다.
그런 이지함 감상에 호응하듯, 황하 강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흩고 지나갔다. 그들이 서 있는 이곳, 제남성 성문 바깥의 들판 또한 바람 따라 한바탕 누웠다 일어나며 물결쳤다.
“그 와중에 네 아들녀석은 거하게 구설수에 오를 짓을 하였단다.”
문득, 진지하고도 어려운 이야기를 하기 전 조금만 더 옛날처럼 우스갯소리 주고받고 싶다는 사사로운 욕심이 든 이지함이 엉뚱한 화제를 꺼냈다.
“뭐? 철수 그놈이?”
“주상의 밝으신 말씀을 그대로 옮기자면,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더라.”
“철수 놈이 뭐 한성부 관아라도 불태웠소?”
“어떻게 그것부터 떠올릴 수가 있느냐?”
“내가 지금 철수 나이 때 사형 구해주러 충주 관아 파옥한 것 벌써 잊으셨소?”
“관아를 불태우거나 한 건 아닌데, 남녀의 강상(綱常)을 흩트리고 종친의 위엄을 무너뜨렸다고 흉보는 자들이 제법 생겨났다.”
남녀 사이의 강상을 흩뜨리는 짓은 지상여장군 이명희가 이미 한바탕 선보였고, 종친의 위엄 무너뜨리는 것은 임금 앞에서 그 조부 욕도 하고 임금의 배다른 형 덕흥군 멱살도 잡아본 꺽정이가 어지간한 짓은 미리 다 해버렸다.
“지금 철수도 슬슬 혼사를 생각할 나이가 되지 않았더냐. 종친들과 각 당 중진의 가족들이 함께 송도로 피난할 무렵에 눈 마주친 이가 있었던 듯하더라.”
덕흥군이 역모에 휘말려 비명횡사하면서, 딱 그때가 종친 기준으로는 혼기였던 덕흥군의 장녀 명순은 혼담을 주고받을 엄두도 못 내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나이 스물이 되도록 규방(閨房)에서 한숨으로 구들이나 꺼뜨리던 명순이가 마침내 집 밖으로 나온 것은 바로 만인의 칭송을 받는 밝디 밝으신 주상께서 열성조 영령이 어린 종묘를 더없이 밝게 만들기 며칠 전의 일.
허겁지겁 송도로 피난하는 도중에 생김새 훤칠한 헌헌장부를 먼발치서 보게 되었다. 한양으로 돌아온 뒤에 아우 부려 알아본즉 그이는 바로 임거정과 이명희의 자 임철수라.
그렇게 겨우 연이 닿자마자 명순이 온 힘으로 밀회를 추진하니, 성미는 몰라도 기력은 예전 같지 못한 신씨 부인의 눈을 피하여 두 청춘남녀가 마침내 눈이 맞게 되었다.
“잘하는 짓이다, 잘하는 짓이야. 지 아비랑 어미는 전쟁통에 바쁜데 아들이란 것은 사랑놀음이나 하고 있고.”
“인석아, 철수 그놈도 바쁘게 살았다. 한양 복구하는 일도 제 또래들 모아 팔 걷어붙이고 나섰고, 또 기학재 들어가서 병해 사형 도와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단다.
더구나 철수가 이씨를 따라다닌 게 아니라 그 반대였다더라. 나이도 그쪽이 더 많으니.”
철수의 성정이야 부모 두 사람을 꼭 빼닮았고, 명순 또한 애써 숨기고 삭였을 뿐 속알맹이는 그 아비나 두 오라버니와 별다를 게 없는지라, 사고뭉치 천생연분이 이렇게 맺어졌다.
그러나 두 사람 중 그나마 더 분별 있는 철수는 아직 전란이 끝나지 않았으니 조금 자제하자 하였다.
“녀석. 나름 기특한 구석은 있구만.”
“그러나 그게 다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는 것 아니겠느냐. 전란 끝났다는 소식 듣자마자 냉큼 이씨에게 달려가서는, 중인환시 하에서 입술을 서로 포갰으니.”
후일 철수가 변명하기로는 솟을대문 문턱에 발이 걸려 넘어진 탓이었다 하였으나, 애시당초 종친댁 규수가 저의 정인(情人)을 대문까지 나와 맞이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더구나 활짝 열린 대문 앞을 지나던 사람들이 공히 그 입술박치기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일대 파란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돌겠네.”
“하필 또 지나가던 화공(畫工)이 하나 있어서, 그 모습을 그림으로 멋들어지게 그렸다더라. 듣자하니 철수 그 녀석이 화공을 붙잡아서는, 목숨을 아깝게 여긴다면 그림값을 비싸게 받고, 그 돈은 모조리 가난한 사람 돕는 데 쓰라고 했다던데, 그게 의협심의 발로인지, 아니면 논란을 어떻게든 잠재울 궁리로 낸 궁여지책인지는 모를 일이다.”
꺽정이도, 이지함도 알지 못했지만, 기실 철수와 명순이 이어지게 된 뒤에는 그 일가 형제자매 중 가장 머리 약삭빠른 하성군이 있었다.
마땅한 혼처 구하지 못해, 노처녀 소리 들은 뒤에야 겨우 어디 변변찮은 집안에나 시집갈 줄 알았던 손윗누이가, 생각지도 못한 큰 기회를 가져온 것이다.
‘양주 임문(林門)’ - 꺽정이도, 가도치도 딱히 바라지는 않은 이름이었으나 어느세 세간에서는 이리 부르기 시작했다 – 이 어떤 집안인가. 전란이 끝나면 온 천하에서 가장 유력하게 될 문중이다. 조선의 임금과는 벗처럼 지내고, 일본과 여진 사이에서는 큰어른으로 대접받고, 이제는 명나라 황태자와도 연이 생겼다.
민주당의 당권이 임거정 한 사람 손에 달렸고 – 모르는 사람 보기에는 그러했다 – 그 당은 천하의 수많은 나라를 움직이고 또 수많은 나라를 능히 무너뜨릴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하성군 자신은, 마침내 그 집안과 귀한 연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임 당수도 이미 나이가 가볍지만은 않다. 그러니 자신처럼 재주 있는 사람이 잘 처신한다면, 나중에 그 당권을 조금이라도, 어쩌면 전부 휘두를 수도 있지 않을까?
허나 이토록 온 한양이 저의 누이를 두고 입방아 찧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서 김칫국만 마시고 있던 하성군은, 만에 하나 이번 일로 뭔가 제게 화가 들이닥치지는 않을까, 얼마 전 한양 어느 기루(妓樓)에서 만나 가히 지음(知音)처럼 지내게 된 (자칭) 용장(勇將) 원균을 찾아가 술잔 기울이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녀석이 종친 집안 규수를 희롱했다고 소문이 나건 말건 사실 녀석이 잘 해볼 일 아니겠소? 백정 집안 가풍이라는 게 점잖으면 이상한 일이지.”
백정이 점잖아서 반가 여인을 희롱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눈길 잘못 두었다가는 양반댁 노복들에게 끌려가 멍석말이를 당하기 때문에 눈도 안 마주치려 할 뿐이지.
그러므로 꺽정이 또한 아들녀석이 종친 여인과 만나 온 한양의 구설수에 올랐다는 것을 두고는 딱히 뭐라 더 하지 않았다. 불편한 화제를 꺼내는 것을 미루고 미루기 위해 잡다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이지함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허나 눈치 없는 꺽정이는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자, 그건 그거고, 이제 사형이 여기까지 먼 걸음 하신 까닭에 대해 논해 보십시다. 오씨 어르신도 조금 있으면 오실 테니, 여기 서 있을 게 아니라 우리도 입성(入城)해서 마저 얘기하는 게 어떻겠소?”
“먼 걸음한 까닭이라... 그래, 그래야지.”
명과 동방 삼국 사이의 싸움으로만 따지면 삼 년을 이어진 전쟁. 죽어간 사람의 수로 보나, 휘말리고 끌려들어간 백성의 수로 보나 딱히 지금껏 동방에서 벌어졌던 전란에 비해 대단하다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허나 전비로 흩뿌린 재정의 양은 그 옛날 수양제와 당태종, 연개소문조차 경악할 만한 것이었고, 무엇보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전장에서 스러지는 목숨 하나하나, 흩뿌린 은 한 냥 한 냥이 모두 옛날과 비할 수 없을 만큼 귀하였다.
그리고 그런 전쟁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값을 치르면서 조선과 다른 두 나라는 마침내 승리하였다. 개명된 법도를 앞세우며, 마침내 중원의 조정으로 하여금 그 뜻을 굽히도록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끝내 – 애초에 그럴 심산도 아니었지만 – 제힘으로 산해관을 넘지 못하였다.
“후... 사실 지금 한양을 가장 뜨겁게 달구고 있는 것은 철수 이야기가 아니다. 본론을 논하기에 앞서 가볍게 이야기 나눌 때나 회자되는 정도지.”
“그럼 뭐요? 전란이야 이제 끝난 것과 다름없고, 북경 들어가서 황제에게 그간 마음고생 많았다며 아들 녀석 돌려주고, 저기 마닐라에 있는 에스파냐 놈들한테는 순순히 떠나라고 전하고, 이탁오 그 사람은 얼른 서쪽으로 가서 다들 항복하라고 전하면서 겸사겸사 ‘리즈’랑 상봉도 하라고 하고. 그렇게 하면 끝 아니오?”
“그랬으면 오죽 좋겠느냐. 허나 천하의 일이 『삼국지연의』와 달라, ‘끝’ 한 마디로 정말 끝나는 게 아니니 말이다.”
민주당 모주이자 조선의 백의재상이라 일컬음 받는 이지함이 오늘 제남에 온 것은, 도원수 임거정과 교우 깊은 한 선비로서, 즉 사인(私人)으로서였다. 적어도 훗날의 『실록』에는 그리 적힐 것이다.
그러나 『승정원일기』에는 진실이 담길 터였다. 이지함은 북경 조정과 교섭에 임하기에 앞서, 먼저 남경 조정과 합의를 이루기 위해, 즉 향후 대명과 동방 삼국의 앞날은 어찌되어야 할 것이며, 북경 조정을 상대로 어찌 교섭해야 할지를 논하기 위해 찾아왔음이.
조선에서 발원하고 이웃한 두 나라가 받아들인 개명된 법도를 대명까지 받아들이게 된다면 어찌 될 것인가?
이십 년간 이이와 이황, 조식, 이지함 사이를 오가고, 정론보 통해 더욱 정교해진 의권의 이론에 따르면, 개명된 법도 따라 국인(國人)들 사이에 세워진 나라 사이에는 위아래가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조선은 ‘올바른 길로 돌아온’ 명을 상국으로 계속 섬겨야 하는가?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장차 명을 어찌 대해야 하는가?
누군가는 칭제건원을 말하고, 누군가는 그간의 일을 잊지는 않되 논하지는 말자 하며, 누군가는 중원을 여럿으로 쪼개 조선에 입조(入朝)케 하자는 말까지 술자리에서 좌우 살피고는 조심스레 꺼냈다.
그뿐인가? 그간 명의 무도함으로 말미암아 흘려야 했던 피와 흩뿌려야 했던 재정을 어찌 돌려받을 것인지도 논해야 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서림이 온 조선에서 가장 할 말 많은 사내였다.)
“한무제가 준왕(準王)을 쳤을 때 이래로 우리 조선 땅의 사람들과 중원의 사람들이 숱하게 싸워왔건만, 지금과 같은 때는 없었다. 하다못해 그 옛날 고구려조차 수·당을 물리친 뒤에도 스스로 낮추어 화해 청하는 구색은 갖추었지.
허나 지금은 다르지 않으냐. 마침내 우리 동방 삼국이, 유사 이래 처음으로 – 물론 여진이야 예외겠지만 – 중원의 질서를 뜻대로 강요할 수 있게 되었다. 도의를 잠시 잊고 불인(不仁) 행할 각오를 품는다면.”
“남경 조정이, 우리가 도와주고 또 이번에 아주 크게 도움 받은 국민당이 있지 않소? 그들 손목을 비틀겠다고?”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자는 아직은 없다. 허나... 아예 틀린 말도 아니지 않으냐? 국인이 바란다면 우리는, 적어도 우리 조정은 따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껏 세워 온 법도니까.”
하나 된 중원의 힘은 실로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장거정이 자신의 조급함과 오랑캐 업신여기는 거만함으로 인해 자멸의 길을 걸었다 여길 후인(後人)들은, 그에게서 승리를 훔쳐내기 위해 천하의 대도(大盜) 임꺽정과 그 벗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여야 했는지, 그리고 그러고도 얼마나 위태로울 때가 많았는지를 오롯이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지함 마음 한 구석 또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이 앞으로도 삼국 중의 으뜸으로서 남기 위해서는, 그리고 우리 당이 당초 뜻했던 대로 말라카 이동(以東) 모든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이 광활한 중원이라는 문제에 답을 내어야만 한다.
그들이 우리 배를 빌리고 우리 상관(商館)에 들리는 대신, 스스로 배 만들고 먼바다로 나아가 장사하고 또 개척하겠노라 주장한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겠느냐? 그들의 덩치, 그 막대한 재화가, 혼군(昏君)이나 폐행(嬖幸, 아첨꾼)으로 말미암아 헛되이 쓰이지 않고 오직 자강(自彊)에만 쓰이게 된다면, 그때 조선이 막을 수 있겠느냐?
물론 네 말대로, 우리가 우리 힘으로 따낸 승리가 아니요, 중화 백성들과 함께 얻어낸 승리인만큼, 도리를 따진다면 무엇도 요구하지 않음이 온당할 것이다. 그러나...”
“장구지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말씀이시구려.”
“차라리 처음부터 이런 고민을 할 수 없을 지경이라면 모를까,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 손에 주어져 버렸으니 고심 또한 깊어지는구나.”
“지금의 국론은 어떻소? 사형이 이곳으로 막 발걸음 옮길 때, 마지막으로 받들고 온 지침이 있을 것 아니오.”
“주상 전하와 동고 대감, 그리고 나머지 당의 영수들은 모두 신중하게 이 일에 임하고자 하고 있다. 얻어낼 것은 얻어내되,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이름에 스스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중도(中道)를 지켜야 하니, 우선은 국민당과 남경 조정이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을지 살피고자 할 뿐이다...”
그때, 꺽정이 귓가에 뭔가 기척이 느껴졌다.
서계와 따로 만나 그들 나름대로 앞날을 논한 다음 제남 성내에서 만나기로 약조했던 해서와 오승은일 수도 있겠지만, 천생 문인인 그들이 이런 기척을 낼 수는 없을 터.
이지함에게 설명할 겨를도 없이, 아직껏 빈틈 없이 꺽정이 저를 도와 온 세상을 누볐던 믿음직한 일본도가 칼집을 나섰다.
“꺽정아, 무슨 일... 이런!”
꺽정이보다 못할 뿐이지 나름대로 무(武)에 재주 있는 이지함 또한 한 발 늦게 인기척을 알아챘다.
만에 하나 적의 잔당이나 도적이 있을 경우에 대비해, 흑의군을 시위(侍衛)로 삼고 있던 꺽정이와 이지함이었다.
그들을 뚫고 바로 지척까지 다가왔다는 것은, 둘 중 하나를 뜻했다.
꺽정이에 비할 만큼 일신의 무예가 대단하거나, 아니면 쉽사리 몸을 숨기고 또 재빨리 남의 눈 피해 그림자 사이를 옮겨다 다닐 수 있도록 홀몸으로 이곳까지 왔거나.
꺽정이가 곧, 그들 서 있는 들판 한 구석의 폐가 쪽으로 몸을 날렸다.
“칼을 뽑았으면 베어야지, 냅다 발길질부터 하고 보는 건 무슨 심사요? 사카이에서 당했던 것보다도 더 발길질이 맵구려.”
곧 목덜미째 붙들려 나오는 자 있으니, 바로 평범한 중원 사람 복식을 하고 삿갓으로 왜상투 튼 머리를 감춘 오다 노부나가였다.
“오냐, 정 원한다면야 여기서 베어주마.”
“되었소. ‘인생 반백년’ 노래를 줄곧 부르는 나지만, 졸지에 직례 막부의 쇼군까지 되었는데 이대로 지옥구경하러 가긴 싫거든.”
차야 시로타로로 행세하던 시절 익힌 조선말은, 약간 녹이 슬고 억양은 그대로였으나 그래도 제법 유창하였다.
“오다 노부나가... 상서 대인. 여기서 이리 뵐 줄은 미처 몰랐소.”
이지함이 떨떠름하게, 하는 둥 마는 둥 인사치레를 했다. 상국으로 모시지 않는다 치더라도 일국의 상서쯤 되면 예를 아니 갖출 수는 없었다. 물론 임금에게도 제멋대로인 꺽정이에게는, 복장 한 번 걷어차고 칼등으로 손목 몇 번 내리친 것으로 그치는 정도로도 노부나가에게 예를 다해준 셈이었지만.
“이 혼란한 시국에도 동창은 여기저기에 아직 뿌리가 남아 있소. 그물이 몇 군데 찢어져도 고기를 간혹 잡을 수는 있는 것처럼, 이곳 제남에 조선의 귀인들이 찾아올 공산 크다는 정도는 북경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었소이다.”
“암만 그래도 이런 시국에, 네놈 황제를 버려두고 여기 직접 나타나는 건 좀 과하지 않으냐?”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막후에서 실세 노릇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천하에서 우리 일본 무사만큼 능수능란한 자가 없을 게요. 그리고 나는 이래 봬도 일본의 천하인을 노렸던 사람이고. 그러니 우리 주씨 천자 곁에 누가 있느냐보다는 나 노부나가가 어디 있느냐가 더 중하지 않겠소?
그리고 나는 여기, 당수 눈앞에 있고.”
“우리가 장차 북경에 당도하여 이번 전란을 어찌 마칠지를 논의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에게 제의하고자 이리 찾아왔겠구려. 지금으로서는 본인이 직접 나타나는 쪽이 우리의 의심을 흩어버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일 테니.”
“역시 훌륭하시오. 더구나 내 이래 봬도 우리 임 당수를 제법 흠모했던 사람이라오. 사카이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자칭 제자로서 스승의 행적 본받겠다는데 뭐 흠 될 게 있겠소?”
노부나가가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은 꾸며낸 것도 아니요, 장거정의 최후를 보며 흘렸던 실소와도 닮지 않았다.
사방에서 무너져내리는 대명을 목도하며,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하든 장거정 그자의 노림수에 맞춰 놀아날 뿐임을 상기하며, 지금껏 자신이 밟아왔던 길을 반추하며, 그리 길지 않은 며칠 동안 북경에서 홀로 고민한 끝에 마침내 떠올린 발상.
알량하다면 알량하고, 궁색하다면 궁색하겠지만, 적어도 노부나가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이 궁여지책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순진한 자신과 기쁨으로써 당당히 말을 이었다.
“꽤 긴 얘기가 될 테니, 어디 폐가 구석에라도 가서 앉아서 얘기 나누십시다. 내 장담컨대 제법 솔깃한 이야기일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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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맞춤의 역사는 쉽게 고증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조선 후기에는 연인 간의 애정표현 중 일부로서 입맞춤이 어느 정도는 퍼졌던 듯합니다. 신윤복의 작품 『월야밀회(月夜密會)』나 『춘향전』에 나오는, ‘네 입(口)과 내 입(口)을 대니 두 입 맞춰 법칙 려(呂)가 된다’라는 구절 등에서 제한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지요.
원 역사의 광양부인(廣陽夫人) 이명순은 덕흥군과 그 정실 정씨 사이의 장녀로, 선조에게는 손윗누이가 됩니다. 그가 언제 안황(安滉)과 혼사를 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안황이 1549년생임을 고려하면 정혼은 대략 1560년대 초반, 실제 혼례를 올린 것은 1560년대 중후반~1570년대 초반쯤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작중에서는 그러기도 전 덕흥군이 아주 거하게 사고를 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어버렸지만요. 당시 여성 대부분이 그렇듯 이명순 역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 종친이 아니었더라면 그 이름 또한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을 공산이 큽니다 – 덕흥군 가계에 면면히 흐르는 망나니 기질을 고려했을 때 범상한 성정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할 수 있겠습니다.